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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산 아래서 산 위를 바라보는 것과 산 위에서 산 아래를 바라보는 것이 다르듯이 산 밖에서 보는 산과 산속에서 보는 산 또한 그 맛이 다르다. 나무와 풀, 물과 바위와 바람 속에서 인간을 담아내고 있는 산! 그 산의 맛은 어떤 맛이며 또한 산속에 있는 산사의 맛은 어떤 맛일까? 이 땅에 불교가 전파된 지 어언 1700년!
부서진 우주의 바윗덩어리들이 모여 새 생명을 탄생시킨 지구! 그 지구에는 적어도 생명을 소중히 하고 생명을 사랑할 줄 아는 그 마음이 첫째 덕목이어야 하지 않을까. 살아 있는 생명을 아끼고 죽은 생명까지도 품어주는 그곳에 우리의 정서적 근간이기도 한 불교 문화가 있다. 그 귀중한 불교 문화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부처를 모신 공간을 금당이라 부른다. 부처의 몸에서 빛이 난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금당 앞에는 보통 탑과 석등이 있다. 금당에는 모신 부처에 따라 이름도 의미도 다르다. 가장 많은 금당은 대웅전이다. 가장 먼저 깨달음을 구한 석가모니 부처를 ‘대영웅’이라고 칭한 때문이다. 아미타불을 모신 곳은 무량수전, 비로자나불을 모신 곳은 대적광전, 모두 다 금당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교회나 성당 안에다 무당집을 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인도에서 생긴 불교가 우리나라에 정착할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포용력이었다. 그것을 보여주는 공간이 절에서 만날 수 있는 삼성각과 칠성각이다. 민중의 토속신인 산신과 칠성을 모신 곳이다. 어느 절에는 일주문 안에 성황당이 있기도 하고, 사찰의 부엌인 공양간에도 부엌을 다스리는 조왕신을 모시기도 한다. 더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싶다.
절이란 부처만을 모시는 공간이 아니다. 인간이 신과 함께 살고 있다. 깨달음을 지향하며 수행하는 스님은 물론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평범한 세속의 인간들이 머물기도 하고, 그냥 스쳐 지나가기도 하는 곳이 절이다. 근심을 더는 곳을 ‘해우소’라고 하는데 마음까지 비우게 되는 화장실을 이보다 정감있게 정갈하게 부른 이름은 없을 듯싶다.
부처와 보살의 외형은 무엇이 다른가.
부처는 육계와 백호, 나발, 삼도가 있으며 보통 남성적인 근엄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육계는 정수리에 볼록하니 상투처럼 보이는 것으로 이는 깨달음과 수행의 상징이다. 백호는 부처의 이마 한가운데의 점을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점이 아니라 하얀 털 모양이다. 경전에 백호는 희고 긴 털을 돌돌말아 놓은 것을 표현한 것이라 했다. 그 털이 빛이 나서 그 빛이 헤아릴 수 없는 곳까지 비친다고 하여 보통 보석으로 장식한다. 나발은 부처의 머리카락이 오른쪽으로 말려 올라간 것이 소라 모양처럼 보이는 것이고, 삼도는 부처의 목에 있는 3개의 주름을 말한다.
부처와 달리 보살은 부처보다 화려하고 여성적인 모습을 띤다. 육계나 나발 대신에 보관을 쓰고 있고 옷도 천의라 하여 하늘하늘 입고 귀에는 귀걸이, 손에는 팔찌 등 장식을 하고 있다.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한 표현인 것이다.
불교는 고타마 싯타르타가 제창한 깨달음의 종교다. 석가모니 자신은 고행 속에서 깨달음을 얻었지만, 실존 인물인 그가 추구한 깨달음의 방법은 고행이나 쾌락이 아닌 올바른 방법으로 중도를 지키는 것이었다. 중도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 팔정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인데,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신념, 바른 명상을 팔정도라고 한다.
석가모니는 인간의 존재 자체를 괴로움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괴로움의 근원은 집착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괴로움을 없애고 해탈하기 위해서는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야 하고, 석가모니 스스로 그 방법을 깨닫고 모든 이에게 가르치려고 했다.
부처는 어리석음을 싫어한다. 다른 사람을 탓하기보다는 오직 지혜를 밝히고 스스로 깨달음을 구하고자 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불교를 찾고 절에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신라와 고려와 달리 조선은 유교국가를 건설한다면서 불교를 탄압했다. 유교는 종교라기보다 정치이념에 가깝다. 조선 시대에도 왕실과 민중들은 여전히 불교를 종교적 기능으로 삼았다.
싯타르타는 80세 때에 제자 ‘춘다’가 정성스레 준비한 돼지버섯 공양을 받았다. 그러나 심한 식중독으로 쿠시나가라의 숲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들었다. 그러면서 싯타르타는 마지막으로 ‘장등명법등명’으로 알려진 유명한 설법을 했는데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에 의지하라’고 말했다.
책에는 작가 박재호 선생이 발길 닫는 대로 찾았다고 하는 절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영주 태백산 부석사, 구례 지리산 화엄사, 하동 쌍계사, 조계산 송광사와 선암사, 김제 모악산 금산사, 예산 수덕사, 서울 조계사, 오대산 월정사, 상원사, 합천 가야산 해인사, 영축산 통도사, 서울 봉은사, 수원 용주사, 팔공산 동화사, 속리산 법주사, 두륜산 대흥사, 청도 운문사, 강화 전등사, 여수 흥국사, 김천 황악산 직지사 등이 그것이다. 처음 소개한 부석사는 내게도 감명을 준 곳으로 그것은 최고의 목조건물 무량수전도, 학의 날개짓을 연상케 하는 안양루도, 부석이란 바위도, 선묘낭자 전설도 아닌 ‘선비화’또는‘어사화’라고 하는 꽃이다.
장원급제한 동량에게 내려준 그 꽃은 조사당 처마 밑에 있다. 전설은 창건주 의상대사가 지팡이를 꽂아 자라난 것이라고 하지만 지팡이가 자라난 꽃나무는 아닌 것 같고, 신선하면서 살콤달콤한 꽃술의 맛은 아직 맛보지 못했지만 보는 것 못지않게 맛도 있을 것이다 싶다. 전설에 따르지 않더라고 수백 년을 자라난 꽃나무가 이것 밖에 안 컸나 싶었는데 비를 맞지 않아서 그런가 하고 생각되는 그 꽃, 오직 밤이슬만 먹고 자란, ‘골담초’라는 학명을 가진 그 꽃을 다시 보고 싶어진다. 아마도 5월초 어버이날 쯤에 갔을 때 보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 시절에 이 꽃을 보고 지었다는 시다.
선비화禪扉花 / 이황李滉(1501 ~ 1570)
탁옥삼삼의사문擢玉森森依寺門
승언탁석화령근僧言卓錫化靈根
장두자유조계수杖頭自有曺溪水
불차건곤우로은不借乾坤雨露恩
옥같이 빼어난 무성한 줄기 절 문에 기대 사는데
스님이 말하길, 지팡이가 신비하게 뿌리 내렸다 하네
지팡이 끝머리에 절로 조계수가 생기니
천지의 비와 이슬 은혜 빌리지 않았네
다음은 구례 화엄사로 지리산만큼 웅장하고 귀한 절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전각인 각황전이 있고 각황전 앞에는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역시 가장 큰 석등이 있다. 각황전이 있는 자리는 원래 3층 건물이던 장륙전이 있던 곳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파괴되어 조선 숙종 때 중건한 뒤 각황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절에서 잔일을 맡아 보던 노파가 숙종의 딸로 환생하여 각황전 중건 불사를 도왔다는 전설, 숙종이 각황전 이름을 지었다고 하고‘깨달은 왕’과‘임금을 일깨워서 중건했다’는 뜻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한다. 석등도 보고 싶어진다.
몇 번 여행객 혹은 산행객으로 찾았던 선암사는 승선교가 바로 일주문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계곡을 따라 걷노라면 속계을 벗어나 선계로 드는 기분이 들고, 여기쯤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에 승선교 안쪽의 강선대에서는 방금 전까지 분명 신선들이 바둑을 두면서 앉아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되는 곳이 선암사다.
근심을 덜어낸다고 하여 해우소라고 하는 화장실을 여기서는 ‘뒷간’이라고 했는데 관광객이 여기를 사용하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싶지만, ‘육체의 찌꺼기를 쏟아낼 때의 무게로 근심까지 잴 수 있는 아름다운 해우소’라고 작가가 말한 것을 보면 실제로 똥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 내것이라고 생각되는 그 무엇도 없고 또 모두를 버리고 내려놓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기도 하다.
3년전 비 오는 날 초딩들과 예당호를 거쳐 수학여행 가듯이 들르기도 했던 수덕사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절이다.‘수덕사의 여승’노래와 경허스님과 만공스님, 일엽스님의 이야기들로 근기가 살아 숨쉬는 절이 아닐 수 없다. 구한말 선종의 기풍을 크게 일으켰던 경허스님에게 안주와 술을 올리면서 왜 이런 것을 좋아하냐고 묻자, 스님이 대답 대신에 시를 지어 보였다고 하는데 그 시는 이렇다.
이치는 단박에 깨쳤으나 망상은 여전히 일어나는구나
단박에 깨달아 내 본성이 부처님과 똑같은 줄은 알았으나
오랜 세월을 살면서 익힌 습기는 오히려 생생하구나
바람은 고요해졌으나 파도는 여전히 솟구치듯
이치는 훤히 들어 났어도 망상이 여전히 일어나는구나
수행하는 스님도 언제나 번뇌가 일렁이는 인간임을 분명히 한 것 같다. 다만 그것을 다스리려 할 뿐인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5대 적멸보궁이 있다는 것은 불자 아니라도 아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 영축산 통도사가 그것이다. 대부분은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에 위치 하지만, 봉정암 사리탑은 아주 높은 곳에, 상원사 적멸보궁은 쉽게 만날 수 없는 곳에 있다. 특히 상원사는 사자암을 지나서 1시간쯤 올라야 적멸보궁이 있는데 힘들여 여기까지 왔다면, 영월 사자산 법흥사처럼 사리탑이라도 만나고 가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절멸보궁 뒤 어딘가에 모셨다고만 전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비석 모양에 탑을 새긴 마애불탑이 있어 그것을 어루만져 보면서 따뜻한 무엇이 느껴지면 좋고, 그냥 마음 가는 대로 내려와도 괜히 힘들게 올라왔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이쯤에서 책에 소개한 절의 창건주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처름으로 돌아가 보기로 한다. 태백산 부석사는 의상대사가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뒤에, 지리산 화엄사는 신라 경덕왕 때 경주 황룡사에서 수행하던 연기조사가, 지리산 쌍계사는 722년 성덕왕 때 의상대사의 제자 삼법스님과 대비스님이 창건했는데, 쌍계사에는 최치원의 4산비 중 하나인 ‘진감선사탑비’와 추사 김정희의 글씨(육조정상탑과 세계일화조종육엽 현판)가 있어 가치를 더 한다.
순천 조계산 송광사는 신라 말에 길상사라는 이름으로 혜린선사가 창건했고, 고려 때 지눌선사를 비롯한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이다. 같은 조계산에 위치한 선암사는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설과 통일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며 대웅전 앞 양쪽에 있는 삼층석탑 형식 등으로 보아 도선국사 설이 지배적이다. 김제 모악선 금산사는 599년 백제 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졌다고 하며, 766년 신라 혜공왕 때 진표율사가 크게 중창하여 미륵전과 미륵장륙상을 조성했다고 한다. 여기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본산으로 꼽히는데 미륵은 석가모니가 입적한 뒤 56억 7천만 년 뒤에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온다는 미래부처다. 기독교의 메시아와 같은 의미다.
예산 수덕사는 ‘수덕사의 여승’노래로 인해 여승들이 수도하는 절로 알기 쉬우나 수덕사 암자 도성암이라는 여승의 수도처가 따로 있다. 이는 오래전에 수덕사를 답사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수덕사는 백제말 창건되었다고 하나 정확하지 않고, 660년(무왕1년) 대웅전을 지었다 하며 이때 고구려 담징이 벽화를 그렸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서울 조계사는 서울 한가운데 위치 해 있으며 근대 한국불교의 총본산으로 1910년 각황사라는 이름으로 민족독립을 염원해 지었다. 대웅전은 1936년 민족종교 증산도 보천교 법당으로 쓰이던 십일전(十一殿)을 정읍에서 옮겨온 것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장중하기 그지 없다. 또 대웅전 안에는 월출산 도갑사에서 옮겨온 석가모니 목불좌상이 있으며, 수령 500년쯤 된 회화나무가 대웅전 앞에 있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송도 있어 시민의 휴식처 이전에 마음 도량으로 손색이 없다.
평창 오대산 월정사는 643년 선덕여왕 때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율사가 창건했다. 월정사로 가는 길목의 전나무 숲과 적광전 앞 9층 석탑은 월정사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북한의 묘향산에 있는 보현사 13층 석탑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보다 더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흔히 상원사를 찾는다면 이 절은 월정사의 말사쯤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는 않다. 월정사에서 한참을 들어가야 상원사가 있는데 상원사는 신라말 보천태자와 효명왕자가 창건했다고 한다. 속세를 떠난 왕자들에게 왕위 계승을 위해 4명의 장군을 보내 데려오게 했고 보천태자는 끝까지 사양하여 결국 효명왕자만 경주로 돌아왔다. 그가 성덕왕이 되었고, 그후 성덕왕이 상원사 자리에 ‘진여원’을 지었고, 나중에 상원사가 되었다.
해인사는 생각보다 창건 시기가 늦은 802년 신라 애장왕 때 순응스님과 이정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 81,258개의 경판에 8만4천 번뇌에 해당하는 법문이 새겨진 8만대장경은 ‘많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고려 1011년 초조대장경이 만들어져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몽골의 침략으로 모두 불타버리자 부처의 힘을 빌어 몽골을 격퇴하고자 팔만대장경을 제작했다. 이를 재조대장경이라 하는데, 1,800명의 각수들이 실로 엄청난 양의 판각을 새겼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장경은 처음에 강화도 신원사에 보관하였으나 1938년(태조 7년) 분명하지 않은 이유로 지금의 해인사로 옮겨졌다.
불법승 삼보사찰 중 불보사찰에 해당하는 영축산 통도사는 646년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를 처음 봉안하기 위해 창건했다. 통도사 일주문 편액과 사리탑 앞 사각전각은 동쪽은 대웅전, 서쪽은 대적광전, 남쪽은 금강계단, 북쪽은 적멸보궁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편액은 모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글씨다.
서울 강남의 중심에 있는 봉은사는 794년 신라 원성왕 때 연회국사가 창건해 ‘견성사’라고 했다. 1498년 연산군이 선왕 성종의 왕릉을 근처에 조성하면서 크게 중창했고 이때 봉은사로 고쳤다. 중종의 왕비고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1550년 봉은사를 선종 중심사찰로 보우스님을 왕사로 승과를 실시하는 등 불교를 증흥시켰는데 재미있는 것은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도 이때 여기서 실시한 승과에 급제한 인재들이라는 것이다.
용주사는 산속에 있는 절이 아니다. 854년 신라 문성왕 때 ‘갈양사’라는 절이 있던 자리에 조선 정조가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에 대한 설법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고는 서울 휘경동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면서 사도세자의 원찰로 용주사를 짓게 했다. 낙성식 전날에 정조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고 하여 용주사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대웅전의 편액도 정조가 직접 썼다. 또한 대웅전에 걸린 탱화는 정조가 매우 사랑한 김홍도가 그린 것이다. 이 후불탱화의 뛰어난 화면구성과 원근의 표현, 투시 기법 등으로 매우 정감이 가는 그림이다.
그리고 용주사는 근현대시대 조지훈의 시 ‘승무’가 탄생한 곳이기도 한데 당시 18세의 조지훈이 용주사 천보루에서 열린 영산제를 보고 시적 영감을 얻어, 10개월간 구상하고 7개월간 집필에 힘써 1939년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의 정서를 담은 유명한 시가 탄생했다.
세상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은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뚜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
대구 팔공산 동화사는 493년에 창건된 유가사를 832년 신라 흥덕왕 때 심지대사가 중창한 것으로 전해진다. 심지대사는 신라 41대 헌덕왕의 아들이다. 한겨울에 오동나무에서 보라색 꽃이 상서롭게 피어나 오동나무 동자를 써 동화사(桐華寺)라고 했다.
속리산 법주사는 553년 신라 진흥왕 때 의신스님이 창건한 것으로 전하는데 스님이 나귀에 불경을 싣고 서역에서 돌아와 이곳에 머문 것에서 유래됐다. 해남 두륜산 대흥사는 차문화의 성지로 이름 높은 곳이다. 대흥사로 이름하기 전까지는 대둔사였다. 544년 신라 진흥왕 때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여승들의 수행처로 유명한 청도 운문사는 오늘날도 260여 명의 비구니들이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규율을 지키면서 수행하는 곳이다. 560년 진흥왕 21년 한 신승이 창건했다고 전해질 뿐 정확한 기록이 없다. 1277년 고려 충렬왕 때 일연스님이 5년 동안 이곳 운문사 주지로 머물렀고, 78세에 국사國師가 되었지만 물러나 군위 인각사에서 《삼국유사》를 완성했다.
한강과 예성강, 임진강 어귀에 위치한 강화도는 수난과 저항의 역사를 간직한 곳인데 강화도의 중심사찰은 전등사이다. 381년 소수림왕 때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하려 강화도를 통해 가는 길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진중사’였으나, 고려 충렬왕비 정화궁주가 옥등을 시주하면서 전등사로 바뀌었다. 전등사는 국조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하는 삼랑성(정족산성) 안에 위치한다. 일주문 대신 삼랑성문이 들어서면서 양헌수*장군의 승전비가 성안에 있다. 강화도의 산 역사가 아닐 수 없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신식무기로 무장한 프랑스 해병 160여명이 정족산성을 공격했을 때 구식무기로 대응해 결국 프랑스군이 철수하도록 했다. 이때 프랑스군은 외규장각 도서와 많은 보물을 약탈해 갔다.
전등사에 전하는 이야기 하나. 여러 차례 화재로 전등사는 17세기 말에 재건하게 되었고, 나라 안의 내로라하는 도편수가 맡았는데 그는 고향집을 멀리 떠나와 있다 보니 절 아래 주막집 주모와 눈이 맞았고 돈을 버는대로 주모에게 주면서 불사가 끝나면 살림을 차리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대웅전이 완성되기 직전 주모는 돈을 챙겨 야반도주해 버렸다. 배신감과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도편수는 도망친 여자를 생각하며 발가벗은 여인을 조각해 대웅전 네 귀퉁이에서 지붕을 떠받치도록 했다. 그 조각상을 나부상이라 하는데 정갈해야 할 절집에 그것도 계급사회인 조선시대에, 또한 주지스님과 불사를 시주한 공양주가 있는데도 금당 안에 그런 나부상을 조각해 걸 수 있었다는 것은 요즘도 어려운 융통성과 소통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그 나부가 바로 도편수 자신인지도 모른다. 어리석고 우매한 자신을 스스로 욕보이는 형태로 만든 건 아닐는지.
여수 흥국사는 그렇게 많이 알려진 절은 아니다. 1195년 고려 명종 때 지늘스님이 창건했는데 ‘절이 잘 돼야 나라가 잘되고, 나라가 잘되면 절이 잘 될 것’이라고 창건기에 적혀있다. 호국불교로서 결정적 역할은 임진왜란 때 했다. 이순신은 호남 사람들의 역할을 두고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고 했을 정도다. 이 말은 지금까지도 이곳 사람들의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300∼700명 의승수군의 활약상이 전하고 있고, 흥국사 수군은 1812년까지도 왜구격퇴 등 활약했다.
마지막 김천 황악산 직지사는 우리나라 한가운데 있는 절이다. 황악산 주위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가 나눠진다. ‘동국제일가람직지사’이다. 직지사는 418년 신라 눌지왕 때 아도화상이 창건했다. 마음을 직관할 때 부처의 깨달음에 도달한다는 ‘직지인심 견성성불’에서 유래했다고 하기도 하고, 다른 하나는 능여스님이 절터를 측량할 때 자를 쓰지 않고 손으로 재어 절을 지었다고 해서 붙였다는 설도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팔공산에서 견훤과 싸워 패하면서 신숭겸이 왕건을 대신해 죽었던 위기에 왕건이 이곳 직지사로 피신했는데 이때 능여스님이 후백제를 칠 수 있는 도움을 주었다 하여 이후 고려왕실의 비호를 받아 크게 번성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