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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서울뉴스 ‘서울人’에 김순진 시인 - 가장 詩다운 시인으로 인터뷰하다
먼저 하이서울뉴스 ‘서울人’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선생님께서 실릴 기사 란은 서울 시청에서 발행하는 인터넷뉴스인데 ‘하이서울뉴스’란에 특별취재코너인 ‘서울人’에 해당이 됩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편안하게 생각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리어카 한 대’의 감동 때문에 일반기사만 취재했던 제가 새로운 코너에 도전을 해보려합니다. 기사의 주제를 ‘오직 시를 사랑하며 걸어온 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몇 가지 질문을 미리 보내드립니다. 선생님의 수필집 ‘리어카 한 대'를 읽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책을 참고 하셔서 답변을 주셔도 좋고, 새로운 의견을 써 주셔도 좋을 듯합니다. 제 질문은 취재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므로 자연스럽게 답변해 주시면 됩니다.
1. 최근에 상영한 영화 ‘詩’를 보셨는지요? 보셨다면 어떤 느낌을 받으셨는지요?
(시를 모르는 사람, 시를 쓰는 사람도 영화 ‘詩’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있기에
이야기를 여기서부터 풀어야 될 것 같아요.)
김순진 : 네, 저도 ‘시’란 영화에서 나오는 김용택 시인처럼 문화센터에서 시창작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3년 은평구청으로부터 주민들을 위해 시창작을 강의해줄 수 없느냐는 요청이 들어와 우연히 시작하게 된 시창작강의인데 지금은 김포문예대학과 스토리문학 출신문인들이 주축인 스토리문학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지요. 그밖에도 지방자치단체로 자주 강의요청을 받고 나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시가 무엇이냐고 물어요. 시는 이슬만 마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는 삶이지요. 영화 ‘시’가 성공할 수 있었던 까닭은 주인공인 윤정희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시를 한 편 써낼 수 있었던 것 때문이었을 겁니다. 제가 은평구에서 시창작강의를 시작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IMF를 만나면서 우리 동네에 사는 많은 젊은이들이 좌절하여 술 마시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평등한데 부모 잘못 만나서, 사업에 실패해서, 가정이 깨져서 기회를 가져보지도 못하고 좌절하는 그들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습니다. 저도 사업에 여러 번 실패하여 길에서 리어카를 끌고 노점을 하거나 막노동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저는 늘 생각했습니다. 남자는 아무리 사업에 실패한다 손치더라도 자기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몸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응암동의 대림시장 주변에 사는 상인, 노동자들에게 “살아볼만한 세상이다. 좌절하지 말고 일어서보자. 개똥밭에 넘어지면 개똥을 딛고 일어서서 툭툭 털고 가면 그만인데 개똥밭에 누워버리면 개똥꾸러기가 된다. 어떻게든 어려운 상황을 견디고 일어서자.”고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영화 ‘시’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듯 시를 쓰는 일이란 발견하는 일인데, 그 발견은 나뭇잎이나 흐르는 강물 등, 자연에서의 발견이 아니라, 나로부터의 발견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며 어떤 상황인데 그걸 어떻게 극복하고 이겨내느냐가 시의 관건이란 생각을 합니다. 시쓰기의 과정에서 그런 슬기가 모아지는 것 아니겠어요.
2. 삶에 문학이란 무엇이며, 왜 시를 쓰시는지요?
김순진 : 저는 소작농이자 화전민의 자식이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입니다. 남들이 3기분 등록금을 낼 때쯤면 저는 2기분을 내야하는 형편이었고 등록금 때문에 청소도 많이 하고 교무실로 서무과로 많이 불려 다녔습니다. 여름방학이 끝난 9월 초에 어머니는 품팔이로 마련한 2기분 등록금을 제게 주셨습니다. 저는 너무나 좋아서 가지고 가다가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친구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날다시피 집으로 달려와서 방이며 밤나무 밑을 뒤져보니 등록금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너, 등록금 잃어버렸지?” 물으시고 힘없이 대답하는 저에게 “엄마가 찾을 테니 너는 학교에 가서 공부해라.”하셨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돌아오니 어머니는 ‘등록금을 찾았다’며 ‘급히 쓸 데가 있어 며칠 있다가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중학교 3학년 봄에 어머니가 중병에 드셨습니다. 한 겨울에 인삼밭에 나가서 일하다가 체하셨습니다. 바늘로 손끝이나 따고 활명수를 사다먹는 정도로 견디시다가 서울의 대학병원에 모시고 가니 간경화증인데 못 고친다며 모셔가라 했습니다. 저는 어머니 병수발을 들며, 동생들을 건사하며 중학교 3학년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배가 점점 더 불러올라 곧 돌아가실 것 같은데 학교에서는 가을 소풍을 간다고 합니다. 저는 소풍을 안 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네가 소풍갔다가 올 동안 안 죽을 테니 소풍을 갔다 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소풍을 따라가서 홀로 바위틈에 끼어 우울하게 앉아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백일장을 하니까 시를 써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엄마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에 비유해서 시를 써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그 바위틈에 끼어서 앉아 있었지요. “김순진! 김순진! 니가 장원이래!” 아이들이 부르더군요. 그때 처음으로 글을 써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렸습니다. 공책 열 권을 타다가 어머니 머리맡에 놓아드렸더니 어머니께서 “내가 너를 가르치지 못하고 죽는구나. 너는 글을 잘 쓰니 글쓰기 공부를 열심히 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3일 동안 내내 알아듣지 못하는 울음을 우시다가 운명하셨지요.
사업에 여러 번 실패하고 문학을 공부할 때 일입니다. 어느 날 어머니에 대하여 골똘히 생각하다가 중학교 2학년 때 내가 잃어버린 등록금은 그때 찾은 게 아니라 또다시 며칠 동안을 품팔이하여 새로 마련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확실하게 마음을 굳혔습니다. 나는 어머니를 위하여 시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 사랑을 노래하고 어머니의 크나큰 은공을 갚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문학이란 이슬만 먹고 사는 신선 같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시를 쓰면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하고 제게 수없이 물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많은 시간을 노동판에서 보내고 길거리에서 노점을 해봤지만 아무도 저에게 ‘야, 너, 어이, 김씨’ 등의 말로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제 손에는 언제나 시집, 시론집이 들려있었고 그들에게는 제가 쉽게 막말할 상대는 아니었나봅니다. 우리 농촌에서는 수박, 참외, 배추, 인삼, 등 아주 맛있고 좋은 농산물들이 나옵니다. 공업지대에서는 아주 좋은 휴대폰, TV, MP3, 자동차 등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돈만 벌면 영화를 꿈꾸거나 음악회에 가고 싶어 합니다. 농사를 주로 하는 나라는 후진국이고 공업을 주로 하는 나라는 개발도상국이며 문화를 주로 하는 나라는 선진국입니다. 노동을 하면 그때 바로 돈을 받고 그만이지만 문학을 하면 존경과 함께 돈을 받고 두고두고 받으며 자식 대에까지 받을 수 있으며 명문가가 됩니다. 저는 시를 통하여 무너진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자식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렵니다.
3. 시인의 삶(특히 가장이 시를 쓰면)은 고달프다고 하는데 어떻게 극복하셨는지요? 그리고 가족들은 선생님의 문학의 열정에 대해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시는지요?
김순진 : 며칠 전 김포문예대학의 한 여자 수강생이 저에게 묻더군요. 자신은 여자라서 가족을 챙겨야하고 남편의 눈치를 보아야하고 금전적으로도 넉넉지 못해서 문학을 적극적으로 할 수가 없는데 교수님은 남자라서 좋겠다구요. 그래서 제가 웃으며 그분에게 ‘그게 선생님이 극복해야할 가장 큰 문제’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내가 내 주변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하고는 아무것도 이룰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여자라서 하지 못하라는 법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시골출신이라서 못하는 것도, 가난해서 못하는 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용기와 노력이 있으면 하는 것이고 포기하면 못하는 것입니다. 새도 집을 짓습니다. 돼지도 새끼를 기릅니다. 쥐도 겨울 먹이를 물어다가 곳간을 채웁니다. 집, 먹는 것, 자식 기르는 것, 그것은 누구나 해야만 하는 동물적인 의무입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사고(思考)의 행위를 해야 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 말고 내 문제를 찾아야 합니다. 평생 함께 가고 싶은 나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 말입니다. 저에게는 시를 쓰는 일이 너무나 기쁘고 행복합니다. 제가 문학이 하고 싶어 공무원을 그만두고 서울로 공부하러 나올 때 가족들의 만류는 대단하였습니다. 최근까지도 공직을 그만둔 일에 대하여 아버지는 야단을 치셨습니다. 가족들도 제가 시를 쓰기 때문에 너무나 고생이 많습니다. 지금은 술을 가끔 마시지만 저는 시공부를 위해 술과 담배를 끊었더랬습니다. 남들은 시를 쓰려면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워야 멋이 있다고 하는데, 저는 죽기 살기로 시공부를 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 공부를 하고 나니까 자신감이 생기더라구요. “아, 이거구나. 시란 처절함을 견뎌낸 자신감이로구나.”하고 그때 깨달았습니다. 지금은 아버지나 형제들, 가족들의 호응과 자랑이 대단합니다. 제가 견뎌내지 못했다면 가정도 깨지고 저에게 시도 없었을 겁니다.
4. ‘리어카 한 대’ 수필집을 몇 달 전에 출판하셨는데 선생님의 삶이 평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취재를 요청하게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평탄한 공무원의 삶을 그만두고 어렵게 공부를 해서 오직 문학을 위한 삶을 살고 계십니다. 그 길을 걸어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과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김순진 : 저는 시골에서 공무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시골의 말단공무원의 생활은 매일같이 나가서 퇴비, 농약, 논갈이 등을 독려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이 끝나면 주민들과 술 마시기에 바빴구요. 물론 그 일에도 나름의 사명감과 보람은 있지요. 그러나 저는 그렇게 늙기는 싫었습니다. 공무원을 나와 특별한 기술 없이 서울에서 살아간다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봉제공장을 동업해서 망했습니다. 그리고 슈퍼를 해서 망하고 나중에는 식당을 해서 망하게 되었지요.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에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습니다. 세 번을 크게 망하니까 정말 어찌해야 할지 난감하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저를 동정하거나 직장을 얻어주지 않았습니다. 가장 힘들 때 저는 문학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먼저 나를 세워야지 내 정신이 바로서지 않고서는 어떤 사업도 직장도 저에겐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비가 철철 오는 날 밤이나 눈이 펑펑 내리는 날 밤에 튀김 어묵 등을 파는 포장마차의 프로판가스를 넣어 물을 데우는 철제의자에 앉아 시를 쓰거나 시공부를 하다가 날이 새는 날이 많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저보고 미쳤다고 했습니다. 저도 미친 줄은 알고 있었습니다. 시에 미쳐있었으니까요. 사람들은 저에게 공인중개사 공부를 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숫자가 게 제일 싫습니다. 영어도 싫습니다. 우리말로 된 문학이 제일 좋았습니다. 사투리가 통용되는 문학, 촌놈일수록, 아픔이 많을수록, 가난할수록 할 말이 많은 문학이 좋았습니다. 길거리에서 5년을 넘게 밤을 지새우며 글을 쓰고 문학공부를 했습니다. 저에겐 어려움이 많았지만 더는 물러날 곳이 없어서 배수진을 치고 정진했습니다. 그렇게 하니 용기가 생기고 이젠 무엇을 해도 되겠다는 용기가 생기게 되더라구요.
5. 주로 시는 언제, 어떤 공간에서 쓰시는지요?, 그리고 책과 사색은 얼마나 많이 하시는지요?
김순진 : 저에게 시를 쓰는 시간과 공간은 따로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건 생각이 떠오르면 시를 씁니다. 밥 먹다가도 쓰고 화장실에서도 쓰며 잠을 자다가 꿈에서도 시가 떠올라 벌떡 일어나 앉아 시를 씁니다. 그렇다고 제 시가 거룩하거나 대단치는 못합니다. 시는 교훈이나 성찰이기보다는 발견이고 저의 시는 대부분 순발력과 재치를 가미한 관찰이기 때문입니다. 늘 책과 함께 합니다. 제 가방에는 늘 시집이나 수필집, 소설책, 문학지 등이 들어있습니다. 전철은 저에게 최고의 독서실이자 시적 발상의 장소입니다. 책은 상상을 도와주는 최고의 도우미고요.
6. 시가 잘 쓰여 지지 않을 땐 특별히 극복하는 비법이 있으신지요?
김순진 :시가 잘 쓰여 지지 않을 땐 시를 쓰지 않습니다. 거리나 자연, 책상 위의 소품들, 음식의 재료 따위를 물끄러미 바라보지요. 마치 구경꾼처럼 말입니다. 그러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신발가게에는 내가 신고 싶은 신발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수십 년 째 저를 기다립니다. 우리 고향집으로 향하는 시외버스는 제가 타든지 타지 않든지 수십 년째 제가 타기만을 기다리며 왕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꽃은 고통의 겨울을 이기고 피워줍니다. 내가 어떻게 자반고등어를 먹고 싶은 걸 아는지 그 식당의 아주머니는 내 배가 고플 때쯤 노릇노릇하게 자반고등어를 구워놓고 기다리다가 내가 식당문을 들어서자마자 ‘어서오십시오!’ 하며 반깁니다. 세상 모두가 시지요. 바야흐로 우리시대는 시의 공화국입니다.
7. 스토리문학과 문학공원은 언제부터 운영해 오셨는지요? 운영하시면서 힘든 점은 없으신지요?
김순진 : 노점을 하면서 시작한 공부에 용기가 생겨서 평생 글을 쓰면서 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에 “이왕에 글을 쓰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자.”란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2003년 3월에 ‘도서출판 문학공원’이라는 출판사를 내고 2004년 6월에 월간 <스토리문학>을 창간하게 되었지요. 무일푼으로 시작한 스토리문학과 출판사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매달 한 번도 금전으로부터 자유로워 본적이 없습니다. 변변히 광고 하나 따낸 일이 없고 누구의 도움을 받은 일도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금전문제를 제외하고는 너무나 재미있는 사업입니다. 누구나 금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 문제를 제외하다보니 오히려 그 문제가 해결되더라고요. 오로지 성실함과 겸손으로, 그리고 문학성만을 추구하면서 운영하다보니까 책을 내겠다는 사람이 이어져서 겨우겨우 유지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문단의 많은 원로선생님들을 만나고 그분들로부터 인생이야기를 듣고 어렵고 못 배운 분들을 가르치고 도와 문단에 내보내거나 책을 내게끔 도와드리는 일은 저에게 매우 큰 보람입니다.
8. 문학 강의를 나가시면서 재미있었던 에피소드를 말씀 해주시겠어요?
김순진 : 한번은 포천문인협회가 송년회를 하면서 저를 문학강연의 강사로 불렀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할까 고민하다가 ‘시론’을 몇 페이지 분량으로 준비해서 갔습니다. 행사장소로 가보니 그곳에는 문학강연을 들으러온 사람들 중 문학 지망생은 거의 없고 대부분 농사를 지으시는 포천문화원 소속의 어르신네들이었습니다. 저는 준비해간 문학페이퍼는 접었습니다. 그리고 농사짓는 이야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가을걷이가 끝나면 내년에는 무얼 심으실까 궁리를 하십니다. 찬물배미에는 찰벼를 심고, 소출은 조금 적더라도 밥맛 좋은 오대벼를 조금 더 심어 큰 아들을 주며, 고추를 심었던 자리엔 배추를 심고, 배추 심었던 자리에는 감자를 심어야겠다. 그런 계획을 세우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계획으로 글을 씁니다. 아버지는 종뎅이를 옆구리에 차고 갈아엎은 밭에 공을 놓을 때 오른발 뒤꿈치로 꾹 눌러 밟은 자리에 두 알 세 알 떨어뜨려 왼발 앞부리로 쓱 덮으십니다. 그런데 콩은 네 알 다섯 알 떨어져서 나지요. 그 콩을 다 먹을 수 있습니까? 때론 비둘기가 파먹기도 하고 자벌레가 잘라먹기도 하며 모두 나와서 여러 대가 자라기도 하지요. 없는 자리엔 모종을 내고, 많이 나온 자리는 솎아주며, 북돋워주고, 웃자라면 순지르기를 해줘서 콩꼬투리가 많이 열리게 해야지요. 제때 수확을 해야 하고, 수확하면 돌을 고르고 수건으로 문질러 때깔을 내야 제값을 받고 팔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남대문이 불났다거나 어떤 사건이 나면 바로 뿌린 시의 씨앗을 솎아주지도 북돋워주지도, 빈 데에 모종내지도, 상품으로 만들어내지도 못하면서 쓸 데 없는 말로 비료를 퍼부어 웃자란 시를 바로 써 올리고 바로 발표하잖아요.”라면서 문학강의를 농사짓는 이야기와 견주며 했습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문화원활동을 하시는 어르신들이 아버지한테 전화를 빗발치듯 걸어서 ‘어떻게 그렇게 아들을 잘 길렀느냐’고 난리들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제가 문학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으시더군요. 하하하.
9. 요즘 시가 너무 어려워 독자들의 외면을 받고 있습니다. 요즘시의 흐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또한 시를 많은 독자들로부터 호응을 얻기 위해서 문단에서 지향해야 할 길은 무엇인가요?
김순진 : 사람들은 시가 어려워진다고 걱정을 합니다. 세상은 진화를 요합니다. 시에 있어서도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매년 신춘문예 당선 시들을 읽어보면 참신한, 신선한 , 그리고 기발한 발상의 시들이 당선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시는 학문입니다. 학문은 남이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추구해야 합니다. 휴대폰이나 컴퓨터가 진화를 거듭하듯 시도 계속되는 진화의 대열에 있어야 합니다. 시의 퇴보는 문화의 퇴보와 맞물려 돌아갑니다. 시계가 나뭇가지에 걸려있거나 벽에서 흘러내리는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영속’도 사실은 시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시는 새로움을 추구해야 하는데, 너무나 어렵게 가는 것은 사실 바람직한 것이 못됩니다. 김수영 시인이 초등학교 6학년까지의 언어로만 시를 써서도 그리 심오한 저항시를 써냈다면 시의 뜻은 심오하되 시어는 어려워질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한자어, 외래어 등을 배척해야 하지만 시대적인 상황, 병균의 이름, 새로운 병명, 컴퓨터 용어 등이 시어에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시의 독자는 시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시를 쓰던 읽던 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란 호칭으로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시인은 스스로 되는 것이지 누가 누구에게 주는 상이나 자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수가 늘어서 시인이 시인답지 않다는 말과 시가 너무 남발되어서 시답지 않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둘 모두를 좋게 생각합니다. 시인이 늘어나는 것과 시가 많이 쓰여지는 현상은 좋은 현상입니다. 도둑이 늘고 범죄가 느는 게 걱정이지 시인이 늘고 시가 많이 쓰이는 게 무슨 걱정입니까. 인터넷의 발달에 따라 시의 르네상스 시대가 온 듯합니다. 시가 독자의 호응을 얻기 위해서는 영화 ‘시’에서처럼 시낭송회, 시화전을 하면서 노래, 무용, 창, 행위예술(퍼포먼스) 등과 연대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10. 작품 활동에 대한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신지요?
김순진 : 지난달에 자전소설집 『너 별똥별 먹어봤니』를 한 권 더 냈습니다. 호언하거나 장담하는 일은 잘 하지 않는 성격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간 정말 열심히 써왔습니다. 이제 책으로 출간할 차례입니다. 평론집도 내고 장편동화집도 내고 시집도 내고……. 앞으로 몇 년은 제가 쓴 책을 자주 만나실 수 있도록 노력하렵니다.
김순진 시인 보도자료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김순진 시인(50)이 첫 수필집 『리어카 한 대』를 펴냈다. 이 수필집에는 김순진 시인이 그간 신문, 월간 잡지 등에 기고한 40여 편의 수필이 실려 있다. 김순진 시인 경기도 포천출생으로 한국방송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을 수료하였으며, 포천시에서 공무원으로 재직한 바 있다. 김순진 시인은 현재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한국시문학아카데미 회원, 은평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순진 시인은 지난 2002년 문학공원동인(창립회장)을 결성하여 8번째 동인지를 내오고 있으며 2004년에는 월간 <스토리문학>을 창간하여 현재 70호를 발간하기에 이르고 있다. 그는 현재 한국스토리문인협회 회장, 시섬문인협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문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김순진 시인은 1984년 첫 시집 『광대이야기』를 시작으로 시론집 『좋은 시를 쓰려면』수필집 『리어카 판 대』, 청소년장편소설 『너, 별똥별 먹어봤니』등을 출간하였으며, 편저로는 『그래도 눈물난다』, 『상처 많은 풀이 향기롭다』,『먹다 남은 케이크 한 조각에게 보내는 메시지』, 『바람개비』, 『기억은 소금 없이도 간간하다』,『마른 이파리 한 잎』, 『봄을 밀회한 여자』, 『파란우체국』, 『애인』, 『도자기의 노래』, 『해가 솟는다』등을 출간한 바 있고, 그의 시 「국수나 한 그릇 하러가세」(한성훈 작곡), 「겨울 고향집」(구두회 작곡), 「제주여 한라여」(정영택 작곡), 「사랑으로 가는 길」(고영필 작곡) 등은 가곡으로 작곡돼 널리 애창되고 있다.
김순진 시인은 포천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문학공부에 뜻을 두고 상경하여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이 책에는 IMF시절 여러 번 사업에 실패하고 건설현장의 잡부, 노점상, 세일즈 등 안 해본 것 없이 어려운 환경을 살아오면서도 이웃들과의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들이 들어있어 훈훈한 감동을 준다. 특히 그의 수필집 『리어카 한 대』는 그가 노점상을 하면서 한 부랑자에게 박스라도 주우면서 살아보라며 리어카를 사주었는데 당사자는 냉방에서 자다가 1월 1일 아침에 떡국이라도 먹이려고 찾아가보니 그만 얼어 죽고 만다. 그리하여 그의 장례를 주관해준 김순진 시인은 그 리어카를 지능이 좀 모자라는 한 청년에게 주게 되는데, 그 후 10년 만에 우연히 집 앞에서 만나게 되고 “아저씨가 리어카 줬어!”하며 알아보았다는 가슴 찡한 감동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김순진 시인은 그간 100여 편의 작품평론을 비롯하여 100여명의 원로작가를 만나 취재기를 썼으며, 시를 비롯하여, 소설, 동화, 수필, 칼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소화해내는 다재다능한 작가로서 장래가 기대된다. 그는 현재 김포문예대학과 스토리문학대학 등에서 시, 수필창작론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