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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쭉빵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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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 쓴 이야기와 지금 쓰는것,또 앞으로 쓰는 이야기가
모두 사실인지 아닌지,저는 모릅니다만
이 이야기가 기록돼어있다는것은 사실입니다.
역사 속 악녀
1장 섹스에 미친 악녀 : http://cafe.daum.net/ok1221/74fn/202020
2장 잔혹한 악녀 : http://cafe.daum.net/ok1221/74fn/202028
브랑뷔리에 후작부인
저는 어려서부터 그런 얘기를 줄곧 들었습니다.
‘ 인간이 무서운게 아니라 돈이 무서운거다 ’
어째서 돈이 무서운지..
지금부터 써보도록하겠습니다.
돈에 미친 악녀라고하면
떠오르는 악녀는 브랑뷔리에 후작부인일것입니다.
17세기 프랑스의 브랑뷔리에 후작부인,그녀의 이름은
마리 마르그리트 도브레
그녀는 요염한 미모인데다가 태생이 음란하여 두 남동생들과도 차례로 성관계를 가졌다고합니다.
남편인 브랑뷔리에 후작이 바깥에 여자를 만들어 놓고 좀처럼 집에 돌아오지않게 되자
‘ 남편이 놀아난다면 나도 같은 짓을 해야지 ’
라며 남자들과의 정사에 열중했죠
그 중의 한 사람이 생트클루아라는 기병대 장교였습니다.
그들은 곧 당시 크게 유행한 도박에 열중하게 되었죠
후작부인과 생트클루아는 ‘ 오늘 번 돈은 오늘 다 써 버린다 ’는 주의로
씀씀이가 시원시원했으며,도박에서도 오늘져도 내일은 꼭 이길수있다는 안이한 생각을 가지고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빚은 점점 늘어나기만하고 그 빚을 갚기위해
다시 빚을내야하는 형편이였습니다.
마침내 생계마저 어렵게 된 두 사람이 궁리해 낸 것은 놀랍게도
‘ 독약 연구 ’였으며,그들은 곧 이 일에 열을 올렸습니다.
당시 독약 매매에는 법적 규제가없었습니다.
그 때의 의학으로서는 피해자의 시체에서 독물을 검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때문에 범죄가 드러날 염려는 없었던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당시 나돌고있던 비소나 초오두 같은것을 실험할 필요가있었습니다.
그 둘의 가엾은 희생양은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바로 자선병원에 입원하고있는 가난한 환자들이였습니다.
후작부인은 망토로 얼굴을 가리고 자선병원에 나타나서는
환자의 침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상냥하게 문병했습니다.
환자들은 이런 고귀한 부인이 우리를 걱정해주시다니,하며 크게 감격했죠
그들이 먹는 포도주와 과자에 독약인 ‘ 비소 ’가 섞여있던것도 모른채 말이죠
그녀는 다정하게 위로하는 체하면서 음식을 먹은 후 환자의 반응을
아주 자세하게 관찰하여 세밀하게 기록하였습니다.
마침내 독약을 복용중이던 환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알게되면
병원 영안실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는 시늉을 하면서
시체에 나타난 독약의 효과를 관찰하였습니다.
그녀가 나타난 후,자선병원의 사망자 수는 급증했습니다.
병원측은 환자가 죽는것이 크게 환영할 일이라고 의심치않았습니다.
빈민을 위한 무료병원이니,그럴만도했죠.
이리하여 후작부인과 생트클루아는 독약 실험에 성공했습니다.
그들은 성공한 독약을,제일먼저 후작부인의 아버지인 늙은 법관을 죽이려했습니다.
그 독약을 복용하면 복용하는 양에따라 시기를 앞당기고 줄일 수 있었기에
후작부인은 아버지는 ‘ 어떤 병에 악화시켜 서서히 쇠약하게 함으로써 자연사 ’의 형태를 생각했습니다.
그 때는 지위가 높은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는 해부하기로 되어있는데,
후작부인의 아버지가 8개월 후 세상을 떠났으며
후작부인과 생트클루아는 숨을 죽이고 결과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곧 해부 결과가 정해졌습니다.
‘ 노쇠에 의한 자연사 ’
완전범죄가 성공적으로 끝났고,후작부인은 아버지의 죽음으로써
막대한 재산이 자신에게 굴러들어올줄알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유산 대부분은 두 동생에게 갔고 그녀는 그 일부분을 받았을뿐입니다.
한번 사람을 죽인 후작부인은,그 두 동생을 가만히 놔뒀을까요?
그녀는 타깃을 아버지에서 두 동생으로 바꿉니다.
생트클루아의 하인인 라 쇼세를 동생들집의 하인으로 들여보내,
몇 차례로 나누어 음식에 독을 넣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결과 1670년 6월에는 큰 동생이,9월에는 작은동생이
각각 구토와 발열을 되풀이하다 결국 죽고맙니다.
이번 해부결과는 이러하였습니다
‘ 위장병의 악화 ’
후작부인은 너무나도 신이 났고
그녀의 독살놀이는 멈출줄을 몰랐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은 하녀의 식사에 독을 섞기도 하며
머리가 나쁘고 못생긴 맏딸을 보기도 싫다며 역시 식사에 독을 넣기도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유혹하여 데리고 논 청년이 싫증나자 독살할려고 했죠
드디어 그녀는 자신의 남편에게도 독약을 몰래 먹였는데,
이때마다 그녀의 애인인 생트클루아가 남편에게 해독제를 먹여 살려냈습니다.
만약 그녀의 남편이 죽어 이번에는 자기와 결혼하자고 한다면,큰일일 것이였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다음 독살놀이의 타깃을 자신이 될게 뻔했으니까요.
이 독살놀이의 종지부는 어떻게 되느냐구요?
애인 생트클루아가 실험실에서 사고로 급사함으로써,
모든 범행이 들통나 잡혀들어갑니다.
후작부인은 알몸인채로 고문대에 묶여 양다리를 벌리고,자신의 치부를
다른 남자들 눈에 노출시켜야만 했습니다.
또한 5시간 동안에 물통에 가득 찬 물을 다 들이켜야 하는 물고문을 당했구요
머리는 빠개질것 같아지고 온몸이 처절한 통증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되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에 못 이겨 그녀는 결국 저지른 죄악을 모두 털어놓습니다.
1676년 7월 17일 아침
파리의 그레이브 광장의 처형대에는
브랑뷔리에 후작부인인
마리 마르그리트 도브레가 서 있었습니다.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 뉘우치기는커녕 다음과 같은 최후의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 누구나 저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하고 있는데, 어째서 나만 벌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
마리 앙투아네트 Marie Antoinette
돈,그에 관련된 악녀라면 이미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여자일것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하면 여러분이 떠올리게되는 말은 이것이겠죠
“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될 것 아니냐? ”
이 말 한마디는 프랑스혁명을 돋구었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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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쪽님 댓글보고 수정합니다
저 말을 누가 했는지는 모르나
루이 14세의 아내 마리아 테레사가 했다는 말도있고,마리 앙투아네트가 했다는 말도있습니다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서,
그녀는 돈에 미친악녀라기보다는
사치에 미친 악녀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13세때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에서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로 시집왔습니다.
그녀는 가련한 미모로 궁중의 인기를 독점하였죠.
또한 그녀는 프랑스 루이 16세,자신의 남편이 호인임을 알아차리고 이것을 기화로 차츰 사치삼매경에 빠집니다.
그녀의 의상비가 얼마였는지 아십니까?
예산만으로도 연간 지금 돈 100억원에 해당했습니다.
그녀는 아침마다 일어나 맨 먼저 생각하는것이
‘ 오늘은 어떤 옷을 입을까? ’ 였다고 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시녀가 드레스의 축소견본을 보여주면 그 중에서 그날 입을 몇가지를 골라내었습니다.
직속 디자이너인 베르탕 양은 왕비와 둘이서 방안에 틀어박혀 드레스의 디자인을 했구요
베르탕 양은 이것도 아니다,저것도 아니다 하는 마리와 몇 시간이고 얼굴을 마주하며 의논했습니다.
하층계급이였던 그녀는 유일하게 왕비의 옆에서 그럴 수 있는것을 허락받았기때문입니다.
또한 베르탕 양이 만드는 드레스는 한 벌에 6억원이나 했습니다.
드레스를 만들었는데,헤어도 중요하지않겠습니까?
마리에게는 헤어스타일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녀는 머리를 1미터쯤 땋아 올리고 그 위에 범선 또는 풍차방앗간이나
정원의 풍경 등을 꾸미기도 하였죠.또한 머리 속에 기계장치를 숨겨놓고
용수철을 누르면 장미꽃이 확 피어나거나,보석으로 꾸민 새가 날개를 치게하는 방법까지 있었다고합니다.
이런 마리의 영향으로 전 프랑스의 귀부인이 헤어스타일에 열중하여
한 해에 자그마치 3,740종류의 신형 헤어스타일이 발표되었다고합니다.
그녀는 25만 루블이나하는 팔찌를 충동구매했을 때에는
빈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도 기가 막혀 나무라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듯 경박한 답장을 써 보냈을 뿐이죠
‘ 어머니의 머리를 그런 하찮은 일로 번거롭게 하리라고는…! ’
또 그녀는 총애하던 시녀 폴리냐크 부인에게 80만 루블(약 30억 원)이나 되는
거금을 지참금으로 주었을 뿐만 아니라,남편으로부터 베르사이유의 프티 트리아농이란
별궁을 선물로 받자 그 정원을 자기 취향에 맞춰 개조하기 위해 2천피트나 되는 곳에서
파이프로 물을 끌어 연못을 만드는 등 공사비만 자그마치 165만 루블(약 60억 원)을 썼다고합니다.
한마디로 정원꾸미기라지만 서민들이 상상하는것과는 스케일이 너무나 달랐죠
하지만 그녀가 이런 무절제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까닭이 있었습니다.
남편인 루이 16세는 성적 불능자였기 때문이죠
매일 밤 침대에서 필사적으로 시도해 보았지만 요긴한 시점에서
엄습해오는 심한 통증으로 매번 그만 허사가 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욕구불만을 사치로 해소하려는걸까요?
7년 후,남편이 수술을 받을 때까지 이런 일이 되풀이되었으니
그녀의 스트레스가 이해가 가기도 할것입니다.
사치에 빠진 악녀,돈에 미친 악녀였던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그녀는 프랑스가 혁명에 치닫음과 동시에 1793년,국민 공회에서 남편이 사형 선고를 받고
어린 왕세자를 강제로 빼앗기고 살아서 나온 사람이 없다는 콩세르주리 감옥에 보내집니다.
그해 10월 13일,마리 앙투아네트는 국민공회의 재판을 받을차례였습니다.
그녀는 당당한모습으로 20시간에 이르는 심문을 받았고
결과는 ‘ 사형 ’ 이었습니다.
그리고 사흘 후 오전 3시,마리는 흰 죄수복에 흰 나이트캡을 비롯해 온 몸을
흰색으로 두르고 데리러 온 마차를 타고 3만의 병사가 정렬한 가운데 혁명 광장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녀의 나이 37세.
아름다웠던 그녀의 금발은 백발로 변하였고,그렇게도 예뻤던 얼굴은
1년 2개월의 유폐생활 끝에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져 있었다고 합니다.
조세핀 Josephine
낭비벽에선 나폴레옹의 아내였던 조세핀도 남에겐 뒤지지않습니다.
1763년, 마르티니크 섬의 농장주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16세에 파리의 식민지 장관 보아르네와 결혼합니다.
그러나 남편이 프랑스 혁명으로 처형되자 두 아이를 거느린 조세핀은 연달아 귀족의 애인이 되는 방법으로
급한불을 꺼나갔습니다.
젊은 나폴레옹과 만났을 때, 조세핀은 나폴레옹의 상사인 정계의 거물 바라스의 애인이었습니다.
32세에 두 아이를 낳아 아주 빼어난 미인이라 할 수 없었지만
조세핀은 나긋나긋한 자태와 꽤 나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기때문에,
나폴레옹의 눈에는 우아한 귀부인 그 자체로 보였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구혼에도 그녀는 대번에 승낙하지않았습니다.
당시의 나폴레옹은 가문이 좋은것도아니었고,큰 재산이 있는것도 아니였습니다.
조세핀은 두 아이를 가진 몸으로서 이쯤에서 결혼하여 생활을 안정시키는게 좋지 않을까 하여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으로 그와 결혼했습니다.
한편,나폴레옹은 그녀에게 홀딱 반하여 그야말로 쪽을 못 쓰는 형편이였습니다.
최고 사령관으로서 파견된 이탈리아에서까지 하루에도 몇 통씩 열렬한 구애의 편지를 보냈을 정도니까요.
나폴레옹이 사교계의 꽃인 조세핀에게 쓴 편지는 유명합니다.
‘ 그대에게서 떠나오니 이 세상은 사막이오,날마다 생각하는건 그대뿐이라오. ’
‘ 이 어리석은 여자야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나는 너를 증오해 너는 멍청하고 어리석고
바보같은 공주병에 빠진 여자일 뿐이지
너는 나에게 답장하지 않았어
너는 네 남편을 사랑하지 않아
너는 네가 쓰는 글들이 나를 만족시켜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그리고 아직 너는 도대체 하루종일 무얼하는건가 부인이여?
네가 하는 그 중요한 일이 네가 사랑하는 남편에게
편지도 쓸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란 말인가?
너는 이 숨막히고 긴장된 연애를 즐기고 있는가?
다른 애인을 만들어 두고 그 새로운 애인에게
애정을 주고 네 남편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는단 말인가?
조세핀이여,나 그대에게 경고한다 조심해라!
어느 날 밤,불시에,나는 네 방에 찾아 갈 것이다.
나는 문을 부수고 네 방으로 쳐들어갈 것이다,그 곳에서 너는 나를 볼 것이다.
나는 지금 매우 불안하다 너에 관한 어떠한 소식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서 나에게 편지를 해달란 말이다.
가장 즐겁고 발랄한 기분으로 편지를 써서 나를 즐겁게 하란 말이다.
어서 빨리
나는 빨리 나의 팔에 네 허리를 껴안고 내 아래에 묻혀있는 네 입술에 100만번의 입맞춤을 하길 원한다. ’
그러면서 나폴레옹은 하루 빨리 이탈리아로 와달라고 애원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열렬한 사랑을 받고있는 조세핀은,그 편지를 제대로 읽지도않고
아무데나 던져버리고는 서둘러 댄스파티에 나가거나 그녀에게 일찍이 생긴 새 애인
이폴리트 샤를이라는 젊은 육군중위와 애정을 나눴다고합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초조해져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냅니다.
‘ 그대가 오지 않는다면 군대를 버리고 파리로 돌아가겠소 ’
하는 수 없이 조세핀은 이탈리아행을 결심했으나,어이없게도 그 여행에마저 애인 이폴리트를 데리고가는 형편이됐죠.
이 모든 것을 안 나폴레옹은 격노하여 즉각 이혼이라면서 펄펄 날뛰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조세핀을 방안에 가두고 문을 걸어 잠갔고,
틀어 박혀있던 방 앞에서 조세핀이 무릎 꿇고 울며 밤새도록 필사적으로 용서를 빌었습니다.
조세핀의 가엾은 모습에 나폴레옹은 결국 힘없이 무너져버립니다.
1804년,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드디어 황제가 되어 조세핀도 황후가 됩니다.
농장주의 딸에서 한 나라의 황후로...그야말로 신데렐라 스토리죠.
나폴레옹의 사랑스러운 조세핀의 큰 결점은 극단적인 낭비벽이였습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드레스가 900벌,장갑이 1000켤레 나되었고 1년에 500켤레 이상의 구두를 샀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황후이기전에 막대한 빚을 안고있었죠.
나폴레옹의 비서인 부리엔이 명령을받고 조세핀에게 말했습니다.
“ 빚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액수를 말해 주셔야 합니다 ”
조세핀은 머뭇거렸습니다.남편이 알게되면 얼마나 화를낼것인지 그것이 무서웠던거죠.
결국 부리엔의 다그침에 조세핀이 액수를 말했습니다.
자그마치 120만 프랑,지금의 돈으로 환산하면 약 60억 원 상당의 거액이였습니다.
하지만 조세핀은 그 절반인 60만 프랑으로 보고해달라고 애원하였기때문에
부리엔도 하는수없이 그렇게 보고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기가막혀 얼마 동안 말도 나오지 않았으나
어쩔수없이 국고에서 전액 청산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화려한 생활을 막을 내려야만했습니다.
조세핀은 끝내 나폴레옹과의 사이에 아들을 낳을 수가 없었다고합니다.
때문에 나폴레옹은 미련이 남으면서도 그녀와 이혼할 것을 결심하죠.
1809년 12월 16일,조세핀은 튀일리 궁전에서 마르메종 궁으로 옮깁니다.
나폴레옹은 그녀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맹세하고 ‘ 황후 ’ 라는 칭호와
대우를 그대로 남길 것과 다액의 연금까지도 약속했습니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의 황녀 마리 루이즈 와 재혼했고 아이를 낳게 되었지만
1814년 3월 러시아·영국·프로이센의 연합군에 패하여 엘바섬으로 유배됩니다.
그 1주일 뒤인 5월 29일,조세핀은 폐렴에 걸려 마르메종 궁에서 세상을 떠났다고합니다.
그녀의 나이 51세
조세핀이 마지막에 남긴 한마디는
“ 나폴레옹 ”
재클린 오나시스 Jacqueline Onassis
현대의 인물로, 돈에 미친 악녀라고 한다면
재클린 오나시스도 빠질 수 없습니다.
그녀는 1960년에 존 F.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됐을때에는
꿈같은 커플의 등장이라며 전 세계의 화제를 모았었죠.
재클린은 퍼스트레이디로서 화려한 무대의 정면에 나서으며,
남편이 공무로 가는 곳곳에서는 ‘ 재키! 재키! ’ 를 외치는 소리가 메아리쳤다고합니다.
사실 케네디 대통령은 여자 관계가 복잡하여 스타 여배우인
소피아 로렌,셜리 매클레인,마릴린 먼로 등 같이 잔 여자가 셀 수 없을 정도였답니다.
참다못한 재클린이 이혼을 들고 나오자,대통령이 이혼하면 인기가 뚝 떨어진다는 이유를 들어
‘ 재임 중에는 절대로 이혼을 하지 않는다 ’ 는 약속을 남편과 하지 않을수 없도록 했다고 합니다.
당시 재클린의 취미는 쇼핑과 실내 치장이였는데,그녀는 대통령의 1년 치 연봉을 털어
백악관의 여러 방의 장식을 모두 바꾼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마구 옷을 사 들여 옥장 안을 입지도 않는 드레스로 가득 채웠다는 보고도 있었죠.
케네디는 산더미처럼 쌓인 청구서를 보고 소리쳤다고합니다.
“ 재클린의 이름을 팔아서 물건을 사는 녀석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 거야! ”
그러나 1963년 11월 22일,미국 남부의 댈러스에서 케네디가 암살당하자
재클린은 34세의 젊은 나이에 비극의 헤로인이 되어 전 세계의 동정을 끌어모았습니다.
하지만 그 재클린은 5년 후,62세의 그리스의 선박왕 아리스토 텔리스 오나시스와 재혼함으로써 온 미국이 분노합니다.
“ 재클린은 수표와 결혼했다! ”
“ 미국은 성녀(聖女)를 잃었다! ”
위대한 남편의 추억에 사는 영웅이 돈을 보고 결혼한 배신자로 전락해버린거죠.
하지만 재클린의 처지에서 보면 이제까지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벌충하고 싶었을 뿐이었을겁니다.
여자문제가 복잡한 남편..남편이 죽자마자 홀로 살아야하는 외로움 그런것이겠죠.
그로부터는 욕구불만을 해소해버리겠다는 듯,돈을 쓰고 또 쓰며 마음껏 즐기기 시작합니다.
의상비는 대통령 부인 때의 10배였으며,결혼 초에는 1분에 300달러로 계산되는 거액의 돈을 낭비했다고합니다.
당시 선박왕 아리스토도 재클린에게 푹 빠져 프로포즈를 하여 OK를 받기까지 약 1년간에
팔찌 23개,목걸이 18개,손목시계 7개,브로치 17개,반지 20개를 선물했다고합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서는 300만 달러 상당의 보석도 선물했다고하구요.
그 두 사람의 행복한 결혼생활은 재클린의 상식에 벗어난 낭비에의해 끝이나고맙니다.
세계적인 거부인 오나시스도 이렇게 탄식했다고 합니다.
“ 그녀와의 결혼생활이란 매달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거액의 청구서를 내게 들이대는 것인가 ”
그리고 곧 오나시스가 죽자,유언장에는 10억 달러에 이르는 대부분의 유산을 딸 크리스티나에게 주도록 되어있었습니다.
그녀는 겨우 1,000만 달러밖에 돌아가지않게 되어있었죠.
그의 유언장에는 또,재클린이 이의를 제기하거든
“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하여 대항하도록 ”
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고합니다.
격분한 재클린은 시동생이었던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까지 움직여 압력을 넣는등,
서로 변호사를 세워 1년 반 동안이나 치열한 법정 투쟁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겨우 2,000만 달러를 받을 수 있는 조건으로 법적 투쟁이 끝났습니다.
크리스티나로써는 2,000만 달러만으로 지긋지긋한 재클린과의 관계를 청산했으니
아주 만족했을것같습니다.
이멜다 마르코스 Imelda Romualdez Marcos
재클린을 말한다면, 이멜다 마르코스를 빼먹을 수 없죠.그것은 불공평하니까요
소녀시절부터 큰 장미꽃 같은 미모였던 이멜다는 마닐라에서 은행에 근무하던 시절
길거리에서 스카우트 되어 주간지 표지를 장식했습니다.
이어 그녀는 1952년 미스 마닐라 콘테스트에 응모했으나 심사에서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시장을 찾아간 그녀가 “ 선발된 사람은 유력장에게 줄을 댄 것이 틀림없어요 ”하고
눈물로 호소하는 바람에 두 사람의 미스 마닐라가 탄생하는 기묘한 결과가 생겨났다고합니다.
그런 이멜다에게 다가온것은 당시 36세의 하원의원 마르코스였습니다.
그는 대통령의 자리를 꿈꾸는 야심가였죠
마르코스는 11일간,매일 한 개씩 다이아반지를 보내어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마르코스가 ‘ 내 재산의 일부에요 ’라며 돈다발을 무더기로 쌓아 보이는 등등의
필사적인 프로포즈 공세앞에 무너지고 맙니다.
그런 이멜다는 결혼 후 환멸을 맛봐야했습니다.
남편에게는 결혼 전부터 애인이 있었고,이미 아이도 셋이나 있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이멜다는 그 애인을 만나러 갔다가
그녀로부터 넷째 아이까지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는 노이로제에 걸리고 말았죠
그녀의 고민은 거듭 계속 되었고,그 거듭끝에 이멜다는 결심합니다.
이제 와서 되돌아설 수는 없다.
여기서 각오를 단단히 하여 남편이 대통령을 목표로 한다면 자기도 그를 도와 그 꿈을 실현시키자.
이렇게 결심한 이멜다의 파워는 정말이지 무서울정도로 발휘됍니다.
대통령 선거 때 남편과 함께 유세 여행을 떠나 필리핀 전국을 돌아다니며 연설을하고,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1965년 남편이 대통령이 되자 이제까지의
욕구불만을 해소시키기라도 하려는 듯,사복을 채우기 시작합니다.
외국 기업으로부터 리베이트를 받거나 도박장의 수입으 슬쩍하는가 하면 마피아와의 유착도 마다하지않았죠.
스위스 은행의 비밀계좌에 나라의 공금을 이체하고 뉴욕의 부동산을 마구 사들였기도했구요
현직에 있는 동안에 이멜다의 외유는 62회,방문국은 33개국,외유대는 비행기 두 대에 드레스를 잔뜩 채운
여행용 가방 200개를 실었다고합니다.
그녀의 낭비벽은 여기서 그치지않습니다.
1977년,호놀룰루에서는 입어 보지도 않고 닥치는 대로 4만 달러어치의 옷을 샀고
1978년, 뉴욕에서는 한 개에 115만 달러나 하는 팔찌를 사고
초특급 호텔에서 일박 1,700달러에 달하는 숙소에 계속 묵으면서
도어맨에게는 팁을 10달러씩이나 주었다고 합니다.
권력을 지향했던 이멜다가 벌인 또 하나의 특징적 현상은
필리핀 국내에 거대한 건물을 연달아 건축했던 일입니다.
기부금을 모아 거대한 건물을 짓거나,미스 유니버스가 열리면
또 거대한 건물을 짓고 문화센터라며 너무나도 호화로운 건물을 짓기도했죠
더욱이 1981년에 로마 교황이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는 코코아 야자나무를 쓴
영빈관을 3,100만 달러를 들여 새로 짓게 했지만 너무 요란스러웠기에 교황이
그곳에서 숙박하는것을 정중히 거절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런 이멜다의 낭비벽에 필리핀 국민들은 빈곤에 시달렸고,
반마르코스파의 아키노는 기치를 내걸고,목숨을 걸고 마르코스 정권을 타도하려 했습니다.
1983년 여름,마닐라 공항에 있던 아키노는 뒷머리에 총격을 받고 즉사합니다.
총을 쏜 범인도 그 자리에서 병사들에게 사살되었구요
1,000명의 병력이 경비하는 공항에서 대낮에 공공연히 감행된 테러에 마르코스는
범행을 공산주의자에게 덮어씌우려고 했으나 속아넘어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반마르코스파가 움직이기시작했고 실질적으로 필리핀을 뒤에서 움직이고 있던 미국도
마르코스에겐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다고 보고 깨끗이 손을 뗍니다.
마르코스와 이멜다는 정권이 타도됨과 동시에 미국 비행기를 타고 간신히 하와이를 망명합니다.
한 남자를 대통령으로 만들고,다시 대통령직에서 내려오게한 여자
이멜다 마르코스,그녀는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요?
그녀는 아직 살아있습니다.
부디 어려운 분들을 도와가며 잘 살아가시기를 빌어야죠.
텔레즈 드리냐크
19세기 프랑스에는 텔레즈 드리냐크,통칭 앙베르 부인이란 여성이 있었습니다.
역시 돈에 미친 악녀의 전형이지만,그녀의 경우는 아주 대단한 지능범이였습니다.
그녀는 다른 악녀들처럼 남편의 돈을 쓰지않고
빚을 만들어도 빚쟁이들따위 있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하신가요?
본다면 아주 까무러칠것입니다.
그녀는 실제로 있지도않은 헨리 크로퍼드란 갑부를 꾸며내어
자신이 그의 유산을 상속하게 되었다고 주위에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다음에도 역시 가공의 인물로,크로퍼드의 두 조카의 존재를 만들어내어 사기를 쳤죠.
즉,그 조카들과의 사이에 크로퍼드의 재산을 에워싼 가공의 법정투쟁을 펼쳤던 것입니다.
덕택에 텔레즈는 어느새 시대의 유명인이 되어 법무장관의 아들인 프레데리크 앙베르의 구혼을 받아
화려한 결혼을 하게 됩니다.
한편,텔레즈와 크로퍼드의 두 조카 사이의 법정투쟁에서 크로퍼드의 유산의 행방이 결정되기까지
크로퍼드의 전 재산인 ‘ 부동산 권리증과 유가증권 ’은 공증인 입회 아래 텔레즈의 금고에
하게 되었다고합니다.
봉투 속에 들어있는것은 아무것도아닌 종이조각이었으나 그걸 아는 사람은 우습게도 아무도 없었다고하죠.
이리하여 20년에 걸친 텔레즈와 두 조카들 사이의 유산을 둘러 싼 가공의 법정투쟁은 계속되고
분쟁이 해결되면 텔레즈는 갑부가 되는 것이니만큼 프랑스 국내의 은행들은 굽실거리며 그녀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줍니다.
20년 동안 그녀가 10여 개 은행에서 빌린 돈은 당시 돈으로 6,000만 프랑에 가까운 엄청난 액수였습니다.
그 돈으로 별장,요트,보석,그림을 사 모으기도 하고
오페라 극장의 전용 좌석을 사기도 하였으며
유명인들을 모아 호화 파티를 열기도 하는 등 호사스러운 사치놀음에 빠졌습니다.
그녀의 대담하고 엄청난 거짓말에 은행이고 변호사들이고 감쪽같이 속아넘어갔다니,
정말 믿을 수 없는 이야기죠
또 그녀가 돈을 갚지 않았기 때문에 도산의 위기에 몰린 은행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왕 나쁜 짓을 하려면 ‘ 대담하고 과감하게 ’의 표본일지도 모르죠.
텔레즈의 천재적인 사기 재능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그녀의 사기는 대리인을 경유해서 받은 가짜 유언장,거리의 인쇄소에서 찍은 미국 변호사의 서명이 든 편지지 등
갖가지 소도구를 모을 수 있었기에 매우 박진감있는 드라마로 연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그녀의 변호인단은 ‘ 크로퍼드 형제 ’의 패배로 몰아붙이려 했으나,텔레즈는 재판에 이기면
빈 금고를 열어야 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재판 연기 작전으로 나가며
상대측이 받아들일리도 없는 얼토당토않은 조건을 내놓았습니다.
뒤늦게 이상하다고 생각한 당시의 프랑스 수상이 국회에서 이 사건을 거론하여 텔레즈를 비난했고
이 비난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변호인단 단장은 금고문을 열도록 텔레즈를 다그쳤습니다.
그제야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 텔레즈는 재빨리 스페인으로 달아났지만 그곳에서 체포되고맙니다.
사건의 크기에 비하여 판결은 5년 금고형이라는 가벼운 것이였고,매스컴은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텔레즈는 엉뚱하게도 영웅취급을 받습니다.
그녀의 초상화를 찍은 그림엽서가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다만 초상화와는 조금도 닮지않은 통통하게 살이 찐 못생긴 여성이었다는 점에서
재판을 방청한 기자들이 실망했지만요
서양의 불능(不能)재판
옛날 유럽에서는 남편이 성적 불능인 경우에 한하여 아내가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때에는 부부가 함께 검증 모임에 나가 남편이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구실을 할 수 있는지 어떤지를 실제로 보여야했죠.
1659년의 랑제 후작 부부의 검증 모임은 온 파리의 스캔들이 되었습니다.
결혼 6년째인 랑제 후작부인이 자기는 아직 처녀 그대로라고 털어놓아 깜짝 놀란 가족이 재판을 열도록 권한것이죠.
호기심 많은 파리 시민들은 이런 종류의 사건을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재판소 앞으로 몰려든 수많은 인파는 랑제 후작이 모습을 나타내자 참새들처럼 이렇게 일제히 떠들어댔습니다.
“ 나도 저런 남편이 있었으면! ”
먼저 신체검사를 받은 랑제 후작부인은 이미 숫처녀가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누구보다도 가장 놀란것은 본인이였다고합니다.
금방 다음과 같은 내용의 노래가 파리 시내에 유행했습니다.
“ 랑제 후작도 6년 동안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건 아니야. ”
검사에 앞서 15명의 감정인이 선정되자,랑제 후작은 사전에 ‘ 아내는 목욕을 하고, 머리를 풀어서 늘어뜨려 두도록 ’
하는 등 세밀한 주문을 하였죠.그리고 아내가 수상한 약을 먹지 않았나 하는 부질없는 걱정만 하고있었다고합니다.
“ 날달걀을 두 개 가지고 와,단 한방으로 아이를 낳도록 해주겠다! ”
시간이 되자 후작은 이렇게 큰 소리 쳤고,고비에 이르기직전에 허탕을 쳐 땀을 뻘뻘 흘리며
두 번이나 속옷을 갈아입는 입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 이거,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군! ”
마침내 제한시간이 다 되어 랑제 후작은 비참한 얼굴로 침대에서 끌려 내려왔습니다.
1659년 2월 8일, 재판관은 부부의 결혼 취소를 명령했고,파리에서는 성불능자를 일컬어
‘ 랑제 후작 ’이라 부르는 것이 크게 유행했다고 합니다.
아주 유명한 사람이 된 랑제 후작은 얼마 후 재혼했는데
참 이상하게도 새 아내는 잇달아 아이를 여섯이나 낳았다고합니다.
이거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
*
안녕하세요
전편에는 엘리자베스 바토리에 대한 댓글이 많았는데요
엘리자베스 바토리가 얼마나 뛰어난지는 저로썬 알지못합니다.
그녀에 대해 알아 본 것은 그저 잔혹하다,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위와 같이 말했듯이 저는 사실을 알지못합니다.
그전에 앞서 그 때 당시 사람이 아니라면,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 이야기가 기록되어있다는것은 사실이기때문에
저로써는 해줄말이 없어 죄송합니다.
출처는 기류 미사오-악녀대전 입니다.
다음은
‘ 권력 ’을 탐하는 악녀
첫댓글 흠 내가 마리앙트와네트에 대한 책을 읽었었는데 그 책에는 마리가 너무 어렸고, 마리의 사치에 대해서 가르치는 사람이 제대로 없었다고 봤어... 마리의 엄마인 마리아테레지아는 걱정했지만 뭐 이미 시집간 딸이고....
여튼ㅋㅋㅋㅋㅋㅋㅋㅋ 재미있다 이 글 ㅋㅋㅋㅋ
마리앙투와네트가 저말을 하지 않았다는건 오히려 기정사실화된것아닌가.. 싶은데...
오히려 마리앙투아네트가 국민들의 현실에 안타까워했다는 이야기를들었지-그렇다고 사치를 줄였따는건 아니고
국민들을 선동하려는 운동세력들이 모함했다는게 오히려 사실인것같아
으이 진짜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