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가을야구/ 이장희
거실에 들어서자 야구중계를 본다. 내가 좋아하는 팀이 이기고 있다. 도심에서 농촌을 오가며 농사짓는 내겐 야구 관전이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일할 때 못 먹은 술 한 잔도 걸치면 훨씬 가뿐해진다.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가져온 과채 다듬기는 잠깐 미룬다. 땀 흘려 일한 뒤 맛보는 위로주慰勞酒는 가을야구에 흠뻑 빠지게 한다.
내겐 밭일이 가을야구다. 아내와 일정은 달라도 밭일이 무조건 1순위이다. 비바람 불고 가물 땐 더욱 그렇다. 농사는 한 해 동안 씨 뿌려 가꿔 결실을 맺는다. 가을야구도 긴 정규시즌을 치른 다음, 상위 팀끼리 짧고 치열한 포스트시즌에 진검승부를 겨룬다. 우리 밭일과 가을야구의 같거나 다른 점이 문득 스쳐간다.
야구로 치면 우리는 감독, 선수 합쳐 둘뿐이다. 투수력, 공격수비력이 약해도 기적을 일궈내기도 하니 분명 도깨비 팀이다. 농사에 숙맥인 나는 아내의 훈수로 초보는 면한 늦깎이다. 인간만사 예측이 힘든 변수가 있음도 느지막이 알았다.
농사가 하늘, 땅과 물에 달렸다면, 가을야구는 선수 컨디션과 경기 흐름에 따라 끝날 때까지 승부를 알 수 없다. 아내와 둘뿐이니 손발 맞추기는 쉽다. 야구는 팀워크가 승패를 결정지으니 더 힘들 테고 순발력과 끈기도 두세 배는 더 요구될 터이다.
밭일과 가을야구는 준비의 여정이 닮았다. 기계치인 나는 농기계 없이 오롯이 호미 같은 전통 농기구에 매달린다. 더디고 고단해도 해마다 땅을 읽고 보살펴 심고 가꾸느라 요령과 내면의 힘이 길러진 듯하다. 마치 야구팀이 봄여름 쉼 없이 경기를 치러 가을 결실을 꿈꾸듯, 흙에서 움트는 생명을 반려삼아 가장으로서의 외조를 다하려 한다.
가을야구는 팀마다 어떻게 준비할까? 상대방 전력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전략, 선수들의 기복 없는 기량이 큰 영향을 미치리라. 우리 텃밭의 시작은 주택의 마당에서였다. 이태 전, 좁은 오피스텔로 옮기면서 확 달라졌다. 일손과 농기구가 별거하니 천리안의 예지로 내다보고 준비할 수밖에.
농사와 가을야구는 경쟁의 성격에서도 사뭇 다르다. 농사는 자신과의 싸움이란 생각은 오래되었다. 남의 성공이 곧 나의 실패를 뜻하진 않는다. 농부는 체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하여 매일 근육 량을 늘리고 근력, 근육 기능을 높이는 아침운동을 한다. 가을야구는 어떤가. 명백히 상대와의 경쟁이다. 승패가 걸린 싸움에 성공을 서로 나눠 가질 수는 없지 않은가.
결과의 시간에 관해서도 곰곰 생각해 본다. 가을야구는 주어진 시간에 순간적 플레이로 판가름 난다. 또 많은 관중과 팬을 긴장시키며 열렬한 환호와 응원 속에 진행된다. 반면에 농사는 결실이 느리다. 외부 관중 없이 조용하고 천천히 다가오질 않는가. 우등생, 열등생이 있듯 작물의 성장이 고르지 않아 잔뜩 신경 쓰인다.
삼백 평 남짓한 밭을 일구며 땀 흘려보니 지구를 살린다는 자부심이 솟아난다. 내 손으로 일군 타향의 밭이 마치 내 인생의 새로운 시즌을 여는 야구장 같다. 진작부터 출퇴근 때에만 운전을 했었는데 밭은 언제나 멀었다. 편도 삼십 분에 뭔가 실어 나르려니 차로 움직인다. 햇빛이 눈부시거나 신호등을 지날 때는 불빛 아래 경기하는 수비선수와 한마음이 된다.
두 세계의 차이는 환경에서도 드러난다. 가을야구가 관중과 동료로 가득 메운 경기장에서 함께 열광하는 스포츠라면 우리 밭일은 다르다. 이웃도, 일하는 농군도 거의 없는 고적한 공간이다. 씨앗과 모종, 비료포대 같은 숙제를 차에 싣고 밭에 이르면, 나는 나만의 무대에 들어서는 주인공이 된다. 흙냄새와 바람소리, 땀방울이 관중이자 동료의 전부이다.
가을은 풍요와 결실의 계절이다. 들깨를 베고 나니 흰콩과 서리태가 앞 다퉈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여러 날 콩을 수확해보니 몸이 지쳐도 마음은 한결 개운하다. 밭에서의 삶과 가을야구의 묘한 닮은꼴을 떠올리곤 한다. 가끔 야구장과 밭의 정경이 겹쳐올 때가 있다. 가을야구가 끝나면 관중들이 떠나고, 길고 짧은 밭고랑엔 작물이 하나둘 사라져가는….
가을야구의 승리는 치열한 경쟁 끝에 얻는 값진 순간이다. 밭에서는 승패의 기준이 다르다. 고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작황이 시원찮을 때, 이 또한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지난봄 당근에 이어 고추와 완두콩이 흉작이었으니 다음번의 밑거름이 되리라 믿는다. 작은 수확에도 감사하며 보람으로 여긴다. 승리의 환희가 아닌, 자연과 함께하는 소박한 행복이다.
밭농사와 가을야구는 결국 하나의 공통된 메시지를 안겨준다. 준비와 인내,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열정이 삶을 이끌고 살찌운다고. 야구팀은 공과 배트를 매개로 승리를 그려내고, 내가 일군 밭에는 푸성귀가 자라고 곡식이 여문다. 우리 모두 자신만의 밭에서 결실을 기다리는 농부가 아닐까.
해가 짧아진 늦가을, 가을야구는 끝났는데 우리 밭일은 플레이오프를 거쳐 한국시리즈의 막판인 듯 설렌다. 해콩으로 메주 쑨 것이 엊그제다. 짚을 구해 시렁 없는 좁은 베란다에 가느다란 앵글을 받쳐 말리면서 김장이라는 결승전이 남았음을 되새긴다. 무 배추와 고춧가루, 마늘 같은 양념은 우리가 키운 선수들이다.
철없는 잡초들이 암팡지게 고개 들 때, 흙먼지 속 신발엔 티끌들이 쌓이고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나는 가을야구의 한 장면 속에 있는 듯 일이 끝나지 않았다. 집에 와서도 곡물과 과채의 선별과 정리에 손길이 분주하다. 흙과 씨앗이 준 농작물로 푸짐한 이 작은 구장에서 나는 내 삶의 경기를 이어가고 싶다. 이것이 내일을 향한 가장 큰 보람이다.(13.5매)
출처: 공무원연금문학회 연간지, 좋은 인연 제20집, 공무원연금문학회 펴냄, 2025. 01, 북랜드.
첫댓글 참으로 재주 없는 녀석이 힘들게 한 점 뽑아냈습니다. 연습생 출신 야구선수인가 봅니다.
이글을 쓰면서 '순산녀, 난산남'이라는 또 다른 글감이 떠올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