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새해가 되자 아드보카트 감독은 선수들을 데리고 추운 한국을 떠났다. 아드보카트와 대표팀은 따듯한 곳으로 이동해 6주간의 훈련을 시작했다. 6월에 있을 월드컵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대다수의 K리그 감독들은 시즌을 앞두고 팀의 주축선수들을 내줘야 하는 상황에 기뻐하지 않았다.
두바이에서 UAE에게 1대0으로 패배한 아드보카트도 그리 행복하진 않았다. UAE전의 경기 내용과 결과는 좋지 못했지만 한국의 경기력은 곧 되살아났다. 유로 2004 챔피언인 그리스와 비겼고 핀란드와 크로아티아에게 인상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K리그는 비시즌 기간이다. K리그 감독들은 아드보카트에게 악담을 퍼붓는 대신 새로운 선수들을 영입하고 전지훈련을 가졌다.
2월
대표팀은 강력한 덴마크를 상대로 지나친 자신감을 보였고 결국 3대1로 패하고 말았다. 유럽파 선수들이 포함되지 않은 대표팀은 다시 캘리포니아로 날아가 두 번의 괜찮은 경기를 치러냈다.
한국은 오클랜드에서 벌어진 코스타리카와의 시합에서 경기를 지배했음에도 불구하고 1대0으로 패배했다. 그러나 며칠 뒤에는 멕시코 제2의 홈이라 할 수 있는 LA에서 멕시코를 격파했다. 이동국의 멋진 골로 승리를 얻어낼 수 있었다.
대표팀은 돌아오는 길에 시리아에 들러 2007 아시안컵 예선전의 첫 경기를 가졌다. 한국은 힘든 싸움 끝에 시리아를 2대1로 꺾었다.
K리그의 팬들은 새 시즌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부천의 축구팬들에게 새로운 시즌은 너무 멀리 있었다.
부천의 모기업인 SK가 갑자기 팀의 연고지를 제주도로 옮기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팬들은 이에 항의했으나 K리그와 KFA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K리그와 축구팬들에게는 좋은 출발이 아니었다.
3월
여전히 겨울의 흔적이 남아있는 가운데, 2006 K리그가 시작됐다.
새롭게 리그에 합류한 경남 FC는 제주 유나이티드와의 첫 경기에서 K리그 특유의 0대0 경기를 보여주며 K리그에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첫 경기에서는 20,000명의 관중이 찾아왔으나 다음 경기에서는 1,031명의 관중만이 경기장으로 되돌아왔다.
첫 달에 치러진 5경기에서 성남은 4번을 이겼다. K리그 6회 챔피언에 빛나는 성남은 곧 리그 1위에 올라섰고 우성용은 4골을 기록했다.
지난 시즌 챔피언인 울산 현대는 스타들을 보유하고 있지만 ‘타이틀을 지키는 것이 따내는 것보다 어렵다’라는 오래된 격언을 몸소 체험하고 있다.
2005시즌의 후반기에서 나타났던 부산 아이파크의 끔찍한 부진은 새 시즌에도 계속됐다. 부산은 3월에만 2무 3패를 기록했다. 부산은 대구와의 경기에서 3대0으로 앞서다가 4대4로 비기기도 했다. 포터필드 감독은 K리그의 21경기 연속무승 기록을 깰 위험에 처해있다.
대표팀은 3월 1일에 앙골라와 시즌 첫 경기를 가졌다. 경기가 끝날 때쯤 서울월드컵경기장은 눈으로 뒤덮였고, 한국은 박주영의 결승골로 1대0 승리를 거두었다. 2006년에 박주영이 보여준 모습 중 가장 좋은 활약인 것 같았다.
4월
대표팀과 관련하여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드보카트는 넘버 1 스트라이커 이동국이 부상으로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
“라이언 킹” 이동국은 4월 5일에 열린 인천과의 K리그 경기에서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입었다. 2002월드컵 대표팀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됐던 이동국은 인천과의 경기에서 환상적인 발리슛을 성공시킨 뒤 또 다시 부상으로 그라운드에 쓰러졌다.
이안 포터필드는 팀 성적이 나아지지 않자 쫓겨나기 전에 사임하기로 결정했고, 부산의 전망은 계속 어둡기만 하다.
포터필드와 부산의 부진은 K리그 연속무승 기록과 동률을 이뤘지만, 그는 신기록이 작성되기 전에 현명하게 그 상황을 빠져 나갔다.
성남은 6경기 중에 5경기를 승리하며 수평선 저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우성용은 4골을 더 성공시켰다.
5월
전기리그는 끝이 났고 월드컵 준비가 서서히 시작 되고 있다. 성남은 2위와의 승점 차를 10점으로 벌리며 전기리그를 우승했고 4팀이 맞붙게 될 플레이오프의 한 자리도 예약했다.
포항은 2위로 전기리그를 마쳤고 신생팀 경남과 연고지 이전의 주인공 제주는 하위권에서 허덕였다.
울산, 서울, 인천, 수원과 같은 팀들은 모두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줬다.
대표팀은 서울에서 가진 두 번의 평가전을 끝으로 팬들에게 출국인사를 했다. 첫 경기의 상대였던 세네갈과는 1대1로 비겼고 3일 뒤에 벌어진 보스니아와의 경기에서는 2대0으로 승리했다. 그리고 5월 27일, 대표팀은 기대에 가득 찬 국민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스코틀랜드로 날아갔다.
6월
운명의 6월이 다가왔다. 6월의 첫 번째 날, 대표팀은 오슬로에서 벌어진 노르웨이와의 평가전에서 지루한 경기 끝에 0대0 무승부를 기록했다. 3일 뒤에는 에딘버러에서 가나와의 마지막 평가전이 있다.
가나는 한국을 압도하며 3대1의 승리를 거두었다. 더 많은 골이 날 수 있었던 경기였다. 갑자기 토고와의 첫 경기가 쉽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토고와의 경기는 예상대로 쉽지 않았다. 그러나 대표팀은 무더운 프랑크푸르트의 날씨 속에서 승점 3점을 얻는데 성공했다. 토고는 전반전에 기세를 높이며 리드를 잡았던 반면, 한국은 긴장과 불안 속에 창조적인 플레이를 하지 못했다.
토고와의 경기는 후반 8분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박지성이 페널티박스 외곽에서 파울을 얻었고 토고의 수비수는 퇴장 당했다. 이천수는 그 파울로 얻은 프리킥을 멋지게 감아 차서 득점했고 수 백만의 붉은 악마들은 열광했다. 경기 종료 20분을 남겼을 때 안정환이 교체로 들어왔다. 그는 소중한 결승골을 성공시켜 한국에게 첫 원정월드컵 승리라는 선물을 안겼다.
대표팀과 붉은 악마는 독일 동부의 라이프치히로 이동했다. 결승까지 올라갔던 프랑스와의 경기는 조별 예선 중 가장 힘든 경기가 될 전망이었다. 프랑스는 전반전을 지배했고 티에리 앙리의 골로 리드를 잡았다.
하지만 한국은 후반전에서 힘을 냈고 경기종료를 몇 분 안 남긴 상황에서 시도한 박지성의 슛이 프랑스의 골대로 흘러 들어갔다. 그 골은 결승전까지 갔던 프랑스가 오픈 플레이에서 실점했던 유일한 골이었다.
바하, 멘델스존, 바그너가 살았었던 라히프치히에서는 한국인과 현지 주민이 어울려 외치는 ‘대한민국~’이 크게 울려 퍼졌다.
하노버에서의 기억은 덜 행복했다.
스위스가 토고에게 막판 득점을 성공시켰던 바람에, 한국은 16강에 진출하기 위해 스위스를 꺾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센데로스는 헤딩으로 득점하며 스위스에 전반전의 리드를 안겼고, 프라이는 경기 후반 ‘문제의 골’을 성공시키며 스코어를 2대0으로 벌렸다. 부심은 오프사이드 깃발을 들었고 한국 수비수들은 플레이를 멈춰버렸다. 그러나 주심은 경기를 계속 진행하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꿈은 끝나버렸고 이제 다시 4년을 기다려야 한다.
번역: 조건호 (스포츠 전문 번역가) |
첫댓글 잘못된게 있는데....토고전에 안정환 선수는 후반 20분을 남기고 들어온게 아니라 후반전 시작과 동시에 들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