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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4. 9. 본문: 마14:13-21 제목: 주님, 이것뿐입니다
마태복음 14:13-21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7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18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우리는 간증을 들을 기회가 자주 있습니다. 간증의 강사들은 저마다 기막힌 인생 스토리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고 있습니다. 간증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나도 저렇게 큰 고백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부러워합니다.
큰 죄를 지어서 감옥에 갔다가 회개한 이야기, 큰 죄에 이은 하나님의 큰 은혜을 자랑합니다. 그러다 보면 죄도 거창한 죄를 짓고 회개해야 그 회개가 제대로 된 회개인 것 같은 착각을 합니다.
또 큰 병을 앓은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특별히 목회자 중에는 유달리 폐병환자가 많아서 마치 폐병을 한 번쯤은 걸려야 훌륭한 목회자가 되는 조건처럼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누구는 실패를 해도 쫄딱 망하고, 그래서 그 실패도 자랑이 될 수 있는데, 내가 한 실패는 대단한 실패도 아니고, 누구는 성공을 해도 온 세상이 주목하고 신문 기사에 실릴 만한 성공을 해서 할 말도 많은데, 내 성공이래야 그저 남들도 다 겪는 기쁨 정도입니다.
내 인생은 남들이 말하는 극적인 변화가 없이 그저 평범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입니다.
사실은 보통 사람들이 더 큰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죽을 병에 걸렸다가 고침을 받은 사람보다 병에 안 걸리고 건강하게 사는 사람이 더 큰 복을 받았습니다.
실패했다가 일어선 사람보다 꾸준히 흔들림 없이 사는 사람이 더 큰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간증은 복을 적게 받은 사람이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을 향해서 당신들이 얼마나 행복한지 얼마나 복을 많이 받았는지 깨달으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말씀하는데도 대부분 자기에게 대한 실망이 있습니다 - 1 -
그런데도 우리는 무언가 자신에게 실망을 느낍니다. ‘내가 이런 사람밖에 안되나? 나는 아직도 이 정도 밖에 안되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단한 변화도 없이 그냥 사는 것입니다. 때로는 세상을 변혁하자고 말하는 것 조차 부끄러운 지극히 평범한 인생의 소유자들입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작기 때문에 스스로 움츠러 들곤 합니다.
우리는 작은 것에 대한 본능적인 열등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도 큰 은혜를 사모하고, 은혜가 크게 대조되어서 보이도록 죄악도 큰 죄악이었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크고 휘황찬란하게 화려한 것을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작은 것입니다.
오랜 싸움을 한 번의 미소로 끝낼 수도 있습니다.
원수관계가 진실한 악수로 화해를 할 수 있습니다.
비가 오는 날 한 쪽 어깨가 젖으면서 작은 우산을 함께 씀으로써 사랑을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작은 것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빈 들에 가셨을 때는 특별한 때였습니다.
본문 마태복음 14장 13절에 의하면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가서 따로 빈 들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들으셨기에 혼자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들으신 소식은 세례 요한이 헤롯 왕에게 비참하게 목베어 죽은 소식을 들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한 위대한 선지자가 세속적인 악한 왕에게 너무나 비참하게 생일잔치의 노리개로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무거웠습니다.
한 편으로는 예수님의 마음은 슬펐고 다른 한 편으로는 예수님의 사명의 무게가 점점 더 무거워졌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또한 일에 지친 제자들에게도 휴식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군중들은 빈 들까지 여전히 예수님을 따라 왔습니다. 이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마치 목자를 잃어버린 양들을 바라보는 심정이었습니다. 참 지도자가 없는 군중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 요한이 무참히 목숨을 잃었습니다. 백성들의 영혼을 책임질 지도자가 없어졌습니다. 여우와 같은 헤롯은 백성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기는커녕 많은 세금으로 백성들의 어깨에 짐만 주는 사람입니다. 도리어 세례 요한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어리석고 교만하고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 밑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백성들이 한없이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며칠을 예수님을 따라왔던 백성들은 먹을 것이 다 떨어졌습니다.
이것을 바라 본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예수님, 이 곳은 빈 들이고, 지금은 이미 해도 저물었습니다. 사람들을 동네로 가게하고 그 곳에서 먹을 것을 사 먹게 하면 좋겠습니다.”
많은 군중이 스스로 먹을 것을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해결 방법이고, 가장 합리적인 방법입니다. - 2 -
이 제자들의 제안은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없을 때 책임을 분산하는 것이 가장 편한 방법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합리적인 의견에 대해서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은 당황했습니다.
제자들이 가진 것이 있었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제자들은 걱정이 된 나머지 계산도 해 보았습니다
많는 군중을 모두 조금씩 먹게 하려면 당시 돈으로 200 데나리온 정도가 드는 돈이었습니다.
당시에 1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임금입니다. 그러므로 200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대략 8개월 월급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말합니다.
“예수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나에게 가져오라. 그것을 나에게 다오.”
제자들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가져갔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도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나마 제자들이 가진 것이 아니라, 한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먹을 것이었습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요 6:9)?
감사의 신앙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부족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바쳐진 한 아이의 음식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복하셨습니다.
축복하셨다는 것은 감사 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이만큼이라도 있음을 감사하는 신앙......
나누는 신앙
그리고 주님은 먼저 떼어 제자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더 떼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떡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수많은 군중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12 광주리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 때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를 빼고도 5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작다고 불평할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이라서 어느 누구의 독점이 아니라, 부수어 져야 하고, 나누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은 것이지만 감사해야 합니다. - 3 -
작은 것이지만 나누어져야 합니다. 이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바치는 신앙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가져오라.” “예야, 네가 보잘것없다고 여기는 것, 너의 작은 것, 부족함, 부끄러운 최선, 너의 약함, 바로 너의 모든 것을 나에게 다오.”
우리가 볼 때는 보잘 것 없는 떡이지만 그 아이의 입장에서는 귀중한 떡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것들이 남들의 눈에는 보잘 것 없이 보일 수 있을지 몰라도 내가 생각할 때 소중한 것이면 주님 보시기에도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중심이 중요한 것입니다
과부의 두렙돈이 그랬습니다
또한 여기서 보잘것없다는 은혜롭게 이해하려면 작은 것을 바친다는 것은 내가 내 것 중의 작은 부분을 바친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내 것의 모든 것을 바쳐도 주님 보시기에 부족하고 또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부족할 수 밖에 없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찬송가에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바친다는 것은 성의 없이 바친다는 것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서 바친다는 의미이고, 나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바친다는 것입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 빌 게이츠가 전 재산을 다 바친들 전 세계 가난의 문제가 해결되겠습니까?
전 세계의 문맹이 퇴치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이 가진 것은 초라하기 그지 없습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적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우리의 소유욕을 채우기에도 부족하고, 우리의 욕망의 그릇을 채우기에도 부족합니다. 보잘것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배가 고픈 사람으로 살 수 밖에 없고,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 어린 아이가 가진 보잘것없는 것으로 수만명의 군중을 먹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쓰기를 원하십니다.
원래 천국은 작은 것에서 시작됩니다.
지지난 주에 말씀드렸듯이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 13:31-33). - 4 -
천국은 이처럼 역동적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여러분 우리의 겨자씨를 주님 밭에 심읍시다.
우리의 누룩을 주님의 밀가루에 넣읍시다.
우리가 가진 밀 한 알을 심읍시다.
더 나가서 우리 스스로가 겨자씨가 되고, 누룩이 되고, 한 알의 밀알이 됩시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이 부족해서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을 드리고 싶어도 너무 바빠서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자신이 드리고 싶어도 너무나 악하고 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도의 빈민가에서 한 수녀가 헌신하였습니다.
내 세울 것 하나 없는, 자랑할 것 하나 없는, 가냘픈 몸 하나 밖에 없는 수녀 한 사람을 통해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이 연약한 한 여인이 마더 테레사였습니다.
그녀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의 행위가 전혀 영웅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그녀의 말은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었고, 소박한 생각, 단순한 행동이 교훈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작은 정성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만듭니다.
우리의 단순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하는 전도에 생명을 살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부족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이끕니다.
하나님은 나의 부족함을 통해서 기적을 이루어내십니다. 기적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부족과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 다른 무엇이 기적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온 천지를 없는 것으로부터 만드신 하나님께서 무엇을 못하시겠습니까?
우리를 주님께서 쓰시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진 것을 주님이 쓰시도록 해야 합니다.
거리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해서 생계를 이어가는 거리의 악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신사가 다가와서 내가 그 바이올린을 좀 연주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거리의 악사는 기꺼이 자신의 바이올린을 그 신사에게 주었습니다.
그 신사가 바이올린을 연주하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리가 그 악기에서 울려퍼졌습니다.
길 가던 사람들은 그 소리에 감탄하여서 많은 돈을 거리의 악사의 모자에 던저 넣었습니다. 이 사람은 바리올린의 천재 파가니니였습니다.
파가니니는 1782년 제노바 출생. 9세 때 첫 바이올린 연주회를 개최하고, 13세때 연주여행과 초인적인 기교를 발휘하기 위한 난곡(難曲)을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 5 -
1805년 루카 궁정오페라극장의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1823년에는 빈을 방문하여 이른바 파가니니선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1833년 파리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한 후부터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어 마침내 인후암(咽喉癌)으로 죽었다. 그는 자기의 연주법을 비밀에 붙이고 제자도 단 한 사람 시보리뿐이었으며, 많은 명바이올린 연주자들처럼 유파(流派)를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주법은 현재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전해지지 못하고 있다.
거리의 악사가 가진 보잘것없는 악기도 위대한 연주자의 손에서 위대한 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 여러분의 것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위대한 주님의 작품이 될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들은 주의 구원 받은 성도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들이 소유하고 있는 세상의 작은 것들이라 할지라도 여러분들 손에 붙들렸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가치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드릴 수 있습니까?
이제는 내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요?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아직 있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것을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하루는 파가니니가 연주를 하는데 바이올린 현 하나가 끊어졌습니다.
곧 이어서 또 다른 현이 끊어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또 한 줄이 끊어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남은 단 한 줄의 현으로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신화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은 “G선상의 아리아”라는 곡을 아십니까?
독일 작곡가 J.S.바흐의 관현악모음곡 제3번 d장조 제2악장의 아리아를 피아노반주가 곁든 바이올린 독주곡으로 장중한 분위기에 가득차고 선율이 아름다워 널리 애청되고 있는 곳이지요.
원곡은 1730년경에 작곡되었으며 1871년 빌헬미(1845∼1900)에 의해 편곡되었는데 바이올린의 가장 낮은 현(G선)만으로 연주되는 데서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바이올린에는 아직도 현이 하나 이상은 남아있지 않습니까?
아직도 숨이 붙어 있습니까?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은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주님께 드릴 것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쓰시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혜미가 하루는 무언가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신발이 망가졌습니다
그래서 얘야 이리 갖고 오렴...그래서 신발을 고쳐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학교를 갔다온 우리아이가 다른 아이의 신발을 들고 왔습니다 - 6 -
우리 아빠는 모든지 다 고칠 수 있다고 자랑하며 갖고 왔다는 것입니다
야!! 이러다 온 동네 고장난 것 모두 갖고 오겠구나 생각하면서도 싫지 않더라구요
지금도 고장나면 아빠는 다 잘 고치는줄 압니다
그래서 제 별명이 마가이버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이런 심정을 가지면 어떨가요
어떤 분은 말합니다.
“나는 잘못되어 있는데요. 내가 좀 더 업그래이드 된 다음에 하지요.” 아닙니다.
잘못된 대로 그대로라도 주님께 드리기만 하면 모두 쓸 데가 있는 것입니다.
고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나는 아직도 죄가 많아서, 아직도 나쁜 습관을 고치지 못해서, 나는 예수님을 일평생 믿었는데도 내 인격이 이것 밖에 되지 않아서” 등 이유가 많습니다.
갖가지 핑계를 대며 망설이지 마시시 바랍니다.
보잘것없는 인생이 된 것, 예수를 일평생 믿으면서도 그 인격하나 제대로 갈고 닦지 못하고, 자기 마음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그 혀 하나 다스리지 못해서 험한 말을 하는 것은 모두 주님께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늦게 믿었어도 관계없습니다
지금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하나님은 오전 7시에 온자나 12시에 온자나 오후 5시에 온 자가 똑같이 임금을 지불하시는 분이십니다
믿습니까?
피아노의 천재 리스트가 연주회를 하는데 피아노의 조율이 너무 낮게 되어 있었습니다.
혼자 독주라면 가능한데...협연은 안됩니다
도저히 그대로는 연주를 할 수가 없어서 리스트는 즉석에서 반음을 올려서 연주를 했습니다.
청중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의 음악가도 잘못 조율된 악기를 가지고 제대로 된 연주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무엇을 못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즉시 고쳐주시던지, 아니면 안 고치고도 아주 소중하게 쓰시는 분이십니다
부족함은 도리어 은총을 기다리며 큰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부족함이 은총으로 채워지고 풍성함으로 바뀌는 기적을 나날이 체험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으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고후 12:9-10)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 7 -
오늘도 우리 앞에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기적은 우리의 부족함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은 극적이지 않은 회개지만 진정한 회개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솔직히 이 정도밖에 안되기 때문에 나에게 오신 것입니다
내가 바리새인처럼 잘나고 자랑거리가 많고 어깨에 굳은 살이 많다면 나에게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고백합시다
이 정도밖에 안되는 나를 쓰셔서 당신의 소중한 일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리고 나는 이것밖에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내가 가진 작은 것을 쓰셔서 당신의 나라를 이루심을 감사합니다.
지난 (2005년 7월) 7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고 이중표 목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단지 ‘일회용 주사기’처럼 사용해 주시기만 해도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일회용 주사기처럼 단 한번 쓰임 받고 버림을 받더라도 하나님께 쓰임 받은 자라면 행복한 인생입니다.
작은 것을 바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족해도 바치기를 바랍니다.
최선을 바치기를 바랍니다.
바칠 수 있는 전부를 바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여러분들 삶에서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