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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 눈물겨운 나의 꿈
박범신
2월에 10여 년 이상 재직하고 있던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직을 사직하고 이곳, 원주 근교의 오봉산 자락에 자리잡은 토지문학관 방 한 칸을 얻어 내려왔다.
교수직을 그만두는 일이나 토지문학관으로 내려오는 일이나 쉽진 않았다. 작가이기 이전에 나 또한 사람의 사회인이자 가장이기 때문이다. 대학에선 학부제자들이야 새로 충원할 교수한테 배우면 된다고 하더라도, 열 명도 훨씬 넘는 석 ․ 박사과정의 학생들이 지도교수라는 이름으로 내 품에 들어 있었고, 가정에선 아내와 세 아이가 내 품에 들어있었다. 내가 사직하자 석,박사과정의 제자들은 하루아침에 지도교수를 잃고 우왕좌왕하게 됐으며 그동안 들인 정이 있으니 헤어지는 것도 마음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와 세 아이도 그랬다. 드러내놓고 내 선택을 가로막진 않았지만 학교를 그만두고 가방을 꾸려 떠나는 나를 지켜봐야 하는 아내와 아이들의 심정 또한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두 아이는 아직도 대학등록금을 대줘야할 입장이니 스스로 자원하여 실직상태가 된 내가 아내로서는 원망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내는 집 떠날 남편의 짐을 쌀때 짐짓 불안을 감추고 밝게 웃으면서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봐. 집안일은 어쨌든 내가 꾸려가볼 게. 내 걱정은 이제 교수직까지 버렸으니 행여 소설 때문에 당신 몸 상하게 할까, 그 점이야. 소설로 가위눌리지 말고 편히 지내면 좋겠어” 했다. 작가의 아내로 평생 살아온 아내니까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나를 깎아먹는 길인 줄 먼저 알고 하는 소리였다. 나는 고맙고 미안해서 묵묵부답,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떠났다. 사회인으로, 가장으로 살기를 나로서는 거의 포기한 결단이었다. 10여 년 전, 언필칭 ‘절필선언’을 하고 용인 산속으로 혼자 살러 떠난 후 두 번째의 길 떠남이었다. 그때는 작가를 사표내고 떠났는데, 이번엔 사회인을 사표내고 떠나는 셈이었다. 나는 ‘절필’을 통해 유명작가로서의 기득권을 스스로 져버렸고, 그리고 다시 10여 년 후 이번엔 교수직을 사직함으로써 사회인으로서의 기득권을 스스로 져버렸다.
‘절필’을 통해 유명작가로서의 기득권을 스스로 져버렸을 때 결심한 몇 가지 중 하나는 ‘소설로 더 이상 가족들의 밥을 벌지 않겠다’는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이후 낸 소설책들, 예컨대 <흰소가 끄는 수레> <향기로운 우물이야기> <침묵의 집> <더러운 책상> 등은 만해문학상을 비롯 몇 몇 문학상을 받긴 했으나 예전의 내 책들에 비해 많이 팔리진 않았다. 그렇지만 베스트셀러를 통해 많은 독자와 만났던 70, 80년대와 달리 지금은 소수 독자의 깊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나는 좋게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원하고 행하여 얻어낸 결과였다. 그러데 이번엔 마침내 ‘교수직으로 더 이상 가족들의 밥을 벌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결행한 셈이 됐다.
그럼 어쩌자는 것일까. 다시 소설을 써서 가족들의 밥을 벌겠다는 뜻인가. 명백히 말하지만, 그것은 나의 지향이 아니다. 앞으로도 나는 소설 써서 밥 먹고 살 생각이 전혀 없다. 팔리든 말든 그런 것에 대한 나의 관심과 열정은 이미 오래전에 단호하게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열심히 쓰고 살면 원고료도 받고 하겠지만 그것은 내가 내 지향을 따라 살면서 절로 얻는 부가가치일 뿐 내가 목표로 삼는 가치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방 한 칸 전셋집에서 신혼을 보냈다. 그것이 서울로 입성해 터 잡을 때 나의 전 재산이었다. 이제 돈벌이를 위한 나의 노동을 좀 멈춘들 어떠랴. 내게는 옹색하지 않은 내 집이 있고 신체 건강한 세 아이가 있으며 한참동안 까먹어도 될 정도의 저축도 있다. 이만하면 분에 넘치는 은혜롭고 행복한 조건이다. 얼마나 많은 이 땅의 가장들이 자기 지향을 쫓아 일상과 욕망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도 해방될 수 없는 현실 속에 놓여 있는가. 아내는 내게 가방을 들려주면서 “우리 방 한 칸으로 서울생활 시작했는데, 전세방 한 칸 남을 때까지 까먹고 산다고 해도 본전치기잖아. 애들 다 키우고 세끼 굶지 않고, 그리고 본전치기로 죽으면 나름대로 수지맞는 장사를 한 셈이지 뭐. 그러니 딴 생각 말고 원하는 일만 하고 살아봐”하고 덧붙여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내가 건네는 가방을 받아들면서. 한동안 내가 시간을 따라 길에서 길로 유랑하게 될 거라는 불안한 예감을 느꼈다. 중요한 사회적 역할로부터 놓여왔으니 당분간 자유롭게 나는 흐를 것이다. 말이 자유지, 이미 젊다고 할 수 없으니 구빗길마다 비오고 바람 불 때, 더러는 미끄러져 넘어지고 더러는 생의 공포에 떨고 또 더러는 외로와서 소리쳐 울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가 원해서 떠난 길일진데 후회하진 않을 것이다.
“지하도 같은데 지나갈 때 잘 봐” 가방을 든 채 대문간에서 나는 농담을 했다. “혹시 홈리스가 돼서 내가 신문지나 골판지 한 장 달랑 덮고 잠들어 있을지 모르니깐. 내가 거기서 홀로 잠들어 있으면 비로소 내가 완전한 자유인이 된 줄 알아” 아내는 내게 눈을 찢어지라 흘겼다. 물론 내 지향은 문학이다. 나는 아주 오래 전에도 작가였고, 작가로 살아왔으며, 작가로 죽을 것이다. 나는 어쨌든 작가라는 이름이 좋다. 소망이 있다면 ‘사는 것을 포기하고 이제 쓰기만 하겠다’는 마르셀 푸르스트의 말처럼 내 남은 인생을 사는 일이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문장을 쓰는 것은 매순간 죽는 일과 다름없다. 황홀한 자기도취는 짧고, 죽이고 싶은 자기모멸, 자기학대는 길다. 왜 하필이면 내 길이 문학이란 말인가. 평생 자문했던 질문이기도 했다. 본질적으로 자기모멸이 없는 문학의 생산성을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모든 글쓰기는 자기 내면에서 시작된다. 찬미와 모멸은 갈팡질팡 작가의 내면에서 반복되고 그 분열을 통해 마침내 창작의 오리지널리티가 확립되는 것이다. 자기모멸이 문학의 최종적 지향은 결단코 될 수 없지만, 그러나 자기모멸, 자기 죽음이 없는 문학의 오리지널리티를 나는 믿지 않는다.
작가로서 나의 소망은 무엇보다 나의 작품이 일차적 텍스트로서의 오리지널리티를 확보해 갖는 것이다. 내 꿈이 그러하니 내가 앞으로 떠돌게 될 골짜기의 길들은 가파르고 좁고 위험할 것이 틀림없다. 내가 아내의 배웅을 받으면서 만났던 불안한 예감이란 바로 그 길에 대한 예감이다. 나는 어쩌면 문학 때문에 내 꿈대로 홈리스의 꿈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문학은 최종적으로 홈리스의 자유가 아니라 가파르고 좁은 골짜기 길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토지문학관 내 방은 산협에 있다. 등 뒤는 오봉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남쪽 창으론 오봉산보다 더 험한 백운산 준령이 가로막고 있으며 서창으로 백운산 지류들이 불끈불끈 버티고 있다. 남성적인 산들이다. 나는 자주 산과 산 사이 비좁은 협곡으로 난 길을 걷는다. 산그늘 사이로 걷다보면 어떤 때 혹시 되돌아나오지 못하는 거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공포감에 가위눌려, 왔던 길을 뒤돌아보곤 한다. 밤이 오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나는 백은산 협곡 사잇길을 걸을 때, 갈 때는 천천히 걷지만 돌아올 때는 허위허위 빠르게 걷는다. 내가 머물고 있는 토지문학관의 별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캄캄할 때가 많다. 저녁이 되면 본관건물은 더욱 캄캄절벽이다.
그러나 밤새 불 켜진 방이 하나 있다. 내가 머물고 있는 별채보다 더 높은 곳, 박경리선생의 사가(私家) 서재에 켜진 불빛이다. 나는 선생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의지해 내 방으로 돌아온다. 선생이 방에 깨어 있는지, 아니면 습관적으로 불을 켜놓고 있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다. 아무튼 박경리선생의 방은 새벽까지 불이 꺼지는 법이 없다. 어둔 골짜기, 가파르고 좁은 산책길로부터 귀가할 때, 또는 쓸쓸함에 대한 공포 때문에 불야성을 이룬 미치광이 도시의 밤을 따라 흐르다가 지쳐 한밤에 돌아올 때, 그것도 아니면 밤새 원고를 쓰다가 글쓰기의 고통, 혹은 글쓰기의 짧은 황홀에 밀려나와 새벽의 베란다로 나와 설 때, 나는 늘 선생의 방에 켜진 불빛을 본다. 선생의 어떤 소설, 어떤 말보다 그럴 때 그 방의 불빛은 내게 위로를 준다.
“아, 저기에 지도가 있구나.” 나는 중얼거린다. 남보다 앞서 간 사람들이 지도를 만든다던 어느 시인의 싯귀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박경리 선생의 작품세계를 쫓아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선생의 작품들은 선생의 고유한 길에서 얻어낸 것일 터, 감히 말하거니와 나는 나의 길에서 ‘내것’ 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오리지널리티를 얻고 싶다. 그것보다 선생 방의 불빛이 내게 주는 큰 위로와 은혜는, 선생께서 나보다 앞서 내가 가고 싶은 ‘가파르고 좁고 위험한’ 길을 단독자 당신 자신의 결단으로 갔다는 것이다. 선생은 그러므로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알고 있을 터이다. 그 길을 먼저 보았고, 그 길을 먼저 알았고, 그 길을 먼저 당신의 길로 만들어왔을 것이니, 내게 선생 방의 불빛이 하나의 지도가 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다.
나는 한동안 ‘청년작가’라고 불리웠다. ‘날이 갈수록 더욱 향기로워지는 영원한 청년작가’ 라는 출판 광고 카피를 보고 ‘그래, 내 지향이 바로 그거야’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것은 내가 어떤 이데올로기의 감옥에도 들지 않고, 또 어떤 시간의 권위에도 굴복하지 않으면서 가급적 영원히 미완의 현역작가 이미지로 남고 싶다는 뜻이기도 했다. 스스로 원한 별칭이었다. 창작집 <향기로운 우물이야기> 서문에서 ‘온갖 수사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다만 청년작가의 이미지로 늙고 싶다’ 고 말한 것이 바로 나 자신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제 나는 끝내려고 한다. 나의 ‘청년작가’는 끝났다. 나이가 많아서 그런 게 아니다. 어차피 내가 청년작가의 붉은 꿈을 갖고 있을 때, 내 생물학적 나이는 중년을 넘어서고 있었다. 맑게 세수하고 난 청년 같은 문학이란 사실은 애당초 생물학적 나이와 상관없는 일이다. 돌아보라. 20대이면서 벌써 청년이 아닌 청년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장 콕도는 이르길 ‘청년은 안전가의 주식을 사지 않는다’고 했거니와, 오늘날의 생물학적 청년들은 이미 장년의 나보다 훨씬 영리해져 대개 ‘안전가의 주식’을 산다. 내가 비교적 좋은 직업인 교수직을 버리고 좁고 가파른 골짜기의 길로 가려는 것이야말로 따져보면 ‘불안전한 주식’을 사는 것일 터이다.
그런 점에서 아직 청년다운 생생한 삶의 방식을 내 스스로 견지하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그러나 청년작가다운 문학적 순정과 열정을 고집한다면, 내가 가고 싶은 좁은 골짜기의 길에서 자칫 자기연민의 함정에 빠질는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최근 나의 뒤통수를 자주 친다. 그래서 나는 감히 바라거니와 청년작가를 내 안에서 싹쓸이로 버리지 않으면서, 그렇지만 청년작가로서의 한 시절을 지금 팽개치고 떠나려 하는 것이다. 굳이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깊이 썩어 향기로운 작가’가 되고 싶다. 깊이 썩으려면 청년의 푸른 갑옷에 내가 갇혀 있어선 안 될 터, 내 가는 길이 비록 좁고 가파른 골짜기길일지라도 내 영혼이 꿈꾸는 것은 우주적이어야 할 것이다. 살아서 내 꿈을 이룰 수 있다곤 믿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좁고 가파른 골짜기의 길에 서서 눈물겨운 단독자로, 내가 일찍이 우주라고 불렀던 것들과 관능적으로 교접하고 싶다. 단 한 번이라도.
내 안엔 포악한 짐승 하나 살고 있다. 놈은 시간에 순응하지 않고 세상의 구조에도 굴복하지 않는다. 내 몸은 늙는데 나를 숙주로 삼고 있는 놈은 전혀 늙을 줄 모르니 미치고 환장할 일이다. 나를 좁고 가파른 골짜기의 길로 데려가는 것도 그놈이다. 나는 가고 싶지 않지만 놈이 시시때때 내 옆구리 생살을 찢으면서 뻗대고 나오니까 안 갈래야 안 갈 수도 없다. 그렇다고 그 길로 간다고 해서 편안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 길로 들어서면 놈은 이내 다른 시험을 내게 건다. 이번엔 옆구리가 아니라 아랫도리 생살을 찢고 나온다. 만약 내가 문학을 하지 않는 방법으로 놈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연인 내게 최상의 길이다. 나의 삶은 놈과의 투쟁에 달려 있다.
놈의 시험과 압제를 피할 길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정면으로 맞닥뜨려 네가 죽고 내가 살든 내가 죽고 네가 살든 피투성이 싸움을 계속 해야만 한다. 이제 청년작가의 순정적 전략을 수정하려하니, 혹시 죽기 전에 놈을 내 손발이 되도록 다스리는 길을 찾을는지도 모른다. 놈을 내 마음대로 다스린 다음엔 아마 내가 금강석처럼 단단해져 능히 내가 꿈꾸는 우주를 만나게 될 터이다. 그것이 남은 삶에서의 내 꿈이다.
아내가 전화를 했다. 어느덧 팔순이 넘은 장인께서, 내가 직장과 집을 버리고 외진 산속 토지문학관에 들어가 있다 하니 걱정스럽고 진지하게 묻더란 말을 아내가 했다. 남편을 그렇게 떨어드려 놓으면 완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묻는 거야. 박경리 선생님 연세 몇이냐구. 내가 여든이 곧 되실 거라니까 그제서야 마음을 놓는 눈치였어. 젊은 여류작가가 토지문학관에 들어있는 않은 게 정말 다행이라시면서…” 아내는 깔깔대고 웃었다.
내 몸속의 짐승이 따라서 미소지었다. 나는 가능하면 문학에 순직(殉職)하고 싶다. 또 가능하면 지금부터 단 한 편의 생에 ‘마지막 작품’이라고 부를 그런 소설을 쓰고 싶다. 그러나 목표로 삼진 않을 것이다. 만약 문학을 버리고 홈리스나 히피가 되어 길에서 길로 떠돌다가 죽으면 더욱더 행복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야말로 더 자연스러운 자유인의 삶을 내가 얻어낸 결과일 터이므로.
밤이 깊으면 가끔 춤을 춘다. 아무도 업는 내 방에서 술에 취해 소리는 내지 않고 덩더쿵덩더쿵 어깨춤을 혼자 추는 것이다. 내 몸속의 잔인한 짐승도 그때만은 나를 봐주고 내버려둔다. 산은 캄캄한데 별은 드높아 아스라하다. 나는 춤추다가 말고 스스로 민망해져서 창가에 붙어 오래오래 별을 본다. 내가 보고 있는 어떤 별빛은 수십 수백 광년이 떨어져 있는바 이미 수십 수백 년 전 제 몸체를 떠난 빛일 것이다. 빛의 속도로 수백 년 날아왔을 수많은 별빛의 바다엔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없다.
그것은 우주이다. 그 무한 경계의 캄캄한 우주를 오로지 여섯 자(尺)도 안되는 인간만이 보고, 느끼고, 끌어당겨 제 품에 안는다. 위대한 상상력의 힘이다. 우주를 품에 안을 수만 있다면 존재의 모든 빛과 욕망들, 이를테면 내가 소설을 쓰고 안 쓰는 것, 살고 죽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영원한 삶과 문학의 화두는 다만 한 가지, 인간이다.
일곱 색깔 비의 파란 율동
이 곡은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의 「一本木野」라는 시에서 전곡했습니다. 끝없이 맑은 하늘의 파랑과 녹색. 바람 빛나는 숲속에서는 일곱 색깔의 비가 보석처럼 내리고 있습니다. 마치 토파스나 사파이어나 비취처럼. 겐지는 이것을 “일곱 색깔의 비”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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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잘 읽고 즐기고 많이 감동받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