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의 구간거리는 백두산에서 지리산까 도상거리가 약 1625km (북한에서는 1470km), 남한구간은 보통 도상거리 약 690km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GPS를 통한 측정거리는 680km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종주 등반을 통한 기록 측정은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뜻있는 분들의 노력으로 남한구간 실측거리가 약 735.6km임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아래의 자료는 그 과정을 기록한 김규태 등반대장의 글입니다.
더불어 월간 <사람과 산> 2002. 12월호에 발표된 실측자료를 함께 올립니다. 수고한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박수를 보냅니다.
백두대간에서 국토 사랑을 배웠다
김 규 태(셀파산악회 등반대장, 경북산악연맹구조대 대장)
"탱", "발", "탱", "발" 새벽의 산에서 이상한 암호 같은 소리가 간격을 두고 짧게 굵게 계속해서 울렸다. 지나쳐보면 등산객들이 분명한데, 한 무리의 까만 복장을 한 등산객이 지나고 나면 빨간 코팅을 한 면장갑을 낀 사람들이 등에는 무거운 배낭을 지고, 손에는 줄자를 쥐고 오면서 "탱", "발"을 연속으로 외친다.
"탱"은 탱탱하게 줄을 당기라는 줄인 말로 후미의 실측자가 앞사람들에게 하는 말이고, "발"은 선두 줄잡이가 스프레이 페인트로 표시를 하였으니 출발하라는 신호였다.
50미터 밧줄 들고 백두대간 종주에 나서
1997∼8년 1차 백두대간 종주대를 모집하여 가칭 '셀파산악회'로 30여명의 완주자를 배출했다. 그 과정에서 지도상의 거리와 각종 등산서적에 나와 있는 거리가 판이하게 다르고, 고저좌우로 돌아가는 실제거리의 차이가 많음을 깨닫게 됐다. 이후 한반도의 등뼈인 백두대간의 정확한 실측자료를 얻기 위하여 고민하기 시작했다.
평소 국토실측의 오차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1999년 발족한 2차 종주대의 회원들에게 백두대간 실측을 제안하자 모두들 기쁘게 호응하여 주었다. 처음부터 모두들 재미있어하고 자부심도 가지게 되었다. 필자 또한 매차 종주 때마다 실측보고와 실측예정자도 같이 발표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큰일을 하는지를 지속적으로 설명하였다.
백두대간 실측은 10미터씩 표시된 50미터 밧줄로 앞뒤에 계수기를 들고 7∼10명이 한 조가 되어 시행했다. 환경과 날씨와 기온의 변화에 따라 어려움은 있었지만, 최초 백두대간 실측이라는 의의를 생각하며 모두들 투철한 의지로 50미터씩 표시하며 진부령을 향해 진행해갔다.
50미터 단위로 거리를 재며 선두가 스프레이를 칠하는 표시방법에는 한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환경오염이었다.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서도 50미터 후방에 있는 계측자가 선두가 표시한 지점을 정확히 찾아야 하는 문제점에 봉착했다. 고민한 끝에 가장 선명한 표시이자, 곧바로 지울 수 있는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하였다. 겨울에는 눈 위에 적색 스프레이 페인트로, 흙바닥과 바위는 흰색으로, 나무에는 검은색 스프레이 페인트로 표시하였다.
그러나 여름철에 비라도 심하게 쏟아지면 스프레이 페인트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럴 때에는 준비해간 큰 시그널로 앞에서 바닥에 놓아두면 후미에서 회수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바람이라도 심하게 불면 선두에서 스프레이 페인트를 든 사람들의 고생이 특별히 심했다. 환경오염을 걱정하여 스프레이는 최소량을 사용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표시지점을 지나쳐버리는 경우도 빈번했다.
그러나 실측산행 차수가 거듭되면서 후미에서는 보물(표시지점)을 찾아내는 기술도 나날이 발전되어 갔다. 이처럼 악조건의 기상 상황에서 실측을 마치고 내려오면 등산화는 본의 아니게 그림도 그려졌고, 실측자들은 두통을 호소하기도 했다. 특히 후미는 빠짐없이 스프레이 페인트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해야했다.
백두대간 거리 실측에 쓰레기 수거도 병행
실측도 중요하지만 쓰레기를 수거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인간의 잘못된 환경 의식은 산 이곳 저곳에 쓰레기 더미들을 참혹한 흔적으로 남겨 놓았다. 발길에 채여 굴러다니기도 하고, 나무 가지에 걸려있기도 하며, 바위틈 속에 박혀있는 등 대자연 앞에서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청소하기로 뜻을 같이 한 회원들은 백두대간간에 버려진 쓰레기를 조금이라도 더 주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큰 잡주머니를 20여 개 준비하여, 종주 때마다 쓰레기를 수거하여 손에 들거나 배낭에 매달아 다녔다. 국립공원을 끼고 있는 산은 수거봉지가 부족하여 다 줍지 못하고 내려올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한 달에 두 번씩 무박산행을 하면서 7∼15시간의 강행군에 배낭의 무게도 적지 않은데, 백두대간 쓰레기 청소와 실측은 날이 갈수록 대원들이 힘들게 했다.
경북산악연맹구조대 대장인 필자도 두 가지를 병행하기란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그런 탓에 연로한 선배산악인과 여자회원들의 불만은 생각보다 심했다. 백두대간 종주를 그만두고 싶었다고 완주가 끝난 후에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우리가 아니면 누가 실측을 해 낼 수 있었겠느냐'하면서 죄송하다는 이야기 외에 할 말이 없었다. 아마 실측과 쓰레기 수거작업을 하고 있을 때, 대간을 종주하는 많은 분들이 우리들을 보았으리라 여겨진다. 자그마한 바램이라면 그 분들이 느낀 점이 있어 최소한 줍지는 않더라도 자신이 가져온 오물을 버리지 않고 집으로 되가져갔으면 했다.
실측에 참가한 백두대간 종주대원들 중에는 104킬로그램이나 되는 거구의 사나이가 완주를 하고 나서 몸무게가 9킬로그램이나 빠지기도 했고, 당시 만 12세로 초등학생이엇던 김비나 양은 국내 여자 최연소 완주자가 아니었던가 싶다.
회원인 이옥자씨는 발가락 골절을 당했고, 이상필 회원은 팔 골절을 당하는 큼직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산행에 빠짐없이 참가하는 열의를 보였다. 또한 소련제 탱크라는 별명을 가진 조양용씨는 머리보다 큰 수박을 배낭 속에 깨뜨리지도 않고 가지고 와서 회원 전체를 놀라게도 하였다.
그리고 진고개∼단목령 구간을 종주할 때는 새벽 3시에 출발하여 오후 9시가 넘어서 내려오다 '백곰' 이봉춘 단장은 양 허벅지가 헐자 부끄러움도 잊고 바지를 내려 약을 바르기도 했다. 또한 부부 완주자인 박태근 이옥자 부부, 공광옥 권순숙 부부, 오영수 정선이 부부, 2번 연속 완주자인 이봉춘, 오영수, 방재태 회원 등 많은 회원 분들이 백두대간 실측과 청소를 같이 했다. 이러한 열성 회원들이 뭉쳐 귀중한 자료를 만들 수 있었다고 돌이켜본다.
백두대간 사랑에 고통도 잊었다
여름에는 얼마나 많은 비를 맞으며 밥을 빗물에 말아먹어야 했던가. 한여름에 삼도봉을 오를 때는 3명의 회원이 탈진으로 쓰러지기도 했다. 잦아지는 의견 충돌에서 정말로 많은 애를 태워야 했다. 회원들이 바진 구간을 지원 산행할 때는 다시 웃으며 손을 잡았고, 완주 후에 진부령에서 벌인 완주기념 행사 때는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부둥켜앉고 고마워했다.
또한 백두대간 완주자들이 구성한 '백두대간사랑회'는 2차 40여명을 완주시켰고, 현재 50여명의 3차 종주대에 지원 산행을 계속하고 있다. 종주대에서 발족한 대정산악회는 현재 낙동정맥을 종주하고 있다.
셀파산악회 회원들은 1년에 한차례 이상 백두산 종주산행과 말레이시아 키나바루, 일본의 북알프스, 중국의 옥룡설산, 천자산, 구채구, 황룡 등을 탐방하는 산행과 오지 여행을 다녀오거나 준비하는 등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백두대간 종주는 미약한 인간인 우리들에게 국토사랑의 계기를 심어주었다. 더불어 사는 세상, 우리 인간 또한 백두대간을 종주하면서 풀뿌리, 나무뿌리, 돌 한 조각도 훼손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편으로는 동·식물들의 서식지를 방해하지 않았는가 생각해본다. 진정 백두대간의 주인인 동·식물들을 보호하는데 노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잘려나간 산허리, 무분별하게 훼손된 난개발 등을 보면서 걷게되는 백두대간 종주 길은 인간이 얼마나 악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편적 사례였다.
끝으로 본 실측조사에 긴 시간을 할애한 많은 회원들의 수고에 감사를 드리며, 그들의 노고의 산물인 백두대간 실측자료가 잘못된 이정표의 거리 수정 및 개·보수에 참조되기를 바란다. 또한 전국의 많은 산악인들이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데 이 실측자료가 쓰여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수고해주신 회원 여러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