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한 사회사상적 경향에 기울어져서 대중을 그러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한 목적 아래 창작되는 희곡 혹은 연극으로, 주로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사상에 근거하여 계급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선전·선동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작품을 지칭한다. → 프롤레타리아연극
프롤레타리아연극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선동·선전의 수단으로 공연되는 연극. 교훈주의연극 또는 목적극(目的劇)의 하나로서 경향극(傾向劇)이라고도 일컬어지며 흔히 줄여서 프로연극으로 불려진다. 이 연극은 1800년대 후반 독일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며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체계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1923년의 ‘선구좌(先驅座)’, 1926년의 ‘전위좌(前衛座)’를 거쳐 1928년 ‘일본프롤레타리아극장동맹(PROT)’이 결성됨으로써 1934년까지 그 전성기의 활동을 펼쳤다. 한국에서의 프롤레타리아연극은 1920년대 초부터 각지방의 소인극(素人劇) 단체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공연되기 시작하였으며, 일본 좌익연극의 영향을 받아 차츰 전문적인 조직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전문적으로 이러한 연극운동을 도모한 최초의 예술단체는 1922년 조직된 ‘염군사(焰群社)’로 알려져 있지만 연극활동은 뚜렷한 것이 없으며, 최초의 본격적인 프롤레타리아 극단인 1927년의 ‘불개미극단’도 여전히 공연 성과는 거두지 못한 채 소멸하고 말았다. 그 이후 카프(KAPF)의 방향전환론에 힘입어 1930년대에 들어서는 각지방에 이러한 연극을 목표로 하는 극단들이 속속 조직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1930년 3월 평양의 ‘마치극장’을 선두로, 대구의 ‘가두극장(街頭劇場)’(1930.11), 개성의 ‘대중극장(大衆劇場)’(1931.3), 해주의 ‘연극공장(演劇工場)’(1931.4), 원산의 ‘조선연극공장(朝鮮演劇工場)’(1931.4), 함흥의 ‘동북극장(東北劇場)’(1932.2) 등이 창립되었다. 이들 극단은 단원의 능력부족과 일제의 탄압으로 거의 모두가 공연은 이루지 못하였고 단지 원산의 ‘조선연극공장’만이 공연활동이 확인될 뿐이다. 서울에서는 1931년 ‘청복극장(靑服劇場)’이 결성되었으나 공연은 불가능하였고, 1931년 11월에 조직된 ‘이동식소형극장(移動式小型劇場)’이 비로소 1932년 함흥 등지에서 공연을 할 수 있었다. 이 ‘이동식형극장’이 1932년 5월 재조직된 극단이 ‘메가폰’으로, 이 극단은 1932년 6월 유진오(兪鎭午)작 <박첨지>, 김형용(金形容)작 <지옥>, 송영(宋影)작 <호신술>, 메가폰 문예부의 <메가폰 쉬프레히콜>·<깨어진 장한몽> 등의 레퍼터리로 서울, 평양, 인천 등지에서 공연하였다. 1932년 8월에 결성된 ‘신건설(新建設)’은 1933년 11월 레마르크 원작의 <서부전선 이상없다>, 1934년 5월에는 <서부전선 이상없다>와 위트 포겔작 <누가 제일 바보냐>, 송영(宋影) 작 <신임이사장> 등의 레퍼터리로 서울에서 공연하였다. 이후 극단 ‘신건설’은 3회 공연 준비중에 1934년 6월 소위 ‘신건설사 사건’을 맞아 1935년 6월 해산되고 말았으며, 이로써 한국에서의 프롤레타리아연극은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한편 이러한 연극운동은 재일(在日)조선인극단들에 의해서도 적극적으로 실천되었다. 1930년 6월 조직된 ‘동경프롤레타리아연극연구회’는 일본의 ‘일본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에 가입하고 ‘삼일극장(三一劇場)’, ‘고려극단(高麗劇團)’ 등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꾸준히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며, 1935년 5월에는 ‘조선예술좌(朝鮮藝術座)’가 조직되어 이기영(李箕永) 원작의 ‘서화(鼠火)’, 한태천(韓泰泉)의 <토성낭> 등을 공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프롤레타리아연극은,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방법론의 원칙을 한국의 현실에 무리하게 적용시키고자 한 운동론상의 문제점을 지니고 있지만, 노동자·농민을 위하여 그들 자신이 주체가 된 공연을 실현시키고자 한 점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위하여 프롤레타리아연극에서는 노동자·농민을 위한 현실적 소재로써 1막의 작품들을 생산해내고, 그들로 하여금 직접 연극에 참가하도록 하기 위하여 ‘관객조직’과 ‘연극써클’의 방법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방법은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 연극이 주로 외국의 번역극을 통하여 민중교화를 시도한 것과는 뚜렷이 구별되며, 아울러 보다 적극적인 민족저항적 색채를 띠고 있는 점이기도 한 것이다. 비록 이러한 한국의 프롤레타리아연극은 일제의 검열과 탄압, 그리고 자체의 능력부족으로 충분한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소멸하고 말았지만, 이들의 연극운동은 연극 대중화의 구체적인 방안으로서 해방직후의 왕성한 ‘자립연극(自立演劇)’의 바탕이 되었으며 진보적 민족연극의 수립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의 프롤레타리아연극은 그 현실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국현대연극사의 대표적인 한 주류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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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휘 연극만화. 조선연극계의 주변이야기 (대중극장) 조선일보 1931.03.04∼05
민병휘 연극비판에 대한 태도(자유평단):이계혁군에게 여함 조선일보 1931.03.14∼17
정순정 해주 연극공장은 어떠한 역할을 하려나 조선일보 1931.04.29
신찬 재일본 조선로동자 연극운동 연극운동 1 1931.05.00
안함광 무산연극운동의 촉진:문제의 간단한 제기로써 (해주연극공장) 조선일보 1931.05.09∼10
신고송 일본푸로 극장동맹 제3회 전국대회방청기 조선일보 1931.05.2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