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2월 17일, 서울 서강대 다산관 503호에서 진행된 '2011 한국사회포럼' 세 번째 단체 세션 행사인
'기본소득, 신자유주의 시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대안의 가능성' 토론회 속기록입니다.
속기를 맡은 김성일 운영위원이 아주 깔끔하게 정리를 잘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김미정: 알찬 토론이 되었으면 좋겠고, 실현하는 운동으로서 고민들을 같이 나누었으면 좋겠다
금민: 현대적 기본소득 논의가 시작한 뿌리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68년 이후에 생태주의자들이 논의하기 시작했고 80년대 이후에 활발하게 지금까지 하고 있는게 빠레이스.
평등한 사회를 시작했던 소비에트 사회의 문제점들이 드러났던 시기. 그 중에 빠레이스의 작업에 대해 따져볼 수 있는데, 그는 자신의 입장을 실질적 자유지상주의라고 규정하고 있다. 자유와 평등이 갈등관계에 있다고 가정할 때, 자본주의 사회의 받아들일 수 없는 불평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자유의 중요성 사이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불평등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게 자유지상주의. 무엇보다도 빠레이스의 자유 개념은 자유지상주의의 지반 위에 수립된 논거들 중에서 유일하게 기본소득의 정당화에 적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에 우리가 판 빠레이스처럼 자유지상주의 틀 안에서 기본소득을 정당화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되물을 수 있다.
로크가 자기 소유권, 인간이 자기소유에 대해서는 타자에게 방해받지 않고 처분권을 가진다. 하지만 자유지상주의 논변이 거의 주목하지 않은 부분은 소유권의 입론에서 로크가 “만물에 대한 공동소유”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이다. 로크는 한편으로 원천적인 공유제를, 다른 한편으로 자기보존의 권리를 소유권의 두 가지 전제로 제시한다. 로크의 공유 개념은 현실적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잠재적인 자격의 문제이다. 즉 누구나 공통적으로 대지와 산물에 대해 원천적 공유자의 자격을 가지기 때문에 스스로의 노동에 의거하여 외적 대상에 대한 소유를 획득할 수 있다. 로크의 공유 개념에는 용익권과 같은 긍정적 공동체 특유의 ‘포용적 권리’ 개념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공유지의 이용이란 노동을 의미하며, 노동은 곧바로 ‘배타적 권리’인 사적 소유권을 성립시킨다. 그런데 잠재적인 자격의 관점에서 원천적 공유는 사적 소유의 가능 근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적 소유에 대해 유보 조건을 설정하는 제한 근거로도 나타난다.
로크는 사적 소유권에 기초한 물질적 생산의 발전이 ‘충분성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점으로 볼 때 로크는 완전고용이 가능하다면 '충분성 조건'이 충족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완전고용이 불가능한 조건이라면 실업자에 대한 선별적 복지는 정당화 된다. 여기에서 정당화의 기초는 바로 사적 소유의 한계인 '충분성 조건'이다. 로크가 ‘자선을 받을 권리’를 인정하지만, 소유권이 로크 정의론의 중심이라는 점이 바뀌지 않는다. 노동성과에 따른 소유만이 정의의 영역에 속하며, 자선은 이와 같은 정의의 영역 외부에서 오직 보충적인 원칙으로 등장한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구빈법부터 현재의 선별적인 사회수당까지는 이로부터 정당화 될 수 있겠지만 기본소득과 같은 보편적이고 무조건적 권리는 정당화 될 수 없다. 판빠레이스 역시 실제로는 최소수혜자의 원칙이라는 측면에서 평등을 고려하는데, 실질적 자유지상주의는 그 자체로 형용모순인 셈이다. 자유란 자기 지배고 자기구속이다. 그래서 자유란 공동체 내에서 실현되는 자유를 의미한다.
기본소득의 정당화를 위해서 루소와 칸트의 근대 공화주의는 각각 고유한 난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난점은 모두 근대 공화주의의 두 유형이 가지는 고유의 탁월성과 일치한다. 루소의 경우 평등주의자다. 기본소득처럼 단순한 분배원리를 바꾸는게 아니라 생산관계 자체를 소생산자 중심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 ‘필요에 입각한 동등한 분배’가 아니라 개인의 자립적인 삶이 루소의 핵심이다. 루소는 타인의 자선에 의해 유지되는 삶은 가장 비참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이는 일견 충분한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듯하다. 특히 기본소득은 ‘보편적 자격’에 입각한 무조건적 ‘권리’이지 타인의 자선에 의지하는 ‘시혜’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자선에 대한 루소의 폄하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선별적인 사회수당의 경우처럼 잔여적이고 시혜적인 복지제도보다는 생산수단의 재분배가 낫다는 것뿐이다. 기본소득 도입보다 생산수단의 주기적인 재분배를 통해 평등주의적 소생산자사회를 주기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루소의 원래 입장에 더 가깝다.
소유의 보호인가 재분배인가의 문제 틀을 벗어나서 공적 이성의 원리인 ‘원천적 계약’을 중심 범주로 삼는 칸트의 정치철학은 기본소득의 정당화에 좀 더 용이하게 보인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정당화에서는 기본소득의 ‘실질적 자유’라는 의미가 희박해진다. 이는 칸트에게 특유한 점인 재화윤리학(Güterethik)의 공백과 맞물리는 문제이다. ‘보편적 원칙의 공화국’은 모든 영역에 적용될 수 있으며, 재화의 분배에서의 정의 문제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칸트에 의지하면서 재화윤리학을 구성하려는 시도 중에서 널리 알려진 것은 롤스의 시도가 있다. 분배윤리학을 수립하기 위하여 롤스는 칸트 이론 특유의 의무론에 이질적일 뿐만 아니라 대척적이기도 한 논변 체계인 공리주의 논변을 한 축으로 끌어 들일 수밖에 없었다. 재화윤리학이 공백으로 남겨질 때 칸트의 공화주의는 단지 ‘심의 민주주의’만을 낳을 뿐이다. 이 경우에도 특별히 기본소득의 탁월성을 정당화하는 논변은 구성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공화주의의 입장에서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다양한 논변들이 현대의 기본소득론 안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다. 물론 그들도 종래의 공화주의 논변과 마찬가지로 모두 고유한 난점들을 드러내고 있다. 자격의 공통성에서 사회적 공통성으로 논의를 발전시킬때에만 적절한 기본소득에 대한 정당화를 끌어낼 수 있다. 소유의 불평등이 충분히 있을 수 있지만 일정한 공통성은 만인이 가져야 한다는 것이 공화주의가 가질 수 있는 정당성 논변의 최대한계. 자격의 현실화는 조건의 수립으로, 곧 자격에 부합되는 현실적 사회적 조건의 확립으로 나타나야 한다. ‘보편적 자격의 공화주의’는 ‘보편적 조건의 공화주의’를 수반하며 양자는 동일한 원리 위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인류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만인의 보편적이고 동등한 자격은 개념적으로 ‘평등(동등성)의 원리’와 ‘공통성의 원리’를 모두 함축한다. 사회적 권리들 중에서 기본소득, 곧 모두에게 특수한 조건과 상관없이 만인에게 평등하게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동등한 자격의 원칙’, 곧 ‘동등성의 원칙’에 가장 근접한다. 사회구성원이라는 자격 요건에만 기초하는 보편적 복지의 제도들 중에서 기본소득은 개별적으로 지급되는 보편적인 평등 수당이라는 점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동등성의 원칙’에 접근한다. 그것은 평등한 선거권의 의미에서의 민주주의와 원리적인 상동성을 가장 많이 보여준다. 기본소득을 통해 평등의 원리는 정치 영역에 한정되지 않고 사회적 권리와 같은 포괄적인 시민권의 문제로 확장된다.
김미정: 사회적 공통성을 말씀해주셨는데 시사성이 높지 않나 생각한다.
곽노완:
기본소득은 맑스주의를 포함한 좌파의 담론에서 뜨거운 논쟁을 촉발했다. 특히 기본소득이 착취를 전향적으로 폐기할 것이라는 주장과 오히려 착취자를 늘릴 것이라는 주장이 첨예하게 부딪치면서, 맑스주의자 안에서 기본소득을 둘러싼 찬반론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이에 대해 호워드는 맑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맑스는 자본주의적인 ‘교환가치’가 노동의 산물이라고 보지만 사용가치 내지 ‘부’의 원천은 노동 및 자연이라고 보았다. 사실, 맑스는 『자본』에서 호워드의 해석과 일치하는 주장을 하고 있다.
“노동은 생산된 사용가치 곧 소재적인 부의 유일한 원천이 아니다. 윌리엄 페티가 말했듯이, 노동은 부의 아버지이며 지구는 부의 어머니이다.”(MEW 23: 58)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은 사회적인 생산과정의 기술과 조합을 발전시키지만, 동시에 모든 부의 원천인 지구와 노동자를 파괴한다.”(MEW 23: 530)
심지어 「고타강령비판」에서 맑스는 노동이 모든 부와 문화의 원천이라는 라살레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노동은 모든 부의 원천이 아니다. 자연도 노동과 마찬가지로 사용가치(그리고 사실 진정한 부는 이것으로 구성된다!)의 원천이다”고 밝히고 있다. 호워드는 맑스보다 더 나아가 부의 원천을 확장한다. 그는 자연자원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유산들도 부의 원천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자원 및 역사적인 유산들은 정의의 관점에서 볼 때 원리적으로 공유재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경제적 부는 부분적으로만 노동의 성과이고 부분적으로는 타인 내지 사회전체의 성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호워드는 판 빠레이스에 따라, 게으른 사람들에게도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대가 없는 기부가 아니라 사회적 부의 각자 지분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고 본다.
또한 그는, 선망 받는 일자리는 특권적인 불로소득을 낳는다는 판 빠레이스의 고용지대론을 수용한다. 고용지대론은, 사회성원들 다수가 선망하는 제한된 일자리가 개인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나아가 이러한 희소한 일자리를 갖는 것이 개인들의 노력만이 아니라 소질‧지능‧가정환경‧성‧인종 등 본인의 노력과 무관한 천부에 의해서도 결정되는 재산이고 따라서 선망 받는 고소득의 일자리는 지대를 포함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용지대론은, 정규직 등 선망 받는 일자리의 독점에서 유래하는 특권적인 노동소득에 대한 추가적인 조세를 통해 기본소득의 주요 재원을 조달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물론 이러한 고용지대론 및 노동소득에 대한 추가적인 과세는, 기본소득의 재원을 가능한 한 충분이 확보하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제안이다.
이러한 결론을 수용하면 노동자들이 모든 생산물을 차지하는 것은 오히려 부당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앞의 곳). 곧 맑스의 「공산당 선언」및 「고타강령비판」에 따라, 사유재산과 착취에 기초한 불로소득이 폐지되고 ‘조건부적’으로 “노동에 따른” 소득으로 대체될 코뮌주의 제일차 국면 내지 사회주의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 대가에 해당하는 소득만이 아니라 토지, 자본, 전승된 기술, 특권적인 일자리에서 유래하는 불로소득까지도 전유하는 불공정한 착취자로 간주된다.
호워드는 판 빠레이스와 마찬가지로 기본소득을 “코뮌주의 고차 국면”의 “필요에 따른” 분배와 동일한 것으로 본다. 판 빠레이스는 맑스의 “필요에 따른 분배” 기준을 “사회의 총생산물 중에서 필요에 따라 분배되는 상대적 몫이 최대화”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이 상대적 몫은 각자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할 정도로 충분히 많아야 한다. 물론 사회적인 생산물이 각자의 다양한 필요를 완전히 충족하기에 부족한 희소성을 갖고 있다면, 가장 공정한 분배방식은 장애인 등에 대한 추가적인 지급을 제외하곤 각자에게 균등한 충족수단을 지급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기본소득이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현대 자본주의 국가 중 일부는 기본소득을 도입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생산력을 갖추고 있다.
생산과정에서의 빼앗김의 과정이 착취. 수탈에 대해서도 자본 안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 맑스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상당부분 무시되어왔다. 여기서 수탈은 노동자와 사회전체성원의 생활수단 및 생산수단을 빼앗아가는 과정으로, 착취와는 달리 직접적인 노동 밖의 시공간에서 발생하는 모든 빼앗김을 총괄하는 개념이다. 이른바 시초축적은 이처럼 포괄적인 수탈의 시공간 중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 중 생산자 및 사회전체성원의 생산수단에 대한 자본과 대토지소유자의 수탈 및 생산자들의 임금노동자로의 재편과정에 대한 분석이다. 지금까지 대다수 맑스주의자들은 수탈의 시공간을 이러한 ‘시초축적’ 시기라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시기에 국한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수탈의 시공간은 맑스의 『정치경제학비판』체계에서 외생적이거나 배경적인 전(前)자본주의적인 시공간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었다. 수탈개념을 세계경제차원에도 확장할 수 있다. 세계경제에서 미달러화가 지불수단으로 작동하면서 미국이 누리게 되는 특권적인 경제적 이득에 대해서도 수탈 개념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미달러화의 금태환제가 폐지된 1971년 이후에도 다른 나라들이 국제결제수단이나 외환보유통화로 미달러화를 사용하는 달러지배체제가 지속되면서, 미국은 달러화를 증발하여 무역수지적자를 확대하면서도 달러화 하락 내지 인플레압력을 거의 겪지 않았다. 이는, 다른 나라들이 생산한 부 중에서 누적된 경상수지적자만큼을 대가없이 미국이 국제적으로 수탈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일종의 독점적인 국제통화인 미달러화를 통해 미국사회성원이 갖는 특권으로서, 맑스적인 의미의 자본주의적 ‘차액지대(Differentialrent)’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비가 강탈로 개념화했던 생물자원에 대한 지적재산권, 공유기업 및 공유지의 사유화 등에 대해서도 맑스의 수탈 개념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사회전체성원의 공유재산을 빼앗아서 특정자본에게 몰아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공황시기에 거대 자본에게 대가 없이 지급되는 공적자금이나 부채탕감에 대해서도, 차세대 사회전체성원의 늘어난 조세부담만큼을 빼앗아가는 것인 만큼 맑스의 수탈 개념을 확대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맑스의 수탈 개념을 확장하고 재구성한다면, 착취 개념의 외연을 확대한 호워드나 네그리뿐만 아니라 강탈 개념을 확장한 하비 이상으로 자본주의적 빼앗김의 시공간을 더 체계적으로 극대화하여 포착할 수 있다. 이 수탈이 차지하는 만큼의 가처분소득을 기본소득으로 전환한다면, 굳이 노동소득에 중과세를 하지 않더라도 충분한 재원이 확보될 수 있다. 오히려 정규직 노동소득에 대한 중과세는 철회하고, 자연자원 및 전승된 자원으로부터 유래하는 부만을 코뮌주의의 기본소득으로 전환하자는 주장이 노동유인을 약화시키지도 않으면서, 정치적 갈등을 유발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더 충분한 재원을 확보하는 우월한 길일 것이다. 맑스의 수탈 개념을 재구성하면서 보았듯이, 이러한 재원은 자본주의에서는 수탈에서 유래하는 소득(이자와 지대 및 증권‧외환‧부동산 양도차익, 공적자금 등)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으며 호워드가 생각했던 것보다 월등히 많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는 착취와 수탈로 인한 불로소득에 대한 집중 과세를 통해, 그리고 생산수단과 자연자원 및 전승된 자원을 모두 사회의 공유로 전환한 코뮌주의에서는 자연적‧사회적인 공유재산에서 유래하는 순수익(이는 자본주의적인 수탈이 차지했던 만큼의 가처분소득 전부를 코뮌주의적으로 전환한 것이라 할 수 있다)을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마련하는 길이 바람직할 것이다. 특히 자본주의에서 착취와 수탈에 대한 집중 과세는 당장에라도 가능할 뿐만 아니라, 부동산과 주식가격의 하락을 촉진하여 토지와 생산수단을 사회적 공유로 전환하기에도 유리한 조건을 창출한다. 왜냐하면 토지와 생산수단을 저가로 유상 몰수할 수도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이명현: 전 철학적 입장보다 복지연구자로서 기본소득을 연구하고 있다. 복지연구자들이 기본소득 반대하는 경우가 많은데, 기본적으로 복지연구자들은 보편적 복지국가를 찬성하는 경우가 많다. 기본소득은 보편성의 극대화까지 가는지라 복지국가를 좀 넘어서는 경향이 있다. 저는 복지국가를 연구하다가 어떤 문제의식을 느꼈냐면, 복지국가라 하면 시민권을 바탕으로 하고 그 사회의 시민으로서의 자격이 있으면 복지가 지급되는 형태다. 그런데 복지국가 위기를 바탕으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사회보장정책의 재편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복지시장화나 워크페어가 도입되고 자립과 자기결정, 수급자에 대한 특별한 의무나 책임 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자활이라거나 이런 기준에 따라 복지급여가 신청을 하더라도 근로의무나 소득자산 기준 때문에 욕구가 있음에도 탈락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 복지국가라는게 특정계층의 복지만을 보장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타나고 실제 워크페어(workfare) 등은 권리적 부분보다 의무를 강조하는 측면이 많다. 이와 같은 복지를 둘러싼 시민의 권리와 책임관계의 변용에서 기본소득은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 즉 무조건 급부를 통해 개개인이 ‘이루고자 하는 것’이 가능한 수단을 확보할 수 있도록 ‘진정한 자유(real freedom)’ 이념을 제도 목표로, 개인의 자율성을 매우 급진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기본소득의 특징인 무조건성은 사회권의 틀 속에서는 수용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 이유는 사회권에서도 생활에 대한 개인책임 원칙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회보험의 경우에는 ‘보험료 납부’, 공공부조의 경우에는 ‘자산과 능력의 활용’이 문제인 것처럼, 책임 및 공헌과 관련된 조건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본소득은 책임 이행을 위한 조건부과가 없으므로 기존 사회권의 형태와는 매우 다른 본질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회복지정책이나 복지서비스 분야에서 권리를 논의할 때에 판단기준을 제공하는 것으로 욕구(need)와 권리의 관계를 들 수 있다. 욕구란 사회복지에서는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특히 정책이나 제도와의 관계에서는 어떤 종류의 상태가 일정한 목표에 비추어 기준으로부터 괴리되어 있는 상태이며, 그런 상태를 회복하거나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욕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복지욕구는 그것이 처음에는 본인이 느끼는 데에서 출발할지라도, 복지욕구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사회적 판단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욕구에 대한 이런 견해는 권리의 생성과 정착을 고려할 경우에는 매우 중요한 뜻을 가진다고 한다. 예를 들면 인권이 단순히 인간이라는 데에만 근거하여 당연히 가지는 권리라면, 인간존재의 복합성과 다양성에 따라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각양각색의 것들이 권리로서 주장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인권이 즉시 모두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적 인권으로 되지 아니하며, 그 중에 특별하게 내실이 있고 기본적으로 중요하다고 인정될 때에만 헌법 속에 명기되거나 또는 ‘개인의 존엄’이나 ‘행복추구’와 같은 포괄적 기본권 규정을 통하여 법적 권리가 된다고 해석한다. 이 해석을 복지에 준용한다면 복지욕구에도 특정한 사회적 승인을 필요로 하는 특정 종류의 규범적 측면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법적 권리의 생성과정과 매우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권이 법적 권리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주장이나 요구의 정당성에 대한 사회적 승인이 존재해야 하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제도적 보장이나 담보가 존재해야 한다. 복지문제를 권리 관점에서 검토할 경우에도 당연히 이러한 전제들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본소득의 경우에도 사회적 승인을 통한 제도적 보장이나 담보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Perez의 경우, 기본적 욕구(primary need)와 구별되는 근원적 욕구(radical need) 개념을 제안하고 있다. 근원적 욕구란 행위자의 도덕적 판단(moral election)에 의해 가동되는 욕구이며 사람들이 어떤 유형의 인생을 원하는지를 결정할 때에 필요하다고 느끼는 욕구라고 한다. 이런 욕구는 자신의 생활스타일이나 인생 목표를 결정하는 자유를 존중하는 데에 필수적이며, 이의 불인정은 복지 자유의 박탈로 연결되며 마찬가지로 행위자를 수단으로 간주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기본소득을 권리와 관련지어 생각할 때 개인의 자율을 어떻게 편입시킬지가 초점이 될 수 있는데, 이런 논의들은 자율 문제를 ‘생존의 자유’에서 ‘생활의 자유’에 관한 기본욕구로 확장하여 인식하는 관점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권리실현을 위한 제도화 측면에서 기본소득을 논의할 경우에 시민의 권리·자율, 책임·의무 관계가 관건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기본소득을 둘러싼 호혜성 문제가 논의의 초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반화된 호혜성은 긍정적 호혜성으로서 시간, 양, 질이 정해져 있지 않지만 되도록 빨리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돌려주려고 한다. 이는 상대방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한다. Sahlins는 그 대표적인 예로 순수 선물, 친절, 도움,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등을 들고 있다. 균형잡힌 호혜성은 직접적 교환으로서 보답의 즉각성과 등가성이 높고 이해관계에 있어 서로를 공평하게 고려한다. 혼인거래, 친구간의 계약, 노동교환 등이 해당되며 일반화된 호혜성보다 덜 인간적이지만, 보다 경제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상대방은 서로 독자적이고 경제적이며 사회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존재로 만난다. 부정적 호혜성은 자기 이해관계를 최고로 고려하며 교환된 자원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아무 것도 주지 않고 무언가를 상대방으로부터 얻는 것, 그것도 아무런 처벌 없이 얻는 것이 최고로 좋다. 값깍기, 도박, 속임수, 강탈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사람들은 서로 대립되는 이해관계를 가진 채 만나 상대방의 희생위에 효율성을 극대화하려 한다. 그런데 복지제도와 관련해서는 특히 복지국가 재편기의 사회보장제도는 워크페어와 같은 노동교환 위주의 ‘균형잡힌 호혜성’을 주축으로 해 왔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유상노동에 대한 의무 없이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그 무조건성으로 인하여 오히려 ‘도움’, ‘관용’과 같은 ‘일반화된 호혜성’ 논리가 강하게 편입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속성으로 인하여 기존 복지국가 급부에 익숙한 사회에서는 생산적·도덕적 측면 모두에서 강한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호혜성 관점에서의 주된 비판은 기본소득이 공정한 사회에 역행한다는 것이다. 한 사회가 공정한 사회이기 위해서는 호혜성 원리에 충실한 사회여야 한다. 그런데 기본소득의 무조건성은 ‘공헌’을 하지 않고 급부를 받는 사람들을 인정하고 있다. 즉 기본소득은 무임승차자를 승인하는 제도라는 것이다. 이런 비판이 타당한 것인가?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오히려 기본소득 보장에 의해 유상노동 이외의 사회적 활동들이 활성화될 것이라 기대한다. 예를 들면 Offe의 경우 “기본소득은 모든 개인에게 임금의 대가로써 파는 것 이외의 것에 자신들의 노동을 사용하도록 촉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함의하고 있는 도덕적 규칙은, 고용 없는 소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유용한 활동에 종사하도록 기대-단지 임금 없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Offe, 1997:102). 이런 지적과 같이 기본소득 지지자의 대다수는 기본소득 도입이 유상노동 이외의 사회적으로 유용한 활동의 활성화에 공헌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기본소득에 대한 호혜성 관점에서의 비판에 대해 반비판으로서 그것을 옹호하는 논리도 가능하다. 구체적으로는 첫 번째로 우리 사회가 자유사회라는 관점에서부터이다.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자유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유의 향유에 어느 정도의 남용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을 수용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유가 ‘과도하거나’, ‘자유로운 사회를 위협하는’ 것이 될 수도 있지만, 당해 자유 그 자체의 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다. 기본소득이 무조건 소득보장에 의해 진정한 자유를 인정한다면 아무런 공헌도 하지 않고 기본소득만을 받으려는 자가 등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유로 각 개인이 자유롭게 선을 추구할 권리까지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더욱 큰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기본소득 옹호론에서 지적한 것처럼, 그것이 호혜성을 촉진할 수 있다면 기본소득이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공헌을 활성화하는 측면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의미다. 생산적 공헌의 의미를 확대해서 해석하면 기본소득은 호혜성을 더욱 촉진시킬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의미 확대를 둘러싼 논의의 중심에는 유상·무상노동의 관계가 있다. 유상노동 종사자의 시간적·가치적 증대는 다른 사회적 제반활동(무상노동)에 관여하는 시간과 가치의 감소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와 관련된 논의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유상노동 중심의 호혜성 개념은 적어도 ‘무상노동’과 ‘정치’라는 두 가지 형태의 공헌을 경시할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서 이들을 포함하는 호혜성의 형태를 ‘다양한 호혜성’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이 개념은 애초에 Fitzpatrick에 의해 제기된 것인데, 유상노동을 호혜성의 핵심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점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또한 시장에서의 노동교환을 통한 등가적 이해관계의 범위를 초월하여 무상의 노동과 공헌활동까지 포함한다는 점에서 Sahlins의 균형잡힌(balanced) 호혜성과 일반화된(generalized) 호혜성까지 아우르는 호혜성의 확장으로 이해해도 좋다고 생각된다. 이런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기본소득과 ‘다양한 호혜성’과의 접점을 만들 수 있다.
재원에서 유상노동과 소득과의 단절을 본질적인 특징으로 하는 기본소득에서 호혜성을 담보하기 위해서 어떤 재정원천이 가장 정당한가에 대한 고려도 필요할 것이다. 부의 원천은 노동으로부터 창출되므로 사회 전체적인 노동과 소득의 일체성을 단절시키지 않는 편이 유리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근로소득 세원확충을 주축으로 다른 재원이 보완적으로 연계하는 방향이 견지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향후 우리나라 복지국가의 지속성과 개혁 방향에 있어서도 호혜성의 확장 및 다양화에 의한 기본소득형 복지국가 정책에 대한 사회적 승인의 요구는 더욱 활발하게 제기될 것이다.
임경석: 본 세션은 정치철학, 경제철학, 그리고 사회복지의 영역에서 기본소득(basic income)을 다룬 세 분의 발표논문으로 구성된다. 발표자 세 분 모두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약칭 BIEN.)의 17번째 가맹조직인 한국기본소득네트워크(약칭 BIKN.)의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현재 보편성과 무조건성을 특징으로 한 기본소득의 필요성, 정당성, 그리고 실현 가능성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분들이다.
- 발표자 금민 선생(이하 발표자로 약칭함.)은 <기본소득의 정치철학>이란 주제 글을 통해 기본소득의 정당화와 관련된 정치철학적 준거점을 모색한다. 발표자는 ‘실질적 자유지상주의’(Real-libertarianism)자 판 빠레이스의 모두를 위한 실질적 자유(Real Freedom for All)란 입장을 모델로 개인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종류의 연대성의 지평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목표로 설정한 듯 보인다. 특히, 기본소득의 정당화를 위해 정의(Justice) 개념의 기초 원리인 ‘자기소유권의 원칙’(principle of self-ownership)과 ‘최소수혜자 우선의 원칙’(principle of leximin priority)에 주목한다.
발표자는 모두를 위한 실질적 자유의 실현을 위한 출발점으로 존 로크의 소유권의 입론 중 주목받지 못한 “자연의 단일한 공동체의 공유”, 곧 “만물에 대한 공동소유”를 언급한다.(이하 원고의 쪽 수 임. 2쪽.) 이를 통해 대지와 자연에 대한 “모든 개인의 원천적 공유(original community) ―그것이 조건적인 소유권이든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이든 ―가 사적소유의 가능 근거일 뿐만 아니라 사적 소유에 유보 조건을 설정하는 제한근거로 나타나며, 종국에는 모든 실질적 자유의 기초가 됨을 언급한다. 더 나아가 이런 공유의 개념에는 근대 공화주의의 ‘공적 자유’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실질적 자유지상주의’보다 더 적절하게 기본소득을 모든 개인의 무조건적이고 필수적인 권리로서 정당화하는 길은 한편으로 아리스토 텔레스, 마키아벨리, 루소와 칸트의 ‘원칙적 공화주의’ 담론을 소개(5-6쪽)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 기본소득과 관련된 ‘사회적 조건의 공화주의’ 입장과 연관된 Philipp Pettit, Stuart White, Richard Dagger 등의 논변을 언급(7쪽.)한다. 끝으로 발표자는 보편적 권리인 시민권으로서의 기본소득의 실현이 추상성을 넘어 실질적 공화주의의 실현을 위한 민주주의임을 역설하고 있다.
-곽노완 선생의 <착취 및 수탈의 시공간과 기본소득(맑스의 착취 및 수탈 개념의 재구성)>은 “맑스의 착취(Ausbeutung)개념이 노동 내부의 빼앗김에만 국한되어 있어, 그가 노동 외부의 빼앗김으로 정식화한 수탈(Expropriation)의 시공간을 간과하게 된다는 점을 주목한다. 이에 발표자는 자본주의적인 빼앗김의 두 가지 시공간을 극대화하여 포착하고자 한 맑스의 착취 및 수탈 개념을 재구성함으로써 이렇듯 협소화된 기본소득의 맑스주의적 지평을 새롭게 확장할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검토하려고 시도한다. 이런 시도와 관련해 발표자는 우선 시장사회주의자 호워드(Howard)의 논거를 통해 부의 원천인 노동과 자연에 더해 공유재로서 역사적인 유산과 특권적인 불로소득(판 빠레이스의 고용지대의 수용.)을 포함시키며, 기본소득을 코뮌주의의 고차 국면인 ”필요에 따른 분배“와 동일한 것으로 보지만 자본주의에서도 맑스의 분배 원칙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확장된 맑스 재해석 소개한다. 아울러 호워드는 ‘노동에 대한 권리’에 기반을 둔 기본소득에 반대하는 논거들(Elster, Haug, Van Donselaar, Schweickart)에 대항해 노동과 기본소득의 조화를 모색한다. 즉, 호워드는 ”판 빠레이스의 논거를 상당부분 수용하여, 착취 개념의 외연을 확장함으로써 사회주의로의 경로 및 사회주의 안에서 기본소득은 착취를 확대하기 보다는 보다 철저히 착취를 폐절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기본소득은 버젓한 노동과 일자리를 위한 권리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촉진하는 길이라고 논증한다. 이는 사회주의를 거부하고 코뮌주의 내지 최적자본주의를 지향하는 판 빠레이스의 기본소득 논거를 대부분 수용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새로운 사회주의적 기본소득 모델을 재구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7쪽.)
발표자는 이제 맑스의 착취 및 수탈 개념의 외연을 재구성하면서, 자본주의적 강탈의 시공간을 더 체계적으로 극대화하여 포착하고자 한다. 그 결과는 “자본주의의 가처분GDP가 ‘노동소득+착취(자본소득)’라기 보다는 사실상 ‘노동소득+착취(자본가이득)+수탈(이자와 지대 및 금융‧부동산투기소득+공적자금+α)’로 구성된다. 그리고 노동의 시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착취와 달리, 수탈은 노동 밖의 모든 시공간에서 항상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자본주의는 착취와 수탈을 통해 불로소득을 극대화하고 노동소득을 극소화하여 노동유인과 생산력을 제약하는 생산양식(강조는 발표자의 것임.)”(11-12쪽.)이다.
또한 발표자는 “기존의 자본주의적인 가처분소득이 ‘노동소득+착취+수탈’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이 ‘노동소득+감소된 착취+감소된 수탈+기본소득’을 거쳐 코뮌주의에서 ‘증가된 노동소득+증가된 기본소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보는데 비해, 호워드는 자본주의적인 가처분소득이 ‘착취를 일부 담고 있는 노동소득+자본가의 착취’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이 ‘감소된 노동소득+감소된 자본가의 착취+기본소득’을 거쳐 코뮌주의에서는 ‘감소된 노동소득+증가된 기본소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보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끝으로 발표자는 기본소득의 실현을 위해 가장 논의가 절실한 재원확보의 바람직한 길로 착취와 수탈로 인한 불로소득에 대한 집중과세의 필요성을 정당화한다. 왜 기본소득의 전망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소득의 불안정과 무소득으로 고통 받는 다수 희생자인 프레카리아트(Precariat)와 노동자들에게 이득이 되는지를 역설하면서 말이다.
-이명현 선생의 <호혜성(Reciprocity)과 기본소득>이란 제목의 글을 통해 1980년대 이후 복지국가의 위기를 배경으로 워크페어(workfare)와 대조적 입장에서 등장한 기본소득 담론을 시민권의 관계를 중심으로 호혜성 원리(The principle of reciprocity)에 초점을 맞추어 소개한다. 기본소득은 수급의 자격문제와 관련해 ‘무조건성’을 강조한다. 반면, 시민권은 권리와 의무의 이중적 관점에서 비시민이나 의무와 공헌과 같은 호혜성 문제를 중심으로 기본소득의 도덕적 반대론을 뒷받침하는 이론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에 이 글은 기본소득(권리성)과 시민권(호혜성)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와 비판들을 분석하고 그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탐색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첫째, 시민의 자격과 사회권에 대한 주된 원리(이타심, 평등, 연대감, 자율성)는 무엇이며 그와 관련하여 권리로서의 기본소득을 인식할 수 있는 이론적 특성(Perez의 욕구의 충족: 기본적 욕구 vs. 근원적 욕구)은 무엇인가?
둘째, 호혜성(Sahlins의 1. 일반화된 호혜성, 2. 균형잡힌 호혜성, 3. 부정적 호혜성)과의 관계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비판론의 주된 관점(공정사회에 역행)과 그 내용(나태의 조장, 근로자 착취, 무임승차 등)은 무엇이며, 옹호론의 관점에서 의무와 기본소득을 논리적으로 연계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1. Fitzpatrick, Ackerman & Alstott의 자유사회 옹호의 관점. 2.Gutmann과 Thompson의 시민의 공헌과 더불어 요구되는 정부의 공헌 필요성)는 무엇인가?
셋째, 호혜성의 확장과 다양화 등 기본소득이 호혜성을 촉진시킬 수 있는 관계의 방향 및 가능성(1. 일시급인 기본자본(basic income)이나 사회적 지분급여(stakeholder grant)처럼 기본소득의 무조건성을 완화하여 호혜성을 담보하려는 경향. 2. Atkinson의 사회적 공헌을 포함하는 참가소득(participation income)의 제안. 3. 유상노동을 바탕으로 한 기존의 생산적 공헌 대신 그 의미를 ‘무상노동’과 숙의적 여론조사처럼 ‘정치참여 제도의 패키지화’를 통한 확장. 4. Offe의 ‘안식년 어카운트’ 혹은 Fitzpatrick의 ‘변화모델’처럼 기존의 균형 잡힌 호혜성에 대한 점진적 인식변화의 필요성.)을 어떻게 전망(1.기본소득의 재원창출 방안, 2.기본소득의 미래.)할 수 있는가?
기본소득론은 현재 신자유주의의 노정된 폐단인 전지구적 금융 위기, 노동의 유연화와 비정규직의 양산, 실업, 고용과 보장의 사각 지대의 현실에서 좌파/우파의 구분 없이 매우 다양한 차원(무조건적 기본소득, 수정형 기본소득, 사회적 지분급여 등)에서 현실문제의 실현 가능한 대안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몇 가지 공통된 질문을 제기해 보자.
1. 기본소득의 재원과 관련해 수탈의 차원에서 불로소득과 투기소득과 같은 증과세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면, 단기, 중기, 장기적인 차원의 대안은 무엇인가?
2. 현재 한국 사회에서 소수의 계몽적 운동이 아닌 참여민주주의 혹은 숙의민주주의를 실현하면서 기본 소득의 담론을 시민의 알권리나 공지성의 차원으로 공론화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은 무엇인가?
3. 최근 우리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역동적 복지국가론, 정의로운 복지국가론, 삼차원 복지국가론이나 무상급식, 무상의료, 무상교육과 같은 복지패러다임 논쟁에서 보여주듯이 모든 복지는 계급투쟁과 계급적 역량의 대립이 피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보편성과 무조건성을 원리로 삼는 기본소득과 학습을 통한 점진적 선호를 변화하려는 프로그램을 통한 확장된 호혜성의 중첩이 과연 행복한 결합일 수 있는가? 양자 간에는 오히려 우선성의 원칙이 요구되지 않을까?
김미정: 임경석 선생이 발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플로어 질문을 더 받고 한꺼번에 답변하는게 나을지?
플로어: 이명현에게 질문한다. 호혜성을 생각하면 노동소득을 재원으로 쓰는게 호혜성에 오히려 어긋나는 것 아닌가? 투기불로소득 등 수탈 영역을 거두어 재원으로 만드는 것이 더 나을 것으로 보인다.
금민: 이명현에게, 호혜성의 개념을 거기까지 확장할 경우 개념 자체가 달라지지 않는가?
플로어: 금민에게, 기본소득이 지금 이야기하는 복지와 연관이 없을래야 없을 수 없는데, 지금 복지정책과 어떻게 연관지을 수 있고 2012년 총선 대선 등에서 어떻게 정책화 할지 묻고 싶다.
금민: 공유와 소유는 일종의 상태다. 나의 관점은 ‘자격’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민권이 그것이다. 사회적 시민권이라는 것이 나왔는데, 그것은 조건이다.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공통적 조건을 주어야 한다는게 바로 사회적 시민권. 기본소득을 하냐 마냐 보다 중요한 것은 신자유주의가 뭐냐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금융자유주의이고 노동유연화체계다. 착취보다 더 훨씬 광범위하게 수탈하고 수탈을 통해서 스스로를 재생산해온 체계다. 기본소득은 하나의 이행전략이어야 한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본소득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회피할 수 없는 문제다.
이명현: 기본소득과 호혜성 결합이 행복한 결합이냐는 질문에 답한다. 행복한 보다는 필요한 결합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기본소득이라는 것이 사회복지라는 면과 양립할 건지 대치될 건지에 관심이 있다. 호혜성 관계없이 기본소득이 지급된다고 하면, 어떤 조건도 묻지 않고 기본소득을 지급한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볼때 어떤 인지적인 반응이 있을까? 재원 관련해선, 기본적으로 복지란 일부가 부담해서 다수가 혜택을 보는데에는 한계가 있다. 모두가 부담을 하고 모두가 혜택을 봐야 한다는 점에서 보면 노동소득이 정당성이 있지 않느냐는 입장이다. 불로소득이나 환경세에 대해 저는 전혀 부정적이지 않다. 다만 정책면에서 현실적으로 접근한다면 소득세 등 부담하는 범위를 확장하는 것이 정당화되지 않을까하는 차원에서 호혜성과의 연관을 말한 것이. 노동소득에만 과세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누진과세도 올려야 한다.
호혜성 개념 확장에 대해서는, 교환적 정의란 것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무조건성과 호혜성이 동일해지면 오히려 기본소득에 대한 의미는 거의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호혜성이 어떻게 무조건성이냐에 대해 인지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거기까지는 아직 닿지 못했고, 공부를 확장해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점진적인것 보다 급진적인 것이 오히려 빠를 수도 있다는데 동의한다. 다만 그 과정이 필요한데, 과정을 이야기하다보면 조건이나 이행과정이 나올 수밖에 없다. 청년기본소득을 도입하는 방식도 찬성하고 있고. 어쨌든 기본소득은 베이스로 깔리고, 보편적인 시민연금을 도입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물론 사회보험들을 통폐합하는 문제들도 달려있는데 거기까지는 내가 말하기 어렵다.
곽노완: 투기불로소득에 중과세를 하면 지가나 부동산 가격 폭락하게 되는데, 예를 들어 국민연기금이 최소한 300조원은 넘을 것 같은데, 그 300조원을 사용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토지에서 불로소득이 나오지 않지만 토지와 기업을 공유하면서 더 많은 이윤을 공유할 수 있다.
무상급식도 허황된 것으로 생각되던 것이 어느 순간 많은 지지를 얻게 된 경우다. 기본소득도 굉장히 허황된 주장처럼 들리지만 우리가 솔직하게 이런걸 하겠다고 이야기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알게 되고 물론 비판도 받을 수 있겠지만... 청년 장애인 생태운동 토지정의를 위한 운동 등과의 조우를 위해서 많은 것들을 올해 중에 시도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