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영덕(盈德)'지구작전
해병 제1연대가 盈德에 집결하기에 앞서 한국 육군 제1군단은 '영덕'북방 동해안 일대에서 작전 중에 있었으며 미 해병 제11포병연대는 浦項-盈德 간을 수색 중에 있었고 또한 미 해병 제7연대는 '영덕'서남방에서 작전 중이었다. 이때 '영덕'에 집결한 해병 제1연대의 임무는 '영덕-안동' 간의 도로를 확보하고 아울러 부근일대에 출몰하는 적의 패잔병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1951년 1월 30일 해병 제1대대(대대장 孔正植 소령)는 중앙선대대로서 院前洞으로 진출하고 해병 제3대대(대대장 金龍國 소령)는 좌일선대대로서 靑松에 대대본부를 설치하고, 또 해병 제2대대(대대장 廉鳳生 중령)는 우일선대대 겸 연대예비대로서 '영덕'에 잔류하여 상호 긴밀한 연계하에 수색을 실시하게 되어 있었다.
한편 당시의 적정은 미 해병 제1연대에서 수색을 담당한 吉安川계곡 일대인 三巨里 서남방 拍子洞에서 적의 패잔병 약 400명이 출몰하고 있을뿐 이었다. 이같은 적정에 접한 해병 제3대대는 우선 1개 소대에 81mm 박격포 2문과 중기관총 2정을 배속시켜 三巨里에 출동하게 하여 적정을 확인하기 위한 수색을 지역일대에서 실시하였다. 수색 결과 吉安川은 '안동-영덕'을 통하는 도로의 요충이며 또한 '영덕'남방에 출몰하고 있는 적의 패잔병들의 북상도주로임을 알게 되었다.
한편 '박자동'일대의 적은 해병 제1연대의 수색대가 도착하기 전인 1월31일 현지로부터 이동하여 '삼거리'경찰지서를 습격, 소각하고 '삼거리'일대의 적의 패잔병과 합세하였다.
2월 2일 해병 제1연대는 제3대대 부대대장을 '박자동'에 이미 출동하고 있는 수색소대에 1개중대와 박격포 2문을 배속한 부대와 함께 파견, 증강케 하므로써 적의 발악적인 준동을 미연에 방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삼거리'일대에 진지를 확보한 패잔병들은 부근일대에서 준동을 시작하였으며 그 준동의 정도는 일익 활발해져서 2월2일에는 縣上洞에서 경찰대와 약 500명의 적과 충돌이 있었다.
이와같이 대부대로써 준동하는 적을 섬멸키 위하여 해병 제1연대는 현지 출동부대를 지원키 위하여 2월3일 靑松에 주둔 중인 제3대대를 '삼거리'로 이동시키고 院前洞에 주둔 중인 제1중대를 '청송'으로 이동시켜 적극적인 수색전을 전개하게 하였다.
해병 제1연대의 주력부대인 제1대대와 제3대대가 주둔지를 근거로 원거리 수색을 실시하고 있는 동안 적은 이 틈을 이용하여 다시 '영덕'에 위치하고 있는 해병 제1연대 본부를 기습하였다.
2월 5일 '영덕'에 주둔 중인 제2대대의 1개 소대는 德山洞부근에서 적의 불의의 기습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이와 때를 같이 하여 項洞에 본부를 설치한 적 약 2.000명이 북상을 기도하고 행동을 개시하였다. 이때 이를 탐지한 해병 제1연대 본부에서는 적의 기습부대의 공격을 저지하는 한편 이를 포촉, 섬멸하기 위하여 제1대대를 新陽洞으로 이동시키고 제3대대의 제11중대를 제2대대에 배속시켜 당면한 "영덕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하였다.
제3대대는 제9중대만을 '삼거리'에 잔류시키고 즉시 '청송'으로 이동하여 제1대대의 수색지경선까지 광범위한 수색을 계속하였다.
'덕산동'일대의 적정을 종합, 평가한 제2대대장은 제6중대와 제3대대의 제12중대를 지휘하여 大枝洞으로 우회, 전진하여 2월 6일 '덕산동'을 공격, 적의 기습부대를 격퇴하고 이를 점령하였다. 한편 제2대대제5중대와 제7중대도 '대지동'으로 출동하여 추후명령을 대기하였다.
2월 7일 제6중대에 귀순한 적의 패잔병의 진술에 의하면 項洞에 집결하고 있던 적은 아군의 신속한 포진과 공격에 북상을 단념하고 東大山으로 입산, 둔주하였다.
이와같은 적정을 입수한 해병 제1연대는 즉시 東大山공격을 결정하고 新陽洞으로 이동한 제1대대와 '덕산동'에 주둔 중인 제2대대와 합동작전으로 "동대산 공격작전"을 수행하였다. 그 후 작전명령을 수령한 제2대대는 즉시 집결지인 '신양동'으로 이동하였다. '동대산'공격을 위하여 '신양동'일대에 집결한 제1대대와 제2대대는 우선 제11중대를 예비대로 '신양동'에 잔류, 배치하고 제5중대 및 제7중대를 德山洞 450m고지일대의 수색을 담당하게 하였다.
2월 7일 12:00시 제1대대의 주력부대는 공격을 개시하여 17:00시 목표 #1인 八角山을 공격, 점령 후 계속 전진하여 다음 날 12:00시 新基를 공격, 점령하고 9일 08:00시 최종목표인 '동대산'을 공격하여 16:00시 목표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해병부대의 전격적인 공격에 당황한 적은 분산되어 '항동' 및 '동대산'을 경유하여 香爐峰으로 입산, 둔주해 버렸다.
제1대대는 적을 격퇴하고 공격목표인 '동대산'을 점령한 후 명에 의하여 2월11일까지 부근일대를 경계하고 있던 중 추가명령에 의거 다시 '신양동'으로 이동하여 계속 '안동-영덕' 간의 도로연변 일대를 수색하면서 보급로 확보에 임하였다.
해병 제1연대는 이와같이 '영덕'지구에 주둔하므로써 아군의 전선부대에 이르는 보급로가 확보되었으며 아울러 적정탐지와 또한 수색전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2월12일 해병 제1연대는 새로운 작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下猪洞에 집결하였다.
영덕지구 "팔각산 전투"상황도.

7. '寧越地區 전투"
(1) 해병 제1연대 '영월'지구에 집결
盈德 및 靑松지구에서 소탕작전을 완료한 해병 제1연대는 1951년2월13일 '영덕'동남쪽 해안에 있는 '하정동'에 집결한 후 다시 LST 803정에 승선하여 2월15일 墨湖에 상륙하였다. '묵호'에 상륙한 해병 제1연대는 육군 제3군단 수도사단에 배속되어 사단작명에 의거 2월16일 三陟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동해안을 따라 남하 중에 있던 적은 2월14일 注文津에 침입하고 있었으나 이 적은 극히 국한된 소수병력이었다.
이때의 적의 주력부대의 전면적인 공세는 烏山-原州선에서 UN군의 반격으로 돈좌되고 또한 서부와 동부전선에서는 UN군의 해, 공군으로부터의 맹공으로 인하여 적극적인 공세는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지역의 적은 험준한 중부 산악지대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므로써 아군의 해, 공군으로부터의 감제를 피하려하였다.
이리하여 동해안을 따라 '주문진'까지 침입한 적은 이 이상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는 것을 단념하고 중부 산악지대로 그들의 진로를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적은 이 중부 산악지대가 해발 900m 이상이 되는 험준한 산악이 연속되어 있는 것과 해빙기의 불순한 일기로 인하여 항상 짙게 끼는 농무를 이용하여 집요한 침투작전을 전개하여 곳곳에서 주효하고 있었다.
반면에 이와같은 자연의 장애와 기상의 악조건 등은 아군의 작전수행에 많은 지장을 초래하였다. 이런 자연조건을 이용하여 집요하게 침투작전을 계속하던 적은 드디어 육군 제3군단의 방어선을 뚫고 그 선두는 '영월'지구와 '영월-春陽(乃城동방 16km 지점) 간 도로를 위협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때 제3군단 소속인 제7사단은 '영월'북방 7-8km 지점에서 작전 중에 있었고 제9사단은 이곳부터 우측에서 제7사단과 연계하여 작전 중에 있었다.
아군의 해, 공군으로부터의 공격을 피하여 중부 산악지대로 그 주력부대을 돌린 적은 중부 산악지대로 이동 중 육군 제7사단과 제9사단의 전투지경선의 간격을 이용하여 침투, 우회하여 제7사단을 우측으로부터 위협하는 한편 '영월'을 공격하려 하였으니 전황은 더욱 긴박의 도를 더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삼척'에 집결한 해병 제1대대는 육군 제3군단 수도사단의 배속차량으로 2월19일 '영월'로 이동한 직후 '영월'북방 4km 지점인 束洞에 경계 배치하였다. 육군 제7사단을 위협하면서 남하, 침투한 적은 '춘양-영월' 간의 아군의 보급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작전상 요지인 綠田里에 침입하여 왔다.
이때 해병 제2대대는 작명에 의거 2월20일 '내덕'에 도착한 후 이어 '녹전리'를 탈환하기 위하여 詩樓里로 급거하였다. 한편 제3대대는 제2대대의 작전을 성공리에 완수케 하기 위하여 內德에서 만반의 지원준비를 갖추고 대기하였다.
(2) '속동(束洞)'지구작전(2.19-2.27)
육군 제7사단이 2월 19일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葉屈雲(엽굴운)에 적 300명, 文山里에 약 200명이 집결하고 있으며 2월21일 제7사단 정면을 동측으로 우회한 적의 대대병력이 '덕산리'에 본부를 설치하고 神屛山(신병산)과 八雲山을 점령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육군 제7사단과 '영월'의 위기는 일익 가증하고 있었다.
해병 제1대대는 이와같은 적정에 따라 육군 제7사단을 지원하고 '영월'을 방어하기 위하여 제7사단의 우익을 지원하면서 '신병산'방면으로부터 남하하는 적을 구축하고 '영월'의 위기를 제거하기 위하여 출동하였다.
2월 19일 17:45시 束洞에 도착한 제1대대는 이날 24:00시 제1중대 및 제2중대를 각각 滿地洞과 巨雲里로 이동배치하고 2월 20일 14:30시에 대대주력병력이 '거운리'에 도착하였다. 대대는 '팔운산'일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21일 '거운리'를 출발하여 2월 21일 11:00시 吉雲里까지 진출하였다.
'길운리'에 진출한 제1대대는 이곳을 거점으로 제1중대는 '운산'을 공격, 점령하고 제3중대는 '신병산'을 공격, 점령 한 후 '덕천리'를 공격하는 제2중대의 좌일선중대로서 계속 '덕천리'를 공격할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21일 12:30시 제3중대는 공격을 개시하여 '신병산'을 지향하여 전진하는 도중 737m고지에서 약 100명의 적과 조우하게 되어 제2중대의 지원을 받아 약 8시간의 격전끝에 적을 격퇴하였다.
한편 '덕천리'로 진출한 정보대는 부근에서 약 1개 소대의 적과 조우하였으나 주력부대의 지원을 받고 교전끝에 적을 격퇴하였다. 제1중대도 공격목표인 '팔운산'을 점령하고 '거산리'에 진출하여 부근일대에 경계배치하여다.
적은 해병부대의 이와같은 맹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도주하기 시작하였으며 '거산리'에 진출한 제1중대는 계속 전진하여 居卜里(거복리)를 점령하였고 水葛嶺(수갈령)를 향하여 계속 전진하였다.
제1중대의 전진에 호응하여 제2중대 및 제3중대는 文希里를 향하여 전진 도중 정보대가 점령하고 있는 '덕천리'에서 숙영하고 2월 24일 '거복리'를 출발한 제2중대와 場洞에서 합류하여 '문희리'에 진출하였다. 부대는 계속하여 斗雲里를 공격, 점령하였으나, 때마침 전진을 중지하고 곧 '덕천리'로 철수하라는 작전명령에 따라 '덕천리'로 귀대하였다. 이날 '소갈령'을 수색한 수색대도 무사히 귀대하였다.
해병부대의 맹공격에 적은 '영월'지구에 침투하려던 계획을 단념하고 중부 산악지대로 입산 둔입하였다. 적의 '영월' 침입기세를 산산히 분쇄한 해병부대는 다시 '영월'로 귀환하였다. '영월'에 도착한 제1대대는 2월25일 적 병력 약 100명이 '속동'부근에 집결하여 야간에 시내를 습격하리라는 정보에 의하여 경비를 엄중히 하는 한편 부근 일대를 수색 후 2월27일 人倉里로 향발하였다.
영월지구 "속동 전투"상황도

(3) '녹전리(綠田里)'지구 전투(2.1- 2.26)
육군 제7사단과 제9사단의 전투지경선으로부터 침입한 적 약 500명은 '녹전리'를 점령하므로써 '내덕-영월' 간의 아군 보급로를 차단하였으며 또한 병력을 더욱 증강하여 재차 '영월'을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아군은 무엇보다 먼저 이 적을 격퇴하여 보급로를 확보하는 것이 당면한 급선무였다.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해병 제2대대는 야음을 이용하여 '내덕리'에서 詩樓里(시루리)로 향하였으며 2월 1일 05:00시를 기하여 '녹전리'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행동한 제2대대는 예정대로 공격개시 시간이 되자 일제히 '녹전리'공격을 개시하였다. 적은 완강한 저항으로 이 지구를 확보하려 하였으나 치열한 격전끝에 제2대대는 37명의 적병을 사살하고 해병 5명의 부상자를 냈을뿐 드디어 '녹전리'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영월지구 "녹전리 전투"상황도

이로써 적의 침입으로 인하여 차단되었던 아군 보급로는 재개통되었고 보급로를 계속 확보하기 위하여 제2대대는 2월 23일 07:00시까지 '녹전리'를 경비하고 있었으며 丹陽에서 대기 중이던 제3대대는 제2대대의 '녹전리'경비임무를 인수하게 되어 임무를 인계한 제2대대는 不項里로 진출하게 되었다. '불항리'로 전진한 제2대대는 內遜道隅(내손도우), 古城里, 禮美里, 및 禾羅里(화라리)일대를 접적없이 수색하고 2월26일 倉里로 진출하였다.
한편 '녹전리'를 경비 중이던 제3대대는 제11중대만을 '녹전리'에 잔류시켜 경계에 임하게 하고 주력부대는 '불항'으로 진출하여 高古山, 女美山, 및 前景臺山 등지를 수색하고 3월2일 제2대대에 이어 '창리'로 이동하였다.
(4) '창리(倉里)'지구 수색전(2.27-3.2)
중부지구에서 아군의 맹공격에 분산된 약 6,000명의 적은 龍灘里(용탄리)에 집결할 것을 기도하였으나 육군의 맹공격을 받아 다시 북상도주 중이었고 육군 제7사단 정면 즉 '평창'북방 10km 지점에 산재하고 있던 적은 下珍富里에 집결하여 병력과 장비를 정비하고 '평창'방면에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이때 '평창'에 사단본부를 설치하고 있는 육군 제7사단은 老論里, '백장리', 및 大基里를 연하는 선상까지 진출하였으며 '창리'에는 육군 제19포병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육군 제7사단에 배속되어 '창리'지구에 집결한 해병 제1연대는 '창리'지구 일대의 수색임무를 담당하고 침투작전으로 남하하려는 적의 기도를 사전에 탐지, 분쇄하며 또한 육군 제7사단의 진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더욱이 산악전에 있어서 후방을 견고히 한다는 의미에서 해병부대의 출동은 이때 절실히 필요한 작전이었다.
이와같은 중임을 맡고 해병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대대가 '창리'에 도착한 시기는 2월 27일이었다. 즉시 제1대대와 제2대대는 강력한 수색전을 전개하였으며 특히 제3중대에서 차출한 1개 분대는 '용전리'북방 고지일대를 수색 중 약 2개 분대의 적과 조우, 교전하여 1명을 생포하고 1명을 사살, 2명을 부상시켰다. 2월28일 계속하여 수색작전 중 西川里부근에서 또 1명의 적을 생포하였다.
3월 1일 해병부대는 '창리'지구의 광범위한 지역일대에 대하여 철저한 수색을 실시하였으나 대규모의 접적은 없었으며 또한 해병부대의 정면에 직접 출현한 적은 없었다. 다만 '노론리'에서 육군 5명이 독주를 마시고 빈사상태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는 양민을 가장한 적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범인의 색출을 위하여 부락민 전체를 육군 제8연대본부로 인치하였을 뿐 이었다.
3월 2일 계속하여 제1대대와 제3대대는 수색범위를 더욱 확대하여 적정수집을 위한 수색을 실시하였으나 역시 접적치 못하고 부대는 다시 이동하여 旌善(정선)으로 진출하였다.
(5) '여량리(餘糧里)' 전투(3.4-3.10)
3월 2일 '창리' 및 '불항' 등지에서 경계수색전을 수행 중에 있던 해병 제1연대는 작명에 의거 '창리'로부터 '정선'으로 이동 집결하였다. 3월4일 제2대대는 '유전동'으로, 제3대대는 '토보동'으로 향발하였고 제1대대만 '정선'에서 수색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제1대대는 우선 제3중대를 '한강'을 도하, 전진케 하고 잔여부대는 대대수색정찰계획에 의거 연일 광범위한 적정수집을 위한 수색을 실시하였으나 적접치 못한채 3월 6일에 이르렀다. 이때 적 약 1,000명이 中洞에 침입하여 이 지역을 점령하고 계속 남하를 기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제1대대는 즉시 이 적을 섬멸코져 '여량리'로 이동하였다.
부대는 익일 계속하여 德楸田(덕추전)으로 이동하여 '중동'일대를 수색하였으나 '중동'에 침입한 적은 이미 高飛德山으로 이동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제2중대는 즉시 경계태세를 취하고 제1중대는 '고비덕산'을 공격키로 하였다.
3월 8일 03:00시 대대의 공격명령에 따라 제1중대는 행동을 개시하여 '고비덕산'을 공격, 5시간에 걸친 교전끝에 이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이때 격퇴당한 적은 王持山일대로 도주하였다. 제1대대장(孔正植 소령)은 즉시 '여량리'에 주둔하고 있는 제3중대를 餘村에서 적의 남하를 저지케 하는 한편 주력부대는 化谷을 경유하여 高沙里로 진출하였다. 첨병중대인 제1중대는 전진 중 '수비岩'에서 적 50명을 발견하고 교전끝에 이를 섬멸하고 무사히 '고사리'에 도착, 경계배치를 완료하였다.
3월 8일 半論山방면에 적 약 300명이 출현했다는 적정을 입수한 제1대대는 '왕지산'에 둔입한 적의 공격을 육군 제28연대에 인계하고 3월9일 09:30시 '반론산'을 공격할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제1대대는 주력부대를 '여량리'에 경계배치하고 공격에 앞서 제1중대에서 2개 소대를 차출하여 '반론산' 산록인 高昌谷일대를 수색케 하였으나 적정을 발견치 못하였으므로 제1대대는 '반론산'공격을 중지하고 3월10일 08:00시 冠掛里(관괘리)로 이동하였다.
(6) "봉산리(鳳山里) 전투"(3.5-3.17)
육군 수도사단 기갑부대는 3월 5일부터 적의 거점인 '하진부리'를 동측으로부터 계속 공격하여 적을 분산 도주시켰고 이에 호응하여 육군 제7사단과 제9사단은 '하진부리'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한편 부근일대에서 아군의 맹공격을 받은 적의 일부병력은 제7사단과 제9사단의 간격을 뚫고 發旺山과 博芝山일대로 침입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육군 제7사단의 우일선이 와해될 위험에 노출되게 되었다.
해병 제1연대는 이 육군의 전선부대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를 타개키 위하여 3월3일 柳田洞을 출발한 제2대대를 3월5일 龍山里로 향하게 하고 제3대대는 豊山里로 진출케 하였다.
제2대대 및 제3대대는 각기 목적지에 도착하여 위기에 직면한 육군 제7사단과 제9사단의 전투지경선일대의 공간을 담당하고 전방에 대한 적정수집을 위한 수색을 실시하였다.
3월 6일 육군 제7사단의 일부병력이 鳳山里전방 '참나무정'에서 적 약 3,000명으로부터 공격을 받자 일단 '봉산리'를 철수하므로써 해병 제1연대는 최전방을 담당하면서 고립된 상태에서 수색전을 실시하게 되었다.


"봉산리 전투" 작전지역도(강원도 정선군일대)
한편 '용산리'까지 진출한 제2대대는 이미 육군 제7사단과 제9사단의 간격을 이용하여 침투, 남하한 적을 격퇴하기 위하여 3월 8일 17:00시 다시 '여계리'로 이동하여 부근일대를 수색하였다.
3월 9일 '참나무정'으로 진출한 적의 일부병력이 '박지산'으로 남하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한 재2대대는 '산제동'으로 이동하여 주로 '박지산'을 중심으로 철저한 수색전을 실시하였다.
이때 제3대대는 '봉산리'에서 아군의 최전선을 담당하고 또한 남하하는 적을 저지하는 한편 화기중대의 전화력을 집중하여 '박지산'을 강타하였다. 이같이 해병대의 신속하고 면밀한 작전으로 '박지산' 및 '참나무정' 일대에서 준동하던 적은 해병부대의 강력한 화력과 맹열한 공격에 다시 산악지대로 깊이 도주하여 제2대대와 제3대대의 철저한 수색에도 좀처럼 그림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와같이 적의 기도가 분쇄되자 下珍富里방면의 적은 3월11일 야간을 이용하여 대규모의 후퇴를 시작하여 북상, 도주하였다.
이렇게 제2대대와 제3대대가 최전방에서 맹열한 활동을 하고 있는 동안 제1대대는 '여량리'지구에서의 작전임무를 완료하고 3월10일 '관계리'에 부대를 배치하고 우군부대의 작전을 유리하게 하고저 간단없이 수색전을 전개하므로서 적에게 계속 압력을 가하였다. 특히 이 지구는 太白山脈의 준험한 산악이 중첩된 지구일뿐 더러 엄동으로 인하여 산악지대에는 강설이 극심하여 장병들에게 주는 고통은 헤아릴 수 없었다. 더욱 설상가상으로 보급지원마저 자연의 장애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1) 제1대대 제2중대
그 동안 우리, 제2중대는, 이때 나는 3소대장이었다, 강원도 '영월'지역의 산악지대에 있는 '봉산리'지역 일대에서 인민군의 패잔병이나 빨치산들을 추적, 소탕하느라 산 넘고 강을 건너고 또한 능선따라 이동하며 작전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이 작전을 "鳳山里作戰"이라 불렀다. 물론 인민군 정규군과의 전투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패주 중에 있었기 때문에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저항은 안하고 산발적인 저항에 끝였다. 이 작전은 3월5일부터 시작하여 약 1주 간 계속되었는데 기간 중 우리의 인원손실은 경미하였다.
지난 3월 초부터 작전 중에 있었던 우리, 제2중대의 특별상황 중의 하나는 어느 날 고지대의 능선을 따라 종대 대형으로 중대 전체가 소대별로 전진하고 있었는데 왼쪽 계곡에서 갑자기 총성이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그 지역은 인접소대의 지역이었기 때문에 우리, 3소대는 다소 긴장하면서, 경계심을 높이고 넓은 계곡을 내려다 보았는데 초가 한채를 중심하여 총격전이 벌어진 것이다.
그때의 상황은 그 지역에 한채밖에 없는 초가를 해병 5, 6명이 포위하고 그 중 1명이 내부를 수색하려고 방문을 여는 순간 집안으로부터 총격을 받아 해병 한명이 쓸어졌다. 다시 다른 해병이 문을 열려하다 역시 집안으로부터의 총격을 받았다. 그때 해병들은 그 적을 사살하지 않고 생포하려고 "너희는 포위되었으니 총을 버리고 두손 들고 나오면 살려 준다"라고 밖에서 큰 소리를 질렀으나 묵묵 무답이어서 다른 대원이 방문을 낚아채듯이 열고 엎드렸는데 방안에서 또 사격을 가해왔다.
그 순간 해병들 전원이 초가에 총격을 가했으나 계속 응전해 오기 때문에 사격을 중지하고 다시"1분 간 시간 여유를 줄터이니 두손 들고 나오면 살려준다"하고 투항할 것을 권유했으나 역시 그들의 사격은 계속되었다.
이때 해병들은 시간이 자꾸 지체되기 때문에 3.5"로?포로 사격해서 그 초가를 박살내 버렸다. 그런데 3.5"로?포의 위력이 그렇게 대단한 줄은 나는 그때까지도 미처 몰랐었는데 아주 놀랍고 대단했다. 초가 한채가 완전히 박살나서 흔적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되어 버렸는데 나는 그걸 보고 역시 대전차포로구나 하고 감탄했다.
2) 그들은 과연 우리의 동족인가?
그때 집안에는 흰저고리에 검정색치마를 입은 여자 1명과 인민군 패잔병 2명이 저항하고 있었는데 물론 그들은 투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가의 폭발과 동시에 폭사당했는데 이것은 너무나 큰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다 폭사당한 저들은 과연 어떤 인간들이었을까? 나는 그들을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으나 결론은 그들은 우리의 동족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격멸해야 하는 우리의 적일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들자신이 그들은 우리의 동족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의 저항으로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동족이 아닐뿐만 아니라 우리와는 도저히 순화될 수 없는 적일뿐이었다. 오늘 날의 북한인들은 그들의 후손들이니 과연 그들은 변했을까?
그것은 그들이 같은 동족으로서 어떻게 우리가 두번싹이나 투항할 것을 권유했는데 투항은 하지 않고 끝까지 거부하고 저항하다가 죽음을 택할 수 있었는가 이다. 이와같은 사실은 단적으로 표현해서 그들은 우리를 같은 동족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고 그들의 표현대로 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원수일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산 증거가 아닌가? 어떡하다 이 민족이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이러한 천신만고를 겪으면서도 시종일관 해병들은 해병정신으로 인내하며 과감히 선전을 계속하면서 '경춘'가도로 진출하게 되었다.
(7) 해병 제1연대 '경춘(京春)'가도로 진출.
'하지부리'에서 준동하던 적이 아군의 맹공으로 인하여 야간을 이용하여 후퇴하자 해병 제1연대는 때를 놓지지 않고 육군 제7사단과 연계하여 3월 11일을 기하여 '경춘'가도까지 진출할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3월 12일 '관계리'에서 수색전을 수행하던 제1대대는 12:00시 '봉산리'로 진출하고 이어 16:40시 '상직동'에 경계배치하였다. 제2대대는 '봉산리'로부터 '발왕산'을 넘어 3월12일 13:00시 '용산리'에 도착하였다.
3월 12일 '봉산리'-'용산리'선에 집결한 해병 제1연대는 제3대대를 예비대로, 제1대대를 우일선부대로, 제2대대를 좌일선부대로 하여 13일 08:00시를 기하여 적극적인 공격작전을 개시하여 북상 전진하였다.
제1대대는 13:20시 春頭項을 점령하고 제2대대는 15:00시 '외자내지'로 진출하여 진지를 구축 후 계속 전진하려 하였으나 작전명령에 따라 일단 현위치에서, 제1대대는 '마양골'에, 제2대대는 '차항리'로 각각 이동하였다.
이로써 해병 제1연대는 "盈德地區作戰"이래 오랜 만에 전선을 떠나게 되어 다소나마 그 동안의 피로를 풀게 되었다. 3월17일 각대대는 다시 '차항리'에 집결한 후 橫城으로 이동하였다.
寧越地區의 종합전과
전과: 사살 135명 사상 176명 포로 14명 장총 18정 M1 소총 3정
피해: 전사 21명 부상 24명 행방불명
참조: 海兵隊戰鬪史(海兵隊司令部 發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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