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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여행 단편)
김명재
1. 서안
서안은 더운 곳이다. 여름에는 후텁지근하여 정말 견디기 힘들다.
겨울에도 황사로 도시가 부옇게 흐려 있으며 물이 부족하고 수질조차 좋지 않다.
호텔의 물도 황토가 섞여 나올 정도이다.
그러나 천년을 누려온 고도로 시내 외에 유적과 유물이 산재해 있고 울창한 가로수 그늘과 사람으로 비좁은 골목, 현대식으로 정비된 도심은 나를 여러 번 이곳에 들르게 하였다.
진시황과 여불위, 항우와 유방, 현종과 양귀비, 고종과 측천무후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그들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그러나 남아 있어도 좋을 레닌모 인민복에 자전거를 타던 사람들, 야시장의 먹거리들, 병마용 앞의 칼국수 장수들도 같이 없어져 애틋한 마음이 든다.
대신 현대식으로 새로 지은 함양공항과 웅장한 대당부용원이 찬란한 불빛과 함께 나를 반기었다.
2. 병마용
서안의 볼거리로는 병마용, 진시황릉, 건릉, 무릉, 영태공주묘, 자은사 대안탑, 법문사, 흥교사, 소안탑, 화청지, 비림, 아방궁, 부용원, 섬서 역사박물관, 서안 성벽, 반파유적지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중 압권은 병마용이다.
그 이전에는 서안시의 상징이 대안탑이었으나 서안을 찾은 외래 관광객의 대부분이 병마용을 보러 간다.
서안 교외 임동현에 있는 병마용은 현재 1-3 호갱까지 개방되어 있고 4 호갱부터는 아직 발굴 조사 중이다.
예전에는 촬영이 엄격히 금지되었으나 요즘은 단속을 하지 않는다.
이곳의 토용들은 워낙 유명하여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고 박물관 입구에서 이마에 밀가루 반죽을 얹고 네모칼로 국수를 잘라 솥에 던져 넣던 칼국수 장수와 한 개 만원을 부르던 병마용 모형을 버스가 출발하려하면 천원에 두 개를 주던 장사치들이 없어지고 작지만 달고 맛있는 서안의 명물 곶감과 석류가 보기 힘들어 졌다는 것이 아쉽다.
대신 새로 지은 가게들이 들어서서 손님을 부를 뿐이다.
3. 대당부용원
대당부용원은 성당시대의 궁중 정원을 재현한 곳이다.
서안 시내 자은사 옆의 곡강 가에 자리 잡았다.
큰 나라여서인지 궁중 정원의 규모 또한 방대하다.
강물을 넓히고 인공호수를 파서 곳곳에 옛 건물을 복원했다.
어연궁, 방림원 등 고루 거각이 곳곳에 자리잡고 왕실극장인 봉명구천도 호수가에
다시 세웠다.
물안개가 자욱한 큰 돌다리를 건너면 중심건물 자운루가 버티고 있다.
서울 광화문을 서너 개 겹친 것 같은 크기에다 사방에 운제가 걸려 운치를 더 한다. 자운루 안에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모형, 당시 장안의 모형도 등이 있어 구경할 만하다. 밤에 더욱 빛이 나도록 사방에서 조명을 비추어 휘황찬란하다.
대안탑이 오히려 작아 보인다.
곡강 기슭의 전당포에 겨울 옷을 잡히고 술 마시던 두보는 멋진 시를 남기고 가고
일세를 풍미하던 당태종과 고종, 양귀비, 안녹산, 측천무후, 현장법사, 이 백. 왕 유도 찾을 길이 없다.
새로 파낸 곡강의 물만 흘러 갈 뿐이다.
4. 감숙성
중국 22 개 성 가운데 가장 못살고 낙후된 곳이다.
최근 지하자원이 대규모로 발견되고 서부 대개발로 인하여 우주항공센터 등 발전이 가속화 되고 있지만 그건 중앙정부의 몫이고 주민들은 가난한 생활을 면하기 어렵다.
황하의 상류 고원과 사막의 손바닥만한 오아시스에서 옥수수를 심거나 몇 마리 양을 길러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하루하루가 힘든 삶이다.
서안에서 비행기로 1 시간이 채 걸리지 않지만 기차로 가면 하루가 꼬박 걸린다.
황하강변을 따라 길쭉하게 형성된 시내에는 그래도 한 성의 성도라 고층건물이 들어찼고 교통체증도 심하다.
손문이 세운 황하제일철교와 어머니가 아들을 안고 누운 황하 모친상이 볼거리이고 교외에는 제철공장과 제련소, 탄광들이 밀집하여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다.
푸른 빛은 찾아보기 힘든 황토 산과 자갈 평원, 시커먼 연기, 누런 황토 물줄기는 사람들을 질리게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씩씩하게 잘 살아 간다
5. 유가협 가는 길
난주에서 유가협으로 가는 길은 직선거리로는 100 km 가 채 안되지만 구절양장 고갯길을 넘어야 하기에 자동차로 3 시간은 족히 걸린다.
시내를 벗어나면 바로 황량한 산야가 펼쳐지는데 창밖으로 황무지들만 보일 뿐이다.
수직에 가까운 누런 황토 민둥산에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실금처럼 남아있고 인공 계단을 만들어 나무들을 심어 놓았지만 제대로 살아갈 지 의문이다.
수병진을 지나고부터는 무인지경인데 황토무더기 산봉우리들은 끝없이 줄을 잇고 인적은 물론 새 짐승조차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도 골짜기의 오목한 곳에는 옥수수가 자라고 있는 걸 보아서 근처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짐작이 간다. 실오라기 같은 오솔길이 구불구불 이어져 어느 곳에서는 산봉우리를 넘고 어떤 길은 흔적뿐인 냇가를 따라 연결되어 있다.
수병진에서 1 시간여를 달려서야 겨우 바람에 밀보리를 타작하는 마을을 만날 수 있는데 동네라고 해야 십 여호 남짓 되는 흙벽돌로 지은 개미집 같은 움막들이다.
그래도 먼지 쌓인 벽에다가 '생산량 달성' '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등의 구호가 붙었다.
안녕보를 지나 하구, 달천을 거칠 때까지도 밖의 풍경은 변함이 없다.
넝마 조각 같은 입성을 한 아낙들이 버스를 보고 손을 들어 세우려 하다가 관광객을 실은 차임을 알고 겸연쩍게 웃는다.
6. 유가협
감숙의 서쪽은 본래 티벳의 영토였던 광대한 청해성이 있다.
동쪽은 내몽골 자치구와 맞닿고 북쪽은 신강 위그루 자치구이다.
모두 고산과 초원, 사막지대라 유목 외에 인간이 할 일이 없는 지지리도 척박하고 못사는 오지들이다.
임하회족자치구에 자리잡은 영정시는 유가협 댐으로 유명해졌다.
황하의 누런 물도 이곳 수고에 이르러 흙이 가라앉아 푸르게 넘실댄다.
여기서 점심을 먹고(길가의 식당은 겉보기와 달리 맛이 있었다) 댐으로 내려가 모터보트로 갈아탔다.
큰 배가 10 여명 정도 타는 보트는 굉음을 내며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위수와 경수처럼 맑은 물과 흐린 물의 경계가 뚜렷한 곳을 지나면 강물은 황토를 가득 품고 흘러내린다.
사막의 가운데를 흐르는 것 같은 황하의 양안은 황량 그 자체이다.
사람이 일부러 쌓은 것 같은 황토 퇴적물이 이어진 강가에 이따금 나타나는 푸른 숲은 나무 서너 그루에 운동장만한 풀밭이 전부이다.
소와 말이 풀을 뜯고 바위산 언덕으로 양떼가 붙어 노는 걸 보아 인가가 있음 직하다. 자연환경만 보아도 여기 사는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7. 병령사
보트를 탄지 두어 시간이 지나면 장가계나 계림의 그것과 닮은 기묘한 벼랑들이 강가에 우뚝우뚝 솟아 있는 곳이 나오는데 여기가 병령사 부두이다.
선창의 계단은 경사가 심한데도 발 디딜 데가 제대로 없어 불편하다.
헐벗은 아이들이 손을 벌리거나 조악한 물건을 사라고 들이민다.
사람들이 기묘한 바위 경치에 넋을 잃고 사진을 찍느라 한 동안 법석이다.
지금은 황량하고 궁벽한 벽촌이지만 옛날에는 토번(티벳)등 외적의 침입을 막는 보루였으므로 사람들이 끓고 전쟁의 무사안녕을 빌기 위하여 불교가 성행하였다.
'병령'은 티벳어의 음역으로 '십만불' 즉 많은 부처를 뜻한다.
200 여개의 석굴에 600 이 넘는 석조 불상과 벽화 등이 2 km 넘게 산재한 불교 미술의 보고이다. 비록 중국 3 대 석굴( 돈황의 막고굴, 운강 석굴, 용문 석굴)에 속하지는 않지만 하루가 걸려도 다 못 볼 작품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위와 일정을 핑계로 자매봉 아래 석조 대불과 따로 모신 와불만 돌아보고 다시 돌아간다.
상반신은 바위로 하반신은 진흙으로 만든 커다란 부처는 그런 대중들의 무관심도 관대하게 받아들이며 한 자리에 천 년을 넘게 앉아서 미소를 띄울 뿐이다.
먼지 쌓인 나무계단과 기와지붕 사이로 산새들이 제 집처럼 날아다닌다.
8. 난주역
중국 사람들의 장거리 주요 교통수단은 열차이다.
넓은 대륙 곳곳으로 거미줄 같은 철로망이 연결되어 있고 최근에는 청해성 서녕에서 티벳의 라싸를 잇는 해발 5 천 미터가 넘는 하늘 열차 칭짱철로도 개통되었다.
기차(汽車)는 '자동차'를 가리키고 열차는 화차(火車)-훠처-라고 한다.
역(驛)이란 말도 쓰지 않고 참(站)이라고 부른다.
기차역은 화차참(火車站)-훠처짠-이다.
난주역의 일등실 대합실은 넓고 안락하다.
커다란 소파와 넓은 홀은 복작거리는 삼등 열차 대합실에 비하면 호텔로비 수준이다.
특히 Y,T,N 등 고급열차(주로 장거리 침대열차)는 객실내부도 비교적 정갈하고 쾌적하다.
침대열차도 등급이 있는데 4인1실의 침대칸은 6인 침대칸 요금의 두 배를 받는다.
객차마다 9 개의 방이 있고 세면실과 화장실이 따로 갖추어져 있으며 실내에는 슬리퍼와 옷걸이 등이 비치되어 있고 침구도 깨끗한 편이다.
36 명 승객의 목적지를 파악해 두고 승무원이 도착역 30 분 전에 일일이 깨워주므로 안심하고 잠들어도 좋다.
거의 100 km 정도 가야 나오는 역에 도착하면 승무원들이 화장실과 객차 사이의 문을 모두 잠그고 객차를 향하여 일열로 도열한다.
차장의 깃발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그들의 동작은 군대의 사열과 흡사하다.
실크로드 열차 여행은 서안을 출발하여 보계를 지나 감숙성에 접어들어서 천수, 장액, 무위, 금창, 주천, 가욕관, 옥문관, 돈황을 거쳐 신강의 투르판, 하미, 우루무치, 선선, 카스 까지 가는 것이 정통코스이나 우리는 중간 중간에 열차를 이용하여 천수의 맥적산 석굴과 양관의 토성을 지나쳐 올 수 밖에 없었다.
9. 가욕관시
길이가 3,000 km 를 넘는 눈 덮힌 기련산맥을 끼고 이어진 좁은 평지가 실크로드에서 말하는 하서회랑 또는 하서주랑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기차는 시속 120 km 의 속도로 쉬임없이 달려 다음 날 아침 우리를 가욕관역에 내려 주고 마지막 역인 옥문관을 향해 달아났다.
관(關)은 장성의 '문'으로 주요한 요새였다.
산동의 산해관, 옥문관, 양관 등 주요 지점마다 관문을 설치하여 통행을 감독하고 적의 침입에 대비한 군대가 주둔하였다.
변방의 끝자락 가욕관은 인근의 철광과 탄광 등으로 인하여 많은 노동자가 일하는 중소규모의 도시로 변모하여 시내가 제법 번듯하고 새로 지은 아파트들이 한창 공사 중이었다.
시내 중심에는 유명한 답마비연상이 우뚝 솟아 있다.
한나라 장건이 서역에서 얻어온 피땀을 흘린다는 하루에 천리를 가는 준마이다.
나는 제비를 발굽아래 짓밟고 달리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다.
이 동상은 출토된 이래 유명한 문화재가 되어 곳곳의 명승지에서 크고 작은 모조품이 팔리고 있다.
새벽에 지나쳐 온 주천(酒泉)은 흉노를 정벌한 젊은 장군 곽거병이 궁중에서 하사한 술을 부하들과 나누어 마시려고 부었다는 샘이 남아있다.
그러나 그 이름을 딴 주천명주는 우리 입맛에는 별로이다.
10. 가욕관 장성
시내에서 5 km 정도 떨어진 교외에 가욕관 장성이 있다.
흙으로 쌓은 성의 입구에는 인공호수가 있고 풀밭에는 사슴들이 돌아다닌다.
허허벌판 사막에 무슨 성을 이렇게 높고 튼튼하게 쌓았을까?
중국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북적(北狄)-북방 유목민인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이다.
한, 진나라 때에는 흉노라 불리웠고 수, 당시대에는 '돌궐'로 알려진 이들은 아무런 역사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각국의 기록에서 그들의 편린을 찾아볼 수 있다.
실크로드의 길목에 자리잡아 상권을 차지하여 부를 쌓고 기마병을 길러 이웃나라를 침략하였다.
사막에서 바위를 구하기 어려우므로 멀리 떨어진 흑산 기슭의 암석을 캐어다가 기초를 쌓고 진흙을 다져 쌓은 성은 수 천년 세월을 견디어 아직도 건재하다.
일정한 구역마다 책임제를 실시하여 벽돌 하나라도 구멍이 나면 본인은 물론 전 가족을 몰살하였다니......
이곳을 나가면 바로 안서로 연결되어 서역 땅의 시발점이 된다.
상인과 군대, 가족으로 분장한 사람들이 말과 낙타를 타고 성을 빠져 나가서 이별하는 장면을 재현한다.
구슬픈 피리소리는 애간장을 끊어도 무심한 사람들은 낙타 사진 찍느라고 정신이 없다.
11. 장성 박물관
가욕관 안에는 장성 박물관이 있다.
중국 사람들은 줄여서 쓰는 것을 좋아한다.
만리장성-장성, 진시황 병마용-진용, 자은사 대안탑-안탑, 당 삼채색 도자기-당삼채 등. 간단해서 좋다.
진 이전의 장성들을 시황제 때 이은 것을 시발로 여러 왕조를 거쳐 백성들을 동원하여 끊임없는 대공사를 벌였다.
흉노족의 말들이 뛰어 넘을 수 없게 한 것이 주 목적이다.
이런 중국인들을 위대하다 해야 할까? 무모하다 해야 할까?
박물관 안팎에는 가욕관의 역사와 변천과정을 알려주는 모형과 유물들이 진열장을 채우고 있다.
한나라 황실의 궁녀로 뽑혔다가 화공들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아 그들이 초상화를 못생기게 그린 탓에 흉노로 시집간 중국 4 대 미녀 중의 한 사람 왕소군도 이 길을 통해 나갔으리라.
이별할 때 가지를 꺾어 잎을 따서 던지던 버드나무도 새벽 비 내리던 주막집도 찾을 길 없지만 시불 왕유가 친구 원이사를 안서로 보내며 지은 ‘송원이사 안서’ 의 구절이 떠오른다.
서출양관무고인-서쪽으로 양관을 나가면 옛 친구가 없다-
성벽 너머 기련산을 따라 달리는 우루무치행 기차가 보일 뿐 이별을 슬퍼하는 것은 가욕관 안의 격석연명(擊石燕鳴) 둥근 돌만이 먼저 간 수컷을 그리워하며 따라 죽은 암컷 제비의 울음으로 남아 있다.
12. 현벽장성
가욕관 인근 흑산 기슭에 쌓은 성벽은 명나라 때 세워진 것이며 45 도가 넘는 경사 위에 세워져 허공에 걸려있는 것 같다고 하여 ‘현벽장성’이라 부른다.
성벽 안은 돌산이요 바깥은 고비사막이라 성위에 올라 사막을 쳐다 보노라면 이런 곳에 무슨 외적이 침입을 하였을까 의심이 들 만하다.
진흙 벽돌로 쌓은 성벽은 산허리를 따라 이어지며 요소마다 봉수대가 높이 솟아 있어 서쪽의 팔달령이라 부르기도 한다.
장성의 입구 평지에는 서역을 개척한 사람들의 석상이 있는데 현장과 장건, 곽거병과 고선지, 손오공과 저팔계 사오정까지 만들어 세웠다.
우리도 산 정상까지 가 보고 싶었지만 우선 더위가 가로막고 나이와 체력이 양쪽 발목을 붙잡은 위에 촉박한 시간이 말려서 실행에 옮기기가 어려웠다.
대신 가까운 성벽 위에 올라 보는 걸로 만족하고 천막 그늘 아래에서 파는 수박을 사먹었다. 비록 냉장고에 저장을 하지 않아 거죽이 따뜻할 정도였지만 호박같이 길쭉한 수박은 보기보다 달고 시원하여 우리 일행 외에도 수 십명의 중국 군인들이 같이 둘러 앉아 잠시 더위를 식혔다.
13. 돈황가는 길
우리는 하서회랑(하서주랑)을 따라 돈황으로 향하였다.
허시저우랑(河西走廊)은 감숙성의 성도 란저우(蘭州)에서 우웨이(武威), 장예(張掖), 지우취앤(酒泉)을 거쳐 돈황(敦煌)으로 길게 이어지는, 치리앤(祁連)산맥의 북쪽과 허리산(合黎山), 롱서우산(龍首山)의 남쪽 사이에 동서로 1000여㎞의 기나긴 협곡 길이다. 이 길은 실크로드에서 가장 중요한 통로 가운데 하나로, 황허(黃河)의 서쪽에 있는 긴 복도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동ㆍ서양 문화 교류의 중요한 통로=허시저우랑을 잇는 유서 깊은 도시에는 우웨이(武威), 장이예(張掖), 지우취앤(酒泉) 등이 있다. 그 중 우웨이는 중국이 자랑하는, 일명 나는 제비보다 빠르다는 동분마(銅奔馬, 마답비연(馬踏飛燕)이라고도 함. 높이 35㎝, 길이 40㎝. 1969년 중국이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방공호를 파던 중 지하 묘실에서 발견)가 출토된 곳이다. 동분마는 한 마리 말이 머리를 들고 꼬리를 휘날리며 뒷발로 나는 제비를 밟고 나는 듯 달리는 모습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발견된 예가 없다. 미국과 중국의 국교수립 때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복제품을 선물할 정도로 예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고 있다.
장이예는 마르코 폴로가 1년 간 머물렀다고 기록한 곳이다. 마르코 폴로는 당시 감주(甘州)였던 이곳을 이렇게 묘사했다. `주민들은 우상숭배자이지만 마호메트를 숭배하는 사람도 있다. 기독교들도 많은데 이 도시에 세 개의 크고 아름다운 교회가 있다. 우상숭배자들은 많은 사원과 수도원을 갖고 있고 엄청나게 많은 우상을 모신다.'
여기서 우상 숭배자는 불교도를 의미한다. 그의 기록으로 볼 때 동서양의 종교가 서로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허시저우랑이 동서양의 문화를 수용하는 중요한 통로였음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지우취앤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도 매우 흥미롭다. 한나라에 곽거병이란 장군이 있었다. 그는 어릴 때 매우 몸이 약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가 병이 물러가라는 의미에서 이름을 거병이라 지었다 한다. 그는 어머니의 바람대로 건강하게 성장해 한나라의 장군이 되어 흉노와의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병했지만 기나긴 행군에 지친 군사들의 사기는 형편없었다. 이 때 황제가 곽 장군을 위로하기 위해 한 병의 술을 보냈다. 곽 장군은 모든 병사들을 사막의 오아시스로 모이게 하고는 황제가 보낸 술을 모두 물에 부었다. 그리고는 병사들에게 황제가 보낸 술을 마시라고 했다. 그것은 한 병의 술을 부대원 전체가 맛볼 수 있는, 떨어진 사기를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 후 사람들은 이 도시를 `술의 샘'이란 뜻인 지우취앤(酒泉)이라 불렀다.
이러한 고대도시들의 역사와 유래보다 더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가 있다. 허시저우랑은 중국 4대 미인 중의 하나인 왕소군(王昭君)이 흉노 왕에게 시집가던 길이라는 것이다. 왕소군은 한나라 원제(元帝)의 궁녀였는데 기원전 33년 흉노와의 화친을 위해 흉노 왕에게 보내졌다. 궁녀로 들어와 황제의 눈에 한 번도 들지 못했던 왕소군이 흉노 왕에게 보내지는 과정은 그야말로 소설이다. 흉노 왕이 한의 원제를 만나 한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고 하자 당시 흉노보다 힘이 약했던 한으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한나라로서는 공주를 흉노 왕에게 시집보낸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 때 마침 흉노 왕의 눈에 연회에서 시중들던 한 여인이 들어왔으니 그녀가 바로 왕소군이다. 흉노왕은 왕소군에게 반하여 공주가 아니고 궁녀라도 좋다고 제안하자 원제는 마음에 드는 궁녀를 고르도록 했다.
흉노 왕이 가리킨 여인을 바라본 원제도 왕소군의 미모에 빠져버렸다. 원제는 약속을 지키는 대신 혼수를 준비할 3일간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왕소군을 자신의 처소로 불러 들였다. 또한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린 화공 모연수(毛延壽)를 참형에 처했다고 한다. 당시 화공 모연수는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려 황제가 맘에 드는 궁녀를 고르도록 도왔다. 그런데 모연수가 뇌물을 주지 않는 왕소군을 밉게 그려서 원제가 왕소군을 만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는 황제를 기만한 죄에 해당했던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늙은 흉노 왕을 따라 허시저우랑을 지나가던 꽃다운 18세의 왕소군이 고향생각을 하며 비파를 뜯었더니, 날아가는 기러기가 미색에 빠져 날개 짓을 잊는 바람에 떨어졌다고 한다. 그 후로 사람들은 왕소군을 낙안(落雁)이라고 불렀다. 왕소군은 흉노 왕에게 시집가 아이를 낳고 살다가 흉노 왕이 죽자 당시 흉노족의 풍습에 따라 다음 왕이 된 그의 적자(嫡子)에게 다시 시집을 가서 또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상당부분은 허구이겠지만 왕소군이 살아 있던 시기에는 실제로 전쟁이 없었다고 하니 흉노의 두 왕이 그녀의 포로가 되었던 것은 아닌지….
人在江湖, 誰能無有令人鼻酸之事!
사람이 한 세상 살아가는 데 뉘라서 코 끝 찡하게 만들 일이 없을소냐!
14. 돈황
중앙아시아에 있는 대 사막 및 반(半)사막지역 - 몽골과 중국 네이멍구 자치구[內蒙古 自治區]의 넓은 땅을 가로질러 뻗어 있는 사막을 고비(몽골어 'gobi'에서 나온 말로 '물이 없는 곳'이라는 뜻) 사막이라고 하는데 동서 방향으로 뻗어 있고 북쪽은 오목한데, 활처럼 생긴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길이만도 1600 km 가 넘는다.
고비는 돌과 자갈, 바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에 반해서 명사산과 같이 고운 모래로 되어 움직이는 사막을 유사라고 한다.
북쪽으로 알타이 산맥, 서쪽으로 톈산 산맥[天山山脈] 남쪽으로 아얼진[阿爾金]·베이산[北山]·인산[陰山] 산맥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돈황은 빛나는 도시라는 뜻을 가졌다.
예전부터 동서양 문화가 교류하던 고장이었고 불교 외 이슬람교 등 여러 종교가 함께 번성하던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도시였으나 지금은 인근 안서로 철로가 지나가는 바람에 규모가 많이 줄었다.
명사산과 월아천 외에도 이곳 최대의 볼거리인 막고굴이 있어 시즌에는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겨울(11-4)에는 영하 수 십도로 기온이 내려가므로 주민들도 외래인들도 꼼짝을 않는다.
15. 명사산
돈황에서 막고굴을 제외하고 가장 유명한 곳이 명사산이다.
말 그대로 모래가 바람에 이동하면서 ‘우는’ 곳이다.
그러나 실제로 모래가 매일 우는 것이 아니고 특수한 울림-세찬 바람이나 진동 등-이 있을 때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그 때는 수 km 떨어진 돈황 시내에 까지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고운 모래는 수많은 사람들과 낙타, 전동차들이 자국을 남기지만 밤 동안 깨끗이 지워져 아침에는 늘 새로운 모습이다.
입장료를 내고 공원에 들어서면 수많은 낙타 떼가 뜨거운 모래밭에 꿇어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낙타는 매우 순한 짐승으로 사람의 말을 잘 듣는다고 한다. 조용한 열사의 사막풍경을 기대하고 왔던 사람들은 시장바닥처럼 들끓는 사람들의 소리와 낙타 울음에 경비행기, 사막 오토바이가 달리며 내는 굉음까지 사방에서 그치지 않아 오히려 귀가 먹먹해 질 지경이다. 낙타를 끄는 중국 사람들의 소리는 더 높아서 싸우는 것 같다.
16. 월아천
월아천은 명사산에 있는 오아시스 이름이다.
월아천(月牙泉)의 월아는 초생달을 말한다.
달은 밝을 량을 덧붙여 월량(月亮)이라고 한다.
명사산 중턱에 기어올라 모래썰매를 한번씩 타고 내려와 오아시스 구경을 하였다.
이 샘은 한번도 바닥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원래 수심은 아주 깊어서 8 m에 달하였으나 지금은 많이 줄었다고 한다.
호수 옆의 누각은 최근 새로 지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주변경관과 잘 어울린다.
부용을 비롯한 달맞이 꽃, 메꽃들이 피어있고 전각 이곳저곳에 일필휘지로 걸어둔
근사한 편액이 많다.
이곳의 일몰이 아주 멋지다고하나 일정이 맞지 않아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서야했다.
17. 돈황산장
돈황산장은 1995 년 개관한 4 성급 호텔이다.
유명한 명사산 입구에 자리잡고 있어 새벽녘에 출근하는 낙타 방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중국 강택민 주석이 묵어 가기도 한 이 호텔은 3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고 땅이 넓어서인지 고층으로 짓지 아니하고 한나라 시대의 황토성을 본 떠 만든 외곽으로 3층만 올렸는데 층마다 100 여 개가 넘는 객실이 있다.
별관에 있는 공연장에서는 밤마다 민속쇼를 공연하는데 주제는 막고굴의 비천이다.
신명나는 두타와 손나잇 반주에 맞추어 춤추는 긴 속눈썹의 위그루 무희와 애간장을 끊는 얼후 소리가 별빛 쏟아지는 밤 하늘에 퍼져간다.
연회장 2 층에서는 양고기 바베큐와 낙타 발요리, 신강 빤미엔(볶음국수)등을 맛 볼 수 있다.
로비에는 막고굴의 벽화 모사품이 걸려 있어 구경할 만하다.
돈황 시내는 좁아서 한나절이면 걸어서 대충 돌아 볼 수 있는 규모이다.
18. 막고굴
불교가 인도에서 히말라야산맥을 넘지 못하고 멀리 돌아서 중국서역을 따라 전래되어 왔기 때문에 돈황이 불교 유적지로 이름이 났다. 특히 돈황 막고굴(漠高窟)은 중국 3대 석굴(낙양의 용문석굴, 대동의 운강석굴)중의 하나이며 세계문화유산으로서 불상, 벽화 등이 매우 유명하며 막고굴 제17호 굴에서 1900년에 발견된 엄청난 서류뭉치들은 이때 이곳에 들른 외국 탐험대의 수중으로 넘어가 지금은 영국, 프랑스 등의 박물관, 미술관 이나 도서관에 보관되고 있다.
돈황 막고굴은 4세기 부터 14세기 까지 굴착되었다고 한다. 특히 불교의 전성기인 당나라 시대에 230개 이상의 굴을 개착하였다고 한다. 북량(北凉), 북위, 서위, 북조, 수, 당, 오대, 원대의 작품이다. 명사산 동쪽의 모래자갈과 진흙으로 이루어진 역암(礫岩)의 절벽에 굴착한 것으로 낙양의 바위에 굴착한 용문석굴과는 달리 흙으로 만든 불상 등과 굴의 벽화로 유명하다.
10 여년 전만해도 100 여개의 굴을 개방하였지만 지금은 훼손을 우려하여 불과 10 개 정도만 개방하고 그나마 카메라는 소지가 원천적으로 금지되며 안내자의 손전등 불빛으로만 볼 수 있다.
입구에 장경동의 희귀한 고문서를 팔아넘긴 도사 원록의 상과 부도 등이 있고 수십미터가 넘는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5층 누각이 바위굴 입구에 우뚝 섰다.
굴마다 사연이 있고 천년을 넘어서도 찬란한 빛을 잃지 않은 벽화에 대한 설명은 중국인 돈황학자가 서툰 우리 말로 재미있게 이야기하여 주었다.
무지한 서양인들의 손길에서 겨우 벗어난 벽화와 불상들은 매캐한 먼지와 곰팡내 나는 어두운 굴속에서 처량하게 앉아 있었다.
힘없고 가난한 나라들의 보물을 제멋대로 약탈하여 제나라 박물관을 가득 채우고 웃음 짓는 독일, 영국, 프랑스, 일본......이런 종자들은 머리 속에 무엇이 들어앉아 있을까?
19. 유원역
유원(柳園)은 붉은 버드나무가 많아서 이름을 지었으나 지금은 버드나무는 한 그루도 보이지 않고 자갈, 모래로 뒤덮힌 황량한 곳이다.
최근 돈황역이 새로 생겼으나 아직 대부분의 신강행 열차는 이곳을 경유하므로 사막길을 두 시간 넘게 걸려 이동해야 한다.
거의 직선도로로 이어진 길 양쪽은 전봇대와 도랑이 보일 뿐으로 군데군데 노천에 쌓인 검은 석탄 더미와 탄광이 보인다.
중국영화 ‘맹정(盲井)’을 보면 열악한 탄광생활을 엿볼 수 있는데 정말 사람이 살고 생활하는 곳이라 믿기 힘들 정도이다. 영화의 장면과 비슷한 움막과 설비가 가끔 지나쳐 간다.
유원 읍내는 50 년대 우리 시골 면소재지 정도로 후지다.
포장이 다 되지 않은 질척거리는 도로, 먼지가 첩첩히 쌓인 건물들, 후줄근한 복장으로 지나는 사람들, 조악한 물건을 파는 손바닥만한 가게, 거기다 가랑비까지.
그래도 이곳 사람들은 금쪽같은 비라며 우산도 받치지 않고 그대로 맞고 돌아다닌다.
종점에서 탄 열차는 비교적 깨끗하였으나 우리 일행을 두 칸으로 나뉘어 배정하여 안경을 쓴 여승무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붙여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녀가 빠른 말과 심한 사투리로 대답하는데 나에게는 완전 외국어 수준이라 반도 알아듣지 못하였다.
다시 천천히 말하라 하니 손짓 발짓과 함께 전한 내용은 ‘모두 단체라 바꾸어 줄 수는 없다. 안심하고 자라. 내일 투르판 역에 도착하면 내가 책임지고 깨워 주겠다.’이런 것이었다.
덕분에 친구와 함께 처음 보는 중국인 남녀와 한방에서 잤다.
그들도 호북성에서 온 중국 팀의 인솔자였다.
20. 투르판
신강 위그루 자치주는 줄여서 신강(新疆)-신짱-이라 부른다.
강은 지경 강이니 새로 편입된 강역이란 뜻이다.
그런데 가이드는 ‘강’을 풀이하여 천산산맥과 곤륜산맥, 타클라마칸 사막 등을 나타낸다고 한다. 감숙에서 신강으로 들어서니 지명부터 서역 이방임을 나타내듯 투르판, 우루무치, 카스 등 도무지 중국어 같지 않다.
본래 터키 계통인 코가 높고 눈자위가 움푹 패인 이국적인 풍모를 한 위그루 족(회족)은 얼굴 생김생김이 미남 미녀 형이다. 자기 문자와 언어를 가진 잘 생긴 그들은 중국 한족의 총칼과 경제력, 문화와 절대 우위의 인구 등에 눌려 가난하고 구차한 살림살이가 역력하다. 도시 가운데로 당나귀 마차가 다니고 그들은 쓰러져 가는 흙벽돌 움막에서 개미처럼 살고 있다.
호텔 앞에서 살펴본 이들 동네는 더욱 열악하였는데 벗은 채로 길바닥에서 자거나 쓰레기 무더기 옆에서 태연하게 낭(회족의 주식인 빵)을 굽고 있었다.
깨어진 창 너머로 바라본 젊은 내외의 살림방에는 옷걸이 하나 없이 낡은 가방 하나가 전부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부지런하여 달도 지지 않은 새벽에 사원의 기도소리가 낭랑하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었다. 투르판은 위그루어로 ‘낮은 땅’이란 뜻이라고 한다.
해발이 -100 m 정도라고 하니 사막 가운데 움푹 꺼진 정말 더운 곳이다.
최고 기온이 48 도에 이르고 밤에는 영하 20 도까지 내려가는 일교차가 큰 정도가 아니라 극과 극의 도시이다.
21. 교하고성
중국 사람들이 ‘고성’이라고 부르는 곳은 2 가지 종류가 있다.
고성(故城)-꾸청-은 옛날 성이었으나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교하고성, 고창고성 같은 곳을 이르고 고성(古城)은 지금도 사람이 생활하는 곳을 말한다. 이런 동네는 운남의 여강고성, 대리고성, 산서의 평요고성 등이 있다.
투르판의 교하고성은 흙으로 만든 벽돌로 쌓은 가옥과 담장의 형태가 일부 남아있을 뿐으로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그냥 흙무더기처럼 보인다.
교하는 도랑물 같은 좁고 얕은 시내를 강이라고 이름 붙여 두강이 양쪽으로 흐르는 언덕 위에 자리 잡았다.
주위는 오아시스라 푸른 버드나무 들이 군데군데 자라는데 높은 구릉 위에는 포도건조장이 눈에 뜨인다. 날은 덥고 그늘은 없는지라 한 바퀴 돌아오는데 등줄기에 땀이 폭포를 이룬다.
옛사람들이 개미처럼 굴집을 파고 살면서 대자대비 부처님 공덕을 기렸을 고성에는 관람객들을 위한 나무도로가 설치되어 있으나 사람들이 예사로 길 밖에 나가 벽도 만지고 흙담 위에 주저앉아 귀중한 유산을 함부로 대하였다.
22. 카레즈
사막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물을 구했을까?
해답은 천산(天山)의 눈 녹은 물이다.
이를 수원으로 해서 생활용수와 농업용수로 끌어다 쓴 것이다.
투르판 시내에만도 지하에 파 놓은 수로 ‘카레즈’가 1,000 군데가 넘고 아직도 건재하여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지표로 흐르는 물은 긴 세월 땅속에서 흙속의 염분 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대로 쓸 수는 없고 지하를 흘러 걸러져야 비로소 식수로 쓸 수 있다.
장비와 기술이 조악하던 까마득한 옛날에 불과 3-5 명의 인원이 몇 개월에서 몇 년까지 걸리는 대공사를 벌여 땅속에 거미줄 같은 수로를 파 놓았다.
한서나 사기 등에 이 카레즈의 이야기가 언급된 것을 보아서 2-3,000 년 전에도 이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만리장성과 대운하 와 더불어 고대 중국 3 대 공사에 꼽히는 카레즈는 박물관으로 꾸며 놓아 사람들이 직접 들어가서 지하로 흐르는 맑은 물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정말 놀라운 지혜가 아닐 수 없다.
23. 소공탑
투르판 동남쪽 2 km 지점에 산이 별로 없는 신강지역에서 가장 높다는 소공탑이 있다.
멀리서도 잘 보이는 이탑은 높이가 44 m로 ‘사막의 등대’라고 불린다.
조국 위그루를 배신하고 청 왕조에게 나라를 바쳐 왕이 된 아버지를 기리기 위하여 아들이 쌓은 탑이다.
흙이 80 %이고 나머지 20 %는 달걀, 꿀, 찹쌀 등으로 접착제를 만들어 세웠다.
마름모, 삼각형 등 각종 무늬가 선명하고 아름다우며 탑 안으로 77 개의 계단이 있어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다.
역시 흙으로 만든 사원 옆으로 석상과 묘비, 포도 넝쿨이 즐비하다.
멀리 언덕 아래 구멍이 뚫린 포도 건조장이 여기저기 눈에 뜨인다.
24. 화염산
글자 그대로 붉은 적갈색 민둥산 ‘불꽃산’이다.
투르판 분지 북부에 자리 잡은 동서로 100 km, 남북으로 10 km 에 걸쳐 뻗어 있는 이 산은 나무는 물론 풀 한 포기 자라지 않고 여름철 기온이 50 도에 육박하며 지표면의 온도는 70 도를 넘는다.
입구에 커다란 온도계가 설치되어 있고 서유기의 한 장면을 재현해 놓은 조각상이 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막 한 가운데 바위산에다 손오공이 우마왕과 나찰녀를 상대로 싸우기 위해 철선공주의 파초선을 빌려 불을 껐다는 이야기를 접목하여 입장료를 챙기는 중국인들, 기발한 그들의 상술에 기가 막힐 뿐이다.
25. 베제크리크 천불동
위구르어로 아름답다는 뜻을 지닌 베제크리크 천불동은 화염산의 무투계곡에 위치해 있으며 83개의 동굴로 구성돼 있다. 이 중 40개 동굴에 프레스코화(안료로 그리는 벽화의 일종)로 불상이 그려져 있었으나 이슬람 교도, 독일 탐사대와 문화혁명 때문에 가차 없이 훼손되어 지금은 겉모습만 남아있다. 그나마 독일 탐사대가 잘라간 프레스코화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베를린 미술관이 폭격으로 유실돼 불화는 없어지고 복사판만 벽에 붙어있다고 한다
이곳 석굴의 수는 당초 83개 였는데 지금은 57개만 남아 있다. 이곳 주민들이 이슬람으로 개종됨에 따라 우상 숭배 금지 때문에 무슬림들이 불상이나 벽화를 훼손하였으며 또한 1900년대 초 독일의 르콕 등이 여러 차례에 걸쳐 벽화를 뜯어가 지금은 거의 다 훼손되었고 우리가 들어가 본 굴들에도 불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벽화만 부분적으로 일부 남아 있을 뿐이다.
실크로드의 악마들이란 책자에는 탐험대라는 이름의 악마들이 소개 되는데 그 중 일본의 오타니 이야기도 나온다. 이 곳 천불동 및 다른 지역의 유물들도 오타니에게 도굴되어 우리나라에 1/3정도 있다고 한다
오타니 탐험대가 약탈해간 유물들은 얼마 후 오타니가 빚더미에 앉게 되자 일본의 대장상을 지낸 사람에게 팔렸는데 그는 한국 내의 채광권을 조건으로 조선 총독부에 기증을 하였다. 덕분에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실크로드의 유물관이 생겼다. 이름 있는 유물들을 보러 유적지에 들렸을 때, 그곳에서 만나는 선인들의 숨결이 심하게 파괴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심한 분노를 느낀다. 오랜 세월이 흘러 풍화 등에 의하여 자연적으로 훼손된 것에도 관리의 소홀함을 말할진 데 하물며 인간이 일부러 자행한 유물 파괴는 정말로 한심한 반문명적 작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반달리즘, 즉 문명파괴 행위라고 한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이 일제시대, 그 무식한 일본 놈들의 작태가 생각나는 대목이었다. 허울 좋게도 발굴이니, 보존이니 하지만 유물은 원래 있던 자리. 그곳에 있어야만 제 몫을 다 하는 줄을 왜 모른단 말인가...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보관하고 있는 각국의 유물은 본국에 모두 돌려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주인이 분명한 남의 것을 뺏거나 주워서 가져다 놓는 것은 도둑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26. 고창고성
투르판 동남쪽 46 km 지점의 화염산 자락에 있는 옛 고창국의 성터이다.
고창국은 499 년 한나라에서 망명한 국문태가 세운 나라로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이었던 부국이었다.
지금은 흙 무더기만 남았지만 불교, 마니교,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등 여러 종교가 함께 번성하던 곳이었다.
고창국의 폐허는 전쟁에 의한 것도 화재 때문도 아닌 인재로 발생하였다.
나라가 망하자 인근 주민들이 거름으로 쓰기 위해 건물과 탑 등을 모두 뜯어 갔다.
흙벽돌을 굳히기 위해 넣어 둔 짚이 비료로 쓰인 것이다.
아직도 그 시절의 짚 부스러기가 벽돌 잔해 속에 박혀 있다.
날은 덥고 나무 그늘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성터는 푸른 하늘과 황토색 두 가지 만으로 다가온다.
성의 중심은 1 km 가 넘어 입구에서 조그만 당나귀가 끄는 마차를 타고 들어간다.
불쌍한 나귀는 십여 명의 관광객을 싣고 흙먼지 이는 더운 사막 길을 쉴 새 없이 오고 갔지만 조금 머뭇거리기라도 하면 사정없이 채찍이 떨어진다.
눈꼽이 끼고 비루먹은 나귀는 잠시 쉬는 동안 먼지 쌓인 여물 통 속의 바짝 마른 옥수수 줄기를 먹고 있었다.
27. 포도구
투르판은 습기가 없는 사막지대이고 날이 너무 더워 벌레가 거의 없다.
한 여름에 벗고 아무데나 잘 수 있는 것도 파리와 모기 등이 없기 때문이다.
풍부한 일조량과 해충이 없는 환경으로 농약을 쓰지 않는 무공해 청정지역이라 여러 작물을 심는데 그 중에서 포도가 가장 유명하다.
포도 외에 하미과라는 둥근 호박 같은 참외를 파는데 맛이 달고 시원하여 잘 익은 것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꺼내 먹으면 정말 꿀맛이다.
값 또한 무척 싸서 누구나 쉽게 사 먹을 수 있다.
포도는 우리가 흔히 먹는 보라색의 둥근 식용포도 캠벨 외에 연두색, 녹색, 분홍색 등 여러 가지 색깔과 둥근 것, 길쭉한 것, 콩알만 한 것 등 크기도 각가지이다.
거리 곳곳에 과일가게가 지천인데 건포도를 곡물가게처럼 그릇에 담아 놓고 무게를 달아 판다.
그러나 위그루족은 회교 율법에 따라 술을 금하기 때문에 포도주는 그리 많지 않다. 관광객들을 농장에 불러 앉혀놓고 전통무용을 보여주고 포도 맛을 보이면서 사라고 권하는데 사 주지 않을 수가 없다. 당연히 시장 가격보다 훨씬 비싸고 차액은 기사, 가이드, 관광회사, 농장주가 나누어 가진다.
살구, 무화과, 망고 등도 생으로 또는 말려서 파는데 무엇 하나 설탕에 절인 것처럼 달지 않은 것이 없다.
28. 아스타나 고분군
고창고성에서 4 km 정도 떨어진 곳에 당대의 고분이 모여 있다.
복희와 여와가 사람과 뱀의 몸통을 하고 선 조각 오른 쪽으로 수많은 무덤들이 있는데 이 중 두 곳은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황토 토굴 같은 묘실 입구는 파낼 때 모습 그대로 계단이 있는 데 안쪽에는 미이라가 유리관 속에 누웠고 현실 벽에는 꽃과 나무, 글씨들이 보인다.
장소가 좁고 날은 더워 가이드가 해설하는 내용이 잘 들리지도 않는다.
한 무리의 서양인들이 (프랑스 사람들인 듯) 몰려 다닌다.
자기네 선조들이 이곳에서 도굴하고 약탈해 간 역사를 알고 온 것일까?
천년을 같은 곳에 누웠던 선인들의 혼백은 자기들의 안식처를 파괴하고 벽화를 뜯어내고 미이라 마저 들고 간 무지한 사람들의 손길을 저항 한 번 못하고 고스란히 뺏긴 채 누런 속살을 드러내고 열사의 하늘을 맴돌았다.
‘아스타나’는 위그루어로 ‘휴식’을 뜻한다니 쉴 자리마저 강탈 당한 셈이다.
29. 달판고성
투르판에서 우루무치까지는 고속도로가 놓여져 있다.
이 도로를 달리면 5 시간 정도 걸린다.
중국 사람들의 거리 개념으로는 눈 깜박할 사이에 닿는 ‘아주 가까운 거리’
(很近-흔찐)여서 엉덩이를 붙이지 않고 서서 갈 정도밖에 안된다.
투르판 초입에는 거의 무인 지경으로 험한 기슭에 날카로운 바위가 솟은 강물이 흐른다. 천산의 빙하가 녹은 탓으로 물빛은 우유 색을 띈다.
강 가운데(강이라고 해보아야 바지를 걷고 건너갈 정도이지만) 떠내려온 고목들이 군데군데 누워있다. 이런 황량한 지역을 지나면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푸른 들판이 나타난다. 여기가 달판이라는 곳인데 분지형 너른 초원에는 양과 소, 말들이 떼를 지어 풀을 뜯고 해바라기가 만발한 언덕 아래 그림 같은 마을들이 보인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 너른 풀밭과 호수, 병풍처럼 늘어선 흰 눈을 머리에 인 천산 줄기....정말 빼어난 경치이다.
이곳에 달판고성이라는 유적이 있다고 하나 우리는 위치도 모르고 지나치며 창밖으로 보이는 기막힌 경치에 입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다.
풀밭에 방사한 소 한 마리 값이 우리 돈으로 50 만원도 안된다니 우리 일행이 2 만원씩만 갹출하면 자연산 무공해 쇠고기를 싫도록 먹고도 남을 터인데......
30. 염호
달판고성 교외에 크고 넓은 호수가 있는데 소금 호수인 염호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흰 모래사장 같이 드넓게 펼쳐진 것이 모두 천연소금이다.
포크레인으로 퍼 담기만 하면 되는 양질의 무공해 소금밭으로 길이가 수 km 에 걸쳐 뻗어있어 부럽기 짝이 없다.
다행히 우리 기업(한화그룹)이 생산과 관리를 맡아 고물이 조금 떨어지는 것 같다.
신강은 소금 외에도 석탄, 석유, 철 등 지하자원의 매장량이 풍부하고 특히 원유는 조사한 것 만해도 수백억 배럴의 매장량을 갖고 있다.
전체의 5 %도 살피지 못했다니 앞으로 무엇이 더 나올지.....
염호 옆으로는 노풍구(老風區)-바람이 센 곳을 말함-에 중국 최대의 풍력발전소가 있다. 날개 길이만 15 m가 넘는 수 백개의 바람개비가 쉴 새 없이 돌며 전력을 생산하고 멀리 석유룰 퍼 담는 채유기가 줄을 이었고 커다란 덤프들이 꼬리를 물고 석탄을 나른다. 정말 하늘도 무심하다. 한 곳에다가 자원을 퍼붓다니......
31. 남산목장
신강(원래 이름은 신강 위그루족 자치구이다)의 성도는 우루무치이다.
우루무치(아름다운 목장)교외에 남산 목장이 있다.
길쭉한 이등변 삼각형 모양의 삼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넓은 초원과 구릉이 펼쳐진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새파란 풀밭 사이로 노란 해바라기, 붉은 자운영, 황금빛 호밀들이 섞여서 한 폭의 그림을 연출한다.
언덕에는 하얀 파오(천막집)들이 자리 잡고 카자흐족들이 말을 끌고 나와 서로 자기 말에 손님을 태우려고 채찍을 권한다.
30 분 가량 승마체험을 하고 파오 속에 들어가 우유차 한 잔과 치즈로 만든 과자를 얻어먹으며 구경을 하였다. 시간만 넉넉하다면 초보자도 쉽게 오를 수 있는 말을 타고 숲속을 천천히 돌아보면 좋으련만.....
32. 천산천지
우루무치에서 보자면 남산목장의 반대편에 천산이 있다.
천산은 중국의 스위스로 불리울 만큼 만년설과 호수로 이루어진 경치 좋은 곳이다.
장백산(백두산)천지와 구별하여 천산천지라 부른다.
백두산 천지는 화산의 분화구에 물이 고인 것이고 천산천지는 조산활동으로 생긴 골짜기에 천산의 눈 녹은 물이 고인 호수이다.
5,000 m 가 넘는 박격달봉 아래 호수까지 가려면 우루무치에서 2 시간, 다시 리프트로 5 분 여 를 올라서 전동차로 갈아타야 닿을 수 있다.
호수를 유람하는 배를 타고 카자흐족의 파오와 서왕묘 등을 구경하는데 1 시간 쯤 걸린다.
흰 눈에 덮힌 바위산과 녹색 전나무 숲, 푸른 물과 새파란 하늘은 좀처럼 보기 드문 풍광이다.
33. 바자르
우루무치 시내에는 이국적인 시장 ‘바자르’가 있다.
원래 유목민들의 물품 거래 장소였지만 지금은 관광객을 상대로 밤낮으로 문을 여는데 밤 풍경이 더 좋다.
미나렛 첨탑들이 하늘을 찌르고 까마득한 공중에는 줄을 타는 사나이가 장대 하나에 의지하고 건너 다녀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모인다.
양고기와 과일, 치즈와 요구르트 등 먹거리 외에도 실크, 가죽제품, 장신구가 골목마다 점포마다 들어차서 하루 종일 다녀도 다 못 볼만큼 가짓수와 양이 많다.
어디서나 그렇듯 항상 시간이 없고 좀도둑이 설쳐서 맘 놓고 구경하기 힘들다.
34. 우루무치
우루무치는 위그루어로 ‘아름다운 목장’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천산산맥의 타림분지와 준가얼 분지의 비옥한 오아시스에 자리잡은 이 도시는 한나라 시대부터 중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당 이후 위그루족이 들어와 살면서 그들의 세력권이 형성되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북경에서 우루무치까지 우편물이 도착하려면 45 일이 걸렸을 정도로 오지였으나 지금은 신강 자치구의 성도로 철도와 고속도로가 지나고 고층건물이 밀집한 중심지가 되었다.
시내는 보기보다 깨끗하고 위그루족이 많이 살고 있으나 중국의 대대적인 인구정책으로 한인을 대거 이주시켜 인구구성은 한족이 훨씬 많다.
저렴한 가격의 달고 맛있는 과일과 값싸고 질 좋은 양고기, 쇠고기에 한 병에 1 원하는 맥주까지..... 1 주일쯤 이곳에 머물면서 이것저것 골라 먹어가며 바자르에서 특산품을 고르는 재미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35. 홍산공원
우루무치 시내 중심가에 위치하며 동서로 길게 뻗은 형태의 산세를 가진 홍산은 주봉이 1,391m로 새벽과 저녁 무렵 암벽이 해에 비치면 붉게 빛난다 하여 홍산(紅山)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맹호와 같은 형세에 기세가 비범하고 붉은색의 가파른 암석들이 있어 호두산(虎頭山)이나 홍산취(紅山嘴)라고도 불리며 원래는 당대(唐代) 불교의 성지였으나 안타깝게도 그때의 문물과 유적이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홍산은 여러 해를 거쳐 녹화(綠化)를 이루어 울창해졌고, 산기슭에는 인민공원인
홍산공원이 조성 되었다.
공원 내에는 누각과 정자가 여러 채 있고, 동물원이나 찻집 등이 있어서 시민들의 휴식장소로 이용되고 있으며 근래에는 청대의 영웅인 임칙서(林則徐)의 돌조각상과 홍산의 녹화를 기념하는 조각이 각각 세워졌다. 또 1788년에 만들어진 9층의 진용탑(鎭龍塔)이 서 있으며 홍산 정상의 "원조루(遠眺樓)"에 오르면 시내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36. 신강 박물관
이슬람 사원을 연상하게 하는 산뜻한 외관을 가진 박물관이다.
1 층에는 신강 일대 유목민들의 공예품, 악기, 의류 등이 전시되어 있고 2 층부터는 촬영이 엄격히 금지된 채로 여러 구의 미이라가 보존되어 있다.
그 중에 ‘누란의 잠자는 미녀’는 봉숭아물을 들인 손톱과 얼굴의 문신, 웃음을 띄운 듯한 표정으로 ‘죽음의 모나리자’라고도 부른다.
3200 년 전 누란 왕국의 처녀가 금방이라도 살아 일어날 것 같이 누운 모습은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이 외에도 카자흐족의 젊은이를 비롯하여 고관대작들의 미이라가 수 천 년 세월을 건너 박물관을 찾은 관광객들을 맞아준다.
37. 비림 박물관
서안의 삼학가에 자리잡고 있는 섬서성 비림박물관 내에 위치하고 있다.
북송 철종 년간(1090)에 처음 지어져 현재까지 900 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비림은 현재 6개의 대형 진열실과 8개의 회랑 그리고 8개의 비정에 한대부터 청대까지 2300 여개의 비석을 수장하고 있으며 그 중 1000 여개를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전서, 예서, 초서, 행서 등의 각종 서체를 비교할 수 있으며 유명 서예가들의 필체를 직접 감상할 수 있다.
비림은 중국 고대 서예 예술의 보고이자 고대 문헌 서적과 비석의 조각,도안 등이 집대성되어 있는 곳으로 대외 문화 교류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유적지이다. 서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꼭 가 볼만 한 곳이다.
비림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는 세 개. 그 중 가운데 문은 과거 시험에 붙은 자만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지금은 과거시험이 없어서 그냥 가운데 문으로 들어간다.
서안 성안 남문 근처에 위치한 비림박물관은 근세 건축물이 아니고 송대 유교서원이었던 공자묘를 대신 사용하고 있다.
비림은 송나라의 여대충이 당나라의 개성석경이 황폐해짐을 안타깝게 여겨 안진경, 서호, 몽염 등 이름난 서가들의 서체가 담긴 돌비석을 세우고 보존한데서 시작되었다.
서안 부근에는 왕조의 도읍지로 많은 비석이 산재했으나 여러 난 때 소실되었고 이곳은 화를 비껴가는 바람에 보존이 가능하게 되었다.
38. 섬서성 역사박물관
중국의 전통건축의 미를 살린 섬서성 역사박물관은 서안 남쪽 교외 대자은사 대안탑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건축면적 5만 6천㎡의 넓은 부지에 개관된 섬서성 역사박물관은 고전과 현대의 건축예술을 한데 어울려 놓은 건축물로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대규모 박물관이다.
여섯 부분으로 이루어진 박물관은 주, 진, 한, 수, 시대의 역사
유물들을 중심으로 11만여 건에 이르는 진품 문물을 전시하고 있다. 이외에도 당대 능묘에서 출토된 40 여 폭의 채색벽화는 중국 미술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방문객들에게 백미로 꼽히고 있다.
첫댓글 실크로드 정말 신비스런 곳에 다녀오셨네요. 잘 감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