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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카페신태인 원문보기 글쓴이: 조성환(83년졸업)
박형준시인은 그런 면에서 본다면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1966년에 태어나서 올해 나이 마흔 하나가 된 이 시인은 직장에서 오래 버티는 재주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 이유인즉 여린 심성 덕분에 감원 얘기가 나오기 바쁘게 얼른 사표를 내고 일터를 떠나는데 일가견이 있는 탓이다. 정우 들판과 신태인 기찻길 오가며 시심을 기르고
그는 1996년도에 제1회 꿈과시문학상을, 시집[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로 제15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하였고, 제10회 현대시학작품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도서출판 작가가 실시한 `2005 오늘의 시`설문조사에서는 문태준, 문인수 시인에 이어 `가장 좋은 시인` 3위에 선정되는 등, 한국시단을 이끄는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 그가 2003년에 (주)현대문학을 통해 발표한 첫번째 산문집 [저녁의 무늬]에는 초등학교 5학년때 전학간 인천에서의 삶과 함께, 떠나온 고향에서의 어린시절과 가족에 대한 정을 담아 냈다. 올해 1월에 발표한 두번째 산문집 [아름다움에 허기지다]에는 자신을 낳아주고 가르쳐준 부모에 대한 정, 피를 나누어 가진 인연으로 가난한 고향과 힘겹고 낯선 도회에서의 삶을 함께 했던 형제들에 대한 이야기, 시인들과의 인터뷰와 여러 시인들에 대한 비평을 담았다. 선굵은 시인을 만나는 어려움 그를 문학으로 만나는 일은 간단치가 않았다. 그에 대해 아는 것도 거의 없는 처지여서 우선 여섯권의 책을 한꺼번에 구입하여 1달 넘게 틈나는 대로 읽었다. 또한 그의 산문집에 나오는 고향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 정우면 산북리를 세번에 걸쳐 찾아가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저작권 침해의 우려를 해소시키기 위해 창비와 현대문학에 메일을 보내어 허락을 얻기도 하였다. 통상적으로 시집이나 소설책을 직접 사보지 않고 인터넷에서 글감을 얻거나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또한 임의로 전재하거나 인용하는 일이 흔한데 정도가 지나치면 저작권 침해가 될 수 있다. 특히 문장전체를 옮기는 경우에는 재수록료를 내야 된다. 창비같은 경우에는 저자와 출판사의 서면 동의를 거쳐야만 재사용이 가능하다.그래서 이번에는 출판사의 양해를 구해 이 글을 쓰게 되었으며, 인용부분은 주를 달았음을 밝힌다. 또한 저자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저자의 삶과 고향에 대한 이야기는 신중을 기했다. 정우면 산북리에서 태어난 박형준
칠성바위 고인돌과 황새평의 전설을 찾아 몇번인가 가보았던 산북리에 이번에는 시인의 자취를 찾아 가보았다. 소년들이 학교를 가기 위해 오르던 산길이 어디쯤일까?기찻길이 마을을 둘로 나누어 놓은 곳이 저기였을까? 모정과 당산나무, 마을회관과 동네 가게를 바라보며 시인의 집을 그려보았다.(연재 중에 주인공의 집에 못가본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 될 듯) 유년시절 그는 정토산과 수금 방죽, 그리고 철길을 따라 신태인읍을 오가며 추억을 쌓았다. 하얀 눈이 가득 내린 날 정토산 산길을 따라 비료푸대로 만든 눈썰매를 타는 아이들속에 그가 있었고, 철길에 떨어져 있는 껌종이를 주우며 신태인읍에 있는 중국식당에 가서 음식냄새를 맡으며 도시를 꿈꾸는 아이들속에 그가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때이던 어느날 그의 어머니가 학교를 찾아와 선생님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눈다. 그사이 아이의 귀는 마냥 쫑긋해지고, 마음은 한없이 초조하기만 하였다. 드디어 이야기가 끝났는지 어머니가 그에게 다가와 `형준아 너 전학가게 되었다.`하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인천 수문통거리에서 시작하여 서울의 변두리로 떠돈 삶 그는 드디어 고대하던 서울로 가게 되었다고 믿었다. 전학가기 전날밤 그는 그동안 학교에서 받은 상장들을 하나하나 찢으며 `서울에서 성공하여 내 고향과 내 집을 구원하리라`는 결심을 한다. 그러나 그가 기차를 타고 간 곳은 서울이 아닌 인천이었다. 서울과 인천의 갈림길에서 그는 안간힘을 다해 유리창에 매달리며, 멀어져가는 서울로 가는 길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아쉬움을 온통 뒤집어 쓴 채 소년 박형준이 찾아가야 했던 곳은 인천의 변두리인 수문통거리였다. 바다가 마을 옆에 있는, 아니 바닷물이 집 밑에 있는 그 곳은 그가 꿈꾸던 미래와의 어긋남을 예고하는 출발점이었는지도 모른다. 산골, 들녁, 바다, 도시...그의 시를 발아시킨 종묘장 정토칠봉을 병풍삼고 드넓은 들판을 마당삼아 살던 고향이 전형적인 농촌이라면, 전학을 가서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시작하여 고등학교까지 다닌 인천은 바다의 도시였다. 절반은 산골이고 절반은 들녘인 고향과 함께, 절반은 도시이고 절반은 바닷가인 인천의 수문통거리는 그의 시를 발아시킨 종묘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1991년 스물다섯의 비교적 이른 나이로 등단에 성공한 뒤에도, 그는 이사를 다니면서 늘 변두리를 배회한다. 웬일인지 그가 다니는 회사마다 번번히 망해버리기 일쑤였는데, 이는 아무래도 詩의 神(뮤즈)이 그에게 시만 쓰고 살라고 운명을 이끈 탓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는 시인 이전의 시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시인 이전의 시인었나보다. 교회를 다니며 늘 아들에게도 집에서 가까운 교회에 다닐 것을 권유하는 어머니는, 홀로 사는 막내아들의 집에 20여 년을 한결같이 한달에 한번씩 찾아와 청소를 해주고 반찬을 만들어 주시곤 하였다. 아들의 부엌에 엎드려서 10년 넘게 일제시대 언문체투로 편지를 썼다고 하는 이 어머니는 아들에게 "협풍덧풍 살지말고 성실하고 부지른 하여서(...), 어머니 실망을 하여 눈의서 눈물을 가슴의서 터지는 목에 매는 눈물리 방울처럼 흘려 나오는구나 어머니 죄를 누기다 원망하리요(...), 너는 이 사회 생활리 시인이요 또 책을 만드는 작곡 작가로써 훌륭한 지급을 하나님께서 주솃으니 성실하고 부지른하고 겨으리지 안게(...), 몸도 단장하고 옷도 머싯잇게 입고 사람이 깨끗하면 흔옷도 조은 거시로 사람들은 한칭 돕뵈계 뵈너이라(...), 이런 글럴 어머니는 정성을 다해서 썻스니 귀찬한 눈이로 보지말고(...),옷도 정장 하여라...강하고 담대하여라, (...)너잠자는데 깨수업서 그양 간다 밥잘 먹어라 건강이 솟애내고 힘이 잇다(...),`어머니가 기도하는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 가슴을 찢어라 그래야 네삶이 보인다" 고 당부하였던 것이다. {주1} "가슴을 찢어라 그래야 네 삶이 보인다" 나이 들어서도 아직 결혼하지 않는 아들, 자주 직장을 때려 치우고 방에 들어앉아 시만 쓰는 아들이 엄마는 늘 걱정이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애타게 간구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아들도 알지만 이것 또한 운명일 터이다. 아들을 남겨두고 어머니가 새벽녘에 버스를 타고 나서는 길, 어머니는 버스에 타자마자 기도를 하고, 아들은 그런 엄마를 보며 가슴을 찢는다. 그 어머니가 아들에게 붙여준 별명은 `테레비생활자`요, `방안퉁소`였다. 툭하면 직장을 때려 치우는 아들은 방학때면 무려 열네시간씩 잠을 자고 나머지 시간은 `테레비`만 보았다. 그렇게 방안에서만 생활하는 아들은 `방안퉁소`일 수 밖에 없었던 것. 아버지의 못다한 말과 글을 다 상속받은 막내 아들 거의 말씀이 없으셨던 아버지는 한번도 글을 쓰지 않았다. 그 아버지는 예순이 넘어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는데 성경은 물론이요 찬송가 가사를 읽을 줄 몰라 몹시 부끄러워 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유형의 재산보다는 무형의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 주셨던 것일까? 그리하여 아버지가 하지 못한 말과 쓰지 못한 글까지 합쳐서 아들이 대신 쏟아내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시인의 말없던 아버지는 이제 영원히 말을 끊고 마을 입구에 있는 자신의 밭가에 묻혔다. 아, 이제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우리의 아버지여! '막내라서 시인이 될 수 있었다' 누나와 형이 있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다.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어두운 시를 쓰지 말고 밝은 시를 써라`고 닥달하는 누나는 어려운 집안 살림과 꼬리긴 형제들을 위해 어린 나이에 '남의 집살이'를 하며 추운 겨울날 찬물에 빨래를 해야 했다. 형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려던 아우, 대우중공업에 다니는 형을 따라 지게차 기사로 취직하고 싶었던 아우, 양손에 신춘문예에 투고할 원고지와 공원이 되려는 이력서를 들어야 했던 그는 신춘문예에 당선된 덕에 책상앞에 계속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시인의 길을 걸어가려는 막내에게는 일곱 명의 형제들이 앞서 있었다. 그가 만일에 첫째나 둘째 내지는 셋째로 태어났다면, 그 자신의 고백대로 시인이 아닌 공원이 되었거나 시인의 길에 일찍 들어서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할 때에 누나와 형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사실. 고향 앞을 달려가는 호남선 기차, 아직도 어머니가 사는 고향 정우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러 기차를 타고 광주로 가는 길에 잠깐 스쳐가는 고향의 풍경이 있다. 아, 나의 고향집에는 어머니가 산다. 그 집에 들러 어머니를 만나고 싶은 아들은 그러나 단 10여 초 밖에는 고향을 볼 수가 없다. 시인이 휙 지나쳐야만 하는 고향처럼 우리의 인생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채 허겁지겁, 엉겁결에 휩쓸려 가는 것이리려니... 예전에 사정이 급해 팔아야 했던 집이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집안사정을 알아보려고 찾아올 아들을 위해 집주인에게 양해를 얻어 아들의 방을 지킨 적이 있다. 아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른 채 하루밤을 묵어가던 그날이 있었다. 고향이 있다는 것, 그 고향에 찾아가 만날 부모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스승 오규원시인, "이건 다 버려라" 시인에게는 스승 오규원시인이 있었다. 스승은 어느날 `이건 다 버려라`하고 제자가 책상에 올린 시들을 빨간 싸인펜으로 그어 버렸다. "지난 20년간 하늘을 날기 위해 무던히도 절벽에 서보았지만 늘 땅바닥에 간신히 내려앉곤 했다. 내가 썼던 시들은 선생님께서 빨간펜으로 그어 땅바닥에 떨어진 깃털들을 운좋게 주운 것에 불과하다." 비상을 꿈꾸었지만 한번도 제대로 된 비행을 하지 못했던 제자는 그렇게 스승이 날려버린 깃털을 주어 모아 시집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냈음을 고백하고 있다. {주2} 박형준시인은 `골방의 시인`이라고 불리운다. 그가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고향의 방을 떠나 한없이 떠돈 객지의 날들은 방을 찾아 헤매는 길이었다. 허공중에 집을 짓고 냄새를 피우고 살고 싶다는, 혼자서 퉁소를 잘 부는 이 시인이 이제는 땅위에 집을 짓고 방을 들이고,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냄새를 피우고 살았으면 좋겠다. "사라졌던 밥그릇은 어머니의 가슴속에 묻혀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겨울밤이면 무덤 같은 /밥그릇을 아랫목에 파묻어두었습니다/내 어린 발은/따뜻한 무덤을 향해/자꾸만 뻗어나가곤 하였습니다/그러면 어머니는 배고픔보다 간절한 것이/기다림이라는 듯이 달그락달그락 하는 밥그릇을/더 아랫목 깊숙이 파묻었습니다//...../하지만 세상은 쉽게 시골 소년에게 열리지 않았습니다/사나운 잠에 떠밀리다/문지방에 어른거리는 것이 있어/방문을 여니, /해당화꽃 그늘이었습니다/뿌리에서부터 막 밀고 나온 듯,/묵은 만큼 화사해진다는/처음 꽃 핀,/삼년생 해당화 붉은 꽃이었습니다 //거기에 어느새 늙은 어머니가 계셨습니다/저녁 바람에 달그락거리는 밥그릇처럼/해당화꽃 그늘 속에 서 계신/어머니는 허리가 굽은 노인이 되어 있었습니다/그 모습이 꼭 가슴에서 무언가를 꺼내느라 열중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사라졌던 밥그릇은 어머니의 가슴속에/묻혀가고 있었던 것입니다/늙은 어머니의 손에서 떠난 그 작은 무덤들이/붉디붉은 꽃으로/환하게 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3} 어느날 해당화가 밑에서부터 피어났다며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오신 어머니에게 아들은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자 이내 어머니는 해당화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을 찍어 보냈다고 한다. 해당화는 우리들 그리움속의 꽃이려니, 고향집 울타리에 환하게 피어있던 해당화의 고운 빛깔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의 모습과 겹쳐진다. 서정주의 계보를 잇는 서정시인 박형준 서정주시인의 "국화옆에서"를 연상케 하는 이 시는 박형준시인이 서정주시인의 계보를 잇는 서정시인임을 느끼게 한다. 배용제시인 등과 함께 우리 시대의 손꼽히는 중견시인으로 주목받는 박형준시인을 이 아름다운 봄에 소개할 수 있어 행복한 마음이다. 보다 많은 이들이 박형준시인에 대한 궁금함을 그의 산문집과 시집을 통해 해소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상으로 필자의 못난 글에 대한 부끄러움을 접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