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의 회화
손미
한 번씩 스푼을 저으면
내 피가 돌고
그런 날, 안 보이는 테두리가 된다
토요일마다 투명한 동물로
씻어 엎으면
달의 이빨이 발등에 쏟아지고
난간을 따라 걷자
깊은 곳에서
녹색 방울이 튀어 오른다
살을 파고
모양을 그리면서
백지위 젖은 발자국은
문고리가 된다
다른 몸으로 나갈 수 있겠다
(손진은 시인)
평소에 엎어진 채로 놓여 있는 컵의 내면은 어떤가요? 텅 비어 있어 무엇이든 담기죠. 차를 마실 때 우리는 컵의 내면을 스푼으로 휘젓습니다. 그때 예민한 사람은 차와 함께 내 피가 도는 걸 느낍니다. 토요일마다 투명한 동물이 된 컵을 씻어 엎으면 (하, 놀랍게도) 달의 이빨이 발등(컵의 밑자리)에 쏟아진다네요. 엎어놓은 컵 거기 맺힌 녹색 물방울이 튀어 살을 파듯 모양을 그리면서 또르르 굴러내립니다. (마음의) 백지 위 젖은 발자국, 컵의 손잡이라는 문고리를 잡고 우리는 다른 몸(존재자)으로 넘어갈 수 있겠네요. 이 시는 사물(컵)이 안과 밖을 생기있게 잡아내며, 사물(컵)과 나(의 마음), 그리고 우주(달의 이빨)가 부딪히는 접면을 잘 잡아냈다고 생각합니다. 32회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시집 ‘양파공동체’의 첫시(서시)입니다.
* 문고리 - 사물(컵)의 안과 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