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교보문고에서 나지의 짐꾼 노릇을 해준 적이 있는데 허우대 멀쩡한 놈이 낑낑대는 게 보기 애처로웠던지 나지가 책을 한 권 사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고른 책이 바로 심윤경의 <달의 제단>이었습니다. 다 읽고 감상문 올리라는 나지의 말이 문득 생각이 나서 조금 끄적여봅니다.
이 소설을 어떻게 알게 됐냐면... 한달쯤 전에 시간이 남아서 이런저런 문학상 수상작들을 연대별로 정리하는 작업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만해문학상,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등등... 이런 것들을 따로 정리해놓은 싸이트가 없길래 네이버에서 이리저리 검색해보며 자료를 찾고 그랬는데요. 동인문학상을 검색하다가 함께 검색결과로 나온 조선일보의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들이 2004년도 수상작을 결정하기 위해 독회를 가진다는 그런 기사였는데 읽어보니 심사위원들이, 특히 박완서와 이문열이 <달의 제단>이라는 소설로 아주 호들갑을 떨더군요. 저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심윤경이란 이름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같은 겁니다. 그래서 기억을 더듬어보니 <나의 아름다운 정원>으로 몇년 전에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적이 있는 바로 그 심윤경이었습니다. 한겨레문학상도 정리하다보니 뇌리에 그 이름이 남았던 게지요.
그런 식으로 심윤경이란 이름과 <달의 제단>이라는 제목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닐 무렵 교보문고에 혼자 갈 일이 있던 저는 소설 코너에서 그 책을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내용을 대강 훑어보니 제목만으로 예상한 그런 내용이 전혀 아니어서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대충 도시 여성의 신산한 삶을 그렸겠지 뭐 이런 식으로 짐작을 했던 저는 옥편이 없으면 읽기 힘든 한자 투성이의 옛날식 문장에 당황했고 분자생물학과 출신이라는 작가의 능글맞은 사투리에 또 당황했습니다. 책 뒤편에 적혀있는, '맹렬히 불타오르고 재조차 남지 않도록 사그라짐을 영광으로 여기는 옛날식의 정열을 다시 만나고 싶다.'라는 작가의 말이 왠지 이 책을 꼭 읽어야 할 것 같이 저를 강하게 끌어당겼습니다. 하지만 그 때 제 수중엔 돈이 한푼도 없었습니다-_-;;
그러다가 얼마 후 산타 클로스와도 같은 나지의 구원의 손길이 들이닥쳤던 것이고, 원래는 안재성의 신작 <경성 트로이카>를 사려고 했었는데 '경성'을 '동경'으로 잘못 알고 검색하는 바람에 교보문고에서 책을 못 찾은 저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식으로 <달의 제단>을 고른 것입니다.
이야기는 효계당 서안 조씨 17대 종손 조상룡이라는 청년이 군대에서 막 제대하고 친할아버지가 사는 효계당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됩니다. 종가집의 대통을 이어야 한다는 친할아버지의 압박과, 난봉꾼 아버지의 인정받지 못한 사랑에 의해 태어난 서자라는 출생배경과, 효계당에서 막일꾼 노릇을 하는 권정실이라는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와의 금지된 사랑이 한데 뒤엉키면서 상룡이의 삶은 혼란으로 치닫게 됩니다. 또한 친할아버지가 해독해보라고 건네준 집안의 옛 문서를 우리말로 옮기면서 상룡이는 여성 억압의 역사가 조상 대대로 내려오고 있는 지독한 가부장제의 횡포를 목격하게 되고 결국, 소설 말미에 상룡이는 '달의 제단'에 오르게 됩니다. 읽고싶어질 만큼만 감질나게 줄거리를 쓰려 했는데 어떻게 의도대로 됐는지 모르겠습니다-_-;;;
<선택>이나 <아기>같은 소설로 자신은 가부장제에 기초한 전통윤리를 중시한다는 걸 만천하에 알린 이문열이 이 소설을 칭찬한 건 심윤경이 거침없이 표현한 옛날식 문장과 안동 사투리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여성에 대한 직간접적인 억압에 대해 끊임없이 고발해온 박완서가 이 소설을 좋게 읽었다고 한 건 충분히 수긍이 갑니다. 감각적인 문체와는 대척점에 있는 옛날식 문장의 엄청난 카리스마는 제쳐두고라도, 딸을 낳은 며느리에게 자살을 권하거나 며느리 몰래 핏덩이 같은 손녀딸을 발로 밟아 죽이는 식의 가부장적인 후손의식과 남근주의에 대한 묘사는 남자인 제가 읽어도 '사람이 사는 게 대체 왜 이래야 되나'하는 한숨을 쉬게 합니다.
말이 길었지만, 한마디로 하자면 이 소설 존나게 재밌어요!! 그게 전부네요.
역시 지나가는 얘긴데요. 오늘 보니 서하진의 <비밀>, 권지예의 <아름다운 지옥>, 김영하의 <검은 꽃>, 심윤경의 <달의 제단>이 동인문학상 최종 후보작 네 편으로 선정되었다는 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