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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쭉빵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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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에 대해 영화의 한 장면이다,어느것이 진실이냐느등의
질문을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기록되어있던 역사였고
모든 관련영화들은 이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것이기때문에
제가 답해줄수없는 난해한질문들입니다.
이번 장은 1장을 보셔야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1장을 보지않으시고 이해하지못하였다 하는일은 없기를 바래요
역사 속 악녀
1장 섹스에 미친 악녀 : http://cafe.daum.net/ok1221/74fn/202020
2장 잔혹한 악녀 : http://cafe.daum.net/ok1221/74fn/202028
3장 돈에 미친 악녀 : http://cafe.daum.net/ok1221/74fn/202078
아그리피나 Agrippina
자 여러분,
1장의 악녀 고대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아내였던 요부,메살리나를 기억하십니까?
그녀의 죽음은 집정관 실리우스와 처형되었죠.
클라우디우스는 어떻게해서든 국민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황후를 다시 맞아야만했습니다.자신의 아이들을위해서도
클라우디우스와 메살리나 사이에서는
왕자 브리타니쿠스 공주 옥타비아를 낳았죠
메살리나가 죽고 비은 황후자리에
곳곳의 미녀들과 가문이 쟁쟁한 여인들은 필사적으로 클라우디우스 눈에 들기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 쟁쟁한 미녀후보자들중 단연 으뜸이였던것은 바로 아그리피나였습니다.
그녀는 시칠리아 섬의 총독이었던 남편 그나이우스를 여의고 과부가 됬죠
그녀는 황후의 자리를 노리고 선전을 개시합니다.
자신이 클라우디우스의 질녀인 점을 이용하여 자주 숙부를 방문해 유혹하였고
심지어는 숙부의 측근인 해방 노예 파라스에게 자신의 육체를 제공하기까지하였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는 이런 작전은 성공하여 정식으로 클라우디우스의 아내가 된 것은 좋았으나,
그 후로 아그리피나가 애를 태운 것은 남편보다 자신의 의붓자식인 아들 네로의 장래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클라우디우스는 네로는 아예 남의 자식이였기에
메살리나사이에서 낳은 브리타니쿠스를 아들로 여겼고,후계자로 삼으려고했죠
아그리피나는 네로를 황제의 정식 후계자로 하기 위해서
우선 네로를 클라우디우스와 메살리나의 친딸인 옥타비아와 결혼시킵니다.
또 클라우디우스의 장남이며 당연히 황제 계승자가 되어야 할 브리타니쿠스를 제쳐놓고
네로의 ‘ 성인식 ’ 을 성대하게 거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이리하여 브리타니쿠스가 아닌 네로야말로 황제 계승자라는것을 민중에게 어필해 둔것이죠.
그리고 나서 그녀는 남편에게 결정타를 날립니다.
황제이자 남편인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독살해버린것이죠.
54년 10월 23일,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무척 좋아하는 버섯요리가만들어져 식탁으로 나가기 전에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손으로 소량의 독을 넣습니다.
호화로운 요리에 식욕이 동한 클라우디우스는 곧 버섯요리에 달라붙었죠
이윽고 황제가 속이 메슥거려 얼굴을 찌푸리기 시작하자 아그리피나의 신호를 받은 의사는
먹은 것을 게우게 한다며 독을 묻힌 거위 깃털을 황제의 목구멍으로 들이밀었습니다.
이런 아그리피나의 노력에 네로를 황제에 등극시키는데에 성공합니다.
이런 어머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반항하는것은 네로 본인이였습니다.
본래부터 전제적인 어머니에게 반감을 품고있었으나 사건의 발단은
네로에게 애인이 생겼기 때문입니다.옥타비아와 이혼하고 애인과 결혼하려는 네로와
이를 반대하는 아그리피나 사이에 자연히 심각한 불화가 생긴것이죠.
“ 네가 그렇다면 좋다. 나는 브리타니쿠스에게로 갈 테니까! ”
이렇게 아그리피나는 네로의 눈치를 보면서 대항마로서 브리타니쿠스를 택해 접근하려합니다.
네로는 몹시 불안했고 겁이났죠.
어쩌면 어머니는 자기를 무시하고 새로이 브리타니쿠스를 편들어 황제가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닐까?
내가 죽기 전에 죽일 수 밖에 없다고 결심한 네로는 브리타니쿠스의 식사에 독약을 넣어 그를 독살해버립니다.
어머니와 아들의 싸움에 애꿏은 생명이 가버린거죠.
눈 앞에서 몸부림치며 숨지는 브리타니쿠스를 보고 아그리피나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충격을 받았더라도 그녀는 이 정도로 물러설 여인이 아니였죠
잃은 것을 되찾기 위하여 그녀가 생각해 낸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자신의 육체를 무기로 자식인 네로를 구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부터 아그리피나는 화장을 더욱 꼼꼼히 하고 연회자리에 나타나
음란한 애무를 퍼부으며 아들의 머리를 혼란시켰습니다.
그녀의 교묘한 애무를 받을때마다 네로는 결국 그것이
친어머리나는 것도 잊고 음욕에 몸을 맡겨버리는 것이였죠
스캔들이 온 로마에 퍼지자 이성과 관능 틈새에서 괴로워하던 네로는
마침내 어머니를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그리하여 아그리피나를 바이아이 별장으로 초대하여 윗자리에 모셔놓고 호사스러운 요리와
즐거운 여흥을 곁들어 크게 환대합니다.
하지만 아그리피나가 돌아갈 때 태워 모시기 위하여 네로가 준비한 배에는
기어를 돌리면 배 밑바닥이 갈라지는 무서운 장치가 숨겨져있었습니다.
아그리피나를 배와 함께 바다 속에 쳐 넣어 버리려는 것이였죠
하지만 아그리피나는 큰 소동이 벌어진 배 안에서 엉겁결에 바다로 뛰어들어
가까스로 해안까지 헤엄쳐 갈 수 있었습니다.
이 보고를 들은 네로는 패닉상태에 빠지죠
네로는 자신이 어머니와 그 군대에 죽을까봐 겁이났고
궁지에 몰린 네로는 해방 노예인 아니케투스의 부대를
어머니가 자고있는 곳으로 급파합니다.
아그리피나는 저항할 겨를도 없이 머리에 일격의 곤봉을 받고 쓰러지죠
군사가 칼을 가슴에 들이대자 아그리피나는 숨이 넘어갈것같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잠옷을 걷어 올리고 아랫배를 내밀면서 당차게 소리쳤습니다
“ 여길 찔러라, 네로는 여기서 태어났으니까!!!! ”
이윽고 어머니의 시체가 네로의 눈앞으로 옮겨지자,네로는 그녀의 옷을 벗겨내어
알몸을 요리조리 살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고합니다.
“ 어머니의 몸은 어쩌면 이렇게도 아름다웠을까! ”
어미도 어미지만,자식 또한 그 자식이란 느낌이들죠.
아리에놀 다키텐 Alinor d’Aquitaine
12세기 프랑스의 아리에놀 다키텐은 중세의 여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활달한 여자였습니다.
당시의 프랑스 국왕보다 훨씬 광대하고 풍요한 프랑스 남서부를 차지하고있던
아키텐 후작의 딸로 태어나,14세 때 두 살 위인 프랑스 왕자 루이와 결혼하였죠
하지만 이 부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않았습니다.
아리에놀은 몸집이 큰 미녀로 성격이 남자 이상으로 호탕하였고
이에 비하여 루이는 왕이라기보다는 수도원에 틀어박혀 신학이라도 연구하는것이
어울릴것같은 만큼 고지식하고 소심한 남성이였죠.
아리에놀은 그런 남편에게 일찌감치 싫증이 난 모양이였고
남편과 함께 제 2차 십자군의 일원으로써 동방으로 향하던 도중에
안티오크(지금의 안타키아)에서 그곳의 지배자였던 숙부 레이몬과 하룻밤을 보냅니다.
루이가 그 사실을 들어 비난하자 아리에놀은 거꾸로 배짱을 부립니다.
“ 그럼 이혼하자고요. 사실 우린 근친이니까 왕실의 규정에 따르면 원래 결혼은 무효에요! ”
하기야 프랑스 왕이라고 해도 이름뿐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리에놀의 친정이 몇 곱절이나 풍요했기 때문에 그녀가 기어오르는것도 무리는아니었습니다.
결국 다마스쿠스 공격의 실패로 십자군은 괴멸하였고 그들은 파리로 돌아오지만,
이미 아리에놀의 마음은 완전히 남편에게서 떠나있었죠
이를 결정적으로 만든것은 젊은 미남의 노르망디 공 헨리의 등장이였습니다.
노르망디 공이 된 18세의 그가 루이에게 신하의 맹세를 드리기 위하여 프랑스 궁정을 방문하였고
이 때 첫눈에 반한 아리에놀은 몰래 시녀를 보내어 그를 자기 침실로 불러들였다니,참으로 대담합니다.
이 같은 만남에서 둘 사이에 어떤 밀약이 맺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한 달 뒤에 룽와 아리에놀의
이혼절차가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루이의 주위에서도 품행이 좋지 못한 그녀를 내보내고 좀 더 정숙한 왕비를
맞아들여 하루빨리 후계자를 생산해야한다는 소리가 높았던거죠
이혼은 성립되었고 아리에놀은 자신의 소유였던 아키텐의 영토를 되찾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2개월 후,그녀는 헨리와 전격적으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당시 헨리는 19세,아리에놀은 30세였죠
아무리 봐도 연상인 아리에놀의 주도로 이루어진것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이 변칙 결혼으로 헨리에게는 유럽 제일의 영토 아키텐이 거저 굴러 들어온 것입니다.
큰 충격을 받은것은 프랑스 측이였습니다. 이혼 2개월 후에 재혼이라니...
왕실을 깔보는 정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게다가 헨리는 어디까지나 루이의 가신인 만큼 결혼전에 루이에게
허가를 신청해야 하는것이 도리였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결혼 후에 아리에놀의 운은 상승일로였습니다.
그 때까지 헨리와 영국 왕위의 계승권을 놓고 다투어 왔던 드 블루아가 급사하는 바람에
영국 왕위가 남편의 손에 굴러들어온게 아니겠습니까?
그 후,아리에놀은 남편이 광대한 왕국을 지배 관리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사이 때로는 동행하고,때로는 뒤에 남아 궁정을 지켜 나갔습니다.
그리고 헨리와의 사이에서 세 아들을 낳았는데 그들이 바로
헨리,즉 리처드
제프리
존
이리하여 얼마 동안은 부부관계가 매우 순조로웠습니다.
하지만 이런 부부 사이에도 틈이 벌어지는 날이 닥쳤습니다.
남편의 애인인 로자몬드의 등장이였죠
왕비의 질투를 겁낸 헨리는 애인을 위하여
복잡한 미로로 되어있는 별궁을 세워 주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리에놀은 그 미궁을 경호하는 기사를 미행함으로써
미궁의 수수께끼를 풀고,로자몬드의 방으로 숨어들어가
칼과 독약을 들이대며 어느 하나를 고르라고 다그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배신감을 느낀 아리에놀은
남편에게 복수하고자 다음으로 일을 꾸몄습니다.
자식들을 움직여 남편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였죠
지배욕과 정복욕의 화신과도 같은 그녀는 남편의 배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것입니다.
이를 위해 이용하려고 접근했던것은 다름아닌 옛날 그녀가 이혼함으로써 결별했던 프랑스 왕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전 남편이었던 루이는 죽고 없었으므로 그의 아들인 새 국왕 필리프에게 다가갔죠
필리프로서도 아키텐이라는 광대한 영지를 가진 아리에놀의 접근을 바라는 바였습니다.
이리하여 아리에놀의 선동으로 아들들인 소헨리 리처드와 존은 잇달아 아버지인 헨리를 배신하고
프랑스 국왕에게 접근하여 반란을 꾀하였습니다
뒤에서 아들들과 프랑스를 움직이던 아리에놀은 헨리에게 잡혀 몇 년 동안이나
감옥에서 신음하게 되지만,먼저 죽은 것은 자식들에게 배반당하여 절망 속에 빠진 헨리였습니다.
남편이 죽은 후 감옥에서 풀려난 아리에놀은 그 후에도 헨리의 뒤를 이어
사자심왕으로 영국에 군림하는 아들 리처드의 참모로써 온 나라를 정력적으로 동분서주하며 통치하게됩니다.
어머니란 참 대단한것같네요
카트린 드 드메디시스 Catherine De Medicis
이번에도 어머니라는 이름의 거물이 등장합니다.
여러분,1장의 마르고를 기억하십니까?
마르고의 본명은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11살에 세 애인을 거느린 여자였었죠
그렇다면 그녀의 어머니,
카트린 드메디시스
또한 빼먹을 수 없습니다.
그녀는 역사 속에서도 희대의 악녀로 통합니다.
16세기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의 왕비 카트린 드메디시스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거상 메디치가의 딸로 태어납니다.
13세 때,프랑스의 왕자 앙리에게 시집가지만 남편은 자기보다 20년이나 연상인 절세의 미녀
디안 드 푸아치에게 빠져 그녀를 돌아보지도않았습니다.
게다가 결혼 후 10년 동안에는 아이도 태어나지 않아 카트린은 한때 이혼 직전까지 몰렸었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불임 요법이 효과를 나타냈는지 마침내 아들도 낳아
그녀는 간신히 위기를 벗어났지만,남편 앙리는 국왕 즉위식에는
디안의 이니셜과 문장을 수놓은 예복으로 임한다는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사람들을 놀라게합니다.
이를테면 공식석상에서 ‘ 나는 불륜을 하였습니다 ’ 라고 당당히 과시한 셈이죠
이렇게까지 멸시당하면서도 카트린은 꾹 참았습니다.
당시 그녀는 ‘ 유격기병대 ’라고 명명된 200명의 시녀 집단을 거느리고있었죠.
이들은 빼어난 미녀들로써 사실은 특수한 정치적 임무를 띠고있었다고합니다.
이들은 카트린의 침실로 숨어들어 정치 길밀을 빼내는 스파이 구실을 하였죠
이 무렵부터 카트린은 뒷날 장악하게 될 권력을 위한 일들을 몰래 진행시키고있었구요
그리하여 1559년 남편 앙리 2세가 무술 시합에서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것을 계기로
카트린 드메디시스 시대의 막이 열리는것이였습니다.
그림 속의 여인은 왕비 카트린 드메디시스,그녀가 어깨에 손을 올리고있는 소년은
첫째 왕자 프랑수아,후에 자신의 아버지를 뒤이을 국왕 프랑수아2세가 되죠
그 옆에 있는 프랑수아와 비슷한 키의 소년은 둘째 왕자 샤를 그 또한 프랑수아가 죽자마자 왕위를 잇는 샤를9세가 됩니다.
아! 저기 샤를과 앙리사이에 어린 마르고 공주도 보이는군요
그리고 왼쪽에있는 작은 소년이 앙리,카트린이 제일 편애한 셋째왕자며 후에 앙리3세가 되는 왕자입니다.
( 이 가족부분에 대해서는 단정지을 수 없지만 책에서는 앞뒤가 맞지않아 네이버로 검색한 결과입니다 )
이렇게 카트린 드메디시스는 자식들을 왕위에 잇게하여
자신은 뒤에서 진정한 실력자로써 정권을 조종하였습니다.
당시 프랑스 국내는 가톨릭,즉 신교와 구교의 다툼으로 갈기갈기 찢어져있었습니다.
가톨릭인 발루아 왕가(카트린 측)와 이에 적대하는 위그노(신교)의 맹주였으며
뒷날 프랑스 국왕,마르고의 남편이었던 앙리 4세가 되는 나바르 공 앙리의 대립이였죠
카트린 드메디시스는 이 항쟁에 종지부를 찍고,
왕국내에 두 종교를 공존시켜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의 딸인 마르고 공주를 위그노의 우두머리였던 나바르 공과 정략결혼을 시킵니다. (1장 참조)
공주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위그노의 우두머리인 나바르공의 결혼식에는
천적이나 다름없는 구교와 신교 양파 귀족들이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이 결혼식날 밤,카트린은 샤를9세를 부추기는 신교에 의해
위그노의 대 학살을 명령합니다.
1장에서도 암시했듯이 이것이 그 유명한
‘ 성 바돌로매 축일의 학살 ’
파리는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하여 거리는 수천에 이르는 신교도의 시체로 메워졌다고합니다.
둑을 무너뜨린 격류처럼 파리의 구교도들은 무기를 들고 위그노의 살육에 가담하였고
거리란 거리는 머리털이 뽑히고 거의 알몸이 되어 도망쳐다니는 신교도들과
이를 쫓으며 창칼로 찌르고 목에 줄을걸어 끌고다니는 구교도로 넘쳐났죠.
이 대학살로 인하여 카트린은 일약 역사에 오르내리는 희대의 악녀로 이름을 떨치게 됩니다.
사건 이후 샤를9세는 변하였습니다.무서운 죄를 저지른 자신을 책망하고 자포자기에 빠져 방탕해졌으며
밤이면 죽어가는 위그노(신교)의 단말마의 끔찍한 비명소리에 놀라벌떡 일어나서는 두려움에 떨었다고하구요
샤를 9세는 지병이었던 결핵이 악화되어 1574년 죽습니다.
일설에는 카트린에 의한 독살이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카트린이 사랑하는 왕위에 오르게 하기 위하여 이미 폐인이 다된 샤를을 처치해버렸다는것이죠.
카트린의 고향인 이탈리아는 독약 제조가 매우 발달해서
그녀는 프랑스로 시집올 때 수상쩍은 독약 기술자와 점성술사를 비롯한 향료사들도
많이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뭔가 불온한 사건이 일어나기만 하면 국민들은 입을 모아
‘ 카트린,카트린 ’
라고 말했다고합니다.
측천무후
측천무후는 본디 황제의 후궁이였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무소(武昭)
당나라 태종의 후궁이었습니다.
태종이 병사하자 무소는 당시의 관습에 따라 여승이 되었는데
이전부터 그녀에게 눈독을 들이던 새 황제 고종(태종의 아들)은 그녀를 환속시켜
다시 자신의 후궁으로 맞아들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미 황후와 후궁이 있었기 때문에 무소에게는 그 아래인
‘ 소의(昭義) ’ 라는 지위가 주어지죠
야심가였던 무소는 어떻게서든 더 높은 지위로 올라가야겠다고 판단하였고
그 맹세아래 기회를 노리기 시작합니다.
후궁으로 들어가고부터 무 소의는 갖은 수단과 아양을 다 하여 끝내 고종의 사랑을 독점하였구요
어느 날,드디어 염원은 이루어져 고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때 그녀는 아이를 갖지 못한 황후를 몰아내고
자신이 황후가 되고자 결심했죠
1장에서도 언급했듯이,그녀는 자신의 아기..그 생명을 이용합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자기 방으로 돌아온 무 소의는 요란스러운 소리로 외쳤습니다.
“ 누가 좀 와 봐요!! 아기가,아기가 큰일 났어요!! ”
태어난 지 얼마 되지않은 아기가 무참하게도 시체로 변해있었습니다.
후궁안은 발칵 뒤집혔습니다.수사 결과,그녀가 방을 비운 사이
황후가 와서 ‘ 어머, 예쁘기도 해라. ’는 말을 하면서 아기를 어르다가 돌아갔다는것이 밝혀졌죠
당연 사람들의 의심의 눈은 일제히 황후에게로 쏠렸습니다.
황후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예,이것은 무 소의가 황후가 되기 위하여 피를 나눈 자신의 딸을 이용해
아주 잔혹한 연극을 벌였던 것입니다.
사실은 황후가 들어간 후,몰래 방안으로 돌아온 무 소의는 아기의 목을 졸라 죽였습니다.
아기를 잃고 비탄해하는 어미의 가증스러운 연기는
그야말로 박진감이 넘쳐 황제는 물론 그 밖의 사람들마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무 소의의 ‘ 황후 몰아내기 작전 ’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병골이었던 황제가 협심증 발작을 일으키자 황후가 황제를 저주해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립니다.
그 직후 황제의 침실에서 발견된 나무 인형에는 황제의 이름이 새겨져있었고
심장 부분에는 못이 하나 박혀 있었습니다.
또 다시 궁중은 야단법석이 되었고 결국 고종은
확실한 증거도 없이 잡아들인 황후를 폐위시켜 옥에 가둡니다.
그 대신 무 소의가 무후(武后)로서
정식 황후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 때 무후의 나이 28세
황후가 된 무후는 그때까지의 장관을 모조리 갈아 치우고
자신이 정치의 실권을 잡았습니다.
남편인 고종은 30세를 넘기자 시력이 나빠져 정사를 차츰 무후에게 일임하게 되었으며
그것을 기화로 무후는 거의 황제와 같은 권력을 장악하게됩니다.
또한 그녀의 질투는 예사롭지가 않았습니다.
그녀는 황제가 좋아하는 여자를 하나하나 죽여갔죠
무후의 언니는 어느 날 식사하는 자리에서 원인 모를 경련을 일으키고 죽었으며
그 언니의 딸인 곧 무후의 조카 역시 비슷한 증상을 일으켜 어이없이 죽었구요
둘 다 황제가 손을 댄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고종에게는 무후 이외의 여자가 낳은 아들이 넷이나 있었는데
그 중 셋이 반역죄나 뇌물죄의 혐의를 덮어쓰고 잇달아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후의 두 친자식까지도 독살되거나 사형 선고를 받았죠
무후는 자신의 권력을 빼앗아 갈 수 있는,그런 가능성이 보이는 존재의 목을 천천히 죄여왔습니다.
모두 합치면 고종의 자식 8명 중 5명이 그녀의 손에 의해,
나머지 3명도 10년 이상의 감금당하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마침내 고종도 무후의 횡포에 불안을 느껴 재상인 상관의에게 논의하였습니다.
상관의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무후를 폐해야 한다고 건의했구요
그러나 이 사실은 대번 무후에게 알려졌습니다.
무후는 고종에게 거세게 따지며 대들었고
마음 약한 고종은
“ 재상인 상관의가 나를 꼬드기는 바람에 이렇게 되었소 ”
라고 변명합니다.
그 후에도 희생자는 끊이지 않았죠
무후가 권좌를 지킨 30년 동안,남편 고종의 일족 70여 명,재상이나 장관 등 고관 36명이 살해되었습니다.
자신의 친족을 이처럼 마구 죽인 여자는 아마 역사상 달리 없을 것입니다.
683년에 고종이 55세로 세상을 떠나자 황태자 이현이 중종으로서 뒤를 잇지만,
60세인 무후는 섭정으로 실권을 놓지않았습니다.
중종에게는 황제로서의 실권이 전혀 주어지지않았고 모든 국정은 무후의손에 결정되었습니다.
그녀는 어떤 사소한 일이라도 자신의 눈이 미치지않는 곳에서 이루어지는것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죠
어느 날,중종이 무후에게 의논하지않고 자기 장인을 시중이란 벼슬에 임명하려고하였습니다.
이에 담당 관리가 말했죠
“ 무후께 말도 없이 어찌 그런 일을.. ”
그러자 중종은 자신도 모르게 불끈하였습니다.
“ 어째서 황제인 내가 남의 허락을 받아야 한단 말이냐!!! ”
그로써는 황제라는 권력을 자기에게 있는데
모든것이 어머니의 뜻대로 되니 분통이 터졌겠죠
이 일 역시 즉각 무후에게 알려졌고 곧 심복인 중서령이 관료 일행과 한 부대의 군사를 데리고 나타납니다.
“ 황제를 폐한다! ”
중종은 즉위 54일만에 황제자리에서 물러나게됩니다.
그로부터 14년간 이어지는 무후의 치세는 숙청 정치와 밀고 제도를 기본으로 하는 공포시대였습니다.
또한 중국의 명절 중 하나인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에 무후는
정식으로 황제에 취임합니다.
이것이 중국 역사 최초로 여황제가 된 측천무후
그녀는 나라 이름마저 ‘ 주(周) ’ 로 바꾸어 당나라 왕조는 일시 중단되었죠
하지만 704년,욕망과 살육의 소용돌이 속에서 야수처럼 살아온 무후도 마침내 병상에 눕게 됩니다.
이듬해에는 무후를 폐하고 황태자 이현을 다시 황제 자리에 앉히려는 계획이 일부 중신들 중심으로 진행되었구요
1월 12일,근위군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인 중신들은 황태자를 받들고 궁중으로 밀고 들어가
허겁지겁 뛰쳐나온 무후의 심복들을 죽이고 무후로 하여금 물러날 것을 동의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황태자(중종)가 복위하고,나라이름은 원래대로 ‘ 당 ’으로 되돌려집니다.
중종은 어머니인 무후를 마지못해 ‘ 상황(上皇) ’으로 받들어 놓기는 하였으나
이미 아무런 권세도 무후의 손에는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같은 핏줄마저 잔인하게 죽여버려 그 목숨을 자신의 권력으로 이용한 측천무후,
무후는 그해 11월 향년 8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서태후 西太后
1861년, 청나라 함풍제(咸豊帝)가 세상을 떠났고 겨우 다섯 살인 동치제(同治帝)가 즉위했습니다.
그의 어머니인 서태후와 함풍제의 정실(正室)이었던 동태후(東太后)가 섭정으로서 실권을 쥐게되었죠
단,여성의 정치 참여는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하들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발을 치고 정치를 행하였습니다.
이것을 ‘ 수렴정치 ’라고 하죠
동태후가 지위는 높았으나 아쉽게도 당시의 여성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글을 읽지 못하여
신하가 올리는 글들은 모두 서태후가 읽기에서 뜻까지 일일이 가르쳐 주어야 했습니다.
그에 반하여 서태후는 교양도 있고 말도 시원시원했으며 야심도 권세욕도 아주 강한 여자였죠
생전의 함풍제는 신하에게 자주 이렇게말했다고 합니다.
“ 이 여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이 진짜 정체인지 알 수 없는 위험한 인물이다. ”
동치제가 15세가 되자 황후를 고르게 하였는데,동치제는 어머니인 서태후가 추천한 차관인 봉수의 딸이 아닌,
동태후가 추천한 숭기의 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평소에 그는 자기중심적이고 고자세인 어머니보다는 동태후를 따르고있었던것이죠
이를 참을 수 없었던 서태후는 동태후가 추천한 이 새 황후를 못마땅히 여겨 무슨 일에든 매정하게 대했습니다.
어느 날,애먼 일로 서태후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떤 황후는 황제에게 가 울면서 하소연했다고합니다.
그러자 황제는 이렇게 말하며 울고있는 황후를 달랬습니다
“ 조금만 더 참아요,그러다 보면 힘을 가지게 될 날이 올 테니까. ”
몰래 뒤를 밟던 서태후가 방안에서 이렇게 말하는 황제의 목소리를 듣고 발끈하였습니다.
서태후는 방문을 확 열고 들어가 황후의 머리채를 잡고 뜰로 끌어내러 매질을 하였죠
그저 황후를 구박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없어 그렇게 지내던 서태후는 황제를 불러 명하였습니다.
“ 황제는 아직 어려서 여러 가지로 공부할 게 많으니 학습이나 수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당분간은 황후의 방에는 가지 말라. ”
아내와 만날 수 없는 외로움으로 괴로워하는 동치제를 어느 한 내시가
재미있는 곳으로 안내하겠다면서 궁전 밖으로 데리고 나가 화류계에 발을 들여놓게 하였습니다.
그 곳에 재미를 붙여 다니는 동안 동치제는 매독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청나라에서는 매독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병이어서 시의 등이 서태후에게 어쩌면 좋을지를 물었습니다.
서태후는 마마라는 말을하였고 서태후에 말에 따라 마마의 치료를 했더니 동치제의 병세는 자꾸 악화되기만하였습니다.
1874년,황제가 더욱 위중해지자 서태후는 황후 방으로 가 황제가 위중한데 어째서 문병을 하지 않느냐면서
손바닥으로 황후의 뺨을 쳤습니다.맞은 황후의 얼굴에서 주르르 한 줄기 피가 흘러내렸죠.
그림 속 서태후의 손을 보면 뾰족한것이 보일텐데,그것은 서태후가 긴 손톱을 보호하기 위해
끼운 금으로 된 손톱집이였습니다.
황후는 그 손톱집에 의해 상처가 난것이구요
며칠 후,황제는 18세의 젊은 나이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 네가 그 아이를 죽인 거야. ”
보고를 받은 서태후는 호통을 치며 울부지는 황후에게 황제를 뒤따라 죽기를 명했습니다.
순사(舜死)하라는 것이였죠
정말 서태후는 황후를 순사라는 명목으로 음식도 주지않고 굶겨 죽였습니다.
동치제가 죽은 바로 그 날,서태후는 황제의 죽음을 알리지 않은 채 지방의 여러 왕과 장관들을 한자리에 놓고 물었죠
“ 황제는 몸이 약하여 아직 아들이 없소.만일의 경우에 말썽이 일어나지않도록
태자를 미리 정해두는것이 좋을거같소.누구를 태자로 세우는 것이 좋게는지 그대들의 생각을 말해보오 ”
모두들 우물쭈물하고 있자 이윽고 어떤 장관이 몇 사람의 황족의 이름을 들었습니다.
그제야 서태후는 위압적인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죠
“ 순친왕의 아들이 총명하니 그렇게 정하는게 좋겠소. ”
그리고는 황제가 죽었다는 말을 소리 높여 선언했죠.
이리하여 서태후의 독단에 의하여 겨우 네 살짜리인 어린아이 광서제(光緖帝)가 즉위하였습니다.
서태후 여동생의 아들이였죠
이렇게 서태후와 동태후에 의한 제 2차 수렴정치가 시작되었구요
이미 독재체제를 확립시킨 서태후에게 있어서 동태후는 장애물에 지나지않았습니다.
다만 어떻게 처치하느냐가 문제였죠
1881년 2월의 어느 날,동태후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서태후는 자신의 팔의 살점을 떼어
탕약과 함께 끓여 보냈습니다.이렇게하면 효험이있다고 하였답니다.
동태후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하지 말았어야할 말과 행동을 해버리고 맙니다.
“ 실은 돌아가신 함풍제께서 남기신 유언장에 ‘ 만약 서태후가 방자한 짓을 하거든 가차없이
처치해 버려라 ’고 적혀있습니다.하지만 이제 이런 건 필요 없군요. ”
말을 마친 동태후는 그 자리에서 유언장을 찢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서태후의 마음에 새삼스레 증오가 지글지글 끓어올랐죠
‘ 이 여편네,얌전한 체 보이지만 무슨 짓을 할지도 몰르는구나.일찌감치 없애 버려야겠어. ’
동태후가 건강을 회복하자 서태후는 축하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 때 선물로 받은 떡을 가지고 자기 처소로 돌아와 동태후가 입에 넣으니
갑자기 속이 이상해져 급기야 자리에서 쓰러졌고
그 길로 동태후는 그만 숨을 거두고맙니다.
물론 서태후에 의한 독살이였구요
광서 15년,광서제가 결혼을 기회로 친히 정치를 시작하였고,서태후는 베이징 교외의 이화원에서 은거했습니다.
그러나 궁정 안에는 황제의 일거일동이 서태후의 귀에 들어오도록 첩보망이 조직되어있엇죠.
27세가 된 광서제는 서태후로부터 정치의 실권을 빼앗고자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호수 가운데의 작은 섬으로 유폐되고 맙니다.
1908년,광서제는 병으로 쓰러졌는데,아마 서태후가 자기보다 먼저 주게 하려고 조금씩 독약을 쓰고있었던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전후하여 서태후도 설사가 멎지 않아 자리에 누웠습니다.
그 해 10월 21일,황후가 문병을 하기 위해 찾았을때는 이미 황제는 죽어 있었고
언제 숨졌는지 측근조차 몰랐다고하니,황후는 울며불며 서태후에게 달려가 황제의 죽음을 알렸습니다.
서태후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하게 싱긋 웃었다고 합니다.
그 이튿날 서태후도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녀의 나이 72세에
서양의 첫날밤
체사레 보르자는 15세기 이탈리아에서 교황 알렉산드로 6세의 아들로 태어난,
르네상스 유수의 잔혹한 폭군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그 체사레가 1499년 아라곤의 왕녀 샤를로트와 결혼식을 올렸구요
신랑은 24세,신부는 16세였다고 합니다.
당시 왕후 귀족은 첫날밤에 관습으로서 입회인을 붙이게 되어있는데
이 때는 프랑스 국왕 루이12세가 옆방에서 그 역할을 했죠.
우선 신랑인 체사레는 식사 전에 신부와 두 번 관계하였습니다.
이윽고 정식 차례가 되어서는 한번 할 때마다 왕에게 신호를 보냈죠
그것이 여섯 번째가 되었을 때,왕도 어이가 없었는지
“ 자네, 대단하군! ” 하며 껄껄 웃고는 곧 그의 아버지인 알렉산드로 6세에게 보고했다고 합니다.
그 후,이런 재판이 열렸었다고 합니다.
어떤 여성은 남편이 밤에 너무 끈덕지게 달려든다고 호소하였고
이에 대하여 남편은 이렇게 반론하였던 것이죠
“ 나는 적어도 하루에 열 번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오. ”
아라곤의 왕녀는 이에 대하여 올바른 부부생활의 기준으로서 하루 여섯 번이 적당하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왕녀에 의하면 이 여섯 번이란 숫자가 여성의 성욕을 만족시키는 데 꼭 알맞다는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하여 크게 불만이었던 사람이 그 여성의 남편이였다고 합니다.
“ 하루 여섯 번 이라고?목욕재계하고 행동을 삼가야 하는 날이라도 그 것으론 참을 수 없다.
도대체 내 그 나머지 욕망은 어디다 쏟아 부어야 한다는 거냐! ”
당신은 어떤 판정을 내릴겁니까?
아마 여섯 번이란 숫자는 체사레의 첫날밤에서 온 것이겠지만,이 판결을 들은 아라곤의 여성들은
크게 불만스러워하며 이같이 웅성거렸다고합니다.
“ 뭐라고요, 여섯 번 이라고요?우린 그 절반도 안되는데! ”
그래서 그 모자라는 횟수를 다른 사나이에게서 채우려는 여자들이 속출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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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역사를 움직이는 악녀
삭제된 댓글 입니다.
222나도 앞에꺼가 기억이 잘 안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10번 6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옹~ 재밌당ㅋㅋㅋㅋ 근데 측천무후 위랑아래랑 갭이 너무 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물론아래가진짜겠지?ㅋㅋㅋㅋ
이거보고싶은데음악도무섭고비지엠제목도무서워서못보고있어ㅜㅜㅜ밤에보면좀무서우려나?ㅜㅜ
다음꺼 궁금해!!!!!!!!!!
아다음꺼궁금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오..황제가 그런 사람이였구나..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아그리피나도..이상해..;;;;;;
체... 체사레 좋은데???
체사레....멋진 사내야
언니들 체사레한테 감동했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측천무후는 왜저리 유명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으앜ㄱ
측천무후 위에 사진은 존나 이쁜데 밑에는 왜이럼?????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