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법
주란 도를 말합니다.
좀더 실재적이고 진전하는 의미로 쓰지요
자천을 하면서 우린 항상 주가 나아진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래야 합니다.
이런 주의 전진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그 절실함과 확신이 주를 이루게 해줄겁니다.
아마 이러겠지... 잘 될거야 잘되고 있을거야...
이런 어떻게 되겠지 정도의 기대심리로는 어영부영하는 것 이상은 아닙니다.
혹시 내가 안되는거 아닌가 잘되고 있나? 정말 이게 맞나? 아닌건 아닌가?
이런 의심과 회의가 든다면 이미 주는 곤두박질 치고 있을 겁니다.
1년, 10년, 100년의 내 자천행이 하루 아침에 박살나는 그 시발점이 이런 의심입니다.
전자의 주가 하루하루 나아진다고 믿고 싶지만 그래도 자꾸 불안한 이유는 자신이 정말 잘 되고 있는지 그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확신이 있으면 더 잘될거 같은데 하는 불안함이 있어요
그래서 점검을 누가 해주었으면 나 잘되고 있다고 말해주었으면 하는 의타성이 생기는 것도 많아요
저에게도 이런 의뢰가 자주 오지요
마음이 불안해서 뭔가 잘된다는 확신이 필요하거나 이러면 잘된거 아닌가 하는 자기의 느낌이나 몸의 반응을 보고 바로 알아내려는 성급함 같은 이유로 물어옵니다.
그러면 별로 알려주고 싶지 않습니다. 또 말을 회피하면 대답을 돌리기도 하구요
자신의 길을 가는 것에 스승이나 선배의 도움이 필요한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배우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시점과 스승이나 선배가 생각하는 그 시점은 차이가 납니다.
위와 같은 이유로 물어오면 도와서는 안됩니다.
자천은 갈등을 회피하는 것도 방황과 불안과 두려움과 고통을 외면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더 조장해서 그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더 정신적인 방황과 갈등을 줍니다.
그래야 자기의 주가 되어 가거든요
엘리트 코스를 밞아가며 쉽게 빠르게 지름길을 가기 바라지만 그렇게 가도 결국은 겪고 살아야 하는 우리 삶은 갈등과 슬픔과 고통의 연속입니다.
그런 삶의 어두움을 피하고 싶어서 도를 구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아마 도로써 안빈낙도와 동천복지를 꿈꾸는 정신적 퇴행이나 미숙함을 나타내는 지적수준일 겁니다.
이런 바람으로 도가 이루어 진다고 믿는다면 도를 우습게 보는 것일 뿐일 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의 길이라는 주체성과 독존의 의미를 이해 못하는 질문과 요구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자기의 주의 증진이든 본의같은 이타적인 도려나 홍익의 길이든 이것이 아니라면 그 성과는 역시 뻔한 것이겠지요
그리고 또 다른 어려움으론 사회생활하고 일상을 살면 우린 대인관계를 해야 합니다.
거칠게 말하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어렵게 느낀다면 그건 사람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철학이 타자에 대한 논의가 되고 있나 봅니다.
타자만 논하다 전체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런 전체나 형이상학에 지나치게 결벽증을 보이는 것도 바람직한 학문 자세는 아닐 겁니다.
보편과 특수는 한쪽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과거부터 그 중을 잡으려고 한거지 한쪽을 강요한 것은 아닐 겁니다.
내가 중요하고 타자가 중요하지만 우리에겐 역사가 있고 인류 공통의 목적도 있으며 의무도 있습니다.
라이프니츠같은 신의 예정조화도 있으며 스피노자 같은 코나투스도 있습니다.
그 중의를 얻는다면 훨 나은 것이 되겠지요
우리 자천은 그러한 철학을 뇌의 논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가 되어 삶의 실현을 그리고 삶에서 보고 겪어가야하는 철저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픔과 고독은 없어지는 것도 회피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홀로 삶의 즐거움을 위하고 불행을 피해가야 하는 존귀한 길을 가는 것입니다.(코나투스)
그래서 그 현명한 판단과 행동을 위한 깨어있음도 있어야 하고 그렇지만 운명의 다가옴과 사회, 나라, 지구, 우주 그 이상의 흐름속에서 이미 내게 다가오는 거역할수 없는 힘도 경험합니다.
나아가 내가 그러한 힘의 설정과 이루어짐에 일조하고 있다는 것마저도 안다면 이미 일반적인 삶은 아닌게 되겠죠(이것이 우리에게 목적이 있다는 의미이다. 절대적인 목적이 아닌 우리 중 누군가가 조금씩 의도하고 있는 우리의 목적)
이러한 자기 인생의 개척과 이미 개쳑되어진 생을 보면서 또다시 자기의 길을 가야하는 어쩌면 지독히도 외로우며 반대로 행복할 수도 있는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입니다.
자천하다보면 타자 때문이든 다른 무엇 때문이든 감정이 상하고 아프며 화가나고 짜증과 불쾌함이 있게 됩니다.
의욕도 사라지고 삶의 회의가 들어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만 일어나는데 이런 일상의 감정과 자천으로의 길을 가는 주의 증진과의 구분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감정적인 흔들림은 흔들림입니다. 어렵고 아픈것은 또한 그런 것입니다.
화나고 짜증나는 것이나 의욕없고 우울한 것은 역시나 그런 것입니다.
이런 것을 부정하거나 외면하면서 아닌척하거나 내가 자천하는 사람인데 이런것도 이겨내지 못하나 하면서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성욕이나 탐욕이나 기타 많은 욕구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런 자연스러운 인간으로서의 감정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럴 수 있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것과 자천과 연관 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천은 자천입니다. 그리고 감정은 감정입니다.
이 둘은 다른 것입니다. 서로 관계시키지 말고 따로 확실한 구분을 하시길 바랍니다.
이렇다고 내가 나쁜짓 하고 무슨 짓을 하든 무엇을 욕구하든 어떤 감정을 가지는 자천은 이루어 지거나 아무상관 없다는 무책임은 아닙니다.
내가 의욕이 떨어진다고 해서 자천이 떨어져서는 안됩니다. 화가 난다고 해서 이건 도가 아니라고 자기의 주를 억압해서는 안됩니다. 탐욕이 일어난다고 해서 자기의 주를 부정해선 안됩니다.
즉 일상의 감정으로해서 자기의 주를 또는 자신이 이룬 경지나 도까지도 싸잡아서 문제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서로간의 구분을 명확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분은 뇌가 아닌 가슴으로 해야 합니다. 지식으로 아는 게 아닌 현실의 삶에서 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은 신이고 나는 나입니다.
운명은 운명이고 나는 나입니다.
감정은 감정이고 나는 나 입니다.
화는 화고 나는 나입니다.
고통은 고통이고 나는 나입니다.
아픔은 아픔이고 나는 나입니다.
.......
하지만 자천인의 행위로 인한 결과에 대해서 그 책임은 물을 겁니다.
그대가 그대이지만 전체이기도 합니다.
자기 인생이지만 함께 살아가기도 합니다.
독존이지만 그대만이 독존인건 아닙니다.
전 멀고 멀기만 하니 제가 묻는 건 항상 시간의 지연이 있겠죠 어쩌면 길게.....
다만 기다려야죠 그대가 어느순간 뭔가 뜻대로 안된다면 그곳이 바로 저의 의지가 있었다고 하는 것이죠
그리고 후자에서 설명한 자천에 대한 회의나 의심은 자신의 나약함 심리도 있고 외부의 영향도 있을 겁니다.
하루하루 힘겹게 수행해가고 그렇게 한달 일년 십년...오랜 세월을 자천하면서 자기의 자천에 거만하고 교만함을 쌓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때론 의기소침해지는 것도 있습니다.
정말 이렇게 자천한게 뭔가 되긴 한건가? 기를 느낀다고, 뭔가 보인다고 이게 자천인가? 도인가?
하는 자기 부정이나 회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아까 한대로 오래 쌓아온 자기의 주를 하루 아침에 날려버리는 무지한 행위입니다.
함부로 의심과 회의를 해선 안됩니다.
이럴때도 역시 의심은 의심이고 나는 나라는 구분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이 없을 경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냉정히 관찰하고 점검하는 것은 당연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고 평생해야하는 자기의 자천행입니다.
하지만 이때 이러한 구분이 없어서 주 자체를 부정하거나 흔들게 되면 자살행위일 뿐입니다.
또 외부에서 오는 경우는 여러가지 있겠지만 이런 것이 있습니다.
자기가 배운 스승이나 단체나 책이나 법에대한 회의나 의심입니다.
오쇼인지 누군지가 쓴 책을 보면 사기꾼에게 배워서 득도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결론은 기억이 안나는데 이때 자기 스승이 사기꾼인 것을 알고 내가 배운 도 역시 거짓이라고 좌절할 수도 있고
스승은 스승이고 나는 나이니 상관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내가 그 사람에게 배운건데 그사람이 사기꾼이면 당연히 내가 배운 것도 옳은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겠지요 하지만 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깨우침이 있는 거지 그 이론이나 학설의 치밀함이나 결론적인 지식을 배운게 아닙니다.
내가 각성해서 얻은건 자기의 성장이고 주체적 삶인 겁니다.
이걸 이해못한 거라면 당연히 득도한 것이 거짓이겠죠 이게 논리적으론 맞을 것인데 이 글은 과장도 있고 극적이지만 현실에도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많은 단체에서 배우는 분들이 있는데 그러다가 그 단체가 세간에 문제가 들어나서 흔들릴때 거기서 공부한 사람의 수행도 함께 흔들립니다.
이건 안됩니다. 자기 스승이 어떤 문제가 있든 내가 공부한 것은 상관없습니다.
막말해서 단전이 생긴 사람이 스승이 이상한 자라고 나중에 알았다고 있던 단전이 사라지겠습니까?
근데 사라지더군요 이런 걸 볼때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승에게 구하지 말고 자기에게서 구하라고 하는 것이 됩니다.
스승이 따로 주거나 뭘 해주는게 없다라는 단순한 이해가 아니라 이렇게 스승과 상관없이 자기길을 갈 수 있는 무서운 인생 앞에 홀로 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할 수 있으신가요?
어떤 유혹과 어려움과 감당할 수 없는 불행 앞에서 정말로 감당할 수 없는 그 상황에서 자기의 주를 해치지 않고 오로지 할 수 있으신가요?
아마 없을 겁니다.
여기서 확실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일수록 더 미덥지는 않아요
아직 그 마음의 밑바닥까지 뒤흔들 파괴를 경험하지 않은거 같아서요....
그런 파멸적인 자기 심층의 해체와 재구성을 해봐야 손끝에서 정성이 나옵니다.
도 아무렇게 하는게 아닙니다. 철저함은 찰나의 생각에도 드러납니다.
이미 주가 진위를 보여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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