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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6.20이후 적용 자세한사항은 공지확인하시라예
출처: 여성시대 오기륭
글 찌려고 한국사전 다운 받은 나란 년....☆
캡쳐는 영상에서 해오지만 글 내용 하나하나 치려니 느므 힘들다.....
이번편은 정말 한국사에서 타이타닉 뺨치는 가장 애절한 러브스토리의 주인공, 공민왕과 노국공주야.
아주 맘이 애려온다 애려와. 잡소리 그만하고 보시져.
참, 공민왕에 대해 고려사에서 안 좋은 부분 나오는건 100%가 아니라고 믿어도 좋다능.
왜냐, 고려사 자체가 조선시대에 쓰여진게 많기 때문에 날조가 되었을 가능성도 무시 못 해서 실제 그렇다기 보다는
그냥 어느정도 참고만 하는 선으로 받아들이면 좋을거 같음.
사실 공민왕에 대해 알고가려면 가계도를 알고 가야 편하지.
공민왕은 고려의 27대왕인 충숙왕과 고려출신 비였던 공원왕후 홍씨 사이의 차남이었어.
장남은 28대왕인 충혜왕이었고.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죽은 이후에 정말 '폐인' 처럼 지냈다고 해.
공주의 초상화를 직접 그려놓고 그 앞에 밥상을 차리고는 너 한입, 나 한입 이러기도 예사였다지.
그래서 고려사에서는 공민왕의 이런 증상을 정신병이라고 했어.
이건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초상. 물론 실제인지 아닌지는 모름. 여하튼 남아있는 초상이 이것 뿐이야.
그리고 저 초상은 현재 종묘에 봉안되어 있음. (조선의 종묘에 고려의 왕과 왕비가 봉안된건 극히 이례적인 일)
공민왕은 원래 좀 엄격하고 예의를 굉장히 차리는 성격이었다고 해.
왜 이런 성격을 가지게 됐는지는 아래에서 살펴봅시다.
공주가 죽고나서부터는 그 성격이 완전히 변했다고 하지.
음악이나 미술에 재능이 있었던 공민왕은 직접 죽은 공주의 초상을 그렸어.
부모의 3년상을 치르듯 고기도 끊음. 세종대왕 같았으면 택도 없는 소리다.
그리고 몽골 음악을 연주하면서 공주의 원혼을 위로했다고도 하지.
증상이 심해지더니 결국엔 여장까지............................
이런 공민왕의 행동들을 고려사에서는 정신병이라고 불렀지.
우리가 공민왕과 노국공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려 한다면 공민왕이 이 전에 처했던 상황에 대해 알고
가야 할 것 같아. 공민왕이 왜 예의바르고 신중한 성격까지 지녀야만 했는지도 이런 상황을 보면 답이 나와.
위에서 썼다시피 공민왕은 충숙왕과 공원왕후의 둘째 아들이야. '충' 자가 있는 왕들은 원나라에서 봉한 왕이라고 보면 돼.
특히 원의 공주와 결혼한 왕들이나 원이 봉해준 왕들은 공민왕을 제외하고 '충' 자를 단 왕들이지.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 - 충혜왕 - 충목왕 - 충정왕)
원은 자신들이 봉한 왕이었기 때문에 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왕을 폐위했다 다시 복위시키고 그러곤 했어.
그래서 폐위 되었다가 복위 된 왕들은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이 그랬지.
폐위시키고는 원나라로 끌고가서 자신들 마음대로 귀양을 보내거나 심지어는 죽여버리기도 했어.
원의 눈 밖에 나서 귀양갔다 죽은 왕이 바로 공민왕의 형이었던 충혜왕 이었지.
공민왕은 어렸을적부터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강릉대군' 으로 원의 수도인 대도(현재의 북경)에 머물렀어.
그리고 자신의 형이 폐위되어 죽는 상황을 겪고, 조카인 충목왕, 충정왕이 왕위에 오르는 것 까지 봐야했지.
(충목왕 = 충혜왕과 덕녕공주의 아들 / 충정왕 = 충혜왕과 희비 윤씨의 아들 : 둘 다 공민왕 조카)
솔직히 공민왕은 왕위에 욕심이 없다고 볼 순 없을거야. 공민왕의 행적들에 대해 나와있는 책들을 보면 공민왕이
대도에서 여러 유명인사들과 어울리고 원 황제에게 깍듯하게 대했다는걸 보면 미래를 위해 대비한다는 느낌이 물신
나기도 하거든. 여하튼 공민왕은 처음 노국공주를 평생을 함께 하는 부인이 아닌 정치적인 목적으로 만나고 대했을
가능성이 꽤 커. 당시 황제가 노국공주의 인척이었거든. (노국공주는 위왕의 딸 / 위왕은 세습지위)
그리고 노국공주의 고모는 공민왕의 아버지였던 충숙왕의 세번째 부인인 조국장공주 이기도 했으니까.
여하튼 그렇게 공민왕은 실세였던 위왕의 딸인 노국공주와 혼인을 하고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가.
그러던 와중 원나라에서는 충정왕이 어려서 제대로 정치를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유로 충정왕을 강화도로 유배보내고
고려의 다음 왕으로 강릉대군을 선택해. 공민왕의 등장이지.
이렇게 즉위를 하게 됩니다.
처음에 정치적으로 만난 관계는 점점 애정이 싹트기 시작했어.
왜냐. 공민왕은 고려의 왕으로 화려한 복귀를 하면서 고려에 있는 원의 뿌리를 뽑아버리려 했고, 자신이 먼저 원의 복색이
아닌 고려의 복색을 했거든. 그런데 아무래도 원의 공주인 노국공주의 눈치를 안 볼래야 안 볼 수가 없었을거야.
하지만 공민왕의 결정에 노국공주는 동참해 주었고 자신도 고려의 옷을 입고 고려의 복색을 하면서
'저는 이제 고려로 시집을 왔으니 고려의 여인입니다' 라며 대답을 해 주었다고 해.
아무래도 그동안 원의 기세를 등에 업고 고려의 왕을 무시했던 여느 왕비들과 다른 모습에 공민왕 또한 마음이 바뀐거지.
점차 둘은 애정이 싹터갔지만 가장 큰 문제가 있었어.
혼인한지 10년이 넘도록 노국공주가 공민왕의 후계자를 낳지 못한거야.
그래서 이때 맞아들인 후궁이 학자인 이제현의 딸 혜비 이씨나 정비 안씨, 익비 신씨등이 있어.
그러다가 이제 홍건적의 난이 터져서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안동까지 피난을 가게 돼.
지금도 안동에는 놋다리밟기라는 놀이가 있어. 이 놋다리밟기의 유래는 바로 홍건적의 난으로 피난을 온 노국공주의 이야기야.
노국공주가 공민왕과 안동에 당도해서 냇가를 건너가려 했는데 돌다리가 드문드문 있어서 제대로 갈 수가 없었어.
그때 이 안동의 아낙네들이 엎드려 공주에게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고 해.
지금도 이렇게 놋다리 밟기 놀이를 계승해 오고 있지.
안동으로 피난을 와 실의에 빠져있던 공민왕에게 노국공주는 말타기를 권유해.
아무래도 피난을 와 있다고 해서 공민왕도 심신이 지쳐있던데다 피난길이기 때문에 굉장히 소극적이었겠지?
그 옆에서 공민왕을 잘 케어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노국공주였던거지.
그리고 노국공주는 공민왕의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어.
공민왕의 측근이었던 김용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곳이 고려 최대의 사찰이라 일컫어지는 흥왕사였어.
공민왕은 병풍 뒤에 숨어있고 공민왕의 복색을 한 환관 안도치가 공민왕을 대신해 있다가 살해를 당했지.
그리고 반란군은 공민왕이 숨어있던 방 앞까지 도착했는데 방 문 앞에는 다름 아닌 노국공주가 있었어.
노국공주는 공민왕을 필사적으로 지켰고, 다른 왕비도 아닌 원나라의 공주를 해하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반란군은 그대로 물러갈 수 밖에 없었지. 이 일로 인해서 왕과 공주는 더 애정이 불탔다고 해.
그리고 공민왕의 치세중에 또 하나의 업적이 있지.
바로 친원파 권문세족의 숙청이었어.
원나라 순종의 황후였던 기황후, 그러니까 고려 공녀 출신이었던 기황후의 오라비인 기철은 대국의 황후인 자신의 누이를
믿고 고려에서 엄청난 비리와 권력을 저질렀어. 자신이 더 위에 있다며 왕들을 무시하기도 했지.
그 결과는 바로 이랬어.
All Kill
잘 가라. 멀리는 배웅 안 나가마.
지랄들을 하시네요.... 대한제국 말년의 을사오적을 보는 것 같지?
이 바쳐진 권씨는 기황후의 아들인 황태자 아유시리다라의 부인인 황후 권씨가 되긴 하지.
뭐 원나라긴 원나라지만 원나라가 망한 후의 북원의 황후가 되는건 함정....☆
그러던 어느날, 희소식이 들려와.
노국공주가 혼인한지 16년만에 아이를 가진거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노산에다가 난산이기까지 했지.
결국 공주는 난산으로 죽었어.
더 안타까운건 사산된 아이가 아들이었다는거.
공주가 죽은 후 공민왕은 급격히 달라지기 시작해.
고려사에 따르면 36명의 자제위들을 뽑고 그 자제위들에게 자신의 시중을 들게 하면서 자제위들로 하여금
후궁들을 강간하게 했다는 말까지 나와. 뭐 그 가운데 후궁인 익비 한씨는 아이를 가졌다는 기록까지 있더라고.
물론 그 아이가 딸이긴 했지만.
공민왕의 암살은 익비 한씨로부터 시작이 돼.
공민왕은 자제위중의 하나였던 홍륜(쌍화점의 조인성 모티브)으로 하여금 익비를 강간하게 했고 익비는 아이를 가져.
그 소식을 공민왕의 측근 환관이었던 최만생이 공민왕에게 알리고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정릉에서 돌아오면서
술이 거나하게 취해있던 상태로 "그래? 그럼 홍륜을 죽여야 겠구나. 이 사실을 알고있는 사람은 너뿐이니 너도 죽여야겠지."
공민왕의 이 한 마디에 최만생은 기겁을 하게 되고 그 사실을 홍륜과 상의하게 돼.
결국 이 두 사람은 공민왕 암살을 시행하지.
결국 그렇게 공민왕은 세상을 떠나.
공민왕의 현릉과 노국공주의 정릉은 고려왕실 유일의 쌍릉이야.
아, 참. 우리는 편하게 노국공주라고 부르는데 고려식으로는 '인덕왕후' 라고 부르더라고.
공민왕의 현릉은 고려왕실의 릉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릉이라고도 일컫어 진다고 해.
그런데 노국공주의 정릉은 아직까지 발굴을 안 했다고 하네. 땅의 지반이 약해서 발굴하기가 어렵다고 해.
하지만 부인을 애지중지했던 공민왕이라면 공주의 릉과 자신의 릉을 똑같이 만들었을테니 굳이 발굴하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는게 학계의 평이라고.
노국공주의 정릉과 맞닿는 부분엔 이런게 있어.
문 모양이 있고, 구멍이 하나 있는데 손 하나 정도가 들어갈만한 구멍이야.
이 구멍은 노국공주의 정릉까지 연결되어 있지.
사람들은 이 구멍을 '영혼의 길' 이라고 표현한다고 해.
죽어서 영혼이라도 함께 하고싶은 공민왕의 마음이 담긴 릉이라고 보면 될거 같아.
두 사람 하늘에서는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 글은 슼랩이랑 복사 금지야... ^*^
슼랩 풀어두면 아무런 말도 없이 가져가는것도 싫고 해서 그냥 여시에서만 봐줬으면 해.
첫댓글 [공민왕]대충만 알고있었는데 ㅎ 자세하게 알수있게됐어! 여시 고마웡~
진짜 이두사람은 너무 절절해 ㅠㅠ 만약 윤회가있고 지금 태어났으면은 잘살고있겠지..?
삭제된 댓글 입니다.
고자는 확실히 아닌데(...) 남색 즐긴다는 말은 반사실 반루머로 받아들이면 될듯! 고려사가 공민왕의 기록을 날조했다는 의문을 품을수는 있지만 아주 사실이 아닌거로 개뻥쳤을 가능성도 좀 적은지라... 여하튼 그냥 반반으로 받아들이는게 가장 정확할거 같아.
으아 언니는 이런 걸 어떻게 아는거야?? 진짜 쩐다 ㅠㅠ 나 어제 언니 닉넴으로 검색해서 언니가 쩌리방에 쪄준 역사글들 다 봤음 ㅠㅠㅠㅠㅠ 넘넘 재밌고 이해하기도 쉽고 되게 신기하고 그릏다 ㅠㅠㅠㅠㅠㅠㅠ 고마워 언니 진짜 잘봤어!!!!!!
ㅜㅜ아름답다ㅜㅜ
나 신돈본뒤로 완전 공민왕이랑 노국공주에 빠졌었는뎈ㅋㅋㅜㅜㅜ 나도 이 다큐봤는데..ㅜㅜ 보면서 질질짜고 그랫다ㅜㅜㅜ신돈에서 노국공주맡은 서지혜랑 공민왕 맡은 정보석아저씨 둘다 연기 쩔었음...
근데 진짜 드라마틱해....정치적인이유로 결혼했는데...정말 진실한 사랑을 했잖아ㅜㅜㅜ나도 이런사랑하고싶어ㅜㅜ
ㅠㅠ 너무 안타깝다.... 다음생애에는 꼭 만나서 검은머리 파뿌리 될때까지 오순도순 살았으면...
ㅜ.ㅜ무덤 보는데 완전 찡했어
우와 진짜 재밌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되게많이 찡하다...ㅠㅠㅠ눈물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ㅜㅜ슬프당 금슬이 엄청 좋은 부부였어.....언니 잘봐쏘!!!!
아 재밋다!!!! 여시글 다 찾아봐야지!!!!
삭제된 댓글 입니다.
어머 신돈을 본 여시가 또 있네 ㅋㅋㅋㅋㅋ 나 그때 신돈 촬영장가서 싸인받은거 아직도 갖고 있는데 ㅋㅋㅋㅋㅋ
하... 주얼리정ㅠㅠㅠ 둘이 21살차인데 케미돋음ㅋㅋㅋㅋㅋㅋㅋㅋ 흥왕사 액션신 겁나 좋아했었음ㅠㅠ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 부분은 그냥... 고려사에서 날조한 부분도 있다고 보면 될듯. 홍륜이 공민왕 죽인건 사실이지만 익비 강간으로 해서 된건지 안 그런건지는 솔직히 아무도 몰라;
언니
다음에기황후얘기도함써주thㅔ요~
기황후는 뒤져보면 내가 이미 쓴거 나옴;
그렇구나ㅠㅠ아 슬프당..
삭제된 댓글 입니다.
응 맞아. 몽골에서 자라서 좀 활달하고 무술에도 어느정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했슴. 근데 연산군 노국공주 얘기는 그냥 야사라서 루머로 받아들이는게 편해; 항간에는 연산군이 노국공주 초상보면서 마스터베이션 했다는 말도 있는데 그냥 연산군 까내리기 위한 기록이라고 보면 될거 같음.
신돈재밋었는데 생각난당 ㅠㅠㅜ 잘읽고가~~
우아 정독했어!!
노국궁주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내조의 여왕ㅎ
위대한 사랑을한 위대한 정치가들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노국공주가 죽고 공민왕이 미쳤다는건 거의 루머로 받아들이면 될것같아.. 뭔가 앞뒤가 안맞네 ㅋㅋㅋㅋ
언니진짜잘읽었어
쓰느라고생했겠다 ㅠㅜ
완전 잘읽었엉..
잘읽어용~ 아 애절하당 ㅠㅠ
ㅠㅜㅠㅠ 넘나 잼잇땅 ㅜㅡ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