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관하여
고교시절 작문 시간에 자유로운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다. 제목은 ‘마음에 관하여.’ 선생님은 나더러 너무 추상적이고 광범위한 주제이므로 재고하기를 권하셨고, 나는 즉각 다른 주제를 찾아 글을 썼던 것 같다. 그리고 얼마 전, 나는 직장상사에게 ‘저 역시 마음이 아팠어요.’하고 말하는 나 자신과 일별하였다. 그 말을 하고는 하루 종일 젖은 양말을 신은 기분이었는데, 왜냐하면 ‘마음’이라는 단어를 내가 너무 분별없이 사용해버렸다는 자괴감이 들어서였다. 지금 다시 생각하건대, 마음에 대한 분별이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어쩌면 나는 ‘마음’을 하나의 관념이 아니라, 실체하는 상식 같은 것으로 암암리에 여기고 있는 건 아닌지? 나는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직장상사는 ‘저 역시 마음이 아팠어요.’에서 ‘마음’을 우리가 서로 공유하고 있는 제반적 인식 따위로 생각했을까? 그러니까 서로 ‘마음’이 통했다고 받아들였을까? 그렇다면 자유로운 주제에서 '자유'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걸까?
일편, 미키 사토시의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스파이 역할를 수행하는 여자주인공은 그녀가 스파이라는 걸 주변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평범하게 살아가라는 임무가 주어진다. 때문에 그녀가 심야도로를 규정 속도를 지키며 운전하고 있을 때, 경찰 오토바이가 추적해 와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시간에 규정 속도를 정확히 지키면서 달리는 걸 보니 당신 혹시 잘못한 거 있나요?” 이후, 그녀는 과속으로 달리기 시작하는데, 다시 오토바이; “당신은 규정 속도를 위반 했습니다.” 대체 ‘평범’이란 무엇일까? 난 평범한 사람이야. 혹은 문학 없는 문학, 믿음 없는 믿음, 생각 없는 생각 이런 부정도 긍정도 아닌 중의적인 표현은 존재와 사유의 근본적인 불일치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 ‘관념적’으로 실존하는 한 방식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예전에 그러니까 대학시절에 Y라는 후배와 바닷가 근처에서 막노동을 한 적이 있었다. 그날은 태풍이 북상한 터라 비가 세차게 내렸고, 아무도 일터로 나가지 않았었다. 나 역시 숙소에서 뒹굴고 있었는데, 후배가 비를 쫄딱 맞고 들어오더라. 어디 갔다 오니? 하자, 바닷가에서 거센 파도를 벗삼아 나체로 수영을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너 자유를 만끽 했겠구나.’ 하자, 후배는 ‘난 선배처럼 자유를 갈구하지 않아요.’ 했었다. 그때에도 나는 그로부터 몇 개월 뒤 군복을 처음 입었을 때와 같은 기분으로 나의 자유를 (괄호)치고 있었다.
‘존재’가 그런 것처럼, ‘마음’ 역시 가장 친숙한 것이며, 자연스럽고 당연하기 때문에 ‘마음이란 무엇인가?’라고 응당 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음’의 그 흔한 용례들은 그러한 물음이 대답을 확정지울 수 없는 집합적 명칭을 가지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정치학자 스티븐 룩스(Steven Lukes)는 『자유주의자와 식인종』이라는 책에서 ‘공동체주의’라는 새로운(?) 관념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기도 한다. <공동체주의는 새로운 관념이 아니며, 심지어는 오랜 관념의 새로운 변종도 아니다 (......) 공동체주의는 인종분열, 대량이주, 경제의 전지구화, 문화적 자본의 침식, 사회민주주의는 그만 두고라도 일체의 사회주의적 전통의 부재 등이 더욱 급성으로 악화시키고 있는 오늘날 미합중국의 딜레마와 대면하려는 정력적 시도들의 범위를 가리키는 집합적 명칭이다> 내가 보기에 집합적 명칭들의 무한증식이란 관념의 언표를 통해 실존하며, 무한한 외연을 가지되, 내연(내용)을 가지지 않는 아포리아들을 생산하는 과정을 뜻한다. 때문에 마음에 관한 논의는 ‘마음’을 규명하기보다는 ‘마음’의 종류 같은 것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마음이란 하나의 은유이자, 추론할 수 없는 장소를 고지하고, 영속적이라고 말할 수 없기에 더욱 당혹스러워해야할 불상사인지도 모른다. 나의 마음은 너의 마음과 별개의 궤도를 순환하는 것인지, 너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나의 마음도 가변적인 모양새를 갖추게 되는 건지 나는 도저히 알지 못한다. 다시금 문학 없는 문학, 믿음 없는 믿음, 생각 없는 생각, 마음 없는 마음은 문학이 아닌 상이한 것을 끌어와 참칭할 수밖에 없고, 믿음을 원용하지 않는 믿음이란 없으며, 생각이 없다고 하자마자 그건 생각에 일부이면서, 마음의 허전함 그건 마음이 곧 아무것도 아니되, ‘것’이기는 하다는 걸 가리킨다.
이‘것’은 더 이상 나의 마음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의미의 과잉성’이 낳는 저자의 죽음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고유명사가 없는, 어쩌면 일반적이거나 집합적인 명칭이 아닐 수도 있는, 단독성으로서의 고유명사 같은 것 말이다. <예를 들어 내가 칸트라고 부르는 것은 ‘작가’를 가리키지 않는다. 또 서양이나 독일에서 전유된 철학자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칸트의 텍스트는 ‘공공적’으로 열려있다. 나는 그 가능성을 칸트라고 부른다.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그러나 ‘존재’와 같은 의미에서 ‘마음’은 일반명사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칸트의 ‘공공성’과 마음의 ‘공공성’의 결정적인 차이는 중심의 유무-그것이 비어있는 중심일지라도-에 달려 있다. 나는 마음이라는 아포리아의 ‘뛰어도 돌아도 더 큰 원을 그리는’ 일종의 미로 속을 방황한다. 이는 다리가 아프다거나 마음이 아프다와 같이 아픔을 표현하는 언표들을 가정할 때 확연히 드러난다. 먼저 다리가 아프다고 할 때, 나는 신체부위를 가리키지만, 마음의 경우엔 정확하게 가리키는 방점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리가 아픈 것보다 마음이 더 아픈 것이다. 때로 이 고통들은 포개진다.
『마음의 종류Kind of Minds』라는 책에서 대니얼 데닛(Daniel C. Dennett)은 이 우주를 통틀어 나를 제외하고는 마음이 없는, 그러니까 나를 제외한 모든 타인은 마음이 없는 기계인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든다. 그리고 나중에야 그것이 유아론(唯我論)이라는 걸 알고는 위안을 얻는다고 하는데, 나는 언젠가 이와 정확히 반대의 방향, 나만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닐까 고민했었다. 아니 이것도 ‘논평’이랍시고, ‘마음’에 관하여 뇌까리는 걸 보면 나는 나의 마음을 여전히 의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나는 ‘마음’이 없는데, 이는 내가 ‘마음’을 정의 내릴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에 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데닛은 그의 책에서 언어의 습득을 통해 마음의 종류를 헤아리고 있지만, 이 책 어디를 뒤져봐도 마음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은 찾을 수가 없다. 이미 데닛은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에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마음 없는 마음의 형식으로서의 외관의 문제는 그의 다른 책(『Consciousness Explained』)에 등장하는 좀비에 관한 시덥잖은 가정과 공명한다. <좀비는 완벽하게 자연스럽고 기민하며 수다스럽고 생기있는 행동을 보여주지만 사실상 전혀 의식적이지 않고 오히려 일종의 자동기계인 인간이거나 그런 인간이 되려고 한다. 철학자의 좀비 개념이 지닌 요점 일체는 외적 행동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는 좀비를 정상적인 사람과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친구들과 이웃들에 대해 우리가 도대체 알 수 있는 전부가 그뿐이므로, 당신들의 가장 친한 친구들 중 몇몇은 좀비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가설은 나로 하여금 다시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을 떠올리게 하는데, 영화에서는 또 다른 스파이-라면집 주인-가 등장한다. 그는 임무-평범하게 보여라-를 수행하기 위해 자신의 뛰어난 요리 실력을 감추고 평범한 맛이 나는 라면을 끓이며 살아간다. 어쩌면 이렇게 관념의 실존에 대한 강박적 자세야말로 내가 좀비라는 귀신들림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인지도 모른다.
David Russell / Mangore: Music Of Bar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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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UN SUENO EN LA FLORESTA (MANGORE) 2. GAVOTA MADRIGAL 3. DANZA PARAGUAYA NO.1 4. DANZA PARAGUAYA NO.2; IJHA, CHE VALLE! 5. DANZA PARAGUAYA NO.3; LONDON CARAPE 6. JULIA FLORIDA 7. VALS, OP.8 NO.3 8. VALS DE PRIMAVERA 9. VALS TROPICAL 10. VALS, OP.8 NO.4 11. LAS ABEJAS 12. FABINIANA 13. MAZURKA APASIONATA 14. PAIS DE ABANICO 15. CUECA 16. I PRELUDIO(SAUDADE) 17. II ANDANTE RELIGIOSO 18. III ALLEGRO SOLEMNE 19. A MI MADRE 20. CAAZAPA 21. UNA LIMOSNA POR EL AMOR DE D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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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렇다면 이 글은 고등학교 선생님의 재고로 인해 미뤄진 <마음에 관하여>가 되는 걸까요?... 마음이란게 있다고 믿는지 없다고 믿는지 역시 규정해보지 않았지만, 전 아마도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시간이 많은 것 같지만, 제 경우를 보면, 마음이 없는 듯 살아가면 차갑다는 말을 듣더군요...조카가 덧셈을 배우더군요. 그래서 8 더하기 6이 얼마지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 엄마가 가르쳐준대로 손가락 여섯개를 펴더군요. 그리고는 하나하나 세며 9,10,11,12,13,14 라고 말하고는 14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물었지요. 8은 어디에 있는데? 조카 왈, 큰 수인 8은 마음 속에 있다고 하더군요.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마음이란 말이 제 자리에 있구나, 하는 경험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케이님의 글을 보니, 그게 생각이 나서요. 그리고 질문 하나, 마음에 관한 글인데 얼굴 그림이 있는 이유를 혹 물어도 될까요? 더불어 음악 너무너무 좋아요. 글과 함께 맘에 꼭 와닿습니다.^^
마음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로는 혜가와 달마의 安心問答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네요. 마음의 평온함을 구해 찾아온 혜가에게 달마는 말합니다. 그 불안한 마음을 가져오라고... 이에 혜가가 마음을 찾을 수 없다고하니, 달마가 말하죠. "내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느니라." 찾을 수 있다면 어찌 그것이 혜가의 마음이겠습니까... 이토록 실체가 없는 마음을 사람들은 찾아 헤매고, 있다, 없다의 단상이견에 얽매여 살아갑니다. 실은 이 실체가 없다는 사실조차도 또 하나의 얽매임을 깨닫지 못한 채 말입니다. 심우도의 팔단계가 되면 人牛俱忘, 찾은 소도 나도 사라지게 되죠.
말장난 좀 해볼까요? ^^ 이 글을 읽고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힌 제 마음은 과거심일까요? 현재심일까요? 미래심일까요?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8주 후인가요? K님의 다음 글이 기다려집니다. ^^
uroboros님/건조한 제 글에 기름칠을 해주셨군요^^ 언젠가 데리다-권위에 호소하는 중이랍니다-의 책에서 비누로 손을 씻으면 그게 더러운 비누이고, 손일지라도 서로 깨끗해진다는 뭐 그런 문장을 읽은 것 같습니다. 제게 "생각에 사로잡힌 마음"에 관해 물어오셨는데, 어떻게 마음이 생각에 사로잡힐 수 있나요? 생각과 마음을 구별할 수 있다면 이미 uroboros님은 마음을 실체로 여기고 계신 게 아닌가요? 마음이 없다고 말하기 위해서도 '마음'에 관하여 이야기를 해야하는 것처럼 말이죠...
조주가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한 것은 있다 없다 구분짓는 그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일체중생실유불성아닙니까? ^^ 구할 수 없기에 양단에 얽매이지 말라는 금강경의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자문자답이 된 줄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말꼬리를 잡으시다니.... 음... 아무래도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멱살부터 잡은 후에 천천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