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텍스트 번역 : 번역대본으로는 Bertolt Brecht Werke. Gro e kommentierte Berliner und Frankfurter Ausgabe. Hrsg. v. W. Hecht, J. Knopf, W. Mittenzwei und K-D M ller. (이하 GBA로 약칭) Bd 4. Berlin und Frankfurt a.M. 1989. S.266-277을 택했다.
등장인물
안나 I, 안나 II, 안나의 아버지, 어머니, 남자형제 두명.
부부 여러 쌍, 카바레 손님들, 카바레 사장, 흉물스럽게 생긴 늙은 여자 무용수, 영화 스타, 영화감독, 촬영 스태프, 엑스트라, 매니저, 하인 두 명, 에드워드 (안나 II를 좋아하는 돈 많은 남자), 아돌프 (안나 II가 사랑하는 남자), 행인들, 거리의 아이들, 신문을 읽고 있는 사람, 두 명의 자살하는 사람, 또 다른 안나들.
이 발레극은 안나 자매의 여행에 대한 서술이다. 이들 둘은 미국 남부 출신이며 가족들과 함께 살 작은 집을 마련하기 위해 고향을 떠난다. 이들은 모두 안나라고 불리며 안나 I은 매니저이고, 안나 II는 예술가이다. 또한 안나 I은 판매원이며 안나 II는 상품이다. 무대에는 작은 게시판이 세워져 있는데 그 위에는 안나 자매가 공연을 하면서 거쳐온 일곱 도시의 여정이 그려져 있다. 안나 I은 게시판 앞에 작은 지시봉을 들고 서 있다. 각 장면마다 무대 위에는 언제나 새로운 시장이 서며 안나 II는 그때마다 안나 I에 의해 장터로 보내진다. 일곱 장면들은 모두 이들 자매가 칠거지악을 범하지 않고 피해 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각 장면이 끝날 때마다 안나 II는 안나 I에게 돌아온다. 무대 위에는 루이지아나에 살고 있는 가족들(아버지, 어머니, 두 명의 남자 형제)이 서 있다.
역주: 이들 4명의 가족은 합창단 역할을 함. 무대 위 가족들 뒤 편에는 안나자매가 보내오는 돈으로 지어지는 작은 집이 놓인다. 안나들이 각 장면에서 칠거지악을 하나씩 피해 갈 때마다 이 집의 높이가 점점 올라간다.
소시민의 칠거지악
불의를 저지를 때 게으름을 피우는 것
자신이 최고라는 자부심을 갖는 것 (상품성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
비열함에 대해 분노를 표시하는 것
절제 없이 먹고 마시는 것 (배부름, 스스로를 먹어치우는 것)
호색 (자신을 돌보지 않는 사랑)
도둑질과 사기치며 탐욕을 부리는 것
행복한 사람을 시기하는 것
언니(안나 I)의 노래
- 역주: 원문에는 언니-동생, 단수-복수에 대한 구별 없이 단지 Schwester로만 표기되어있다. 그러나 이들 둘을 구분해서 사용할 때에는 문맥에 따라 안나 I을 언니로, 안나 II를 동생으로 번역한 곳이 있음을 밝혀둔다.
저와 안나는 루이지아나에서 왔어요.
노래에서 들어 아시겠지만
그곳에는 달빛아래 미시시피 강물이 흐르지요.
언젠가 우리는 그 곳으로 돌아갈 거에요.
내일보다 오늘이면 더 좋겠구요.
우리는 4주전 그 곳을 떠났어요.
대도시를 향해, 우리의 행복을 찾기위해
7년이면 해낼 수 있을 거에요.
그러면 우리는 돌아가요.
6년이면 더 좋겠구요.
루이지아나에서 부모와 두 남동생이 기다리기 때문에
우리가 번 돈을 모두 그들에게 보낼 거에요.
그 돈으로는 집이 지어질 거구요.
루이지아나 미시시피강가의 한 작은 집이
그렇지 않니, 안나?
그래, 안나.
제 동생은 이쁘답니다, 저는 실질적이구요.
제 동생은 약간 돌았어요, 하지만 저는 이성적이지요.
원래 우리는 두 사람이 아니라
하나에요
우리 둘은 서로를 안나라고 부르지요.
우리는 하나의 과거를, 하나의 미래를
하나의 심장과 하나의 통장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누구나 상대방에게 좋은 일만 하지요.
그렇지 않니, 안나?
그래, 안나.
1. 게으름
a) 이들이 공연을 위해 도착한 첫 도시. 돈을 벌기 위해 이들은 하나의 술책을 생각해낸다. 도시의 공원을 어슬렁거리면서 이들은 적당한 부부들을 탐색한다. b) 대상을 찾으면 안나 II는 사내에게 달려들어 마치 아는 사람인 것 처럼 그를 포옹하거나 또는 욕을 퍼부어대면서 사내를 곤경에 빠뜨린다. 반대로 안나 I은 안나 II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안나 II는 언니가 자신을 사내로 부터 떼어 놓으려 하면 이젠 갑자기 그의 부인에게 달려들어 들고 있는 양산으로 사내의 부인을 위협한다. 그러는 동안 안나 I은 동생을 부인으로부터 떼어준다는 명목으로 사내로부터 돈을 갈취한다. 이들은 짧은 시간 동안 매우 여러 번 이런 술책을 부린다. 그러다 c) 한번은 동생이 부인을 위협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안나 I이 한 사내에게 돈을 요구하고 있을 때 그녀는 놀랍게도 피곤에 지친 동생이 일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안나 I은 d) 그녀를 깨워 다시 일을 하게 내몰 수밖에 없다.
가족의 노래
우리 안나가 정신을 차리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앤 늘 멋대로 굴었고 게을렀어요.
침대에서 몰아내지 않으면
아침에도 일어나지 못했다구요.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말하곤 했어요: 안나야
게으름은 모든 죄악의 시작이란다.
하지만 우리 안나는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이성적인 아이였어요.
고분고분 부모 말도 잘 들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해 나가겠지요. 낯선 곳에서도
필요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기를
우리는 바랄 뿐이에요.
2. 자부심
a) 작고 지저분한 카바레, 안나 II는 관객 너댓명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 등장한다. 이 관객들이 너무 기괴하게 생겨 안나 II는 놀란다. 그녀는 비록 옷은 잘 입지 못했어도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최선을 다해 춤을 춘다. b) 그러나 이 춤은 관객의 흥미를 끌지 못하고, 관객들은 지겨워 상어처럼 하품을 해댄다. (이들이 쓰고 있는 마스크에는 커다란 입과 끔찍한 이빨들이 그려져 있다.) 관객들은 무대에 물건들을 던지면서 소란을 피우며 단 하나 달려 있는 램프까지도 이들이 던진 물건에 맞아떨어진다. 안나 II는 자신의 예술에 몰두해 c) 카바레 사장이 그녀를 무대에서 불러 내릴 때 까지 계속 춤을 춘다. 사장은 안나 대신 뚱뚱하고 추악하게 생긴, 나이 든 다른 무용수를 무대에 올려 보내 관객들의 환호를 받아 내는 법을 안나 II에게 보여주게 한다. 이 무용수는 상스럽고 야하게 춤을 춤으로써 관객들로부터 엄청난 갈채를 받는다. d) 안나 II는 그러나 이러한 춤을 거부한다. 안나 I은 무대 옆에 서서 처음부터 계속 동생의 행동을 바라본다. 그녀는 안나 II의 춤에 박수를 치는 유일한 인물로서 동생의 실패를 눈물을 흘리며 지켜본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동생으로 하여금 관객들이 원하는 대로 춤을 추게 한다. 그녀는 안나 II의 지나치게 긴 치마를 벗겨 내고 그녀를 다시 무대 위로 올려 보낸다. e) 무대에서 늙은 무용수는 안나 II에게 춤을 가르쳐 준다. 그녀는 관객들의 환호 속에 안나 II의 치마를 치켜올린다. f) 하지만 안나가 낙담한 모습을 보이자 이 늙은 무용수는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작은 게시판 앞으로 안나를 데려간다.
안나 I의 노래
우리가 옷과 모자로 치장하며
준비를 갖추었을 때
우리는 여행의 두 번째 도시 멤피스의
한 카바레에서 무용수 일자리를 얻었어요.
그 것은 안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옷과 모자는 나이 어린 한 여인을 우쭐하게 만들어
여행의 두 번째 도시 멤피스에서
안나는 예술가가 되려 했고 또 예술을 하려 했지요.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답니다.
그들은 돈을 지불하는 대신
그 돈 가치에 합당한 것을 보려 했어요
그런데 한 여자가 마치 썩은 생선을 감추듯
자신의 알몸을 감추려 들면
그 여자는 어떠한 갈채도 바랄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난 내 동생에게 진심으로 말했어요: 안나야
자부심이라는 것은 부자들에게나 허용된단다.!
네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너에게 원하는 것을 너는 해야 해
여러 날 저녁 동생과 씨름했지만
그녀의 자부심을 몰아내는 일이 간단하지는 않았어요!
나는 그녀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했지요:
루이지아나에 있는 우리 집을 생각해!
그러면 그녀는 말했습니다: 그래, 안나.
가족의 노래
일이 잘 풀리지 않나봐요!
아이들이 보내 온 돈은
집짓기에 충분치 못해요.
그 애들은 번 돈을 모두 먹어 치우나 봅니다!
아이들이 정신차려야 해요
안 그러면 일이 안 풀릴 거예요.
아이들이 보내 온 돈은
집짓기에 충분치 못해요.
아이들은 정신차려야 해요
번 돈을 모두 먹어 치우나 봐요.
3. 분노
a) 안나 II는 영화 촬영장에서 엑스트라로 일한다. b)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역주: 1920년대를 풍미한 미국의 배우)타입의 스타가 말을 타고 꽃바구니를 뛰어넘는 장면을 찍고 있다. 그는 훈련이 안 되어 있다는 이유로 말을 때린다. 말은 쓰러지고 사람들이 말밑에 담요를 깔아 주고 입가에 설탕을 들이대도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그러자 스타는 다시 말을 때린다. 이 순간 이 키작은 엑스트라가 나타나 그에게서 채찍을 빼앗아 분노에 떨면서 그를 후려친다. c) 그녀는 당장 해고당한다. d) 그러자 안나 I은 안나 II에게 달려가 그녀를 촬영장으로 다시 돌려보내 스타에게 용서를 빌게 한다. 동생은 그의 앞에 무릎 꿇고, 그의 손에 키스를 하며 용서를 구한다. 스타는 감독에게 그녀를 다시 고용할 것을 권한다.
안나 I의 노래
일이 잘 풀리고 있어요.
우린 벌써 로스앤젤레스에 와 있답니다.
이 엑스트라에겐 모든 문이 열려 있어요.
이제 정신차리고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거칠 것 없이 출세할 거예요.
불의를 막으려는 자는
어디서나 환영받지 못하는 법이지요.
야비함에 화를 내는 사람은
스스로를 곧 매장하게 되고,
비열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들도 참지 못하지요.
아무런 잘못을 지지 않은 사람도
속죄하는 것이 세상이니까요.
여행의 세 번째 도시 로스앤젤레스에서
분노하는 동생의 못된 버릇을,
불의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동생의 못된 버릇을
이렇게 고쳐 주었어요.
언제나 난 그녀에게 말했어요: 조심스럽게 굴어야지 안나야
알지 않니,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그러면 그녀는 내 말에 수긍하며 말했어요:
나도 알아, 안나.
4. 절제 없이 먹고 마시는 것
a) 안나II 도 이제는 스타가 되어 계약을 맺게 된다. 계약에 따라 그녀는 일정한 몸무게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음식에 주의해야 한다. c) 어느 날 그녀는 배가 고파 사과 한 개를 훔쳐 몰래 먹는다. c) 그러나 몸무게를 재게 되었을 때 그녀는 1그램이 더 나가게 되었고 이에 화난 매니저는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채며 화를 낸다. d) 그 이후로 그녀는 먹을 때마다 안나 I로부터 감시를 받게 된다. 또한 권총을 찬 두 명의 시종으로부터 음식 시중을 받게 되며 언니와 같이 받게 되는 밥상에서도 단지 작은 고기 한 조각만이 허용되었다.
가족의 노래
필라델피아에서 편지가 왔어요.
잘 지낸다는군요: 드디어 돈이 벌리기 시작한데요.
무용수로 계약도 맺었답니다.
계약에 따라 그 애는 많이 먹어서는 안된데요.
하지만 쉽지 않을 거예요, 무척 많이 먹는 아이잖아요.
그 애가 계약을 지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필라델피아 사람들이 나일강의 하마를 보고 싶어하진 않을 거예요
당연하잖아요.
매일 그 애는 몸무게를 잰다는군요.
일 그램이라도 더 나가면 참 큰일이에요.
그들은 52 킬로그램에
안나를 샀대요.
더 나간다면, 그것은 죄악이예요.
그러나 이성적인 안나가 있으니까요!
계약은 계약이라는 것을 명심할거예요.
또 말도 할거구요: 안나야 먹는 것은 루이지아나에서도
실컷 할 수 있지 않니, 크로아상도, 스테이크도, 닭다리도!
그리고 잘 구워진 작은 꿀과자도!
루이지아나에 있는 집을 생각하렴
자 봐, 한 층이, 또 한 층이 올라가고 있지 않니!
잘 참아야 돼: 먹는 것을 탐하는 것은 죄악이란다.
5. 호색
a) 안나II에게는 부유한 친구 (에드워드)가 생긴다. 그는 안나를 매우 사랑해 옷과 보석을 사준다. 그러나 안나에게는 이미 애인 (아돌프)이 있다. 안나는 아돌프를 무척 사랑하며, 그는 에드워드로부터 안나가 받은 옷과 보석을 가져간다. b) 안나 I은 안나 II를 비난하며 결국 동생이 아돌프와 헤어지고 에드워드에게 충실하게 만든다. c) 그러나 어느 날 안나 II는 어느 카페 앞을 지나다 아돌프가 언니와 나란히 앉아 언니에게 접근하려 애쓰는 광경을 보게 된다. 안나 I에겐 아무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d) 안나 II는 언니에게 달려들어 에드워드와 그의 친구들, 몰려든 구경꾼들과 거리의 아이들이 보는 데서 언니와 e) 싸움질 하며 f)길거리를 뒹군다. 아이들은 그녀의 값비싼 엉덩이를 가리키며 킥킥거리고 에드워드는 놀라 달아난다. g) 그러자 안나 I은 동생에게 욕을 퍼붓는다. 안나 I은 안나 II를 다시 에드워드에게 보낸다. 안나 II는 눈물을 흘리며 아돌프와 이별한다.
언니 (안나 I)의 노래
우리는 보스턴에서 한 남자를 찾아냈어요.
그는 돈을 잘 썼어요, 더욱이 사랑에서 나온 돈을요.
그런데 동생이 애를 먹이는 거예요.
이유는 그 애가 사랑에 빠지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다른 사람과요. 그리고 그 애는 그 사람에게
돈을 써 댔어요, 사랑한다면서요.
저는 동생에게 자주 말했어요: 신의를 저버리면
네 몸값은 잘 쳐 주어도 절반이라구
그런 돼지 같은 인간들에게 사람들은 돈을 지불하지 않아
단지 그들이 존경하는 것에만 지불하는 법이야
그런 짓은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은
여인에게나 허용된답니다.
그렇지 못한 여자가 자신의 처지를 잊는다면
그런 여자에겐 문제가 생기는 법이에요.
전 그녀에게 말했어요: 양 다리 걸치고 재주 피우면 안돼!
그리고 저는 그를 찾아가
말했어요, 그러한 감정은
내 동생에게는 곧 파멸을 뜻하는 것이라고.
그런 짓은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은
여인에게나 허용된답니다.
그렇지 못한 여자가 자신의 처지를 잊는다면
그런 여자에겐 문제가 생기는 법이에요.
유감스럽게도 나는 자주 아돌프를 만나게 되었어요
그러나 우리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요! 가소로울 뿐이에요!
그러나 동생은 우리가 같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고 슬프게도
저에게 곧장 달려들었어요.
모양새가 좋지 않으면
정말 아무 일도 할 수 없나 봐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점을
사람들은 너무 자주 잊고 살아요.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하얀 엉덩이를
작은 공장보다도 더 값나가는 그 엉덩이를
공짜로 거리의 구경꾼들과 거렁뱅이 아이들에게 보여주었어요
그들의 불경한 눈빛에 적나라하게요
언제나 이런 일은 생기지요
사람들이 일단 자신을 망각한다면!
그런 짓은 단지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은 사람에게나 허용되는 법이지요
아, 모든 일을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아돌프와 이별, 에드워드에게 대한
사과! 그리고 그 긴 밤 내내
저는 동생이 우는 것을 들으며 말해 주었어요: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야 안나, 하지만 힘이 많이 들지.
6. 탐욕
a) 얼마쯤 후 에드워드는 안나 때문에 파산하고 권총으로 자살한다. b) 신문에는 그녀를 치켜올리는 기사들이 실리며 신문을 읽은 사람들은 존경심에 가득 차 그녀 앞에서 모자를 벗는다. 이들은 한 손에 신문을 들고 스스로를 파멸시키기 위해 안나에게 몰려든다. c) 그 얼마쯤 후 두 번째 젊은 사내가 안나에게 모든 것을 털리고 나서 창문에서 스스로 몸을 던졌을 때 d) 안나 I은 동생의 일에 간섭해, 막 목을 매려 하는 세 번째 남자의 목숨을 구한다. 안나 I은 또한 안나 II에게서 이 남자의 돈을 빼앗아 그에게 돌려준다. 그 이유는 e) 탐욕 때문에 그녀의 동생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이 돌게 되고 사람들이 안나 II를 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가족의 노래
신문에 실린 대로라면 우리의 안나가
지금은 테네시에 있다는군요, 그리고 그 애를 둘러싸고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끊었대요:
그 애가 돈을 많이 벌겠어요.
만약 이런 일들이 신문에 실린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지요! 이름이 나잖아요! 또
한 여자아이가 출세하는 것을 돕겠지요.
하지만 너무
탐욕을 부리지 않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곧
그 애를 피하게 될텐데요.
탐욕을 드러내는 사람은
배척받게 되는 법이에요
탐욕이 끝없는 사람을
사람들은 손가락질하게 되지요.
한 손을 잡으려면
다른 한 손은 내주어야 해요.
이 것을 받기 위해 주는 것이라고 말들 하지요.
파운드에는 파운드
라고 이 법칙을 부르기도 하구요.
아마 안나는 그 정도로는 이성적일 수 있겠지요
사람들을 껍데기까지 벗기려 들지는 않을 거예요
대신 명심하겠지요: 탐욕을 드러내는 것이
권할 만한 것이 못된다는 걸요.
7. 시기심
a) 안나가 대도시를 지나가는 모습이 다시 한번 무대에서 보여진다. 그녀는 길을 가며 다른 안나들이 (무용수들은 모두 안나의 마스크를 쓰고 있다) 자신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모든 다른 죽을 죄들을 (예를 들어 '게으름') 저지르는 것을 쳐다본다. b) "꼴찌였다가 첫째가 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역자 주: 마태복음 19장 29-30절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첫째였다가 꼴찌가 되고 꼴찌였다가 첫째가 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공동 번역 성서, 대한 성서공회 1977년 발행) 에서 인용한 것임.)라는 테마가 춤을 통해 서술된다. 다른 안나들이 조명을 받으며 걸어가는 동안 안나 II는 허리를 구부리고 힘들게 몸을 끌며 지나가나 곧 c) 그녀의 비약이 시작되어 그녀는 점점 당당해지고 결국 승리하게 된다. d) 반면 다른 안나들은 파멸하여 비굴한 모습으로 골목 속으로 사라진다.
안나 I의 노래
우리 여행의 마지막 도시는 샌프란시스코였어요.
모든 일이 바라는 대로 풀려 나갔지요. 단지 안나가
피곤에 지쳐 자주 행복한 사람들을 시기했어요, 즉
매일 매일을 게으름피우며 보내는 사람들,
자신을 팔기 위해 내놓지 않고, 자만해도 되며,
비열함에 화를 내고,
자신의 충동대로 사는 사람들,
또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하며
자신에게 늘 필요한 것을 당당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을요.
저는 불쌍한 동생에게 말했어요:
안나야, 우리 모두는 자유롭게 태어났어.
마음에 드는 대로 우리는 밝은 대낮에 갈 수 있지.
그래 머리를 들고 승리한 듯이 문들을 통과할 수 있어.
하지만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그들은 알지 못해.
안나야, 내 말을 따라 줘 그리고 너나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기쁨을 포기해.
그런 것들은 다른 바보 같은 인간들에게나 주어 버려.
종말을 무서워하지 않는 그런 인간들에게.
먹지 말고, 마시지 말고 또 게으름 피지도 마
사랑을 함으로써 받게 되는 형벌을 생각해!
네가 하고 싶은 대로했을 때 무슨 일이 생길지 생각해 봐!
젊음을 허비하지 마: 젊음은 사라지는 것이야!
안나야, 내 말을 따라 줘, 결국
네가 승리해, 누구보다 우월해지는 것을 보게 될 거야.
그들은 닫혀진 문 앞에서 모든 것을 잃고
떨며 서 있게 될 거야. 얼마나 놀라운 뒤바뀜이니!,
그리고 저와 동생은 (우리의 두 아이들은)
(역자 주: 이 노래를 동시에 가족이 함께 부르는 경우를 생각해서 들어간 대사.)
루이지아나로 돌아갔어요
여러분들이 노래로 들어 아시는 것처럼
달빛 아래 미시시피 강물이 흐르는 그 곳으로
7년 전에 우린 집을 떠나 대 도시로
행복을 찾아 떠났었지요: 이제
우리는 해냈어요.
집이 다 지어져 저 곳에 서 있네요
루이지아나에 있는 우리 작은집이
루이지아나 미시시피강가에 우리 작은 집이.
II. 작품 해설
1. 생성사) 이 생성사는 GBA 4, 492ff.에 보다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1933년 2월 28일, 독일 제국의회가 나치에 의해 불탄 다음날 브레히트는 부인 헬레나 바이겔 Helene Weigel, 아들 슈테판 Stefan Brecht과 함께 망명길에 오른다. 프라하와 비인, 쮜리히를 거쳐 스위스의 카로나에 도착한 4월 중순 브레히트는 이미 파리에 망명해 있던 작곡가 쿠르트 바일 Kurt Weil로 부터 그가 계획하고 있던 발레극의 대본을 써 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이 발레극은 처음 영국의 부호 에드워드 제임스 Edward James에 의해 계획되었다. 제임스는 자신의 부인인 독일 태생의 무용수 틸리 로쉬 Tilly Losch가 발레단 Les Ballet 1933과 공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 위해 무용가 조르쥬 발란쉔 Georges Balanchine과 작곡가 쿠르트 바일에게 안무와 작곡을 의뢰한다. 이들은 곧 두 명의 주연 배우, 즉 춤추는 주인공과 노래하는 주인공을 무대 위에 세울 것에 합의하며, 제임스의 의견대로 그의 부인 로쉬에게 무용수의 역할을, 바일의 부인이며 바일 음악의 뛰어난 해석자였던 로테 레냐 Lotte Lenja에게 가수의 역할을 맡긴다. 바일은 처음 장 콕토에게 노래 대본을 의뢰한다. 그러나 그가 거절하자 바일은 이미 베를린에서 자신과 공동작업을 한 적이 있던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브레히트와 바일은 오페라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 Aufstieg und Fall der Stadt Mahagonny}와 {서푼짜리 오페라 Die Dreigroschenoper}, {린드버그일행의 비행 Der Flug der Lindberghs}, {동의하는 자/ 동의하지 않는 자 Der Jasager/ Der Neinsager} 등의 작품에서 작가와 작곡가로 한 팀을 이루어 작업하였다.
브레히트에게 이 일을 부탁하게 된다.
파리에 도착해 텍스트 작업에 들어간 브레히트는 자신이 1930년에 계획했던 드라마 {상품으로서의 사랑 Die Ware Liebe}에서 다루려 했던 테마를 이 발레 텍스트에 받아들인다. 그 결과 인간이 상품과 상인으로서 분열되는 모티프가 강조된다. 또한 이 텍스트에는 1705년 영국의 의사이며 작가였던 베르나르드 드 망데비으 Bernard de Mandeville가 쓴 {벌들의 우화, 또는 사적인 악행, 공적인 이익 The Fable of the Bees, or Private Vices, Public Benefit}이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브레히트는 맑스를 공부하던 1920년대 후반 {자본 Kapital}에서 많이 언급되었던 이 작품을 처음 접한다. 꿀벌국가의 우화를 통해 당대 사회를 비판한 이 작품에서 발레 텍스트의 저변을 흐르고 있는 생각 즉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악행이 필수 불가결하며 또한 유용하다는 기본 구상") Jan Knopf: Brecht-Handbuch in 2 B nden. Bd. 1: Theater. Eine sthetik der Widerspr che. Stuttgart 1980. S. 138.이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브레히트는 일주일 여만에 텍스트를 완성시키며 여기에 바일이 곡을 붙여 1933년 6월 7일 {칠거지악} 초연 당시의 제목에는 '소시민'이 빠져 있었다. 첫 막이 파리에서 오른다.
2. 장르: 발레의 서사화
{소시민의 칠거지악}을 어떤 장르에 포함시키느냐의 여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이 것은 연구가들만의 문제가 아니었으며 브레히트의 사후 그의 전집을 출판하던 페터 쑤르캄프가 갖게 된 고민이기도 했다. 그는 1959년 이 텍스트 중 노래 부분만을 떼어 내어 시집 속에 넣으려다 반대에 부딪치자 이 텍스트 전체를 1961년에 간행된 시전집 Gedichte 3권에 실었다. 또한 1967년의 전집 Gesammelte Werke에서는 발레라는 장르 명으로 그의 단막 희곡, 미완성 희곡들과 함께 7권에 수록되었다. 또한 동서독 합작으로 간행되고 있는 새전집에서는 발레라는 장르 명에 대한 언급 없이 무대 공연을 위한 작품으로서 St cke 3권에 실려 있다.
발레라는 예술 장르에 대한 인식의 전환 없이는 이 작품을 발레로 보기 어렵다. 빌페르트는 그의 문학용어사전에서 발레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마음의 상태, 인물 성격의 유형, 또는 극적인 사건을 의상과 음악의 힘을 빌리면서 대사 없이 단지 춤사위만을 통해 서술하는 것 (Gero von Wilpert: Sachw rterbuch der Literatur. 6., verb. u. erw. Aufl. Stuttgart 1979. S.68.)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이 작품은 발레가 아니다. 그 이유는 우선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는 노래로 된 대사가 있다 (모든 대사에는 곡이 붙어 있다. 그러나 실제 공연에서는 노래가 아닌 대사로 처리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이 작품은 발레이고자 하면서도 안무를 위한 세밀한 지침 Choreographie이 주어져 있지 않다. 단지 매 장면마다 그 장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대략의 윤곽이 주어져 있을 뿐이다. 이 점은 초연 당시 전통적인 발레에 익숙해 있던 발레 단원과 마찰을 일으키게 했던 원인이 되었다.(Vgl. GBA 4,495.)
그 결과 연구가들은 이 작품을 짧은 오페라, 발레판토마임으로 부르기도 했으며 또한 서사적 오페라로 분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작품에 특정 장르 명을 부여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브레히트와 바일이 의도적으로 '발레 같지 않은 발레극'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바일은 이 작품에 착수하기 이전부터 발레와 노래를 결합시킬 구상을 갖고 있었으며(Vgl. GBA 4, 492.) 브레히트는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이러한 공동 작업(브레히트의 많은 작품은 공동 작업의 결과이며 이 것을 얀 크놉은 >팀-작업 (Team-Arbeit)<이라고 부른다. (Vgl. Knopf, a.a.O., S.138.)
)을 통해 이들이 의도했던 것은 현실과 괴리된 고전적인 발레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브레히트가 시, 드라마, 산문 등에서 했던 일련의 시도들과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1920년대 후반 이후 사실주의 작가로서 현실의 모순된 모습을 작품 속에 보여주고자 했던 브레히트는 기존의 장르 관이나 형식들이 그의 작업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그는 많은 형식 실험을 하면서 기존의 장르 틀을 벗어난다. 또한 20년대 말부터 브레히트는 기존의 문학 장치들을 개혁하려는 시도들을 시작한다. 그 하나가 전달매체에 대한 개혁으로서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연극무대, 라디오, 영화들의 전달매체가 예술 작품과 그 수용자들을 단지 소비재와 소비자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된다. 그 결과 그는 이들을 단순한 소비재와 수동적인 소비자가 아닌 생산재와 생산자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 노력의 산물이 라디오와 무대예술의 기능 전환을 시도했던 '교육극 실험'과 음반이라는 새로운 전달매체를 실험 대상으로 설정했던 시집 {도시인을 위한 독본 Aus dem Lesebuch f r St dtebewohner}이었다.
{소시민의 칠거지악}도 이러한 관점에서 볼 수 있다. 브레히트는 전통적인 발레 또는 춤의 기능이 현대 사회에서는 단순한 소비재로 전락했다고 판단한다. 이 점을 그는 텍스트의 두 번째 장면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도시 멤피스에서 무용수가 된 안나 II는 고전적인 발레를 연상시키는 예술적인 춤을 추려 한다. 그러나 관객들이 원하는 것은 예술이 아니며 단지 그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해 주는 관능적인 춤이었다. 그들은 무대 위에서 자신이 돈을 주고 산 상품을 보려 한 소비자였을 뿐 예술을 즐기면서 동시에 그 속에서 배움을 추구하는 생산적인 면이 결여된 관객이었을 뿐이었다. 이 장면은 브레히트가 살고 있던 자본주의 사회의 예술에 대한 현주소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 아래 브레히트가 이 {소시민의 칠거지악}에서도 발레라는 무대예술의 기능전환을 시도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브레히트와 바일은 발레와 노래를 접목시켰다. 그 결과 무언의 춤은 사건의 진행을 묘사하며 노래는 이에 대한 주해, 평가, 조언의 역할을 한다. 노래의 역할은 그러므로 서사문학에서 서술자가 하는 역할을 맡게 되며 기존의 고전적인 발레 예술의 취약점이었던 서사적인 측면이 보다 강화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이 발레는 그가 '시도 Versuche'의 출판 이후 계속한 일련의 실험적 작업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 모티프 분석
3.1. 칠거지악
이 작품은 프롤로그와 그 뒤를 잇는 일곱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7장의 마지막 연은 에필로그로 처리할 수도 있다. 또한 각 장면들은 공통적으로 세 부분, 즉 장면 제목(이 장면 제목도 텍스트의 한 부분으로서 게시판, 영사막, 피켓 등의 여러 서사적 장치를 통해 관객들에게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등장 인물들의 춤이나 행동으로 묘사되는 사건 진행, 안나 I이나 가족의 노래로 이루어져 있다.
에필로그를 통해 관객/독자들은 안나 형제가 고향에 집을 장만하기 위해 도시로 돈을 벌러 떠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일곱 장면에서는 이들이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결코 범해서 안될 일곱 가지 죽을 죄 Tods nden가 그려지고 있다.
칠거지악 중 1장에서 비판받는 첫째 항목은 "게으름"이다. 그러나 이 극에서 이 죄는 새롭게 해석되어 '불의를 저지를 때 피우는 게으름'을 뜻하게 된다. 이에 맞게 안나 II에겐 몸이 피곤해도 조는 것이 허용되지 않으며, 안나 I은 동생이 범죄를 저지르면서 피곤에 지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그녀를 "일을 하게 내몰 수밖에 없다"
2장에서는 안나 II의 '자부심'이 철저히 부정된다. 그녀는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여기며 예술적인 춤을 추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은 자신들이 지불한 돈의 대가로 무용수의 벗은 몸을 보고자 하는 관객들의 요구 앞에서 철저히 부서지고 그녀는 "자부심이라는 것은 부자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3장에서 안나 II는 비열함과 불의에 대한 '분노'를 표시하다 해고를 당할 위기에 처한다. 안나 I은 이러한 분노의 직접적 표출이 약한 자, 가진 것이 없는 자들에게는 그들의 파멸을 초래할 위험한 행동이라는 점을 동생에게 납득시킨다.
4장에서는 '절제 없이 먹고 마시는 것'이 죄악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 이유는 기독교적인 금욕이 미덕으로 간주되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법칙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절제 없는 행동은 곧 바로 자신의 상품성을 떨어트리는,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먹어 치우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5장에서 이제 스타가 된 안나 II는 자신을 좋아하는 돈 많은 파트론과 자신이 좋아하는 애인 사이에서 "재주를 피우"다 자신의 "공장보다도 더 값나가는 엉덩이"를 공짜로 길가의 구경꾼들에게 보여주는 추태를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물질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파트론 외에 다른 애인을 사랑한다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망치는 '호색', 음탕함으로 해석된다는 것에 동의하고 결국 애인을 버리게 된다.
현실을 알게 된 안나 II는 이제 6장에서 자신을 원하는 많은 사내를 '껍데기까지' 벗겨 그들을 자살하게 만든다. 그러나 물질에 대한 이러한 '지나친 탐욕'은 그녀의 명성에 먹칠을 하게 되어 주위에 몰려들던 사내들이 그녀 주위에서 떠나가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 장면에서도 탐욕은 기독교의 도덕률에서처럼 악덕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부정되는 것은 물질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그 것의 지나침이다. 즉 지나친 탐욕은 도둑질과 사기를 단명으로 끝나게 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장기적인 '사업의 안목'으로 보아서는 오히려 해가 되는 것이다.
7장에서 이제 여섯 가지의 관문을 뚫고 "성공"한 안나 II는 자신과 달리 "게으름을 피우며 [...]/ [...] 자만해도 되며/ 비열함에 화를 내고/ 자신의 충동대로 사는 사람들/ 또한 단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행복한 사람"들을 시기하게 된다. 그러나 안나 I은 이러한 "행복한 사람들"의 비참한 말로를 보여주면서 동생에게 그녀가 결국 승리하리라는 점을 확신시킨다.
에필로그의 역할을 하는 마지막 노래에서는 일곱 가지 죄악을 어렵사리 피해가면서 마침내 '성공'한 안나 형제가 집으로 돌아오게 되며 이들의 고향 미시시피에는 가족과 함께 살 '작은 집'이 세워진다.
이와 같은 작품의 진행을 따라가다 보면 관객/독자들은 브레히트가 기독교의 도덕률이 금기시하는 죄악들을 나열하면서도 이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새롭게 해석, 형상화시킨 일곱 가지 죽을죄는 기독교적인 전통이 깊은 서구에서는 종교적인 그림들에서(Werke von Otto Dix. Bildhefte der staatlichen Kunsthalle Karlsruhe Nr. 11. Karlsruhe 1986. S.26ff.) 이미 많이 사용되었던 종교적인 모티브였다. 신약 성서의 요한 1서 5장 16-17절에서는 이 죽을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형제가 죄짓는 것을 볼 때 그것이 죽을 죄가 아니라면 하느님께 간구하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 죄인을 살려 주실 것입니다. 사실 죽을 죄가 있습니다. 이런 죄를 지은 사람을 위해서 간구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옳지 못한 일은 모두 죄입니다. 그러나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지 않는 죄가 있습니다.(공동 번역 성서. 대한 성서공회 1977. 신약 468면.)
또한 마태복음 12장 31-32절에서는
"그러므로 잘 들어라.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거나 모독하는 말을 하더라도 그 것은 다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거슬러 모독한 죄만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또 사람의 아들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위의 책 23-24면)
이 성서의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독교에서는 '용서받을 수 있는 죄'와 성령을 거슬러 신으로부터도 구원받지 못하는 '죽을 죄'가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성서에는 이러한 모든 죄악의 근본이 되는 죽을죄에 대해 더 이상 자세한 언급이 없다. 그후 중세의 도덕 신학이 죽을죄로 '자만, 탐욕, 호색, 시기심, 무절제하게 먹고 마시는 것, 노여움 (분노), 게으름' 일곱 가지를 설정하였으며 기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죄악이 이 일곱 가지의 죄에서 유래한다고 해석하였다.(Vgl. Werke von Otto Dix. a.a.O. S.26/ Knopf, a.a.O. S.138/ GBA 4,494.)
이 작품의 초고를 보면 브레히트의 첫 구상이 기독교에서 열거하는 칠거지악의 모티프에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애초의 구상은 '가난, 병, 생각, 진실 된 사랑, 정의에 대한 사랑, 진리를 말하는 것, 자신을 팔려 하지 않는 것'의 일곱 가지를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성을 상실시키는 원인으로 보여주는 데에 있었다. (Vgl. GBA 4,494.)
그러나 브레히트는 곧 초고의 구상에서 벗어나 도덕 신학의 계율을 자신의 작품에 받아들여 현대 자본주의의 현실에 맞게 재해석을 시도한다. 그 결과 브레히트는 프롤로그에서 제시된 다음과 같은 현대판 칠거지악을 만들어 낸다.
불의를 저지를 때 게으름을 피우는 것
자신이 최고라는 자부심을 갖는 것 (상품성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
비열함에 대해 분노를 표시하는 것
절제없이 먹고 마시는 것 (배부름, 스스로를 먹어치우는 것)
호색 (자신을 돌보지 않는 사랑)
도둑질과 사기치며 탐욕을 부리는 것
행복한 사람을 시기하는 것
이와 같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칠거지악'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일곱 가지 중죄의 목록을 수용하면서도 그 개념들을 현실에 맞게 새롭게 정의한 결과이다. 그 이유는 이 죄에 대한 기독교적인 해석이 더 이상 현실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며 현실, 즉 자본주의의 상품 사회가 이러한 개념들에 대한 해로운 해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안나 자매가 '행복'을 얻기 위해 찾아간 도시는 물화된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이다. 이 속에서는 인간 스스로를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게 하는 본질적 특성인 '생산적인 노동'으로부터 인간이 소외된다. 그 결과 소외된 인간은 상품 사회에 예속되어 더 이상 자기 주장을 할 수 있는 개인으로 존재하지 못하며 단지 사고 파는 관계의 상품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은 안나 자매처럼 '판매원'이나 '상품'이 될 수 밖에 없으며 이들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가치 역시 다름이 아닌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의미하게 된다.
이 발레극에서 새롭게 정의되고 있는 칠거지악은 바로 이 인간의 상품성을 해치는 죄이다. 그리고 상품성을 해치는 이러한 중죄로부터 그 밖의 다른 죄들이 파생되어 나오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일곱 가지 죄는 현대 자본주의의 신으로부터 결코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중죄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전통적인 기독교적 윤리관에서 평가했을 때 죄가 아니라 미덕에 속하는 행위들이 죄악시된다. "소시민의 칠거지악은 [...] 전통적인 의미에서는 미덕"(Helfried Seliger: Das Amerikabild Bertolt Brechts. Bonn 1974. S. 195)이다. 그러나 이러한 도덕관이 대도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 이상 허용되지 않으며 새롭게 정의될 것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1장에서 안나 형제는 공원의 부부들을 등치는 범죄를 저지른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가 이제는 '일 Arbeit'이라는 개념으로 인식되며 5장에서는 물질이 개입된 성관계가 사랑으로 정의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회에서는 자부심, 분노, 사랑 등의 미덕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허용될 뿐 자본주의 시장에 예속된 '소시민'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덕목들이다. 이처럼 브레히트가 새롭게 정의한 칠거지악은 전통적인 도덕 신학의 일곱 가지 죽을죄에 대한 파로디이며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신랄한 풍자적 비판이다.
3.2. 도시 상경
브레히트의 현실 비판은 그러나 대도시 자본주의 사회를 단순히 부정적인 것으로만 묘사하고 있지 않다. 그는 오히려 이 현실을 인간이 긍정해야 할 것으로 제시하면서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나 형제처럼 그 법칙을 인식하고 이에 '동의'하는 긍정적인 인간들을 형상화하고 있다. 브레히트는 현실에 대한 '동의'가 현실 극복을 위해 내딛는 첫 발걸음이라고 보았던 것이다.(Vgl. Knopf, S.77.)
이와 같이 현실에 동의하고 살아남는 인간형이나 그렇지 못하고 파멸하고 마는 인물들이 브레히트의 작품 속에는 주로 농촌을 떠나 도시로 상경하는 인물들을 통해 그려지고 있다. {도시의 정글 속에서 Im Dickicht der St dte}에나오는 마리 가르가나 {댄 드류 Dan Drew}의 조지 맨스필드, {백정 조우 Joe Fleischhacker}의 케테 미첼, {서푼짜리 오페라 Die Dreigroschenoper}의 제니, {마하고니시의 흥망성쇠 Aufstieg und Fall der Stadt Mahagonny}의 제니와 여섯 여인은 도두 이러한 인간형들이다.
이 중에서도 {댄 드류}의 조지 맨스필드는 도시의 법칙에 동의하게 된자의 전형으로서 그녀는 대도시 뉴욕에 도착하자 자신이 도시에 온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지 맨스필드:
나는 조지 맨스필드, 19살이에요
남부 주에서 온 가난한 사람의 자식이지요
[...]
지나가던 사내들:
야, 호놀룰루에서 온 창녀, 가 돼져 버려. 이곳에서
넌 한 조각의 빵도 먹기 힘들 걸.
조지 맨스필드:
빵을 먹는다고? 나는 고기를 먹을거라구요.
나는 식욕이 좋다고요.
잘 못 먹어 안색이 안 좋아 보이지만
단지 시작이 어려울 뿐이라고요. (BBA 194/62.)
그러나 맨스필드는 자신의 희망과 달리 대도시 뉴욕에서 "고기"를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20년이 지난 후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대도시 삶에 대해 말한다.
이제 마흔 살, 다
망했어요. 나이 스물에
나는 도시 뉴욕으로 왔어요, 한푼도
없었답니다. [...]
[...]
[...] 그 동안 우리는
이 곳에 이 대도시를 건설했어요.
그러나 지금 나는 전보다도 훨씬
못하답니다, 왜냐하면 내 얼굴에서 젊음이 사라졌고 아무도
일을 하지 않으면 돈을 주지 않기 때문이죠.
[...]
[...] 언제나
나는 다시 떠나려 했었지요, 하지만 마지막 날 밤
나는 결국 결정했어요, 이곳에 머무르기로요.
[...]
왜냐하면 이제 깨달았기 때문이에요, 물러가는 것이 무엇이고
물러가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BA 194/59)
맨스필드의 말처럼 대도시로 상경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여러 형태로) 결국 자신의 몸을 파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스필드는 대도시를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20년에 걸친 도시 생활 속에서 그녀가 "물러가는 것이 무엇이고/ 물러가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제 농촌의 시대는 물러갔고 도시의 시대가 왔다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 인식 아래 그녀는 대도시와 그곳을 지배하는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뒤로 돌릴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다시 시작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맨스필드는 이제 도시의 삶의 방식, 그 법칙, 그 도덕률에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발레극 {소시민의 칠거지악}의 안나 형제 역시 미국 남부 미시시피강이 흐르는 농촌에서 돈을 벌러 상경한 여인들이다. 그리고 이들이 미국의 일곱 도시를 돌면서 배우고, 동의하게 되는 것은 곧 자신을 상품으로 파는 도시의 법칙이다. 그러나 이들이 이에 동의하는 것은 현실과 타협하고 그에 안주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브레히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어떠한 현실 극복도 그 첫걸음은 정확한 현실 인식이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 과학적으로 현실을 분석하고 파악할 수 있는 자만이 이 현실을 극복할 수 있으며 동의는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3.3. 분열되는 인간
이 발레극에서 도시로 상경한 인물이 현실에 동의하는 과정이 다루어지면서도 위에 언급된 작품들과 다른 점은 농촌에서는 하나였던 인간이 도시에서 둘로 분열된다는 점이다.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안나 I의 노래"에 의하면 이들 자매는 원래는 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들은 도시로 들어오면서 안나 I과 안나 II로 분열된다. 이 것은 여러 의미로 해석 가능하며 또한 교육적인 성과를 높이기 위해 브레히트가 고안해 낸 장치이기도 하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브레히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의 분열에 대해 처음 생각했던 것은 구상 단계로만 머무른 드라마 {상품으로서의 사랑}에서였다. 그는 이 드라마의 초고에 다음과 같이 대강의 줄거리를 적어 놓고 있다:
한 젊은 창녀가 자신이 상품이면서 또한 동시에 상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운 좋게 얼마간의 돈을 손에 넣자 이 돈으로 담배 가게를 차린다. 이 담배 가게에서 그녀는 남장을 하고 담배 상인 행세를 하는 반면 창녀로서의 직업 역시 그대로 계속해 간다.(BBA 464/54)
브레히트는 이 구상을 그가 망명 시기에 완성시킨 {세추안에 사는 착한 사람 Der gute Mensch von Sezuan}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창녀 쉔테와 담배 상인 수이타로 분리되는 인간형을 만들어 낸다. 많은 연구가들은 {소시민의 칠거지악}에서 나오는 안나 형제의 분열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본다. 그 예로 얀 크놉은 브레히트가 이 작품에서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드는 부르주아-자본주의 사회가 인간까지도 상품으로 변모시키며, 인간의 행동을 외부의 강요에 적응하는 행동과 인간으로서의 욕구를 실현시키기 위한 행동으로 분열시킨다는 점(Vgl. Knopf, a.a.O., S.139.)을 보여주려 했다고 본다. 이렇게 볼 때 안나 II는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주장하고 자신의 개인적 욕구를 실현시키기 위해 애쓰는 인간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처럼 스스로 개인이고자 주장할 때마다 현대판 칠거지악을 범하게 된다. 이에 반해 안나 I은 현실이 이러한 개인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현실에 적응해 이에 합당하게 행동하는 인간형이다. 이와 같이 대도시에 들어와 자본주의 사회 속에 편입된 안나의 인간 분열을 통해 브레히트는 이 사회의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최근의 연구서(Dieter W hrle: Bertolt Brechts medien sthetische Versuche. K ln 1988. S.81-86.)는 안나의 분열을 교육적인 측면을 위한 장치라는 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뵈를레는 안나 형제의 대립되는 성격 중 안나 II가 대도시 현실을 모르고 배워 나가는 인물인 반면 안나 I은 이미 대도시 현실을 알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Vgl. ebd. S.85.) 그의 해석은 여기서 더 이상 나가고 있지 못하지만 연구의 시야를 좀더 넓힌다면 이 발레와 브레히트가 1929년 말부터 시도했던 교육극 실험이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초기 교육극인 {동의를 위한 바덴의 교육극 Badener Lehrst ck vom Einverst ndnis}과 이와 같은 시기 쓰여진 시집 {도시인을 위한 독본 Aus dem Lesebuch f r St dtebewohner}에는 이미 이런 대립되는 성격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바덴의 교육극}의 '학습한 합창단 der gelernte Chor'과 시집에서 화자 역할을 하는 '학습한 자아 das gelernte Ich'는 현실을 이미 알고 있는 안나 I과 같은 유형의 인물이다. 이에 반해 {바덴의 교육극}의 대중, 조종사와 정비사들, 시집의 4, 5, 6번째 시에서 묘사되는 인물들은 현실을 배워 나가는 안나 II와 같은 유형에 속한다.
이처럼 한 작품 속에 현실을 이미 인식하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대립시켜, 이들이 학습하는 과정 자체를 작품 내용에 포함시키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교육적 방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현실에 적응해야 한다는 당위감과 애써 이것을 외면하고 지나간 시대의 덕목에 집착하고 싶은 이율배반적인 마음을 갖고 있는 관객/독자들은 분열된 안나 형제에게서 자신의 상반되는 마음의 한쪽을 발견하게 된다. 이럴 때 무대에서 진행되는 교육과정은 관객의 현실 학습을 보다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안나 형제가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는 것으로 끝난다. 또한 도시에서 '상품'과 '상인'으로 분해되었던 안나는 다시 하나의 안나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극의 결말을 통해 브레히트가 대도시 대신 전원적인 삶을 동경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60, 70년대 소위 공업화를 통해 농촌의 공동화와 피폐화를 경험한 한국의 독자들은 이미 우리의 동경 속에 들어 있는 농촌이 더 이상 전원적인 모습으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자연과 벗하며 각박하지 않은 인간다운 삶이 살아 있는 농촌을 우리 현대인들은 텔레비전의 {전원일기}에서나 볼 수 있다. 이 발레극에서 안나 형제가 동경하고 마침내 돌아간 고향 역시 더 이상의 옛 고향이 아니다.(바이마르 공화국을 연구한 한 역사책은 당대의 도시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20년대 중반 대도시, 군소 도시, 농촌에 사는 독일인들의 수는 엇비슷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생활 감정은 도시나 지방 모두 도시 풍에 물들어 있었다." (J.K. Detlev: Die Weimarer Republik. Krisenjahre der Klassischen Moderne. Frankfurt a.M. 1987. S.182)) 이점은 고향에 남아 있는 가족이 부르는 '가족의 노래'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들은 극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안나가 칠거지악을 범할까 걱정한다. 하지만 그 이유는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대도시에 떨어진 딸/형제들에 대한 걱정 때문이 아니라 보내 오는 돈의 부피 때문이다. 이들은 도시로 돈을 벌러 떠난 안나보다 자본주의의 현실을 더 잘 아는 자들이다. 또한 고향에 돌아와 다시 하나가 된 안나 역시 고향을 떠나기 전의 안나가 아니다. 그녀는 이미 대도시 현실을 알았으며 이에 동의한 안나이다. 그러므로 대도시에서의 '성공'의 대가로서 지어진 고향집 역시 더 이상 전원적인 생활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그 때문에 브레히트는 안나와 그 가족이 얻은 고향집을 '작은'집이라고 하였다.
III. 공연 스케치
브레히트의 유일한 발레극인 {소시민의 칠거지악}은 요즈음도 많이 상연되고 있는 브레히트 작품 중의 하나이다. 특히 작은 무대에서 소수의 등장 인물로 공연 가능하기 때문에 소극단들도 이 작품을 자주 무대에 올리고 있다. 이 장에서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 초연, 필자가 본 쾰른 공연과, 그리고 영화화된 필름에 대해 간략하게 스케치하려 한다.
세 번의 공연은 모두 공통적으로 브레히트의 텍스트가 아니라 바일이 곡을 붙이면서 약간의 수정을 가한 초연 당시의 공연 대본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1955년 처음 인쇄된 이 대본(Kurt Weill: Die sieben Tods nden. Ballet mit Gesang in acht Teilen, Texte von Bert Brecht. Schott & S hne Verlag 1955.)의 특징은 노래 중 가족이 부르는 부분이 많아졌다는 점이다. 특히 가족은 안나 II가 칠거지악을 저지를 위험에 처할 때마다 "우리 아이가 행복해지는 길을 알 수 있게/ 신이여 우리 아이들을 지켜 주소서"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사건 진행에 개입을 한다.
1. 초연
1933년 6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이 발레극의 첫 막이 올라간다. 초연의 제목은 {칠거지악. 베르트 브레히트의 시를 각색한 공연극. 음악 쿠르트 바일. 무대연출및 의상 카스파 네어 Die sieben Haupts nden. Schauspiel nach Gedichten von Bert Brecht. Musik von Kurt Weill.(Ausstattung und Kost me von Caspar Neher}였다. 이 초연은 카스파 네어(브레히트와 어릴 때부터의 친구이며 뛰어난 무대 연출가로서 브레히트의 많은 무대의 연출을 맡았다.)가 연출한 무대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고 기록(Vgl. GBA 4, 498ff.)은 전하고 있다.
남아 있는 공연 기록에 의하면 무대에는 반원 모양의 벽이 일곱 개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벽에는 아치형의 문이 뚫려 있고 이 문은 각각 일곱 개의 죄들 중 하나씩을 적어 놓은 종이로 닫혀 있다. 안나 II는 각 장면에서 칠거지악을 범할 때마다 이 문을 통과하게 되며 그 때마다 이 종이 문은 그녀에 의해 찢겨진다. 이 반원형의 벽 양쪽에는 작은 커튼이 달려 있으며 왼쪽 커튼 앞에서는 가족 합창단이 서 있고 그 뒤로 고향의 작은 집이 관객이 볼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다. 또한 오른쪽 커튼에는 계속 다른 그림들이 보여진다. 무대 위에는 둥근 갓을 씌운 일곱 개의 전등이 매달려 있다. 안나 자매는 외투 하나를 같이 어깨에 걸치고 무대에 등장해 이 외투를 벗어 던지며 또한 무대에서 퇴장할 때도 다시 이 외투를 같이 걸친다. 이 것은 이들이 원래 하나였다는 점을 상징한다. 각 장면이 끝날 때마다 무대 좌측의 가족들에게는 돈 부대가 전해지며 이때마다 집의 높이가 올라간다.
2. 영화
1980년 바이에른 방송국 Bayerischer Rundfunk은 이 발레극을 필름으로 옮겨 방영하였다. 감독 예르훼펠트 Goeran J rvefelt는 상연시간 36분 동안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빠른 장면전환을 통해 안나가 현실을 배워 나가는 과정을 형상화해 냈다. 이 필름에서는 가족의 노래 장면이 많이 등장하며 이들이 단지 딸/형제들을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반면 안나 I에게서는 영화의 흐름을 전달해 주는 내레이터의 성격이 보다 강조된다. 초연과 달리 발레적인 성격, 즉 춤은 완전히 삭제되어 있다.
프롤로그
가방 위에 일상적인 투피스 차림의 안나 I과 안나 II가 앉아 있다. 안나 I은 앞(미래를 상징)을 보고 안나 II는 등을 돌린 채(과거를 상징) 첫 노래 ('안나 I의 노래')를 같이 부른다. 노래 중 안나 I은 안경을 쓰고 안나 II는 모자를 벗는다. 이 부분은 한 인물 안나의 분열이 시작됨을 상징한다. 노래를 마치면서 이들은 거대한 문을 통과해 대도시로 들어간다.
게으름
공원에서 사기치는 장면이 펼쳐지고 이어 고향의 달빛 아래 헐벗은 모습의 가족이 노래부르는 장면이 계속된다. 이 장면이 번갈아 반복되다 안나 II가 벤치에 누워 잠을 자는 모습으로 장면이 바뀐다. 벤치 뒤에서 교활한 얼굴을 한 가족들이 나타나 노래를 부르며 안나가 다시 일을 하게 재촉한다. 안나 I는 안나 II를 다독거리며 일으켜 세운다.
자부심
무대 뒤 장면: 안나 I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안나 II는 뒤에서 거울을 보며 이 옷 저 옷을 입어 본다. 노래를 부르면서 안나 I은 동생이 무대의상을 입는 것을 봐주며 그녀가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동안 객석 뒤에서 지켜보며 박수를 친다. 관객은 담배를 피우며 못 마땅해 쳐다보다 드디어 소란을 피운다. 안나 I이 자신의 노래 대사중 3연 "그들은 돈을 지불하는 대신/ 그 돈 가치에 합당한 것을 보려 했어요"를 반복 해 부르는 동안 무대에는 늙은 무용수가 팬티와 브래지어 차림으로 등장한다. 이 것을 보고 안나 II는 무대를 내려와 안나 I에게 온다. 안나 I은 동생의 옷을 벗겨 속옷 차림으로 만들어 다시 무대 위로 올려 보낸다. 안나 II는 이제 스타킹까지 벗고 늙고 뚱뚱한 무용수를 따라 춤을 춘다. 그러다 안나 II는 무대 뒤에 와 쓰러져 울음을 터트린다. 카바레 사장이 우는 안나에게 돈을 준다. 카메라는 우는 안나 II의 얼굴을 클로즈업시킨다.
분노
술 마시며 초조해 하는 가족 (아버지는 담배를 피우며 초조해 서성대고 어머니는 뜨개질을 하고 있음. 아들들은 술을 먹으며 빈 병을 쌓아 나감)들이 부르는 노래가 끝나면 장면이 바뀌어 안나 I은 치어걸 복장을 하고 촬영장으로 가는 안나 II를 돕는다. 그녀는 영화 촬영장에서 다른 엑스트라들과 함께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만족해하며 즐거워한다. 그러나 스타가 자신이 탄 말을 채찍으로 때리자 그를 말에서 끌어내리면서 채찍을 빼앗아 그를 때린다. 가족이 나타나 안나 II를 둘러싸고 노래를 부르며 안나 I은 동생을 다독거리며 다시 촬영장으로 돌려보낸다. 안나 II가 촬영장으로 돌아가자 감독이 안나 I에게 와 돈을 준다. 앞 장면에서 보다 받는 돈이 많아진다.
절제 없이 먹고 마시는 것
가족의 노래. 안나 II는 무대의상을 입고 사과를 먹고 있다. 매니저는 이것을 말리다 안나가 말을 안 듣자 건장한 사내 두 명 (그중 한 명은 권총을 들고 있다)을 불러 들여 그녀를 위협한다. 그 다음 장면은 자매가 식사를 하는 장면: 안나 I이 스테이크와 포도주를 먹는 동안 안나 II는 먹고 싶으면서도 총을 들이대는 2명의 감시인 때문에 먹지 못한다. 가족이 안나 II의 뒤에 나타나 노래를 부른다.
호색
롤스로이스에서 귀부인 차림의 안나 II가 실크 헤드를 쓴 신사 (에드워드)와 내린다. 이들을 쳐다보며 안나 I이 노래를 부른다. 안나 II는 신사와 헤어져 애인 아돌프(평범한 옷차림)를 만나 신사에게서 받은 반지를 빼 준다. 키스를 하는 이 둘 사이에 안나 I이 끼어 들어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애쓴다. 안나 I은 아돌프로부터 신사가 준 보석을 다시 빼앗는다. 그러자 아돌프는 눈물을 흘리며 안나 I은 그를 위로한다. 신사와 같이 지나가다 이 장면을 목격한 안나 II는 안나 I에게 대들며 둘은 길가에서 뒹군다. 팬티, 엉덩이가 보이고 구경꾼이 몰려 손가락질한다. 안나 II는 눈물을 흘리며 아돌프와 이별하고 신사와 떠난다. 안나 I은 돌려 받은 보석을 꺼내 본다.
탐욕
호텔 계단. 계단 밑에서는 안나 II를 만나러 온 사내들이 진을 치고 있다. 가족의 노래. 가족은 이제 부유해져 있다. 아버지는 고급술을 마시면서 거품 목욕을 하고 있다. 계단에서 안나 형제는 사내들의 지갑을 빼앗고 사내는 자살을 한다. 남자들은 밑에서 수군거리고 그녀를 피해 간다.
호텔 방에서 안나 II는 누워 계속 남자를 받는다. 옆에서 안나 I은 사내들이 벗어 건네준 옷에서 돈을 꺼내 센다. 많은 돈이 쌓여 간다.
시기심
비싼 모피 옷을 입었으나 피곤에 지친 동생을 부추기며 안나 I이 노래부른다. 1장부터 6장까지 나왔던 인물들이 다시 등장하면서 이들이 '다른 안나들', 즉 동생이 부러워했던 '행복한 사람들'의 역할을 한다. 공원을 산책하는 연인들, 추고 싶은 춤을 마음대로 추는 여인, 엑스트라들, 먹고 싶은 대로 먹는 여인, 연인과 마음대로 사랑을 하는 여인들이 안나들을 둘러싸고 있고 동생은 이들을 부러워한다.
그러다 안나자매가 전면으로 나선다. 반면 다른 인물들은 바닥에 쓰러지면서 화면은 어두워진다. 안나자매는 노래를 부르며 이들이 들어왔던 문을 통해 나간다. 이 장면은 이들이 도시를 떠난다는 것을 상징한다.
에필로그
자매가 나란히 서서 노래를 같이 부른다. 이들의 옷차림은 영화 시작 때와 동일하며 안나 II는 모자를 쓰고 안나 I도 안경을 벗고 있다. 이 것은 이들이 다시 한 사람의 안나로 돌아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래를 부르며 안나 I은 정면으로, 동생은 등을 지고 여행가방 위에 앉는다. 화면은 영화의 첫 장면과 동일해지며 정물처럼 앉아 있는 두 자매의 형상이 점점 작아진다.
3. 1990년 쾰른 공연
1990년 가을 시즌 쾰른 시립 극단은 토르스텐 피셔 (Torsten Fischer)의 연출로 이 발레극을 소극장의 무대에 올렸다. 공연 시간은 약 한 시간 정도였으며 특히 안드레아스 라인하르트 Andreas Reinhardt는 단순한 무대와 의상 연출로 호평을 받았다.
무대
무대 벽 한가운데에 긴 거울이 놓여 있다. 이 거울은 그 속에 불이 들어오면 투명한 유리벽이 된다. 이 유리벽 속으로 미시시피 강이 보인다. 무대의 나머지 부분은 병풍처럼 만들어진 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벽면 사이사이에 빈틈이 나있다. 이 빈틈은 무대 뒷면으로 통하게 되어 있다. 무대 전면에는 루이지아나의 고향 풍경이 그려 있다. 안나 형제를 제외한 인물들은 모두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며 벽 틈새를 통해 손만 내민 채 연기한다. 코러스를 이루는 가족은 무대 반대편 객석 뒤에 위치하며 이들과 무대 사이에는 외나무다리를 연상시키는 좁은 널빤지로 연결되어 있다. 관객들은 극장으로 들어오면서 이들 가족이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등장 인물:
무대 위에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고는 안나 형제만 등장한다.
안나 I : 남장을 하고 있다. 검은 연미복 차림이며 실크 헤드를 쓰고 검은 스타킹에 검은 하이힐을 신고 있다.
안나 II: 전문 무용수가 아니며 그녀가 추는 춤은 매우 단순하다. 맨발에 단순한 하얀 원피스의 의상을 입고 있다.
가족: 안나 I과 동일한 의상을 입고 있다.
프롤로그
무대에서 객석으로 연결 된 복도의 벽에 가족들과 동일한 의상을 걸친 한 남자 배우가 일곱 가지 죄악을 천천히 분필로 쓰면서 극이 시작된다. 그 동안 동일한 의상을 입은 다른 남자 배우가 섹스폰을 연주한다. 무대에는 연기가 깔리면서 안나 I이 객석 뒤 가족이 있는 자리에서 무대로 건너온다. 이 동작은 안나 자매가 대도시로 진입하는 것을 상징한다. 안나 II는 유리벽 속에서 천진스럽게 그네를 타고 있다. 무대로 건너 온 안나 I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그녀의 노래가 끝나면 무대 위에서 또 하나의 벽이 내려와 고향 풍경이 그려진 무대 뒷면을 가린다.
게으름
브레히트의 텍스트와는 달리 안나자매가 공원의 산책객들로 부터 돈을 뜯는 장면이 없다. 가족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안나 I은 계속 벽에 기대 졸려고만 하는 안나 II를 정신차리게 한다. 그녀는 동생의 뺨을 때리면서 화장을 시키고 머리를 빗긴다. 빗기는 동작이 과장되어 빗과 바닥이 부딪치는 소리가 노래와 박자를 맞추며 어울린다. 이 장면이 끝나면서 안나 II는 벽 속으로 사라지고 안나 I은 무대 밑으로 내려와 연미복의 바지를 벗고 하의는 검은 스타킹 차림이 된다.
자부심
늙은 스트립 걸 역할을 안나 I이 맡는다. 안나 II는 긴 무용복을 입고 등장. 노래부르는 안나 I은 춤추는 안나 II의 옷을 벗겨 짧은 속옷 차림이 되게 한다. 안나 I은 채찍질을 하면서 안나 II를 훈련시킨다. 채찍으로 맞을 때마다 안나 II가 취하는 자세는 점점 선정적으로 변한다. 가족이 노래부르는 동안 안나 I 은 가방을 열고 붉은 색 하이힐을 꺼내 동생에게 신기며, 다리에 하얀 분을 바르고 그 위에 검은 색 선을 그어 스타킹을 신은듯한 효과를 낸다. 안나 II는 하이힐이 불편해 처음에는 잘 걷지 못하나 곧 이에 적응한다.
분노
원래 텍스트와 다르다. 안나 I이 노래부르는 사이 벽의 틈 사이에서 남자들의 손이 나온다. 이 벽 앞에서 안나 II는 이 남자들이 자신의 가슴을 만지게 하고, 성교의 자세까지 보여준다. 그러다 화가 난 안나 II는 하이힐을 벗어 안나 I에게 던진다.
절제 없이 먹고 마시는 것
가족이 노래부르는 동안 안나 II는 벽 틈에서 벽돌을 받아 하나씩 쌓아 나간다. 돌이 쌓여지는 것에 비례해 안나는 점점 힘들어한다. 노래는 계속 "1그램만이라도 살이 더찌면 ..." 을 반복하고 안나 I는 벽에 기대어 이것을 쳐다보기만 한다. 안나 II가 힘들어 벽돌 위에 앉아 쉬자 안나 I은 은식기에 음식을 가져온다. 안나 II는 반가워 입맛을 다시며 뚜껑을 여나, 그 안에는 단지 레몬 한 알만이 들어 있다. 안나 II는 짜증을 내나 안나 I은 집에 가면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다는 노래를 부르며 이 과일마저 관객에게 주어 버린다.
호색
안나 I은 벽 틈에서 나온 남자 다리 밑으로 들어가 돈을 받아 반대편 벽 틈 속의 손에게 건네준다. 이 동작이 장면 내내 반복되며 안나 I이 아돌프를 만나고 그 결과 거리에서 소란을 피우는 장면은 없다.
탐욕
안나 I은 동생에게 검은 안경을 벗어 주고 무대 밑으로 내려와 바지를 입는다. 안나 II는 벽 둘레를 돌고 그때마다 벽 틈에서 돈이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곧 이어 총소리가 나며 천장에서도 돈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시기심
안나 I은 무대를 가로질러 가족들과 연결되어 있는 널빤지 위에 올라서서 노래를 부르며 돈을 뿌린다. 무대로 돌아와 거울을 들여다 보다 거울을 무대에 쓰러트리며 "인간은 모두 자유롭게 태어났다"라는 대사를 절규하듯 뱉어 낸다. 다른 여러 명의 안나 장면은 빠져 있다. 안나 II는 그 동안 벽에 기대 있다가 넘어진 거울 위로 걸어가 무대 뒷면에 쓰러진다. 가족들은 손가락질하며 노래를 부르고 안나 I은 무대와 가족 합창단 사이에 놓여 있는 외나무다리를 기어 무대 뒷면으로 건너간다.
에필로그
무대 뒷면이 올라가고 그동안 가려졌던 고향의 풍경이 다시 보여진다. 안나 II는 무대 위에 계속 쓰러져 있다. 안나 I은 가족이 있던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앞무대를 노려본다. 가족은 한 명씩 다리를 건너 앞무대로 와 돈을 줍는다. 음악은 악단 줄 고르는 소리 같은 불협화음을 내며 무대에는 프롤로그에서처럼 연기가 깔린다. 돈을 주우면서 가족들이 무대 전면으로 나와 관객을 노려보는 동안 막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