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는 마침내 한양을 조선의 도읍지로 결정한다.
태조 6권, 3년(1394) 8월 24일(신묘) 2번째기사는
"도평의사사에서 한양으로 도읍 정할 것을 아뢰니 가납하다"며
한양을 도읍지로 정한 이유로 한양이 국토의 중앙에 있고
한강이 갖고 있는 수운의 이점을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큰 덕과 신성한 공으로 천명을 받아
한 나라를 차지하시어 이미 또 제도를 고쳐서 만대의 국통(國統)을 세웠으니,
마땅히 도읍을 정하여 만세의 기초를 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윽이 한양을 보건대, 안팎 산수의 형세가 훌륭한 것은 옛날부터 이름난 것이요,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거리가 고르며 배와 수레도 통할 수 있으니,
여기에 영구히 도읍을 정하는 것이 하늘과 백성의 뜻에 맞을까 합니다.”
이에 앞서 태조 이성계 일행은 무막에 올라 도읍지 후보지를 살피고
남경의 행궁이 있는 오늘날 청와대 근처에서 머무르면서 한양을 살피게 된다.
태조 6권, 3년(1394) 8월 13일 1번째기사
'왕사 자초와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들어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다.'는 그 과정을 밝히고 있다.
임금이 〈남경 의〉 옛 궁궐터에 집터를 살피었는데, 산세를 관망(觀望)하다가 윤신달 등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떠냐?”
〈그가〉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 경내에서는 송경이 제일 좋고 여기가 다음가나, 한되는 바는 건방(乾方) 이 낮아서
물과 샘물이 마른 것뿐입니다.”
임금이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송경 인들 어찌 부족한 점이 없겠는가? 이제 이곳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 만한 곳이다.
더욱이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의〉 이수도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
임금이 또 왕사(王師) 자초(自超)에게 물었다.
“어떠냐?”
자초가 대답하였다.
“여기는 사면이 높고 수려(秀麗)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하소서.”
임금이 여러 재상들에게 분부하여 의논하게 하니, 모두 말하였다.
“꼭 도읍을 옮기려면 이곳이 좋습니다.”
하윤이 홀로 말하였다.
“산세는 비록 볼 만한 것 같으나, 지리의 술법으로 말하면 좋지 못합니다.”
임금이 여러 사람의 말로써 한양(漢陽)을 도읍으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전 전서 양원식(楊元植)이 나와서 말하였다.
“신이 가지고 있던 비결은 앞서 이미 명령을 받아서 올렸거니와,
적성(積城) 광실원(廣實院) 동쪽에 산이 있어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으니,
계족산(雞足山)이라 하는데, 그 곳을 보니 비결에 쓰여 있는 것과 근사합니다.”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조운할 배가 통할 수 없는데, 어찌 도읍 터가 되겠는가?”
원식(元植)이 대답하였다.
“임진강 에서 장단 까지는 물이 깊어서 배가 다닐 수 있습니다.”
임금은 그만 연(輦)을 타고 종묘 지을 터를 보고서 노원역(盧原驛) 들판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이 두 기사에서는 태조 이성계가 도읍지로 한양을 택하는데는 풍수적인 요소보다는
한강이 지니고 있는 수운(水運)의 이점을 많이 참작하였다고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