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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韓(삼한)의 位置(위치) 批正(비정)3世紀(세기) 무렵 !
元來(원래)는 천관우(千寬宇) 先生(선생)의 批正(비정)까지 地圖(지도)에 反映(반영)하고자 했으나, 다른 次元(차원)에서 筆者(필자)가 整理(정리)해놓은 資料(자료)들과 다른 論文(논문)·인터넷(Internet) 등에서 정리해놓은 것과 比較(비교)해보니 다른 점이 너무 많이 나와, 追後(추후) 다시 確認(확인)해본 뒤에 追加(추가)하도록 할 豫定(예정)이다.(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結局(결국)엔 馬韓(마한)地域(지역)은 박순발 先生(선생), 辰(진)·弁韓(변한) 地域(지역)은 김태식 先生(선생)의 批正(비정)과 이병도 先生(선생)의 批正(비정)이 地圖(지도) 上(상)에 反映(반영)되었다. 靑色(청색)은 馬韓(마한), 赤色(적색)은 辰韓(진한), 綠色(녹색)은 변진(弁辰·변한)에 該當(해당)하고, <三國志(삼국지)>에 言及(언급)된 順序(순서)대로 番號(번호)를 附與(부여)해 批正(비정)되지 못한 地名(지명)의 漏落(누락) 與否(여부)를 把握(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李秉道(이병도) 先生(선생)의 批正(비정)에서는 批正者(비정자)의 主張(주장)을 最大限(최대한) 反映(반영)해 馬韓(마한) 54國(국) 中(중) 漢江(한강) 流域(유역)에 位置(위치)한 國家(국가)들을 辰韓(진한)으로 標示(표시)하고, 옅은 靑色(청색)으로 진왕(辰王)에 所屬(소속)된 변진(弁辰)을 表現(표현)하였다. 따라서 <三國志(삼국지)>에 言及(언급)된 順序(순서)를 最大(최대)한 맞춰가가고자 弁辰(변진) 部分(부분)은 알파벳(alphabet) 順(순)으로 番號(번호)를 附與(부여)했다.
補助的(보조적)인 參考資料(참고자료)로써, <三國史記(삼국사기)>地理志(지리지) 地名(지명), 樂浪(낙랑)·帶方郡(대방군)의 批正(비정) 位置(위치), 포상(浦上) 8國(국) 및 <三國史記(삼국사기)>新羅本紀(신라본기) 初期(초기)記事(기사)에 登場(등장)하는 小國(소국)들의 位置(위치)도 入力(입력)해두었다.
但(단) 非(비) 活性化(활성화)된 레이어(Layer:層(층)로 設定(설정)되어 있기에, 이를 살펴보려면 凡例(범례)를 選擇(선택)하여 이를 活性化(활성화) 해야한다. 灰色(회색)은 <三國史記(삼국사기)>地理志(지리지)의 地名(지명), 紫色(자색)은 樂浪(낙랑)·帶方郡(대방군), 黃色(황색)은 蒲上(포상) 8國(국)[蒲上八國(포상팔국)], 朱黃色(주황색)은 新羅(신라)에 倂合(병합)된 小國(소국)에 該當(해당)한다.
※ 三韓(삼한) 國名(국명) 目錄(목록) ※
<마한(馬韓)>
01.원양국(爰襄國)
02.모수국(牟水國)
03.상외국(桑外國)
04.소석색국(小石索國)
05.대석색국(大石索國)
06.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
07.신분고국(臣濆沽國)·신분활국(臣濆活國)·신분첨국(臣濆沾國)
08.백제국(伯濟國)
09.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10.일화국(日華國)
11.고탄자국(古誕者國)
12.고리국(古離國)
13.노람국(怒藍國·奴藍國)
14.월지국(月支國)·목지국(目支國)
15.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資離牟盧國)
16.소위건국(素謂乾國)
17.고원국(古爰國)
18.막로국(莫盧國)
19.비리국(卑離國)
20.점리비국(占離卑國)·고리비국(古離卑國)·고비리국(古卑離國)
21.신흔국(臣釁國)
22.지침국(支侵國)
23.구로국(狗盧國)
24.비미국(卑彌國)
25.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26.고포국(古浦國)
27.치리국국(致利鞠國)
28.염로국(冉路國)
29.아림국(兒林國)
30.사로국(駟盧國)
31.내비리국(內卑離國)
32.감해국(感奚國)
33.만로국(萬盧國)
34.벽비리국(辟卑離國)
35.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
36.일리국(一離國)
37.불미국(不彌國)
38.지반국(支半國)
39.구소국(狗素國)
40.첩로국(捷盧國)
41.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42.신소도국(臣蘇塗國)
43.막로국(莫盧國)
44.고랍국(古臘國)
45.임소반국(臨素半國)
46.신운신국(臣雲新國)
47.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48.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
49.일난국(一難國)
50.구해국(狗奚國)
51.불운국(不雲國)
52.불사분야국(不斯濆邪國)
53.원지국(爰池國)
54.건마국(乾馬國)
55.초리국(楚離國)
<진한(辰韓)>
01(A).이저국(已柢國)·기저국(己柢國)·사저국(巳私國)
02(B).불사국(不斯國)
03(E).근기국(勤耆國)
04(F).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난리미동국(難離彌凍國)
05(I).염해국(冉奚國)·염원국(冉爰國)
06(L).군미국(軍彌國)·변군미국(弁軍彌國)
07(N).여담국(如湛國)
08(P).호로국(戶路國)·시로국(尸路國)
09(Q).주선국(州鮮國)
10(R).마연국(馬延國)
11(W).사로국(斯盧國)
12(X).우유국(優由國)·우중국(優中國)
<변진(弁辰)>
01(C).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미리동국(彌離陳國)
02(D).접도국(接塗國)·누도국(樓塗國)
03(G).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04(H).고순시국(古淳是國)
05(J).반파국(伴跛國)·반로국(半路國)
06(K).낙노국(樂奴國/악노국·약노국)
07(M).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미언야마국(彌焉邪馬國)
08(O).감로국(甘路國·甘露國)
09(S).구야국(狗邪國)
10(T).주조마국(走漕馬國)·정조마국(定漕馬國)
11(U).안야국(安邪國)
12(V).독로국(瀆盧國)·속로국(續盧國)
※ <後漢書(후한서)>에서는 馬韓(마한)이 54開國(개국)이라고 傳(전)하고 있는데, <三國志(삼국지)>에는 55開國(개국)의 國名(국명)이 羅列(나열)되어 있다. 18番(번)과 43번에 막로국(莫盧國)이 重複(중복)되어 나타나는데, 이 中(중) 19番(번)의 '비리국(卑離國)'이란 이름이 馬韓(마한)의 國名(국명)에서 接尾辭(접미사)처럼 나타나는 用例(용례)인 만큼, '莫盧卑離國(막로비리국)'이 잘못 傳(전)해지면서 莫盧國(막로국)(18번)·卑離國(비리국)(19번)으로 標記(표기)된 것으로 理解(이해)되고 있다. 또한 <三國志(삼국지)>에는 辰韓(진한)이 12國(국)이며 辰韓(진한)과 弁辰(변진)을 합쳐 24開國(개국)이 있다고 전하면서도, 26開國(개국)의 國名(국명)이 羅列(나열)되어 있다.
이 中(중) 마연국(馬延國)이 두번 重複(중복)되고, 군미국(軍彌國)과 변군미국(弁軍彌國)을 같은 대상을 重複(중복)해 指稱(지칭)한 것으로 看做(간주)하면 24個(개)로 맞출 수 있다. 弁辰(변진) 12國(국)의 國名(국명) 앞에는 '변진(弁辰)' 2字(자)를 붙여 弁辰(변진) 所屬(소속)임을 把握(파악)해볼 수 있게 했는데, 이 亦是(역시) 11個(개)만이 나타난다. 다만 '변(弁)'자가 붙은 國名(국명)이 변군미국(弁軍彌國)과 '변락노국(弁樂奴國)' 두 事例(사례)가 보이는데,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弁軍彌國(변군미국)을 '軍彌國(군미국)'의 重複(중복) 標記(표기)로 看做(간주)하면, '弁樂奴國(변락노국)'을 '弁辰(변진) 낙로국(樂奴國)'의 잘못된 標記(표기)로 理解(이해)할 수 있어, 弁辰(변진) 12國(국)의 숫자도 맞출 수 있게 된다.
參考(참고):莫盧(막로) 卑離國(비리국)
參考(참고):삼국지 三國志》 위서 동이전 한조(韓條)에는 우리 나라 古代(고대) 三韓(삼한)의 여러 小國(소국) 이름이 列擧(열거)되어 있다. 이들 나라 이름은 우리말의 나라 이름을 당시의 中國(중국) 상고음(上古音)에 따라 漢字(한자)로 표기되어 있는데, 우리 漢字音(한자음)에 가까우므로 三韓(삼한)小國(소국)의 位置(위치) 比定(비정)에 參考(참고)가 된다.한조에 열거된 소국의 이름에는 ‘비리(卑離)’가 붙은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를테면,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내비리국(內卑離國)’·‘벽비리국(辟卑離國)’·‘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등이 그것이다. ‘비리’는 옛 지명 어미에 흔히 붙어 있는 백제의 ‘부리(夫里)’, 신라의 ‘벌(伐)’·‘불(弗)’·‘불[火]’ 등과 같은 뜻이다.
즉, 平野(평야)를 뜻하는 ‘벌’에서 由來(유래)된 말로서, 邑落(읍락) 또는 나라라는 뜻으로 쓰여졌다.그러므로 卑離國(비리국)은 위에서 例(예)로 든 여러 卑離國(비리국)들처럼 ‘卑離(비리)’ 앞에 특정한 나라 이름을 나타내는 固有名詞(고유명사)가 붙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무슨 卑俚(비리)’라는 특정한 나라를 가리키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혹은 일정한 地域(지역)의 ‘卑俚(비리)’ 中(중) 根本(근본)이 되는 ‘卑俚(비리)’이기에 特定(특정)한 이름을 붙지 않았을 수도 있다. 新羅(신라)의 6部(부) 이름에 양부(梁部)·사량부(沙梁部)·점량부(漸梁部) 등이 있는데, 이 中(중) 根本(근본)이 되는 것만 梁部(양부)라고 한 例(예)와 마찬가지이다.그 位置(위치)에 대해서는 한조의 記錄(기록)順序(순서)로 보아 지금의 忠淸南道(충청남도) 地域(지역)이었던 것으로 推定(추정)되지만, 오늘날의 地名(지명)에 批正(비정)하기는 어렵다. 이 小國(소국)은 馬韓(마한)聯盟體(연맹체)의 一員(일원)으로서 盟主國(맹주국)과 여러 가지 形態(형태)의 結束(결속)關係(관계)를 유지하면서도 土着的(토착적)인 勢力(세력)基盤(기반)을 그대로 간직한 채, 3世紀(세기) 以後(이후)까지 個別的(개별적)인 成長(성장)을 지속하다가 百濟(백제)에 樸樕(복속)되었다.
直接(직접) 位置(위치)批正(비정)을 示導(시도)해보고자 했으나, 實質的(실질적)으로 音相似(음상사) 外(외)에는 考證(고증)을 示導(시도)해볼만한 方法(방법)이 없고, 上(상)·中(중)古音(고음)을 硏究(연구)하는 것은 내 知識(지식)水準(수준)으로는 도저히 理解(이해)하기가 힘들어 抛棄(포기)했다. 本來(본래)는 박순발 先生(선생)의 批正(비정)에 대해 批評(비평)을 해보고자 始作(시작)한 일이었는데, 하면 할 수록 懷疑感(회의감)만이 느껴졌다.
우선 가장 먼저 指摘(지적)을 해보고자 하는 점은, <三國史記(삼국사기)>地理志(지리지)의 文獻(문헌) 成立(성립) 時點(시점)에 관한 問題(문제)이다. 일찍이 윤경진 先生(선생)은 <三國史記(삼국사기)>地理志(지리지)의 文獻(문헌)批評(비평)을 통해, 이 地理志(지리지)의 目錄(목록) 構成(구성)이 新羅(신라) 當代(당대)의 것이 아닌 <三國史記(삼국사기)>가 編纂(편찬)된 時點(시점)의 高麗(고려)의 地名(지명) 沿革(연혁) 資料(자료)를 根幹(근간)으로 再構成(재구성) 된 것으로 밝혀낸 바가 있다. 卽(즉), <三國史記(삼국사기)>地理志(지리지)는 3世紀(세기) 初盤(초반) 무렵의 3韓(한) 國家(국가)들의 地名(지명)을 考證(고증)하기엔 年代(연대)의 差異(차이)가 상당히 큰 편이다.
結局(결국) <三國史記(삼국사기)>의 地名(지명)들은 新羅(신라) 하대~高麗(고려) 中期(중기) 무렵의 鄕札(향찰) 表記法(표기법)에 따라 作成(작성)된 것이고, <三國志(삼국지)>의 地名(지명)은 上古音(상고음)에서 中古音(중고음)으로 넘어갈 무렵의 發音(발음)을 根幹(근간)으로 當代(당대)의 固有語(고유어)를 近似(근사)하게 옮겨적은 標記(표기)라는 差異(차이)가 發生(발생)한다.
두번째로 指摘(지적)하고자 하는 점은, 위에서 言及(언급)한대로 <三國史記(삼국사기)>地理志(지리지)가 高麗(고려) 中期(중기) 무렵에 再構成(재구성)된 資料(자료)인 만큼, 新羅(신라) 當代(당대)에는 주(州)·군(郡)·현(縣)과 對等(대등)한 고을[邑]로써 技能(기능)했던 향(鄕)이, 實質的(실질적)으로 법외(法外)의 잡다한 特殊(특수)集團(집단)으로 전락한 高麗(고려) 中期(중기)의 高麗人(고려인)의 시각으로 인해 一括的(일괄적)으로 排斥(배척)되어 모두 記錄(기록)되지 않게 되면서, <三國史記(삼국사기)>地理志(지리지)의 地名(지명)들이 實質的(실질적)으로 新羅(신라) 하대의 모든 行政(행정)地名(지명) 조차 제대로 反映(반영)하지 못하게 된 점을 指摘(지적)하고 싶다. 卽(즉), 3世紀(세기) 무렵에는 70여개의 3韓(한) 小國(소국) 中(중) 하나로 待遇(대우)받던 地域(지역)이더라도, <三國史記(삼국사기)>地理志(지리지)에선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代表的(대표적)으로 백제국(伯濟國)의 例(예)를 擧論(거론)할 수 있는데, <三國史記(삼국사기)>에서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또는 한성(漢城)으로 登場(등장)하는 3世紀(세기) 무렵의 百濟國(백제국)의 中心地(중심지)에 대한 沿革(연혁)을 <三國史記(삼국사기)>地理志(지리지)에서 찾을 수 없기에, 그 位置(위치)를 批正(비정)하는데 있어 과거 河南(하남) 춘궁동설·稷山說(직산설) 등의 論爭(논쟁)이 있었다. 最近(최근) 風納土城(풍납토성)에 대한 考古學的(고고학적) 硏究(연구)의 成果(성과)가 充積(충적)되면서 이 부분에 대한 論爭(논쟁)은 事實(사실)상 終了(종료)되었는데, 다른 3韓(한) 國家(국가)들이라고 이러한 境遇(경우)가 없으란 法(법)이 없다.
參考(참고):現在(현재)의 忠南(충남) 天安市(천안시) 직산읍으로 百濟(백제)의 첫 都邑地(도읍지)인 위례성(慰禮城)이 있었다고 傳(전)해지는 곳이다. 本來(본래) 百濟(백제)의 영토였다가 高句麗(고구려)가 取(취)해 사산현(蛇山縣)으로 고쳤고, 景德王(경덕왕) 16년(757)에는 백성군(白城郡: 京畿道(경기도) 安城市(안성시)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高麗) 太祖(태조) 23년(940)에 직산현(稷山縣)으로 고쳤고, 현종(顯宗) 9년(1018) 천안부(天安府)의 속현(屬縣)이 되었다. 高宗(고종) 32년(1895) 郡(군)으로 昇格(승격)하였고 2002년 天安市(천안시) 禝山邑(직산읍)이 되었다.
參考(참고):춘궁동(春宮洞)은 京畿道(경기도) 河南市(하남시)의 法定洞(법정동)이다. 南(남)쪽으로는 京畿道(경기도) 廣州市(광주시) 南漢山城(남한산성)면과 接(접)하고 있고, 東(동)쪽으로 泉峴洞(천현동), 西(서)쪽으로 甘北洞(감북동)과 各各(각각) 接(접)한다.
參考(참고):河南市(하남시) 行政(행정)
行政(행정)組織(조직)
5국 1단 3담당관 25과 1의회(1과) 1직속(2과) 2소(3과) 13동 157팀 ⇒ 公務員數(공무원수)(定員(정원) 771名(명)
13洞(동) 369統(통) 2,003班(반) (法定洞(법정동) 24個洞(개동)
行政洞(행정동)과 法定洞(법정동)
법정동(法定洞) : 법(法)으로 정(定)한 동(洞). 대부분 1914년 施行(시행)된 行政區域(행정구역) 統廢合(통폐합) 때 定(정)해진 것으로, 예로부터 傳(전)
해온 固有(고유) 地名(지명)을 그 名稱(명칭)으로 하며 거의 變動(변동)이 없음.
法定洞(법정동)은 身分證(신분증)·신용카드 및 財産權(재산권)과 關聯(관련)된 各種(각종) 공부(公簿)의 住所(주소)에 使用(사용)됨.
행정동(行政洞) : 行政(행정) 運營(운영)의 便宜(편의)를 위하여 設定(설정)한 行政區域(행정구역)으로서 住民(주민) 數(수)의 增減(증감)에 따라 隨時(수시)로 設置(설치) 또는 廢止(폐지)됨.
公簿(공부)의 保管(보관)과 民願(민원) 發給(발급), 住民(주민)管理(관리) 등 行政(행정) 處理(처리)를 管轄(관할)함.
하나의 法定洞(법정동)을 2個(개) 以上(이상)의 行政洞(행정동)으로 運營(운영)하거나 2個(개) 以上(이상)의 法定洞(법정동)을 하나의 行政洞(행정동)으로 運營(운영)할 수 있음.
이러한 점 때문에 音相似(음상사) 硏究(연구)가 과연 實效性(실효성)이 있는 硏究(연구) 方法(방법)인지 큰 疑問(의문)이 든다. 비록 박순발 先生(선생)의 批正(비정)을 위 地圖(지도)에 反映(반영)하기는 했으나, 이것이 正確(정확)하거나 過去(과거)의 硏究(연구)들에 비해 더 나은 方式(방식)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現實的(현실적)으로 馬韓(마한) 地名(지명) 批正(비정) 中(중) 그나마 믿을만한 것은 百濟國(백제국) 외에, 熊津都督府(웅진도독부) 地名(지명)과 聯關(연관)성이 있는 境遇(경우)에 限定(한정)된다고 여겨진다.
진한(辰韓) 位置(위치)의 批正(비정)에 대해서는 最近(최근)의 硏究(연구)가 무척이나 적은 關係(관계)로 사실상 空欄(공란)이 되어 있다. 김태식 先生(선생)의 著書(저서)에 불사국(不斯國)과 사로국(斯盧國)에 대한 位置(위치) 批正(비정)이 包含(포함)되어 있어 이를 함께 包含(포함)시켰다.
弁辰(변진)의 境遇(경우)에는 後日(후일)의 '伽倻(가야)'와 密接(밀접)한 聯關(연관)성이 있어온 만큼, 상당한 水準(수준)의 硏究(연구)가 進陟(진척)이 되어있고, 이에 대한 反論(반론)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에 個人的(개인적)으로 김태식 先生(선생)의 批正(비정)은 相當(상당)한 信憑性(신빙성)을 擔保(담보)하고 있다고 評價(평가)한다. 김태식 先生(선생)의 硏究(연구)에는 낙노국(樂奴國)에 대한 批正(비정)만이 漏落(누락)되었다
<三國志(삼국지)>에는 百濟國(백제국)이나 斯盧國(사로국:新羅(신라)이 特別(특별)히 强國(강국)이라고 볼만한 要素(요소)가 없다. 특히 特別(특별)한 신지(臣智)들에게 덧붙이는 呼稱(호칭)으로 言及(언급)되는 "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狗邪秦支廉("신운견지보안사축지분신이아불예구사진지렴) "라는 句節(구절)에 百濟國(백제국)과 斯盧國(사로국)에 該當(해당)될만한 稱號(칭호)가 發見(발견)되지 않는 점이 指摘(지적)되어, <三國史記(삼국사기)> 初期(초기) 記事(기사)들에 대한 懷疑論(회의론)에 根據(근거)가 되기도 하는데, 個人的(개인적)으로 이 句節(구절)은 나름 有意(유의)해서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목지국(目支國)의 진왕(辰王)이 3韓(한) 全體(전체)를 統率(통솔)하는 聯合體(연합체)의 盟主(맹주)였는가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점이 發見(발견)된다. <三國志(삼국지)>에서는 辰韓(진한)과 弁辰(변진) 24個國(개국)의 國名(국명)들을 羅列(나열)하고는 이 中(중) 12個國(개국)만이 辰王(진왕)에게 신속(臣屬)되어 있다고 明示(명시)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狗邪秦支廉(신운견지보안사축지분신이아불예구사진지렴)"에 대해서는 "安邪踧支濆(안사축지분)"과 "狗邪秦支廉(구사진지렴)"의 例(예)를 봤을땐, 國名(국명)2字(자)+稱號(칭호)3字(자)의 구문(句文)으로 이뤄진 文章(문장)이라고 생각한다. 漢文(한문)이 구절(句節) 리듬(rhythm:韻律)의 反復(반복)성을 重視(중시)하는 文章(문장)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앞의 "臣雲遣支報(신운견지보)"·"臣離兒不例(신이아불예)" 역시 마찬가지의 構造(구조)로 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위 文章(문장)은 '신운(臣雲)'의 견지보(遣支報), '안야(安邪)'의 축지분(踧支濆), '신리(臣離)'의 아불례(兒不例), '구야(狗邪)'의 진지렴(秦支廉)으로 끊어진다. "臣雲(신운)"은 馬韓(마한)의 '신운신국(臣雲新國)', '安耶(안야)'와 '구야(狗邪)'는 弁辰(변진)의 '安耶國(안야국)'과 '구야국(狗邪國)'에 그대로 該當(해당)된다. '신리'는 어디에 該當(해당)되는지 意見(의견)이 분분하다. '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안사축지분신이아不불예)' 部分(부분)을 安邪踧支 濆臣離兒不例(안사축지 분신이아불예)로 끊어, 國名(국명) 部分(부분)을 '濆臣離(분신이)'로 보고, 이 中(중) '濆臣(분신)'을 '臣濆(신분)의 倒置(도치)로 보아 신분고국(臣濆沽國)'으로 解釋(해석)하는 境遇(경우)도 있으나, 이는 漢文(한문)의 文章(문장)構造(구조)로 보기 어려울 뿐더러 지나치게 作爲的(작위적)인 解釋(해석) 方式(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신리'가 신분고국(臣濆沽國)에 該當(해당)되는지는 더 살펴봐야할 여지가 있으나, 辰韓(진한) 및 弁辰(변진) 國名(국명)들에선 '臣(신)'字(자)가 登場(등장)하지 않는 만큼 馬韓(마한) 中(중) 하나인 것은 確實(확실)해보인다.
參考(참고): 臣濆沽國(신분고국),
參考(참고):臣濆活國(신분활국)은 馬韓(마한) 54個國(개국) 中(중) 하나. 三國志(삼국지) 魏書(위서) 東夷傳(동이전)에서 앞 部分(부분)에 나온 것으로 보아 只今(지금)의 京畿道(경기도)에 位置(위치)한 것으로 推定(추정)된다.
結局(결국) 特別(특별)한 稱號(칭호)가 붙은 신지는 馬韓(마한) 2國(국)과 弁辰(변진) 2國(국), 都合(도합) 4個國(개국)이 되는 셈인데, <三國史記(삼국사기)>에 따르면 新羅(신라)는 建國(건국) 初期(초기)부터 馬韓王(마한왕)에게 굽히지 않는 모습을 보였고 百濟(백제)는 아예 滅亡(멸망)(...)을 시켜버리는 水準(수준)에 이르렀음에도, 이 名單(명단)에는 包含(포함)되지 않는 奇怪(기괴)한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고 3世紀(세기) 무렵의 百濟國(백제국)과 斯盧國(사로국)이 實際(실제)로는 弱小(약소)한 勢力(세력)이었는지도 疑問(의문)스럽다. <三國史記(삼국사기)>의 記錄(기록)에 依據(의거)하지 않더라도, 考古學的(고고학적) 硏究(연구)에서도 이 時期(시기)의 百濟國(백제국)과 斯盧國(사로국)은 相當(상당)한 規模(규모)를 갖추고 周邊(주변)地域(지역)으로 影響力(영향력)을 擴大(확대)해나가는 面貌(면모)들이 捕捉(포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矛盾(모순)은 어떻게 解決(해결)할 것인가?
個人的(개인적)으로는 <三國史記(삼국사기)> 初期(초기)記錄(기록)의 '年代(연대)'를 그대로 盲信(맹신)하는 것은 危險(위험)하다고 여기는 편이지만, 그 內容(내용)까지 不信(불신)할 수 있는 것인지는 지극히 懷疑的(회의적)이다. <三國史記(삼국사기)>에 나타난 대로, 百濟國(백제국)과 斯盧國(사로국)은 이미 3世紀(세기) 以前(이전)부터 目支國(목지국)의 辰王(진왕)과는 敵對的(적대적)인 關係(관계)에 놓였던 것으로 본다면, <三國史記(삼국사기)> 初期(초기)記錄(기록)의 對外關係(대외관계) 記事(기사)들에서 特別(특별)히 矛盾點(모순점)을 찾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百濟國(백제국)은 미추홀(彌鄒忽)의 비류국(沸流國)?을 倂合(병합)하고, 只今(지금)의 春川市(춘천시)에 該當(해당)하는 주양(走壤)에서, 이른바 春川(춘천) '맥국(貊國)'으로 보여지는 말갈(靺鞨)과 對峙(대치)한 점을 볼때, 이미 3世紀(세기) 무렵에는 百濟國(백제국)이 漢江(한강) 中(중)·下流(하류) 流域(유역)에 걸친 勢力圈(세력권)을 形成(형성)하고 있었던 점을 文獻的(문헌적)으로도 否認(부인)하기 힘들다. 斯盧國(사로국) 역시 유리왕(琉璃王) 17年(년)에 該當(해당)하는 西紀(서기) 40年(년)(...) 무렵에 동예(東濊)의 화려국(華麗國)·불내국(不耐國) 聯合軍(연합군)과 衝突(충돌)이 있었고 이에 對立(대립)하는 貊國(맥국)과 遭遇(조우)한 記錄(기록)이 있는데, 華麗國(화려국)과 不耐國(불내국)이 毌丘儉(관구검)에 의해 高句麗(고구려)의 東濊(동예) 支配力(지배력)이 崩壞(붕괴)된 以後(이후) 잠시 獨立(독립)을 되찾은 勢力(세력)임을 勘案(감안)하면, 이 일은 實題(실제)로는 3世紀(세기) 무렵에 있었던 일로 判斷(판단)된다.
이를 달리 解釋(해석)한다면, 新羅(신라)는 이미 3世紀(세기) 무렵에 江原道(강원도) 東海岸(동해안)까지 進出(진출)해 있었던 점을 副因(부인)하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된다. 百濟國(백제국)과 斯盧國(사로국)이 특별히 '稱號(칭호)'가 주어지지 않은 것은 勢力(세력) 規模(규모)에 의한 問題(문제)가 아닌, 目支國(목지국)의 辰王(진왕)과 對立(대립)關係(관계)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參考(참고):동예(東濊, 紀元前(기원전) 1世紀(세기) ~ 6世紀(세기)경는 韓半島(한반도) 東海岸(동해안) 一帶(일대)에 東沃沮(동옥저)와 자리잡았던 初期(초기) 部族(부족) 國家(국가)의 하나이다. 예(濊)라고 불렸으나, 넓은 의미의 濊(예)와 區別(구별)하기 위해 통상 '東濊(동예)'라고 부른다.
參考(참고):魏書(위서)
參考(참고):지안시(집안시, 중국어: 集安(집안) 또는 輯安(집안), 병음: J'ān)은 中華(중화)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 지린성(吉林省) 퉁화시(通化市)의 현급시이다. 면적은 3408 km², 人口(인구)는 약 23萬(만) 명이다. 鴨綠江(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 자강도(慈江道)만포시(滿浦市)와 마주보고 있다. 高句麗(고구려)의 首都(수도)였던 國內城(국내성)이 있던 곳으로 批正(비정)되고 있다.
參考(참고):관구검기공비(毋丘儉紀功碑)
參考(참고):퉁화시(통화시, 中國語(중국어) 간체자: 通化( 통화), 병음: Tōnghuā)는 中華(중화)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 지린성의 지급시(市)이다. 面積(면적)은 約(약) 15,600,km², 人口(인구)는 約(약) 230萬(만) 名(명)이다.
參考(참고):지린성(한국어: 吉林省(길림성), 중국어: 吉林省(길림성), 병음: Jílín Shěng; 滿洲語(만주어): girin ula)은 中國(중국) 東北(동북) 地方(지방)의 한 省(성)이다.
定意(정의)
中國(중국) 吉林省(길림성) 통화시(通化市), 집안시(集安市) 판석령(板石嶺)에서 發見(발견)된 魏(위)나라 長帥(장수) 毌丘儉(관구검) 관련 戰功碑(전공비).內容(내용)길이 약 25.8㎝, 너비 약 26.4㎝, 碑文(비문)의 書體(서체)는 한예서체(漢隷書體)이고, 자경(字徑)은 약 2.7㎝이다.244년(東川王(동천왕) 18) 8월에 魏(위)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毌丘儉(관구검)이 高句麗(고구려)를 侵入(침입)하여 高句麗(고구려)의 首都(수도) 국내성(國內城)을 占領(점령)하고 245년에는 현도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 등이 다시 侵攻(침공)하였는데, 이 戰爭(전쟁)에서 勝利(승리)한 관구검(毋丘儉)은 戰功(전공)을 記念(기념)하는 碑石(비석)을 세웠다.이 때 記錄(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석각(石刻)의 一部(일부)가 1906년 滿洲(만주)의 집안현(輯安縣) 판석령(板石嶺)에서 道路工事(도로공사) 中(중)에 發見(발견)되었다. 碑面(비면)의 左右(좌우)와 아래쪽이 떨어져나가서 內容(내용)을 完全(완전)히 把握(파악)할 수는 없다.判讀(판독)이 可能(가능)한 部分(부분)은 第(제)1行(행)의 ‘정시삼년고구려반(正始三年高句驪反)’, 第(제)2行(행)의 ‘독칠아문토구려오(督七牙門討句驪五)’, 第(제)3行(행)의 ‘부견구육년오월선(復遣寇六年五月旋)’, 第(제)4行(행)의 ‘토구장군외오환선우(討寇將軍巍烏丸單于)’, 第(제)5行(행)의 ‘위구장군도정후(威寇將軍都亭侯)’,第(제)6行(행)의 ‘행비장군령(行裨將軍領)’, 第(제)7行(행)의 ‘비장군(裨將軍)’ 뿐이다.이 碑(비)가 새겨진 年代(연대)에 대해서는 245년說(설)과 246년說(설)이 있지만 대체로 245년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관구(毌丘)’가 복성(複姓)이고 검(儉)이 이름이라 보고, 이 碑(비)의 名稱(명칭)도 一般的(일반적)으로 毌丘儉(관구검) 紀功(기공)비라 하는데, ‘毌丘(관구)’를 ‘무구’로 읽어야 한다는 說(설)도 있다.
參考文獻(참고문헌)
삼국사기삼국지(三國志)『朝鮮金石總覽』 上(朝鮮總督府,1919)『朝鮮金石攷』(葛城末治,圖書刊行會,1974)
辰韓(진한)·弁辰(변진) 24個國(개국) 中(중) 12國(국) 만이 辰王(진왕)에 新屬(신속)된 情況(정황) 역시, 對外的(대외적)으로 伽倻(가야)에 所屬(소속)된 것으로 보이는 不斯國(불사국)을 除外(제외)한 다른 辰韓(진한) 10個國(개국)과 現在(현재) 釜山(부산)廣域市(광역시) 東萊區(동래구) 一帶(일대)에 該當(해당)되는 弁辰(변진)의 독로국(瀆盧國)이 斯盧國(사로국)에 新屬(신속)되거나 目支國(목지국) 辰王(진왕)의 影響力(영향력)에서 벗어난 狀態(상태)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個人的(개인적)으로 <三國志(삼국지)>에 言及(언급)된 馬韓(마한) 國名(국명)의 順序(순서)는 나름 重要(중요)하게 여겨봐야할 部分(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반드시 거리나 경로를 그리는 것은 分明(분명)히 아니겠으나, 어느정도 '圈域(권역)'의 性格(성격)을 反映(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에 따라 馬韓(마한)은
①黃海道(황해도) 및 臨津江(임진강) 流域(유역)→
②百濟國(백제국)(漢江(한강)流域(유역))→
③京畿道(경기도) 南部(남부)~湖西(호서) 地方(지방)→
④全羅北道(전라북도)→
⑤全羅南道(전라남도) 順(순)의 分布(분포)가 있을 것으로 判斷(판단)된다. 辰韓(진한)은 不斯國(불사국)과 斯盧國(사로국)을 除外(제외)하면, 대체로 慶尙北道(경상북도) 洛東江(낙동강) 이서 地域(지역)과 忠淸北道(충청북도) 忠州市(충주시)·堤川市(제천시)·丹陽郡(단양군) 一帶(일대) 및 江原道(강원도) 原州市(원주시)·寧越郡(영월군) 一帶(일대)에 걸쳐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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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승철 ~ 월 2021-01-04 오전 12:04 ~ 좋은 역사 자료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