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전주시 황강서원, 문학대, 마전고분군 답사 후 !
1. 개 요 : ⑴, ⑵, ⑶, ⑷, ⑸, ⑹, ⑺, ⑻, ⑼, ⑽, ⑾.
⑴. 日 時 : 2011年 05月 14日 09:00~14:00.
⑵. 場 所 : 全羅北道 全州市 孝子洞 3가 黃岡書院, 文學臺, 馬田古墳群.
⑶. 主 催 : 全羅北道 全州市 市民行動21.
⑷. 主 管 : 全州市 市民行動21 文化財 지킴이.
⑸. 目 的 : 우리나라 高貴한 文化遺産을 保全 後孫에게 물려주기 위함.
⑹. 人 員 : 一般人 10名, 高等學生 40名으로 모두 50명.
⑺. 管 理 : 黃岡書院 黃岡 李文挺 後孫.
⑻. 氣 候 : 초여름 날씨.
⑼. 寫 眞 : 添附 하였습니다.
⑽. 作 成 : 文化財廳 및 全州市 文化財지킴이 宋 哲孝(珍國).
⑾. 槪 要 : ⑴, ⑵, ⑶.
⑴. 황강서원(黃岡書院)은 1984년 4월 1일에 全羅北道 文化財資料 제12호로
지정되었으며 원래 全州市 곤지산(坤止山) 아래에 있었으나 朝鮮 先祖 때 壬
辰倭亂으로 燒失되어 그 後 중건되었으나 1869年(高宗 6) 書院撤廢令에 의
해 撤去된 것을 1898年(光武 2)에 지금의 位置로 移轉하여 중건하였습니다.
現在 이곳에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올린 강당과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린 솟을삼문인 외삼문, 祠堂 等의 建物이 있
습니다.
⑵. 黃岡書院의 祠堂에는 黃岡 이문정(李文挺)을 주벽(主壁:祠堂의 으뜸이 되
는 位牌)으로 하여 양후공(良厚公) 이백유(李伯由), 추탄(楸灘) 이경동(李瓊
仝), 竹溪 유인홍(柳仁洪), 졸암(拙庵) 강해우(姜海遇), 寒齋 이목(李穆), 金谷
이덕린(李德鄰 等을 배향하고 있으며 黃岡 李文挺은 高麗 末 恭愍王 때 정당
문학(正堂文學 : 高麗와 朝鮮時代 行政을 總括한 部署))의 벼슬을 지냈고 한
때 王에게 배불정책(排佛政策)을 간하기도 하였습니다. 後에 故鄕으로 돌아
와 文學臺(1984年 4月 1日에 全羅北道 文化財資料 제 24호로 지정함)에서
生活 하시며 後學을 養成하신 곳이 現在의 黃岡書院입니다.
⑶. 黃岡書院은 朝鮮時代의 私立 敎育機關으로 先賢을 모시고 後學을 가르치
는 것이 目的이었으며 書院은 유학의 聖賢들을 모시는 祠堂 또는 사묘의 역
할 향약 等의 향촌의 秩序를 정하고 百姓들을 계도하는 役割로 단순한 敎育
이 아닌 學文의 硏究와 發展機能을 하는 硏究所 役割을했었습니다.
2. 내 용 : ⑴, ⑵, ⑶, ⑷.
⑴. 黃岡書院 入口에는 孝子 旌閭碑閣과 孝婦 旌閭碑閣이 정자나무와 함께
있어서 주민들의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全州市 完山區 孝子洞 3가에 位置하
고 있습니다. 全州市를 둘러싸고 있는 東西南北의 여러 산들과 함께 양지바
른 곳이면 마을이 자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西部 신시가지 개발로 진입 도
로가 정비되고 있는데 서신교를 지나 서쪽으로 곧 바로 가면 세내(三川)를
건너게 되는데 여기서 우측으로 보이는 마을이 마전(馬田)마을이며 黃岡書院
과 文學臺 그리고 馬田古墳群이 있습니다.
⑵. 황방산 아래에 있는 馬田마을은 高麗 忠肅王때 黃岡 이문정(李文挺)이
자리를 잡아 오늘에 이르기까지 7百餘 年을 全州 李 氏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는 集成村으로 文學臺가 있으며 黃岡書院의 고풍스런 운치가 있습니다. 黃
岡書院은 본래 坤止山 아래에 있었으나 丁酉再亂때 燒失되어 그 後 이곳에
다시 建立하였습니다. 졸암(拙庵) 강해우(姜海遇)는 1628년(仁祖 6) 父親 강
종례(姜宗禮)의 2男 中 1男으로 1657年(孝宗 8)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1등 5위로 合格하여 생원시 어머니 病을 고치고자 손가락을 잘
라 피를 먹게 하여 어머니를 살렸으며 상(喪)을 당해서는 너무 슬퍼하여 몸
을 傷하기도 하였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애통(哀慟)해 하며 三年喪을 치
러 지극한 효심(孝心)으로 世上에 이름이 알려져 숙종(肅宗) 때에는 금부도
사(禁府都事)가 되었으며 1730年 英祖 때에는 그의 집에 당(堂)을 건립하고
편액(扁額)을 걸어주어 사람들에게 敎訓으로 삼게 하여 後에 황강사(黃岡祠)
에 제향(祭享)되었습니다. 또한 양후공(良厚公) 이백유(李伯由)는 黃岡의 孫
子로 朝鮮王朝 開國功臣으로 완산군(完山君)에 봉(封)해졌습니다.
⑶. 1865年 高宗 때 興宣大院君은 全國의 書院과 祠宇 1000여 곳을 헐어
버리고 47個所만 남겼으며 書院 소유의 土地들을 거두어 國家에 歸屬시켰습
니다. 黃岡書院의 祠堂에는 黃岡 이문정(李文挺)을 주벽(主壁)(사당의 으뜸이
되는 위패)으로 하여 양후공(良厚公) 이백유(李伯由), 추탄(楸灘) 이경동(李瓊
仝), 竹溪 유인홍(柳仁洪), 졸암(拙庵) 강해우(姜海遇), 寒齋 이목(李穆), 金谷
이덕린(李德鄰) 等을 배향하고 있으며 黃岡書院이 자리한 稜線에는 馬田古墳
群이 있습니다. 全州市 孝子洞 일대에 西部 新市街地를 造成하는 과정에서
發掘된 馬田古墳群은 5世紀 중반 것으로 推定되고 發掘過程에서 石槨, 토광,
甕棺 等 多樣한 形態의 묘제가 確認됐으며 옥류 1천여 점과 호형 병형 토기
等 토기류, 환두대도, 철부 等 철기류 等이 多量 出土되었습니다.
⑷. 特히 馬田古墳群 中에서 保存狀態가 좋은 3호분의 경우 當時 地方에서
有力한 勢力이 사용하던 양식으로 竪穴式 石槨墓와 中央 권력 세력이 사용
하던 橫穴式 石室墳이 順次的으로 나타나 묘제의 변화상을 통해 당시 百濟
의 地方 勢力이 中央 勢力에 同和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3. 결 론 : ⑴, ⑵, ⑶.
⑴. 高麗 後期의 文臣으로 黃岡書院에 제향 된 黃岡 이문정(李文挺)의 後孫
이며 朝鮮의 開國功臣 이백유(李伯由)의 孫子인 이경동(李瓊仝)은 우승지 벼
슬을 지낼 때 王妃 尹 氏의 廢妃를 反對하다가 投獄되기도 하였습니다. 成宗
조에서 大司憲 및 예조참판, 병조참판, 동지중추부사, 동지경연사 等의 벼슬
을 역임한 李瓊仝이 낙향한 後 추천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末年을 悠悠自適
하며 보낸 곳이 바로 全州 地方文化財 제 8호(1984.04.01 지정)인 楸川臺
(朝鮮 成宗 때 대사헌(大司憲)과 예조참판(禮曹參判), 동지의금부도사(同知義
禁府都事를 歷任함)라 하는 편액을 걸었으며 상량(上樑에 세 기해 2월 11일
입주상량(歲 己亥二月 十一日 立柱上樑)이라 하여 이는 光武 3年(1899年)에
建立되었고 1947年에는 李瓊仝의 後孫들이 그 자리에 亭子를 세웠습니다.
⑵. 李文挺은 高麗 末 恭愍王 때 正堂文學(高麗와 朝鮮時代 行政을 總括한
部署)의 벼슬을 지냈고 한때 王에게 배불정책(排佛政策)을 간 하기도 하였습
니다. 後에 故鄕으로 돌아와 文學臺(1984년 4월 1일에 全羅北道 文化財資料
제 24호로 지정함)에서 生活하시며 後學을 養成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유허
지가 現在의 黃岡書院입니다.
⑶. 全州市 근린공원(近隣公園)을 新市街地 開發 時 發掘된 遺物인 三國時
代 古墳 5기 等을 移轉하여 文化遺産 展示場과 觀覽施設을 갖추어 遺蹟 公
園으로 꾸며 상수리 군락지-황방산-黃岡書院-文學臺 等 인근 볼거리와 連繫
하여 市民들의 歷史 敎育 場所로 活用될 計劃입니다.
4. 感謝 합니다 ! 2011年 05月 15日 01:00. 文化財 지킴이 宋 哲 孝(珍國).
Z.사진1.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