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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1편<보통 종류의 사고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觀想 祈禱 入門書
하느님을 향하여-><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하느님을 향하여,마음을 열고,가슴을 열고>:관상(觀想)기도入門을 위하여
관상의 이 초기 단계에서 사고들 때문에 큰 싸움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의식의 흐름 속으로 들어오는 여러가지 종류의 사고들과
그 사고들의 형태들을 분간하는 것이 그것들을 잘 다루기 위한 중요한 것이 된다.
가장 쉽게 분간되는 것은 보통의 산만한 상상들이다.
상상은 영구적으로 움직이는 심리적 기능이므로 항상 일어난다.
그래서 아무런 사고를 갖지 않으려고 목적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우리가 내적 침묵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상대적 침묵을 말할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내적 침묵을 지나가는 생각들에 집착하지 않는 상태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당신이 도시의 번화가의 7층에서 문을 열어 놓은 채 누구와 대화를 한다고 치자.
거리에서 끊임없이 자동차 소음이 들려 온다. 아마도 당신은 이 소음을 어쩌지 못할 것이다.
이 때에 이 소음에 지겨운 생각이 들어 "왜 조용히 하지 못할까?"라고 한다든지,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 "당신들 조용히 하시오!"하고 소리 친다면
결과는 당신의 대화가 중단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게 된다.
만일 당신이 그 소음을 무시하고 대화를 계속 한다면 그 소음에 주의를 주지 않는 힘이 길러 질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당신의 상상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마음을 고쳐 먹고 그 상상들이 당신의 내적 세계의 현실임을 받아 들이도록 하라.
만일 그렇게 받아 들이면 그 상상들은 당신의 내면에서 점점 의미를 잃어 갈 것이다.
그렇지만 가끔 그 소음이 출퇴근 시간에
더욱 커지고 참을 수 없을 만큼 소리가 커질 수도 있다.
당신은 이 때에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처럼 당신은 때때로 무수한 잡된 상상으로
기도 시간 내내 시달리게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기도가 좋지 않았다거나
내적 침묵으로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도에 정진하다보면
당신은 새로운 습관 새로운 능력이 개발될 것인데
그중의 하나가 동시에 두 개의 의식 수준에서 의식하는 능력이다.
당신은 주위의 소음을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당신의 주의가
어떤 깊은 수준에서 무엇인가를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될터인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없을는도 몰라도 이것이 결코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당신은 멀지 않아 외부의 소음에 대하여 기도 중에
내적 침묵의 둘레에 벽을 쌓을 수 있게 됨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소음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소음은 당신을 방해하지 않게 된다.
당신이 기도를 계속하다 보면 당장은 성공하지 못하겠지만 점차로
당신 주변에서 소음이 일더라도 깊은 수준에서 즐거운 침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나는 뉴욕의 제3가 전철이 헐리기 얼마 전에 그 전철 위에 사는 어떤 가정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들의 아파트에서 철로가 내려다 보였고 때때로 전철이 큰 소리를 내며 거기를 지나가곤 하였다.
나는 정신이 아찔하였는데 그 이유는 전철이 마치 거실로 달려드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가족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전철이 지나갈 때면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대화를 잠시 멈추곤 하였다.
전철이 지나가고 나면 그들은 아무 일도 없어다는 듯이 대화하던 바로 그 내용을 이어 가는 것 이었다.
그들은 귀를 막는 습관을 자신의 생활 속에 형성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대화의 중단뿐만 아니라 대화의 끝장도 가져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머리 속에서 소란을 피우는 상상들과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때는 아주 좋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참아 내지 못한다.
그들은 "내적 침묵과 관상은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지 나는 도저히 내 머리를
지나가는 끝없는 잡념을 참아 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리를 걷고 일어나고 만다.
그렇지만 그들이 만일 조금만 더 참고 기도에 매달리면 그들도 소음에 익숙해 질 것이다.
향심 기도(向心 祈禱)를 습관적으로 계속하면 점차 내적 소음이 줄어들 것이다.
처음에는 끝없는 사고들로 해서 지치기도 할 것이다.
향심 기도(向心 祈禱)나 다른 마음의 평정 방법을 써 보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실재로 얼마나 많은 사고들을 가지고 있는지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평정을 갖기 시작하게 되면,
우리의 머리 속에 얼마나 많은 우스꽝스런 사고들이 들어차 있는지 깨닫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그 사고들 때문에 겁을 먹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일상적으로 흐르는 그들의 피상적인 사고들을 참아 낼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 가장 알맞은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하루중에 전화라든가 기타 예측할 수 있는 다른 방해가 일어나지 않는 시간을 택한다.
예수님께서 골방에서 하느님께 기도하라고 하신 충고를 받아 들인다.
만일 집안에 어린 아이들이 뛰어 돌아다닌다면 조용한 시간이나 장소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욕탕만이 가장 조용한 곳일 수도 있다.
어떻든 간에 당신은 가장 방해를 적게 받을 시간과 장소를 택하라.
잔디 깎는 기계나 비행기의 소음 같은 것들은 내적 침묵에 통합될 수 있지만,
큰 소리로 하는 대화와 같이 지성과 상상을 요구하는 소음들은 다루기가 몹시 힘들다.
요약하여,
일상적으로 떠오르는 상상들에 대한
가장 좋은 반응은 그것들을 무시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짜증이나 불쾌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안정된 감정으로 하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응답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 순간에 실제로 있는 일들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산만한 상상이 떠오르는 것은 우리의 하나의 자연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당신이 평정으로 들어가기를 아무리 원한다 하더라도 사고들이 떠오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해결책은 마음을 완전히 공백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적 침묵과는 다른 것이다.
-------------O-------------제6장 1절 <보통 종류의 사고들> 끝----------O-----------O----------
제6장 2절 <보통 종류의 사고들>: 누구라도 할 수 있는觀想 祈禱 入門書
[ 하느님을 향하여->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
향심 기도(向心 祈禱)의 전 기간중에 우리는 내적 침묵으로 들어 갔다가 나왔다가 한다.
기도자의 내적 주의(注意)는 바람이 자는 날에 풍선이 땅에 닿는 것과 같다.
어디선가 미풍이 불어오고 그러면 풍선은 다시 떠오른다.
이와 비슷하게 향심 기도(向心 祈禱) 중에는 가장 즐거운 침묵으로
막 들어가려는 찰나에 감질 나게 튀어나오는 순간을 맛보는 경우들이 있다.
이 때가 바로 어떤 원치 않는 사고들이 의식 속에 들어오는 순간이다.
이 때에 침묵으로 들어가려는 순간을 잃어 버리게 되었다는 것
때문에 언짷게 생각하지 말고 사고를 받아들이는 데는 큰 인내가 필요하다.
그저 단순히 다시 시작하라.
이와 같은 끊임없는 안내와 평정과 받아들임은
우리 전 人生을 받아들이는 훈련을 하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가 행동을 취하도록 준비시켜 준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 앞에 일어나는 어떠한 일들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반사적으로 그 현실을 바꾸어 버리거나 통제하려고 드는 경향이 있다.
이 기도 중에 의식의 흐름 속으로 두 번째 종류의 사고가 끼여 드는데,
그것은 당신의 산만한 상상중에 어떤 특정한 사고에 흥미를 갖게 되고
당신의 주의가 그 방향으로 움직임을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이것에 대하여 어떤 감정적 요소를 가지게 될 수도 있다.
정서로 충전된 사고나 상상은 그것이 외부로부터 들어왔건
당신의 상상으로 왔든 간에 당신의 식욕 계통에 자동적으로 반응을 일으킨다.
그 상상이 유쾌한 것이냐 불쾌한 것이냐에 따라 동시적으로 좋아함과 싫어함의 감정이 일어난다.
만일 당신이 어느 특정한 사고나 거기에 따른 감각을 알아차리게 되면 거룩한 단어로 돌아감이 적절하다.
이렇게 하여 당신은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 드리고 그분께 맡겨 드리려는 원래의 지향을 도로 찾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의 의식은 흐르는 큰 강과 같아서 피상적인 사고들이나
경험들이 마치 배나, 잡물이나, 수상 스키하는 사람들이 그 표면을 지나가는 것과 같다.
이 강 자체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의 존재에 우리가 참여하도록 주신 것이다.
우리의 바로 그 부분에 다른 모든 기능들이 머물고 있지만,
우리가 강의 표면에 너무 빠져 있기 때문에 이것을 평소에 잘 인식하지 못한다.
향심 기도(向心 祈禱) 중에 우리는 우리의 주의를
강 표면의 보트나 다른 물건들에서부터 그 강 자체로 돌리기 시작하는데,
거기에 우리의 모든 기능들이 지탱하고 있으며 또 거기에 원천이 있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강은 어떤 성격을 띠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것이며 한계가 없는 것인데,
그 이유는 우리는 단지 하느님의 존재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배에 흥미를 느끼고 그 배 안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려고 한다.
당신은 애초의 지향(하느님께로 향하는)에서 빠져 나오게 된다.
이 때에 당신은 강의 표면에서 강 자체로, 특수 부분에서 전체로,
유형에서 무형으로, 그리고 상상(想想)에서 무상(無想)으로
당신의 주의를 계속해서 돌려야 한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것이,
내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믿음으로 찾는다는
나의 원래의 지향(指向)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이제 시내 중심가의 7층 사무실에서
친구와 대화하는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출퇴근 시간에는 경적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당신이 무슨 일이 일어났나 하고 궁금해 하면
당신의 주의는 대화에서부터 떨어져 나온다.
예의상 당신은 주의를 새롭게 대화로 돌려야 한다.
그래서 당신은 "실례한다."
혹은 "내가 말하던 것처럼"이라고 말하려는 듯이 그 친구를 바라본다.
다시 말해 당신의 대화로 돌아간다는 간단한 동작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투거나, 소음을 멈추게 하거나,
소음을 막아 버리는 문제가 아니라,
당신의 원래의 지향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향심 기도(向心 祈禱)중에,
당신이 무슨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면,
단순히 그 주의를 하느님께로 돌린다.
이러한 당신의 지향을 나타내는 표시로 거룩한 단어를 떠올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거룩한 단어가 마치 마음을 비워 주는 요술이나 되는 것처럼
이 단어를 자꾸만 반복하거나 이 단어를 당신의 의식 속에 강제로 자꾸 떠올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 옴으로써 당신은 하느님과의 대화로 돌아오고
그분과의 일치를 바란다는 것을 재확인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승복(承服)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단어로 돌아올 때에는 언제나 힘겹게 애쓰면서 하지 말라.
과잉 반응은 역생산적이다. 아무도 잔디를 불도저로 깍지는 않는다.
파리를 쫓기 위해서는 당신의 손만 흔들면 되는 것이다.
향심 기도(向心 祈禱)에서 당신의 지향을 참을성 있게 새롭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길은,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나 우리의 어떤 기능을 통해서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첫번째 언어(言語)는 침묵(沈默)임을 명심하라.
이 기도에서 침묵으로 당신을 준비시켜라.
그러면 기도 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것은,
당신의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문제인 것이다.
이것을 당신의 문제로 삼으면 당신은 즉각 하느님이 아닌 다른 무엇을 찾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떤 무엇보다도 순수한 믿음이 당신을 하느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체험에 매달리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하나의 사고인 것이다.
향심 기도(向心 祈禱) 시간은 당신의 모든 사고
-심지어 아주 좋은 사고라도 그것을 떠나 보내는 시간인 것이다.
만일 그것이 정말로 좋은 사고였다면 나중에라도 다시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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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3절 <보통 종류의 사고들>: 누구라도 할 수 있는觀想 祈禱 入門書
[ 하느님을 향하여->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
<질문1> 신비적 체험을 얻기 위하여 약물을 쓰는 것은 어떤가?
<답변1 > 어떤 이들은 영적인 경험을 하기 위하여 마음을 취하게 하는 약물을 쓰는 것 같다.
그것보다는 어떤 수련으로 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한데
약물은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어떤 동방적 묵상의 강력한 방법들처럼 약물이 자신의 감정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그것들을 무의식에서 풀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LSD를 흡입한 어떤 사람들은 약물로 인해서 자신의 무의식에서 풀려 나온
어떤 심리 현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채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주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
<질문2> 오늘 오후는 내가 몹시 몸이 무겁고 피곤함을 느낀다.
<답변2 > 당신은 언제나 소위 좋은 기도와 나쁜 기도 사이를 왔다 갔다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기도(祈禱)를 분류하는 버릇을 버리도록 하라.
<질문3> 나는 한번 "이게 모두 무슨 감각인가?
깨어 일어나자."하는 생각이 든 적이 있다.
내가 물론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답변3 > 좋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사고였다.
어떤 사고가 당신을 몹시 괴롭히더라도 당신이 할 일은 단지 그것들을 떠나 보내는 것이다.
그것과 싸우면 당신은 다른 생각들도 일어나서 손해만 본다.
<질문4> 내가 한번 매우 씨름을 했던 어떤 것에 대해 분명히 알고 싶다.
과거에 나는 아주 결심을 가지고 향심 기도(向心 祈禱)에 전념했다.
나는 조용히 아주 부드럽게 향심을 하는 대신 떠밀다시피 주의를 집중하는 느낌을 가졌었다.
<답변 4> 당신은 이 기도를 당신의 의지력으로 할 수 없다.
당신이 노력을 하면 할수록 당신은 잘 안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애를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긴장을 풀고 떠나 보내어라.
거룩한 단어를 부드럽게, 아주 부드럽게 떠올려라.
이것을 마치 당신이 솜덩이 위에 새털 하나를 올려 놓듯 하라.
물론 야구 공이 당신에게로 날아들듯 사고들이 날아들면,
당신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것을 막아낼 길을 찾으려 들 것이다.
그 공을 때려 구장 밖으로 쳐 내는 것처럼 사고들을 쳐 내는 것이 최선은 아니다.
당신은 솔직하게 "나는 이 사고들로 얻어 터지고 있다."라고 시인하고 그것들을 참아 내라.
그리고 기억하라. 당신이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이 모든 것들은 지나가 버릴 것이다.
폭력을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
이 기도는 완전히 비폭력적인 기도이다.
너무 힘들여 노력하면 앞이마가 조여오고 목 뒤가 뻣뻣해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당신이 당신의 주의를 그 통증과 함께 떠나 보내면 그것들은 대개 가 버린다.
다른 말로 해서, 당신은 통증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라.
통증 속에서 쉬어라.
통증은 다른 모든 사고들을 녹여주는 길을 제공한다.
그것은 당신의 주의를 하나의 점으로 수렴하여 주는데,
이것이 바로 거룩한 단어가 하는 구실인 것이다.
당신의 통증이 사라질 때 당신은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질문5> 내가 처음 하는 기도 시간 동안에 홀의 다른 곳에서 카운셀링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거기서 들려 오는 소리가 커서 나는 말소리를 알아듣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큰 소리로 거룩한 단어를 외치고 싶었었다.
<답변 5> 그러한 경우에 그저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것
이외에 당신이 할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면서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한다.
때때로 당신은 소음들을 참아 내는 이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당신은 깊은 내면에서는 새롭게 되었지만 그것을 외적으로는 즐기지 못했을 뿐임을 생각하라.
<질문6> 앞으로 기도가 30분 혹은 그 이상 한 시간까지 갈 때도 있을 것이며,
그 때에 당신의 등에 불편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이제 기도를 끝낼 때가 되었구나."하고
중단할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계속해야 할 것인가?
<답변 6> 당신의 기도는 등이 아프기 전에 끝나는 것이 보통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마다 정상적으로 기도를 끝내는 때를 감지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20분 후가 될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반시간이나 혹은 더 오랜 다음에 오기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당신의 기도가 끝날 때를
당신이 감지하지 못한 채 1시간 이상 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만일 그것을 계속할 은총이 있고
또 그렇게 하도록 이끌린다면 어느 때까지고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다.
기도를 오래 하는 더 좋은 방법은 두 번의 기도 시간을 이어서 하도록 설정하되,
그 중간에 5분 내지 10분간 명상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걷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한 자세로 오랫동안 앉아 있음으로 해서 오는 불편을 없앨 수 있다.
그러나 기도 시간이 길고 짦음이 기도의 가치를 표시하는 것은 아니다.
기도의 질이 기도의 양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온 기도 시간 동안 당신이 내적 침묵 속을 들락날락하는 것보다는
단 한 순간(瞬間)의 신적 일치(神的 一致)가 더 값지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이 당신을 풍족하게 해주시는 데는 한 순간(瞬間)이면 족하다.
그렇게 볼 때에 기다리는 과정은 신적 일치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치가 순간적으로 있었다 하더라도,이것은 이처럼 순간이나마 하느님 속에
잠기는 경험도 없이, 한두 시간 수준이 얕은 관상 기도에 매달렸던 것 보다는 더 나은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는 자신의 기도가 정상적으로 언재쯤 끝나는가를 실험과 수련을 통하여
알아 두는 것이 좋다.
기도가 잘되기 때문이라는 이유만으로 기도를 오래 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질문7> 내가 기도에 깊어질 때 나는 두려움 때문에 거기서 빠져 나오고 만다.
나는 그곳에서 마냥 머물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나는 이 두려움이 심리적인지, 신체적인지, 영적인 것인지 알지 못한다.
<답변 7> 이것은 자주 있는 경험이다.
당신이 당신 자아를 거의 망각하게 되는 곳에 이르면,
하느님께서 당신을 강하게 그리고 마음 놓이게 해 주시면서
끌어 당기시지 않는 한, 당신은 두려움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상상력에 따르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그것을 무시하고 그 물 속에 뛰어들면 그 물은 매우 기쁨을 줄 것이다.
<질문8> 지난밤에 나는 거의 빠져 들게 되었는데 나는 갑자기 거기에서 뛰쳐 나왔다.
후에 나는 매우 잘못했다고 느꼈지만 왜 내가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답변 8> 기도하기 전에 하느님께 이렇게 여쭈어라.
" 만일 당신이 나를 저쪽으로 데려가고 싶으시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고는 긴장을 풀어라.
당신이 맨 처음 마취 상태에 들어 간다면 당신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당신이 다소간 억지로라도 마취해야 하지 않았다면 당신이 마취를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생각이 끊어진 상태가 어떤한 것인지 당신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을 시도해 봐라.
<질문9> 나는 거의 그 아름다운 상태로 막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두려움이 생겨서 나는 중단하였다.
내가 왜 그렇게 했는지 알 수 없다.
<답변 9> 그러한 경험이 일어날 때 그 경험에 대하여 전혀 생각하지 말라.
그냥 내버려 두라.
<질문10> 만일 이 기도를 너무 오래,
그리고 자주 하면 무기력한 상태로 빠져 들지는 않는지?
<답변 10> 만일 당신이 하루 5,6시간 이상씩 오랫동안 하면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하루에 서너 시간 기도하는 것이 사람에게 역효과를 준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달 동안 서서히 기도를 발전해 가면 기도를 오래 하게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당신을 지치게 하던 감정적 찌꺼기에서 당신을 해방시키기 때문이다.
당신의 피상적 기능들이 의식의 흐름을 타고 떠내려가는
배나 쓰레기들을 의식하고 있다고 해서 당신의 내적 기능인
지력과 의지가 하느님을 깊이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당신은 원하지 않는 사고들이 지나갈 때 고통을 가지고,
의식하며 또 그것들이 없어졌으면 하고 바라기도 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당신은 당신의 내면에 신비하게 현존하는,
전혀 표현할 수 없으면서도 정교하고 섬세한 어떤
신비적인 것에 당신이 빠져 들고 있음을 의식할 것이다.
이 이유는 내가 앞서 말한 확장된 인식을 당신의 정신이 발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표면적 차원과 아주 깊은 차원의
두가지 차원에서 인식할 수 있음을 말한다.
만일 당신이 표면에서 일어나는 사고들로 흥분하여 여기에
사로잡히면 당신의 깊은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식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당신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당신의 상상과
기억의 내적 소음때문에 이 깊은 차원의 경험을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만일 기도 시간이 빨리 갔다면 당신은 그만큼 깊이 들어갔었다는
표시인데, 아마도 당신 자신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당신이 상상들로 방해를 받지 않으면 시간 감각은 중단된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당신의 의식은 완전히 살아 있으면서도 시간만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시간이란 자신의 투영(投影)이다. 아무런 사고도 없을 때 당신은 시간에서 해방된다.
이것은 당신에게 우리의 신체가 우리의 영에서 빠져 나갈 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관하게 할 것이다.
깊은 기도 속에서 당신은 어쨌든 당신의 육신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죽는다는 사실이 당신을 두렵게 만들지 않을 것이며
그 이유는 이미 당신이 영이 육신을 떠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미리 경험하였기 때문인데 이와 같은 상태는 매우 즐거운 경험인 것이다.
-------------O-------------제6장 3절 <보통 종류의 사고들> 끝----------O-----------O----------
제6장 4절 <보통 종류의 사고들>>: 누구라도 할 수 있는觀想 祈禱 入門書
[ 하느님을 향하여->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
<질문11> 기도중에 때때로 나는 날아갈 듯이 아주 행복한 느낌을 갖는데
이것은 매우 즐거운 경험이다.
< 답변 11> 당신은 기도를 너무 심각하게 다루지 말라.
하느님에게는 유희적인 면이 있다.
펭귄이나 다른 어떤 동물들을 볼 때
하느님이 피조물에게 어떤 장난기를 보여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의 유희적인 면은 현실의 아주 심오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것을 보면 우리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다루지 말 것과
또 하느님께서 어떤 유머 감각을 가지고 우리를 창조하셨음을 깨우쳐 준다.
<질문12> 나의 수호 천사가 향심 기도 중에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가?
< 답변 12> 당신이 그에게 말하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
천사나 악마는 당신이 아주 깊은 관상 기도(觀想 祈禱) 중에 있을 때
당신에게 일어난 일을 보지 못한다.
그것들은 당신의 상상과 기억의 기능들을 사용할 때 당신이 하는 일을 알고,
이것들에 자기들의 이야기를 유입시킬 수 있다.
그렇지만 당신이 깊은 내적 침묵 속에 있을 때
거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하느님만이 아시는 비밀이다.
오직 그분만이 영혼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실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잠재울 때 신을 무형의 존재들에게 열어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성 요한에 따르면 ,
당신이 사고와 감정을 넘어서 하느님의 현존에
빠져 들면 그곳보다 더 안전한 곳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마귀들이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내적 침묵에서 빠져 나왔을 때만 마귀들이 당신을 유혹으로 괴롭힐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혹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신이 관상(觀想) 중에 가졌던 것과 같은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것이 다윗 왕이 시편에서
"나의 피난처, 나의 힘, 나의 바위, 나의 요새, 나의 성탑,나의 성채!"라고
하는 말의 뜻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관상 기도(觀想 祈禱)를 수련할 때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위험에 우리를 열어 주게 된다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 수준에서는 그보다 깊으신 분 외에는 아무도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다.
그 하느님은 우리의 안에 계시며 그분의 창조적 사랑으로부터,
우리가 매 순간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질문13> 오늘 나의 기도 시간 중에 한 가지 사고가 계속해서 다시 돌아오곤 하였다.
나의 기도가 끝났을 때에 그것이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그것은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나는 그 사고를 경당으로 가지고 와서
그것을 주님 앞에 바치고 난 뒤에 나의 기분이 좀 나아졌다.
나는 그것이 마치 가시 박힌 것 같아서 그것을 그저 뽑아 버렸다.
당신이 하느님께 이렇게 여쭐 수 있을 때
기도 중에 주님께 이것을 바치는 것이 어떤 이점이 있는가?
< 답변 13 > 어쨌든 당신이 이끌리는 대로 하라.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갈 때 아주 자연스럽게 해야 한다.
나는 관상 기도(觀想 祈禱)가 지난 몇 세기 동안 잊혀져 왔지 때문에 이 기도를 강조하는 것이다.
당신이 내적인 침묵으로 열심히 기도하는 시간이 다른 형태의 기도와 서로 상충하는 것은 아니다.
<질문14> 향심 기도(向心 祈禱)를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목소리로 기도하지 않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나 자신을 비울 때 성령께서 들어오셔서
내 존재의 깊은 곳에서 기도하신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생각을 떠나 버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제 나는 말로 기도할 필요가 없고, 그저 긴장을 풀고
그분이 오셔서 기도(祈禱)하도록 해야 됨을 알게 되었다.
< 답변 14 > 기도(祈禱)란 하느님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뀌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일이 빨리 일어날수록 우리의 기도(祈禱)가 더욱 좋아진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께 관심을 갖고
그분을 찾기 시작한 이상,
가장 좋은 길은 기도(祈禱) 속에 침묵하여
그분이 기도(祈禱)과정을 끌어 가시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모님께 아주 의미 있는 일이 아니었던가?
그분의 존재가 바로 기도(祈禱)였고 그분의 모든 동작이 기도(祈禱)였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큰일을 하셨나?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을 이 세상에 가져오셨다.
아니 말씀이 자신을 통하여 이 세상에 오시도록 허락하셨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도록 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무엇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임 때문이다.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현존이 우리의 기능들을 통하여 나타날 때,
우리가 길을 걸어가든, 국을 마시든 간에 거룩한 생명이 세상 속으로 쏟아지는 것이다.
모든 행동의 효과는 그것이 솟아나는 원천에 달린 것이다.
그것이 거짓 자아에서 나오면 그것은 심하게 제한 되어 버리지만,
그것이 하느님에 잠긴 사람(즉 관상 상태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나오면 아주 효율적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모님의 성소(聖召)와 같은 관상의 상태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낸다.
<질문15> 유혹받고, 스트레스 쌓이고, 어려움을 겪을 때에
관상 기도(觀想 祈禱)를 하는 것에 대해 확실히 알고 싶다.
나는 나에게 평화가 오도록 하기 위하여
기도한다는 생각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게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가?
< 답변 15> 관상기도(觀想 祈禱)로 들어가라고 권할 때
내가 생각한 것은 사고와 감정을 잠재우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어떤 유혹으로 시달릴 때에
관상기도(觀想 祈禱)에서 하듯,
같은 종류의 떠나 보냄을 수련하라는 것이다.
유혹도 나의 의식의 흐름을 타고 떠가는 다른 사고와 마찬가지로 취급하라.
떠나 보내면 그것으로 충분한 방법이다.
만일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찾도록 해 보라.
<질문16> 우리가 어떤 것을 떠나 보내는 일상 생활의 습관이 확실하고도
실제적으로 우리를 기도에 준비시키는 방법이 되는가?
그리하여 우리가 기도 중에 떠나 보냄이 더욱 쉬워지는가?
< 답변 16> 당신이 생활 중에 하는 활동과 기도 중에 하는 활동 사이에는 상호 관련성이 있다.
그것들은 서로 도와 준다.
-------------O-------------제6장 4절 <보통 종류의 사고들> 끝----------O-----------O----------
<제6장 5절 <보통 종류의 사고들>: 누구라도 할 수 있는觀想 祈禱 入門書
[ 하느님을 향하여->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
<질문17> 당신이 어떤 일에 흥분하였을 때 어떻게 침묵과 평화 속에서 기도 할 수 있는가?
< 답변 17> 이러한 경우에는 당신이 어떤 완충적인 상황을 거치지 않고도 침묵 속에 기도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당신은 한 블록 정도 달리기를 하거나 신체 운동을 하든지 혹은 적절한 독서를 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앉아서 평정을 얻으려고 할 때,
고요한 의식의 흐름곁에 앉아 있기보다는 나이아가라 폭포 밑에 앉아 있는 것과 같다.
당신이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당신 자신이 평정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하여야 한다.
어떤 경우는 그 시험은 너무 커서 당신을 짓밟아 버리기 때문에
당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내적 침묵 속으로 도저히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도하기 위해 어떤 시간을 허용한다면
당신이 그 문제와 더불어 감정적 폭풍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질문18> 왜 당신은 그룹으로 기도할 때 반시간으로 제한하는가?
< 답변 18> 그 정도가 주의를 유지하는 정상적 시간이라고 본다.
그보다 길면 기도를 시작하거나 계속하는 용기를 꺾을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내적 침묵의 감각을 이루기에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시간 동안 기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렇게 하면 당신은 침묵을 안정시키는 저수지를 갖는 것과 같다.
하루 시간을 두 번에 나누어 같은 시간 동안 깊은 기도에 들어가면
그날 하루를 지내는 데 필요한 그 침묵의 저수지를 마련하는 최선의 기회를 갖게 된다.
당신이 활동을 더 할수록 그만큼 기도 시간의 필요도 늘어난다.
활동을 지나치게 하면 영적으로 바닥이 들어난다.
그 활동들은 신비한 환상적 요소를 갖고 있다.
예를 들면 트레드밀(벨트가 계속 돌아가고 그 위를 걷게 만든 운동 기계)이나
회전 마차와도 같아서 거기에서 빠져 나오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규칙적인 기도가 참다운 수련이다.
당신이 하던 일을 멈추고 기도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긴급한 자선활동이 아닌 다른 어떠한 활동보다는
당신이 기도하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확신을 가져야만 한다.
그렇게 하면 당신이 하는 일이 잘 돌아가고 더 빨리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다.
그 때에 당신은 당신의 활동과 먼저 해야 하는 일(기도)사이에 가치를 견주어 볼 수 있게 된다.
<질문19> 한 번 길게 기도하지 않고 왜 두 번으로 나누어야 하는가?
< 답변19 > 하루에 두 번으로 나누어 하는 기도는 당신의 침묵의 저수지에 더욱 당신을 가깝게 만든다.
당신이 그 저수지에 멀리 떨어지면 그것은 그 저수지에서 다른 사람들이
필요한 물을 다 빼 가고 난 다음에 있는 수도의 맨 끝에 당신이 있는 것과 같다.
당신이 수도꼭지를 틀면 당신은 겨우 몇 방울 밖에 받지 못한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수압을 올려 놓아라.
당신은 그 저수지가 찰 때까지 채워라.
그러면 물은 언제나 흘러 내릴 것이다.
관상 기도(觀想 祈禱)는 활동을 위한 준비이다.
그 활동은 우리가 흥분과 욕망과 집착을 가라앉히는 침묵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기회를 최대한으로 드리는 것이다.
<질문20> 기도 중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사색하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그것들을 떠나 보내는 것이 좋은가?
< 답변 20> 이 기도 중에는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사색하는 것은 적당치 않다.
우리는 이 기도 중에 판단을 완전히 중단하여야 한다.
기도가 끝난 다음에 사색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당신이 경험을 쌓아 가면서 당신은 기도를
당신의 다른 신앙 생활과 잘 조화를 이루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어느 정도 개념화의 작업이 필요하기는 하다.
그렇지만 당신은 기도의 효과를 얻으려고 당신의 기도를 분석할 필요는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기도로부터 열매를 얻게 되면 당신응 그것을 동시에 깨닫게 된다.
사실상 다른 사람들이 "당신은 이전처럼 그리 흥분하지 않는 것 같다."라고 말할 것이다.
당신 자신도 이전에는 부드럽지 않았지만 이제는 행동이 부드러워진 것을 알아보게 될 것이다.
당신이 이전에는 화가 났을 때 남을 두드려 주고 싶은 충동을 받았었지만,
이제는 약한 질책 정도에는 만족스러울 만큼 잘 다스리게 됨을 알아차릴 것이다.
관상 기도(觀想 祈禱)는 자신의 감정에 대해 아주 다른 태도를 형성시켜 준다.
즉 다른 차원에서 이것을 보게 된다.
극단적인 감정은 안전하지 못하다는 감각에서 오고
특히 위협을 받는다고 느낄 때에 그런 감정을 갖는다.
그렇지만 당신이 깊은 침묵 중에 하느님의 현존을 계속해서 재확인하게 되면,
당신은 다른 사람의 반대를 받거나 멸시를 당하더라도 그 속에서 무엇을 배울 만큼
겸손해지고, 비난이나 멸시로 인해 자책감이나 복수심 같은 것으로 시달리지 않게 된다.
사람들이 어린 시기에 발달시킨 낮은 자아상으로 인해,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갖는 것이 이 문화에 팽배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향은 특히 이 사회가 고도로 경쟁적 사회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뒤떨어지면 자신이 이 문화에 부족한 사람이라고 느낀다.
그렇지만 침묵의 깊은 기도(祈禱) 속에서는 당신은 새 사람이 된다.
아니 당신 자신이 된다.
<질문21> 기도로 위안을 받고 있는데 기도를 아주 오래 하면 어떤가?
< 답변 21> 만일 당신이 지나치게 하면 그것은 나쁜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
지나친 슬픔과 마찬가지로 지나친 기쁨도 피곤하게 만든다.
이 기도의 목적은 더 기도하고 더 침묵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침묵을 활동과 조화를 이루게 하려는 것이다.
영적인 위로가 너무 만족스럽게 되면 이것도 덫이 될 수 있다.
이렇기 때문에 관상 기도(觀想 祈禱)를 어느 시간으로 제한하는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영적으로 지나치게 탐닉하지 않으면서도
당신에게 적절하게 좋은 기도 시간의 양을 상식적으로 알아내게 한다.
내적 침묵으로 가까이 간다는 것은 아주 귀중한 선물이다.
이것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 사람의 미적 감각 자체를 바꾸어 놓는다.
이러한 경험을 자주하게 되면,
반대되거나 상반적인 상황에 대처하는 힘이 길러진다.
내적 침묵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경험 중에서
가장 힘을 길러 주는 경험이며 가장 확신을 주는 경험은 없다.
그러한 계시는 다른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말을 우리에게 한다.
"너는 좋은 사람이다. 나는 너를 창조했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말씀의 더욱 완전히 충만된 감각 속에 머물도록 인도한다.
그것은 자신에게 갖는 부정적인 감정을 치유해 준다.
<질문22> 나는 기도 중에 숨이 멈출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나는 나의 신체적 리듬과 함께 할 때 가장 안전함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거기에 주의를 주고 너무 오랫동안 떠나 보냄 속에 머무는 것이 두렵다.
< 답변 22> 당신의 호흡이 얕아질 수 있겠지만 당신이 산소를
필요로 할 때에 당신은 자동적으로 호흡하도록 되어 있다.
당신의 몸은 자체가 좋은 감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신의 호흡이 얕아질 때 몸은 스스로 깊은 숨을 쉬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잠을 잘 때도 일어나는 일이며 또한 기도 중에도 일어날 것이다.
생각하는 것과 숨쉬는 것 사이에는 상관 관계가 있다.
호흡이 얕아지면 생각도 줄어든다.
그렇지만 당신이 생각하자마자 다시 호흡도 증가한다.
<질문23> 단식하면 묵상이 더 잘된다고 들었다.
아마도 이것은 훈련하기에 달렸다고 추측한다.
< 답변 23> 단식의 능력은 사람마다 다르다.
권고할 것은 뱃속이 찼을 때는 향심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기도는 신진 대사를 줄어들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결과로 소화와 같은 신체 과정이 느려진다.
식사 후에는 한 시간 반 정도 기다려라.
그리고 잠들기 바로 전에 기도 하지 말라.
그러면 에너지가 솟아나서 몇 시간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단식을 함으로써 향심 기도가 더 잘될 수 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 반대의 영향도 있을 수 있다.
배가 너무 고프면 기도시간 동안에
거기에 신경이 쓰여서 단식은 기도를 저해한다.
향심 기도 중에 따라야 하는 원칙은 신체를 잊어버리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극단성이 아니라 삶의 단순성이 이러한 수련에는 더 적합하다.
-------------O-------------제6장 5절 <보통 종류의 사고들> 끝----------O-----------O----------
<제6장 6절 <보통 종류의 사고들>: 누구라도 할 수 있는觀想 祈禱 入門書
[ 하느님을 향하여->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
<질문24> 사기를 돋우기 위해 집단이 도움이 된다.
같이 기도하는 것이 더 나은가?
아니면, 혼자 기도하는 것이 더 나은가?
< 답변 24 > 그룹을 통해서 사기와 심리적 지원을 받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한 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모이는 지원 그룹이 도움이 된다.
그런 반면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방법에
자신을 맞추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혼자 하기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두 가지 경험, 둘다 다 값어치가 있다.
<질문25> 내가 아무 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될 때,
나는 나의 호흡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 답변 25 > 가장 좋은 길은 그 사실을 받아 들이고 더 이상 주의를 주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마치 교회로 가기 위하여 거리를 걸어가고 있을 때
누가 당신 곁에서 걸어가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
그냥 그대로 걸어가면서,
같이 가기를 청하지 않았던 그 사람에게 주의를 주지 말라.
그러면 당신은 결국 가고자 하는 곳에 이르게 된다.
일어나는 어떠한 것에도 "예"하고 받아들여라.
그렇게 하면 강박적인 영상이 더 잘 지나가 버리게 된다.
그런 일에 짜증스럽거나 즐거운 마음으로 반응하면
그 특정한 사고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 된다.
의식의 흐름 속에서 떠내려가는 어떠한 사고도 시간이 해결해 준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움직이는 것들이어서 결국 지나가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냥 기다리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모두 지나가고 만다.
그러나 당신이 그것들에게 무엇을 하려 들거나 털어 버리려고
애를 쓴다면 당신은 그것에 붙잡혀서 그것들과 같이 떠내려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사고가 들어오게 하라.
그리고 그것이 가 버리게 하라.
성가시게 생각도 말며 아무런 기대도 하지 말라.
이것이 아주 섬세한 자기 부정이긴 하지만,
이것은 신체적 엄숙보다는 낫다.
이 신체적 엄숙은 자신에게 주의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떠나가 버리지 말고 하느님을 기다리며,
정상적인 기도 시간을 내고,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들이
진정한 신심을 얻는 데 가장 효과적인 훈련이다.
이것을 잘 지키면 마침내 완전한 내심의 변화(즉 변형)에 이르게 될 것이다.
<질문26 > 어떤 때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인식하기도 하는 것 같다.
거룩한 단어를 떠올리기는 하지만 그것을 반복할 수가 없다.
이것은 일상적인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는 아니지만, 여기에는
다소간의 인식이 있기 때문에 잠자고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도 없다.
<답변 26 > 그것은 우리가 깨어 있으려고 하는 인식이다.
그것을 아마도 영적인 주의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깊은 주의는 외적인 상황을 인식하면서도,
자신은 신비하게 내적으로 향한 주의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에,
외적으로 아무런 인상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과 같다.
이때에 당신이 아무런 말도 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에게 온통 사로 잡혀 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식당에서 그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면,
웨이트레스가 오고 가고 하더라도,
당신은 그와의 대화에 열중하기 때문에,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그 웨이트레스가 당신 테이블에 청구서를 놓고 가더라도
당신은 이제 식사가 끝났다거나,아니면 모두가 떠났기 때문에
그 식당을 떠나야 할 시간이라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다.
이 기도는 말을 주고받는 대화가 아니라 내심을 주고받는 대화이다.
이것은 다른 기도(祈禱)에 비해 높은 수준의 기도이기 때문에,
이보다 낮은 수준의 기도는 이 속으로 다 스며드는 것이다.
<질문27> 나는 하느님에 대한 어떤 종류의 저항 때문에 씨름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씨름을 하면서 동시에 이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 기도를 하느님과 씨름하는 시간으로 갖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
<답변 27 > 사람이 내적으로 침묵에 들어가면 일상적으로 흐르는 사고들의
뒤에 숨어 있던 어떤 갈등 같은 것이 의식에 떠오르기도 한다.
통상적으로 나는 이 시간 동안에 그것들과 씨름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가 버리도록 내버려 둔다.
이것들을 사색하는 것은 기도가 끝난 다음에 한다.
관상 기도의 가치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온전히 빠져 드는 것에 있는데,
내적 침묵의 진보로 이루어지는 그 관계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심리적인 문제들이 큰 평화의 시간 동안에 머리에 떠올라 오고 사색의 초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러한 당신의 성찰은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게 만드는 하나의 요술이다.
"침묵이 아닌 것은 어떠한 것"도 환영하는 것이 이런 종류의 기도에 대항하는
거짓 자아의 반응이다.
내적 침묵은 거짓 자아의 모든 성향과 아주 상반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어느 시간 동안 조용히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이 어떤 갈등을 놓고 특별한 성찰을 하면서 바로 기도 시간 중에
그것을 다루어야 한다는 영감을 받은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이럴 경우 당신이 느끼는 대로 자유스럽게 하라.
그러나 이러한 일이 자주 생기면 그것은 잘못이다.
<질문28> 오늘 나는 사고들이 들락날락하면서도
늘 그렇듯이 거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거룩한 단어를 쓰는 것과,현존 안에
머무는 것 사이에 균형을 잡으려고 더듬거리고 있다.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단순한 현존을 몇 번 체험했다.
그 때에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묻곤 한다.
"지금 거룩한 단어를 써야 하는가?"
<답변 28 > 당신이 깊은 내적 침묵에 있을 때,
깊은 못에 있는 물고기에게 맛있게 보이는 미끼처럼
어떤 사고는 당신에게 유혹을 준다.
당신이 이것을 물면 당신은 잡힌 것이다.
어떤 기대도 하지 않도록 노력하라.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이것은 모든 사고들을 떠나 보내는 습관을 길러서 얻어지는 것이다.
마침내 당신은 의식 속에 흘러내리는 것들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데,
그것이 즐거운 것이든 고통스러운 것이든 결국은 지나가고 말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부연할 것은, 이 기도의 훈련을 통하여 삶의 사건들을
오고 가는 대로 내버려 둘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삶을 더 쉽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향심 기도(向心 祈禱)는 떠나 보내는 훈련이다.
-------------O-------------제6장 <보통 종류의 사고들> 끝----------O-----------O----------
곧 이어서 제7장 <영적 주의성이 생겨남>이 계속 게재 하오니 많은 관심 가져주시길 바라오며,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을 향한 , 관상(觀想)기도를 완성 하시기를 기원 드리면서......
2015年3月30日(月)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하느님의 어리석은 從
'베드로 문' 옮겨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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