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거래
□ 본문 : 창세기 25장 27-34절
※ 역사상 가장 미련한 거래가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55년 전, 1867년 러시아는 단돈 720만 달러에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았습니다. 1㏊당 5센트 가격이었습니다. 당시 알래스카는 크림 전쟁으로 재정난에 허덕이는 중이었고, 영국이 알래스카를 넘볼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미국에 팔았는데, 이것이 ‘역사상 가장 미련한 거래’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미국인들조차도 쓸모없는 땅을 샀다며 이 거래에 대해 비난했으나, 수십 년 후 사정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정확히 30년 후인 1897년, 유콘강 기슭에서 금광이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1950년 무렵에는 푸르도만에서 대형 유전이 발견되었고, 이로 인하여 미국은 세계 3위의 석유매장량 국가가 되었습니다. 물론 러시아는 돌이킬 수 없는 역사상 가장 미련한 거래로 인하여 땅을 치며 후회했습니다. 알래스카에는 석유뿐 아니라 석탄과 천연가스와 구리 등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관광지로도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미련한 거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판 이야기입니다. 팥죽은 중동지방에서 흔한 적갈색 콩에 밀과 보리 같은 곡류와 양파, 그리고 감람유 등을 섞어 끊인 음식입니다.
장자의 명분은 가정을 통솔하는 권리입니다. 장자의 명분을 가진 아들은 아버지가 죽으면 아버지의 권위를 물려받습니다. 그리고 유산도 다른 형제들보다 두 배를 더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까지 계승받았습니다. 한마디로 장자의 명분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위임장이었습니다. 그러니 팥죽 한 그릇과 장자의 명분은 비교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팥죽 한 그릇을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팔았습니다.
에서의 성격을 이용해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산 야곱도 문제입니다. 이런 야곱에 대해서 창세기 27장에서 자세히 나누도록 하고, 오늘은 팥죽 한 그릇을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6절 말씀입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성경은 이런 에서를 한 마디로 ‘망령된 자’라고 표현합니다. 망령된 자는 ‘불경건한 사람’ ‘신앙심이 없는 사람’ ‘사악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망령된 자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 ‘무신론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새번역성경에서는 망령된 자를 ‘속된 사람’이라고 표현했고, 쉬운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성경이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고 말씀하는 이유는, 우리도 얼마든지 에서와 같은 망령된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럴까 싶습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이렇게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예배만입니까?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향해 왜 성경은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오늘은 에서를 통해 망령된 자의 모습 두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파는 에서와 달라.’ 맞습니다. 우리 중에 에서와 같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에서와 같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서처럼 망령된 자는 아니어도 적어도 에서끼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리면 좋겠습니다.
32절 말씀입니다.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1. 망령된 자는 영의 것보다 육의 것이 먼저입니다.
망령된 자는 영의 것보다 육의 것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것이 영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 은혜, 축복, 사랑, 평안, 기쁨, 사명 등이 영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관계없는 모든 것은 육의 것입니다. 영원한 것이 영의 것입니다. 반면 잠시 있다 사라져버릴 것은 모두가 육의 것입니다.
성경은 육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육을 더럽고 추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혼과 육신이 분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영혼뿐 아니라 몸도 거룩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몸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6:19)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언제든지 죄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몸을 위해서는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새 먹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버립니다. 사람들이 종종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다 먹자고 하는 일인데.’ 아닙니다. 먹자고 하는 일 아닙니다. 먹는 것이 중요하지만 먹는 것이 우리가 사는 목적은 아닙니다. 먹는 것이 목적인 사람은 좋은 것을 먹어야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것, 다른 사람이 못 먹어본 것을 먹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것을 먹으면 인스타그램에 올려서 자랑하기도 합니다.
요즘 유튜브의 먹방이 유행입니다. 그것이 좋다 나쁘다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한 가지 염려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급식재료를 사용해서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 특별한 것을 먹는 것이 인생의 목적인 것처럼 비쳐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좋은 것을 먹기 위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먹어보지 못한 것을 먹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마치 인생의 행복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맛있는 것 드십시오. 몸에 좋은 것 드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몸이니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살기 위해서 먹지, 먹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삽니다. 먹는 것이 하나님보다 먼저이면 안 됩니다. 먹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사명을 뒤로 하면 안 됩니다. 먹는 것 때문에 영적인 것을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제가 먹는 것을 예로 든 것은 에서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7절을 보면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능숙한 사냥꾼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늘 사냥에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빈손으로 돌아온 에서는 너무 배가 고팠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내가 죽게 되었으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팔 수 있습니까? 지금 안 먹으면 죽습니까? 아닙니다.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한 시간, 아니 단 몇 십 분을 참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에서는 철저하게 육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영의 것보다 육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에서를 보면서,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어떻게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우리 중에 에서와 같이 실재로 팥죽 한 그릇과 장자의 명분을 바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정말 에서와 같은 모습이 없습니까?
만약 팥죽 한 그릇이 아니라 1억 엔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억 엔을 줄 테니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분명 흔들릴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10억 엔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장자의 명분을 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팥죽 한 그릇과 10억 엔은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파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것이지만, 10억 엔에 장자의 명분을 파는 것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십니까? 결국 팥죽 한 그릇이나 10억 엔이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똑같다는 것을 말입니다. 팥죽 한 그릇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파는 것이나, 10억 엔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파는 것이나 결과는 똑같다는 것을 말입니다. 둘 다 망령된 사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팥죽은 육의 것을 대표하고 장자의 명분은 영의 것을 대표합니다. 육적인 것을 위해 영적인 것을 판다면 그 사람이 바로 에서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팥죽 한 그릇과 비교할 수 없이 대단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파는 영적인 것이 장자의 명분과 비교할 수 없이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육신의 것을 얻기 위해 영적인 것을 포기한다면 결국은 그 사람이 에서입니다. 에서의 이야기는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일상생활 속에서 에서처럼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 아는 목사님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야기하셨습니다. 늘 주일성수 하시던 집사님이 주일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 아프셔서 못 오셨나 걱정이 되어서 예배 후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전화상으로 들려오는 집사님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많이 아프신가 해서 전화 드렸는데 말입니다. 꽃가게를 하시는 분이셨는데 알고 보니 주일에 몇 만 엔짜리 예약이 들어와서 오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그래도 믿음이 좋다고 생각했던 집사님이셨는데, 몇 만엔 때문에 주일을 타협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몇 만 엔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육적인 것이 필요 없다는 말씀은 더더욱 아닙니다. 육신을 가지고 있기에 먹고 마시고 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하나님의 나라보다, 사명보다, 예배보다 먼저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먼저 구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것 때문에, 몇 만엔 때문에, 사람 때문에, 어떻게 주일을 타협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팥죽 한 그릇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파는 것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육신의 편안함과 즐거움을 위해,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 영적인 것을 소홀히 하고 뒤로 미루는 것을 절대로 작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우리도 모르게 우리를 에서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빼앗기 위해 에서가 사냥에서 빈손으로 돌아오는 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을까요? 글쎄요. 야곱의 성격을 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야곱은 이런 말도 되지 않는 거래를 제시할 수 있을 정도로 에서가 육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에게나 이런 거래를 제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에서에게는 이런 말도 되지 않는 거래를 제시할 수가 있었습니다. 왜요? 평소에 에서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것에는 하나님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고, 오직 육적인 것을 위해서만 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영적인 것을 위해 육적인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주일예배를 위해 몇 십만엔, 아니 몇 만엔 포기하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손가락질 합니다. 광신자라고 배가 불러서 그런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만 그럴까요? 함께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렇게 고지식하게 예수님을 믿으면 어떻게 세상을 사느냐고 충고 아닌 충고를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팥죽 한 그릇을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파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말입니다. 마음이 아프지만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영적인 것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육적으로 귀한 것을 포기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세상의 성공과 명예를 포기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다가 오랜 전에 보았던 영화 한편이 생각났습니다.
※ ‘불의전차’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제가 제자훈련을 받을 때 생활숙제로 보았던 영화입니다. 1981년에 제작된 이 영화는 1924년 파리올림픽에 출전한 영국의 두 선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달리는 독실한 스코틀랜드 그리스도인 에릭 리들과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달리는 유대계 영국인 해롤드 아브라함의 실제 이야기를 기반으로 했습니다. 뛰어난 작품성과 영상미로 인하여 작품상을 비롯하여 아카데미 4개 부문을 수상한 영화입니다.
부모님이 중국 선교사였던 에릭 리들은 영국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합니다. 100m 금메달 후보였습니다. 그런데 100m 경주의 예선전이 주일에 열리게 되자 ‘저는 주일에는 뛰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경기를 포기합니다. 에릭 리들의 말은 영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각 신문에서는 ‘옹졸한 신앙인’ ‘배신자’라고 비난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국가의 영광을 위해 하루만 양보하면 안 되느냐고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
결국 에릭 리들 대신 해롤드 아브라함이 100m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따내고, 에릭은 다른 종목에서 메달을 딴 친구의 양보로 자신의 주 종목이 아닌 400m경주에서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결과적으로 영국은 100m와 400m에서 금메달을 자치하게 됩니다.
이 영화가 감동적인 것인 실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나의 일이라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요? 금메달을 포기하고, 세상의 무서운 비난도 감수하면서 ‘저는 주일에는 뛰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 생각에는 팥죽 한 그릇과 금메달은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습니다. 금메달도 팥죽 한 그릇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한 것도 팥죽 한 그릇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세상 그 어떤 것도 팥죽 한 그릇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영원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은 영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영적인 것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육적인 것이 먼저입니까?
2. 망령된 자는 장래의 영광을 위한 현재의 고난을 인내하지 못합니다.
망령된 자는 장래의 영광을 위한 현재의 고난을 인내하지 못합니다. 아버지 이삭이 죽은 후에 얻는 것이 장자의 명분입니다. 장자의 명분은 장래의 것입니다. 그 날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그 날은 반드시 옵니다. 그러나 장자의 명분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지금 잘 먹고 잘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장자의 명분이 지금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에서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이지 미래가 아닙니다. 지금 배고파 죽겠는데 장래의 축복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지금 힘든데 장래의 영광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팥죽 한 그릇을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팔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망령된 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장래의 영광을 위해 현재의 고난도 기꺼이 감당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히브리서 12장2절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암송까지 합니다. 그런데 앞의 구절만 알고 있지 뒤의 구절은 잘 모릅니다. 뒤의 구절까지 암송하는 분도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씀의 강조점은 앞의 구절이 아니라 뒤의 구절에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겪고 있는 현재의 고난을 이기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쓴 편지입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로마의 핍박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로마의 핍박보다 더 고통스러운 핍박이 있었습니다. 바로 유대인들에 의한 핍박이었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유대인공동체에서 출교를 당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에게 배신자, 이단자로서 온갖 조롱과 멸시와 위협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핍박을 견디지 못해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안과 밖으로 핍박을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그 앞에 있는 기쁨’ 즉 부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기쁨,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십자가를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신 예수님처럼, 현재의 고난을 이겨내자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잠시 받는 고난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통해 장차 받을 영광은 영원합니다. 현재의 고난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장차 받을 영광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7)
그래서 진짜 계산을 잘하는 사람이 신앙생활도 잘합니다. 잠시 사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받으면, 영원히 사는 천국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립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과, 그 고난 때문에 천국에서 누리게 될 영광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3절, 24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많은 열매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하여 구원받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한 분의 죽음으로 인하여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쁨을 바라보시고, 예수님은 이 영광을 바라보시고 기꺼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이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계산 잘 하며 삽시다. 이것을 계산할 줄 모르면 에서와 같이 망령된 사람이 됩니다.
성경을 쉽게 번역한 ‘메시지’는 히브리서 12장16절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에서 증후군을 조심하십시오. 잠깐 동안의 욕구 충족을 위해, 평생 지속되는 하나님의 선물을 팔아넘기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영적인 것보다 육적인 것을 먼저 구하는 에서 증후군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에서 증후군이 고개를 들 때, 우리 안에서 에서끼가 발동할 때, 육신의 것은 팥죽 한 그릇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이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버릴 팥죽 한 그릇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영적인 것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영적은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영원하다는 것을 기억하십니다. 세상은 돈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금메달이 더 중요하다가 말합니다. 에릭 리들처럼 금메달이 아니라 주일을 선택하면, 세상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선택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
그때 우리는 담대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예, 중요합니다. 금메달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세상 명예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세상 나라보다 하나님 나라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면 에서 증후군 때문에 망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이 중요한 우리에게는 장래의 영광을 위한 현재의 고난을 피하고 싶은 에서 증후군이 있습니다. 영광은 원하면서도 영광을 위해 지불해야할 희생을 외면하고 싶은 에서끼가 발동할 때, 영적인 계산기를 짚어들어야 합니다. 현재의 배고픔을 피하기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팔 것인지, 아니면 현재의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고 장자의 명분을 지킬 것인지, 둘 중의 어느 것이 복인지를 계산해야 합니다. 팥죽도 먹고 장자의 명분도 지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하나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 영화 ‘불의전차’의 주인공 에릭 리들은 금메달리스트의 영광을 뒤로하고 24세의 젊은 나이로 중국 선교사로 갑니다. 그리고 1945년 2월 21일, 44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에릭 리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영원한 영광 가운데 있는 에릭 리들은 오히려 에서처럼 팥죽 한 그릇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팔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을 안타까워할 것입니다.
3월 2일부터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주일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주일을 뺀 40일을 말합니다. 사순절기간에 성도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성도의 신분에 합당한 거룩한 삶을 위해 회개하며, 부활의 축제를 준비합니다.
이번 사순절기간에 영의 것보다 육의 것을 먼저 구했던 것을 회개합시다. 이번 사순절기간에 예수님을 위해 받는 고난을 외면하고 살았던 것을 회개합니다. 이번 사순절기간에 팥죽 한 그릇을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팔았던 미련한 거래를 회개합니다. 오직 예수님께만 집중하는, 그래서 오직 예수로만 충만해지는 은혜의 사순절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