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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목사 설교 녹취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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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꼬모의 겨울
2021. 5. 1. 20:17
예수님의 비유 3. 기도를 가르치는 비유들
(눅 11:1~13)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6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오늘 우리가 세 번째로 함께 공부할 비유는 흔히들 강청기도의 능력을 강조하고 그러한 기도를 권장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는 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예요. 많은 이들이 이 비유를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강청하여 졸라대면 하나님이 귀찮아서라도 그 기도를 들어주시고야 마신다는 그런 아전인수격의 해석을 하고 있어요.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우리의 거룩한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꾸준히 반복하여 지속적으로 기도를 하면 그 정성에 감격하셔서 그 기도에 응답을 하시는 그런 분일까요?
여러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이게 성경에 있다?(맞으면 손들라고) 역시 서머나 교회는 수준이 높아요. 미국의 그리스도인들, 기독교인의 70%가 출구조사를 했더니 그 말이 성경에 있다, 라고 대답을 했다죠? 미국도 다 허당이에요.
여러분, 그건 성경과 완전히 대치되는 개념들이에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늘은 하늘의 뜻대로 인간을 바꾸어 내요. 하늘은 절대 인간들에게 다스려지거나 조종되지 않습니다. 하늘이 인간을 다스리는 거예요.
하나님은 절대 성도들이 드리는 기도의 양이나 기도의 자세, 끈기 등을 고려해서 기도 응답의 가부를 결정하지 않으세요. 하나님은 오히려 성도의 기도를 당신의 뜻에 맞게 바꾸어 내시는 분이에요.
그럼에도 하나님도 귀찮을 정도로 강청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보좌가 흔들려서 하나님이 마침내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그런 류의 해석은 하나님을 한낱 해결사로 전락시켜 버리는 불경스러운 성경해석인 거예요.
우리네 인간 세상에서의 부모들도 자식들이 무조건 땡깡을 부린다고 그 요구를 다 들어주지 않습니다. 우리네 인간 세상의 부모들도 그 자식의 요구가 과연 그 자식의 사람됨에 도움이 될 것인가, 아닌가를 심사숙고한 후에 그 자식의 요구에 대한 가부간의 응답을 해요.
하물며 우리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숨과 바꾸셔서 당신 나라 백성으로 양육을 하고 계신 그 자식들의 요구를 그저 끈질김과 간절함, 강청이라는 것만을 근거로 하여 응답의 유무를 결정하시겠습니까?
기도의 응답을 너무 못 받은 어떤 사람이 나중에 하늘나라에 들어갔다고 한번 가정해 보자구요. 그런데 자기가 기도의 응답을 그렇게 못 받은 이유를 하나님께 여쭈어 보았더니 하나님께서 ‘너는 참 끈기가 없더라. 금식 기도도 열흘을 작정해 놓고 여드레 만에 중단을 하고 100일 새벽기도를 작정하고도 90일을 못 채우더라.
좀 더 끈기 있게 끈기를 좀 발휘해 보지 그랬어. 그럼 내가 들어주었을 텐데. 열흘만 더 했으면 내가 그 기도 들어 줬을 거야’ 만약에 하나님이 그렇게 대답을 하셨다면 여러분 그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천국에서 사시겠습니까?
그리고 오늘 본문 중에 그 어디에 친구가 끈질기게 요구했다는 대목이 있어요? 그냥 ‘떡 있어?’ 이렇게 한번 물어본 것으로 끝이에요.
‘떡 있어?’ 예수님은 떡 세 덩이를 요청받은 그 친구가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떡을 주었는지 안 주었는지도 안 밝히세요. 그냥 질문을 하나 던지시고는 그 질문에 대한 제자들의 대답을 추론하셔서 기도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계실 뿐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유가 강청기도의 능력에 대한 비유로 둔갑을 한 것은 인본주의적 색깔을 짙게 드리우고 있는 그 ‘강청’이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그 단어로 모든 비유의 내용이 그냥 흡수되어 버린 거예요.
그렇다면 과연 이 비유가 담고 있는 진짜 내용은 무엇일까요? 지금부터 차근차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이 비유가 어떤 문맥 속에 들어 있는지를 살펴봐야 되겠죠? 여러분이 보셨다시피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이 비유는 주기도문에 붙어 있는 비유예요. 그게 이 비유를 여는 아주 중요한 열쇠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에 대해 가르쳐 달라는 요구를 했어요. 그건 단순히 기도의 방법이나 내용을 가르쳐 달라는 그런 요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기도를 거의 습관처럼 자주 하고 있었고 기도를 무척 중요한 종교행위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그들은 기도문 몇 개씩은 늘 암송하고 다녔고 시편의 기도들을 노래로 만들어서 흥얼거리며 다닐 정도로 기도에 열심이었던 사람들이에요. 예수님 당시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을 유명한 기도문들이 여러 개 있었어요. 그들은 그 기도문들을 수시로 암송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카디쉬(Kaddish)라는 조금 짧은 형태의 기도문도 있었고 18번 축복기도라고 불리는 쉐모네 에스레(Shemone Esre)라는 기도문도 있었어요.
유대인들은 카다쉬와 쉐모네 에스레라는 기도문 같은 것들을 의무적으로 매일 두세 번씩 낭송하도록 되어 있었어요. 제자들은 그렇게 기도문을 많이 알고 있었고 많이 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구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인가? 당시 커다란 무리를 이루고 있던 종교적 정치적 이익 집단들은 각자가 자신들의 믿는 바와 지향하는 바를 특화시켜서 기도문으로 요약을 해서 마치 신앙고백서나 사명선언문처럼 암송하거나 읽고는 했어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세례요한파, 헤롯당 등등 모든 집단들이 각각의 특색을 살린 기도문을 갖고 있었어요.
지금 예수님을 좇는 제자들은 그러한 배경 하에서 ‘주여, 우리에게도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준 것처럼, 요한파도 기도가 있는데 왜 우리에게는 기도문이 없어요? 기도문을 하나 만들어 주세요~’라고 부탁하는 거예요. 우리도 우리 파만의 특화된 기도문을 하나 갖자는 것이었어요.
주님은 그들의 요구를 금방 간파하시고 그 자리에서 예수를 좇는 자들이 드려야 하는 기도의 핵심을 몇 가지로 나누어서 하나의 기도문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게 우리가 알고 있는, 늘 암송하고 있는 주기도문이에요.
여러분이 이미 공부하셨다시피 이 주기도문은 우리 자신의 소원을 이루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것 정도를 그 내용으로 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우리 성도의 정체성을 규정하며 우리 성도가 도달하게 될 궁극의 목적지를 소개하고 있어요.
‘내 품속에 가지고 있는 나의 가장 깊은 소원이 내가 누구인가를 정의한다’라는 말이 있죠? 내가 갖고 있는 내 마음속의 가장 깊은 소원이 바로 내가 누구인지를 정의한다는 거예요.
그게 기도로 나오겠죠? 따라서 우리가 어떤 기도를 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어떤 인간인지가 폭로되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이 주기도문을 한번 보시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달라고 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런 삶을 살게 될 것이고 너희들의 정체성은 바로 이거야~를 가르쳐주시는 거예요. 주기도문을 제가 사역(私譯)으로 조금 구체적으로 늘여서 번역을 한번 해 볼게요.
유진 피터슨이 요즈음 ‘메시지’라는 성경해설집을 냈죠? 본인은 성경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아요. 어설픈 부분이 많이 있기 때문에 제가 그러한 모양으로 한번 고 주기도문을 번역을 해 볼게요.
‘우리 성도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들이며’ 이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예요. ‘우리 때문에 모독을 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은 반드시 거룩하게 찬양을 받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일어나는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이고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 온전히 성취가 될 것이며 우리에게 하늘의 만나이신
예수님을 양식으로 주셔서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우리를 살려내신 하나님께서 다른 세상의 양식들을 모두 쳐 내시고 오직 예수라는 양식으로만 배부른 자들로 만들어 내실 것이고 율법에 의해 형벌을 가해야 하는 율법의 시대가 가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은혜의 시대가 와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율법으로 정죄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으며 가시적으로도 완성이 될 것이고 선악과라는 시험,
즉 probation 기간이 완전히 끝나고 생명나무만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이 곧 도래할 것이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모두 아버지께만 돌려지는 그러한 완벽한 하나님 나라가 올 것이며
그 나라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 자들이 바로 우리 성도인데 그 모든 것이 하늘의 양식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영적으로 모두 이루어질 것이고 이루어졌습니다!’ 이게 주기도문이 담고 있는 우리의 신앙고백인 거예요.
그런데 주기도문 안에 쓰인 동사가 전부 부정과거시제라 그랬죠? 부정과거시제가 imperative 명령문으로 쓰이면 어떤 의미가 있다 그랬어요? 과거, 현재, 미래의 전체를 아우르는 그런 내용으로 바뀐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할 때 그 안에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고 지금 임하고 있고 완전하게 임할 것입니다’라는 뜻이 모두 담겨 있는 거예요. 그런데 주기도문의 모든 동사가 부정과거명령형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은 과거에 이미 임한 것과 현재에 진행 중인 것과 종말의 현실이 모두 그려져 있는 ‘이미’와 ‘아직’의 교리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기독교 핵심교리의 보고인 거예요. 아니 아직 십자가도 지기 전에 이런 기도문을 가르쳐줘도 되는 거예요? 예, 부정과거시제로 동사가 쓰여 있다니깐요.
그런데 주기도문의 청원을 구체적으로 나누어보면 크게 일곱 개로 나누어져요.
첫번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A)
두번째 ‘나라이 임하옵시며’(B)
세번째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C)
네번째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D)
다섯번째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C')
여섯번째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B')
일곱번째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A')
저는 이 구조를 카이즘 구조로 봅니다. 1항과 7항을 A와 A'로 보고요 2항과 6항을 B와 B'로 봐요. 그리고 3항과 5항을 C와 C'로 보고 가운데 네 번째를 D, 이 기도문의 핵심인 D로 보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악에서 구하옵소서’ 세상의 악이 다 제거가 돼 돼요. 그렇게 A와 A'가 연결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완성이 되기 위해서는 선악과의 시험기간, 하나님의 probation기간이 끝나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B와 B'가 연결돼요.
‘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시며’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가 연결이 되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땅에서도 현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뜻은 바로 하나님의 십자가에 의한 죄 사함, 즉 은혜의 나라의 완성에 관한 것이므로 그게 C와 C'로 연결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카이즘 구조로 밀고 들어가다 보면 가운데 하나가 남아요. 그게 카이즘 구조의 핵심입니다. 그게 뭐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예요. 그러니까 카이즘 구조의 나머지 내용들은 바로 이 D 양식이라는 핵으로 모두 수렴이 되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럼 주기도문의 모든 기도가 겨우 우리가 이 땅에서 먹고살 양식에 관한 기도였단 말인가? 그게 핵심이라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성경 자체에 모순이 일어나요. 이 주기도문이 기록이 되어 있는 마태복음으로 가면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어구 바로 밑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6:25 볼까요?
(마 6:25)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바로 위에서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그러고 바로 밑에서는 구하지 말래요. 어떤 걸 좇아가야 돼요?
자,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되는 거예요. 주님이 주기도문에서 제자들을 비롯한 성도들에게 구하라고 하는 일용할 양식은 단순히 이 땅에서 먹고 살 양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경을 한번 잘 보시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의 ‘일용할 양식’이라는 단어 옆에 풋노트가 있을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내일의 양식’이라는 말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일용할’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에피우시온’이라는 이 단어에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그 ‘에피우시온’이라는 단어는 헬라의 어떤 문헌에도 쓰인 바가 없는 아주 생소한 단어예요. 성경에서도 딱 여기에 한번 쓰였어요.
따라서 그 헬라어 ‘에피우시온(헬1967-에피우시오스)’이라는 단어가 현재에 어떠한 의미로 쓰이고 있는가를 가지고 고대 당시의 문헌을 해석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인 거예요. 언어의 의미는 수시로 변한단 말입니다. 제가 토플 시험을 볼 때만 해도 gay라는 단어는 joy라는 단어였어요.
그래서 비슷한 말을 고를 때 그걸 골라야 됐는데 지금은 gay라는 단어는 동성연애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죠? 언어는 이렇게 짧은 시간에도 완전히 그 뜻이 바뀌어버린단 말이에요. 따라서 오늘날의 현대 헬라어를 갖고 그 당시의 헬라어를 추론하여 해석을 하면 안 된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다른 그 어떤 문헌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그 ‘에피우시온’이라는 단어의 뜻을 어떻게 올바로 해석을 할 수 있어요? 그때 필요한 게 바로 아람어 성경이에요.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에 아람어를 쓰셨습니다. 아람어는 바벨론의 언어예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70년간 있으면서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가 아람어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아람어를 썼어요. 오히려 히브리어는 유대인들 중 아주 극소수의 학자들이나 랍비들 정도나 쓸 수 있는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잊혀져 있는 언어였어요.
그래서 아람어 성경은 당시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잘 그려주는 그러한 좋은 참고가 돼요. 그래서 헬라어 성경의 단어해석이 모호할 경우 항상 아람어 성경과 비교 대조하여 보는 것이 중요해요.
그런데 아람어 주기도문에는 ‘오늘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정확하게 그 부분을 번역을 하면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오늘 먹을 양식을 주세요’가 아닌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을 주세요’라고 번역을 해야 맞아요. 그런 청원인 거예요. 그러면 성경이 자체의 모순을 일으키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죠?
그렇다면 내일의 양식, 내일의 떡이 무엇인가? 구약에 바로 그 내일의 양식이 나오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일의 양식을 오늘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사건이죠? 하나님은 6일째 되는 날에 항상 내일의 양식을 함께 주셨어요. 왜 여섯째 날에 다음 날 거까지 주셨죠? 제가 주기도문 강해 때 거기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드렸으니까 잘 모르시는 분들은 그걸 참고하세요.
그 다음날이 안식일이기 때문이죠. 안식일에는 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기 때문에 여섯째 날에 일곱째 날 것까지 거두고 안식일에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해 놓으신 온전한 창조를 기념하며 즐기고 종말에 이루어질 참 안식을 고대하라는 의미에서 여섯째날 다음 날 것까지 주신 거예요. 그렇게 여섯째 날 내일의 양식까지 주심으로 안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하시고 아울러 그 안식의 날은 반드시 온다! 라는 것을 주지시킨 거예요.
왜? 내일의 양식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늘 주어졌다는 건 ‘아~ 우리에게 내일이 오겠구나~’라는 것을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거거든요. 내일이 안 오는데 내일의 양식을 줄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그 내일이 안식일이란 말입니다.
아~ 그러니까 안식일이 담고 있는 그 나라는 반드시 오겠구나~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게 바로 ‘내일의 양식’이에요. 여섯째 날 받았던 내일의 양식. 마찬가지예요. 성도는 이 땅에서 여섯째 날을 살면서 완성의 날인 일곱째 날을 살 수 있어요. 어떻게? 내일의 양식으로~
예수님이 쓰셨던 아람어 주기도문을 보면 거기 ‘마헬’이라는 아람어 단어가 나오는데 그 단어가 ‘내일의’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중요한 건 아람어의 ‘마헬’이라는 단어는 그냥 24시간 후의 내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오늘과는 다른 다가올 시대의 내일’ 다가올 시대의 어떤 날.
그런데 다가올 시대가 한 단어로 뭐라 그랬어요? 다가올 시대의 삶? ‘영생’이라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내일의 양식은 다가올 시대의 삶을 위한 양식, 영생을 위한 양식. 어디서 본 적 있죠? 요한복음에서 봤잖아요? 누구였어요?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였잖습니까~ 요한복음 6:27 보세요.
(요 6:27, 48~51)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영생하도록’이 다가올 시대에 필요한 양식이란 뜻이죠?)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 자니라(48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또 나왔어요)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여기서 ‘떡’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와 ‘일용할 양식’에서의 그 ‘양식’으로 번역이 된 단어가 똑같은 단어예요. ‘아르토스(헬740)’ 떡. 하늘의 떡으로 오신 그 예수와 일용할 양식의 그 양식이 똑같은 단어, 아르토스, 떡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 안에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내일의 양식을 주세요. 내일의 떡을 주세요’의 그 떡은 누구?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통하여 일용할 양식, 일용할 떡을 구하라고 하신 것은 바로 내일의 양식, 다가올 세대의 양식, 영생하는 양식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라~ 라는 그런 의미로 그 주기도문을 주신 거란 말이에요.
그 예수에 의해 죄가 사해지고 그 예수에 의해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고 ‘나라이 임하옵시며’ 그 예수에 의해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되는 거고 그 예수에 의해 하나님의 공의가 채워져서 율법의 시대가 가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율법의 형벌로 정죄하거나 심판하지 않고 용서할 수 있는 은혜의 시대가 온 것이며 그 예수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회복이 된 거예요.
그래서 주기도문의 카이즘 구조 가장 가운데에 내일의 양식, 내일의 떡, 예수 그리스도가 차지하고 있는 거예요. 바로 그 양식, 그 떡에 관한 구체적 설명이 바로 떡을 구하는 친구의 비유에 메시지로 담겨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기도문과 그 떡이 붙어 있는 거란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더운 날씨를 피해서 밤에 주로 여행을 하곤 했어요. 그리고 여행길에 식당이나 여관이 많지 않았던 시대이기 때문에 거의 늦은 밤에 목적지에 도달하여 숙식을 해결하는 게 상례였습니다. 그렇게 밤을 타고 찾아온 친구가 떡을 좀 달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그 집에는 떡이 없었어요.
K. E. Bailey라는 신학자는요 복음서를 복음서의 배경인 중동에서 이해하기 위해서 스스로 중동에 가서 30년 이상을 계속 살면서 복음서를 해석했던 사람이에요. 참 극성이죠, 그죠? 저도 신학교 때 그의 책을 보면서 당시 유대 지방의 관습에 대해 참 많이 배웠어요. Bailey 박사에 의하면 당시 중동지방의 사회는 철저한 공동체 사회였다 그래요.
그래서 떡도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만들었어요. 지금 우리가 각 구역이 돌아가면서 전체가 먹을 음식을 만들잖아요? 그렇게 한 집이 돌아가면서 마을 전체가 먹을 떡을 만들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어느 한 집의 손님은 그 집만의 손님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손님 대접을 받았다 그래요.
그러한 사회문화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성경에 나오는 대표의 원리나 연합의 원리가 생경하지 않았던 거예요. 그들은 이미 그 대표의 원리로 살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들의 친구 개념은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친구의 개념과 많이 달랐다 그래요.
그들은 부모나 자식 등의 관계가 아주 친밀하게 무르익었을 때의 그 관계를 친구라고 묘사할 정도로 당시 중동지방의 친구관계라는 건 니 것 내 것이 없는 아주 친밀한 관계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맺고 있는 모든 관계 중 가장 으뜸으로 무르익어 있는 관계가 친구예요.
따라서 밤에 친구 집에 도착한 그 친구도 미안할 것이 전혀 없는 상태였고 그 친구를 맞아 다른 친구 집으로 떡을 빌리러 갔던 친구도 전혀 미안할 것 없이 떡을 요구할 수 있는 상태였어요.
왜냐하면 당시의 풍습 하에서 그 손님은 마을 전체의 손님이었고 그날 떡을 만든 집이 바로 잠자고 있던 친구의 집이었던 것이며 친구 사이는 밤낮 구별 없이 아무 때나 그 집의 것을 제 것처럼 쓸 수 있는 사이였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은 그러한 상황을 설정해 놓으시고 질문을 하나 던지시는 거예요. 누가복음 11:6 보세요. 본문 6절.
(눅 11:6~7)
6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이 질문은 제자들에게 실소를 자아냈을 거예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아니오’라는 대답은 상상할 수도 없는 대답이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당연한 질문을 예수님께서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는 이 비유가 끝나요, 그냥. 이렇게 이 비유에 떡을 구하는 친구의 강청이나 끈질김이나 땡깡은 단 한 줄도 기록이 되어 있지 않아요. 그냥 질문으로 비유의 네러티브는 끝이 나고 설명이 이어진단 말입니다. 본문 8절로 가보세요
(눅 11:8)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여기에 나오는, 딱 한 번 나오는 강청이라는 단어 때문에 이 비유가 크게 오해되고 있는 거예요. 여기에 쓰인 강청이라는 단어 ‘아나이데이아(헬335)’라는 단어는요 사실 교부시대를 거쳐서 중세 시대에 들어와서야 강청함, 끈질김이라는 단어로 쓰였지 그전에는 전혀 다른 의미로 쓰였던 단어예요.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책 ‘Jewish War’나 유대 랍비들의 문헌 그리고 70인역 등을 보면요 당시에 아나이데이아라는 단어는 모두 ‘수치를 피하기 위함,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함, 체면을 잃지 않기 위함’이라는 단어로 쓰였어요. 강청함이라는 단어는 그때 당시에는 아예 강청이라는 의미는 없었단 말입니다. 끈질김이라는 의미는 없었어요.
그러다가 라틴어 성경 번역본에서 처음으로 importunity, 강청함이라는 뜻으로 번역이 되었고 곱틱 번역본에서 persistence, 끈질김 등으로 번역이 된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단어들과 상황들을 우리의 문화권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서 그 비유를 우리의 문화나 언어로 옷을 입혀서 현대화시켜버리면 안 돼요. 지금까지 설명을 해 드린 단어의 배경이나 사회문화적 배경 등을 정보로 하여 이 비유를 다시 한번 해석해 보자고요.
한 친구가 밤을 타고 다른 친구의 집을 방문했어요. 그 친구는 당시 집단적이며 공동체적인 사회문화 속에서 당연히 그 마을 전체의 손님이에요.
그래서 방문을 받은 친구는 스스럼없이 그날 마을의 떡을 구웠던 친구의 집으로 떡을 가지러 갔어요. 만일 그날 떡을 구운 친구가 귀찮아서 떡을 내어놓지 않는다면 그 친구는 물론이요 마을 전체가 수치와 창피를 당하게 돼요.
유대인들이 그러한 예의를 치명적으로 지켜왔단 말입니다. 그래서 마을 누구에게 가서 부탁을 했어도 그는 마을 전체의 손님으로 대접을 받아야 했었고 그 마을 어디에 떡이 있어도 그건 그에게 갖다 주어도 아무도 불평을 누구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태였단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수치와 마을의 수치는 친구 사이라는 그 관계를 넘어서는 모든 행위의 근거와 이유가 되는 거였어요. 차라리 목숨을 내놓을망정 수치를 당하면 안 된다가 유대인들의 마음이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러한 수치를 모면하기 위해서 뒤에서 적들이 칼을 들고 쫓아오는데 안식일에 안 뛴 거예요.
신앙이라기보단 그건 자기 가치 향상의 마음에서 나온 수치를 면하기 위한, 창피를 당하지 않기 위한 그런 사고에서 나온 거란 말입니다. 마치 유다가 ‘내 죄는 내가 책임진다. 쪽팔리게 가서 용서 안 구할 거야’라고 수치를 면하기 위해 자살한 것처럼. 그게 유대인들의 사고였단 말이에요.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야,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겠지만 그렇게 소중하고 당연한 친구 사이라 해도 귀찮아서 떡을 안 내어놓을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그런 일을 절대 있을 수 없지만 혹 혹 그렇게 친한 친구 사이라도 그 떡을 안 내놓을 수는 있을 거야.
그러나 수치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강청, 아나이데이아예요, 그게. 수치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절대로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잖아? 그건 너희들도 아는 거 아냐?’ 이렇게 물어보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 친구와 떡 세 덩이의 비유는 절대로 거부당할 수 없는 어떤 당연한 요청에 대한 하나의 그림으로 제시가 된 거란 말입니다. 그 떡이라는 예수가 성도의 기도로 안 주어질 수가 없다는 뜻이에요.
‘지성이면 감천이고 조르면 주게 되어 있다’라는 그런 유치한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 비유에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어떤 요구가 붙어 있는지 한번 보세요. 본문 9절.
(눅 11:9~12)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세 친구의 비유 아래에 그 유명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라는 권고가 붙어 있어요. 그러니까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찾고 두드려서 무얼 얻어내라는 거예요? 떡~ 그 떡은 뭐라 그랬어요?
바로 위에? 예수 그리스도요~ 그 떡, 아르토스는 예수 그리스도란 말이에요. 그런데 주기도문에 의하면 그 떡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어요? 맞습니까? 부정과거명령형으로 써 있다 그랬잖아요? 이미 주어졌어요.
그렇다면 우리 성도가 하늘의 양식인 예수를 열심히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얻어낸다~ 라는 건 무슨 말일까요? 예수라는 하늘의 만나를 먹은 자로서 하나님 백성다운 삶, 예수 같은 삶,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삶을 추구하라는 거예요. 그 일을 도와주러 오신 보혜사, 누구? 성령이잖아요~ 그래서 이 비유의 결론이 이렇게 나는 거예요. 13절.
(눅 11:13)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성령은 우리가 구한다고 우리에게 오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일을 한단 말입니다. 그걸 성령을 준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기도문으로 시작하여 세 친구의 비유로 끝이 나는 누가복음 11장의 전체 내용은 하늘의 떡을 먹은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삶, 즉 떡을 먹은 자로서의 떡을 닮은 삶을 당연히 추구하게 되어 있는 것이며 아버지는 반드시 그 추구를 완성시키시고 성취시킬 것이며 그 일의 보증으로 성령, 보혜사가 와 계신다고 하는 구속사 전체를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거예요.
유치하게 그냥 문을 두드리고 조르고 귀찮게 잠도 못 자게 하면은 하나님도 귀찮아서 주신다. 보좌를 그냥 수시로 흔들면 하나님도 어지러워서 ‘야, 야, 그만해. 그래 줄게’ 이거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에게 먹여진 그 떡의 삶이 우리의 삶 속에서 잘 나타나지 않죠?
그때 그리고 또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의 처우답지 않은 고난과 환난의 삶이 닥치기도 해요. 그때 어떻습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알아요. 우리는 예수를 먹었어요.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먹었어요. 떡을 먹었습니다.
우리 안에 와 계세요. 성령으로 와 계세요.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너무 요원해 보여, 내 삶을 보면. 거기다가 이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가 임한 내 삶이 너무 초라해 보이는 거예요. 그때 성도에게 오는 게 뭡니까? 낙망이에요.
누가복음에 예수님의 사마리아 여행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 네러티브 속에 여러 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거기에서 누가복음에만 있는 기도에 관한 비유가 세 개가 나와요.
그게 뭔지 아세요?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세 친구의 비유와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 그리고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의 비유. 그거 두 개는 붙어 있죠? 뒤의 거는? 요게 누가복음에만 나오는데요, 요 세 기도에 관한 비유가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어요.
자, 지금 우리가 세 친구와 떡 세 덩이에 관한 비유는 충분히 공부를 했습니다. 자, 이제 우리는 우리가 항상 기도하면 그 성령이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를 하여 떡을 먹은 자의 삶, 그 하늘의 떡의 삶을 우리 안에서 드러낸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왜 안 주시겠느냐? 그랬으니까. 그런데 우리의 삶을 정작 보면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낙망을 할 수밖에 없어.
고난과 환난이 계속 들이닥치고 내가 나의 삶을 봐도 전혀 변해가는 것 같지가 않아요. 그때 우리가 낙망하게 되잖아요. 예수님이 거기에 대해, 그러한 상태에다가 비유를 또 하나 던지시는 거죠. 항상 기도하며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은~ 그게 어디 있어요? 같은 누가복음에 있습니다. 18장으로 가보세요.
(눅 18:1~8)
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2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이 불의한 재판관과 강청하는 과부의 비유 또한 하나님을 귀찮게 조르면 반드시 주신다는 식의 유치한 내용이 아니에요. 그 내용을 잘 보시면 불의한 재판관과 선한 하나님 그리고 과부와 택한 자가 이렇게 대조가 되어 있잖아요?
불의한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아주 불성실한 재판관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불성실한 자가 과부의 강청이 귀찮아서 그의 소원을 들어줘요.
그것과 대조해서 선하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은 택한 자들이 밤낮 부르짖고 있고 있는 그 내용을 이미 아시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밤낮 부르짖지 않아도 반드시 그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대조인 거예요.
왜냐하면 성도의 기도는 모두가 하늘의 떡에 대한 기도인데 그 떡은 이미 주어졌을 뿐만이 아니라 가시적으로도 완전하게 우리를 점령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에요. 누구에 의해서? 떡에 의해서! 우리는 떡이 될 거예요, 이 세상에서. 떡 돼서 죽을 거예요. 떡이 우리를 점령해버린단 말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언약이에요.
그런데 가끔 그러한 확정된 현실이 의심으로 다가올 때가 있잖아요? 아니 가끔이 아니라 너무 자주 그렇죠? 마치 하나님이 불의한 재판관처럼 느껴질 때가 있단 말입니다. 우리의 요구와 청원을 귀찮아하셔서 마냥 침묵하고 계신 분처럼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우리한테. 왜 하나님은 내 기도를 안 들으실까? 왜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실까? 우리에게 하나님이 그 불의한 재판관처럼 느껴질 때가 있단 말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은 실제로 그렇게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거기에 믿음이라는 게 필요한 거고 그 믿음을 선언하고 더욱더 공고하게 다지는 게 바로 기도라는 거예요. 여러분, 기도는 내가 뭔가를 요구해서 얻어내는 게 일차 목적으로 갖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제발 똑바로 알아들으세요.
기도는 Means of Grace, 은혜가 쏟아지는 수단이에요. 통로! 그러니까 우리는 기도를 함으로 해서 ‘하나님, 나는 믿어요. 나는 지금 이렇게 낙망하고 있고 의심하고 있지만 하나님, 나에게는 언약이 주어졌잖아요? 내가 그걸 믿었잖아요? 그리고 나는 아직도 하나님을 놓지 않고 있잖아요?
하나님, 저는 제가 지금 비록 낙망하고 있고 의심하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저는 그 나라가 반드시 완성될 걸 믿고 제가 하나님 나라로 완성될 걸 믿어요’가 내 신앙고백이며 기도인 거예요. 뿐만 아니라 그 나라는 분명히 올 것이라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의 선포. 그게 기도인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삶 속에 너무 자주 의심과 낙망이 오니까 항상 기도하게 되는 거예요. 그건 기도하지 않아도 들어줄 거지만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기도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단 말입니다. 그건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다시 한번 믿음 위에 공고히 서게 되는 거고 다시 한번 언약을 확인하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기도하되 낙망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 항상 기도하는데도 안 들어줄 수 있으니까 낙망하지 말라는 거예요. 아니라면 ‘항상 기도해, 그러면 절대 낙망할 일 없을 거야’라고 시작되어야 되잖아요?
근데 ‘항상 기도하되 낙망하지 말 것은’이라고 시작된단 말입니다. 왜?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은닉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 나라의 은닉성!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은닉되어 있단 말입니다.
밭에 감추어져 있단 말입니다, 그 보화가. 그리고 그 보화는 질그릇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질그릇으로 폭로가 되어야 하나님의 보화 됨이 드러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 아까 찬양했잖아요? 약할 때 강함 되시네! 그게 나는 질그릇이에요. 하나님만 보배예요. 이걸 고백하는 거예요, 그게. 전부 지들이 보배가 되려고 그러니까 하나님이 완전히 쓰레기가 되어 버렸어요. 보배 속에 쓰레기.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는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항상 기도하며 인내로 기다려야 한다~ 라는 것을 쉬운 그림으로 설명해주는 게 바로 이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예요. 이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 바로 앞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잠깐만 보고 갈까요? 누가복음 17장 보세요. 20절.
(눅 17:20, 22, 25, 33)
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22절)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인자의 날 하루라는 것은 메시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시대의 절정, 심판의 날이란 뜻이에요. 못 본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25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지니라(누가? 예수가)
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너희도 내 삶을 그대로 좇아오게 될 거야’라는 이야기한 거예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면서. 근데 그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놓고 나니까 예수님이 마음이 안 좋으신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에다가 비유를 하나 딱 붙여주신 게 ‘항상 기도하며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은’인 거예요. 그게 누가복음 18장인 것입니다. 이 비유도 역시 우리가 서두에 공부했던 누가복음 11장의 떡 세 덩이와 세 친구의 비유에서 흘러나온 거란 말입니다.
은닉되어 있는 하나님 나라. 그 나라 때문에 때로는 우리가 낙심이 되어 기도하고 여전히 같은 모습인 것 같은 자신의 모습 때문에 기도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속히 이루실 하나님의 언약과 전능하심을 믿기에 그 믿음으로 기도하는 거예요. 역시 무얼 구하는 기도죠? 떡~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예수라는 떡을 구하는 기도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들의 나라니까.
그래서 그 비유가 어떻게 끝난다? 내가 다시 올 때 그런 믿음을 보겠느냐~ 왜? 그 삶이 너무 힘들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삶을 끝까지 해낼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거예요. 신앙생활이 그만큼 힘들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들만 끝까지 간다니깐요. ‘세상에 내가 다시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성도야, 너희들의 신앙생활은 그만큼 힘들 거야’라는 말씀인 거예요.
근데도 ‘내가 택한 이들은 반드시 인자의 날의 절정, 그날을 보게 해줄 거야~’ 그거예요. 그래서 이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가 ‘믿음’으로 끝나는 거예요,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또 하나 등장하죠? 그게 바로 ‘성도의 원한’이에요. 그 과부가 원한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우리 성도가 원한이 있다, 라는 게 말이 됩니까?
우리 성도의 원한은 어떤 원한일까요? 니 이웃을 니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고 너에게 해를 끼친 이웃을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 그랬어요. 근데 무슨 놈의 원한이에요? 성도가 어떤 원한을 갖고 있어요?
심지어 하나님 나라에서도 제단 밑에, 제단 밑이라는 것은 ‘제물로 죽은’이라는 뜻이에요. 제단 밑의 영혼들, 성도의 영혼들이 신원하여 ‘우리의 이 원한을 풀어 주세요’라고 기도를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 원한이 어떤 원한일까요? 계시록 6장에 보면 잘 나오죠?
그 원한은 창세기 4장에서부터 연결이 되는 거예요. 가인이 아벨을 때려죽였을 때 아벨은 nothing이라는 뜻이라 그랬죠? 하벨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단어가 nothing이에요. nothing인 자, 아무것도 아닌 자가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가인, 가인은 ‘나는 힘이 있으며 내 힘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줄 수 있다’라는 아담의 아들이에요.
맏아들. 아담이에요, 그 자체가. 세상이에요. 세상에게 하나님에 의해 택함을 받은 의인이 맞아 죽는 거죠. 근데 그 아우의 피가, 아벨의 피가, 의인의 피가 땅속에서, 그 핏소리가 땅속에서 신원을 하고 있다 그래요.
히브리서 4:10에 보면. 니 아우의 피가 땅속에서 나에게 호소한다 그러잖아요? 그게 신원이거든요. 그 신원이 어떤 신원이겠어요? ‘하나님, 저놈이 날 죽였으니까 빨리 복수해주세요’ 그 신원일까요? 아닙니다.
아벨의 신원, 성도들의 신원, 제단 아래 영혼들의 신원이라는 건 의에 대항하는 죄에 대한 원한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근데요 계시록을 보면 ‘하나님, 언제 우리의 이 신원을 해결해주실 거예요?’
그랬더니 ‘지금 땅에 있는, 세상에 있는 니 형제들이 다 죽으면~’ 이래요. 세상을 죽여야지 왜 그 아래에 있는 불쌍한 이 성도들의 형제를 다 죽이냔 말이에요? 그들이 다 죽을 때까지 너희들의 신원은 안 풀어진다~예요. 왜 그들을 죽여야 되죠?
다시 한번 묻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도가 이 세상에서 이 억지 같은 힘의 원리, 이 세상의 삶의 원리를 보면서 굉장히 불쾌하고 또 왜 하나님은 아직까지도 이러한 더러움과 추악함과 죄악을 그냥 두고 보실까? 하는 안타까움도 있고, 그렇죠?
그리고 왜 하루속히 완성되지 않을까? 이 하나님의 나라는. 거기에 대한 초조함도 있어요. 근데 그러한 것들이 어디에서 제일 많이 발견이 됩니까?
내 안에서~ 다른 것 볼 필요도 없이 다른 사람들은 얼마든지 연극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야, 저 사람들은 좀 괜찮은가 봐~’ 우린 이렇게 볼 수 있어요. 그러나 나는 나를 속일 수가 없어요. 나는 나에게 가장 밝히 드러나게 돼 있어요. 폭로 당합니다.
그 죄가, 하나님 없이도 나는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고 하나님 없이도 나는 내 스스로의 힘으로 하늘에 도달할 수 있다, 라는 이 죽일 놈의 이기주의, 인본주의가 내 속에 가장 강렬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요. 하나님은 철장을 갖고 오셔서 바로 그 마귀적 속성을 죽여가시는 거예요. 그게 세상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신원, 그 원한은 언제 다 해결이 될 수 있어요? 내가 죽을 때, 세상이 죽을 때 완전히 해결이 되는 거예요. 근데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보면 절대 안 죽을 거 같잖아요?
이 세상은 계속 이렇게 패역하게 흘러갈 것 같애. 그리고 나는 절대로 하나님의 자녀로 완성이 안 될 것 같애. 예수를 40년 믿었는데 변하기는 개뿔이나 하나도 변하질 않았어. 그때 뭐 하라는 거예요? 항상 기도하며 낙망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게 성도의 원한입니다. 성도의 유일한 원한. 죄에 대한 원한.
나의 미성숙함에 대한 원한. 그러나 ‘나는 불의한 재판관 아냐. 너희에게는 내가 불의한 재판관처럼 보일 수 있어. 그러나 나는 너희들의 아버지야. 내가 그 기도 안 들어주겠어? 걱정하지 마. 항상 기도하며 낙망치 말아~’ 이게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예요.
그러면 한 번 보자고요. 내가 이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인본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하나님 말고 다른 데에 마음을 두고 있는 그런 나의 이 죄성을 하나하나 끊어내야 되죠? 그러니까 하나님 이외에 내 마음을 빼앗고 있는 것들이 하나하나 끊어져 나가야 돼요.
그게 기도의 응답이에요. 그렇잖아요? 그게 항상 기도하며 낙망하지 말아야 할 기도의 내용이잖아요? 그런데 강청해서 얻어내자? 이게 마귀 새끼들인 거예요. 책도 나왔어. 이게 마귀새끼란 말입니다.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요? 성경을 거꾸로 보고 있는 거예요.
인간 중심으로 성경을 보느냐, 하나님 중심으로 성경을 보느냐는 이렇게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 땡깡 부리면 무조건 준다는 내용이 있어요? 아무거나 찾아서 갖고 오세요. 다 풀어드릴 테니까. 그런 거 없어요.
하나님이, 떡이 여러분을 점령하여 이 세상에서 떡 쳐서 죽이는 거예요. 그때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예수가 오신 거고 성령이 여러분 안에 와 계신 것이고 하나님은 반드시 완성하실 거예요. 그걸 믿으며 오늘 조금 내가 낙망이 되고 오늘 내가 조금 의심스러워도 기도로 다시 회복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이 비유의 진의입니다.
첫댓글 이렇게 아바돈 빙의설에 꼬리치는데
쌈마는 왜 찰자의 마음을 몰라주는 걸까? ㅎㅎㅎㅎ
너는 입방정으로 망한다
@관찰자 차라리 아바돈 빙의론이 진리입니다! 라고 꼬리치고
이재하에게 가서 배워라.
그러면 쌈마가 두 팔벌려 환영할 것이다.ㅎㅎㅎ
@crystal sea 루시퍼장로가 지랄하는 이유....
카페회원님들은 아셔야 합니다.
@여호와 삼마 아바돈 빙의론......ㅋㅋㅋㅋㅋ
좋은 내용의 글입니다~!!
이거 완전 간신이네?~
영지주의라고 욕할땐 언제고?~
아람어성경은 말이 안되는 소리입니다
마태복음에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말씀은 예수님께서 숨지기 직전에
아람어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말의 뜻을 바로 그밑에
기록했슴니다
주여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성경이 아람어로 되었다면
굳이 이런 말씀이 기록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마태가 헬라어로 성경을 기록했으므로
아람어로 말하신 것을 다시 해석해서
기록한 것이지요
그리고
성경필사란 원래 기록된 말씀을
그대로 옮기는 것을 필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본보존을 위해서~
아람어였다면 아람어글자 그대로
필사되어야 필사본이라고 말할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람어로 말씀하셨으면
아람어로 기록하고 밑에 해석을
달았었겠죠
그러므로 아람어성경 원본설은
새빨간 거짓말인 것입니다
@주님내안에 그래 너 참 말한번 잘했다.
아람어 원본 성경에는 번역하면이라는 말씀이 없단다.
그 뜻이 뭐다?
아람어 성경원본을 헬라어가 베끼어 기록했다는 뜻이 된단다.
And about the ninth hour, Jesus cried with a loud voice and said, “God, God, why have you left me?”
(마27:46)
아림어 영어성경.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만 기록되어있고.
번역하면...이라는 문장이 통째로 빠져있는 아람어 성경이란다.
그러면 무슨 뜻이겠니?
답답한 등신아~~
나는 찰지가 빨갱이새끼라고 욕했지.
영지주의라고 한적이 없다.
험담을 하려면 제대로된 근거로 좀 해봐라.
부활이 없다하는
이단 쪼다시끼야~~
내용은 관심없고 신학 가지고만 싸우는 우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