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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권호만barnabak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삶
사도행전19:1-7
‘금쪽같은 내 새끼’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전문가를 중심으로 금 쪽같이 귀한 자녀들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그 문제점을 해결해주는 참으로 유익한 프로그램입니다.
며칠 전 제가 보았던 방송은 게임에 빠져있는 초등학교 쌍둥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쌍둥이가 얼마나 게임에 빠져있는지, 하루 종일 거의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게임만 합니다.
게임에 빠져 공부하라고 하는 엄마의 말을 전혀 듣지 않습니다.
엄마가 야단치면 절대 고분고분하지 않고 말대꾸를 하고 성질을 내면서 욕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 엄마를 때리기도 합니다.
게임을 하다가 상대방에게 지면 화가 나서 다른 사람에게 그 분풀이를 합니다.
그 아이들은 오직 게임에만 몰두되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아이들의 상태가 게임에 이끌려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생각해봅니다.
게임에 이끌려 살아가는 모습으로 계속 살아간다면 이 아이들이 장래 어떤 사람이 될까? 어떤 일을 저지를까?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다행히 그 아이들은 자기들이 게임에 빠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 받게 되어서 다행이었습니다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이나 사람들이 얼마나 더 많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누구나 다 무엇인가에 이끌려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지방에서 복음을 전할 때의 상황을 보면, 어떤 여종은 귀신에 이끌려 점을 치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행16장)
그 여종을 고용하여 많은 돈벌이를 했던 주인들은 돈에 이끌려 살고 있었습니다.
그 지방의 행정관들은 권력에 이끌려 자기 마음대로 폭력을 휘두르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비해 바울과 실라는 복음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무엇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것에 이끌려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분명히 180도 달라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악한 마귀에 이끌려 살아가면 마귀와 함께 지옥에 가게 됩니다.
세상 쾌락과 욕망에 이끌러 살아가면 언젠가는 비천한 존재가 됩니다.
물질에 이끌려 살아가면 일만 악을 저지르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에 이끌려 살아가면 성령의 능력과 은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한 마디로 성령에 이끌려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성령에 이끌려 살아갈 때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승리할 수 있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드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이름을 갖고 있으면서도 성령에 이끌려 살지 못하면 우리는 이름만의 신앙인, 껍데기만의 신앙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에베소에서의 3차 전도여행을 시작하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왔을 때 그는 일단의 어떤 제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한 12명쯤 되었는데, 바울이 볼 때 그들은 참으로 애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믿는 자들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안 믿는 자들같이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묻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러자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대답을 합니다.
바울이 다시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묻자 ‘우리는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대답을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이들이 세례요한을 따르는 제자들이라는 것을 파악한 사도 바울은 이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복음을 전하여 구원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사도 바울이 그들이 믿는 자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물은 것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하는 말입니다.
믿을 때에 기쁨이 있더냐? 믿을 때에 회개가 나왔느냐? 믿을 때에 행복하더냐? 믿을 때에 찬송이 나왔느냐? 이러한 여러 가지를 물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믿음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아니라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물은 것은 믿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증거는 성령을 받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님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성령님을 받은 것입니다.
온전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도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힘이 되어야 하고 능력이 되어야 하고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에베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믿는 성도들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요한의 제자는 되었지만 구원받은 예수님의 자녀가 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고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그랬을 때 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셨고 방언과 예언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온전히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주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을 받아 온전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를 믿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아닌 것 같은 그런 신앙생활은 아닙니까?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렇게 요한의 세례에 머무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대로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올바르게 살아가기 위해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한의 세례에 머무는 사람은 나쁜 짓 하지 않고, 깨끗하게 살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책임감 있게 사는 것을 믿음으로 여깁니다.
이런 생활을 한 마디로 성실한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성실한 생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와 사명의 삶에 있습니다.
성실한 생활이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교제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이 어린 시절 골리앗을 물리칠 때 골리앗 앞에는 훈련받은 많은 병사들이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평소에 열심히 군사훈련을 받았던 성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골리앗 앞에서 그들의 성실함은 무능함으로 전락했습니다.
다들 주눅 들어서 도망가거나 숨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군사훈련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는 들판에서 양을 치면서 자유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영적교제가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골리앗 앞에 믿음으로 나설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17:45-47)
다윗이 신앙으로 영적으로 무장되어 있었기에 그는 골리앗 앞에 담대하게 나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 온전한 신앙은 성실함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성실함이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필요 없다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내 노력과 내 의지에 의해 살아가는 성실함을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성령님의 힘으로 살아가고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령님께 이끌리어 살 수 있겠습니까?
먼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여 성령님을 모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요한의 세례만 아는 자들에게 요한이 한 말을 인용하여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세례요한도 사실은 자신을 믿으라 한 것이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영접한 그들이 세례를 받았을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습니다.
또한 성령이 임한 증거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성령이 임하면 꼭 방언을 해야 한다거나 예언을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방언과 예언은 성령이 임했다는 증거로서 성령의 많은 은사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그 외에도 많은 성령의 은사가 있습니다.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믿었다면 분명히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믿는 자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로 성경은 3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고 했습니다.
성령님을 통해서만이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알고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한다면 그것은 여러분 스스로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들 속에 계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기도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이미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자입니다.
성령님을 모시지 않는 자들은 절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못합니다.
둘째는, 성령의 은사입니다.
오늘 본문에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고백했을 때 성령을 받고 성령의 은사인 방언과 예언을 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것이 성령의 은사의 전부는 아니고 그 중에 두 가지입니다.
그 외에도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위로, 구제, 다스림, 예언, 긍휼을 베푸는 것,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영들 분별함, 방언, 방언 통역 등의 은사가 있습니다.
여러분 속에 이런 은사가 있을 때 나에게 성령이 임하셨다는 확신을 가져도 좋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자신의 뜻대로 여러분 각자에게 주시는 성령님의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9가지 열매, 사랑과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갈5장)
이것은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들이 성령의 역사 속에서 맺게 되는 열매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에 육체의 열매를 맺지 아니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열매가 나타나고 있다면 그것은 성령을 모시고 살아가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에게 이끌려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한 성도들 가운데 성령님이 임재하시고 내주하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성령님에게 이끌려 살기 위해서는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늘 끊임없는 교제를 하여야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성령님은 믿는 성도들안에 거하십니다. 내주하십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우리들과 더 깊은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사촌이라도 멀리 떨어져서 제대로 왕래하지 못하고 가까이 하지 못하면 사촌의 관계가 없어져버리고 맙니다.
혈육관계가 하나도 없어도 가까이 살면서 서로 도와주고 사랑하고 왕래하고 교제하면 사촌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우리 속에 거하셔도 우리가 성령님과 교제하지 못하고 잊어버리고 산다면 먼 사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성령님과 늘 교제하고 대화하고 가까이 할 때 이웃사촌이 되어서 우리를 도우시고 역사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잘 하지 못합니다.
여기에는 성령님에 대한 오해가 한 몫을 하기도 하는데요,
‘성령이 내게 임재해서 나를 지배하면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는 건 아닐까?’
‘내가 성령 충만 하게 되면 가정과 직장을 버리고 바울과 같이 먼 나라에 선교사로 나가야 되는 것은 아닌가?’
또는 ‘내가 성령 충만 하게 되면 열광적으로 변해 마치 미친 사람처럼 되는 건 아닌가?’ 하고 염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과 의심 때문에 성령 충만을 바라지도 않고 간구하지도 않고 주춤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것들은 성령 충만을 오해한 것입니다. 성령은 꼭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을 모시고 살 때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하게 하고요, 우리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가치 있게 올바르게 능력 있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에 이끌려 사는 것은 험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축복된 삶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과 늘 교제하며 대화하며 기도하며 살아가심으로 성령에 이끌려 살아가는 새해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과 유행을 따르지 마시고 성령님을 따라 성령님의 이끌림을 받아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022.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