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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민족 과학기술의 행방에 관한 의문들 □ 보도일 : 2002년 10월호 □ 보도처 : 에머지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개화기 및 일제시대의 유길준兪吉濬(1856∼1914)과 최남선崔 南善(1890∼1957)을 비롯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려고 애쓴 이들이 적지 않다. 유길준은 조선민족의 과학기술적 창의성을 보여주는 예로서 고려자기, 금속활자, 거북선을 내세웠 고, 여기에 첨성대, 측우기, 정음正音, 비거飛車 등을 추가한 최남선은 “문화의 창조력 에 있어서 조선인은 진실로 드물게 보는 천재 민족”이라 했다. - '청기와장수’의 정체 과학기술을 근원적 사상이나 문화적 기반으로 파악하기보다는 김윤식金允植(1835∼1922) 의 이른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의 연장선상에서 유달리 실용성을 강조하고 있으면서 도, 막상 민족의식의 연장선상에서 타성적으로 뽐내고 있는 과학기술 유산들은 정음(한 글)을 제외하고는 실용성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그런가 하면, 언제부터인지 실체조차 분명치 않은 '청기와장수’는 줄곧 비난의 대상 이 되어 왔다. “고려시대, 청기와장수가 청기와 굽는 기술을 남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 다는 데서, 기술을 혼자만 알고 가르쳐 주지 않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라는 것이 한국 어사전의 풀이이다. 청기와의 실체가 궁금하여 한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청기와’를 검색했더니 청와대靑瓦 臺가 뜬다. 경복궁의 후원 자리에 1927년 일제가 지은 것을 정부 수립 후 대통령 관저 로 사용하면서 경무대景武臺로 불렀지만, 4·19 후에는 청와대로 고쳤는데, 본관 지붕이 청기와(靑瓦)였기 때문이라 한다. 청와대 구관과 옛 조선총독부 건물은 일제보다는 해 방 후에 우리가 더 오랫동안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명목 아 래 각각 1993년과 1995년에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져버렸다. “텨-ㄹ썩, 텨-ㄹ썩, 쏴아 /따린다, 부슨다, 문허바린다.”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 게〉(1908)의 시구詩句가 연상되는 장면이었다. 1936년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연재된 박종화朴鍾和의 역사소설 〈금삼錦衫의 피〉에는 다 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날아갈 듯한 주란화각朱欄畵閣 위에는 푸른 기운이 흐를 듯 한 청기와로 지붕을 덮으니, 백성들은 천고에 이만한 사치를 구경해 본 일이 없다.” 이 소설의 배경은 1504년(연산군 10년)의 갑자사화甲子士禍이다. 또 1405년(태종 5년)에 건축했으나 불에 타고, 1647년(인조 25년) 다시 지은 창덕궁 선 정전宣政殿의 특징 중의 하나는 청기와를 사용한 것이라 한다. 전라북도 김제의 승가사 僧伽寺는 고구려 승려 보덕普德이 650년(백제 의자왕 10년)에 창건한 사찰이다. 1597년 (선조 30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불에 타서 없어진 것을 1625년(인조 3년)에 흥복거사 가 중창하여 흥복사興福寺라 했는데, 이곳의 3대 진물珍物 중의 하나가 극락전에 있던 '청자기와’라 한다. '청기와’가 삼국시대 말기의 청자기와에서 유래하는 것이라면 청기와 비법은 17세 중엽까지 거의 천년 동안이나 전래된 셈이다. '장이’가 '장수’를 겸했기 때문에 청기와장이가 아니라 청기와장수로 불리는지는 모 르겠지만, 그는 기예技藝의 소유자인 장인匠人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청기와장수와 청자 도공靑瓷陶工은 같은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비법이나 기술을 공개하지 않았다면 서 비난한다면 혼신의 힘을 다 해서 기술을 더욱 발전시키려고 노력하고자 하는 인센티 브가 사라진다. 청기와의 맥이 끊긴 것은 비법을 숨겼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회적 대접은 받지 못했더라도 청기와를 구워서 파는 것만으로도 남보다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다면, 적어도 남이 아닌 자손에게는 남몰래 비법을 물려주려 했을 것이다. 더 구나 특허제도와 같은 비밀보장 장치가 없는 사회에서는 이러한 비법을 아무리 감추려 했어도 친척이나 주위 사람들이 가만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1363년의 일이지만 원元나라 에 갔던 문익점文益漸이 붓대(筆管) 속에 목화씨를 숨겨서 가져올 수 있었던 상황을 미 루어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 기술시장의 풍토 청기와장수와는 달리 독특한 비색翡色의 고려청자를 만들었던 청자도공은 오히려 상찬 의 대상이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나라의 지원을 받으면서 유근형(1894∼1993년)과 조기정(1939∼)을 비롯한 많은 전문인들이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직도 옛 번조법燔造法 의 비밀을 알아내지 못해 전성기(12∼13세기)의 모습이 완전히 재현되지는 못했다고 한 다. 만 원짜리 지폐의 세종(1397∼1450)의 초상 왼편에서 '물시계’라는 작은 글자를 발견 하고 고개를 갸우뚱한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물통들만 있을 뿐 시보장치 등의 부속 장치가 보이지 않으므로, 그것이 물시계인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다. 세종의 명을 받아 장영실蔣英實(139?∼?)이 1434년(세종 16년)에 만들었던 물시계 자격루自擊漏는 지금 남 아있지 않다. 매일경제신문에서 1990년부터 매주 장영실상을 시상하면서 그를 기리고는 있지만, 관노 官奴 출신이기 때문인지 그의 생애 자체는 분명치 않다. 생애가 불분명하기로는 14세기 의 최무선崔茂宣(?∼1395)이나 19세기의 이규경李圭景(1788∼?), 김정호金正浩(?∼ 1864) 등도 마찬가지이다. 고려나 조선시대에 기술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장영실은 이름이라도 남아있지만,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에밀레종)의 기술자, 청자 도공이나 측우기의 제작자, 청기와장수 등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기야 세종의 휘諱가 도?라는 것을 기억하는 이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 중에는 이름이 전해지는 경우가 많다. 담징曇徵(579∼ 631)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기원전 27년 구슬, 칼, 창, 일경日鏡(화경火鏡, 금속제 오 목거울) 등을 일본에 전했다는 신라 왕자의 이름은 천일창天日槍이고, 743년에 시작하 여 15년만에 완성한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의 대불大佛을 제작한 기술자는 백제의 공 마려公麻呂라 한다. 1598년 일본으로 끌려간 이삼평李參平(일본명 金江三兵)은 일본의 대표적 도자기 아리타야끼有田燒의 도조陶祖로 추앙받는다. 사쯔마야끼薩摩燒를 연 심당 길沈當吉의 후손은 우리 성姓을 고집하면서 습명襲名하여 14대 심수관沈壽官으로 이어지 면서 일본 도예계를 이끌고 있다. 그런데, 고려 청자의 발원지라는 강진요康津窯와 부안요扶安窯는 어째서 유적으로만 남 아있는 것일까? 《고려사高麗史》에 제요직諸窯直이라는 관명이 있는 것을 보면, 청자요 靑瓷窯가 관영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조정이 관여한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다 면 고려청자나 청자기와가 전래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조정의 간섭 때문은 아니었을 까? - 제왕식 과학기술의 행방 서양보다 2세기나 앞서서 1442년(세종 24)에 만든 측우기는 서울뿐 아니라 각 지방에도 설치하여 강수량을 측정했다지만 이것 역시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과학사학자 박성래 는 “측우기가 강우량을 측정하여 농사에 직접적인 도움을 얻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 라, 세종이 나라를 열심히 다스린다는 점을 과시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라고 그 정치적 의미를 강조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니까 통치의 상징으로서의 과학기술, 시체말을 빌 린다면 '제왕식’ 기술인 셈이다. 훈민정음의 훈민訓民(백성을 가르친다)에서도 엿볼 수 있지만 백성은 오로지 통치와 훈육의 대상일 뿐이었다. 왕은 늘 권력의 중심에 있었 다. 지금도 우리는 걸핏하면 무슨 일에나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한다면서 대통령에게 권한 을 집중한다. 일이 있을 때마다 대통령 직속 위원회를 만들어 참여한다. 정책의 기본 틀 이나 방향을 제시하는 차원을 넘어서 대통령의 입을 빌려서 시시콜콜 지시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그래놓고는 이번에는 '제왕식’ 대통령제라면서 비난한다. 재벌기업의 경영 역시 제왕식이기는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2002년 7월에 열린 한 포럼에서 계열사 사장은 “회장으로부터 … 5∼10년 뒤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 한 질타를 받고 있다”고 했다. '큰 소리로 꾸짖는다’는 의미의 질타叱咤라는 어휘를 사용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열린 한민족과학기술자 종합학술대회에 초빙된 기본스John Gibbons에 따 르면, 미국에는 과학기술부가 없고 대통령 과학정책자문단이 있다고 한다. 정부의 역할 이란 산업 및 연구 현장을 잘 아는 전문가들을 동원해 집중투자대상을 선정하는 것이라 했다. 우리가 미국을 본받아야 할 이유는 없겠지만, 우리에게는 과학기술부도 있고 국가 과학기술자문회의도 있으며 국가과학기술위원회도 있다. 언제부터인지 과학기술과 관련하여 첨단尖端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부 터 정부는 첨단과학기술의 육성에 나선다. 컴퓨터, 정보과학, 반도체산업, 유전공학, 물 리학, 생물학, 전산과학, 전자공학 등이 첨단과학기술 분야라 했다. 선진국에서 앞서 나 가므로 우리도 따라잡아야 할 분야라는 것이다. 1994년 5월에는 과학기술처가 '2010년 과학기술발전 장기계획’ 시안을 발표하면서, 당 시 세계 15위권 수준인 과학기술력을 1998년까지 9위권으로 끌어올리고, 2001년까지 선 진 7개국권에 진입하며, 2010년까지는 G-7 선진국 중심국가 수준으로 도약한다는 목표 가 제시됐다. 1990년대 말에는 첨단 분야인 IT, BT, CT, NT를 육성한다고 했다. 산업자 원부는 2001년 7월 향후 10년간 유망 신기술 개발의 전망을 담은 '산업기술지도’를 발 표했다. 1차로 단백질제품, 디지털가전, 무선통신기기, 로봇, 광섬유, 전지 등 6대 기술 을 지원하고, 2차로 생리활성정밀화학, 의료공학, 추진장치, 멀티미디어, 선박, 컴퓨터 기술 등 6대 분야를 지원할 계획이라 했다. 기획예산처는 2002년 6월 '신기술(6T)개발 예산의 효율화방안’을 발표하고, 관련 산업 기술 발전에 정부의 R&D 예산을 집중적으로 투입할 계획을 발표했다. 1년만에 4T에서 6T 로 늘었는데, 6T란 IT, BT, NT, ET, CT, ST라 한다. 이 와중에서 CT가 환경기술에서 문 화기술로 바뀌고 환경기술은 ET라 했다. 2002년 7월에는 과학기술부가 '국가기술지도’ 를 발표했다. '첨단’에 이어 '지도road map’(말하자면 청사진)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큰 길뿐 아니라 샛길까지 일러주는 계획이나 지도는 수시로 발표되는데, 그때마 다 과학기술자들이 첨단의 길을 따라 몰려든다. 마치 '떴다방’처럼 렌트시커rent- seeker들도 날뛴다. 첨단이 아닌 길은 거의 완전히 외면당한다. 나름대로의 길은 개척 할 겨를이 없다. 도자기도 첨단의 축에 끼지 못한다. 정부의 지휘통제는 중등학교 교육에서부터 시작된다. 창조적 정신을 피폐하게 만든 개발 독재시대의 고교평준화제도는 아직도 끄덕 없다. 학군제라는 '감옥’을 만들어 학생들 의 학교 선택권을 완전히 박탈한다. 결과적으로 주거이전의 자유를 제약하는 학군제야말 로 지역감정의 원천이라는 지적도 있을 정도이다. 또 원래부터 자립형이었던 사립고등학 교들을 온통 예속 상태로 만들어 놓고는 새삼스럽게 자립형 사립고교 설립을 논하고 있 다. 대학은 입학안내서에 등록금조차 '자율적으로’ 명시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된 다. 이처럼 창의력이 억제되는 상황에서도 우리의 과학기술이 지금의 수준까지 올라왔다 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같은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아무튼 정부의 강력한 육성정책 덕분에 2002년의 월드컵 축구대회를 계기로 우리는 IT 강국으로 부상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와중에서 외국의 원천기술에 대해 지불하는 로열 티는 과연 얼마나 되나? 월드컵 축구경기장 중에서 우리 기술만으로 설계한 것이 어느 것인가? - 기술이 자생하는 토양 기술技術은 인간 존재에 본질적인 것으로 인류 역사와 함께 발전했다. 사마천司馬遷의 《史記》(기원전 1세기경) 〈화식열전貨殖列傳〉에 이미 기技와 술術이 언급된다. 히포 크라테스Hipocrates(기원전 4세기 경)가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고 말했다지만, 여 기서 ars(art)는 현대적 의미의 예술이라기보다는 기술, 기예技藝의 의미이며 technic (기술적)의 어원인 tekne와 거의 같은 뜻이다. 전근대적 기술은 공동체 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유럽은 목축, 항해, 상업이 발전 했고, 중국이나 우리는 관개 농업 문명이 형성되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인 우리의 전래적 핵심역량은 농업에 있다 할 것이지만, 농업은 보호나 보조의 대상으로 삼 아 오히려 경쟁력만 약화시켰을 뿐이고 첨단 분야에는 끼워주지 않는다. 서구로 눈을 돌리면, 고대 로마의 몰락 후 15세기경에 이르기까지의 중세를 암흑시대 Dark Ages라 하지만, 이는 르네상스 문화와는 이질적인 고전문화라는 의미의 경멸적 용 어다. 중세를 다시 들여다보면 이 시대야말로 실용기술이 발전한 시대였다. 이를테면 등 자?子를 비롯한 마구馬具, 물레방아, 쟁기, 삼각 돛, 비누, 크랭크crank, 펠트 등 이 시 기에 도입된 것들이 아주 많다. 이는 중앙정부의 통제권이 취약해진 상황이었기 때문이 라 할 수 있다. 중세야말로 산업혁명과 과학혁명의 에너지를 비축한 시대라 할 수 있다. 고려 후기 이후로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는 농업기술과 함께 솜과 무명, 그 리고 베틀의 출현 등을 들 수 있다.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돛의 제작에도 사용되어 항해를 발전시켰다. 18세기에 영국에서 진행된 산업혁명도 방적 기계 의 개량이 발단이라 할 수 있다. 라봐지에Lavoisier, 르블랑Leblanc, 카르노Carnot, 쿨 롱Coulomb, 게이루삭Gay-Lussac, 암페어Ampere, 라플라스Laplace 등 쟁쟁한 과학자들이 활약하던 프랑스가 아니라 부실한 두 대학밖에 없었던 영국 사회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 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산업혁명은 뉴커먼Thomas Newcomen(1663∼1729)의 대기압기관大氣壓機關에서 태동되었다 고 할 수 있다. 대장장이었던 그는 같은 고향 출신이면서 1698년에 이미 양수펌프의 특 허권을 가지고 있었던 세이버리Thomas Savery(1650∼1715)와 함께 광산이나 탄광의 배수 排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펌프의 개발에 전념했다. 그들이 새로 고안한 펌프는 물의 증발-응축을 이용한 아주 단순한 것으로 에너지 효율 이 아주 나쁜 것이었지만 1712년부터 60여 년간이나 사용되면서 석탄 산업 발전에 기여 했을 뿐 아니라 증기기관 개발의 바탕이 되었다. 그들은 이론적 과학 지식의 소유자들 도 아니었고, 정부의 지원을 받은 일도 없다. 그들을 고무시킨 것은 인센티브를 추구할 수 있는 영국의 특허제도와 기술시장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원시적 특허제도는 기원전 500년에 이미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도 있었고 갈릴레이 도 1594년 특허를 받은 일이 있으며, 영국 왕실은 특허장을 남발하여 수입원으로 삼기 도 했다고 한다. 특허제도가 정착된 것은 1623년 영국 의회가 전매조례를 제정하면서부 터다. 우리 나라에는 약 300년 뒤인 1908년 특허제도가 처음 도입되었지만 1949년에 특 허국이 설치되고 특허청으로 승격된 것은 1977년이다. 고려 및 조선시대의 경주인京主 人, 객주客主와 공장계工匠契가 배타적 독점권을 행사하는 일이 있었지만, 특허제도와 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최무선도 처음 화약과 무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서였 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관리들의 녹봉을 담당하는 관리로서, 전국에서 조운선漕運船 에 실려와 개성으로 운반되는 곡식을 왜구倭寇로부터 보호하는 데 도움을 줄 생각이었 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기술을 계속 발전시키고자 하는 인센티브가 미약했다. 아무튼 지금은 기술의 수명 자체가 아주 짧아져서 기술자의 평생 동안 기술 주기가 4번 이상 바뀐다고 하지만, 기술은 본디 자생적自生的으로 진화 발전해 나가면서 자기조직화 되는 성질이 있다. 이것은 기술의 장점이면서도 단점일 수도 있다. 최근의 컴퓨터나 반도체 가격 추이에서도 알 수 있지만 기술이 발전할수록 제품의 성능 이 좋아지면서도 시장 가격은 오히려 내려가는 것이 일반적 특징이다. 기술이 시장을 창 조하기도 하고, 시장은 늘 새로운 기술을 요구한다. 기술의 발전은 직접 관련되는 분야 의 인력을 축소시키면서 산업 분야의 구성을 변화시킨다. 우리의 농업인구는 해방 후 지 금까지 계속 감소되어 농업인구의 비율이 10% 이하가 되었지만, 식량이 남아돌아서 쌀 을 동물사료로 사용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른바 '이공계 기피’ 현상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비록 통신사업자 선정에는 정부가 간섭했지만 지금과 같은 인터넷 시대를 예견한 이는 아무도 없다. 경제학자도 몰랐고 과학기술자도 몰랐다. 하기야 아인슈타인도 한때는 원 자력에너지를 이용하려는 것은 달빛을 이용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라면서 비웃었다. 지금 과 같은 인터넷 시대가 열린 것은 무엇보다도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여성 골퍼들이 전세계를 석권하고 있는 것 역시 정부의 통제나 협회 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경쟁 상황에 있기 때문이라 한다. 관료제 사회는 일반적으로 기술의 창조적 발전을 저해한다. 한편 기술은 사회의 통제수단이나 후진지역의 지배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하지만 자유사 회 구현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무엇보다도 인간을 노동과 권위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역 할을 한다. 북한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면서 노르마norma를 설정하고 사람 들을 일터로 내몰았지만 결과는 후진화의 길이었다. 최근 북한에서 시장경제 체제로 전 환하는 듯한 기미가 보인다지만, 이것이 햇볕정책의 성과인지 인터넷과 무선통신을 비롯 한 통신기술 발달 등의 영향인지 그 경중을 따져봄직하다. - 지식정보의 진화 국내에서는 새삼스럽게 지식정보화시대라면서 떠들지만, 인류의 문명과 문화 발전과정 자체가 지식의 정보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연생태계의 진화가 유전정보의 진화 과정인 것처럼, 인류의 진화는 지식정보의 진화과정인 것이다. 활자나 인쇄술을 비롯하 여 최근의 인터넷과 이동통신에 이르기까지의 정보전달 기술이야말로 인류 발전에서 가 장 큰 기여를 해왔다고 할 수 있다. 베이컨Francis Bacon(1561∼1626)에 따르면 서양 문명이 세계를 압도하게 된 것은 나침 판, 화약, 인쇄술 덕분이라 했다. 나침판과 화약은 중국에서 발명된 것이고, 세계 최초 의 목판 인쇄물은 우리 것으로, 770년 경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이라 한다. 신라 종이에 인쇄한 것인데, 1966년 10월 도둑이 불국사 석가탑을 털려다가 달아나는 바람에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8세기 경에 이미 타임캡슐time capsule이 있었던 셈이다. 우리는 청동금속기술과 목판기술의 발전을 배경으로 1234년(고종 21년) 세계 최초로 금 속활자를 발명했지만 금속활자에 의한 최초의 인쇄물인 《고문상정예문古今詳定禮文》 은 전해지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는 등 여러 번 활자 를 개량했고, 1436년(세종 18년)에 만든 조선 최초의 납 활자인 병진자丙辰字는 구텐베 르크의 납 활자보다 시기적으로 앞섰지만, 이런 모든 노력들이 인쇄술로 이어지지 못했 다. (실용적 한글타자기도 1949년에 비로소 안과의사 공병우公炳禹(1906∼1995)에 의해 개발되었다. 실용적 영문타자기에 비에 80년 정도 늦었다.) 조선 후기에도 주로 목판 인쇄나 필사筆寫에 의존했다. 비용이 오히려 많이 드는 금속활 자로 찍어낼 정도의 책의 수요(시장)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세종 이후에도 한자에만 의존하고 한글이 보급되지 못한 것이 무엇보다 아쉬운 점이다. 대부분의 관료사회가 그 러했듯이 어쩌면 지배계급은 백성의 지적 수준이 향상되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 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나라에서 처음 출간된 국한문 혼용 도서는 유길준의 《서유견 문西遊見聞》으로서, 국내가 아니라 동경에서 1895년에 인쇄되었다. 그러나 해방 전까지 만 해도 우리 국민의 문맹률은 80%나 되었다. 금속활자의 개발은 우리보다 2세기나 늦었지만 독일의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397∼1468)는 인쇄술을 개발했다. 1450년경에는 인쇄공장을 만들어 천문력天文曆, 면 죄부 등을 인쇄했고, 2∼3년 뒤에는 이른바 “구텐베르크 성서”를 인쇄했다. 그러나 전 력을 다한 연구의 결과가 결실을 맺으려할 즈음 부채상환소송에서 패하는 바람에 모든 업적이 고스란히 채권자의 손으로 넘어갔으며, 이 채권자는 성공하여 큰돈을 벌었다. 구 텐베르크는 인쇄공장을 재건하는 등 동분서주했지만 재기에 성공하지 못하고 실의에 빠 진 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알파벳이 간단했기 때문에 인쇄술이 성공할 수도 있었겠지 만, 도서시장이 인쇄술의 개발을 유도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일이 관제官制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적私的으로 이루어졌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 과학문화에 대한 호기심 역사적으로는 기술이 먼저 자생했으며, 기술이 과학을 자극했다. 이어서 이 관계가 역전 되면서 과학이 기술을 유도했으며, 19세기 이후에는 과학과 기술이 융합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동안 고등학교에서 문과-이과를 구분했고, 2002년에 취임한 서울대 신임 총장 은 신입생 선발의 '지역할당제’(일종의 구시대적 '배급제’)를 언급하면서 입학전형 방법을 미분微分하고 있지만, 문과-이과가 융합되는 적분積分의 시대에 들어선 지 이미 오래다. (이런 의미에서 2002년부터 제7차 교육과정의 시행으로 문과-이과 구분이 사라 진 것은 발전적이라 할 수 있다.) 이른바 퓨전fusion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를테면 의학은 물론 생물학, 컴퓨터, 심리학, 윤리학 등이 협조하지 않고는 뇌腦를 연 구하기가 어렵다. 오늘날에는 많은 과학자들이 과학을 진전시키기 위해 기술 연구에 관 여하며, 또 많은 공학자들이 기술을 한층 발전시키기 위해 과학 연구에 종사한다. 과학 과 기술의 경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서구에서는 과학과 기술의 통 합적 용어가 없어서 곤란을 겪고 있다지만, 뒤늦게 서구의 과학과 기술을 도입하기 시작 한 우리는 처음부터 '과학기술’을 통합적으로 이해한다. 한자어권에서 '과학’은 원래 과거지학科擧之學에 근거한 '분과分科의 학學’을 의미 했지만 19세기에 들어와 근대적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영어권에서는 science(14세 기 초)나 engineer(14세기 초)가 technology(17세기 초)보다 먼저 사용되었지만 artist 를 본딴 scientist는 1834년 영국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engineer는 재능, 상상력을 의 미하는 라틴어 ingenium에서 유래했다. 이른바 17세기 과학혁명의 시대에도 과학은 기술보다는 철학의 범주에 들었다. 뉴턴 Isaac Newton(1642∼1727)의 《프린키피아》는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다룬 것이 다. (그는 우리에게 알려진 이후로 뉴톤, 뉴우톤, 뉴튼, 뉴우튼, 뉴우턴, 뉴턴 등으로 이름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우리 사회에는 뉴턴보다 앞서서 자연철학에 대해 지적 호기심을 보인 사람들이 있다. 황 진이가 자신을 포함하여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한 서경덕徐敬德(1489∼ 1546)은 집안이 가난하여 독학했지만, 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로서 궁리窮理와 격치格致 에 관심을 보였다. 17세기에 들어와서는 조선의 실학자實學者들이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 한 호기심이 많았다. 특히 관직에 나가지 않았거나 귀양 생활을 한 사람이 학문을 발전 시켰다. (역설적이지만 당시의 유배流配제도는 정신을 자유롭게 하여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지봉유설芝峰類說》의 저자 이수광李磎光(1563∼1628)은 서학西學을 최초로 도입했 고, 과거科擧를 단념하고 《반계수록磻溪隨錄》 등의 저서를 낸 유형원柳馨遠(1622∼ 1673)은 실학의 체계화에 노력했다. 뉴턴과 거의 같은 시기에 살았던 김석문金錫文(1658 ∼1735)은 최초로 지전설地轉說을 소개했다. 그는 인류 역사와 문명, 자연 현상은 일정 한 시기를 주기로 흥망성쇄를 되풀이한다는 순환론적 역사철학을 개진하기도 했다.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했던 이익李瀷(1681∼1763)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서양의 과학기술을 적극 수용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으며, 지구의 구형설球形說과 지심론 地心論(중력) 등을 폈다. 홍대용洪大容(1731∼1783) 역시 지전설을 주장했으며, 《의산 문답醫山問答》 등의 저서를 통해 자연철학 및 과학사상을 소개했다. 실제로 혼천의渾天 儀를 비롯한 천체관측기구를 제작하기도 했지만, 특히 그의 우주론은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성운설星雲說에 필적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신분 의 차이 없이 8세 이상의 모든 아동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개혁사상을 제창하기도 했다. 1780년대 이후의 실학자들에게는 서학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서출 庶出이었던 박제가朴齊家(1750∼1805)는 청淸의 풍물과 제도를 시찰한 결과를 바탕으로 1778년에 《북학의北學議》를 펴내고, 1786년에 정조에게 상소했는데, 서양 선교사 초빙 과 과학도서의 수입, 유학생 파견을 주장했으며, 공업 표준화도 언급했다. 기술은 수요 가 있을 때 발달하는 것으로서, 검소하여 비단 옷을 입지 않으면 직조기술이 퇴보한다 고 했다. 재물은 샘물과 같아서 퍼내야 다시 생기는 법이라며, 상인은 사농공상士農工 商 사민四民의 하나로서 나머지 셋을 서로 통하게 해주는 사람이니 마땅히 인구의 10분 의 3은 되어야 한다면서 서비스산업의 도래를 예견하기도 했다. 소설가로 더 알려진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저자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청의 문화를 소개하고 이용후 생利用厚生의 실학을 강조했다.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과학기술 관련 기관으로 이용감利用監 설립을 제안했다. 기 중기를 처음 만들어 실용하기도 했으며, 과학기술을 신분제도의 타파와 결부시키려 했 다. 또한 기술은 시대가 지날수록 더욱 발전한다는 기술발전론을 펴기도 했다. 일제 때 엿장수의 파지破紙에서 발견했다는 이규경(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 散稿》는 1830년쯤에 집필한 것으로, 정전기와 발전기 등 과학기술 관련 항목을 비롯하 여 1417개의 항목으로 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1천 권이 넘는 책을 집필했지만 그 10분의 1 정도만 겨우 남아있다는 최한기崔漢綺(1803 ∼1875)는 국내보다는 외국에서 먼저 연구가 시작된 과학사상가인 동시에 경험철학자였 다. 이를테면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를 각각 가백니歌白尼와 각백이刻白爾로 표기했고, 소리와 냄새를 파동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경험주의적 인식론을 확립하여 사물을 수학 적, 실증적으로 파악할 것을 주장했다. 수학을 공부하면 판단력을 기를 수 있어 선악善 惡 허실虛實을 구별할 줄 아는 능력이 생기고 다툼이 없는 밝은 세상을 만드는 데 도움 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아무튼 당시 실학자들 자신은 여전히 유교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약용처럼 기중 기를 만들어 쓴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과학기술의 실천에도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 며, 백성의 과학화에는 무관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그들에게는 민간 주도의 개념이 없었으며 정부 주도를 먼저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동아시아는 근대 화, 개방화가 진행되는 시기였지만, 우리 사회는 오히려 보수화되면서 쇄국주의로 치달 았다. 홍대용은 후종候鐘(서양식 자동시계)을 만들었지만 집안의 농수각籠水閣에 두고 혼자만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과학기술은 일반적으로 실용성보다는 지적 관 심과 철학적 호기심에서 출발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놀이’의 차원에서 이해해야할 측 면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는 과학기술자 자신이 솔선해서 실용성을 앞세우는 나 머지 정부가 지나치게 실용성을 강요한다면 오히려 과학기술의 발전과 문화적 토양의 형 성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실학자들의 시대와 지금의 문화적 상황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으로 보 인다. 14∼16세기의 르네상스는 기예와 철학이 만나서 고급 직인職人, artisan이 등장 한 시대였지만, 우리는 문예부흥文藝復興이라 하여 '문예’에 초첨을 맞추면서 르네상 스의 핵심인 과학기술을 외면한다. 이렇게 과학기술이 문화로 정착될 수 있는 길이 막 힌 것이다. 1967년에는 한국과학기술후원회가 발족하고 1996년에는 한국과학문화재단으 로 확대 개편되면서 과학문화 운동을 펼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의 '문화행사’ 코너나 '문화캘린더’에서는 과학기술 관련 행사를 철저하게 배제한다. 과학기술문화 는 여전히 '문화’의 축에 끼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새삼스럽게 기초과학 육성론이 대두되고 있지만, 정부가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한 다고 하더라도, 일반적 문화활동에 대한 지원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놀이’의 차원에 서 지원해야 할 것이다. 임무를 부여하거나 단기적인 실용적 결과를 강요한다면 과학기 술자의 창조적 두뇌가 자유롭게 활동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한편 최한기도 지적했지만, 기초과학 육성보다도 시급한 것은 非이공계에 대한 과학, 수학 교육의 강화라 할 수 있 다. 그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몰이해沒理解 때문에 과학기술 문화를 외면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 이공계 기피의 실상 일본의 제도를 모방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근거가 있어서였는지는 몰라도 그동안 국내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을 문과-이과로 나누어 '반토막’ 교육만 해왔다. 최근 대학입시 에서 이른바 교차지원이 허용되자, 수학능력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한 전략의 하 나로 이공계를 지원하려는 학생 중에 문과반을 택하는 수가 많아지면서 이과반의 학생수 가 줄어들자, 이공계 기피현상이라는 말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2002년 7월에 열린 국가 과학기술위원회는 물론 각계각층에서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각하다면서 병역 혜택을 포 함한 다양하고 세부적인 이공계 장려 정책들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학계에서는 오히려 대학 정원의 감축을 논의하고 나섰다. 역시 청기 와장수의 이야기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이공계를 전공하여 남보다 잘 먹고 잘 살 수 있 다면 이공계가 아무리 어려운 분야라고 해도 이공계를 지원하려 할 것이다. 생각해 보 면, 이공계 기피현상이 지속되어 이공계 인력의 희소가치가 증가한다면 다시 이공계를 선호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결국 이공계 인력시장의 문제인 것이다. 공급이 달리는 것이 아니라 수요가 모자라는 것 이다. 그렇다면 이공계도 장려가 아니라 의학계처럼 대학 정원의 감축을 논의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공계는 고교생들에게 큰 인기가 있어서 우수한 학 생들이 몰려들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조선시대만 해도 이공계 교육기관의 불모지였고, 일제시대에는 의도적으로 이공계 교육을 억제했으므로, 이공계 인력이 모자 라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몇 년 전 연구중심대학, 대학원중심대학을 육성한다는 정책이 발표되기 시작하면서 오히 려 이공계 대학원들은 정원미달사태가 속출하면서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IMF 관리 체제에 들어가면서 가장 먼저 '구조조정’(인력감축)의 대상이 된 것이 각종 이공계 연 구소였던 것이다. 이공계 기피 현상, 좀더 정확히 말해서 이공계 인력시장의 축소 현상은 선진국에서는 이 미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온 것으로 새삼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미국의 경우 이공계 대 학원에는 외국인 학생들의 비율이 아주 높다. 이들이 없다면 미국의 대학원은 물론 학문 도 붕괴될지 모른다. 이러한 선진국의 사례를 벤치마킹한다면 해결책은 저절로 나온다. 우리보다 후진국의 우 수한 두뇌를 국내로 유치할 수 있는 인센티브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우수한 이공계 두뇌가 선진국의 대학원에 진학할 경우에는 등록금이 면제되고 생활비도 받으며 의료보험의 혜택도 보장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처럼 미국이 외국인 학생들에 게 각종 혜택을 주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의 창조성과 열의가 미국의 과학기술 발전 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선진국에서 공부한 학생들은 귀국하였을 때 '몸값’이 올라가므로, 양쪽의 이해가 맞아떨어진다. 그런데 우리의 정책은 구태의연하기만 하다. 2002년 4월과 7월에 각각 설립된 대규모의 이종환 교육재단과 삼성장학재단도 마찬가지이다. 기업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라 하여 칭찬들이 자자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우수한 두뇌의 해외 유출을 조장하고 있 는 셈이다. 외국으로 나가는 이공계 유학생들에게 거액의 장학금을 지불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에 환원해야 할 돈으로 국내가 아니라 외국의 대학들을 지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기업이 사회에 기여하는 첫 번째 길은 고용창출이다. 두 번째가 인재 양성인데, 국내 대 학과의 산학협동체제를 구축하여 지원하는 것이 국가적으로 가장 생산적인 방법일 것이 다. 우리도 이제는 외발적外發的 개화의 의존에서 탈피하여 내발적內發的 개화의 수준 에 올라섰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유럽 국가의 대부분은 인력을 국가에서 양성하므로 대학 등록금이 없고, 미국은 사립대 학이 20% 정도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사립대학이 거의 80%에 이른다. 대부분의 학생들 이 자비로 공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은 대학졸업생을 그야말로 '맨입’에 데려 가려고 한다. 역시 인력의 공급초과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과학기술도 정부 주도나 청사진적 정책이 아니라 자기조직적 자유시장이라야 창 의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이 '청기와장수’ 이야기의 함의含意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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