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70
11월10일[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연중 제31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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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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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GRb29Q822X8
[서울대교구 이경록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길음동본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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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상에서의 성공도 중요합니다만!>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가르침은 특별하게 예외적이며, 지극히 은유적이므로 깊이 묵상하고, 잘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불의한 집사는 막대한 금액의 공금을 횡령한 것뿐 아니라 공문서위조까지 했으니 현행법상 적어도 징역 5년은 구형받아야 할 범죄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십니다. 정의와 진실을 촉구하시며, 올바른 길을 강조하시는 예수님께서 이런 가르침을 주시다니 어찌된 일일까요?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 집중해야 할 대목은 바로 이 구절입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
이 세상 사람들 한번 보십시오. 세상에서의 성취와 성공을 위해 얼마나 머리를 쥐어 짜내고 죽기 살기로 노력하는지 모릅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이 성공의 가장 중요한 척도라고 여기는 부의 축적과 증식을 위한 그들의 노력을 상상을 초월합니다. 자신이 투자한 종목의 주식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분 단위로 확인합니다. 좋은 매물이 나왔다면 언제, 어디라도 달려갑니다. 자신이 펼치고 있는 사업체 고객의 만족을 위해 그야말로 자세를 완전 낮추고 허리를 굽힙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측면을 예의주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최종적인 성공, 영원한 목표인 영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획득을 위해 자신이 지닌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부으라는 초대입니다.
한 형제가 틈만 나면 ‘어떻게 하면 고기를 원 없이 많이 잡을까?’ 갖은 고민을 하고, 이런 저런 장비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제가 그랬습니다. “그런 노력의 10분의 1만 영혼 구원에 투자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 말을 하고 나니, 저 역시 갑자기 부끄러워졌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상에서의 성공을 위해 끊임없이 전략을 짜고, 수정하고, 시뮬레이션 작업을 합니다. 시행해보고 부족한 부분은 어떻게 해서든 보완하고, 수립한 계획이 성공하기까지 갖은 노력을 무한 반복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물론 지상에서의 성공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영원한 성공을 얻기 위해 얼마나 투자하고 있고, 고민하고 있으며, 전력투구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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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2020. 11.06.
https://youtu.be/ZyxZ3vJr3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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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쓴다고 다 친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
오늘부터 시작하는 루카 복음 16장은 인간이 재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15장에서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하고 떠난 탕자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는 유산을 가지고 나가서 그것을 탕진하였습니다. 그때 그의 주위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재물이 사라지자 아무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청지기가 많은 친구를 사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왜 같은 돈을 써도 누구에게는 친구가 생기고 누구에게는 생기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의한 재물’입니다. 친구를 사귀는 도구는 ‘불의한 재물’이지 나의 재물이 아닙니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재물이 나의 것이라고 느끼면 그것으로는 친구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쓴 돈을 반드시 회수하려 합니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보다는 부담스러운 마음을 줍니다.
따라서 주면 보답은 받을 수 있으나 관계가 형성되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그 사람 것이 아니니 갚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게 베풀어야 친구가 생깁니다. 오늘 청지기가 그렇게 재물을 써서 친구를 사귄 사람입니다.
누군가 쓴 「왠지 부담스러운 사람이 있다」란 글을 소개해 드립니다. 왜 우리는 남에게 잘해주면서도 친구가 생기지 않을까요? 이 글에 그런 고민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싫지는 않은데 더 가까워지는 게 부담스러운 사람이 있다. 이야기해 보면 재미있고 공유하는 느낌도 많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다 좋은데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될 것 같은, 커피 같은, 아이스크림 같은 그런 사람이 있다.
멀어지면 걱정이 되고 오래 말 안 하면 이대로 침묵이 굳어질까 두려운 사람이 있다. 함께 오래 이야기 나누는 좋은 사람, 부담 없이 이야기해도 되는 사람, 그래서 여기서 그냥 말하고 싶은데 슬슬 다가와 앉거나 더 친절해지려 하거나 있어야 할 경계선 같은 걸 무시하려 하는 그런 사람이 있다.
사실 알맞지 않으면 저도 힘겨울 텐데, 저도 다 생각이 있을 텐데 이쯤이 그래도 좋다는 걸 저도 알 텐데 슬그머니 자꾸 가까워지는, 나도 모르게 가까워져서 놀라서 뒤로 발을 빼게 되는 사람이 있다.
왜 그러는 걸까. 그가 생각하는 것과 내가 생각하는 것이 다른 걸까. 내가 잘못 생각한 걸까. 서로 오해에서 이만큼 다가선 걸까. 아니, 그런 건 아니다.
잘못 생각할 것이 무엇이 있다고. 그 또한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는 것을. 그 또한 가끔 침묵하고 서먹하고, 쑥스럽기도 한 것을. 사람 사이란 벽돌처럼 가운데에 쌓아 올리는 경계가 아닌 것을, 물 흐르듯 흐르기도 하는 것을,
그래서 가끔 내가 넘어가고 저가 넘어와 서로 미안하기도 한 것을. 그래서 더 걱정돼서 물러나, 그 부담스러움을 다시 일깨우는 것을. 아니, 솔직히, 친절해지고 싶지만 그걸 호감으로 느낄까 봐 두려운 사람이 있다.
호감이 아니란 건 아니지만, 호감 이상으로 느낄까 봐 두려운 사람이 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아니 원래 그래야 하는 것처럼 저대로 나대로 잘 있으면서 쿨하게 그래 쿠울하게 부담 없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조금만 더 잘해주면 내가 잘해준 것보다 더 잘해줘서 위험한 사람이 있다.
알맞은 마음을 재는 내 마음이 고장 난 걸까. 알맞은 마음 이상으로 늘 퍼주려 하는 그 마음이 고장 난 걸까. 늘 한결같이 친절하고 고맙고 따뜻하고, 그래서 불편한 좀 오래갔으면 좋을, 친구가 되고 싶은 부담스러운 사람이 있다. 누군가에게 나도 이런 사람일까.”
왜 우리는 잘해주면서도 누군가에게 부담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그 사람 속에 자신이 준 것에 대한 보답을 받겠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것이니까 손해를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약삭빠른 종에게 이것저것 탕감을 받는 이들의 마음엔 부담이 없습니다. ‘어차피 자기 것 주는 것도 아닌데 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고맙기도 한 것입니다. 비록 갚아야 할 의무는 없지만 고마워서 내가 할 수 있을 만큼의 보답만 하면 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친구 사입니다. 우리는 그런 편안한 사람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친구가 생깁니다.
유튜브 채널 ‘애니멀봐’에 「할머니 장례식에서 눈물 흘리던 백구가 2년 동안 한 일」이란 짧은 동영상이 있습니다. 할머니가 노환으로 돌아가시자 나이가 많고 몸도 성하지 않은 백구는 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할머니와 함께 걷던 떡집과 절 등을 순례합니다.
보통 젊은 주인이었으면 개에게 밥을 주거나 보살펴 줄 때도 무언가 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부담 없는 사랑을 베푸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사랑을 받았어도 할머니의 사랑이 더 순수하고 깨끗하여 할머니를 더 생각하는 것일 수 있겠습니다.
‘어차피 나도 받은 건데 뭐’라고 생각하며 재물을 쓴다면 그 재물을 받는 이들은 그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이만큼이나 해주는데’라고 생각한다면 상대는 부담을 느낄 것입니다.
고마움을 느끼게 할 것인지, 부담을 느끼게 할 것인지는 주는 사람의 자세에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 친구가 생기고 안 생기고가 결정되고, 하느님 나라에서 나를 맞아들일 사람이 생길 것인가, 아닌가가 결정됩니다.
부담이 아니라 감사가 나오게 재물을 사용해야 친구가 생깁니다. 돈을 빌려주는 사람과 거저 주는 사람 중에 누가 더 사랑스럽겠습니까? 예수님은 감사가 나오게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십니다. 그 이유는 그것을 당신 것으로 여기지 않고 다 아버지께 받은 것으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는 모든 것, 그것들은 항상 본래 나의 것이 아닌 ‘불의한 재물’이어야만 합니다. 세상에 나의 것은 없습니다.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줄 때는 친구가 생길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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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각자가 스스로 살길을 도모함’이라는 뜻입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전쟁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사망하고 부상하였습니다. 전쟁의 과정에서 많은 난민이 발생하였습니다. 국가가 보호해 주지 못하는 팔레스타인의 난민들은 말 그대로 ‘각자도생’해야 합니다. 교구청에서 주교님을 만났을 때입니다. 주교님께서는 제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떻게 지낼만 합니까?” 그 말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습니다. ‘밥은 먹고 지내는지? 신문사 운영은 잘 되는지? 건강하게 잘 지내는지? 사제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는지?’라고 묻는 것 같았습니다. 교구청에 있는 동창 신부님이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조 신부는 사막에서도 잘 살 겁니다.” 주교님께서도 “조 신부는 잘 지낼 거야.”라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돌아보니 지난 4년 동안 그럭저럭 잘 지낸 것 같습니다. 팬데믹 중에도 잘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브루클린 교구의 한인성당 사제들과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들과 자전거도 타고, 캠핑도 다녔습니다. 교우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언제나 든든하게 자리를 지켜주는 직원들의 도움도 컸습니다. 제가 신문사에만 있었다면 이렇게 많은 분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퀸즈성당의 미사를 도와주었고, 브루클린 한인성당의 미사도 도와주었습니다. ME 대표신부와 꾸르실료 지도신부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분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매일 새벽이면 ‘복음묵상’을 하였습니다. 묵상 내용을 이웃들과 나누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니 감사했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꼭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복음묵상은 제게 힘이 되었습니다. 성지순례 중에도, 휴가 중에도 복음묵상은 계속하였습니다. 매일 3시간은 걸었습니다. 걸으면서 묵주기도를 하였고, 걸으면서 강의를 들었고,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였습니다. 제가 각자도생할 수 있었던 것은 교우들의 도움, 복음묵상, 규칙적인 운동에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약은 청지기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각자도생이라는 면에서 세상 사람들이 빛의 자녀보다 더 지혜롭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정직하지 못하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순수하지 못하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인내하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나누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이 전해 주신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없습니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선한 일은 아주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고, 악한 일은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하지 마라!’ 마음을 정리할 수 있도록 해준 짧지만 좋은 글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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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6,1-8: 약은 집사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집사는 교활한 사람이다. 집사는 자기가 맡은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횡령을 하였다. 주인은 자기의 부정을 알아차리고 이제 자기를 해고하겠다고 통고한다. 그런데 집사는 기발한 생각을 해낸다. 그는 장부를 조작하여 빚진 자들에게 실제로 빚진 액수보다 훨씬 적은 액수로 고쳐 쓰게 했다. 그렇게 해두면 자신에게 해고라는 최악의 불운이 닥치더라도 빚진 자들에게서 자기가 또 받아낼 수 있는 좀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놓는다. 이러한 처사에 주인은 충격을 받았지만, 약은 집사의 교활한 처사에 감탄하며 집사를 칭찬하고 있다. 그들이 세속적인 삶을 위해서 교묘한 수단 방법을 짜내고 있다. 약은 집사의 비유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다.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는 이 집사와 같이,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를 준비하면서 오늘을 잘 살아야 한다는 종말론적 가르침이 담긴 말씀이다.
세상의 이익을 위해서 이처럼 갖은 재주, 갖은 꾀를 다 동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우리의 영적인 삶을 위해서 무엇을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사람들이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서 돈이나 부귀영화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만큼 하느님과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노력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겠는가! 집사가 횡령하고 사기를 쳐가면서 준비한 그래서 그토록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삶도 언젠가 끝나고 말 삶이다. 그러니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우리의 육체적인 삶을 위해서 노력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위해서도 모든 노력을 다할 수 있는 삶을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도 언젠가는 하느님 앞에 우리가 책임을 갖고 관리하던 우리 자신의 집사 일에 대한 셈을 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셈을 바치는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날에 대비하여 언제나 준비되어있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고, 항상 깨어있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주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항상 지금 여기에서부터 구원을 체험하고 그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우리도 그만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여야 우리가 맡은 집사 일을 잘하는 것이다. 언제나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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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조금 당황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협잡꾼’ 또는 ‘사기꾼’처럼 묘사된 집사의 모습을 주인이 칭찬하는 것으로 비유 이야기가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루카 복음사가는 독자들에게 ‘협잡꾼’이나 ‘사기꾼’이 되라는 것일까요? 복음사가는 이 비유에서 ‘협잡꾼’의 모습 그 자체를 그리스도인의 본보기로 내세우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라는 대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곧 세속적 이익을 좇아 재빠르고 능수능란하게 움직이는 비유 속 집사의 모습 그 자체가 그리스도인의 본보기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자녀들도 그처럼 부정한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하는데, 하물며 빛의 자녀들은 어떠하여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풀이됩니다. 이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실현과 관련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데 능숙하고 현명하여야 한다는 교회 공동체를 향한 신앙적 권고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일상에서 경험하듯 교회 공동체는 천사들로만 구성된 집단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회개하는 죄인들의 공동체, 자신의 잘못을 겸허히 인정하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공동체, 성령께서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 주시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의 구성원인 우리 그리스도인은 각자의 삶 속에서 복음 정신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데에 얼마나 적극적입니까?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고자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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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약은 집사의 비유>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루카 16,1ㄴ-2)
여기서 ‘집사’는 주인이 맡긴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은, 재산 관리를 잘못해서 주인에게 손해를 입혔다는 뜻인데, 주인의 재산을 ‘횡령’한 일도 있을 것입니다. ‘말을 듣고’라는 말과 ‘소문이 들리는데’라는 말만 보면 주인이 ‘소문’만 듣고서 집사를 해고했다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아마도 누군가가 주인에게 집사의 비리와 부정을 알렸을 것이고, 그래서 주인은 정확한 상황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인이 집사를 해고한 것은 막연한 소문을 근거로 한 일이 아니라, 직접 확인한 사실을 근거로 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집사 일을 청산하라는 주인의 말은, 가지고 있는 장부를 정리해서 제출하라는 뜻입니다. 집사를 해고하는 것은 확정된 일이지만, 그를 곧바로 쫓아낸 것은 아니고, 정리할 시간을 준 것입니다. 이것은 12장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하느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목숨을 곧바로 되찾아 가신 것이 아니라, ‘오늘 밤에’ 되찾아 갈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그가 회개할 수 있도록 몇 시간의 여유를 주신 것입니다. ‘약은 집사의 비유’에서 주인이 집사에게 장부를 정리할 시간을 준 것도, 잘못한 일을 바로잡을 시간을 준 것입니다. 잘못한 일을 바로잡으면 해고가 취소될까?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그 부자가 회개한다고 해서 그의 목숨을 되찾아 가겠다는 하느님의 말씀이 취소되지 않는 것처럼, 집사를 해고한 일도 취소되지는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집사가 주인에게 앙심을 품고, 잘못한 일을 바로잡기를 거부한다면? 그러면 해고로 그치지 않고 감옥에 갇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잠시 맡기신 재산과 같습니다. ‘나’는(우리는) 주님이신 하느님께서 맡기신 인생이라는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입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하느님께서 장부를 정리해서 제출하라고 명령하시면,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인류 전체의 일로 생각하면, 그 시점은 ‘최후의 심판 날’이고, 각 개인의 경우에는, 지상에서의 삶을 마치는 임종 때입니다.
그런데 실제 현실을 보면 갑자기 임종을 맞이해서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장부를 정리할 시간은, 즉 회개하고 잘못을 바로잡을 시간은 ‘지금’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3-6.8)
이 상황을 겉으로만 보면, 잘못한 일을 바로잡기는커녕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데, 집사가 자기 잘못을 정말로 바로잡으려는 의도로 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자’에 관한 율법이 신명기에 있습니다.
“너희는 동족에게 이자를 받고 꾸어주어서는 안 된다. 돈에 대한 이자든 곡식에 대한 이자든, 그 밖에 이자가 나올 수 있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다. 이방인에게는 이자를 받고 꾸어주어도 되지만, 너희 동족에게는 이자를 받고 꾸어주어서는 안 된다.”(신명 23,20-21ㄱ)
빚진 사람들 처지에서는 ‘주인에게’ 빚을 진 것이지만,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꾸어주고 다시 그 빚을 받아내는 일은 모두 집사가 했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집사는 주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이자를 받았을 것이고, 그것을 자기가 차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해고 통보를 받자, 받은 이자를 돌려주고 사람들의 인심을 사려고 한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물론 그의 진짜 목적은 해고된 다음에 먹고살 길을 찾는 것이지만, 그래도 어떻든 잘못한 일을 바로잡은 것은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빚진 사람들은 이자를 내지 않게 되어서 좋아했을 것이고, 주인은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을 것이고, 집사는 먹고살 길을 찾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인이 왜 집사를 칭찬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집사를 칭찬할 주인은 없습니다. 잘했으니까 칭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속 사람들은 어떤 위기가 다가오면 자기들 나름대로 신속하고 영리하게 대처한다. 그런데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너희는 종말이 다가오는데도 대비하는 모습이 왜 이렇게 굼뜨냐?”
우리가 일생을 마치고 하느님 앞으로 가는 일은, 해고당하는 일이 아니라 임무 완수를 보고 드리는 일입니다. 그때가 되었을 때, 우리는 바오로 사도처럼“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7)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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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은 부정직한 집사의 비유입니다. 어느 부자의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가 재산을 멋대로 낭비하자, 주인은 그를 불러 해고하겠다고 통보합니다. 이에 집사는 오히려 더 뻔뻔스러운 일을 하지 않습니까? 부자에게 빚진 이들을 불러서 그 빚을 줄여 주며, 대신 집사인 자신에게 마음의 빚을 지게 한 것이지요.
따라서 집사에게 신세를 진 사람들은 조만간 그가 해고된 다음에는, 그 신세를 어떤 모양으로든지 갚아야 했던 것입니다. 정말로 약고 뻔뻔스러운 집사입니다.
그런데 복음 후반을 보면 주인은 이상하게도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지요.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했기 때문이라지만, 상당히 어색해 보이기만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까? 그것은 집사가 착하거나, 나쁘다는 것을 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위기에 처한 집사가 자신의 미래에 대한 대책을 민첩하게 세우는 행동을 본받으라는 것뿐입니다.
이처럼 세속의 자녀들은 자신의 앞날을 위해 약고 재빠르게 행동합니다. 그렇다면 빛의 자녀들인 그리스도인들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지금부터 계획을 잘 세워야 하겠습니다. 특히 주님을 받아들이려면 여러 가지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고, 편리한 것을 포기해야만 하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불필요한 것들을 손에 꽉 쥔 채, 이를 놓지 않으려고 얼마나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까? 더 큰 것을 얻으려면 작은 것을 포기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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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집사 이야기는 현대인들이 이해하기에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주인의 재산에 해를 입히는 일종의 ‘배임죄’를 저지르는 약은 집사가 주인에게 도리어 칭찬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문맥 안에서, 특별히 루카 복음의 신학 안에서 면밀히 읽어 보면 그 메시지가 명확히 드러납니다.
루카 복음서에서 재물은 하느님에게서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불의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보다 재물에 더 기대어 살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재물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는 그것들을 잘 관리하고 활용하여 ‘친구들을 만들기 위함’입니다.(루카 16장 9절 참조)
그래서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루카 16장 14절)처럼 재물을 마음대로,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해서는 안 되고, 이웃을 위하여 내놓음으로써 모두를 유익하게 하는 방식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집사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면서도, 자신이 관리하는 재산으로 이웃을 돕지는 않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 집사를 관리인 자리에서 내쫓으려 합니다. 그제야 집사는, 비록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재물의 본디 목적에 따라 자신이 해야 할 일, 곧 주인에게 빚진 이들의 빚을 탕감해 주는 일을 시작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복음을 전하려고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자랑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자랑하니 다소 어색하게 여겨질 만도 합니다만, 보통 바오로 사도가 무엇인가를 자랑할 때면 대개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는지를 자랑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위하여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낸 사람입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은 자기 것이 아니라 하느님 것이기에 기꺼이 하느님과 이웃을 위하여 내어놓은 사람입니다. 정말 올바른 집사의 모습을 지닌 사람입니다.
독서와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라고 맡기신, 본디 내 것이 아닌 하느님의 재물은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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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무엇을 나누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한동안 제가 가졌던 묵상거리입니다. 아주 조그마한 것이라도 나누며 하루를 살아가자고 다짐합니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고, 할 수 있는 것들 가운데 사소한 것 하나라도 나누고 싶었습니다. 열정, 시간, 미소, 마음, 그리고 사랑 …… 물론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정기적으로 후원을 하고,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하며 다른 이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하였습니다. 사람들을 만나 성경에 관한 이야기도 함께 나누고, 위로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공감해 주며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성체 앞에 앉아 반성할 때면, 사제로서 책임감 때문에 그들을 만났고 내 명예를 높이고자 열정을 쏟은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나눔에 대한 다짐은 언제나 저의 부족함을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이기적인 의도와 욕심으로 하루를 살아가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선행이나 봉사, 나눔이라 하더라도, 좀 더 깊이 살펴보면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의 비뚤어진 의도도 괜찮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약은 집사는 자신의 앞날에 대한 걱정 때문에, 인심을 얻고자 문서를 조작하고 주인의 재산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런데 주인의 반응이 더욱 놀랍습니다. 주인은 어떤 생각으로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을까요? 주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재산을 손해 보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비로운 주인에게는 자신의 손해보다는, 빚을 진 가난한 사람들이 조금은 풍족해지고,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얻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바로 불의한 종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가 어떤 의도로 그런 행동을 하였는지는 어쩌면 주인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의 행동이 타인에게 나눔의 행위가 되었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의도와 욕심은 분명 잘못이지만, 더 나쁜 것은 나눔을 실천하지 않는 일입니다. 좋은 의도와 자비의 마음으로 나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좋은 의도가 있으면서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것이, 나쁜 의도를 가지고 나눔을 실천하는 삶보다 절대 바람직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무엇을 나누며 살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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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 참 많지만, 그중에서도 오늘 복음이 가장 난해하면서 또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주인의 재산을 제멋대로 낭비한 죄를 지은 것으로도 모자라, 제 살길을 마련하기 위해 일종의 ‘공금 횡령’을 함으로써 주인에게 2차, 3차 피해를 준 ‘불의한 집사’를 그 주인이 칭찬하였다고 하니, 선과 악의 이분법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악을 단죄하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권장하는 듯한 이 비유의 의미를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해지는 것이지요. 그만큼 우리는 ‘선’에 대해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행동을 ‘선’이라고 부를 수 있으려면 그 행동의 동기와 과정과 결과 모두가 선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생각이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결과가 좋다고 해도 그 행동을 한 동기가 불순하거나, 그 과정에서 다른 이들에게 피해와 상처를 입히거나 한다면 그런 불완전한 ‘착함’은 참된 ‘선’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면 상황이 좀 달라집니다. 하느님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의 지향이 마냥 순수하고 깨끗하기만 했던가요? 저마다 하느님으로부터 고유한 부르심을 받아 살아가지만, 신앙을 갖게 된 동기, 봉사를 시작하게 된 이유, 성소를 느끼는 상황, 소명을 받아들이는 목적 등을 엄밀히 따져보면 참으로 부족하고 인간적이며 계산적이기까지 한 부분들이 많지요. 하지만 하느님은 그런 우리의 부족함과 약함을 탓하거나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허물과 단점이 가득한 우리를 당신 구원사업을 위한 도구로 쓰시면서 각자의 지향을 일일이 따져 묻거나 당신 지향과 다르다고 배척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그릇되고 불순한 지향을 지녔더라도 당신의 섭리 안을 걷다 보면 정화되고 성화될 수 있다고 믿으시고 또 그럴 자신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재산으로 자기 살길을 마련하려 드는 집사의 꼼수를 모르지 않으면서 그의 ‘불의’를 인내하고 견디며 기다려 주는 주인의 마음이 바로 그런 하느님의 마음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은 ‘굽은 자를 가지고도 직선을 그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즉 집사의 죄를 이용해서도 선익을 가져오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다만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불의한 집사가 받은 ‘칭찬’이 ‘구원’과 같은 뜻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소 뒷걸음질 치다가 개구리 잡은 격’으로, 하느님의 능력과 섭리 덕분에 나의 ‘불의’가 ‘선익’이라는 좋은 결말로 마무리되더라도 내 죄가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닌 겁니다. 그러니 스스로가 ‘불의한 집사’처럼 살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나의 악을 선으로 바꿔주신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하며 그분의 선한 뜻과 올바른 지향을 마음 안에 받아들이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까지가 하느님께서 그리신 ‘큰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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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일을 준비하라>
신앙인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삶에 있어서 미래를 소중하게 봅니다. 지상 삶의 마지막을 영원한 새 삶의 시작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지상을 넘어 천상을 희망한다면 무방비로 살 수는 없는 법입니다.
미래는 오늘을 통해 오기 때문에 지금 최선에 최선을 다하며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은 현명합니다. 그런데 미래의 충만한 삶을 위해서는 재물에 투자하는 것보다 삶 자체를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상교회의 삶을 마치고 천상교회 안에서 하늘의 영광을 차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일을 준비하되 약속된 미래, 천상의 영원한 생명을 생각하면서 지혜롭게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부잣집 집사가 정직하지 못한 삶을 살아서 결국은 주인으로부터‘해고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고민하다가 자신의 장래를 보장받기 위한 부정을 또 저질렀습니다.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다 빚을 탕감해 주고 훗날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려고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것을 보고 그를 칭찬하였습니다. 비록 잔꾀를 부렸지만, 재산에 집착하지 않고 재산을 사람에게 배려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세속적인 사람이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려 애쓰는 모습은 칭찬할 만합니다. 그러나 방법이 잘못되었으니 결국 세속적입니다.
어쩌면 그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현세적인 이득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오히려 잘나가는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자녀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해서는 안 될 일도 서슴없이 합니다. 그래 놓고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에 위로를 삼기도 합니다. 세상일에는 정말 많은 수고와 땀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세상일에도 이렇게 정성을 쏟거늘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노력은 얼마나 더 해야 하겠습니까? 세속의 자녀도 막다른 골목에서 돈을 팔아 사람을 사거늘 마지막 날 주님의 대전에서 서게 됨을 알고 있다면 그 준비를 미리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빛의 자녀들은 영혼의 이익을 위해서 그만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행복합니다.(루카 12,43) 그리고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입니다.’(루카12,4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지혜로운 덕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바가 무엇이며, 마땅히 피할 바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현재는 하느님의 사랑에, 그리고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십시오.”(성 아우구스티노) 헛된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을 잘 이용하여 천상의 미래를 대비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천상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만큼 큰 수고와 정성으로 복된 날 만드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원하지 않고 주님 눈에 들기를 갈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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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 성당에는 어린이들이 다른 성당에 비해 많이 나옵니다. 어린이 미사에는 100명 이상의 아이가 나와서 얼마나 예쁘게 미사를 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아이들 눈에는 제가 나이 든 아저씨로만 보일 텐데도 저를 거부하지 않고 먼저 다가옵니다. 멀리서 저를 보면 뛰어와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속사포처럼 내뱉습니다. 길을 걸을 때는 제 손을 꼭 잡고 있습니다. 여기에 어떤 어색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치 제 손이 자기 손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주 편안하게 손을 잡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누군가의 손을 이렇게 편한 마음을 가지고 잡은 적이 있었을까?’ 아이의 손을 잡을 때는 불편한 마음이 없습니다. 만약 다 큰 성인의 손을 잡고 걷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남자의 손이면 ‘신부님이 이상하다’라고 할 것이고, 여자의 손을 잡고 있으면 역시 ‘신부님이 이상하다’라고 할 것입니다. 보는 사람의 마음도 불편해지고, 저 역시 불편해집니다. 하지만 아이의 손을 잡고 있으면 너무나 편합니다.
아이의 솔직하고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이 있기에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는 순간 순수한 마음은 퇴색해지고 서로가 편할 수가 없게 됩니다.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예수님 말씀이 확 와닿습니다.
유치원생인 아이 엄마가 제게 이런 말을 해줍니다.
“우리 아이가 신부님 보고 싶다고 졸랐어요.”
이 말에 기분이 좋아지고, 또 그 아이가 너무나 예쁘게 보였습니다. 문득 하느님도 “하느님, 보고 싶었어요. 하느님, 제 손을 잡아 주세요.”라는 말들을 듣고 싶지 않으실지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무조건 좋아하십니다. 특히 솔직하고 진실되고 또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서면 아빠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안아주실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도 당신에게 다가오면 기뻐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정직하지 못한 집사의 모습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여 없앴을 뿐만 아니라, 들통나서 쫓겨난 뒤에도 생계를 보장받으려고 주인의 돈을 씁니다. 주인으로서는 못된 집사입니다. 그런데도 이 불의한 집사를 칭찬합니다. 왜냐하면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지요. 바로 미래에 지향을 두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모습이든 우리를 받아주시지만,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는 오늘을 ‘아직 오지 않은’ 내일과 연결할 줄 하는 우리의 모습을 더 기쁘게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래의 하느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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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세상은 더 살맛나겠지요>
루카 16,1-8 (약은 집사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세상은 더 살맛 나겠지요>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
가지려는 사람이
어떻게든
더 가지려 하는 것보다
나누려는 사람이
어떻게든
더 나누려 할 때
세상은 더 살맛 나겠지요
오르려는 사람이
어떻게든
더 오르려 하는 것보다
낮아지려는 사람이
어떻게든
더 낮아지려 할 때
세상은 더 살맛 나겠지요
섬김받으려는 사람이
어떻게든
더 섬김받으려 하는 것보다
섬기려는 사람이
어떻게든
더 섬기려 할 때
세상은 더 살맛 나겠지요
내치려는 사람이
어떻게든
더 내치려 하는 것보다
품으려는 사람이
어떻게든
더 품으려 할 때
세상은 더 살맛 나겠지요
죽이려는 사람이
어떻게든
더 죽이려 하는 것보다
살리려는 사람이
어떻게든
더 살리려 할 때
세상은 더 살맛 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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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선심 팍팍 씁시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오늘 주님의 비유에서 불의한 집사가 칭찬받습니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불의한 집사가 칭찬받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칭찬받는 이유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집사가 불의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고 집사가 영리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건지.
우선 집사가 불의하다는 것은 주인의 재산을 제멋대로 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영리했다는 것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게 처신했다는 것입니다.
집사의 직분과 책임은 주인의 재산을 잘 관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집사에 대한 다른 비유에서 주님 말씀하셨듯이, 정해진 양식을 제때 다른 종들에게 제공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주인의 종들이 건강하게 주인을 위해 일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압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이란 하느님이시고, 정해진 양식이란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책임과 함께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의로운 집사는 책임과 자유를 주인의 뜻에 맞게 쓰지만 불의한 집사는 책임과 자유를 자기 뜻대로 씁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은 주님의 사랑을 나누어주는 것이기에 의로운 집사는 주님 사랑을 이웃과 나누기 위해 책임과 자유를 선용하는 데 비해 불의한 집사는 주님 사랑도 악용하고 책임과 자유도 자기 욕망을 채우는 데 씁니다
아무튼, 오늘 비유의 집사는 처음에는 불의했습니다. 그러다가 계속 그러면 자기가 벌 받을 거라는 것을 눈치챘고, 그래서 이제라도 주님 뜻에 맞게 주님 사랑을 나누기로 했고, 그래서 주님도 그런 집사를 칭찬하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이 비유를 들려주시는 것은 우리도 그러라는 말씀이겠지요.
우리도 지금까지 불의한 집사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의 집사라는 신분과 책임을 망각하였고, 그래서 주님께서 주신 사랑과 자유를 내 욕망을 위해 썼습니다.
그러나 나이를 꽤 먹은 이제부터라도 내 살길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랑, 그래서 내가 받은 사랑을 이웃과 나누는 데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남의 것을 가지고 선심 쓴다고 하는데 우리는 주님 것을 가지고 선심 팍팍 쓰면 됩니다.
이제부터 우리도 주님 사랑을 가지고 선심 팍팍 씁시다! 사랑 나눔에 인색했던 우리 이제 주님 사랑으로 선심 팍팍 쓰는 회개를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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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충실하고 슬기로운 주님의 종으로 살기>
-하느님의 자녀답게-
"주님은 하느님, 너희는 알라, 우리를 내셨으니, 우리는 당신의 것, 당신 백성이어라, 기르시는 양뗴이어라."(시편 100,3)
어느 때보다 북두칠성 또렷이 빛나는 만추의 새벽 밤하늘입니다. 참으로 기도에 전념해야 할 11월 위령성월입니다. 살아 있음이 축복이자 은총입니다. 무한한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깨어 빛으로 살라고, 사랑하라고, 기도하라고, 찬미하라고, 감사하라고, 회개하라고, 보속하라고 연장되는 우리의 날들입니다. 11월 위령성월은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달이자 더욱 우리 삶을 추스르며 깨어 살아야 하는 달입니다.
“자신의 희망을 하느님께 두라.”(성규4,41)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성규4,47)
문득 떠오른 베네딕도 성인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깨어 하루하루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약은 집사의 비유’입니다.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며 참으로 충실하고 슬기로운 삶을 위한 반면교사가 됩니다.
그의 미래에 대처한 민첩성을 배우라는 것이지 그의 삶을 배우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에게 주목할 것은 그가 “어떻게”대처했느냐 이지 그가 “무엇을”했느냐가 아닙니다.
불의한 집사는 미구 닥칠 위험에 대비하여 참으로 신속하고 과감하게 결행합니다.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임의대로 과감히 탕감해 줍니다. 그런데 주인은 이런 불의한 집사를 칭찬합니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입니다.
복음 사가는 다음과 같이 예수님 심중을 전합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믿는 이들은 세상속에 살지만 빛의 자녀들입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라 했습니다. 빛의 자녀들 역시 분발하여 미래에 대처하여 약은 불의한 집사와는 달리 하루하루 충실하고 슬기롭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위기에 민첩하게 대처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삶의 태도를 배워야 하겠고 그의 태만하고 무책임했던 과거의 삶은 철저히 배격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최고, 최상의 미래에 대한 대책이겠습니까? 하루하루 한결같이 정의와 평화의 삶, 사랑과 지혜의 삶, 찬미와 감사의 삶, 회개와 보속의 삶, 맡은 사명을, 책임을 다하는 삶이겠습니다.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주님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최선을 다하는 진인사대천명의 삶입니다. 말그대로 성인다운 삶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배울 삶의 롤모델은 약은 집사가 아니라 충실하고 슬기로운 주님의 종, 제1독서의 주인공 바오로 사도요,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위대한 성인 대 레오 교황 학자입니다.
여기에 저는 또 한 분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1940년 11월1일 모든 성인 대축일에 위대한 신학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그와 평생 영적 교류를 가졌던 기도의 사람,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 여사입니다. 의사였던 그녀의 임종을 앞둔 시기에 대한 묘사입니다.
‘건강이 점점 약해지던 그녀는 기력이 없어 더 이상 환자들을 진료하기가 어려워졌다. 결국 1950년대 중반에 의료행위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 후로도 기도하고, 뜨개질하고, 편지를 쓰고, 책을 읽으며 활동하던 슈파이어는 죽음을 앞두고 “죽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말하였다.
그 이유는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 앞에 계시기 때문이었다. 1967년 9월17일, 그녀가 세상을 떠난 그 날은 빙엔의 힐데가르트 축일이었다. 슈파이어의 전 생애는 전적으로 하느님께 순명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스며드는 삶이었다.’(기도의 세계, 569쪽)
복음의 약은 집사와는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참 충실하고 슬기로운 슈피이어 여사입니다.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녀다운 삶인지요! 제1독서 로마서의 바오로 사도의 겸손과 그 사명에 전력투구하는 삶은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지요!
“이 은총은 내가 다른 민족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 되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른 민족들이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제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이와같이 나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알려지지 않으신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명예로 여깁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복음 선포를 자랑으로 여기며, 명예로 여기며 시종여일, 한결같이 복음 선포의 사명을 다한 바오로의 한평생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이 무한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섭리와 사랑의 하느님은 그 시대에 맞게 당신의 종들을 보내십니다.
오늘 기념하는 대 레오 교황학자가 바로 그런 분입니다. 정말 위대한 교황입니다. 재위 21년 동안의 업적은 정말 불가사의, 놀랍습니다.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의심할 여지없이 교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중 하나”라고 평합니다. 제45대 교황으로 재위 21년 동안 총명한 두뇌와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해 가톨릭 교회를 넘어서 유럽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중 하나로 거론되며 대교황의 칭호를 받은 첫 번째 교황입니다.
교황님 재위 기간은 게르만 민족의 대 이동과 더불어 서로마 제국이 위기에 봉착한 시대였습니다. 교황은 훈족과 반달족의 침공을 받았을 때 용감하고 지혜롭게 이들로부터 로마를 구출하여 교황의 권위와 위엄을 로마시민들에게 깊이 각인시켰습니다. 사자라는 레오 이름 뜻대로 지칠줄 모르는 열정의 교황이었으며, 교황에 대한 평가는 위대한 행정가, 신앙의 보존자, 고대 교회의 초석을 놓은 교황으로 요약됩니다.
내우외환, 서로마제국의 붕괴로 정치적 사회적 불안과 교회 역시 여러 가지 이단 사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상황에서 신학적, 사목적, 정치적 난제들을 훌륭하게 해결해 냈던 그는 대내적으로 로마 교회의 최고 통치권 기반을 확립한 수장이었고, 대외적으로는 사실상 로마의 수호자로서 황제 역할까지 했던 당시 서방 유럽 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교황은 교회학자라는 칭호을 받을 정도로 173편의 서간들과 100여 편의 강론집을 남겼습니다. 교부시대의 마지막 교황으로서 그의 문체는 레오 문체라고 불릴 정도로 수 세기 동안 교회 문학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레오 1세와 같은 예술같은 서간을 쓰거나 강론한 교황은 역시 대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나타나기 전까지 150년 동안 없었습니다.
안팎으로 백척간두에 처해있던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뛰어난 무수한 서간과 강론을 남길 수 있었던지 하느님의 각별한 은총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하느님께서 교회를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훌륭히 수행해온 레오 대교황은 교회를 넘어 세속의 황제 역할 까지 하며 로마를 구하고 유럽을 수호했던 참으로 위대한 교황이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당시 과거 로마제국의 역할까지 떠맡아야 했던 부득이한 상황이었습니다. 하르나크의 말과 같이 이제 로마교회는 종교적 의미에서 서로마제국이었고, 로마주교는 사실상의 황제였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이런 역사적 상황을 이해할 때 오해도 많이 해소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의 약은 집사로부터 배울 바는 미래에 신속히 대처하여 유비무환의 자세로 맡은 바 주님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사명을,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방금 예로들었던 바오로 사도, 위대한 대교황 레오1세, 그리고 간략히 소개했던 슈파이어 여사처럼 말입니다.
11월 위령성월, 죽음을 묵상하며 하루하루 날마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각자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종으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크든 작든 깨어, 주어진 책임을 다하면 됩니다. 정의와 평화, 사랑과 지혜, 찬미와 감사, 회개와 보속, 그리고 맡은 사명을, 책임을 다하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이렇게 살라고 연장되는 하루하루 선물로 주어지는 날들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주님 좋으시다, 영원하신 그 사랑, 당신의 진실하심, 세세에 미치리라."(시편 100,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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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16,8b)
<민첩한 행동!>
오늘 복음(루카16,1-8)은 '약은 집사의 비유'입니다.
복음을 통해 드러난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인간적으로 가장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복음인 '약은 집사의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부자의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다가 들켜서 쫒겨날 처지에 놓입니다.
그러자 그 집사는 쫓겨난 이후의 삶을 생각하면서, 불의한 행동을 합니다.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 자기 마음대로 빚을 탕감해 줍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합니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주인이 불의한 집사를 불러서 호되게 야단쳐도 부족할 텐데, 칭찬하다니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오늘 복음은 '비유'입니다. 때문에 전하고자 하는 그 깊은 의미와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숨겨져 있는 의미와 뜻을 알려면, 문자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주인이 불의한 집사를 칭찬한 이유와 비유의 숨겨져 있는 의미와 뜻이 이 말씀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
이 비유에서 주인은 예수님이시고, 세상의 자녀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고, 빛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거래하는 데에 영리하고 민첩합니다. 결코 손해 보는 일에 빠지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이들도 세상 사람들처럼 그렇게 민첩하게 대처해야 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곧 다가올 종말에 대비해서 이 집사처럼 민첩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민첩한 행동이 바로 '나의 회개'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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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VdUwaQdL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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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6, 8)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은
그때마다
영리하게 대처하는
지혜이며
소통입니다.
없어지는 것과
사라지는 것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지혜의 빛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관계 맺음의
완성이며
지혜의
기쁨입니다.
모든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시각을 낮추고
마음을 넓히는
지혜가
필요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지혜는
그 어떤 순간에도
열려있는
관계 맺음의
지혜입니다.
관계 맺음의
지혜는
우리 인생에서
맛 볼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또한
그 어떤
상황에서도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지혜가
중요합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소중한 것은
소중한
관계입니다.
우리 자신을
비우지 못하면
갈등과 반목으로
인한 고통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빛의 자녀들은
그 어떤
상황에도
휘둘리지
않습니다.
세상의 자녀들과
빛의 자녀들의
차이는 없습니다.
어리석음과
교만 앞에
빛을 잃는 것이
지혜의 빛입니다.
버릴 것과
실행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위령 성월입니다.
관계의
단절이 아닌
관계의 소통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기도이며
삶의 자세입니다.
은총 가득한
삶의
나날들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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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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