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중국 영화가 들어온 일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일제시대에 중국 영화가 들어왔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할 바가 없고, 1956년 고려영화사에서 수입․개봉한 「해당화(海棠花)」가 그 제1호로 기록되고 있다. 그 이후 1960년대 말 후진취안(胡錦銓)의 영화가 대거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중국 영화에 대한 우리의 각별한 관심이 불붙기 시작하였다. 1967년 「대취협(大醉俠, 1966)」 이 들어온 이후 「용문객잔(龍門客棧, 1967)」, 「협녀(俠女, 1971)」, 「영춘각의 풍파(迎春閣之風波, 1973)」, 「충렬도(忠烈圖, 1975)」, 「산중전기(山中傳奇, 1979)」, 「천하제일(天下第一, 1982)」 등 그가 이름을 날린 작품들이 연이어 1980년대 초반까지 소개되면서 후진취안은 한국에서 중국 영화에 대한 폭발적 관심을 이끌어내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7년 「방랑의 결투」라는 제목으로 개봉된 「대취협」은 한국에 최초로 수입된 홍콩 ‘무협영화’로 기록되었다. 1968년 「용문의 결투」라는 제목으로 수입된 「용문객잔」은 그 해 흥행 1위를 기록했다고도 하니 가히 1960년대 말부터 중국 영화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고 하겠다. 후진취안과 함께 1970년대를 풍미했던 감독이 바로 장처(張徹)였다. 1968년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던 「독비도(獨臂刀, 1967)」, 「돌아온 외팔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던 「독비도왕(獨臂刀王, 1969)」 등은 모두 이른바 ‘외팔이 시리즈’로 불리면서 중국 영화에 대한 한국인들의 지대한 관심을 이어갔다. 이와 같은 중국 영화에 대한 관심은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리샤오룽(李小龍), 청룽(成龍) 등의 무협-쿵푸 영화와 훙진바오(洪金寶)의 코미디 시리즈로 이어지더니 청샤오둥(程小東)의 「천녀유혼(倩女幽魂, 1987)」이 장궈룽(張國榮)과 왕쭈센(王祖賢)이라는 탁월한 배우들을 발굴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우위썬(吳宇森) 감독의 「영웅본색(英雄本色, 1987)」을 필두로 한 누아르(noir) 영화 시대를 개막했다.
지금까지 열거한 영화들은 중국 영화라고는 했지만 사실은 모두 ‘홍콩’ 영화였다. 홍콩 영화가 지속되는 자기 반복을 통해 침체의 길로 걸어 들어가고 있을 무렵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중국, 죽의 장막에 가려있던 ‘대륙’ 중국의 영화가 다가왔다. 1950년을 전후하여 태어나고 중・고등학교 시절 문화혁명을 겪으면서 그 상처를 고스란히 겪으면서 자라나면서 때로는 홍위병으로 때로는 변방의 농촌으로 하방(下放)되었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극도의 은유와 강렬한 형식미학에 의존한 주제의식의 표현을 위해 1930년대, 혹은 그 이전의 시간까지도 거슬러 올라가는 농촌 혹은 변두리에서 스크린을 포착했던 5세대 감독들의 영화였다. 그들의 영화는 과거에 대한 회고는 있으되 그에 대한 치열한 비판은 진한 색채와 화면의 분할 뒤로 은폐되었고 과거로부터 연유했을 현재에 대한 직설은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비판적인 의견에도 불구하고 홍콩 영화를 대신하여 새로운 중국 영화의 스타일을 선보이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다만, 5세대를 대표하는 장이머우(張藝謀)나 천카이거(陳凱歌)의 영화는 1990년대 초반까지 계속되었던 홍콩 영화에 대한 관심을 능가하지는 못했다.
2. 중국 영화에 대한 우리의 관심
이처럼 중국 영화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영화 보기’의 양상으로 발현하였다. 우리에게 소개된 중국 영화의 계보를 간략하게나마 훑어본 것은 이와 같은 영화 수입 혹은 유입의 역사와 그에 대한 연구의 역사가 지나치게 파행적인 불균형을 이룬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요컨대 1950년대 말 중국 영화가 처음으로 한국에 유입된 이후, 이 땅에 중국 영화에 대한 환호와 열광, 오마주(homage)는 있었으되, 그에 대한 진지한 학문적 뒷받침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로 기존의 중국영화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조 위에서 한국에서 중국 영화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띤다.
첫째, 현상은 있으되 연구는 없었다.
중국 영화에 관한 학문적 초창기 연구라 할 수 있는 결과물은 1980년에 등장한 것으로 파악된다. 리여우닝(李祐寧)의 글을 문상명이 번역하여 「중국 영화 70년사」라는 제목으로 ꡔ영화ꡕ(제68호, 영화진흥공사, 46-57쪽)에 실은 것이 최초의 학문적 관심이라 보인다. 이 글은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중국 영화의 발원, 영화교육이 강화되었던 중일전쟁 시기, 종전 후의 중국 영화, 타이완 영화산업 발전의 초기, ‘타이완어 영화’와 민영 영화의 발전 등 10개 항목으로 나누어 중국에 영화가 유입된 이후 약 70년 간의 역사를 정리하여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특별한 관점이 없이 자료의 나열과 서술이 주를 이루고 있을뿐더러 필자 자신이 타이완에 국적을 두고 있었으므로 ― 당시 이데올로기의 장벽으로 인해 대륙 중국의 영화는 우리에게 소개될 수도 없었겠지만 ― 앞서 살펴보았던 바와 같이 타이완에서의 중국 영화사 연구의 한계를 그대로 노정한 채 우리에게 ‘수입’되었다고 하겠다. 그 이후로 약 20년 동안 중국 영화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전무한 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마 조기업(「중국 영화의 새로운 기수들: 제5세대 감독과 중국 영화」, ꡔ영화ꡕ 제122호, 1989), 조희문(「아시아 각 국의 영화 수용에 관한 고찰: 인도, 중국, 일본을 중심으로」, ꡔ영화평론ꡕ 제2호, 1990), 변인석(「아시아영화의 용머리, 중국․홍콩․대만영화」, ꡔ영화ꡕ 제139호, 1991) 등에 의해 간헐적인 관심만이 이어져 왔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1950년대이래 1990년 초반까지 한국에서 중국 영화에 대한 관심은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자리잡지 못했던 것이다. 영화, 특히 무협과 액션, 코미디 등으로 점철되었던 중국 영화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련의 현상들이 사회학, 심리학, 문화학, 심지어는 중국학, 영화학 등 그 어느 학문 분야에서도 돌보아지지 못한 ‘고찰’의 사각지대로 남아 있었다. 무려 30년 동안이나 계속된 “현상은 있으나 해석은 없는” 이와 같은 상황의 밑바닥에는 기본적으로 ‘영화’ 자체가 학문의 영역으로 범주화될 수 없다는 인식론적 문제가 짙게 드리워있다고 할 것이다. 영화는 오락의 대상, 혹은 유통 시장의 상품은 될 수 있을지언정 그 자체로 ‘학문’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던 일반적인 인식의 범주를 극복하지 못했다. 영화 연구 자체가 미국 등 서구에서도 1970년대에 들어서서야 학문적 대상으로 범주화했던 점을 생각해 보면, 이 또한 비단 우리만의 상황은 아닐 것이다.
둘째, 중국 영화는 아시아 영화의 일부에 불과했다.
중국 영화에 대한 본격적인 학문적 관심은 1990년대, 영화학계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는 1992년 8월 한․중 수교로 인한 대륙 중국과의 교류 확대, 영상문화 자체에 대한 관심의 증대, 90년대 중․후반의 동아시아 담론의 성행에 따른 주변국의 문화 현상에 대한 관심의 확장 등과 맞물리는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 따라 등장한 성과 가운데 현재 파악되는 최초 중국 영화에 관한 학위논문으로 도성희의 연구(ꡔ중국 영화 제5세대 연구ꡕ, 중앙대 석사논문, 1992)가 있다. 이 연구는 제3국을 통한 단편적인 정보에만 의지해 왔던 기존의 연구상황을 극복하고 직접적인 자료의 수집과 분석을 통하여 “중국 근대사의 격동기가 배태시킨 일군의 젊은 창작자의 그룹”인 제5세대 감독과 그 영화가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들을 역사적 관점에서 살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논문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한동안 중국 영화에 대한 연구는 독립적인 주제로 정착되지 못하고 아시아 영화 연구의 일부로 편입되어 진행되어 왔다. 이러한 성과들로는 주윤탁․김지석(ꡔ아시아 영화의 이해ꡕ, 제3문학사, 1993), 한국영화학회(ꡔ아세아 영화연구ꡕ, 행복한집, 1998) 등의 연구를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연구 주체가 영화학계라는 사실 때문에 아시아 영화를 폭넓게 보려고 시도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인도를 비롯하여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일본, 타이완, 홍콩, 대륙 중국 등을 포괄하여 이들 나라의 영화사와 특정한 시기 또는 주제를 병치시키는 방법론을 사용함으로써 폭넓은 논의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반면, 그에 따른 특정한 주제에 대한 깊이는 상대적으로 깊이를 담보하지 못했을 뿐더러 각 국의 언어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일어나는 원자료를 충분히 검토하지 못하거나 사실(fact) 자체에 대한 심각한 오류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는 점은 이들 연구의 한계라 하겠다.
셋째, 홍콩 영화, ‘심심풀이 오징어 땅콩’에서 ‘진지한 성찰의 대상’으로
한국 사회의 오락문화를 규정함에 있어 비껴갈 수 없는 장르, 홍콩 영화에 대한 진지한 물음은 1990년대 중반에 와서야 시작되었다. 이는 앞서 말했던 바와 같이 우리 삶의 오락거리로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홍콩 영화현상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찰의 차원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수준 떨어지는 영화”, “황당한 영화” 등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세계 시장에서 미국 영화 다음으로 가장 수출이 잘 되는 영화이자 기술적으로도 우리를 훨씬 앞서 가” 있던 홍콩영화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시작된 것이다. “어느 동네 할 것 없이 비디오 대여점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영화가 홍콩영화라는 우리의 현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 대한 반성이 시작된 것이다. 그 반성의 주요한 결과가 김지석․강인형의 연구(ꡔ향항전영(香港電影) 1997년ꡕ, 한울, 1995)였다. 이 저작은 우리에게 이상 현상으로 기록될 만큼 열풍으로 다가왔던 홍콩 영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에 힘입어 그 역사와 산업, 그리고 작품으로서의 갈래의 문제 등을 다룸에 있어 대중성과 학술성을 함께 아우르고 있다. 무협, 코미디, 멜로 등 장르적 특성을 다분히 가지고 있던 홍콩 영화를 각각 성인들의 동화, 희화화된 홍콩인의 자화상, 메마른 도시의 영양제 등으로 해석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넷째, 홍콩에서 대륙으로, 혹은 중국 영화를 보는 시선의 패닝(panning)
공교롭게도 홍콩영화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시작될 무렵, 홍콩 영화 자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중국 영화에 우리의 대한 연구는 대륙 중국 영화의 유입과 더불어 그에 대한 관심으로 급격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홍콩 영화가 단지 대중적 취미에만 영합한 저급한 상업영화라는 인식이 기저에 깔려있던데 비하여 대륙 영화, 특히 5세대 감독을 중심으로 우리에게 소개되었던 영화들은 나름대로의 미학성을 담보하며 인간의 삶과 역사에 대한 고민을 끌어안고 있다고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영상문화의 확산과 영상 텍스트의 강력한 부상 등은 인문학 자체의 욕망, 즉 인간과 세계의 문제를 진단․해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려는 노력과도 일치하면서, 더 이상 중국 영화연구가 영화학계만의 전유물이 아닌 인문학 전반으로 확산되는 현상도 드러났다. 그에 따라 연구주체가 다변화하기 시작했는데 그 가장 핵심적인 변화가 기존 중국학계의 영화에 대한 관심의 확장이다. 요컨대 홍콩에서 대륙으로라는 대상의 ‘패닝’과 더불어 주체의 ‘확장’이 이루어졌다고 할 것이다.
대륙 영화에 대한 저널리즘적 관심과 학술적 연구가 혼재되면서 특정한 시기 또는 세대를 중심으로 하거나 특정한 작품에 대한 비평의 차원에서 지속되어 왔다. 김영란(ꡔ첸카이거의 중국적 영상미와 주체의식 연구ꡕ, 동국대 석사논문, 1996), 전평국(ꡔ중국 제5세대 영화의 영상 미학적 연구ꡕ, 중앙대 박사논문, 1997), 류재형(ꡔ중국 제5세대 영화의 도가적 미학특성ꡕ, 서강대 석사논문, 2000) 장수봉(ꡔ장이모우의 몽타주 미학ꡕ, 서강대 석사논문, 2000) 등은 대부분이 중국 영화의 미학을 탐색하되 전통성의 계승에서 그 해법을 찾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오늘날의 중국 영화의 형식이 단지 서구의 이식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중국 전통의 미학적 특성을 계승하고 있음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연구방법의 변화로 인한 내재적 접근법의 취용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정수국(「신시기 이후 중국 영화산업의 동향」, ꡔ중국연구ꡕ 제13호, 건국대 중국연구소, 1994), 이욱연(「동양적인 것의 두 운명: 장이머우와 리안의 영화」, ꡔ창작과비평ꡕ 제90호, 1995 / 「장이머우 영화와 중국 전통사회」, ꡔ역사비평ꡕ 제35호, 역사문제연구소, 1996), 김양수(「중국 ‘5세대 감독’의 영화와 오리엔탈리즘」, ꡔ현대중국연구ꡕ 제4집, 성균관대 현대중국연구소, 1997), 송철규(「영화 속에 나타난 북경」, ꡔ중국학연구ꡕ 제21집, 중국학연구회, 2001), 장용화(「對陳凱歌電影«黃土地»的若干個見解」, ꡔ中國現代文學ꡕ 第20號, 韓國中國現代文學學會, 2001), 임대근(ꡔ초기 중국영화의 문예전통 계승연구(1896-1931), 한국외대 박사논문, 2002), 남지현(「張藝謀 女性三部作에 나타난 女性形象硏究」, 숙명여대 석사논문, 2003), 백현주(「<妻妾成群>과 <大紅燈龍高高掛>의 比較硏究」, 숙명여대 석사논문, 2003), 제영미(「중국 제5세대 張藝謀 감독의 작품속에 나타나는 민족의식」, 동의대 석사논문, 2004) 등은 중국 영화를 인문학적 시각 또는 중국의 문예 현상과의 연관성 속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일련의 노력으로 받아들여지는 중국학계의 성과이다. 요컨대 1990년대 중반 이후 우리나라의 중국 영화 연구는 연구주체, 연구대상, 연구방법 등의 측면에서 다변화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최근에는 영화에 대한 관심과 중국에 대한 관심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중국 영화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는 계기를 맞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의 중국 영화 연구에 있어 2000년도는 중국 영화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전문서가 2권이나 출간되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준 해이자 그 원년이라는 평가를 부여할 만하다. 그 하나는 슈테판 크라머(Stefan Kramer)의 것(황진자 옮김, ꡔ중국 영화사ꡕ, 이산, 2000)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종희의 연구(ꡔ중국 영화의 어제, 오늘, 내일ꡕ, 책세상, 2000)이다. 전자는 비록 서구 학자의 연구를 번역했다는 아쉬움은 있으나 초창기 중국 영화의 탄생에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영화사를 정치․사회적 관점과 결합하여 기술함으로써 일관된 시각을 통해 우리에게 중국 영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었다는 데 의의가 있으며, 후자는 간혹 중국적 관점이 내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우리 학자에 의한 첫 관련 전문서라는 의의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3. 맺으며
이상과 같이 중국 영화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연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30년 가까이 오락의 대상으로만 취급되어 오던 중국(홍콩) 영화에 대한 관심은 기본적으로 (옐로우) 저널리즘적인 것이었으나 1990년대를 기점으로 하여 아카데미즘의 영역으로 편입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의 상호 대립을 전제로 하여 어느 한 편으로의 귀속이라고 설명하기보다는 두 영역이 점차 그만큼의 공유부분을 확대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중국 영화가 독자적인 지역의 영화로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기존의 중국 영화에 대한 관심은 기본적으로 ‘홍콩’영화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딱히 ‘중국’ 영화에 대한 관심이었다 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그리하여 홍콩 영화 또한 주로 아시아 영화의 일부로서 다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영국도, 그렇다고 중국도 아닌 혼돈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던 홍콩 영화를 중국 본연의 것이었다고 인정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지만, 대륙 영화의 유입과 대만 영화계의 중흥으로 인해 ‘온전한’ 중국 영화에 대한 관심의 확장이 시작된 것이다.
셋째, 중국 영화 연구가 다만 영화 미학적 측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영화의 본래적 속성과도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겠지만, 중국 영화 연구가 ‘영화학적’ 입장과 ‘중국학적’ 입장의 상호 보완 속에서 진행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연구주체의 등장, 새로운 연구방법론의 개발 등이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무엇보다도 우리 삶의 매우 중요한 부분을 구성해왔던 후진취안, 장처, 리샤오룽, 청룽, 장궈룽, 저우룬파, 류더화 등을 둘러싼 문화현상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통해 이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한국 사회와, 한국의 대중들과 관계 맺었는지를 탐구하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중국 영화 연구는 그 앞날이 널리 열려 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