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금강산은 왜 일만삼천봉인가?
1. 금강산이 일만이천봉이라 부르게 된 배경.
1) 반도 금강산 개요
금강산은 면적은 약 530㎢이고, 1952년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 전에는 회양(淮陽)·통천(通川)·고성(高城)·
인제의 4개군에 걸쳐 있었다. 최고봉인 비로봉(1,638m)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옥녀봉(1천4백24m), 상등
봉(1천2백27m), 오봉산(1천2백64m), 선창산(1천2백26m), 금수봉(1천1백13m) 등이 우뚝 솟아있고 남
쪽으로는 월출봉(1천5백80m), 일출봉(1천5백52m), 백마봉(1천5백10m), 차일봉등이 있고, 삼선암, 토
끼바위, 사자바위 등 무수한 기암괴석을 품고 있다. 동남쪽으로는 장군산(1천5백60m)과 채하봉(1천5백
88m), 서쪽으로는 영랑봉(1천6백1m), 용허봉(1천4백56m) 등이,동쪽에는 세존봉등이 군소 봉우리들을
거느린채 위용을 자랑한다. 또 금강산에는 비로대, 천선대, 망군대, 백운대, 칠보대 등 20여개의 전망대
가 있다.

그림1= 반도 외금강 계곡(1998.12.19 현지답사)
2) 가장 널리 국민에게 보급한 노래.동요 금강산에서 일만이천봉을 배웠다.
금강산 (강소천 작사 / 나운영 작곡)
[1절]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철따라 고운옷 갈아입는산
이름도 아름다워 금강이라네 금강 이라네
[2절]금강산 보고싶다 다시또한번
맑은 물 굽이쳐 폭포이루고
갖가지 옛이야기 가득지닌산
이름도 찬란하여 금강이라네 금강 이라네
강소천[姜小泉, 1915~1963]
한국의 아동문학가.본명 용률. 함남 고원 출생. 함흥 영생고보 졸업. 해방 후 청진여자고급중학등에서 교
편생활을 하다가 월남하였다. 1930년 아이생활등에 동요 《버드나무 열매》 등을 발표하고, 동요 《민들
레와 울아기》(1930)가 조선일보 현상문예에 당선되었다. 1939년을 전후하여 동화와 아동소설도 쓰기
시작하여 금강산,돌멩이,토끼 삼형제, 전등불 이야기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아동문학》 편집위원,
한국보육대학 ·이화여대 ·연세대 강사, 아동문학연구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3) 송병완 금강산 일만이천봉 시집작성
2000년 「대한겨레문학」시 부분 신인으로 등단한 송병완 시집. 2003년 7월 18일 몽골 태고의 지구 모습
인 에싸라트헤이르한산을 보고 2004년 11월 30일 금강산을 여행한 것을 토대로 한 두번째 산(山) 시집이
다. 한시 중간중간에 영시를 함께 수록하였다.
4) 금강산이 일만이천봉이 된 이유
① 불교 경전인 화엄경(華嚴經)에 ‘‘법기보살(法起菩薩)이 일만이천 권속(眷屬)과 항시 반야경(般若經)
을 설법하고 있는 곳이 금강산이라’’ 고 했고, 신기하게도 온 산이 금강석처럼 단단한 돌로 이루어진 산이
어서 금강산이라는 이름이 주로 쓰여지게 되었다고 한다.
②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어느날 풍악산(금강산)에 왔는데 내금강의 한 지점인 배점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법기보살이 일만이천 무리를 거느리고 나타났다. 태조는 황급히 엎드려 절을 했는데 그 절한 자
리가 배점 (拜岾 또는 拜在嶺)이고, 법기보살이 나타나 광채를 발하던 곳을 방광대(放光臺)라 하여 그 자
리에 정양사(正陽寺)를 세우고 왕건의 원찰로 삼았다고 한다.
③ 1307년 노영스님이 그린 법기보살출현도(法起菩薩出顯圖)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 그림이 가장 오래
된 금강산 그림이면서 금강산의 이름과 일만이천봉이라는 유래를 말해 주는 것으로서 중앙박물관에 소
장되어 있다. (출처 jst815)
④ 여지승람 회양도호부조에 하륜이 중을 보내는 시에서 황산을 금강산이라고 일컫는 것은 장경의 설
을 빌린것이다. 장경에 말하기를, “동해속의 팔만유순의 곳에 달무갈(성인보살)의 무리 1만2천이 항상
그 가운데 머문다 ”하였으니 풍악(금강산)을 말한 것이 아니다. 1만2천은 산이 아닌 달무갈(성인보살)의
제자의 숫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림2= 대륙 금강산 (안휘성 황산)
(주) 일만이천은 보살의 제자들이 금강산에 출현한 숫자이지 봉우리 숫자는 아니다. 즉, 일만이천이 금강
산과 연결되면서 봉우리숫자로 변경인식된 것이다. 강소천은 일제시대인 1930년대 후반에 동요 <금강산
>에서 일만이천봉이란 표현을 썼고, 동요 금강산이 보급화되면서 전국민이 그리알게 되었다. 송병완 시
인도 2000년대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짓게 되었다. 일제의 대륙과 반도와의 분리정책에 의해서 동요
금강산을 전초등학교 학생들이 부르도록 한것으로 보인다. 즉, 일만삼천봉인 금강산을 대륙의 황산에서
반도의 현 금강산으로 옮겨 심으면서 일만이천봉으로 바꾼 것이다. 이것도 역사왜곡의 일환이었다.

그림3= 대륙 금강산(황산)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