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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금북정맥 5차 종주기
1. 산행일자 : 2006년 5월 7일 (일요일)
2. 산 행 지 : 상당산(491.9m), 좌구산(657.4m) 충북 청원, 괴산, 증평
3. 날 씨 : 흐림, 안개, 개임(오후)
4. 참 가 자 : 강동규, 노승애, 박봉하, 안상경, 윤희원, 이용준, 장현옥(7 명)
5. 산행 거리 및 소요 시간
[1] 산행거리 : 약 19. 3km
[2] 소요시간
(1) 예정 소요 시간 : 8시간 30분
(2) 실제 소요 시간 : 12시간 50분
6. 경유지 및 구간별 거리, 소요 시간
[1] 경유지 및 구간 거리
■ 산성고개(343m, 512번 도로)--2.2km--상당산(491.9m)--6.3km--486.6봉--1.0km--이티고개(511지방도)--1.0km--구녀산(494m)--1.8km--분젓치--2.4km--밤티재(370m)--1.8km--좌구산(657.4m)--2.8km--질마재(330m, 592번)
[2] 구간별 도착 및 소요시간
(1) 예정 시간
■ 수원(04:00) ~ 영동, 중부고속 ~ 오창TG(05:30) ~ 17번 ~ 성모병원앞(06:00/아침식사 /06:50) ~ 외곽순환도로 ~ 박물관 ~ 산성고개(07:30)
■ 산성고개(08:00) → 상당산성(08:15) → 서문/미호문(08:35) → 상당산(08:55) → 성황당터 안부(09:35) →능선분기봉(09:55) → 430.7봉(10:15) → 인경산분기점(10:30) → 임도고개(11:10) → 486.8봉(11:35) →이티재(12:10/점심/12:40) → 구녀산(13:20) → 분젓치(13:50) → 510봉(14:15) → 임도고개(14:40) →좌구산(15:30) → 성황당터안부삼거리(16:00) → 질마재(16:30)
■ 질마재(16:40/식사/17:30) ~ 증평TG ~ 중부, 영동고속도로 ~ 동수원TG ~ 수원(20:30)
■ 탈출로 : 이티재(511번 지방도), 분젓치, 냇물촌 올갱이국(043-215-5454), 산너머가든 (043-832-9055)
(2) 실제 산행 시간(산악대장 측정 자료)
수원(04:15) ∼ 영동, 중부고속 ∼ 오창TG(05:10) ∼ 17번 ∼ 성모병원앞(05:25/아침식사/06:05) ∼ 외곽순환도로 ∼ 박물관 ∼ 산성고개(06:25/차량 질마재 이동 주차/07:43) 산성고개(07:45) → 중계탑(07:51) → 산성입구 도착(08:00) → 서문(미호문, 08:21) → 상당산(08:35/08:40) → 산성터널통과(08:42) → 알바(08:45/09:35) → 원위치, 산성에서 "숲속 둥지" 표지가 있는 막거리 좌능선 진입(09:50) → 473봉(10:35) → "숲속 둥지" 표지 사거리(10:55) → 삼각점 봉(11:05/11:20) → 인경산 분기 봉우리 좌 우회(11:32) → 넓은 임도고개(11:39/12:00) → 능선삼거리(12:05) → 콘크리트 벙커(12:18) → 헬기장(12:20) → 삼거리(12:38) → 이티재(12:48/점심/13:45) → 구녀성 운동기구 및 정자(14:05) → 구녀산(14:06) → 안내표지판 삼거리(14:21) → 분젓치(14:40/15:00) → 540봉(15:35/15:55) → 방고개(16:25) → 510봉(17:05) → 돌탑봉(17:32) → 좌구산(17:40/18:00) → 세작골산 삼거리(19:00) → 질마재(19:20) 질마재(19:35) ∼ 증평(19:55/식사/21:00) ∼ 증평TG ∼ 중부고속도로 ∼ 죽산 ∼ 용인 ∼ 수원(23:10)
7. 산 행 기
[1] 산행 전
黃沙로 덮인 나무 잎을 세척이라도 하려는 듯 山行 前日 새벽부터 내리던 비가 그칠 줄을 모른다. 기상 예보에 따르면 오늘과 내일(5월 6, 7일)에 걸쳐 최고 100mm이상 비가 내린다고 한다. 오랜만에 내리는 비라 반갑기는 한데 산행을 하루 앞둔 터라 은근히 걱정이 된다. 우중 산행을 대비한 장비를 챙겨 배낭을 꾸리고 새벽 3시에 일어날 수 있도록 알람도 설정을 해 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예정된 시간에 일어나 밖을 내다보니 별빛은 보이지 않았지만 비도 그치고 바람 기운도 한결 부드럽다. 다행이다. 아마도 올 연초에 올렸던 山神祭의 효력이 나타나는 것 같다.
04 : 00시, 윤사장님 전화. 집에서 출발하고 있으니 아파트 정문으로 나오란다. 乘車, 동수원 물류센터 입구에 도착하니 노승애, 안상경, 장현옥, 산악대장 미리 나와 대기하고 있다. 강사장은 대전에서 출발하여 산행 출발지로 온다고 한다. 오늘 산행 참가 인원, 총 7명. 대원들이 좀더 많이 참석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
윤사장님 차는 경기대 후문 입구 공터에 정차시켜 놓고 노부장과 장부장 차에 3명씩 分乘(노 : 박봉하, 안상경, 윤희원 / 장 : 노승애, 이용준, 장현옥 승차)하여 동수원 TG를 빠져나갔다. 잠시 졸았다 싶은데 오창 TG에 도착(05 : 10분경)이다. 오창 TG를 빠져나와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찾아 간 곳이 청주시 외곽(상당구 율량동 국민은행 맞은 편)에 있는 「먹거리 25시 해장국 집(☎ (043) 213-9009)」 지난 정맥 산행 때 이곳을 찾지 못하고 헤매던 일이 떠오른다.
올갱이, 콩나물 해장국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점심 때 먹을 김치와 쌈장을 준비하여 오늘 산행 출발지 『산성고개』로 향했다(06 : 05분).
[2] 상당산성
(1) 상당산성
06 : 30분경, 산성고개 도착.
산악대장과 윤사장, 오늘 산행의 끝 지점 『질마재』에 차를 두고 오기 위해 떠나고 남은 대원들은 산행 兼 상당산성을 둘러보기 위해 산성고개 경사면으로 올라붙었다.
비 온 뒤라 山色이 더 푸르고 풀잎, 나뭇잎이 더 신선해 보인다. 노부장 지난 산나물 산행(4월 30일) 때 재미를 붙였는지 산행 시작부터 취나물 채취에 관심을 보인다. 19. 3km, 8시간 30분간 산나물 채취. 산행 끝 무렵에 허리가 제대로 펴질지 걱정이 앞선다.
07 : 00 상당산성(上黨山城 : 충북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산 28-1) 도착, 城壁과 雉城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먼저하고 秘密門(暗門 : 참고자료 1)을 통과하여 城 안으로 들어섰다.
秘密門은 적에게 들키지 않게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작은 문을 만들어 軍需物資를 城 안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만든 軍事施設物로 有事時에는 門을 닫고 주변에 쌓아 둔 돌과 흙으로 暗門을 메워 閉鎖했다고 한다.
상당산성(上黨山城)의 상당(上黨)은 백제 때 청주 일원을 일컫던 地名으로 사적 제 212호인 상당산성은 백제의 上黨縣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上黨山城은 우리나라에서 원형이 잘 남아있는 조선 중 후기의 대표적인 石城이라고 한다. 둘레가 4.2㎞, 내부면적이 727,276㎡에 이르고 있으며 전형적인 포곡식 내탁공법(內托工法, 포곡식 산성 : 내부에 넓은 계곡이 있고, 계곡을 둘러 싼 주위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축조한 산성)의 城이다.
최초의 정확한 축성 년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김유신의 셋째 아들 원정공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과 상당산성 고금사적기에 김유신장군의 아버지인 김서현장군이 쌓았다는 기록,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 청주목고적조에 고상당성은 율봉역의 북에 있고 석축으로 둘레가7,772척인데 성안에 큰 연못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의 상당산성은 임진왜란중인 선조 29년에 수축된 이후 숙종 42년에서 45년까지 충청병사 유성추의 감독으로 대대적인 성벽개축이 이루어졌고, 이듬해 성내에 구룡사와 남악사의 2개 사찰과 暗門이 마련되었는데 이것은 성문 무사석의 기록에 남아 있다. 그 후 여러 번의 修築이 이루어져 성내의 여러 시설인 관아사, 군기고, 창고 수구, 장대, 포루 등이 완성되었다.
조선왕조실록과 비변사등록 등에 의하면 효종 2년(1651년)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이 충남 해미에서 청주로 옮겨지고, 왜구의 침입과 내란 등으로 한성의 중간방어 지역으로 청주의 중요성이 점점 높아가면서 상당산성의 改修築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상당산성에는 동문, 서문, 남문의 3개 문과 東暗門, 南暗門의 2개 暗門, 치성(雉城 : 성곽의 일부를 성벽으로부터 돌출 시켜 전방과 좌우 방향에서 접근하는 적과 성벽에 붙은 적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로서 요철( 凸 )모양으로 만들었다. 제 몸은 숨기고 밖을 잘 엿보는 꿩(雉 : 치)에 비유해서 「치성(雉城)」이라고 부른다) 3개소, 水口 3개소가 있는데, 77년부터 78년까지 정비공사로 東. 南 門樓와 東門이 재건되었고 '92년 말에는 東將臺도 재건되었다. 또한 1995년도의 발굴조사로 서장대의 규모와 위치가 확인되었다. 동장대에서는 매년 시민의 날에 國運隆盛, 淸州發展, 家庭和平을 祈願하는 三願祭를 지내고 있으며 이곳에서 城돌이 행사가 시작된다.
<출처 : 충북관광허브사이트>
후미 팀 도착하도록 城內 景觀이나 돌아 볼 料量으로 城郭 길을 따라 걷노라니 누각이 앞을 가로막는다. 현판에 미호문(弭虎門)이라 새겨져 있다. 이 문은 이 지역 산세가 호랑이와 같아서 이를 제압한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2) 상당산
누각에 올라보니 청주 시내가 한 눈에 와 닫는다. 누각의 이모저모와 청주 시내를 조망하고 성곽을 따라 上黨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후미로 처져 있는 노, 장부장은 어디쯤 오고 있는지, 강사장, 윤사장, 산악대장은 차량 이동을 하고 도착을 했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성의 가장 높은 지점까지 올랐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상당산(상령산) 정상을 찾았으나 정상이 어디쯤인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선행자들의 山行記에는 산 정상에 頂上石과 삼각점이 있다고 했는데-----. 성곽을 산책을 하는 사람을 붙들고 물어도 현재 있는 곳이 上黨山이라고만 한다.
잠시 휴식을 가진 후 상당산 정상을 찾기 위해 성곽 길을 따라 내려가노라니 東鎭門이 나온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아 다시 되돌아가(08 : 25분) 산성 마루 쉼터 의자에 앉아 후미 팀을 기다렸다.
후미 팀 도착. 산악대장, 쉼터 의자 뒤편에 있는 봉에 올라 우리를 부른다. 나무를 헤치며 山峰에 오르니 국립지리원에서 세운 안내판과 삼각점, 그리고 상당산 표지석(491.5m)이 눈에 들어온다(08 : 35분). 누가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山 頂上을 指呼之間에 두고 30여분간 東鎭門까지 오르내리는 수고를 감내했던 것이다.
(3) 헛 다리 품 산행 한 시간
안내자 산악대장을 만났으므로 길을 잃고 헤맬 일은 없어 안심이 된다. 지체된 시간이 있어 상상산 정상은 확인하고 내려와 또 하나의 暗門을 빠져 나오니 정맥 표지기가 나무 가지에 촘촘히 매달려 있고 길도 잘 나 있다.
08 : 50분. 넓게 난 農路.
길 건너 산으로 낡은 표지기 하나, 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고 산 속으로 길도 잘 나 있어 생각 없이 길을 따라 삼거리 갈림길까지 도착(09 : 15분)했는데 되돌아오라는 전갈이다. 또 정맥 길을 벗어난 모양이다. 너무 안이하게 생각한 탓인가. 되 물림을 거듭하고 보니 힘도 들고 기운도 빠진다.
農路까지 되돌아 나와(09 : 40분) 마을(덕암리)로 진입. 마을 老人丈을 만나 길 안내를 받았다. 능선을 따라 10여분을 가니(09 : 50분) 나무 가지에 표시기가 여러 개 달려 있는 갈림 길 공터가 있고 5m 벗어난 지점에 「① 등산로명 : 이티재, ② 거리 : 8.0km, ③ 소요시간 : 5시간, ④ 구간 : 상당․산성 ↔ 미원․이티재<청원군수>라 표기된 등산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상당산에서 잠시 방심(잘못 달린 표지기)으로 1 시간여의 헛다리품을 팔았던 것이다.
길을 잃은 것이 미덥지 않았던지(자존심이 상했던지) 산악대장, 길 잃은 지점을 확인하기 위해 상당산성으로 되돌아가고 나머지 대원들은 잠시 휴식을 가진 후 『이티재』로 향했다.
[3] 이티재 가는 길
(1) 돌탑 재(사거리)
이정표를 뒤로하고 200여m쯤 더 가다보면 작은 돌탑이 세워진 사거리(돌탑재)가 나온다. 한 시간 여를 헛다리품을 팔아서인지 다리가 뻐근했지만 넓고 평탄한 능선 길이라 걷는데 힘은 별로 들지 않는다.
좀더 진행하니 농장이 나오고 사람들의 출입이 잦았는지 ‘출입금지’ 팻말을 달아 놓았다. 놓친 길을 확인하기 위해 산성으로 갔던 산악대장, 어느새 우리를 따라 붙었다. 왕릉같이 잘 꾸민 묘를 지나 멋지게 자란 소나무 봉에 올랐다 다시 내려오니 『숲 속의 둥지』안내 화살표가 나무에 부착 되 있다(10 : 55분). 아마도 산 속에 韻致가 있는 그럴듯한 쉼터가 있는 모양이다.
(2) 삼각점봉과 인경산 갈림길
11 : 10분 삼각점봉 도착.
땀도 닦고 간식도 하며 잠시 휴식을 가졌다. 불어오는 바람의 감촉이 너무 좋은데 다시 출발이다.
10여분을 걷다보니 높은 봉이 앞에 버티고 있다. 거칠게 숨 한번 몰아 쉴 각오로 산 중턱에 다다르니 예상과는 달리 정맥 길은 산 중턱으로 휘어져 나간다. 이곳이 仁景山으로 가는 길과 갈라지는 지점(11 : 30분경)인 모양이다.
仁景山은 말구리(한티 북쪽에 있는 마을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 上空에서 보면 말발굽 모양과 같다하여 말구리고 함.) 동쪽에 있는 산이다.
(3) 숭조묘(崇祖廟)
인경산 갈림길을 빠져나와 20여분, 급경사를 내려서니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있는 넓은 길이 나온다. 이 도로는 청원군 북일면 비상리와 미원면 대신리를 연결시켜주는 3,640m 林道로 청주 청원 임협에서 시공 했다는 표지석이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표지석 뒤에는 몇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崇祖廟(납골묘)가 있고 쉼터도 마련해 놓았다. 느티나무의 모양새가 너무 멋져 단체로 사진촬영과 휴식을 가진 후 느티나무 옆으로 난 정맥 길로 올라붙었다.
임도에서 볼 때는 상처 하나 없는 아름드리 느티나무였는데 뒤로 돌아가 보니 속이 텅 비었는데 누구의 소행인지는 몰라도 불까지 놓아 속이 시꺼멓게 숯검정이 되 있다. 보호수 팻말이라도 붙어야 할 나무가 내 팽개쳐져 生死의 岐路에 서 있다 생각하니 안쓰럽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천년 수령의 이 느티나무가 더 오래 오래 살기를 빌며 納骨墓 뒤의 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4) 이티봉 정상(486.8봉)
산 정상에 오르니(12 : 25분) 정간 길을 따라 塹壕(참호)를 파 두었고 시멘트 블록으로 방카도 설치해 두었다. 잠시 휴식을 가진 후 6, 70도 가파른 봉 2개를 오르니(12 : 36분경) 삼각점이 있는 헬기장(486.8봉, 이티봉 정상, 벙커에서 약 200여m 거리)이 나온다. 시가지가 확연히 眺望(내수읍) 되는 지점이다.
(5) 이티재
헬기장을 지나 걷기 10여분, 급경사 내리막으로 내려선 곳이 『이티재, 516번 도로, 해발 360m, 12 : 50분』다. 이 고개는 궐말에서 저곡리 닥골 거쳐 미원으로 가는 고개(내수읍 비상리)로 어떻게 해서 영화에 나오는 이티(E.T)라는 지명을 붙였는지 알 수가 없다.
이티봉 휴게소, 주유소, 구녀성 등산로 가든, 이티 편의점 등 여러 시설물이 가추져 있고 휴게소 입구에는 九女城을 알리는 대형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휴게소 주변을 잠시 살펴보고 휴게소 좌측으로 난 정맥 길을 따라 소나무 숲으로 들어섰다. 강동규사장은 결혼식 참여 때문에 이티재 까지만 산행하겠다고 하더니 우리(후미 팀)가 도착했을 때 이미 떠나고 없다. 점심 자리도 함께하지 못하고 떠난 것을 보면 어지간히 시간이 급했나보다.
숲속 평지(철망 울타리 속에 닭 몇 마리가 노닐고 있는 근처)에 자리를 잡고 준비해 온 도시락을 꺼냈다. 각자 준비해 온 饌은 지난 산행 때와 마찬가지로 가지각색으로 다양했는데 휴게소에서 구입해 온 소주에 장부장이 마련한 골뱅이 무침으로 반주까지 곁들이니 그야말로 錦上添花다.
상당산성에서 한 시간여를 헛다리품을 팔아서인지 오늘 산행은 원안대로 『분젓치』에서 끝맺음을 해야 한다고 異口同聲이었으나 산악대장은 산행계획을 바꿀 생각이 없는지 대답이 없다. 힘이 들더라도 『질마재』까지 가야할 것 같다. 느긋하게 점심을 마치고 千斤같은 엉덩이의 흙을 털고 일어섰다(13 : 45분).
[4] 九女城과 九女山
(1) 구녀성(九女城)
다소 지쳐서인가. 발걸음이 쉬 떨어지지를 않는다. 가파른 경사 길을 15분여를 오르니(14 : 06분) 체육시설물, 쉼터 누각과 구녀성 유래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성곽은 군데군데 허물어져 있고 성벽의 돌에는 돌 옷이 피어 오랜 風霜의 痕迹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구녀성 유래 표지판에는 성을 쌓게 된 유래가 상세하게 기록 되 있다.
九女城(충청북도 청원군 북일면 조정리에 있는 성)의 築城時期는 新羅時代로 추정되며 石築 形態로 다음과 같은 由來가 전해진다.
이곳 산정에 아들 하나와 아홉 딸을 가진 홀어머니가 있었다. 이들 남매는 모두가 장사였는데 항상 불화가 잦아 마침내는 생사를 건 내기를 하게 되었다. 내기인 즉 딸 아홉은 산꼭대기에 성을 쌓는 일이고 그 사이 아들은 나막신을 신고 한양을 다녀오는 것이었다. 내기를 시작한지 5일이 되던 날 어머니가 상황을 살펴보니 성은 거의 마무리가 다 되어 가는데 한양 간 아들은 돌아올 줄 몰랐다. 이에 내기에 지게 되면 아들이 죽게 될 것을 생각하고 어머니는 가마솥에 팥죽을 끓여 딸들을 불러 모아 팥죽을 먹으며 천천히 해도 되리라 했다. 뜨거운 팥죽을 식혀 먹고 있는 동안 아들은 부르튼 다리를 이끌고 피를 흘리며 돌아왔다.
그리하여 내기에 진 아홉 딸은 성위로 올라가 몸을 던져 죽고 부질없는 불화로 아홉 누이를 잃게 된 동생은 그 길로 집을 나가 돌아올 줄 몰랐다. 어머니는 남편의 무덤 앞에 아홉 딸의 무덤을 만들어 놓고 여생을 보내다 숨을 거두었다. 이때 당시 죽은 아홉 딸과 부모의 묘는 이 성안에 2줄로 배열된 11기의 묘라고 전해진다.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죽음까지 몰고 간 남매와 아홉 딸과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픈 전설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2) 구녀산(九女山, 484m)
구녀성 성곽 길을 따라 걷기를 10여분(14 : 16분), 구녀산 정상 표지석(484m)과 돌탑, 그리고 이정표(이티재 0.8km / 초정삼거리 4km)가 있는 구녀산(484m) 정상에 도착(14 : 16분)했다.
구녀산은(484m)은 남한강의 발원지, 좌구산(675m)에서 남서쪽으로 북일면 우산리, 미원면 대신리의 경계를 이루는 지역으로 삼국시대 때 신라와 백제가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구녀성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이곳은 민간신앙의 집산지로 출생과 무병을 기원하는 곳으로 노송과 원시림이 천연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산의 내부는 성터로서 우물과 수원지의 흔적이 남아 놀이와 휴식에 적합한 공간을 형성하고 있으며 서북쪽 미호 평야와 청주의 상당산성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전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구녀성은 정확한 축성기록은 없다. 신라가 백제의 낭비성(지금의 상당산성 또는 삼년산성)과 대결하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전하고 있을 뿐이다.
구녀산은 구라산(句羅山)이라고 불려졌으나 이곳 축성 설화와 관련하여 구녀산으로 불리고 있다. 이곳 구녀산은 삼국시대의 石 성터로 내부 전체가 울창한 송림과 휴식공간으로 이루어져 가족 또는 단체여행객의 소풍장소로 인기가 높은 곳이다. 성 둘레는 약 1km정도로 약 30분정도면 성곽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다
[5] 분젓치
구녀산의 정상석, 이정표를 확인하고 정상의 참호들을 지나 평지 같은 길을 15분 정도 걸어가니 삼거리에 「초정리(左) / 율리(右)」방향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정맥은 우측으로 가야 한다. 나무 사이로 간간히 저수지(증평저수지)가 보인다.
14 : 50분, 한쪽은 포장(분티마을 방향)이 되 있고 한쪽은 비포장(율리의 삼기리 방향)도로인 고개 마루에 도착했다. 이곳이 『분젓치』인 모양이다. 포장된 도로변에는 「증평군」이란 큰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도로를 건너 절개지 능선을 따라 조금 오르니 「한남금북정맥, 좌구산 14km」란 표지목이 세워져 있다. 坐狗山을 오르면 질마재까지 내림 길로 이어진다고 했는데 14km를 더 가야한다는 말인가? 납득이 가지 않는 거리표시다. 먼저 도착하여 쉬고 있는 윤사장님, 누가 장난으로 4자 앞에 1자를 첨가했다고 한다.
분젓치(분저티, 粉峙)는 曾坪 시가지에서 540번 국도를 따라 栗里 方面으로 자동차로 10여분, 밤티골 서남쪽에 있는 三巨里(三埼里, 주막거리 : 曾坪, 내수, 미원으로 가는 세 갈래 길이 있는 곳에 위치하여 내수나 증평 장을 보러 가는 행인들이 이곳에서 목을 축이고 쉬어갔다고 한다.)에서 청원군 미원으로 가자면 넘어야 하는 고개다 .
좌구산과 삼기저수지, 그 주변의 산들, 길 아래 논밭과 어우러진 평화로운 율리마을의 풍경이 있는 분젓치 정상에 서면 증평방향으로 훤히 트여 삼기저수지 너머로 언덕과 평야가 올망졸망 어우러진 증평 시가지가 보이는 곳이다.
♣ 밤티골(율리) : 지금으로부터 약370여 년 전에 남봉 김치(:1577~1625, 경상도 관찰사로 인조반정 때의 공신)가 머문 이후 형성된 마을
<참고자료 : 증평괴산가이드>
[6] 坐狗山 오르는 길
(1) 540봉 분기점
분처치 절개지에서 증평저수지를 바라보며 10여분 휴식(기념촬영)을 가진 후 또 출발이다. 切開地 능선 길이 끝나면서 급경사 오름 길로 이어진다. 한바탕 급하게 숨을 몰아쉬고 땀을 흘리며 산마루에 올라 우측으로 방향을 바꾸니 걸으면서 숨을 고를 수 있는 평탄한 길이 한동안 이어지다 다시 급하게 숨을 몰아쉬며 산마루에 올라선 곳(15 : 45분)이 능선이 분기하는 540봉인 듯하다.
(2) 방고개
다시 완만한 능선 길로 이어지다 급하게 경사면을 따라 내려선 곳(16 : 30분)이『방고개』. 비포장도로로 증평 산악회에서 세운 이정표에는 「←좌구산 2.5Km, 구녀산 →, ↑우측은 미원, ↓왼편은 점촌 1.8Km」라 표시되 있다. 이정표에 표시된「점촌」이 경상북도의 「점촌」으로 생각했는데 여기의 「점촌」은 栗里에 있는 점촌부락이라고 한다(산악대장의 설명)
(3) 좌구산(坐狗山)
이곳에서 좌구산이 2.5km면 최소한 한 시간은 걸어야 좌구산 정상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산행 중 가장 힘든 구간을 앞에 두고 있다. 모처럼의 장거리 산행이라 녹녹치가 않다. 되돌릴 수 없는 없는 길이라 도로를 가로질러 통나무 계단을 밟고 올랐다.
오늘 산행구간에서 가장 높은 좌구산 지역으로 들어선 것이다. 경사도 심해지고 다리도 뻐근해 온다. 바로 앞에 있는 산(510봉)이 좌구산이라 생각하고 올랐는데 더 높은 산이 뒤에 버티고 있다. 숨소리가 더 거치러 진다.
산행 시작부터 산나물에 관심을 둔 노부장, 눈에 띄는 취나물이며 고사리 꺾기에 餘念이 없다. 풍성하지는 못해도 하나 둘 뜯어 담는 재미가 힘든 다리품도 잊게 하나보다.
17 : 05분, 좌구산이 바로 올려다 보이는 안부에서 휴식. 다시 출발. 마지막 힘을 내본다. 허리를 바짝 굽히고 발끝에 힘을 주며 좌구산 정상에 올랐다(17 : 50분).
산 정상에는
♣ 정상석(←상당산성 ---[한남금북정맥 / 청원의 최고봉 / 좌구산 657m →]),
♣ 스텐 이정표(← 방고개 2.5km / ↓ / 새작골산 1.9km →)와
♣ 나무 이정표(분젓티 4Km-질마재, 직진을 하면 대덕마을 2Km)가 있고
♣ 정상의 북쪽 아래로 묘가 1기가 있다.
『좌구산』은 높이가 657m로, 증평읍 율리와 청원군의 경계선 위에 솟아 있다. 아직까지 산행 대상지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한남금북정맥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좌구산의 명칭은 인조반정에 가담한 남봉(南奉) 김치(金緻)가 이곳을 지나다가 한밤중에 동편 산에서 개가 짓는 소리가 3번 들려 잠에서 깨었다. 심복에게 산 이름을 물으니, 거북이가 앉아 있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좌구산(坐龜山)이라고 답하였다. 風水에 조예가 깊은 김치는 개가 3번 울었으니 저 산은 좌구산(坐狗山)이 틀림없다고 얘기했다. 김치는 3번의 개 짓는 소리를 누가 염탐하러 오는 것을 알리는 신호로 알고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출처 : 지방행정정보은행(http://www.laib.go.kr/newlaib/jojic/index.jsp>
[7] 질마재
이제부터는 『질마재』까지 내림 길로 이어진다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볍다. 10여 분간 느긋하게 휴식을 갖고 자리에서 일어섰다(18 : 00시).
좌구산 정상에서 급하게 내려와 작은 산봉을 올랐는데도 후미 팀이 따라 붙지를 않는다. 정상 출발 때 움이 잘 돋은 두릅을 발견하고 그것을 채취하느라 여념이 없나보다.
후미 팀 도착하기까지 대기(18 : 25분).
合流
19 : 00시, Y갈림인 새작골산 정상에 도착했다. 언덕 갈림길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데「← 좌구산 1.9Km/ [●새작골산, 613m] /↓ 안청봉 1.6Km / 질마재 1.3Km」라 표시되 있다.
목적지 『질마재』까지는 앞으로 20여 분은 족히 더 걸어야 할 것 같다. 해거름이 지기 시작한다. 뛰는 걸음으로 『질마재(대덕리에서 원통산을 넘어 감곡면 쪽으로 가는 고개가 하나. 승대산 넘어 앙성면 쪽으로 가는 고개가 둘, 이 모두를 질마재라 부르는데 고개마루가 질마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함)』에 도착한 것이 19 : 20분경. 아침 06 : 30분에 산성고개를 출발하여 오늘 산행의 終着地 질마재까지 장장 12 : 50분을 산중에서 생활한 것이다. 백두대간 종주 후 모처럼 옹골찬 산행을 해 본 것이다. 12시간 50분 탈 없이 산행한 대원들이 대견스럽다.
[8] 산행 마무리
이번 산행은 이런 산행이었다.
* 우중 산행을 예상했는데 天地神明이 도운 가장 좋은 날씨를 얻은 산행이었다.
* 한남금북정맥 산행 중 가장 적은 대원이 참여한 산행이었다.
* 출발부터 삐거덕거린(정맥 길을 놓치고 한 시간여를 헤맨) 산행이었다.
* 돌 옷(돌이끼)에 묻어 있는 역사의 흔적(상당산성, 구녀성 등)을 찾아 본 산행이었다.
* 고개 마루를 넘고 지나며 민초들의 애환을 느껴 본 산행이었다.
* 채움과 비움의 순환이 자연의 순리임을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산행이었다.
* 백두대간 종주 후 모처럼 해본 옹골찬 장거리 산행이었다.
* 한배 산악인들의 七顚八起 모습(중도 하산을 하자 하면서도 완주하는)을 볼 수 있었던 산 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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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 暗門(秘密門)
상당산성에는 두 곳의 秘密門(사적 제 212호로 지정)이 있는데 이를 暗門이라 한다. 東北 暗門은 東北에서 북상하는 능선이 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만나는 지점 아래에 위치해 있다. 이 暗門은 1720년, 숙종46년에 築造된 것으로 上黨山城 1차 개축이 이루어진 후의 일이다.
東北 暗門은 서너 명이 허리를 숙이고 드나들 정도인데 안쪽으로 빗장구멍을 내어 견고히 하는 한편 유사시에는 곧바로 폐쇄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西北 暗門은 最近에 복원한 것이다. 청주시는 상당산성 사적공원화 사업을 벌이며 暗門으로 통하는 관광코스의 개발을 검토중이다.
<참고자료 2> 상당산성 관련 설화 / 유래전설
상당산성의 상당(上黨)이라는 이름은 삼국시대 백제의 上黨현에서 유래된 이름인 듯하며 높은 지위의 무리가 있다는 뜻을 지니고 있고 상당구의 어원이 되는 지명이기도 하다.
최초의 정확한 축성년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김유신의 셋째 아들 원정공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과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 김유신장군의 아버지인 김서현장군이 쌓았다는 기록,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 청주목고적조에 고상당성은 율봉역의 북에 있고 석축으로 둘레가7,772척인데 성안에 큰 연못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참고자료 3> 城에 관한 지식
▷내탁공법 : 산의 경사면에 성을 쌓은 후 그 성벽과 산지와의 사이에 생긴 간격을 자갈과 흙으로 채워 성토함으로써 성벽내부에 사람이 통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산성의 특징.
▷여장 : 성벽 위에 쌓은 담.성가퀴라고도 하며 전쟁시 적의 공격을 피하며 공격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치성 : 성벽에서 바깥쪽으로 돌출 되게 쌓은 성벽. 평시에는 외부를 관찰하는 감시 초소. 유사시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는 역할. 상당산성에는 3개가 있는데 모두 남문 주변에 있다.
▷용도 : 성문주변에 양쪽으로 담을 쌓은 것으로 성문으로 침입해 들어온 적을 막는 역할을 한다. 상당산성에는 동, 남 암문과 남문에 있다.
▷옹성 : 모양이 반으로 쪼갠 항아리와 같아서 옹성이라 한다. 성문을 지키기 위해 성문 밖에 쌓은 작은 성.상당산성에는 옹성이 없는 대신 치성과 용도가 있다.
▷수구 : 배수구. 성벽에 쌓이는 물을 밖으로 배출시킴으로써 성벽의 붕괴를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상당산성에는 3개의 수구가 있다.
▷체성 : 성곽의 부속시설을 제외한 성벽의 몸체부분.
▷미석 : 체성과 여장사이에 납작한 돌로 튀어나오게 설치한 것으로 마치 눈썹처럼 보여 미석이라 한다. 상당산성에는 미석이 원형으로 남아있다.
▷해자 : 성벽의 주변에 인공적으로 땅을 파서 물을 채워 성의 방어력을 높여주는 성곽시설의 하나. 정북동토성에서 해자의 모습이 발굴결과 나타났다.
<출처 : http://www.cbtour.net/cb_web/cb_tour/kw_toursite_v?id=00385, 충북관광허브사이트>
<참고자료 4> 초정약수
1) 초정리 광천수 유래
초정리 광천수는 세계 광천학회에서 미국의 샤스터, 영국의 나포리나스와 함께 세계 3대 광천수(鑛泉水)로 꼽고 있다. 또 초정리 광천수는 6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세계적인 광천수(F.D.A. 인정)로 조선 세종대왕(世宗大王) 26년(서기 1444년) 3월 2일에는 왕이 친히 이곳에 행차하여 60일간 머물면서 안질(眼疾)을 치료하였으며, 세조대왕(世祖大王)께서도 이곳에서 질병을 치료하였다. 東國與地勝覽 淸州牧 山川 에서는 [淸州에서 東쪽으로 39里에 매운맛이 나는 물(椒水)이 있는데, 이 물에 목욕을 하면 피부병이 낫는다.] 고 하였으며, 이수광의 지봉유설(芝蜂類設)에는 [우리나라에 많은 초수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廣州와 淸州의 초수가 가장 유명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로부터 7~8월 한여름에는 초수의 약효가 제일 좋다고 하여 복날과 백중날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찾아와 목욕을 하며 더위를 식혔다.
2) 초정리 광천수 역사
소백산의 중앙부 아주먼 옛날 아홉선녀가 승천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충북 청원군 초정리 구녀산 기슭에서 천연탄산수가 용출하는데 혀를 찌를듯한 알알한 물맛으로 수질이 맑아 세종대왕 26년에 친히 왕이 행차하여 60일간 안질을 치료하였으며 세조대왕도 行幸한 일이있다.
동국여지승람 제 15권과 왕조실록 103권에도 초정약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 초정약수로 '천연사이다', '맥콜', '탑씨'를 비롯한 음료수와 '초정수'를 제조 판매하고 약수터는 천연탄산수를 음미하고 받아가려는 수많은 인파가 줄을 서고 있다.
세계 3대 광천수의 으뜸
미국의 샤스타 광천, 영국의 나포리나스 광천과 함께 세계3대 광천수의 하나로 사람몸에 유익한 미네랄이 풍부하여 "동양의 신비한 물"로 각광받고 있다.
<출전 : http://www.carbonwater.co.kr/about/about.asp?v=info>
<참고자료 5> 좌구산(座龜山. 675m)
● 높 이 : 657m
● 위 치 : 충북 증평군, 괴산군, 청원군
● 특징/볼거리
충북 괴산군과 청원군에 걸쳐 있는 좌구산은 증평읍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이나 널리 알려지지 않아 등산로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이다. 전체적으로 수림이 우거진 육산으로 호젓한 산행을 즐기기에 알맞은 산행지이며 장마끝무렵에는 온 산에 버섯이 지천으로 피어 등산객들의 손을 심심치 않게 한다.
"앉을 ´좌(坐)´자 거북 ´구(龜)´자. 거북이가 앉아 있는 형국이다 해서 좌구산(좌구산)이라 쓰는데 여기서는 최고 높은 봉우린데, 왜 옛날에는 난리가 나면 봉화를 올리던 자리가 있어. 그런데 원래는 그게 그 위에 가면 봉화를 올리던 자리가 있어.
그런데 원래는 그게 좌구산(坐狗山)이 아니고 앉을 ´좌(坐)´자 개 ´구(拘)´자. 좌구산(坐狗山)였데. 왜 그러냐 하면, 예전에는 민가가 없었어. 그냥 산밖에 없었는데 그 산에 올라가면 개짖는 소리가 났데여. 그래서 좌구산(坐狗山)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풍수적으로 말해서 좌구산(坐狗山)으로 고쳤다는거여."
증평에서 청안을 거쳐 청천쪽으로 가다보면 칠보산과 좌구산의 중간지점 쯤 되는 곳에서 봉천사 입구인 고개가 질마재 고개다. 이 고개를 넘어 조금 가면 봉씨가 난을 피해 살았다하여 봉천리라고 이름 지은 마을이 있다.
1106년(고려 예종 1년) 어느날, 경기도 강화군 하첩면 장정리 하음산 기슭 연못가에 상서로운 광채가 비치더니 이어서 비가 내리쳤다. 물을 길러 왔던 한 노파가 이상히 여겨 살펴보니 못 수면에 돌로 만든 상자가 떠 있었고, 그 상자 속에는 귀여운 사내 아이가 들어 있었다.
노파는 이 아기를 궁중에 바쳤고 왕은 기이하게 여겨 왕실에서 키우도록 했다. 노파가 봉헌했다 하여 성을 봉(奉)이라 하고 장래 국가를 도울 인재라 하여 이름을 우(佑)라 붙인 '봉우'를 시조로 하는 하음 봉씨들의후손들은 그 후 많은 인재들이 등용됐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 내고 왕위에 오른 다음해인 1457년 성삼문, 박팽년 등은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동료인 김질의 배신으로 발각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소식을 들은 박팽년의 매부 봉여해는 세조를 살해하기 위해 칼을 차고 어전으로 가던 도중 의금부에 붙잡혀 화를 당했다. 당시 그의 벼슬은 궁중요리를 검사하는 사옹원별좌였기에 어전 출입이 쉬웠다 한다.
봉여해는 어려서 재주가 뛰어나 박팽년, 성삼문 등과 함께 박중림(박팽년의 아버지) 문하에서 수업, 학문을 떨쳤고 박중림의 사위가 됐다.
봉여해가 박팽년과 함께 단종 복위 모의에 참여했다가 화를 당한후 세조 이후에는 벼슬길에 오른 사람이 거의 없고, 화를 면하기 위해 전국으로 흩어지던 중 일부가 이곳에서 살게 됐다 한다.
외봉천에서 서쪽으로 약 1km쯤 떨어진 망월산(해발 459m : 망탑봉)이 있어 이곳에서 보면 미호평야와 증평평야를 한 눈에 볼 수 있고, 이곳에 사는 봉씨들은 강화도를 쳐다보며 고향의 향수를 달래기도 하고, 난을 피하는 사람으로 감시의 역할을 한 산이기도 하다.
망탑봉에서 보면 군사적 요충지인 두타산성, 이성산성, 구녀산성과 북이면 부연, 토성, 광암의 경계가 되는 낭비성, 삼보산맥들이 한눈에 보여 군사적 요충지로 적진의 활동을 탐색하고 감시하는데 적지임을 알 수가 있다.
남봉 김치(金緻 : 1577~1625)는 1597년(선조30)에 알성문과 병과로 급제, 설서(設書 : 세자시강원의 정7품)를 거쳐 1608년에 조정 관리들의 휴가연수를 담당하는사가독서를 담당했다.
광해군 때 사북시정, 이조참의, 동부승지, 대사간을 거쳐 홍문관교리, 부제학등을 역임하고 정3품 병조참지에 올랐으나 독직사건으로 파면됐다.
이이첨의 심복으로 이조에 있으면서 흉한 일을 벌였으며 대사간이돼서는 영창대군 살해음모를 반대하는 정온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는 충남 병천면 백전리에서 괴산 능촌으로 이사해 살았다고 전하는데 광해군의 학정이 날로 심해짐을 깨닫고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차에 인조반정이 일어난 1623년에 자기의 관상을 보니 그해에 죽게 됐는지라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그런데 수변성을 만나면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인조반정이 있을 무렵 심기원과 사전에 내통해 벼슬길에 다시 올랐으나 대북파로 몰려 유배를 당했다.
광해군은 즉위한 후 정세변화에 따라서 왕위를 위협할 지도 모를 동복형 임해군과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는 등 학정을일삼으므로 인헌황후(좌찬성 구사맹의 딸)의 아들인 종(倧, 인조 : 1595-1637)은 조정에 대북파와 견원지간인 서인 일파와 경기 ․ 충청지방의 관리들을 포섭해 반정을 일으킬 것을 모의한다.
인조가 반정을 일으키기 전 어느 여름날 심기원이 그를 찾아와서 능양군(인조)의 사주를 봐 달라고 하기에 이곳 율리의 물치폭포에서 목욕한 후 소반에 보를 놓고 점을 쳐 보니 임금이 될 쾌인지라 이를 극비로 하고 반정을 일으킬 날을 잡아 주는데 천파일로 잡아주고 심기원의 심복이 될 것을 다짐한다.
그가 밀담을 마치고 오랜 노독으로 깊은 잠에 빠졌을 때, 난데없이 한 밤중에 동편 산에서 개가 짓는 소리가 3번 들리므로 그는 잠에서 벌떡 일어나 "이 앞산이 무슨 산이냐?" 하고 물으니 그의 심복 하나가 대답하기를 "이 산은 거북이가 앉아 있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좌구산이라고 합니다"하니 점술을 연구해 천문에 밝고, 풍수에 조예가 있는 백곡 김치는 말하기를 "아니다 저곳에서 개가 3번 짖었으니 저 산은 좌구산이 틀림없다"하면서 "누가 염탐을 하러 오는 것이 틀림없으니, 이곳을 빨리 떠나자"하고 서둘러 모두 이곳을 떠나므로 난을 무사히 피했다고 한다.
그 후 인조는 1623년 3월 13일 밤에 이귀, 심기원, 최명길, 김자점 등의 병력 700여명과 능양군이 이끄는 친병과 장단부사 이서의 병력 700여명이 합세해 인조 반정을 성공시킨다.
김치는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 다시 유배에서 풀려나 동래부사를 거쳐 1625년(인조3년)에 경상도 관찰사가 됐으나 그 해에 학질(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 그가 죽은 후 시신을 괴산 능촌으로 모시려했으나 상여가 이곳 율리재를 넘을 때 명정이 바람에 날려 현재의 그의 산소 자리에 앉으므로 그 곳에 안장했다고 그 후 후손들이 이 곳에 와서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그가 잠시 이곳에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닦으며 지낸 보천에서 율리에 이른 깊은 골짜기를 뜻하는 심고을 그의 호로 정했을 가능성과 유배를 당할 때는 근처에, 산소의 우연성으로 미루어 이 곳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 출처 : 한국의 산하, http://www.koreasanha.net/san/jwagusan.htm >
<참고자료 6> 좌구산(坐狗山)
증평에서 청안을 거쳐 청천쪽으로 가다보면 칠보산과 좌구산의 중간지점 쯤 되는 곳에서 봉천사 입구인 고개가 질마재 고개다. 이 고개를 넘어 조금 가면 봉씨가 난을 피해 살았다하여 봉천리라고 이름 지은 마을이 있다.
1106년(고려 예종 1년) 어느날, 경기도 강화군 하첩면 장정리 하음산 기슭 연못가에 상서로운 광채가 비치더니 이어서 비가 내리쳤다. 물을 길러 왔던 한 노파가 이상히 여겨 살펴보니 못 수면에 돌로 만든 상자가 떠 있었고, 그 상자 속에는 귀여운 사내 아이가 들어 있었다.
노파는 이 아기를 궁중에 바쳤고 왕은 기이하게 여겨 왕실에서 키우도록 했다. 노파가 봉헌했다 하여 성을 봉(奉)이라 하고 장래 국가를 도울 인재라 하여 이름을 우(佑)라 붙인 '봉우'를 시조로 하는 하음 봉씨들의후손들은 그 후 많은 인재들이 등용됐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 내고 왕위에 오른 다음해인 1457년 성삼문, 박팽년 등은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동료인 김질의 배신으로 발각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소식을 들은 박팽년의 매부 봉여해는 세조를 살해하기 위해 칼을 차고 어전으로 가던 도중 의금부에 붙잡혀 화를 당했다. 당시 그의 벼슬은 궁중요리를 검사하는 사옹원별좌였기에 어전 출입이 쉬웠다 한다.
봉여해는 어려서 재주가 뛰어나 박팽년, 성삼문 등과 함께 박중림(박팽년의 아버지) 문하에서 수업, 학문을 떨쳤고 박중림의 사위가 됐다.
봉여해가 박팽년과 함께 단종 복위 모의에 참여했다가 화를 당한후 세조 이후에는 벼슬길에 오른 사람이 거의 없고, 화를 면하기 위해 전국으로 흩어지던 중 일부가 이곳에서 살게 됐다 한다.
외봉천에서 서쪽으로 약 1km쯤 떨어진 망월산(해발 459m : 망탑봉)이 있어 이곳에서 보면 미호평야와 증평평야를 한 눈에 볼 수 있고, 이곳에 사는 봉씨들은 강화도를 쳐다보며 고향의 향수를 달래기도 하고, 난을 피하는 사람으로 감시의 역할을 한 산이기도 하다.
망탑봉에서 보면 군사적 요충지인 두타산성, 이성산성, 구녀산성과 북이면 부연, 토성, 광암의 경계가 되는 낭비성, 삼보산맥들이 한눈에 보여 군사적 요충지로 적진의 활동을 탐색하고 감시하는데 적지임을 알 수가 있다.
남봉 김치(金緻 : 1577~1625)는 1597년(선조30)에 알성문과 병과로 급제, 설서(設書 : 세자시강원의 정7품)를 거쳐 1608년에 조정 관리들의 휴가연수를 담당하는사가독서를 담당했다.
광해군 때 사북시정, 이조참의, 동부승지, 대사간을 거쳐 홍문관교리, 부제학등을 역임하고 정3품 병조참지에 올랐으나 독직사건으로 파면됐다.
이이첨의 심복으로 이조에 있으면서 흉한 일을 벌였으며 대사간이돼서는 영창대군 살해음모를 반대하는 정온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는 충남 병천면 백전리에서 괴산 능촌으로 이사해 살았다고 전하는데 광해군의 학정이 날로 심해짐을 깨닫고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차에 인조반정이 일어난 1623년에 자기의 관상을 보니 그해에 죽게 됐는지라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그런데 수변성을 만나면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인조반정이 있을 무렵 심기원과 사전에 내통해 벼슬길에 다시 올랐으나 대북파로 몰려 유배를 당했다.
광해군은 즉위한 후 정세변화에 따라서 왕위를 위협할 지도 모를 동복형 임해군과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는 등 학정을일삼으므로 인헌황후(좌찬성 구사맹의 딸)의 아들인 종(倧, 인조 : 1595-1637)은 조정에 대북파와 견원지간인 서인 일파와 경기 ․ 충청지방의 관리들을 포섭해 반정을 일으킬 것을 모의한다.
인조가 반정을 일으키기 전 어느 여름날 심기원이 그를 찾아와서 능양군(인조)의 사주를 봐 달라고 하기에 이곳 율리의 물치폭포에서 목욕한 후 소반에 보를 놓고 점을 쳐 보니 임금이 될 쾌인지라 이를 극비로 하고 반정을 일으킬 날을 잡아 주는데 천파일로 잡아주고 심기원의 심복이 될 것을 다짐한다.
그가 밀담을 마치고 오랜 노독으로 깊은 잠에 빠졌을 때, 난데없이 한 밤중에 동편 산에서 개가 짓는 소리가 3번 들리므로 그는 잠에서 벌떡 일어나 "이 앞산이 무슨 산이냐?" 하고 물으니 그의 심복 하나가 대답하기를 "이 산은 거북이가 앉아 있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좌구산이라고 합니다"하니 점술을 연구해 천문에 밝고, 풍수에 조예가 있는 백곡 김치는 말하기를 "아니다 저곳에서 개가 3번 짖었으니 저 산은 좌구산이 틀림없다"하면서 "누가 염탐을 하러 오는 것이 틀림없으니, 이곳을 빨리 떠나자"하고 서둘러 모두 이곳을 떠나므로 난을 무사히 피했다고 한다.
그 후 인조는 1623년 3월 13일 밤에 이귀, 심기원, 최명길, 김자점 등의 병력 700여명과 능양군이 이끄는 친병과 장단부사 이서의 병력 700여명이 합세해 인조 반정을 성공시킨다.
김치는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 다시 유배에서 풀려나 동래부사를 거쳐 1625년(인조3년)에 경상도 관찰사가 됐으나 그 해에 학질(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 그가 죽은 후 시신을 괴산 능촌으로 모시려했으나 상여가 이곳 율리재를 넘을 때 명정이 바람에 날려 현재의 그의 산소 자리에 앉으므로 그 곳에 안장했다고 그 후 후손들이 이 곳에 와서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그가 잠시 이곳에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닦으며 지낸 보천에서 율리에 이른 깊은 골짜기를 뜻하는 심고을 그의 호로 정했을 가능성과 유배를 당할 때는 근처에, 산소의 우연성으로 미루어 이 곳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출처 : 증평군 홈페이지, 문화/체육,
http://jeungpyeong.chungbuk.kr/culture/culture_03_05_01_04.html>
첫댓글 언제나 한번 더 산행하는 느낌으로 글을 읽습니다. 덕분에 월 1회의 산행이 기분은 두번으로 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