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날
이윤경
면도하는 남자의 옆모습은 매력적이다. 예리한 칼날을 움켜잡고 얼굴선을 따라 목줄기까지 훑어 내려가는 손의 움직임은 느리지만 섬세하다. 그 순간 팽팽하게 흐르는 묘한 긴장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얼굴 가득 부드러운 거품을 묻히고 있지만 칼날이 스칠 때마다 모든 세포들이 일제히 긴장하고 있는 듯 느껴진다. 평생 면도를 해볼 일이 없기에 더욱 면도하는 남자의 모습이 멋있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칼날이 스쳐 지난 자리마다 깨끗하고 반듯한 길이 새로 난다. 억센 수염이 밀린 자리마다 푸른빛이 감도는 청량한 길이 보인다. 바람처럼 면도날이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그 길에서는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막 베어놓은 신선한 풀냄새가 난다.
남자의 일과는 면도를 하면서 시작된다. 날마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목을 향해 칼날을 들이대며 세상 속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 자고 나면 어김없이 새로 돋아 매일 잘라내야 하는 수염처럼 남편도 가족의 밥벌이를 위해 매일같이 칼날을 세워야 한다. 면도하는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며 위를 향해 턱을 치켜들면 자연스레 당겨지는 목줄기의 선명한 힘줄은 끊어질듯 팽팽해진다. 튀어나온 둥근 목젖의 떨림을 볼 때 위태롭지만 그때가 진짜 남자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면도를 하지 않고 수염을 기르는 것은 사회의 관습에 대한 반항이거나 특별한 멋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보인다. 콧수염이나 턱수염을 기르는 사람은 뭔가 특별한 직업을 갖고 있거나 자유로운 생각과 일을 가진 예술가들이 많다. 내 남편처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곳으로 가서 일을 해야 하는 월급쟁이들은 수염을 기르고 다닌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수염을 자르는 일은 곧 칼을 벼르는 의식과 같다. 생존을 위해 화살촉을 만들고 돌칼을 갈던 선사시대의 남자들처럼 내 남편도 밥벌이를 위해 아침마다 집을 나서기 전 면도를 한다. 로마 병사들은 전쟁터에서 적의 손에 붙들리는 빌미가 되지 않도록 이발을 하고 면도를 했다고 한다. 삶이라는 치열한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늘도 그는 자기의 얼굴과 목을 향해 칼날을 치켜든다.
나는 가끔 남편의 면도하는 모습을 곁에 서서 지켜보고는 한다. 처음에는 누가 보고 있다는 걸 의식하는지 불편해하더니 요즘은 숙련된 자신의 기술을 자랑까지 한다. 면도기를 든 남편은 평소의 덤덤한 모습과는 달리 무척 섬세하고 예민해 보인다. 피부의 결을 따라 면도기를 밀착시키고 적절한 힘을 가한다. 면도기가 닿는 부위에 따라 얼굴 표정이 달라진다. 입을 둥글게 오므리기도 하고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불어넣기도 한다. 그 표정을 관찰하는 게 재미있다. 나는 욕실 앞에서 수건을 들고 기다렸다가 말끔해진 그의 턱을 쓸어본다. 매끈하게 면도가 되었지만 손끝에서 만져지는 수염의 미세한 느낌이 좋다.
오래전에 잊혔던 기억도 어떤 행위를 통해 한순간 선명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까끌까끌한 감촉에서 오래전의 기억이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흐려진 거울 속으로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비쳤다. 나는 마당의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아 긴 거울을 양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거울을 사이에 두고 나는 뒤편에, 아버지는 거울 앞에 앉아 계셨다. 하얗게 비누거품을 칠한 아버지를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면도기는 내가 만질 수 없는 신기하고 멋진 물건이었다. 면도기 자루를 나사처럼 잡고 돌리면 은색의 뚜껑이 하늘을 향해 서서히 열렸다. 종이에 겹겹이 싸놓은 양날의 도루코 면도날을 끼우고 반대로 돌리면 천천히 맞물리며 닫힌 사이로 예리한 면도날이 반짝거렸다.
세워둔 거울 뒤에서 아버지의 면도가 끝날 때까지 꼼짝도 않고 기다려야 했다. 면도기의 방향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아버지의 표정과 손가락의 작은 움직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바라보는 일이 즐거웠다. 면도기가 움직일 때마다 나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좋았다. 물속에 면도기를 헹구며 탁탁 두드릴 때마다 양은대야에 담긴 햇살이 일그러졌다. 그 빛이 거울에 와서 부딪치면 아버지는 실눈을 뜨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나를 쳐다보았다. 거울의 각도를 바꾸라는 신호였다.
면도를 끝낸 아버지는 내 손에서 거울을 받아 세워두고는 무릎 위에 나를 앉혔다.
“수염이 잘 밀어졌나 어디 한번 볼까?”
파르스름해진 턱을 내 볼에다 사정없이 비벼대셨다. 소리를 지르고 밀치며 빠져나오려는 시늉을 했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하는 그 시간이 내게는 가장 행복한 기억이 되었다.
로션을 바르던 남편이 면도날을 바꿔야겠다고 한다. 무뎌진 칼날은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칼날이 매끄럽게 움직여주지 않으면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게 되고, 한순간 얼굴에 깊은 상처를 낼 수도 있다. 살아가는 일도 어김없이 자라나오는 수염을 잘라내는 것처럼 매일 거울을 보며 나를 다듬고 불필요한 부분들을 잘라내는 일이리라. 오래 써서 무뎌진 칼날을 바꿔 끼우듯, 날이 빠지고 무뎌진 감성과 낡은 사유들도 갈아 끼우고 나서야 남은 날들을 매끈하게 살아낼 것이다.
이제 남편의 키를 훌쩍 넘긴 아들 녀석이 남편의 로션을 슬쩍 찍어 바른다. 요즘 들어 부쩍 멋을 부리는 녀석의 코밑이 제법 거뭇해져 있다. 머지않아 아들 몫의 면도기를 준비해야 할 날이 곧 올 것이다.
칼날을 들고 위태롭게 선 남편과 남자가 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는 아들에게 예전에 아버지에게 그랬듯 거울을 세워두고 그 앞을 지켜 주고 싶다. 그들의 작은 표정 하나 미세한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오래도록 지켜봐 주고 싶다.
무뎌진 칼날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상처 나지 않도록 예리한 새 칼날을 준비해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