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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5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오 21,33-43.45-46
불안증, 상실감이나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법
오늘 복음은 ‘못된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소작인들이 포도밭을 자기들의 것으로 삼기 위해 주인의 외아들을 죽이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하느님 아버지이시고 그 아드님이 유일한 상속자이십니다.
그러니 소작인들은 그 포도밭에서 일하여 자신의 것을 취하고 주인에게 도지만 조금 바치면 됩니다.
하지만 도지를 바치기 싫어 주인의 아들까지 살해합니다.
그런다고 포도밭이 자기 것이 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우리도 자칫 이 세상의 것들을 ‘나의 것’으로 여기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불안과 상실감, 우울증을 크게 겪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감정을 앓는 모든 이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부분 그런 감정은 주인이 아닌데 주인 행세를 하려다 보니 겪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불안감, 상실감, 우울감 등은 자신이 그것들의 주인이라 믿지 않으면 좀처럼 나오기 어려운 감정입니다.
나의 것이기에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불안을 느끼고 또 결국 잃고 나면 나의 것이었는데 잃었으니 상실감과 우울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 ‘그녀의 조각들’(2021)은 출산 중 아기를 잃은 아픔을 극복하려는 부부의 각자 다른 모습을 그려줍니다.
이 영화는 코르넬 문드럭초 감독과 그 아내가 겪었던 실화를 소재로 삼았습니다.
병원에서 아이를 출산하지 않고 가정분만을 고집하는 ‘마사’는 결국 출산일이 다가왔고 남편 ‘숀’은 급하게
조산사에게 연락해 보지만 마사를 담당하던 조산사는 다른 산모를 돌보고 있었기 때문에 ‘에바’라는 낯선 조산사가 마사의 출산을 돕게 됩니다.
에바의 능숙한 처치 끝에 아이는 무사히 세상 밖으로 나왔지만 이내 숨을 쉬지 못하고 위태로운 상황에 부닥칩니다.
에바는 아이에게 인공호흡을 하며 응급처치를 함과 동시에 남편 숀에게 구급차를 부르라고 지시하지만
이미 숨이 꺼져버린 아이는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한 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합니다.
아이의 사망 이후 마사와 숀은 아이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를 각기 다른 방법으로 극복하려 합니다.
숀은 아이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외부에서 찾기 시작했고 가장 탓하기 좋은 요인은 조산사인 에바였습니다.
숀은 아이의 죽음에 대한 책임으로 에바에 대한 법정 소송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마사는 그러기를 원치 않습니다.
애초부터 자연분만하자고 한 것은 자신이었고, 그래서 아이의 죽음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이 상실감을 잊기 위해 그녀는 일상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아이의 죽음에 너무도 무심한 것 같은 모습에 숀은 화를 냅니다.
숀은 그러는 중에 변호사와 불륜에 빠지고, 마사도 그런 남편이 싫어 클럽을 전전하다 비슷한 상황으로 갑니다.
둘은 그렇게 끝납니다.
이 영화에서 아기의 죽음에 대한 상실감을 두 부부는 남의 탓을 하거나 쾌락적인 삶으로 극복하려 했습니다.
결과는 좋던 부부관계의 종식이었습니다.
도대체 상실감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그 원인을 외부에서 찾아 남의 탓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자신 안에서 정신없는 삶으로 잊어야 할까요?
근본적인 것부터 해결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왜 상실감이 일어나는가?’
신앙인이었다면 결국 ‘주님의 것을 주님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주님을 찬미할지어다.’라고 하며
극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인이 아닌 이상 아이는 분명 나의 것이었고 그 아이를 잃은 책임을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전가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 탓을 자신에게 돌리든, 남에게 돌리든 정상적인 삶으로는 돌아올 수 없습니다.
무언가 잃을 것 같은 불안함이나 상실에서 오는 슬픔 등은 내가 그것을 가질 자격이 애초부터 없었음을 깨달으면 됩니다.
피조물은 피조물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종이 주인의 것을 소유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더 쉽게 말하면 자녀가 부모의 것을 소유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자녀는 자신이 자녀임을 알기에 자신의 것을 잃는다고 상실감에 빠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모를 걱정합니다.
저도 아버지가 세발자전거를 사 주셨을 때 매우 기뻤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그것을 타고 놀다가 손잡이 달린 자전거 머리를 부러뜨린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때 자전거를 잃은 슬픔은 없었습니다. 그것을 받았을 때 잃을까 봐 두려워하지도 않았었습니다.
다만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가 마음 아파하실까 봐 걱정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나에게 준 자전거이지만 자녀는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못합니다.
받았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것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또 전자시계를 선물해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깡패를 만나서 시계를 빼앗겼습니다.
아버지가 주신 것이라 그것은 안 된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상하게 그것을 빼앗긴 것보다 아버지가 아파하실까 봐 더 걱정하였습니다.
물론 부모님은 아무 말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빼앗기기 전까지는 그것을 잃을 두려움은 갖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잃었을 때는 그것을 잃은 상실감보다는 내가 그것을 잃어서 그것 때문에 마음 아파할 부모의 마음에 더 신경이 쓰였습니다.
이렇듯 부모를 둔 자녀는 모든 것이 부모의 것이기에 불안함이나 상실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느님을 부모로 인정하지 못하면 항상 불안하고 또 잃으면 그것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에서 벗어나는 일은 하느님을 주님, 혹은 아버지로 인정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자녀들에게 세상 살아가면서 불안이나 상실감, 우울감을 겪지 않게 하고 싶다면 자녀에게 참 주님, 참 부모가 누구인지 알려주어야 합니다.
사춘기가 지나 성인이 되면 자기 것은 자기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면 고통의 삶이 시작됩니다.
무언가 잃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참 창조자, 참 주님, 참 부모를 믿고 고백하게 해야 합니다.
그 방법이 ‘봉헌’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어머니 생신에 맞추어 그동안 모은 적은 돈으로 형들과 함께 어머니에게 작은 덧버선을 선물한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그 덕분으로 불안함과 상실감을 겪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포도밭 소작인들은 마치 에덴의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기 싫어서 도지를 바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성당에서 내는 교무금과 봉헌금은 바로 주님이 나의 주인님이시고 나의 아버지이심을 인정하는 전례와도 같은 행위입니다.
되도록 우리 자신도 십 분의 일을 봉헌하며 내가 어떤 처지인지 알고, 우리 자녀들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불안함과 상실감, 우울함을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5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창세기 37,3-4.12-13ㄷ.17ㄹ-28
마태오 21,33-43.45-46
우리는 잠시 하느님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입니다!
소작(小作)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지주로부터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수확의 일정량을 바치며 생계를 이어가는 형태의 농사입니다.
일년내내 죽을 고생만 하고 손에 쥐는 것은 쥐꼬리만큼인 소작농들의 애환은 오랜 역사 소설의 주된 테마였습니다.
돈보스코를 연구하다보니 그분의 부모님 역시 소작농이었습니다.
구호대상인 극빈자 계급은 아니었지만, 아버지 프란치스코 보스코와 맘마 마르가리타는 남의 땅을 빌려 하루 온종일 뙤약볕에서 죽기살기로 일만 하던 소작농이었습니다.
부양해야 할 식구는 많은데, 농업이 기계화가 되기 훨씬 전이지, 돈보스코의 부모님들은 그야말로 하루 온종일 뼈빠지게 일만 하셨습니다.
돈보스코께서 유명인사가 된 이후, 알베르 뒤 보이라는 전기 작가가 근사하게 돈보스코 전기를 집필했었는데,
최종적으로 돈보스코에게 검열을 부탁했습니다. 돈보스코가 제일 먼저 수정한 대목이 있습니다.
“돈보스코의 가족은 꽤 넉넉한 농부였다.”라는 구절을 확인한 돈보스코는 빨간 펜으로 찍찍 긋고, 이렇게 고쳤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농부였다.”
그만큼 소작농들의 삶은 고달팠고 힘겨웠습니다. 사실 소작인들 입장에서 지주들이 땅을 빌려준 것,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소작인들 가운데서 악한 소작인들이 있습니다.
대풍년, 다시 말해서 엄청난 소출을 거두었으면서도, 주인에게는 올해 농사가 흉년이라며 쥐꼬리만큼의 소출만을 보내는 악덕 소작인도 있습니다.
빨리 소출을 보내주라고 몇 번을 이야기해도, 알았다 해놓고는, 죽어도 안 보내는 진상 소작인도 있습니다.
더 지독한 소작인이 있습니다.
도저히 기다릴 수 없어서 지주는 자신의 종을 보내기도 하고, 나중에는 아들까지 소출을 받아오라고 보냈습니다.
그런데 악한 소작인들은 그 아들마저 매질하고 죽인 후 포도밭 밖으로 던져버린 것입니다.
그 악한 소작인들은 바로 유다인들이요, 동시에 우리들이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 모두 소작인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단 한번뿐인 인생을 잘 좀 가꾸어보라고, 풍성한 결실을 거두어 보라고 임대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임대 기간이 결코 영속적이지 않고, 길어야 90년 100년입니다.
악한 소작인들처럼 분수 넘치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주인 행세를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언제나 나는 잠시 하느님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라는 사실을 잊지 알아야겠습니다.
종이면서 주인인 양 큰 소리 뻥뻥 치고 행세하다가 큰코 다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악한 소작농처럼 처신하다가는 하느님의 강력한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늘 겸손하게, 늘 신중하게, 늘 종이나 소작농의 마음으로 그렇게 하루 하루 살아갈 일입니다.
나를 내 삶의 주인이요 주인공으로 여기고, 가슴을 딱 펴고 당당하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태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3월5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 21,33-43.45-46 : 저 자는 상속자다. 자, 저 자를 죽이자!
오늘 복음의 밭 임자는 포도밭을 일구고 울타리를 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소작인들이 했어야 할 일들을 직접 하였다. 소작인들은 그렇게 많은 일을 해야 했던 것이 아니다. 주어진 것을 잘 지키기만 했어도 되었다. 모든 것이 다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왔을 때, 율법을 주셨고 도시를 세워주셨으며 성전을 마련해 주셨고 제단을 준비해 주셨다.그러고는 “멀리 떠나셨다.”(33절) 하느님께서는 끈기 있게 그들을 기다려 주셨다.
밭 임자는 “소출을 받아 오라고”(34절) 자기 종들, 즉 예언자들을 보냈다. 소출은 행실로 드러나는 복종심을 뜻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토록 세심한 보살핌을 받고 나서도 게으름을 피워 소출을 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을 찾아온 종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밭 임자에게 용서를 청해야 했지만 그들은 성을 내고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기까지 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의 회개를 위해 계속 종들을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인은 아들을 보낸다.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37절) 이 말은 글자 그대로 소작인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주님은 소작인들이 아들을 죽일 줄 알고 있었다. 소작인들은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듣든, 또는 듣지 않든”(에제 2,5)이라며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다. 그들이 당신의 종들에게는 완고하게 굴었을지라도 아들의 존귀함에는 경의를 표했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소작인들은 어떻게 했는가? 자기들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청할 시간이 있었지만, 예전에 저지른 죄보다 더 큰 죄를 짓는다.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하고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38-39절)고 한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소리치며, 주님을 도성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기도 하였다. 그들은 율법이라는 상속재산을 차지하지 못하였고 스스로에게 죽음을 선고하고 말았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40절)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41절)고 대답한다.그 대답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였다. 주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으로 이것을 암시하셨다.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동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42-43절)
그리스도께서 ‘돌’로 불리시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분께서 놓으신 기초는 튼튼하여 그분 위에 서 있는 이는 거짓스런 속임수에 넘어가거나 박해의 폭풍에 흔들리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사악한 자들은 그분 안에서 완전하게 파멸하기 때문이다. 돌과 부딪히는 것은 산산조각 나지만 돌은 멀쩡하다. 돌 위에 떨어지면 스스로 부서지고 만다. 그들의 파멸은 돌의 힘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떨어진 그들의 잘못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에게 하는 이야기인 줄 알고 예수님을 죽이자고 마음먹었지만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46절)그 군중들에게 변을 당할까 두려워 한 것이지만 그 군중들도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외칠 사람들이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참으로 주님의 일을 올바로 따르고 있는 소작인의 삶을 살고 있는가? 반성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