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관념론
신두호
새하얀 고양이는 하얀이라는 속성을 기른다
하얗지 않다면 아무것도 아닌 고양이는
네 발을 모으고 골몰하는 7월의 구름 11월의 열기구
쓰러지는 나무 곁에 아무도 없다면
어디론가 사라지기 시작하는 숲
종적을 지우며 흩어지던 발걸음이 멈추고
전화벨이 울리면 나는 전화기만 확신한다
거실의 형태와 색채는 차원을 먼지로 기록하지만
공간을 점유하려는 사물의 성질은 믿음의 영역
하얀이라는 속성이 빛의 털실 뭉치에서 새어 나온다
정오를 떠다니는 음모들은 식별되지 않을 만큼 가볍고
고양이 없는 그림자들에 대한 실마리는
해진 주머니에 있다 버려진 지팡이의 매끄러운 손등 위에도
늘어진 음성처럼 더디게 퍼지는 의심 속에서
희미한 벽들을 선동하며 어슬렁거리는 방
목소리는 기억한 입술을 잊기 위해 건너오지만
꽃병과 꽃이 서로에게 무능한 감정이듯
어둠 속 검은 원뿔의 희미한 태두리들을 가진
나는 근사한 걸음걸이에 뻐져든다*
곡면을 제도하듯 차오르는 감정들의 기하학
향기의 모양을 간직한 꽃잎이 실재에 유일한
자신의 꽃을 다 바친다 하더라도 고양이는
아니다 피어오르는 향이 붉은 부채를 펼쳐 보이는 어디에도
하얗게 지워지는데 아무것도 아닌 숲
한데 모인 네 발을 감추는 꼬리가 남는다
정지한 해변을 물들이는 창백한 개념들과
사라지기 위해서만 골몰하는 과정이
그리는 붓에서 찾는 붓을 발견한다 백사장이
태양을 등진 고고학자의 입에 견고한 무덤을 만들고 있다
고양이 없는 꼬리의 뼈가 막 드러나려는 순간에
*폴 발레리<시의 아마추어>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