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봉은한서가1918년부터1939년까지 조국광복을기원하며
기도 드렸던 기도터이다.
무궁화꽃은 7월부터 5개월간 쉬지않고 피고지고한다.
수련회기간은 가장 아름다운무궁화겨례의꽃을 관광할수있는때이다.
П 한서남궁억의 생애와 사상.
한서남궁억(南宮憶 1863년12월27일-1939년 4월5일)
은 서울 정동에서 남궁영의 외아들로 태어났다.본래양반
가문이었으나 아버지를 일찍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고생스럽게 자랐다.용모가 준수하고 재질이뛰어났던 그는
어께너머로 사서삼경을 통달하였고,1883년 관립영어학에
입학하였다.1886년 내부주사로 피임 어전통역을맡아 고종의 사랑을받았다.미주 사절단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통역과서기관으로일하였다.
1893년 경상도 칠곡부사로 취임하였고 1895년 내부토목국장이 되어 탑골공원을 건설하였고 종로통과정동의거리를확장하였다. 1896년 일어난의병들의선유사로활동하였고
성주목사 양양군수를 역임하였다.그는 벼슬을 떠나 독립협회에투신하며 수석총무로취임 애국사상 고취에 헌신하였다.1898년장지연등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초대 사장이 되어 언론을통한 독립운동과 사회계몽교육에
전력을 기울렸다.그는 이 때문에 세 번의옥고를치렸다.
그는 독립협회시절 윤치호의전도로
남 감리교 종교교회에
입교하며.1903년황성기독교청년회(YMCA)가 창설된 이래
열성회원이되었고 그후로 기독교청년회 이사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13년에는한국YMCA대표로 한·일 YMCA대표자협의회에 참석하기도했다.
그는「을사보호조약」에 큰충격을 받고 이제나라를 구할길은 인재를 기르는데 있다고 생각하였다.
1895년흥화학교 교사.1906년부터양양군현산학교 서울배화학당 서울 상동청년학원의 교사로 재직했다.
특히 순한글로된「교육일보」를간행하는 한편「가정교육」,「궁체국문서법」「조선어법」「조선이야기」「조선어보충」「동시략」등 수많은 교과서를 펴내었다.
1908년 남궁억은「대한매일신보」민족과 기독교신앙에관한 중요한글을 남겼다.「우리동포는 이제모두 한가지로구주를믿어야한다.예수그리스도의은혜에 힘입어일신의
죄와국간의죄를 모두 속죄받고 모두가 살신성인의
정신으로구세창생의 마음을가꾸고 동포를 사랑하자」고하였다.이민족이 일제를 물리치려면 영적으로 거듭난 내적
참회를 성취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한일합방이 되지 군수직에서 물러나 배화학당교사가되어
기독교 여성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영어를 가르치다가도 름 만나면 한국역사를 가르쳤으며,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무궁화꽃으로 삼천의금수강산을 수놓는 지도를 수본으로 만들어수를놓깨했다.
1918년 한서는 자신의 선향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으로내려와 본격적인 기독교민족운동을 준비하였다.
모곡에 내려온후 한서는 자신의사재를털어 열간짜리 예배당을 짓고 청소년교육과 전도에 전력하였다.또한편그는
학생들과 함께 무궁화묘목을 기르고 「무궁화동산 꾸미기 운동」을시작했다. 이예배당에서모곡학교를 시작했고,
이모곡학교와 예배당을중심으로 인재를 양성하였다.
그는 학교운영비를 마련한다는 구실로 무궁화묘목을
해마다 수십만주 길러서 온나라에보급했다.
그는학교 실습지에서 학생들과함께밭을만들고무궁화묘목을가꾸었다.「…특별하다 무궁화는 자광할말하도많다.
여름 가을 지나도록 무궁무진꽃이핀다.그씨번식하는
것은 씨심어서 될뿐더러 접붙여도 살 수 있고 꺾꽃아도
성하도다…」라는 「무궁화동산」노래를지어 학생들의
가슴에 우리민족의강함과 역사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1922년 남궁억은 봄돌아와 밭갈때가곧온다는 조국의
찬가를불러 민중에게 새로운소망을 불러일으키니 유명한
찬송가 371장이다.1923년에는 춘천 주재남감의교 선교사의 도움을받아 모곡학교 교실과 기숙사를건축 하였다.
1924년 한서는 단군시대부터 3·1운동 시기까지의 민족사
를「동시략」4권으로정리하고 1929년에는동화체로「조선이야기」전5권을저술하였다.
이책은 조선민족은 무능하다는 식민사관에맞서
우리민족의 자주역량을 아동들에게 심어주고자 조선의
첫댓글 수고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