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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산악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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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원정 자료실 스크랩 K2 초등정
쌍둥이 추천 0 조회 40 09.12.16 18: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K2는 1954년 이탈리아 원정대에 의해 초등되었지만, 그 동안 미국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관계를 가져왔던 세계 제2위 고봉으로 등반이 어렵기로 정평이 나있는 산이다.
‘K2’라는 특이한 산 이름은 원래 카라코람(Karakoram) 제2호라는 측량기호에서 비롯되었다. 인도 측량국은 현지명을 알 수 없을 경우에는 기호를 붙여 사용했는데, 1856년 인도주재 영국 측량국이 산 높이를 측량하면서 붙여진 ‘K2’라는 기호가 산 이름으로 굳어진 것이다.
이 산의 원래 이름은 발티(Balti)어로 초고리(Chogori)며, ‘큰산’이란 뜻이다. 초(cho)는 ‘크다’는 뜻이고 리(ri)는 ‘산’이며, 고(go)는 ‘높다’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답상(Dapsang)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는데 이는 1902년 K2 등반을 처음 시도한 에켄슈타인(O. Eckenstein) 원정대의 일원으로 참가한 스위스의 자코 길라르모(Jacot Guillarmod)가 펴낸 보고서에서, 현지 주민들이 답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다는데 근거한 것이다. 1856년 이 산을 멀리서 처음 발견한 영국의 공병장교 몽고메리의 이름을 붙여 한때는 마운트 몽고메리(Mt. Mongomery)라고 부른 적도 있다. 또한 1861년 이 산의 접근로를 최초로 찾아낸 영국의 등산가 고드윈 오스틴의 이름을 붙여 마운트 고드윈 오스틴(Mt. Goldwin Austen)이라고 부른 적도 있다.
오늘날 널리 쓰이고 있는 K2라는 이름은 세계 제2위 고봉이라는 간결한 의미와 부합되어 산명으로 굳어졌다. 이산의 지리적 위치는 카라코람 발토로 무스타그(Karakoram Baltoro Mustagn)다.
이 산에 인류의 첫 발걸음이 미친 것은 1892년으로 콘웨이(William Marthin Conway)가 이끄는 영국 등반대가 최초로 이 산을 답사하면서부터이다. 이들 일행은 발토로(Baltoro) 빙하에 들어가 최초로 K2를 마주할 수 있었으며, K2의 정체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다.
이로부터 10년 뒤인 1902년 아이젠의 고안자인 에켄슈타인이 이끄는 혼성 원정대가 이 산에 도전한다. 이들은 북동릉 루트를 따라 6821미터까지 진출한다. 이 등반대의 일원이었던 자코 길라르모는 이 원정대의 경험을 <히말라야에서 6개월·Six Mois I. Himalay>이란 이름으로 출간한다. 이 책은 히말라야 문헌 가운데 고전으로 유명하다. 후일 K2 등반에 기초를 다진 이탈리아의 아브르찌(Abuzzi) 공도 이 저서를 읽고 K2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1909년 이탈리아 아브르찌 공이 이끄는 원정대가 세번째로 K2에 도전한다. 아브르찌 공은 국왕 빅토리오 에마뉴엘 2세의 손자로 K2에 오기 전, 이미 알래스카와 북극, 아프리카의 루엔조리 등을 초등정한 탐험가였다. 아브르찌 원정대는 막대한 물자와 장비를 동원, 13명의 대원과 360명의 많은 포터를 고용한 대규모 원정대였다. 후일 히말라야에서 8000미터 고봉을 등반하는 원정대의 대부분이 이런 대규모 조직으로 편성하는 선례를 만든 원정대였다. 이 원정대는 5033미터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남동쪽으로 뻗은 9개의 능선을 정찰한 후 그 중 하나를 선택한다. 이 루트는 후일 아브르찌 능으로 명명되었으며, 이것이 K2 유일의 등로가 되어 그 후 모든 원정대가 이 길을 이용한다.
이 산의 첫 등정 때도 이탈리아 원정대는 이 길을 따라 정상에 오른다. 당시 아브르찌 원정대는 분명치는 않지만 5800미터 지점에 이른 후 철수한다.
아브르찌 원정대에는 당시 산악사진가로 명성이 높은 비토리오 셀라(Vittorio Sella)가 참가한다.
그는 아브르찌와 평생 동안 탐험을 함께 한 동료이기도 하다. 이들의 등반기록 <카라코람에서 서히말라야>에는 많은 지도와 함께 비토리오 셀라의 사진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K2를 다양한 구도에서 촬영한 사진들은 K2의 위용을 전세계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예술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뛰어난 자료로 평가되어 후일 K2 원정의 기본 자료로 활용된다. 이 사진들은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K2를 대표하는 사진으로 쓰이고 있다.
셀라의 사진 건판은 30×40㎝ 크기의 대형이었으며, 촬영 장비 무게만 123킬로그램에 달했다고 한다.
K2의 네번째 도전은 29년 만인 1938년에 이루어진다. 미국의 찰스 하우스톤(Charles S. Houston) 대장이 이끄는 원정대가 K2에 도전한다. 미국 원정대는 아브르찌 능 위 7530미터에 7캠프를 설치한 뒤 정상을 공격한다. 이때 이들이 오른 최고 기록은 7925미터였다. 그 후 미국은 1939년과 1953년에 두 차례나 더 시도했지만 모두가 실패로 끝난다.
미국의 세 차례에 걸친 도전에도 불구하고 정상을 거부하던 K2는 마침내 1954년에 아르디토 데지오(Ardito Desio) 대장이 이끄는 이탈리아 원정대에게 정상을 내준다. 아브르찌가 K2 등정을 시도한지 44년만의 일이다.
우리나라는 1986년 8월 대한산악연맹 원정대의 장봉완, 김창선, 장병호가 남동릉으로 국내 최초 등정을 이룩한다. K2 국내 초등기는 이란 제호로 김병준 대장에 의해 출간되어 국내 독자들에게 널리 애독되었다. 이 등반기는 담담하게 펼쳐지는 자료중심 보고서 형식을 뛰어넘어 문학성이 돋보이는 창작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 동안 K2를 놓고 이탈리아와 미국은 경쟁관계를 가져왔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초등정의 영예를 성취하려고 전 국민적인 성원과 막대한 국고보조를 이끌어 낸 대규모 원정대를 조직한다.
이 원정대는 40일간의 악천후를 극복한 후 8050미터에 최종 캠프를 설치하고, 산소가 떨어진 상태에서 계속 전진하여 마침내 초등정에 성공한다. 이탈리아 원정대는 전 대원의 팀워크를 존중해 정상 등정자 두 사람의 이름을 발표하지 않는다. 등정자 콤파뇨니(Achille Compagnoni)와 라체델리(Rino Lacedelli) 두 사람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의 일이다.

40년만에 불거진 초등 비화

K2 초등으로 이탈리아의 국민적 영웅이 된 콤파뇨니는 자신의 초등기에서 초등 당시 정상 200미터 아래서 산소가 떨어져 정상까지 무산소 등정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등반대장이었던 데지오 박사의 등반기인 나 콤파뇨니의 초등기 그리고 스위스에서 발간하는 에 실린 등정 사진에는 정상에 선 초등자 발밑에 산소통과 산소 마스크가 함께 놓여 있는 것이 찍혀 있었다. 산소가 떨어져 무용지물이 된 쓸모 없는 쇳덩어리를 정상까지 지고 갈 어리석은 산악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런 사실은 40년이 지난 1994년에야 발견되었다.
이런 정황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기록은 K2 등반에 참가했던 저명한 등산가 월터 보나티의 이라는 자전적 등반기에도 산소문제에 대한 기록이 전해져 파문을 불러일으킨다.
보나티는 당시 최연소 대원으로 이 원정에 참가했다. 고소 캠프에 배치된 대원들이 고산증세로 원만하게 활동할 수 없게 되자, 8캠프에 있던 공격조장 콤파뇨니는 9캠프 개척에 나서면서 보나티에게 7캠프에 있는 공격용 산소통 2개를 최종 캠프(9캠프)까지 운반해 주면 건강상태가 나쁜 자기 대신 보나티를 공격조에 끼워주겠다고 약속한다. 보나티가 훈자 포터 마디(Mahdi)와 함께 19킬로그램이 넘는 무거운 산소통 2개를 해발 8000미터 지점까지 운반했을 때 어둠이 닥쳐오고 있었다.
9캠프를 설치하기로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고 캠프도 설치되지 않았으며 어둠 때문에 콤파뇨니를 찾을 수가 없었다. 보나티는 미친 듯이 소리치며 콤파뇨니를 찾았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절망에 빠진 그는 눈구덩이를 파고 은신처를 마련한 후 또다시 공격조를 찾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들이 있는 훨씬 위쪽 9캠프에서 랜턴 빛이 켜지면서 공격조의 한 사람인 라체델리가 산소를 그 자리에 두고 즉시 8캠프로 하산하라고 대답했다. 보나티는 어둠 속에서 하산은 매우 위험하므로 약속한 대로 9캠프에서 함께 머물게 해 달라고 애원했으나 공격조로부터 아무런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이들은 랜턴이 고장나 하산이 불가능했으며, 텐트와 침낭은 고사하고 비박색도 없는 형편이었고, 식량과 물도 없이 고통 속에서 하룻밤을 지새운다. 보나티와 마디는 절망 속에서 60센티미터 깊이 눈구덩 속에서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지옥 같은 밤을 지새우고 다음날 새벽 가까스로 8캠프로 하산했다.
훗날 라체델리는 두 사람이 하산한 줄 알았다고 변명했으나 보나티의 주장은 크게 달랐다.
2인용 텐트에 두 사람을 불러들이면 다음날의 등반 시도가 무산될까봐 그랬을까, 아니면 강인한 체력의 보나티에게 초등정의 영광을 빼앗길 것을 염려했기 때문일까? 어떤 이유에서든 정상 공격조의 행동은 비인간적이었다. 동료를 죽음의 혹한 속에 내몬 상태에서 초등정의 영광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콤파뇨니의 초등정기에는 보나티가 산소를 옮겨준 것이 K2 초등정에 큰 공헌을 했다는 것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보나티는 정작 K2 초등의 영광에 누가 될까봐 이런 사실을 함구해오다
1961년 자신의 저서 에서 비로소 공개했다. 이에 대해 콤파뇨니는 초등 당시 보나티가 초등의 영예를 차지하려고, 공격조와 경쟁을 벌였다는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 이에 보나티는 법정투쟁을 벌여 누명을 벗었고, 콤파뇨니의 비인간적인 행동이 폭로되었다. 콤파뇨니가 산소통 2개를 지니고 정상에 오른 사실도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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