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살다간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
지정하
1919년 4월1일(음력 3월 1일)은 아오내 장날이었다.
유관순은 부모님과 함께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아오내 장터로 가서 전날 밤새도록 그린 태극기를 장터에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정오가 되었을 때. 유관순은 쌀가마니가 높이 쌓여있는 꼭대기에 올라가서 큰 소리로 외쳤다.
“ 우리는 단결해야 합니다. 삼천리강산이 울리도록 만세를 부릅시다.”
“ 대한 독립 만세 ! "
유관순이 외친 만세 소리를 신호로 수천을 헤아리는 군중들은 제각기 품속에 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었다.
" 대한 독립 만세 ! "
" 대한 독립 만세 ! "
순식간에 아오내 장터는 만세 소리로 천지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는 태극기의 물결에 일본헌병들은 당황하며, 사정없이 총칼을 휘둘렀다. 이 때, 맨 앞에서 만세를 부르던 김상원이 칼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유관순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헌병들이 쏘아대는 총에 쓰러졌다. 아오내 장터는 삽시간에 피바다가 되어 버렸고, 장터 시위 주동자인 유관순은 천안 헌병대 본부로 넘겨졌다.
유관순열사는 1902년 12월 16일(음력 11월 17일)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의 작은 마을에서 유중권씨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이소제 여사이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유교적 전통과 충효정신을 깨우치고, 일찍이 기독교에 입문한 가족들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신문화를 접하면서 교육에 대한 꿈과 민족정신을 키워왔다.
1916년 기독교감리교 공주교구의 미국인 여자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입학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5일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그 뒤 총독부 임시휴교령에 의해 이화학당이 휴교당하자 3월 8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고향에서는 이종성(李鍾成)이 주동이 되어 시위운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구금당해 실행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주선으로 3월 9일 밤 예배가 끝난 뒤 조인원(趙仁元)·이백하(李伯夏) 등 2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사촌언니와 함께 서울의 상황을 설명하고, 즉석에서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오내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한다. 유관순 열사는 안성·목천·연기·청주·진천 등의 마을 유지와 유림계를 규합하기 위한 연락원으로 선출되어 20일 동안 수백 리를 왕복하며, 시위운동에 참여할 것을 설득했다. 4월 1일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조인원(조병옥박사 부친)의 선도로 시위가 시작되자 시위대 선두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일제의 무력진압으로 시위 도중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당하고 자신은 주동자로 잡혀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 항소했으나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자 재판장에게 유관순 열사는
“죄를 지은 것은 일본인이다. 그런 일본인에게 우리를 재판할 권리가 있단 말인가?” 라는 주장을 시종 굽히지 않았다. 죄를 뉘우치고 제국신민이 되겠다고 다짐을 한다면 관대한 처분을 내리겠다는 재판관의 회유에 “강도를 몰아낸 것이 무슨 죄가 된단 말인가? 살아서도 독립만세 죽어서도 독립만세다.”라며 한 걸음도 물러설 줄 몰랐다. “너희들 조센징이 무슨 독립이란 말이냐?” 라는 모욕적인 말을 한 재판장의 검사를 향해 의자를 집어던진 그녀의 옥중 법정투쟁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이로 인해 유관순 열사는 법정모욕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감옥에서 쉴새 없이 계속된 고문은 그녀의 죽음을 앞당기게 했다. 일제는 그녀의 밥에다 모래와 쇳가루를 섞어서 먹게했으며, 머리에는 콜타르를 칠해 머리 전체를 잡아당기고, 가발처럼 머리가죽을 벗겨내기도 했다. 겨드랑이와 음부의 털도 불에 달군 인두로 태워 버렸고, 코와 귀는 면도날로 자르고 손톱, 발톱은 몽땅 집게로 뽑아 버렸다고 한다. 이런 모진 고문속에서도 유관순은 '독립만세'를 외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으며, 유관순 열사는 1920년 10월 12일 고문에 의한 방광파열로 끝내 숨지고 말았다.
18세의 꽃다운 나이였던 그녀의 사망소식을 접한 이화학당의 프라이교장은 일본이 유열사의 시신을 인도하지 않자 국제여론에 호소하여 그녀의 시신인도를 거듭 요구했다. 당시 일본은 유관순열사의 시신을 석유 상자속에 토막을 내어 보관하고 있었다. 학교측에 인도된 유관순의 시신은 눈뜨고는 볼 수 없을 만큼 머리, 몸통, 사지가 따로따로 여섯 토막으로 절단되어 있고, 코와 귀가 잘리고 머리와 손톱, 발톱이 뽑혀진 모습이었다고 한다.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열사의 마지막 유언]
유관순 열사는 18세의 짧은 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불사르다 순국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러나 그는 스물도 안된 꽃다운 나이이기에 그동안 독립운동가라는 칭호보다 유관순누나로 우리들 곁에 있었다. 어릴적 고무줄놀이와 쎄쎄쎄 등의 손 놀이를 할 때도 유관순은 친근한 언니로 노래 속에 함께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누나 유관순은 조국독립을 위해 일제와 맞서 싸운 강인한 투사였다. 어린 나이에도 일제의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독립만세를 외쳤던 그녀의 조국애와 투혼은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또한 유관순열사의 마지막 모습은 우리를 분노케 한다. 일제는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만행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저질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비롯한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만큼의 수많은 야만적 행동에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있다. 더욱이 전쟁주범인 자신을 원폭피해자로 전쟁피해자로 역설하고 있다.
올해로 광복 60년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친일청산의 과제가 남아있다. 간혹 뉴스를 통해 친일파의 후손들이 조상들의 재산권 환수를 위해 소송을 벌여 승소하고 있다는 보도를 접할 때 마다 분노가 치민다. 일제 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투사와 그의 가족들은 생계조차 어려운 분들이 많은데, 호사를 누렸던 친일파의 후예들은 뻔뻔스럽게도 조상의 땅을 되찾겠다고 소송까지 벌인다. 또 법원은 그들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손까지 들어준다. 그것은 60년의 긴 세월동안 청산되지 않은 친일문제 때문인 것이다. 진정 기쁨으로 광복절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은 친일문제가 청산되는 역사의 부끄럼이 없는 날. 60년전 태극기를 손에 들고 벅차게 거리를 활보했던 그날의 기쁨으로 진정한 독립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지정하님 잘 계시져^^ 잘 읽고 갑니다~~~~
반갑군요. 출산일이 다가와서 대기중이라 이번 제사에는 못볼 것 같네요.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