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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일본 문예춘추 7월호에 실린 일본의 저명한 작가 시오노 나나미(塩野七生) 의 글
「이 나라의 활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 일본과 일본인들에게 던지는 10개의 질문」전문을 번역한 것입니다.
중앙일보에 간단히 소개 되었습니다만
일본어를 모르시는 분들 특히 젊은이들을 위해 번역을 해 보았습니다.
교육, 엘리트, 역사, 애국심등에 관한 그의 일본인에게 던진 질문들은
그대로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여기에 올립니다.
정치 경제 안보 면에서 큰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게 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美加悅>
<시작하며>
언론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호소하는 방법에는 크게 나누어 2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신이 직접 전면에 나서는 방법이며 둘째는 반대로 자기 자신은 뒤로 물러나고 사실이 말을 하게하는 방법이다.
나의 경우는 후자 두 번째 방법으로 일관해 왔다.
어떤 분야에 있어서도 교조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제일 싫었기 때문이며 이러한 나의 스타일은 자칫하면
그러한 교조적 존재를 만들고 싶어 하기 쉬운 매스 메디아와의 관계를 어렵게까지 만들어온 것이 아닌가 생각 한다.
게다가 나는 메시지를 보내는 나와 그것을 받는 독자의 관계는 완전히 대등하다는 생각을 고집하고 싶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당신은 어떤가?」라고 하는 질문을 앞으로도 계속함으로써.
지금부터 시작하는 나의 「이야기」도 일방적으로 말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느낌으로 읽어주기 바란다.
회답을 준다는 따위는 눈곱만큼도 생각지 않는 시오노 나나미(塩野七生) 가 당신과 마주앉아서
우리의 존경하는 평론가 小林秀雄(고바야시 히데오)의 말을 빌리면
당신이 「생각 할 수 있는 힌트」를 제공하는 정도만이라고나 생각하고.
■<格差사회에 대해 >
戰後(전후)의 일본사회는 「1억 총 中流(중류)사회」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平成(헤이세이) 불황으로부터 벗어난 순간
21세기의 일본은 어떻게 된 것인지「格差(격차)사회」에 돌입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막대한 개인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부유층이 있는 한편 생활보호 세대의 수도 激增(격증)하고 있다 → 고 하는
보도를 볼 때마다 의문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로 일본은 지금 처음으로 격차사회가 된 것인가」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만다.
「일본은 옛날부터 격차사회였지 않는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사회가 있는 모든 곳에 格差(격차)는 존재했던 것입니다.
격차가 없는 사회라고 하는 발상은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戰後(전후)의 일본을 보더라도 대기업의 샐러리맨과 중소기업의 노동자 간에는 소득격차가 있었으며
조직에 속하는 사람과 나와 같은 프리랜서 간에는 사회적 격차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차(差)는 전후 60년 가까이 되기까지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 ?
일본사회 특유의 緩和劑(완화제)라고도 해야 할 그 무엇이 이 격차를 가려왔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컨대 서구 사회에서는 권위와 권력은 동일 인물에 집중되어 있는 경우가 많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은 전통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권위를 갖는 것은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황실이며 권력을 담당하는 것은 때에 따라 과거에는 幕府(막부)가 되기도 했고
지금은 내각 총리대신이기 때문입니다.
또 서구에서는 대학교수와 초등학교 선생의 경우 대학교수 쪽의 지위가 압도적으로 높지만
일본에서는 모두「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예컨대 大臣(대신=장관)이라도
자녀의 교사에게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경의를 표합니다.
이것은 歐美(구미)사회에서는 볼 수 없는 일본 특유의 문화적「緩和劑(완화제)」가 아니겠습니까?
만약 현재의 일본인이 격차를 실감하기 시작했다면 이 완화제가 없어졌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지 않겠는가.
그 결과 지금 까지는 오블라트(oblate 캅셀 같은 막)膜에 쌓여 있어서
그 윤곽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 이제는 명확히 보이게 되고 만 것입니다.
고대의 로마에도 격차는 있었습니다.
단지 로마 사회에는 격차를 고정화 시키지 않는 유동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사회는 피라밋트 형을 한 계급사회입니다. 삼각형의 정점에는 황제가 있고 그 밑에는
요즈음의 국회라고 해도 좋을 元老院(원로원)계급이 있으며 그 밑에는 당시의 경제계였던 騎士(기사)계급,
그리고 평민으로 이어지고 그리고 그 밑에는 屬州民(속주민)이라든가 해방된 노예 그리고 최 하층에 노예가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평민 위가 시민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 역사상의 「로마 市民(시민)」입니다.
그렇지만 「로마 시민」과 「非(비)로마 시민」도 고정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노예라고 해도 한 평생 노예로 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도 격차의 벽을 넘어 위로 올라 갈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어학의 재능이 뛰어나거나 발군의 商材(상재)를 갖고 있는 노예들은 해방노예가 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리고 해방노예도 일정액 이상의 재산을 보유하는 등 諸(제)조건을 갖추면 로마 시민권을 얻는 것이 법률로 인정되고 있었습니다.
즉 사회 전체적으로 유동성이 기능하고 있어서 노력과 능력에 따라 찬스를 잡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에 정복당한 屬州(속주) 출신자에게도 「로마 시민」이 되는 길은 열려 있었으니까요.
이런 종류의 「敗者復活(패자부활)시스템」이 기능하고 있는 사회야 말로 건전한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일본이 격차사회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격차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격차가 고정화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아베 신조(安倍晋三) 수상은 이 사회의 고정화를 해소하기위한 「再(재) 찰렌지 계획」을 제창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패자부활의 길을 만들려고 하는 發想(발상) 자체는 칭찬해도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異論(이론)이 있습니다.
「再(재) 찰렌지」에는 연령별 배려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리스트라(リストラ. restructuring: 구조조정) 의 쓰라린 경험을 당한
40대, 50대 에게도 새로운 일자리 찾기를 위한 재교육을 하는,
그런 식으로 해서 도대체 오랜 세월 일해 온 이 세대 사람들의 일을 통해 쌓아온
自信感(자신감)을 존중하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인간은 누구라도 일을 함으로써 自信感을 분명히 해가는 동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재교육을 위해 나라의 돈을 쓰는 것 보다 그 예산은 관민 일체가 되어서
그들의 소득을 보장하는 형태로 배분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재 찰렌지 기간」3년간으로 설정하고 그 사이에 자신이 스스로 재취직 자리를 찾아라.
그 기간 동안의 급여의 절반은 보장 한다고 한다든가.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어차피 불가능한 격차의 완전 해소 보다도
격차가 크게 드러나지 않도록 완화제에 대한 배려를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일하는 방법에 대해>
언제 어디서나 실업문제는 국가를 뒤흔들 수 있는 큰 문제였습니다.
로마史(사)에 있어서 실업문제가 심각 했던 시대라고 한다면
제1차, 2차, 3차로 나뉘어 1백년이나 계속되었던 카르타고와의 싸움에 마침내 승리 했으나
국내가 흔들렸던, 흔들리고 분열되었던 기원전 1백3십년 전 경이었습니다.
『로마人 이야기』에서는 제3권이 되는 이 시대를 쓰기위해 「실업이란 무엇을 의미 하는가」를 열심히 생각하고 있을 때
영국인 작가 켄 포렛(Ken Follet)이 TV에서 말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失業(실업)이라고 하는 것은 생활의 수단을 빼앗기는 것만이 아니다.
그 대책이라면 복지정책으로 카버 할 수 있다.
최대의 문제는 직업을 잃음으로써 인간이 자기에 대한 自信(자신)감을 다질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다는 것이다.」
수자를 다룰 뿐인 경제학자로서는 간파하기가 어려운,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한마디였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분명해 졌습니다.
평민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 직무인 호민관이었던 크라크스 형제(兄 = Tiberius Sempronius Gracchus, 弟 = Gaius Sempronius Gracchus)가
농지개혁에 적극적이었다든가, 공공사업을 확충했다든가 그리고
집정관 마리우스에 의한 징병제로부터 지원제로의 軍制(군제) 개혁에 이르기 까지가 모두 이 시대의 로마가 직면해 있던
失業(실업) 에 대한 대책이었다고 생각할 수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카에사르(Caesar)시대에 로마軍(군)은 만기 제대한 병사에게는
토지를 주는 일종의 퇴직금 제도를 실시하기 시작해서,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xs)에 의해 정식으로 법제화되어 갑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戰勝國(전승국)에 의한 패전국 약탈이 진정되었을 뿐 아니라
병사에 대해 장기고용으로 후하게 보상하는 경제적 보장을 해주게 되었습니다.
즉 군에서 일 함으로써 한번 실직했던 사람들의 프라이드를 지켜주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대의 성과는 로마의 안정된 성장노선의 확립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실업률이 개선되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지금 크로즈 업 되고 있는 것은 고용형태의 문제입니다.
단적인 예가 正規(정규)사원과 非(비)정규 사원이라고 하는 「格差(격차)」입니다.
일본에서는 문자 그대로 「正規(정규)」사원이 기준이 되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정규 사원을 정규사원 화하는 것이 이 문제의 해결법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방법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고도 성장기에 신입사원이 많다는 것을 자랑하는 풍조가 있었습니다만,
요즈음 구조조정 당하고 있는 세대가 바로 그때의 신입사원 세대입니다.
대량채용 후의 구조조정, 이런 악순환을 계속하려 한다면 기업도 책임을 저야 하게 되고 맙니다.
앞으로도 일본의 경제력이나 景氣(경기)가 계속 호전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현실적인 것은 계약사원과 종신고용사원으로 나누어서 고용한다고 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종신고용사원은 장기고용을 보장하는 대신에 급료는 억제한다.
逆(역)으로 계약사원은 높은 성적을 올리면 보수도 高額(고액)이 되게 하면 된다.
다만 계약기간은 1년으로 한정하지 않고 職種(직종)에 따라서는 3년이라든가 5년 정도의 시간도 필요할 것입니다.
어쨌든 「上下(상하)」가 아니고 「竝立(병립)」이 되는 이런 식의 제도가 기능을 하게 되면
이제까지는 하나의 사회, 하나의 업종 속에 침체해 있던 노동력이 유동성을 갖게 됩니다.
로마에서 인재를 활용하기 위해 중요시되고 있던 사회 전체의 유동성이
2천 년 후 일본에서도 再現(재현)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정년 후의 사람들이라도 계속해서 더 일하고 싶다는 사람은,
지금까지와 같은 주 5일 근무가 아니고 계약사원의 형식으로 주 2일이라든가 3일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도 늘어납니다.
어쩌면 그 일을 정년 후의 사람과 학교를 막 졸업한 젊은이가 분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런 식의 제도나 방식의 중첩이 노동력 전체의 활성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기대하고 있습니다.
■<교육에 대해>
일정한 직업을 갖지 않는「프리터 (Free와 Arbeiter의 일본식 합성어= 정규직장을 구하지 않고 아르바이트만으로 생활하는 사람)」,
그리고 일 자체를 하지 않는「니트(NEET-'Not in Employment, Education or Training')」등
일본 젊은이들은 패기가 없다든가 원기가 없다는 말을 합니다.
그 중에서도 젊은 세대에 그런 경향이 현저 하다면 그 원인은
「아이들의 자주성, 개성을 존중하는 교육」이라고 하는 시대의 풍조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개성 존중은 좋은 일이나 그러나 그것도 사리판단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고 나서부터의 이야기입니다.
그때 까지는 問答無用(문답무용)의 예절교육이 필요합니다.
저도 아들을 키우고 있을 시기에는 손바닥으로 뺨을 때린 경우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사리를 따지는 설명은 필요가 없습니다.
선과 악의 판단을, 사리를 따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통째로 몸에 익히는 시기가 아이들에게는 절대로 필요합니다.
최초에 이런 식으로 해서 예절이 몸에 배이게 하면 유소년 기를 벗어날 때 쯤이면
아이들 쪽도 세상사를 이해하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흔히 교육 문제가 논의의 대상이 될 땐 학교교육의 면만 비판 되지만 학교 교육이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뿌리에는 가정교육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로마 여인의 귀감」으로 칭송받는 크라크스 형제의 어머니 코넬리아는
「아이는 어머니의 태내에서 자랄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차리는 식탁의 대화에서도 자란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幼少年 期(유소년 기)를 지내지 않은 세대가 아마도 지금 젊은이의 대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부모세대는 8백만 또는 1천만이라고도 하는「단가이(團塊)세대(1947~1949년 출생)」.
그들이 교육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닌가요?
이런 현상은 세계적인 것으로 유럽에서도 니트(Neet)라든가 청년실업 대책이 사회문제화 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파고들어가 보면 부모세대의 문제로 뿌리는 같다고 생각합니다.
계급체제의 타파를 호소하며 프랑스의 「5월 혁명」에 참가한 세대를「68년 세대」라고 합니다.
일본의 「단가이(團塊) 세대」, 좀 더 말하면 全共鬪(전공투)세대와 같은 세대입니다.
유럽 전체에서도 그 세대가 아이를 갖는 부모가 되었을 때 부모자식 관계에 큰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 마저 격차를 없애자며 「파파」「마마」라고 부르게 하지 않고 이름으로 부르는 관계로 만들었어요.
이 같은 부모 자식 관계에서 자식들이 부모의 말을 듣겠습니까.
그 결과 젊은 층의 높은 실업률이며 온갖 사회문제의 만연으로 발전했습니다.
아메리카도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젊은 층 홈리스 급증이 우려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과거 제조업으로 영화를 누렸던 시대에는 일자리도 많고 경제적으로 독립하기도 쉬웠지만 지금은
求人(구인)도 적고 그리고 또 이제 와서 부모 곁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해서 홈리스 화(화)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결국 단가이 세대라든가 68세대, 나아가서는 베트남反戰(반전)세대가 세계적으로 가정교육을 잘못시킨 대가를
지금의 젊은이들이 지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 젊은이들은 어떻게 하면 좋은가.
「20대 까지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그러니 방황해라」고, 나 같으면 이렇게 어드바이스 하겠습니다.
방황을 할 수 있는 것은 젊음의 특권입니다. 다만 방황하더라도 무엇이든지 경험하면서 방황 하는 것입니다.
미지의 일이라도 무엇이든지 좋으니까 물러서지 말고 온몸으로 부닥치고 맞서야 하는 것입니다.
실패하더라도 아직 젊으니까 기회, 찬스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 <노인에 대해>
그러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늙는다는 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자기가 자신을 갖고 할 수 있는 일을 골라 하고 그 밖의 것은 깨끗이 버려가는 과정입니다.
20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헤매고 방황합니다.
어쨌든 아무것도 아직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지요.
30대가 되면 그래도 일단은 일어납니다.
하지만 아직 확정은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40이 되어 방황하지 않게 되는 것은 40이 되어서도 여전히 방황하고 있으면
사람대접 받는「사마(樣)」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인간은 하나씩 하나씩 지엽적인 것을 잘라서 버려 나갑니다.
그러나 에너지 - 즉 체력은 조금, 조금씩 감소되어 가기 때문에
필요하지 않은 것은 잘라 버리지 않으면 나무 자체가 넘어지고 마니까요.
그래서 나 같으면 「늙음」을 다룬 기사나 책 같은 것은 읽지 않습니다.
충분히 알고 있는 일들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말하고 있는 것을 읽을 시간이 아깝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늙음」까지 생각할 정신적 여유가 있을 정도라면
60세까지의 인생에서 기른 자신의 개성을 더 연마하는데 그 시간과 여유를 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자원봉사활동도 좋고 취미라도 좋고 일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정년 후 처음으로 가사를 돌보는 남자들을 위한 학교도 있는 모양인데,
그곳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기본적인 최대 공약수로서의 방법뿐.
하지만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방법은, 같은 것은 재미도 없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이겠지요.
그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만 몇 만 엔이나 투자할 여유가 있다면 영화를 보기도하고
여행을 하던가 하는 쪽으로 돌리는 것이 좋으며 나라면 그렇게 합니다.
늙는다는 것 따위는 생각지 않고 지금 까지 살아온 자기에 대한 자신을 갖고 하고 싶을 것을 하면 좋은 것입니다.
■ <엘리트에 대해>
고령화 사회기 때문에 일본은 활력이 없다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일본에 활력이 없는 것은 고령화 때문이 아니라
일본의 엘리트라는 사람들의 自覺(자각)및 氣槪(기개)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제게는 듭니다.
일본에서 엘리트로 불리는 사람들로부터 自信(자신)이 없어진 것은
버블(거품)이 아직 존재도 하지 않았던 1980년대 전반부터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 무렵부터 이미 이 景氣(경기)도 언젠가 끝난다, 그 후 일본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으로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異例的(이례적)인 일입니다.
로마제국이라든가 베네치아공화국을 보더라도 경제적인 번영이 확실해진 시점에서
「이제부터야말로 우리나라의 시대다」라고 하는 기개가 넘치고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활기가
국민 간에도 콘센서스로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로마史(사)에서 말하면 名將(명장) 한니발이 이끈 카르타고와의 제 2차 포에니전쟁에서 승리한 기원전 2세기 말.
베네치아라면 제 4차 십자군에 참가해서 자국의 경제력과 해군력을 유럽대국에 보여준 13세기 초두였습니다.
당시 베네치아 없이는 프랑스인이나 독일인으로 구성되는 십자군도
기독교 성지인 예루살렘에는 갈수가 없다는 것을 諸國(제국)에 과시했으니까요.
마치 베네치아야말로 지중해세계, 그리고 유럽세계의 견인차라고 하는, 자신감에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고도 성장기가 정점에 이른 시기에도 일본인은 그런 자신에 찬 긍지를 뽐내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87년 노무라(野村)증권이 경상이익에서 일본 제1이 되었을 때
「제조업이 아닌 증권회사가 넘버원이란 것은...」라는 비판이 나왔던 일이었다.
일본의 엘리트층 가운데 이윤추구를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류가 되었습니다.
벌어들인 돈을 사용해서 세계운명의 일익을 이 일본이, 그리고 자신들이 담당한다, 라고 하는 기개가
그들에게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이 일종의 무기력한 정신 상태는 국민들 사이에까지 전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일본의 지도층은 돈을 버는 일에 뒷 걱정이나 께름칙함을 느낄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번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생각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남긴 정신적인 負(부)의 유산덕분에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혼미에 빠지고 만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치 언덕 밑에서 바라보는 한은 아름다운 흰 구름이었던 것이
정상에 올라가 보면 자욱한 안개일 뿐으로 어디로 향해야 좋을 것인지 알 수 없게 되고 만 것처럼.
일본의 지도층에 없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볼 때 그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정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반 대중에게는 행동의 자유가 있는 일이라도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희생을 치르더라도
떠맡고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다고 하는 각오.
로마의 리더들이 좋아한 스토아학파의 철학이 설파한 것이 이런 사고방식 이었습니다.
유럽에서는 귀족이나 기사계급은 지배계급인 동시에 국민에 대한 책무를 지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武力(무력)을 가지고라도 국민의 안전과 재산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몸을 바쳐 지켜내는 것」입니다.
한니발과의 거듭되는 싸움에서 지기만 하던 시절의 로마는 어떻게 대응했는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未曾有(미증유)의 國難(국난)기에 까지도 로마는 자신을 잊지 않았습니다.
병역의무가 없는 17세 미만의 소년이라든가 노예라든가 「프로레타-리」로 불리고 있던 하층의 시민을 징용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장래의 로마를 책임지게 될 청소년이라든가 家長(가장)이 전쟁에 나가면 가족이 거리를 헤매야하는 사람들 까지 끌어내 가지고는,
한니발 상대로 지는 것은 로마 군 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로마라고 하는 국가 전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대신 엘리트 계급이 문자 그대로 계속 제 1선에 나섰던 것입니다.
한니발 한 사람에게 로마 집정관이 10여명 정도는 전사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정도로 나라를 지키는 일에 책임을 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엘리트 들은 버블이 붕괴한 후 우리는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 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자신을 잃었을 뿐이 아니겠습니까.
■ 리더십에 대해
그러면 정말 진짜 리더는 어떤 인물일까요. 로마라든가 베네치아 역사를 쓰면서 나는
무수한 역사상의 리더들과 대화를 거듭해왔습니다.
로마史上(사상) 최대의 리더는 카이저를 빼고는 달리 없습니다. 그로부터 배운 리더 철학은 2개.
그중에서도 제1의 최대 要諦(요체)는 「모든 人材(인재)는 활용할 수 있다」고한 그의 인재 활용 術(술)입니다.
어떤 조직에도 부하들의 능력부족을 개탄하는 上司(상사)가 있습니다만 그것은 즉
상사 측의 상상력 결여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부하의 능력을 적절히 잘 관찰해서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한정된 분야에서라도
그 능력을 최대한 발휘시키는 것이야 말로 리더에게 요구되는 자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부하들이 즐거이 고생을 참고 노력하도록 이끄는 재능입니다.
인간은 누구라도 무언가를 할 때는 수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수고하는 것은 달게 받아들입니다. 더욱이 그 수고도 기꺼이 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것이 리더 입니다.
일본에도 「사무라이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에피소드가 카에사르 에게는 있습니다.
로마사상 최고의 지식인으로 되어있는 키케로에게도 약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賢兄愚弟(현형우제)라고 할 수밖에 없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그 동생을 키케로는 카에사르 에게 천거하여 맡깁니다.
그러니까 카에사르는 戰功(전공)도 없는 그 동생에게 느닷없이 1개 군단을 지휘하도록 맡기고 맙니다.
때는 갈리아 전쟁이 한창이던 무렵이었습니다.
그의 군단은 갈리아 敵軍(적군)에 포위되어 궁지에 몰리지만 키케로 동생은 분투했습니다.
부하를 절대로 버린 적이 없는 카에사르기 때문에 물론 구원하러 옵니다.
「불이 나니까 바보도 의외의 큰 힘을 발휘한다.」면 표현은 좀 그렇지만
형 키케로 까지도 절망하고 있던 동생의 이 戰果(전과)에 키케로 동생은 물론
형 키케로도 기뻐한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기는 데는 적을 격파하고 이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적을 끌어드려서 이기는 방법도 있어요. 원로원 주도형의 공화정 주의자인 키케로는,
황제 주도형의 帝國(제국)으로 가려고 생각하고 있던 카에사르 로서는 政敵(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사건 이후의 키케로는 카에사르 파는 되지 않았지만 강경한 앤티(反)카에사르 도 아니게 됩니다.
이 또한 인심 掌握 術(장악 술)이 아니겠습니까?
■경제에 대해
얼마 전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일본은 국가로서 막대한 부채를 지고 있는 한편 돈이 넘치는 현상도 보인다.
그리고 개인 금융 자산이 모두 1천 4백조 엔이나 된다고 하면서 경제적 불안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왜일까요?」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백화점 지하의 식품 매장을 보고 온 직후의 일이었습니다.
백화점 광경을 보면 일본이 풍요롭지 않다고는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방대하고 값비싼 식료품과 과일 채소 등이 팔리고 그리고 남은 것은 버려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일본인이 경제적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정말 마키아베리가 말한 것처럼
「인간이라는 것은 지금 갖고 있는 것에 더해서 새로이 더 얻을 수 있는 보장이 없으면
지금 갖고 있는 것까지도 갖고 있다고 말할 기분이 들지 않는 존재」인지모릅니다.
이 不安(불안)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는 역시 마키아벨리가 말하는「구체적인 질문하기」가 필요하겠지요.
우선은 리더가 명확한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필요 하겠지요.
전후 일본에 있어서 최대의 성공 예는 이께다(池田勇仁)내각이 구가한 「所得倍增(소득배증)」이었습니다.
당시는 바로 한창 고도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던 시기 여서 말을 하지 않아도 소득배증은 실현되었겠지요.
그러나 바로 소득배증이라는 구체적인 구호의 덕분에 장래에 대한 국민의 불안이 불식되었던 것입니다.
국민이 불안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을 불식시킬 메시지를 발하는 것은 정치가의 역할입니다.
아무튼 일본은 이처럼 풍요로우니까 말이지요.
국가의 기본은 고대 로마시대 부터 불변이며 정치, 경제, 안전보장 3가지입니다.
지금의 일본인이 자신의 장래 그리고 나라의 장래에 대한 불안을 불식하기 위해서도
이 3가지 기본 그 중에서도 경제를 안정시키고 지속적으로 성장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정치의 안정도 안전보장의 뒷밭임도 경제력이 없으면 확립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있어서 기본 체력이 국가에 있어서는 경제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이 장기간에 걸쳐 번영하고 「팍스 로마나」로 불리는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것도
강대한 군사력을 보유한 동시에 유럽 中近東(중근동) 북 아프리카 까지도 망라한
광역 경제권을 잘 활용한 경제대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점은 베네치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확실히 베네치아는 상인국가로 불릴 정도의 경제력을 자랑했지만
그러기 위해 힘든 노력 등 지불한 비용은 결코 쉽고 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3세기에 이미 정보 수집을 위해 각국에 주재 대사를 상주시키고 있던 최초의 국가입니다.
자원이 부족한 교역국인 이상 정보 수집이 자국의 명운을 좌우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당시의 베네치아를 지금의 일본에 비유한다면 「經團連(경단련)」이 정치를 하고 있는 것과 같은 모양입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대로 고도성장을 달성한 당시 일본의 정계라든가 官界(관계), 경제계에는
「공격해 오면 맞받아친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기개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 국가재정의 기초가 되는 세제에 대해서도 고대 로마의 원칙은
우선 무엇보다 먼저 간단했으며 간접세를 중심으로 「얕고 넓게」였습니다.
이에 비해 일본의 세제는 지나치게 복잡합니다.
전문가나 세무사가 아니면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일반국민도 이해할 수 있는 심플한 형태가 이상적인 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말입니다.
그렇지만 로마도 「적자재정」의 측면은 부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완하는 「財源(재원)」을 생각해 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라는 말을 낳을 정도의 교통망 발달이라든가 광범위한 治水(치수)시설 등
인프라 정비 없이는 팍스 로마나는 완성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인프라도 부유한 사람들이 낸 私財(사재)로 이루어 진 공공사업이 적지 않았습니다.
즉 기부입니다.
앗비아 街道(가도), 푸라미니아 가도, 크라우디우스 水道(수도) 등 이들 명칭은
그것을 기획하고 실행한 公人(공인)의 이름을 딴 것이지만
그 유지는 상당한 정도로 私人(사인)의 기부금에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 지방자치단체, 私人(사인)의 기부라고 하는 3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지는,
아우구스투스(Caesar Divi Filius Augustus)에 의해 정책화된 이 로마의 시책을 일본도 배울 수 없겠습니까.
물론 거기에는 근본적인 세제 개혁이 필요하겠지만 말입니다.
■ 애국심에 대해
국민투표법의 성립이라든가 교육기본법의 개정도 있어서 愛國心(애국심)이라는 일본어가
최근 신문이라든가 잡지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의 戰後(전후) 사회를 지배해 온 것은 애국심이니 뭐니 하는 말을 자랑스럽게 함부로 쓰는 것은
인텔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며 애국심 같은 것은 반동적이다 라고 하는 풍조였습니다.
하지만 애국심 자체는 옛날부터 일본에 뿌리내리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요.
그 상징이 스포츠의 장면입니다.
오래전에는 수영 남자 자유형에서 세계기록을 몇 번이나 갱신한 후루하시 히로노신(古橋廣之進)선수의 활약,
최근에도 야구의 세계에서 보여주고 있는 일본인의 활약상에는 평소 애국심 같은 말과는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사람까지 열광하고 있으니,
이 나 시오노 나나미 까지 포함해서 말이지요.
스포츠를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와 같은 개인적 체험의 축적을 통해 일본인은 자연히 애국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애국심을 기르는 과정은 유럽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국경왕래를 자유화하고 통화통합까지 이룩한 EU(유럽연합)지만
2006녀 월드컵 축구 때는 일시적으로 통합이 해소될 정도였어요.
4강에 오른 나라가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포르투갈 4개국.
이 때만은 각국 팬은 자국의 矜持(긍지)를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상대국에 대한 매도의 소리도 거침없이 퍼부었습니다.
이래서 4년마다 한번 EU가 해산되기 때문에 「내셔널리즘을 버린 통합」이라는 평소의 비아냥도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탈리아에서 살고 있는 나의 경우 이탈리아의 축구도 좋지만
월드컵에서 응원할 때는 기껏해야 2번째입니다.
첫 번째로 응원하는 것은 아무리 약해도 우리 일본입니다.
이런 감정을 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애국심은 좋으나 애국심 교육이라는 것은 가능한가,
저는 의문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실에서 교사가 어떻게 해서 가르치는가.
가르치려 해도 아이들 마음의 바탕에 가정에서 배양되어야 하는
인간관계의 기본은 있는 것일까 의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결국은 가정의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아이들도 어린 시절부터 모친을 사랑하고 모친이 나이 들어 늙으면 보호하려 합니다.
부모에 대해 갖는 이런 감정과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은 모두 同心圓(동심원)에 있는 것입니다.
애국심은 인간의 마음의 바깥에서 부여되는 것이 아니고 내심으로부터 솟아올라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원래 정치가는 추상적인 것은 말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애국심 교육은 정치가의 일이 아니며 교육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키케로의 다음 말을 다시 한 번 읽어봐야 합니다.
「인간으로서 최고로 명예스런 행동은 조국을 위해 도움을 주는 일이다.」
문화로도, 스포츠로도 도움을 주는 것은 같으니까요.
■ 중국과 미국에 대해
전후의 냉전 대립구조가 붕괴한 후 세계는 급속히 변화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글로벌 사회의 도래 입니다.
국경선은 몇 번이나 다시 그어지고 EU는 통화통합을 이루었으며 기업의 다국 간 경쟁도 격화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글로벌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의 본질을 무엇입니까? 생각해보면
그것은 武力(무력)충돌을 포함하는 諸(제)문제에서의 대립이며 동시에 그 대립을 어떻게 해서 회피할 것인가 하는 싸움인 것입니다.
EU통합은 경제문제로 자주 이야기 되어왔습니다.
확실히 경제적으로 격차가 있는 동구 제국을 서구의 시장경제가 어떻게 먹어 들어갈 것인가 하는 것이며
그것은 큰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유럽으로서 최대의 관심사는 우선 첫째 유럽諸國(제국)간에는 두 번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는 것.
둘째는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주도권을 미국이나 일본에 빼앗기고 말았음으로
정치 경제면에서의 열세를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뒤지고 있는 동구제국을 먹어 삼키는 데 따르는 디메리트(缺點)도 이제는 감수하자는 발상입니다.
그러면 일본은 이웃 중국을 글로벌사회 가운데서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政冷經熱(정냉경열)」이라고 하는 지금의 일중관계가 곧바로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본 기업은 지난 20년 가까이 경제 효율만을 찾아서 값싼 중국의 노동력을 이용해 왔습니다만 그사이 중국은 크게 변화했습니다.
시장경제가 도입된 결과 국내에서의 경제격차를 증대시킨 동시에 해외에도 적극적으로 경제 진출을 해 가게 되었습니다.
전후 일본도 걸어온 길이지만 그때의 중국이 취한 대응은 일본과는 반대였습니다.
이쪽에서 가까이 가려고 노력한 일본과는 달리 WTO등 국제사회에 있어서의 기존 룰에 좀처럼 따르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중화사상이란 이런 것인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기존 룰과 충돌했을 경우 중국은 자국의 잘못을 타국에 책임전가 합니다. 그래서 국제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야스쿠니 문제에 관한 日中(일중) 간의 논의도 그 연장선 상에 있습니다.
그럴 경우 일본은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까요?
카에사르 에게는 「나는 나의 생각에 충실히 해왔다. 때문에 상대도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지난 6월호 본지(文藝春秋)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야스쿠니와 스미소니언과 중국이나 한국에 있는,
같은 종류의 시설 모두를 돌아가며 둘러보는 투어를 기획해보면 어떨까.
또 일본 수상도 일본을 방문하는 외국요인들에게 함께 야스쿠니에 가시지 않겠습니까.
나도 귀국방문 때는 여러분들 나라에 있는 같은 종류의 시설에 동행하면 아주 안성맞춤일 것입니다.
라고 말해보면 어떻겠는가.」라고 쓴 것도 이런 발상이 전제에 있었던 것입니다.
상대의 존재를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시아 「넘버 원」으로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도 없습니다.
마키아벨리는 「중간 정도의 승리로 만족하는 자는 항상 계속 승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기지 못해도 지지는 않는다는 식으로 말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로벌 화 된 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역시 미국입니다.
「팍스 로마나」를 모방해서「팍스 아메리카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미국은 정치 경제 군사에 있어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로마시대의 팍스(평화)와 미국이 추구하는 평화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 상징이 미국에 의한 이라크 전쟁입니다. 미국은 이때「정의의 전쟁」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웠습니다.
이점이 고대 로마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고대 로마의 전쟁에는 승자와 패자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패자에 대한 관용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의의 전쟁」에서는 패자에 대한 관용 같은 것은 바랄 수 없습니다.
어쨌든 이 경우의 「敗者(패자)」는 「非 正義(비 정의)」이니까 말이지요.
미국은 자국의 정의를 전 세계가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십자군의 발상인 것입니다.
「神(신)」이「正義(정의)」로 바뀌었을 뿐인 것입니다.
아니 바뀌지도 않았습니다.
「神樣(가미사마)」가 옳지 않은 것을 말할 리가 없으니까 말이지요.
서구사회에서는 르네상스期(기)를 거쳐서 계몽주의시대가 종언을 고한 18세기에 이미 십자군적 발상은 유행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 글로벌 화 시대에 와서
「神(신)」이 「正義(정의)」로 이름을 바꾸어 부활했다는 사실에 절망감마저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正義(정의)의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一神敎(일신교)의 정신입니다.
그러나 고대 로마는 그리고 우리 일본도 多神敎(다신교)의 세계관으로 살아왔습니다.
그 다신교의 정신이야말로 「팍스 로마나」의 원천이었습니다.
그 점을 일본인은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자연히 미국과의 교제방법도 알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역사에 대해
나는 지금까지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를 쓰고 , 베네치아라고 하는 해양국가의 역사를 쓰고, 그리고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1천년의 고대 로마를 썼습니다.
최근 역사와 친해질 필요성을 통감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역사라고 하는 것은 배움만의 대상은 아닙니다.
지식을 얻는 것뿐이라면 역사를 다룬 책을 읽으면 끝납니다.
그렇지 않고 역사에는 현대사회에서 직면하는 諸(제)문제에 판단을 내릴 지침이 있는 것입니다.
나는 두 개의 좌표축에 사물을 놓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의 상황을 횡축에 놓고 종축에는 역사를 놓습니다.
이 두 개의 축을 전후좌우로 자유로이 움직임으로써 현재의 상황을 과거의 역사에 비춰보면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일본은 유럽과 마찬가지로 수천 년 단위의 긴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3백년도 안 되는 역사 밖에 갖지 않은 미국과는 명확히 다릅니다.
그러나 일본이 세계사 가운데 플레이어(역할 자)로 등장하는 것은 日露(일노)전쟁이 있고 부터입니다.
세계사 가운데서의 경험 부족이라는 점이라면 미국과 닮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더욱 세계사를 배워서 역사라고 하는 종축을 길게 잡음으로써
현재의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도 적절히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하지만 그것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맞지 않습니다.
동일한 사실과 현상이 반복되고 되풀이 될 리가 없습니다.
단지 사람들의 사실과 현상에 대한 대응의 방법이라면 되풀이됩니다.
석유 쇼크와 화장지가 고대로 가면
이집트에서의 정정불안과 로마시장에서의 소맥 값 폭등 이라고 하는 모양새가 되는 것이지요.
되풀이되는 것은 「불안에 쫓기는 대중」이었으니까 말입니다.
역사에서 배운다고 하는 것은 지식의 集積(집적)에 역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행위의 원인을 찾는 쪽에 중점을 두어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역사는 바로 인간학의 寶庫(보고)입니다.
정치가라든가 경제인도 「역사는 싫어서...」라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런 말씀은 하시지 않는 쪽이 좋습니다.」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싫어서...」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해서 역사를 배우면 좋은가 고 자주 질문을 받습니다.
종요한 것은 「역사의 if」를 갖는 것입니다.
흔히 「역사에 if」란 금기라는 말을 합니다만 그것은 역사학자의 말입니다.
학자의 세계에서는 史料(사료)라는 것은 사실이라는 확증이 있는 것에 한정되지만
우리 같은 학자 이외의 일반인은 이 제약에 구속받을 필요가 전연 없습니다.
「만약 노부나가(信長)가 혼노지(本能寺)의 변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고 20년 더 장수 했더라면...」
「만약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이겼더라면... 」 이런 질문을 설정하고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도 기본적인 역사의 골격 구성만은 학교교육에서 해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연후에「역사의 if」를 두뇌체조라고도 생각하며 하면 되는 것입니다.
「if의 활용」으로 상상력을 갖고 역사를 생각하는 것이
나아가서는 현대사회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지침이 된다고 까지 생각합니다.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은 후세인 체포에 성공했지만 전황은 수렁에 빠졌습니다.
이런 때 카에사르 라면 어떤 전략을 세웠을까? 」---첫째 이런 질문을 생각하는 자체가 재미있지 않습니까.
한 사람의 인간이 일생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는 과잉일 정도로 정보가 범람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대에서 필요한 정보를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역사라고 하는 긴 縱軸(종축)을 갖는 것이 자기라고 하는 그릇의 용량을 늘리는 것으로 이어진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끝)
지도자, 추상적 이야기는 그만 나라 위한 희생 앞장서 보여야` [중앙일보]
`로마인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리더십은 …`
10일자 `문예춘추`에 기고
"일본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책무)' 정신이 없다. 엘리트라고 하는 사람들의 자각(自覺)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로 유명한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70.사진)가 일본 사회의 10가지 문제점에 대해 쓴소리를 쏟아냈다.
10일 발행된 분게이슌주(文藝春秋)에서 '일본과 일본인에의 10가지 질문'이란 글을 통해서다.
그는 "일본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라며 ▶리더십▶사회 격차▶고용 ▶교육▶고령화▶사회 지도층▶경제▶애국심▶중국과 미국▶역사 등
10개의 주제를 짚었다.
그는 무엇보다 지도층에 희생정신을 발휘할 것을 촉구했다.
"일본에 활력이 떨어지는 것은 고령화 때문이 아니다.
사회 지도층의 정신 자세가 문제다. 떠안고 가야 할 것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렇게 하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게 문제다."
그러면서 그는 로마의 역사를 인용했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과의 싸움에서 매번 지기만 할 때 로마가 어떻게 했는지 떠올릴 필요가 있다.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로마의 지도자들은 병역의무가 없는 17세 미만이나 노예, 하층민은 일절 징용하지 않았다. 대신 지도층이 몸소 최전방에 나섰다.
한니발에게 로마의 집정관 10명이 희생당했다. 엘리트들이 스스로 나라를 지킨다는 소임을 다했던 것이다."
그는 "일본의 지도자들은 1980년대 초부터 경제적 번영을 누리면서도 세계 운명의 일익을 일본이 맡겠다는 기개가 없었다"며
"이같이 한발 뒤로 물러서는 자세가 사회에 전파되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이어 바람직한 리더십을 설명하면서 다시 로마 이야기를 들춰냈다.
"그동안 로마와 베네치아의 역사를 쓰면서 수많은 지도자의 철학과 면모를 연구했는데, 역시 최고는 줄리우스 카이사르였다"며 "
카이사르의 지도력은
'모든 사람은 활용할 수 있다'는 것과 '아랫사람들이 고생스러운 일도 즐겁게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재능'으로 집약된다"고 강조했다.
시오노는 "부하들의 재능을 탓하는 상사가 있으나 그건 상사의 상상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며
"부하의 능력을 적절하게 파악하고 적재적소에, 무슨 능력이라도 최대한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 리더에게 요구되는 자질"이라고 말했다.
또 "인간은 누구나 뭔가를 해야 할 때는 고생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며
"어차피 고생해야 한다면 즐겁게 하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게 지도자의 덕목"이라고 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추진 중인 '애국심 교육'에 대해서는
"애국심은 밖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내면에서 용솟음쳐야 하는 것"이라며 일침을 가했다.
그는 "애국심 교육은 정치가의 일도 아니고 교육으로 될 일도 아니다"며 "정치가들은 추상적인 얘기를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중간 정도의 승리로 만족하는 이는 항상 승자로 남을 것"이라는 마키아벨리의 말을 인용했다.
"상대방(중국)의 존재를 인정하며 '이기지 않으면서 지지 않는' 방법을 택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시오노 나나미=1937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아와 로마문명을 집중 연구한 전문 작가로 유명하다.
고교 시절 이미 이탈리아에 빠졌고, 대학에서 서양철학을 전공했다.
그 뒤 이탈리아로 건너가 그리스.로마사를 캐면서 활발한 저술활동을 했다.
지난해 '로마인 이야기' 15권을 완간했다.
[luckyman@joongang.co.kr]
2007.06.11 04:18 입력 / 2007.06.11 07:33 수정
첫댓글 꽤 길어요.지루할지도 몰라요...
어,나도 저거 읽었는데 혹은 퍼오고 싶었는데 하시는 분 계신다면 반가워요.
겁나길다요약부탁요
결론은 바로 '케사르'고 '로마사이야기'에요..
잘읽었습니다 연화님..하품나오는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 비한다면 나나미 처럼 로마역사를 재미있게 쓴사람도 없겠지요. 저두 매년 한권씩 나왔던 로마인 이야기를 기다리던 사람중에 하나였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것은 나나미는 '로마'의 매니아이며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 그녀의 모든 시각은 로마의 제국주의적 시각에 맞추어 지지 않았을까 가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이런~~꼬리까지열라기네..ㅋㅋ
내가 11시6분에 등록버턴 눌렀는데 꿈에..님은 11시 22분에 잘읽었다고 댓글을 다셨어요.난 끝까지 읽는데 장장 30분이나 걸렸는데 꿈에님같은경우 그럼 댓글 다는 시간(몇초)를 뺀다치더라도 16분!! 왜 이렇게 빨리 읽는거죠?
사면초가님은 왜 짧게 써요? 안읽은건가요?
(실토)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지는 않았구요. 몇개 찍어서 읽었습니다. 그런거까지 계산을 하셨네요. 그녀의 글을 그래도 좀 접해봐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모든 글을 다읽지않고도 짐작은 할수있지 않을까 합니다. 시간이 날때 다시 정독을 할게요.
아하 그렇군요! 나는 옆에서 누가 그렇다 그러면 바로 수긍하는 편이에요~~팔랑귀~~*^.^*
실토하는 자세..좋아요~*^.^*늦은감은 있지만서도~~~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격차, 일하는 방법, 교육..리더십은 건너뛰고..노인..요정도 읽다가 후다닥 삽질하러 갔지요. 항목에 대해 언급하고 싶었지만 말이 길어질거 같아서요..
다음부턴 건너뛰지 말아줘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저도 날개.님과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허거걱...^^;;....생각보다...내용이 길~~^^;;...<교육에 대해><--관심 가지고 읽꾸....나머진 뜨문이...^^;;....반갑슴다...(꾸뻑~)
저도 반갑습니다~~~*^.^*교육에 대해~그렇죠? 관심이 가죠? (방가방가~)
삭제된 댓글 입니다.
나중에라도 꼭 읽어보시구요~~~*^.^*
다음에도 안읽을거야...모리 아포...^^
안돼.읽어줘~~*^.^*
역시 동서고금을 망라해 풍부한 식견으로 말씀을 주셨군요. 평등하고 다른이를 배려할수있는 사회. 경쟁이 아닌 개성을 살리는 교육. 나만이 잘난 것이 아닌 다름도 인정할 수있는 시각. 가장 필요한 사회 지도층의 책임지는 자세..국민을 희생양삼지 않는정부의 올바른 방침들.
그래서 퍼왔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