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지역 답사 자료 [2002. 10. 26 ∼ 10. 27] 낙동강 중류 - 청동기, 지석묘, 가야 고분, 6가야, 非火伽倻로 발전 □ 고분들 창녕읍, 계성면, 영산면 : 가야무덤 교동 무덤 무리(사적 80호), 송현동 무덤무리(사적 81호) : 삼국통일 전 신라 무덤 동산 만한 가야 무덤들 200 여 채 - 대부분 도굴, 빈무덤. 가야무덤 유물은 민간에 死藏 - 금관, 금동 장신구, 마구류, 다채로운 문양의 토기 □ 진흥왕 拓境碑(국보33호) 점제현 신사비에 이어 한반도내 두 번째 오랜 비, 신라 진흥왕 22년(561년) 건립 진흥왕 - 고령 합천 김해 고령 등 6가야 멸망시키고 그 중앙 돌파 지역에 세운 진흥왕 순수비. 拓境碑(국경을 넓혔다)로 부른다. 비문 『신사년 2월 1일』 근거, 창녕읍과 고암면 경계 화왕산 기슭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1914 년 발견. 두께 30 센티, 높이 178 센티미터 자연 상태 화강암 한 면 비문 23 줄 한문, 가장자리 선을 새김. 진흥왕의 巡狩 행적 - 나라 안을 살피고 다닌 발자취, 수행한 신하 이름 관직등을 기록. 한창 뻗어가던 신라세력이 미친 곳에 박은 "말뚝". 함경남도 황초령비, 마운령비와 북한산비에 이어 네 번째로 발견된 비. 이 비를 세운 561년에 이르러 신라가 마침내 가야제국을 거의 자기 영토 안에 두게 되었다. 가야제국으로 맨나중까지 남아 있던 대가야는 562 년 멸망. 대가야 땅으로 비자화 또는 비사벌로 불리던 창녕에 진흥왕 척경비가 세워진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님. - 창녕에 척경비 세운 이유는 당시 이곳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였음을 의미함. 서쪽 낙동강을 끼고 낙동강을 물길로 삼아 영토확장을 위해 북쪽으로 진출하는데 좋은 지정학적 위치. □ 창녕 曺, 창녕 成, 창녕 李 3대 姓氏 발원 ○ 창녕조씨 : 화왕산 月影三池 - 계룡 시조 조민수(위화도 회군), 조위(무오사화-명필), 구례사 원증국사(나주) 조한룡, 남명 조식 ○ 창녕성씨 : 성삼문 - 성승 - 성달생(조선초 대명필), 성달수(생육 신), 성혼 - 성수침 등 명문가 □ 비룡산 - 火王山 양기, 물부족, 음기 없는 사람에게 좋다 火山 : 분화구가 월영삼지 - 창녕조씨 발원 곽재우 : 화왕산성과 목마산성에서 임란 시 일본 가등청정 대결 산성 - 분지 1.8 Km(안 : 억새, 밖 : 기암괴석) 배바위 - "노아의 방주" 유사한 전설 정상에서 보는 일몰과 일출 - 일몰시 석양에 비치는 우포늪 전경 화왕산성 -보수, 영화촬영 셋트 □ 觀龍寺 영축산(영산 - 석가), 양산 통도사, 여수 흥곡사 뒷 영축산, 원효 불법 진흥왕 555 점령, 583년 진평왕 5 년 증폭대사 - 송파제자 - 구룡 승천 - 구룡사 - 관룡사 - 원효 화엄경 강의. 임란 소실 -광해 중창 -숙종 가을 대홍수 -병풍바위 소실, 중창, 6/25 소실, 장승 -고신앙 집결지(옛절터), 칠성각 - 원음각 1967 대웅전 보수시 상량문 발견 -조선 태조 원년(1401) 건축, 임란 소실, 광해군 때 재건, 영조 때 보수(보물 212호) 약사전(보물 146호) : 지은 수법이 영주 부석사 조사당과 비슷 네 면이 모두 한 칸씩 주심포집, 맞배 지붕 영축산 밑 영산마을 - 옥천계곡 -사리마을, 북암 -대흥사 터 -북암마을 부처님 설법 - 만법만국어 통용/ 대웅전/ 광해군 중창 영조 보수/ 삼존불 : 석가 + 아미타 + 약사여래 3존불 - 경남북 일대 조선시대 유행한 풍조-옆모습 통도사 말사 인 울산 문수사/ 미타암 이로 삼성암 -3대 기도처, 제비집 명당 - 용선대 □ 옥천사 절터 (신돈의 출생지) □ 塔· 金堂 治成文記碑 - 40년간 불사에 관한 기록[보물 227 호] □ 西寺址 석탑 [보물] 창녕읍 교상동 위치. □ 東寺址 석탑 [국보34] 높이 5.7미터 탑신 기단 조화 뛰어난 조각품 불국사 석가탑과 비견. 현지인 축조 - 문화 역량이 수도 서라벌에 못지 않았다(비사벌 : 서라벌에 비견된다). 신라 석탑 모델 석가탑과 거의 동일. 석가탑은 백제 석공, 이곳 석가탑은 현지인 -창녕의 문화 역량 가늠, 제2의 경주 □ 석빙고(송현동 보물 310호) 화강석 홍예 넷 장대석 - 영조 18년(1742) 창녕 현감 신 서 -개수, 실제 축조는 가야 ∼ 신라 초기 □ 오백년 묵은 하병수 草家(창녕읍 술정리 중요민속자료 10호) 조선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 때 하 자연이 이곳으로 낙향, 오백년 간 본디 모습 고스란이 유지, 하자연 17세 후손 하 병수 씨가 지금 도 살고 있다 해마다 새 짚 지붕 교체 , 남향 네간 초가건넌방, 대청, 안방, 부엌, 쇠풀 지붕, 못을 쓰지 않은 것이 특징. □ 척화비(斥和碑) 길이 4자 5치, 너비 1자 5치, 두께 8치 5푼. 재료는 화강석. 1871년 건립. 비석 표면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主文 큰 글자, "우리들의 만대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 라고 작은 글자 새겼다. 1866년(고종 3)의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후 대원군 쇄국 결의, 온 국민에게 외세 침입 경계 목적, 1881년 4월 서울 비롯 전국의 요소에 세운 것.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청나라 납치 후, 개국하자 철거, 파묻어 버림. [우포늪] 창녕 일대 큰 못이 많다 - 용호 사지포 우포 여우못 사몰포 장척호 연기호 번개호 우포늪은 국내 최대 자연늪. 창녕군 대합면 주매리와 이방면 안리, 유어면 대대리, 세진리에 걸쳐 있는 70 만평.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할한 늪지. 수많은 물풀. 부들, 창포, 갈대, 줄, 올방개, 붕어마름, 벗풀, 연꽃 등이 무더기. 늪에 반쯤 밑둥이를 담그고 있는 나무들이 '원시'의 분위기 자아낸다. 개발이란 미명 아래 국내의 많은 늪은 사라지고, 이제 늪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곳은 국내 한 곳. 바로 우포 늪 뿐. 뭍도 아닌 물도 아닌 늪, 국내 최대 규모의 온갖 풀, 나무, 곤충, 물고기, 새 그리고 인간을 품에 안은 자애로운 곳. 1억 4천만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마지막 자연늪인 우포는 산으로 둘러싸여 개발이란 탐욕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던 '생태계 박물관' (경향신문 1996/5/30). 우포늪은 1997년 7 월 26 일 생태계보전지역 중 생태계특별보호구역(환경부 고시 1997-66호) 지정. 국제적으로도 1998년 3월 2일 람사협약 보존습지로 지정. 이제 우포는 세계인이 지켜보는 보존해야 할 곳 【창녕 지역 문화재】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33호) 창녕읍 술정동 동쪽 삼층석탑(국보 34호) 창녕읍 송현동 부처돌 좌상(보물 75호) 창녕읍 관룡사 약사전(보물 146호) 창녕읍 석빙고(보물 310호) 창녕읍 교상동 서쪽 삼층석탑(보물 520호) 영산면 만년교(보물 564호) 창녕읍 화왕산성(사적 64호) 목마산성(사적 65호) 창녕읍 교동 고분 무리(사적 80호) 창녕읍 송현동 고분 무리(사적 81호) 영산면 석빙고(사적 169호) 창녕읍 하 병수 씨 집(중요민속자료 10호) 창녕읍 탑·금당 치성문기비(보물 227호) 부곡면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02호)
카페 게시글
명찰순례
창녕화왕산 - 관룡사...
북마크
번역하기
공유하기
기능 더보기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