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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4. 묵상글 ( 주님 수난 성지 주일. - 수난이라고 쓰고 사랑이라고 읽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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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4.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수난이라고 쓰고 사랑이라고 읽는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오늘 저는 강론 주제를 다음과 같이 잡았습니다.
수모는 받아도 수치를 당하지는 않는다.
이 말은 스스로 받지, 억지로 당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수난 주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수난을 수난이라고 쓰고 사랑이라고 읽습니다.
수난(受難)이라는 한자어를 뜻풀이하면 ‘받을 受’, ‘어려울 難’입니다.
고통을 받는다는 뜻이기도 하고 어려움을 받아들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게만 보면 받는다는 것이니 수동태(passive)입니다.
그런데 받기는 받되 억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저 받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고,
기꺼이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러니 수동태이되 능동적 수동태인 셈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고통을 기쁘게 받게 하고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합니까?
사랑이 아닙니까?
그래서 수난이라고 쓰고 사랑이라고 읽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이라고 번역한 ‘Passio Christi/Passion of Christ’의
Passio 또는 Passion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이 Passion을 흔히 ‘열정’, ‘격정’, ‘열광’ 등으로 번역하지만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면 ‘뜨거운 사랑’
또는 ‘불타는 사랑’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저는 즉시 불나비를 생각하고
‘불나비사랑’이라는 옛 노래를 떠올립니다.
“얼마나 사무치는 그리움이냐,
밤마다 불을 찾아 헤매는 사연
차라리 재가 되어 숨진다 해도
아아아 너를 안고 가련다 불나비 사랑
무엇으로 끄나요 사랑의 불길
밤을 안고 떠도는 외로운 날개
한 많은 세월 속에 멍들은 가슴
아아아 너를 안고 가련다 불나비 사랑”
자신을 불태우고 죽는 사랑입니다.
그렇게 죽어도 행복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다시,
주님의 수난은 수난이라고 쓰고 사랑이라고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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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4.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그리스어 성경에서 보면 ‘십자가를 진다’는 단어는 βασταξειν(바스타제인)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의 첫 번째 의미는 ‘귀중한 것을 품고 가다.’입니다. 구체적인 예로 어머니가 아기를 품고 갈 때, 이 동사를 씁니다. 복음을 보면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에서 ‘배었던’이 바로 바스타제인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그 무게에 눌려 힘들게 버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고 가는 것입니다. 단순히 버티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곧 내 삶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삶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합니다.
고통과 시련은 우리 삶의 일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과 시련을 거부하고 없어지기만을 바라는 우리입니다. 이때는 십자가에 눌려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안는 사람은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 힘차게 앞으로 갈 수 있습니다.
복음을 보면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마태 5,41)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는 당대 로마법을 기억하게 하는 구절입니다. 로마 병사는 언제든지 식민지 백성을 붙들어 짐을 나르게 명령할 수 있습니다. 그 거리가 천 걸음, 약 1.5km입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도 이 법에 따라 예수님 대신에 십자가를 진 경우였습니다.
식민지 백성이 이런 명령을 받으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먼저 나서서 천 걸음을 더 가겠다고 합니다. 처음 천 걸음은 명령이지만, 두 번째 천 걸음을 나의 선택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끌려가는 삶이 아닌 이끄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날을 시작으로 우리는 거룩한 성주간을 보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교회의 명령이라면서 성주간 예식에만 참여하면 그만일까요? 아닙니다. 바스타제인이라는 단어의 뜻인 ‘귀중한 것을 품고 가다’라는 의미를 기억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자기 의지를 앞세워서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끌려가는 삶이 아닌 자기 삶을 이끌면서 살아야 합니다.
인터넷에서 칠곡 할머니들이 모여 만든 대한민국 최초의 할머니 래퍼 그룹 영상을 보았습니다. 평균 연령 85세의 8인조 칠곡 할매 래퍼 그룹 ‘수니와 칠공주’입니다. 팔십 넘은 할머니들이 이제야 글을 배우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래퍼 그룹도 만들었습니다. 억지로 시켜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늦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나이이지만, 자기 의지를 앞세워서 이끄는 삶을 살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께서 하느님 나라로 우리를 부르시는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을 만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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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욕심의 반대는 욕심이 없음이 아닌, 잠시 내게 머무름에 대한 만족입니다(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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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4.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마르 15,38)
오늘은 주님성지수난주일입니다. 부활을 눈앞에 두고 있는 오늘 <전례>는 기쁨과 슬픔이 혼합되어 교차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입성하는 기쁨이 충만해 있습니다. “호산나” 하고 외쳐대는 군중들의 환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환호는 일시에 지나가고, 수난과 죽음의 비탄이 젖어듭니다. 환호와 환영의 축제행렬은 이제 배척과 조롱의 십자가 행렬로 바뀝니다. 축복의 성지가지는 저주의 채찍이 됩니다. 자신의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았던 이들은 이제 예수님의 속옷마저 벗겨갑니다. 나귀위에 오르셨던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 달리십니다. 왕으로 떠받들어져 성 안으로 모셔졌던 그분은 마침내 강도와 함께 성 밖에서 처형됩니다.
그래서 <성주간>이 시작되는 오늘은 두 개의 명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주님성지주일>이면서, 동시에 <주님수난주일>이라 불립니다.
오늘 <제1독서>는 <주님수난주일>의 특성을 잘 나타내줍니다. “매질하는 자들에게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뺨을 내맡기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는” <야훼의 종의 셋째노래>를 들려줍니다.
오늘 <제2독서>는 <주님성지주일>의 특성을 잘 나타내줍니다. “예수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 찬가>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마르코가 전한 예수님의 수난기>를 들려줍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1,1)이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예수께서는 공생활을 통해서 당신의 신분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악령들이 예수님의 신비의 일면을 알아챘을 때에도(1,34; 3,12), 당신의 변모를 체험한 제자들에게도(9,9)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곧 메시아의 비밀이라는 신비에 가려졌습니다.
오늘 <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부분은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가 드러나는 부분이요(14,1-52), 둘째부분은 다른 등장인물들, 곧 성전경비병, 군중, 대사제, 다른 유다인들, 빌라도와 그의 군인들이 등장하는 부분입니다(14,52-15,41).
이제, 메시아의 비밀은 오늘 <복음>인 이 수난기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 신비의 전모가 폭로되게 됩니다. 마르코복음사가는 예수께서는 숨을 거두셨을 때 생긴 일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마르 15,38)
그렇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가리고 있던 비밀의 장막이 두 쪽으로 찢어졌습니다. 감추어진 베일을 “찢고서” 당신 자신을 열어 보여주신다. 십자가의 죽음이야말로, 그분을 감추고 있던 신비의 베일을 벗겨줍니다. 바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줍니다.
이 ‘바라봄’, 이 ‘발견’에 대한 놀라움에서, 예수님 수난의 극적인 사건은 비로소 신비롭고 경이로운 기쁨으로 번져갑니다. 결국, <마르코복음>의 전체 줄거리는 바로 이 ‘발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발견’은 예수님의 사형을 집행하고 감독하면서 십자가의 죽음을 ‘바라본’ 백인대장의 고백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마르 15,39)
이제 ‘십자가의 무력함’은 ‘전능함’으로 바뀌게 되고,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게 됩니다. 대체, 백인대장은 이 나약한 십자가의 죽음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바보같이 죽어가는 모습에서 “하느님의 아들”임을 본 것일까?
사실, 그는 십자가의 죽음에서 끝이 아닌 시작을 봅니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봅니다. 실패가 아닌 승리를 봅니다. 곧 그는 나약함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신적 권능을 봅니다. 전능함이 무력함 안에서 이루어짐을 봅니다. 약함의 어리석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권능을 봅니다. 어둠 가운데서 오히려 빛과 사랑의 무한함을 봅니다. 죽음을 건너간 사랑을 봅니다.
그것은 세상의 기준이 ‘찢어진’ 자리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공이냐 실패냐가 아니라, 자신을 바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그 사랑을 보았습니다. 죽음은(십자가는) 언제나 모순을 드러내지만, 바로 그 모순은 찢어졌고, 아니 바로 그 모순과 화해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죽음에 지배당하면서도 오히려 죽음은 찢어져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는 사랑의 장소가 되고. 구원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십자가에 메달리신 분이 구원자 메시아임을 봅니다. 그리하여 외칩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마르 15,39)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이 ‘나약함’에서,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로 찢어질 때입니다. 우리네 세상의 기준이 찢어질 때입니다. 나의 생각, 나의 판단이 찢어지고, 사랑에 눈을 뜰 때입니다. 사랑을 바라보게 될 때입니다. 사랑으로 바라볼 때입니다. 바로 그 모순과 화해할 때입니다.
바로 이 사랑이야말로, 십자가의 이 ‘무력함’이야말로, 바로 그리스도의 신비요, 그리스도의 비밀입니다. 아니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는 비결이 됩니다. 진정, 자유로워지는 비결이 됩니다. 구원의 길이 됩니다. 해방인 것입니다. 참으로, 그것은 내 자신이 찢어지는 것이요, 내 의식의 장막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억울하게 묵묵히 나약하고 어리석게 죽어간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이 신비 앞에, 우리 자신을 내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나는 자신을 내놓고 죽는가? 그 바람에 찢어지고 있는가?
나 자신을 가리고 있는 장막을 찢고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있는가?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고 있는가?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 14,24)
주님!
제가 산산조각 났을 때
저보다 먼저 산산이 부서진 이는 당신이십니다.
저를 풍기박살 낸 이도 바로 당신이십니다.
그래야만 온 몸을 쪼개고 피 흘리신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까닭입니다.
오늘도 당신처럼, 다른 이들을 “위하여”
먼저, 부서지고 찢어져 피 흘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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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4.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도 언제나 변치 않길 희망합니다. 아울러 주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도 항구하길 기도합니다.
‘굶주리면 달라붙고 배부르면 떠나가며 따뜻하면 몰려들고 추우면 버리는 것’(채근담)이 사람의 약점 중 하나입니다. 언제나 변함이 없으면 좋겠는데 인간의 마음은 흔들비쭉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시지만 우리의 마음은 이랬다저랬다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에 올라 앉으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때 많은 이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습니다. 또 어떤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르11,1-10). 정말 군중들은 가장 소중한 것을 길바닥에 깔아 놓으며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수석사제들과 원로들, 그리고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결박하여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마르15,1). 빌라도는 군중에게 “여러분이 유다인의 임금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오?”그러자 유다인들은 거듭 소리를 질렀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마르15,13). 빌라도가 다시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하고 묻자 더욱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르15,14) 하고 외쳤습니다. 열렬히 환영하던 마음은 어디 가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 만 반복하였습니다.
유다인의 명절인 과월절 기간에, 로마 총독이 정치범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광복절 특별사면’같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이 기회를 통해서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선동에 많은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고 빌라도는 군중을 만족시키려 예수를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내어 주었습니다(요한15,15). 소신 있게 판결해야 함에도 군중의 목소리에 따라가고 말았습니다. 소위 여론정치요, 인기 정치였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우리가 보고 믿게,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마르15,31-32).하며 예수님을 더욱 조롱했습니다. 모욕과 조롱을 일삼는 것은, 아마도 그들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속으로 켕기는 무엇인가가 있기에 큰소리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떳떳하고 당당하면 어떤 처지에서도 흔들림이 없고 그저 침묵하며 진실의 때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켕기는 것이 있으면 더 큰 소리를 내며 변명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묵 속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까지도 주셨습니다. 과연 우리의 일상 안에서 나를 모함하고 헐뜯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침묵하며 기다릴 수 있을까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엉뚱한 구설에 오르게 될 때 묵묵히 소문을 낸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까요? 아직은 아닐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도 회개해야 하고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깨달은 사람은 침묵하고 그저 그 뜻을 살아냅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면 가장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주고서 도리어 발길로 채이고 맙니다. 사실 원수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멀리 안 보이면 괜찮은데 늘 가까이에서 보니 잊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곤 합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그러나 힘이 드는 만큼 더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힘든 상황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마르15,34.시편22,2)하시며 더 간절히 아버지의 뜻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큰 소리를 지르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거기에 서 있던 백인 대장이 그분이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15,38) 하고 고백합니다. 그분의 정체를 모두가 안 것은 아니었지만 몇몇 여인들이 그분의 임종을 지켜 드렸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신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은 복됩니다. 그리고 임종을 지킨 여인들도 주님의 임종을 지켰으니 복이 있습니다. 주님을 배반한 이들도 있었지만, 끝까지 주님을 지킨 이들도 있습니다. 기왕이면 끝까지 주님을 지켜야 합니다.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뒤늦게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본 백인대장처럼 늦게나마 주님의 정체를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배신의 삶은 더 이상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14,36). 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으로 나를 내려놓을 수 있길 희망합니다. 농담 삼아 ‘신자 중에 가장 무서운 신자는? 배신자’라고 했었습니다. 하느님께도 일상 안에서도 결코, 배신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이번 한 주간은 성주간입니다. 거룩한 주간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성목요일은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을 하시면서 성체성사를 설정해 주신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던 세족례를 행하고 성찬례를 성대하게 거행합니다. 낮에는 성유축성 미사를 봉헌합니다.
성금요일에는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오후 3시경에 십자가 길을 하고 저녁에는 십자가 경배 예절을 합니다.
성토요일 부활을 준비하는 날 입니다.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기에 토요일 밤부터 주일 새벽에 걸쳐 빛의 예식과 부활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게 됩니다.
한 주간 특별히 주님의 부활을 잘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부활은 죽음을 통해서 왔습니다. 일상 안에서 내적 비움을 이루는 만큼 부활의 기쁨이 커질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헌신과 사항, 희생, 봉헌이 부활의 영광을 준비하는 밑거름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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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4.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제 생활을 하면서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하신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본당의 물품과 자기의 물품을 구분하지 못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성당에 있어야 할 사다리가 없어서 찾아보니 형제님이 자기 집 일에 쓰려고 잠시 가져갔다고 합니다. 전화해서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대학교도 나오고, 말도 잘 하는데 셈이 좀 흐린 것이 늘 문제였습니다. 먹는 자리, 생색이 나는 자리에는 어김없이 나타나는데 힘든 일, 봉사하는 자리에는 늘 이유가 있어서 빠지는 분이 있었습니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늘 밝아서 좋긴 하지만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본당에서는 열심히 봉사하는데 아파트 단지에서는 비난 받는 분도 있었습니다. 성당에서 신자라면 성당 밖에서도 신자의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 겉과 속이 다른 것 같아서 아쉬웠습니다. 자기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큰 목소리로 비난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먼저 듣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 좋은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분이 지나간 자리는 늘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뒷수습이 힘들었습니다. 솔선수범하고, 추진력이 있어서 좋았는데 혼자서 모든 것을 하려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지나친 음주 때문에 공든 탑을 무너트리는 분이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말도 없고 얌전하고, 봉사도 잘 하는데 그만 술이 과하면 사람이 변하였습니다. 술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인데 사람이 술을 위해서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제 생활을 하면서 제게 큰 위로와 힘이 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사제관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한 형제님이 자전거를 타고 성당으로 왔습니다. 성당의 문을 다 닫고, 하수구에 있던 오물을 다 꺼냈습니다. 그리고 성모상 앞에서 고개 숙여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33년이 지났는데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방앗간을 하면서 설날이나 추석이면 어르신들을 위해서 떡을 드리는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서 장학금을 주는 형제님이었습니다. 저는 몰랐는데 면장님이 그 형제님을 위해서 표창장을 준다고 제게 연락해서 알았습니다. 말보다는 늘 먼저 봉사하던 형제님의 따뜻한 마음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큰 바위 얼굴처럼, 동네에 있던 커다란 느티나무처럼 언제나 본당을 지켜 주시던 어르신이 있습니다. 성탄에는 손수 새끼를 꼬아서 구유의 지붕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제가 어디를 다녀 올 때면 잘 다녀왔는지 안부를 물었습니다. 어르신의 집에는 늘 기도의 향내가 났습니다. 집 안의 중심에는 성경책이 있었습니다. 하도 읽어서 낡고 낡아진 성경책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동네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늘 앞장서서 힘을 보태는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아픈 분이 있으면 찾아가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예비자 인도를 많이 하셔서 대자도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사명을 실천하는 분이셨습니다.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 충실하였습니다. 제가 사제 생활을 33년 동안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그런 분들의 기도와 봉사 그리고 헌신과 열정 때문입니다.
예수님 수난의 길에도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다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배반은 절친했던 사람들에게 당하는 것들 봅니다. 많은 것을 나누었던 사람들에게 당하는 것들 봅니다. 본당에서도 보면 그렇습니다. 단체의 간부들끼리도 없는 자리에서는 상대방의 흉을 보기도 합니다. 이런 배반은 사제/ 수녀/ 평신도 모두에게서 나타나곤 합니다. 저는 교구에 있었기 때문에 때로 본당에서 ‘투서’를 보내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본당 신부님의 잘못을 지적하고, 본당 신부님을 비난하는 그 사람은 사실 본당 신부님과 늘 가까운 자리에 함께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예수님을 팔아 넘겼던 그 유다와 비교해서 “나는 아니죠!”라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같은 사람을 종종 봅니다. 늘 모범생이었고, 남들에게 칭찬을 많이 받았고, 기도도 공부도 열심히 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입장을 먼저 생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주님께서는 늘 나와 함께 계셨는데, 나는 주님이 힘들어하실 때, 주님께서 함께 기도하자고 하실 때, 어쩌면 늘 주님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봅니다.
예수님 수난의 길에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 5처에는 시몬이 예수를 도와 십자가 짐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성서를 읽어보면 길을 지나가는 키레네 사람 시몬에게 강제로 십자가를 지우게 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 십자가를 지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성서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만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게 될 경우가 있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갑자기 아프시거나, 여행을 가게 될 경우가 있죠. 그럴 때 보좌신부는 본당 신부님이 하셔야 할 미사를 하게 되고, 여러 단체의 모임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럴 때 정말 기쁜 마음으로 하는지, 아니면 의무감으로 하는지, 저 자신을 돌아보면 기쁜 마음으로 하기보다는 의무감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십자가의 길 제 6처는 성녀 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의 얼굴 씻어 드림을 묵상합니다. 성서를 읽어보면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주는 내용은 없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성녀 베로니까는 예수님께서 골고타 언덕으로 십자가를 기고 가실 때, 예수님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피땀을 닦아 준 예루살렘의 어느 부인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옷으로 성면을 씻었는데, 나중에 살펴보니 거기에 주님의 모습이 박혀있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그 여인은 베로니까로 알려졌는데, "베로" 는 라틴어로 "베라"(참 진실한) 이고, "이까"는 "아이콘" 즉 성화상을 뜻하므로, 그녀의 이름은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참 모습" 이란 뜻이 됩니다. 이 사건이후 그녀의 운명은 여러 가지로 서로 다른 전설로 전해옵니다.
주님 수난 성지주일입니다. 나는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예수님께 위로를 드리고 있는지,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들도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면 좋겠습니다. 베로니카 성녀처럼 주님의 얼굴에 흐르는 땀과 피를 닦아 드리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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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4.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성주간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핵심이고 또 제일 중요한 시기입니다.
광기 어린 백성들의 아우성이 들립니까?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십니다. 3년 동안 그렇게 많은 이들을 만나시고 많은 말씀을 들려주신 예수님께서 일언의 대답도 하지 않으십니다.
5천명을 먹이신 기적이 생각나십니까? 왕으로 예수님을 모시려 했던 그 사람들 지금 어디 있습니까?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와 제자들…. 지금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손을 얹어 병을 낫게 해 주신, 또 말씀으로 낫게 해 주신 그 수많은 사람, 다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어려울 때, 내가 아플 때, 내가 외로울 때 예수님을 찾았던 나는 지금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고 있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증언해야 할 때, 예수님이 우리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해야 할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예수님도 침묵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침묵과는 다릅니다. 백 마디의 말보다 침묵의 외침이 더욱 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침묵 속에서 이런 기도를 하셨을 것입니다. '아버지 저를 받아 주십시오. 세상의 빛이신 아버지 하느님, 당신이 나의 희망이고 방패입니다. 이제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의 길을 가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시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기꺼이 하느님 한 분 믿고 가십니다. 이제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고통의 길이라면, 아픔의 길이라면 침묵하십시오. 그곳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볼 수 있고, 하느님만이 희망이고 기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걷는 십자가의 길, 그 성주간이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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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데기
번데기는 스스로 번데기가 됩니다.
번데기는 번데기가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번데기를 거쳐야 나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번데기라는 시기 없는 나비는 없습니다.
우리 신앙의 길에도 거쳐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늘 항상 뽀송한 길이면 좋겠지만
걸어도 걸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늪과 같은 길을 만나기도 합니다.
인내의 길을 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꼭 가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듯이
우리에게도 그런 길을 꼭 펼쳐질 것입니다.
번데기가 나비가 되려 스스로 번데기가 되었듯이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스스로 인내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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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4. 주님 수난 성지 주일. 키엣 대주교님.
갈림길에서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환호하였지만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는 등을 돌려 다른 길로 가버렸습니다. 우리가 그 길에 있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하였을까요?
유다의 선택
그는 3 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설교를 들었던 주님의 열렬한 추종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오실 때는 옆에 있었지만 골고다 언덕에선 없었습니다. 탐욕의 길을 선택한 그의 길은 예수님의 길과는 정반대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베드로입니다.
주님과 가장 친밀한 제자였고 제자들의 우두머리였던 그는 모든 사람이 스승님을 버리더라도 자기만은 끝까지 스승님을 따를 것이라고 맹세했습니다. 그 역시 유다와 같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날 그 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난 후 그는 안락함의 길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그는 이미 잠들 만큼 게을렀고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실 때도 그는 대사제의 집안에서 시종들과 함께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태만함과 안일함이 그를 점점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였고 결국 스승을 부인하게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군중들의 모습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군중들은 수만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먹고 자는 것도 잊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주님을 따랐고 수없이 많이 주님의 설교를 들었지만 십자가를 지고가는 예수님을 조롱하고,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위에 묶이신 예수님을 모욕하며 뒤도 안 돌아보고 가 버렸습니다.
군중은 여론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주장보다 강한 여론 쪽에 의지하여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인양 떠드는 것이 군중의 속성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기에 돌아서는 것도 쉬운 사람들입니다. 대중이 좋다고 하니 그저 그들을 따라 손을 흔들고 대중이 뒤 돌아서니 그들을 따라 조롱하고 뒤 돌아섰을 뿐이고 그분께서 판결을 받으실 때는 자신들도 심판관인양 그분을 판결하였습니다.
그 누구도 주님을 부인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주님을 비난하고 주님을 판결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돈과 안일함, 여론에 휘둘려 자신들의 가야할 길을 버렸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선택의 길에 놓인다면 과연 그 옛날 유다와 베드로, 군중과는 다른 길을 갈 수 있을까요?
바른 길을 택하고자 한다면 성경을 바로 읽고 묵상을 통해 주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어둠과 같은 막막한 순간 주님께서 밝게 길을 밝혀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나약한 순간 힘을 주시고 길을 잃고 헤맬 때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체득할 수 있다면 나의 영혼도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주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나의 삶에서 복음은 어떤 의미입니까?
2. 복음을 읽고 그 의미를 생각해 보고 있습니까? 그저 글자를 읽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3. 나의 선택에 빛이 되었던 복음 구절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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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4.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느님 중심의 한결같은 신망애(信望愛)의 삶-
"배워라, 비워라, 닮아라"
“사람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감동은 한결같음이다.”
어제 어느 자매로부터 받은 그림과 더불어 위 짧은 말마디가 깊은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일희일비하지 않는 한결같은 삶입니다. 깊은 내공의 믿음을 반영하는 한곁같음입니다. 이런 한결같은 사람을 만나면 신뢰와 더불어 참 편안함을 느낍니다. 다산 어른의 다음 3월24일 오늘 말씀도 이런 하느님 중심의 한결같은 믿음의 삶에서 가능합니다.
“높은 지위에 매달리며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 하지 마라. 그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일도 빛나고 나도 빛난다.”
“맡은 일을 부지런히 행했을 뿐, 그 밖의 일은 삼가지 않음이 없었다. 이것이 남들이 알아주기를 구하는 나만의 방법이었다."
오늘 가톨릭신문 글로벌칼럼 난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대한 로버트 미켄스의 글에서도 교황님의 한결같은 모습이 참 좋은 가르침이었습니다.
“장애물을 넘어 계속 전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나이들면서 건강 약해져도 오히려 더 큰 결단 보이는 중, 반대 세력과 급진 세력 모두 교황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주눅들지 않고 교회 이끌어”
이런 어려움을 전혀 내색하지 않고 한결같이 늘 미소띈 얼굴 표정을 짓는 교황님이 참 위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가톨릭신문에서 소개된 사제서품 50주년 “금경축”을 맞이한 가톨릭교회 26분의 사제와 사제서품 60주년 “회경축”을 맞이한 3분 사제 역시 한곁같은 삶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삶은 흡사 장애물 경기와 같습니다. 예전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때 장애물 경기는 보는 이들에게 얼마나 흥미진진했는지요! 일상의 삶에서 이런저런 장애물을 온갖 지혜와 용기로 타개해 나가는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한결같은 신망애 정주의 삶도 자랑스럽습니다. 오늘 성지주일부터 시작된 성주간은 가톨릭교회에서 파스카 신비가 실현되는 절정에 속하는 전례시기입니다. 성지주일의 긴 복음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한결같음이 어둠을 밝히는 빛같습니다. 가톨릭 굿뉴스에 한결같이 제 강론을 올려주는 형제의 댓글도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아마 이 글을 쓰시기 위해 전날 하루의 성찰과 고백과 감사와 찬미의 삶의 결정판을 우리에게 매일 주십니다. 항상 신부님의 묵상글을 보면서 어두운 세상에서 빛 한줄기를 바라봅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아멘.”
어둔 세상 한 복판에서 “주님의 빛”으로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가는 형제님이 참 경이(驚異)롭습니다. 세상이 그래도 살만한 것은 세상 곳곳에서 크고 작은 주님의 빛을 반사하며 살아가는 형제자매들 덕분입니다. 오늘 수난복음 중에도 한결같은 주님 사랑의 빛이 어둠을 밝히고 있음을 봅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후 전개된 수난복음의 목차를 정리해봤습니다.
(마르14,1-15,47)
1.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다
2.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다
3.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다
4.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다
5.제자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시다
6.성찬례를 제정하시다
7.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을 예고하시다
8.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다
9.잡히시다
10.알몸으로 달아난 젊은이
11.최고의회에서 심문을 받으시다
12.예수님을 조롱하다
13.빌라도에게 신문을 받으시다
14.사형 선고를 받으시다
15.군사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다
16.십자가에 못 박히시다
17.숨을 거두시다
18.묻히시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갖 고통과 수난을 겪어낸 주님의 한결같이 깊고 깊은 믿음, 희망, 사랑이 참 놀랍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호산나!" 당신을 환영하던 군중이 폭도로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외침에도 한결같은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은 평상시 참으로 듣고 배움에 충실했음을 깨닫습니다. 다음 주님의 종이 고백하는 바 그대로입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한결같이 듣고 배우는 공부에 충실하셨을 우리 주님이십니다. 이어 제2독서 필립비서의 그리스도 찬가가 또 깊은 감동과 더불어 깨우침을 줍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매주 토요일 제1저녁 기도시 바치는 찬미가입니다. 그 일부를 인용합니다.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대로 오늘 수난복음의 요약처럼 느껴집니다. 역시 하느님 향한 사랑의 비움, 사랑의 겸손, 사랑의 순종입니다. 수난복음에서 주님의 이런 모습에 감동한 백인대장의 다음 고백이 수난복음의 절정이자 결론입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앞서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던 여인과 더불어 백인대장과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신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 역시 칠흑같은 어둠을 비추는 주님의 빛입니다. 수난복음 마지막 묘사, ‘마리아 막달레나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분을 어디에 모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라는 말마디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두 여인 역시 칠흑같은 어둠을 비추는 주님의 빛입니다. 과연 나는 수난복음의 누구에게서 나의 얼굴을 발견합니까?
예수님은 수난복음에서는 물론 평생 삶에서 겪는 모든 시련과 어려움을 겸손의 계기, 순종의 계기, 비움의 계기로 삼으셨음이 분명합니다. 사랑의 겸손, 사랑의 순종, 사랑의 비움이 파스카 신비의 완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닮는 것은 우리 모두의 평생과제입니다. “어떻게?” 저는 셋을 권합니다.
“배워라, 비워라, 닮아라”
주님처럼 한결같이 배움의 여정에, 비움의 여정에, 닮음의 여정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한결같은 열렬한 신망애(信望愛)의 삶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처럼 간절히 항구히 바치는 기도가 이런 한결같은 배움과 비움, 닮음의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주님의 감동적인 두 기도로 강론을 끝맺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니니, 이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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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4.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길>
마르코 11,1-10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다)
마르코 14,1-15,4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사람길>
사람이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이 사람인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의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이고자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 사이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을 만나는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을 만나러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을 잇는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을 이으러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과 함께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이 열기에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이 막아도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이 기쁨이기에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이 슬픔이어도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이 희망이기에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이 아픔이어도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이 살림이기에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이 죽임이어도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을 살리려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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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4.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성주간은 주님 수난 사건을 전례적으로 기념하는 연중 가장 거룩한 기간입니다. 주님 수난을 바라보는 핵심은 무엇보다도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성주간은 그리스도의 고통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기쁘게 지고 가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구원과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상징입니다. 원래 십자가는 이집트와 고대 동방에서 노예들에게만 내려졌던 형벌이며 잔혹한 죽음일 뿐만 아니라 사형에 처하던 치욕의 형틀이였습니다. 이 십자가를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고귀하고 거룩한 사랑과 영광의 십자가로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을 열어주며 이 길을 따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십자가의 신비로 이끄십니다. 우리의 고통은 그분의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변화됩니다. 고통에 담겨진 사랑을 보게 해 줍니다.
그리스도의 고통과 사랑이 담긴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을 때 고통이 매우 적어집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자신이 이기심에 의해 야기된 고통으로부터 분노와 원망, 자기연민, 신랄함, 절망에 의해 야기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받아들이라고 하는 십자가는 일차적으로 우리가 어릴적부터 가지고 온 우리 자신의 아픔입니다. 우리 자신의 한계들, 우리 자신의 성격적 결함들, 어릴때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이 나에게 끼친 손상들, 그리고 우리 각자가 고유하게 경험하는 인간 조건의 아픔들, 이것들이 우리들이 지고 가야 할 진정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신비의 실현이며 믿음의 길입니다. 동방교회의 교부 신비가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의 지혜와 사랑에 중심을 두며 사는 인간이 십자가를 자랑으로 생각해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진보도 없을 것이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반드시 설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 중 몇가지를 빠뜨리고 설교할 수는 있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설교하지 않고는 선교할 수 없습니다.”
서방교부들의 설교중에도 십자가에 대해서 다음과 전해져 옵니다: “그 나무는 높이 높이 창공을 찌를 듯 솟아 있어서 이 승에서 천국에로 그 나무를 타고 갈 수 있습니다. 그 나무는 시들지 않는 나무이며 하늘 한 가운데에서 땅의 중심을 뚫고 무성하게 뻗어 내려 갔으며 우주를 받치고 온갖 것을 하나로 묶어 인간이 사는 땅을 유지해 주고 우주를 하나로 결합케 합니다.”
성 비안네는 십자가 무엇인지 우리들에게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비안네 성인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은총의 성주간 보내시길 빕니다.
“십자가는 책중에서 제일 지혜로운 책입니다. 이 책을 모르는 사람은 다른 책을 다 보았다 하더라도 무식한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학교에 다닐수록 여기에 머물고 싶은 것을 다 알게 됩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입니다. 십자가는 하늘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십자가를 기쁘게 맞이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십자가로 여기지 않습니다. 십가가는 그를 우리 주님과 일치시켜 줍니다. 십자가는 그것을 지고 가는 사람을 깨끗이 하고,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버리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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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브와-시뇰-이삭에서 피흘리는 성체
벨기에-1405년
두 번째 발현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지 않기 위하여 쟝 뒤 브와는 지난 밤의 체험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다음 날 밤에 알 수 없는 사람이 그의 침대에 다시 나타나서 그의 게으름을 나무라셨다.
“네가 나와 함께 연민의 마음을 품고 또 나를 치료해 주고 내 고통을 멀게 할 수 있는 의사를 찾도록 너에게 나의 상처를 보여 주고 내 슬픔과 고통을 말해 주었다. 그러나 난 너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를 불쌍히 여기고 내 문제를 받아들일 마음의 채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실제로 아무도 없었던가? 너희들은 나의 상처가 더 심하게 되도록 내버려 두겠느냐? 내가 하소연해도 듣지 않는 이 세상을 벌하도록 너희들은 나를 강요하겠느냐?"
전보다 더욱 당황한 이 착한 예언자는 아직까지도 그분이 누구이신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에 그는 그의 식솔들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들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래서 그 성주는 담대한 동생에게 그날 밤 자기와 함께 있으면서 필요하면 자기를 보호해달라고 부탁하였다. 두 사람은 세심하게 방문을 잠궜다.(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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