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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8일(월)
* 시작 기도
주님...
간밤에 비가 왔었는지 창문에 빗방울이 맺혀 있네요.
비가 오는지도 모르게 살짝 왔다 갔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때는 이렇게 모르지 않겠지요.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함께 주께서 호령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살전 4:16).
죽어서 잠자는 자도 일어나고 살아서 믿는 자들은 부활한 자들과 함께 공중으로 올림을 받아 주님을 만날 것을 믿습니다.
내 육신이 죽어 썩어지고 없어질지라도 괜찮습니다.
그 날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내 안에 허탄한 생각과 나의 생각 등으로 어질러진 속마음을 주의 보혈로 씻어 정결하게 하소서.
주일 이후 새 날과 새로운 한 주를 맞이합니다.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 품속으로 달려가오니 영원을 현재로 사는 자로 서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왕하 8:16-29
제목 :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16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요람 제5년에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었을 때에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니라.
17 여호람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32세라. 예루살렘에서 8년 동안 통치하니라.
18 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가서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19 여호와께서 그의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
20 여호람 때에 에돔이 유다의 손에서 배반하여 자기 위에 왕을 세운 고로
21 여호람이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사일로 갔더니 밤에 일어나 자기를 에워싼 에돔 사람과 그 병거의 장관들을 치니 이에 백성이 도망하여 각각 그들의 장막들로 돌아갔더라.
22 이와 같이 에돔이 유다의 수하에서 배반하였더니 오늘까지 그러하였으며 그 때에 립나도 배반하였더라.
23 여호람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4 여호람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들과 함께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25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요람 제12년에 유다 왕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니
26 아하시야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22세라. 예루살렘에서 1년을 통치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달랴라. 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손녀이더라.
27 아하시야가 아합의 집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니 그는 아합의 집의 사위가 되었음이러라.
28 그가 아합의 아들 요람과 함께 하사엘과 더불어 싸우더니 아람 사람들이 요람에게 부상을 입힌지라.
29 요람 왕이 아람 왕 하사엘과 싸울 때에 라마에서 아람 사람에게 당한 부상을 치료하려 하여 이스르엘로 돌아왔더라. 유다의 왕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아합의 아들 요람을 보기 위하여 내려갔으니 이는 그에게 병이 생겼음이더라.
* 나의 묵상
아합의 아들 요람이 왕위에 오른 지 5년에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남유다 왕이 되어 아버지와 공동통치를 한다.
여호람이 유다의 왕이 되었을 때의 나이는 32세였고 예루살렘에서 8년을 다스렸다.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였기에 여호람이 북이스라엘의 길로 행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종 다윗에게 그와 그 자손에게 등불을 주겠다고 하신 약속으로 인하여 유다 멸망을 유보하신다.
여호람 때에 에돔이 배반하여 유다의 수하에서 벗어나 스스로 왕을 세운다.
여호람이 에돔 응징을 위해서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사일로 갔다.
에돔 응징을 위하여 밤에 출정했다가 오히려 포위되어 참패를 당한다.
결국 에돔은 유다의 통치에서 벗어났고 오늘 곧 본 성경이 기록될 때까지 그 상태가 계속 유지되었다.
이때 립나도 에돔과 함께 배반한다.
여호람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역대지략에 기록되었다.
여호람은 죽어 다윗성에 장사되었다.
그 아들 아하시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아합의 아들 요람이 왕위에 오른 지 12년에 남유다 왕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다.
아하시야가 왕이 될 때 그의 나이는 22세였고 예루살렘에서 1년 간 통치하였다.
아하시야의 어머니는 아달랴로서 북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손녀였다.
아하시야가 북이스라엘 왕 아합의 사위로서 북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아하시야가 북이스라엘 왕 요람과 연합하여 길르앗 라못에서 아람 왕 하사엘과 싸웠다.
그 때 요람 왕이 라마에서 아람 사람에게 맞아 부상을 입었다.
요람이 아람 사람에게 입은 부상을 치료하기 위하여 이스르엘로 돌아왔다.
여호람의 아들 유다 왕 아하시야가 요람 왕의 병문안을 위하여 이스르엘을 방문한다.
책장에 오랫동안 꽂혀 있던 책을 꺼내서 읽을 때 가끔씩 아주 작고 투명한 책벌레가 책 위를 기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 때 장난기가 발동하여 볼펜 끝으로 책벌레가 가는 길목을 막으면 그 작은 벌레는 무서워서 방향을 바꾸어 쏜살같이 도망가는 모습을 본다.
볼펜심에 막혀 허둥지둥 도망하는 책벌레는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쏜살같이 도망한다.
하지만 그의 목숨은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앞길을 볼펜심으로 가로막는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
사람은 책벌레 위에서 그의 모습을 다 볼 수 있으며 그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할 것인지가 다 보인다.
왜냐하면 책벌레는 바로 앞만 보지만, 사람은 한참 위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도 그렇다.
우리는 위를 보지 못하고 자기 앞만 바라보고 나갈 때 자기 앞에 놓인 고난이 얼마나 큰지, 그 기간이 얼마나 될지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
그저 자신에게 닥친 그 고난을 맞아 어떻게 하면 이 고난을 헤쳐 나갈 것인지를 궁리할 뿐이다.
그러나 위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우리의 생각을 아시고 심지어 생각 뒤에 숨어 있는 생각의 동기까지도 아신다.
따라서 우리가 행하는 일을 위에서 훤히 꿰뚫어보고 계신다.
때로는 우리가 행하는 일을 보시면서 환하게 웃기도 하시고, 때로는 우리의 실수로 인하여 마음 아파하시기도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신실하시다.
그래서 날 향하신 아버지의 언약과 사랑은 변함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이미 엘리야 선지자를 통하여 아합의 가문을 끊을 것을 예고하셨다.
그리고 이 일을 이룰 사람으로 하사엘을 사용하시고자 그로 하여금 아람 왕 벤하닷을 죽이고 아람 왕이 되게 하셨다.
사람들은 왕이든지 백성이든지 한 치 앞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에게 닥친 일, 곧 상황을 해결하느라 전전긍긍한다.
이런 면에서 자기의 앞을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들은 한결같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줄 모르는 미련한 자들이다.
이스라엘왕 요람이 그렇고, 유다 왕 여호람도 그러하며, 유다왕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 역시 마찬가지다.
나에게 어떤 상황이 닥치면 그것은 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과 섭리 가운데 나온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일을 계획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눈을 위로 향하고 위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위는커녕 자기 앞에 있는 한 치도 볼 줄 모르는 자들인 것이다.
유다 왕 여호람이 행한 다른 일을 보지 않아도 그를 평가하는 단 한 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왕하 8:18) 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가서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의 아들 아하시야도 마찬가지다.
(왕하 8:27) 아하시야가 아합의 집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니 그는 아합의 집의 사위가 되었음이러라.
이스라엘 왕 요람은 아하시야와 함께 아람과 싸우고자 길르앗 라못으로 갔다가 거기서 아람 군대에 의해 부상을 입고 치료차 이스르엘로 내려갔다.
그가 하사엘의 군대에 의해 부상을 당한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나 요람은 그런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한다.
물론 아프면 치료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 아픔을 통하여 위를 보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하건만 요람은 위를 보지도 않고, 앞을 보지도 못하며 오직 그 앞에 닥친 일만 해결하려고 하는 책벌레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나는 위, 즉 만물 위 창세전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자였다.
그저 한 치 앞도 보지 못하고 내 앞에 닥친 여러 가지 상황들만 해결하려고 몸부림치는 이들과 같고 책벌레와 같은 자였다.
나를 보고 계시며 나를 언약 가운데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그저 땅에 있는 것으로 영적 육적인 것을 충족시키려고 남의 다리만 긁고 있던 어리석은 자였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니 내가 믿는 예수를 또한 전하고 가르치는 목사이면서도 나는 그 예수님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 그저 단세포적인 생각에만 머물러 있기에 제대로 알 수도, 가르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이 땅의 것들이기에 그것이 전부인 양 그것들만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사랑하시는데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사는 것을 원하겠느냐고 하면서 분명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부자로 살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자식들이 다 부자로 잘 살기를 원하는 것처럼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나님 아버지도 여러분이 이 땅에서 부자로 살기를 원하실 거라고 말하곤 하였다.
이것은 성경 말씀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순전히 나의 생각에 불과하였다.
무엇보다 나는 그런 설교를 하였던 거짓 선지자였던 것이다.
내가 만물 위의 세계를 볼 줄 모르니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도 무지하고 하나님의 뜻도 알 수 없었다.
단지 땅의 일에만 관심을 가지며 예수 잘 믿으면 땅의 일도 잘 된다고 가르치는 거짓 교사요 선생이었다.
그런 나에게 창세전, 만물 위를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셨다.
복음을 통하여 생명을 얻음으로 땅에만 머물러 있던 나의 눈이 이제는 위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요한복음을 보는 눈이 새로 열렸으며, 디도서 1:2이나 디모데후서 1:1-11절의 말씀을 통하여 만물 위의 세계를 보게 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사도 바울이 디도나 디모데에게 편지를 쓸 때 인사말로 쓰는 첫 구절에 복음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편지를 쓸 때, 인사말은 편지 내용과 그다지 상관이 없는 단순한 인사치레에 불과하지만 바울은 그 인사말에도 복음의 핵심을 기록하였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나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이 창세전에 이미 작정되었다는 말씀이나, 생명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은 나의 영안을 열기에 충분하였다.
그동안에는 별 의미없이 눈으로 훑고 지나가던 말씀들이 복음이요 생명이었다니 나는 실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베드로 역시 벧전 1:20절에서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라고 말씀한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3년 동안 함께 동고동락 할 때는 물불 안 가리는 천방지축 같은 자였으나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성령의 능력을 받은 이후에는 만물 위를 보는 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계시로 창세전에 아들을 보내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그 약속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세전부터 아들로서 복종과 사랑의 존재법으로 사셨으며 창세전에 아버지와 하셨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과 명령에 복종하여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분이셨다.
그런데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자요, 원시(遠視)치 못하는 자로 한심 그 자체이다.
그런 나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창세전의 비밀을 알게 하시고 그 복음으로 생명을 주셨으니 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일인가?
그저 주님께 머리 숙여 감사할 수밖에 없다.
오늘도 그 주님께 영광을 돌려 드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언약도 모르고 창세전 만물 위의 세계도 모르고 오직 땅의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던 자였나이다.
영적인 것을 이야기 하지만, 영적 세계를 모르니 깊이 들어갈 수도 없고, 이야기 할 수도 없었나이다.
그런 나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시고 당신의 생명으로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독생자의 의미도 몰랐던 나에게 이제 아들의 생명으로 영생을 살게 하신 것은 신비요, 비밀입니다.
아들의 생명 안에 이런 신비의 비밀이 있기에 나는 오늘도 가슴 벅찬 감동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여러 가지 상황들이 힘들고 복잡하지만, 그러나 거기에 매여 있지 않고 하늘로부터 오는 기쁨으로 그것들을 삼킵니다.
오늘도 주님으로 만족함을 느끼며 주님을 찬양하나이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