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도 더 추운 계절의 축복>
한국이 개나리로 봄잔치를 시작한다면 버밍엄에서는 노란 수선화가 봄을 알리는 첫 신호이다. 상큼한 노란꽃들이 신의 계시를 받고 겨울 늦잠을 자는 온 세상을 깨운다. 우리 동네는 노란 수선화가 대부분이지만 수선화는 역시 흰색이 함께 어우러진 것이 제격이다. 하얀 날개 꽃잎 안 쪽에는 춤추는 봄처녀의 치맛자락 처럼 노란 꽃잎이 아직은 수줍은 꽃술을 감추고 벌들의 유혹을 기다리고 있다.
이맘때 쯤이면, 한국의 텔레비젼에서 흔히 보던 화면들이 그립다. 깊은 산 속에서 계곡 물이 녹아 내리고 한 눈만 뜬 개구리가 덜 깬 다리로 폴짜거리는 모습, 길거리에 만개한 개나리꽃들… 이런 모든 것들이 한국에서 살았을 때는 무심 했었다. 그저, 눈 녹던 지저분한 자리나 봄비에 빨리 쓸려 가기 바라고 겨울 옷 정리와 대청소 할 생각이나 했었지, 봄을 기다리며 따뜻한 볕을 찾아본 적 따위는 없었다. 그러던 내가 수선화를 보며 대화를 시작한 것이다.
삼년 전, 처음 런던땅을 밟았던 해의 첫 여름은 하루 종일 해가 내리 쬐고 고풍스러운 영국 주택의 색이 눈이 부실만큼 날씨가 화창했다. 동네 아이들이 저마다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롤러브레이드와 바퀴달린 의자를 들고 나와 한참을 소리 지르며 놀아댔고 공원과 강가에는 웃통을 벗어던진 남자와 핫팬츠를 걸친 여자들이 자기 안방 뒹굴 듯 공원 한 켠을 메웠다. 갑자기 날이 더워져 급하게 찾아간 대형전자상점에서 선풍기가 품절됬다는 점원의 말을 듣고 돌아서는데, 그가
“선풍기 찾음, 나 한테도 알려 주슈.”
하고 농을 건네 식구들이 다 같이 웃었던 적이 있다. 그 해에 한국의 친척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모! 선풍기 보따리 장사 하자.”,
”외숙모, 한국에서 길거리에 널린 손바닥만한 선풍기 거, 한 만원임 되져?…”
해가며 내년을 다짐하마 했던 내 자신이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바로 그 좋은 날씨가 십년 만에 처음이었다는 사실!
스티브가 한 명언이 이제는 뼈 속 깊이 와 닿는다. 그는 우리가 6년 전, 방글라데시에서 살았을 때, 남편과 같이 일하던 영국인 감독이었다. 어느 날은 읍내에 나갔다가 화려한 수가 놓인 끈달이 실크셔츠가 하도 예뻐 영국에 사는 동생에게 주려고 샀다. 돌아 오는 길에 스티브를 만나 보여주고 어떻냐고 물었더니, 손바닥 만한 그 옷을 들여다 보고는 그가 하던 말.
”오우~노우~.영국은 여름이 1년 중 단, 하루야.”
워낙에 쾌활한 성격에 재밌는 말을 잘 하던 그의 말이 그때는 농담이려니 했었다.
런던에서의 그 좋던 구월이 지나고 시월이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던 겨울. 게다가 지긋 지긋한 겨울 추위가 어느 정도 지나고 나면 봄비랍시고 하염없이 비가 추적거리고 내렸다. 비만 내리면 다행이건만 바람도 장난이 아니다.
‘얘들은 우산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들어.’ 했었는데, 사실은 비바람에 우산이 남아나질 않는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대부분 비를 맞고 다닐 뿐만 아니라, 기나 긴 6개월간 단벌신사들이다. 재질이 다양한들, 색깔이 화려한들, 허구헌날 내려오는 빗물에 옷태가 유지될 리가 없다. 영화 속에서나 보는 버버리 코트 입은 멋진 남녀, 여기선 눈씻고 찾아 볼래도 없다. 대부분 등산복 같은 방수처리된 점퍼나 칙칙한 무채색의 패딩코트를 입는다. 영국제 버버리를 그대로 보고 만들었다는, 한국 홈쇼핑에서 산 남편의 코트도 3년째 주인 얼굴도 못본 쓸쓸한 옷장 늙은이 신세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우산도 흔하지가 않아 몇 정거장을 걸어서 큰 상점이나 가야 살 수 있다. 동네 구멍 가게에서는 팔지도 않는다. 비는 영국인들에겐 오던 안 오던 상관없이 준비도 필요 없고 두려움도 없는 그런 존재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비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 길거리에서 화가 잔뜩 난 영국인 남자가, ‘이런, 거지 같은 날씨…’어쩌구 해가며 궁시렁 거리고 욕하는 모습도 자주 보았다. 그러니,어쩌다 볕이 들면 얼마나 좋아들 하겠는가. 모두 얼굴빛이 화사해 지며 마주칠 때 마다, ‘날씨 좋지요?’ 로 시작되는 인사말들을 주고 받는다.
하루는 브라이언 할아버지께 날씨 좋다고 인사를 했더니,
"금방 또, 흐릴텐데 뭘…"
이렇게 대답을 하시는 것이다. 날씨가 맑으면 좋아하면서도 그들은 이렇듯 들뜨거나 쉽게 흥분하지도 않는다.
11월,12월은 그래도 참을만 하다. 다 똑 같은 겨울이니까. 그런데, 1,2,3월이 지나 4,5월에도 계속되는 겨울 때문에 5월까지도 들여놓지 못하고 옷걸이 한 쪽을 메워야만 하는 겨울외투와의 권태로운 대면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그렇게, 런던에서의 무덤처럼 어둡고 추웠던 겨울을 겪으면서 남편이 하던 말이 있었다.
“꼭 죽을 날 받아놓고 사는 것 같다.”
지금도 날씨 하나 때문에 당장 짐을 싸고 싶은 생각이 불끈 불끈 솟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남편이 잘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고 선택한 영국행 티켓에 모든 것을 걸었던 일년 간의 현실들은 그야말로 영국의 날씨처럼 어둡고 축축해져만 갔다. 십년 만에 처음이라는 화창한 여름이 물러감과 동시에 시작되었던 비의 계절은 그렇게 우리 가족의 미래에 부푼 꿈들을 6개월간을 적시고 지워 갔다. 그 당시, 이 낯선 곳에 와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불안했었는지… 절망처럼 변해갔던 막막한 시간들 속에서 영국행 티켓에 세겼던 비젼들이 남은 데 없이 찟기고 너덜대던 어느 날, 남편은 한국을 돌아 가겠다는 말을 꺼냈다. 삼년 내리 나라를 옮겨다녀 국제미아가 되어버린 큰 아이 때문에 나와 아이들은 남기로 하고 기러기 아빠가 되기를 자청한 남편과 아픈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며칠 후, 기적처럼 남편이 영국 회사로 부터 함께 일하고 싶다는 제의를 받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이듬 해, 4월에 버밍엄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주변에서는 날씨가 더 나쁘고, 기온도 낮다며 걱정들을 했다. 그러나 버밍엄에는 생각지도 않은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경험한 추위에 대비해 옷을 더 껴입고 무장하던 버밍엄에서의 첫 겨울 어느 날, 무겁게 가라앉은 회색구름을 뚫고 내리던 하얀 눈송이들. 나는 어두운 하늘 속에서 희망처럼 세상을 날아 다니던 새하얀 요정들을 조금 더 추운 버밍엄에서 그렇게 만났다.
버밍엄의 겨울을 겪으면서 나는 또 다른 인생의 진리를 깨닫고 있다. 그것은 바로, 겨울이 없이는 봄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조금 더 따뜻한 세상이 가져다 준 계절은 봄,여름,가을,겨울…이 아니었다. 적막하던 런던의 계절엔 봄도 가을도 없는 겨울,겨울,겨울과 단 하루의 여름 뿐이었다.
2도 더 낮은 계절의 골짜기에 갇힌 나의 겨울은 더 이상, 봄도 가을도 침범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 여름 어느 응달에서 떠나지 않고 불던 차가운 바람도 함께 가져가 버렸다. 그 계절의 골짜기에서 나는 런던에서도 버리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하얗게 덮인 눈 속에 파묻기 시작했다. 허영에 쌓였던 혜안의 꽃씨를 드러내고 새싹을 뒤덮던 자존심이란 껍데기를 걷어내기 시작하였다. 물론, 껍데기가 걷힌 첫 해의 봄도 시렵긴 마찬가지였다. 첫 출발이 의례 그러하듯이, 다시 시작된 새 삶 앞에 우리는 걸음걸이 조차 불완전한 나약한 돌쟁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아이들은 무럭 무럭 잘 자라고 있다. 나 또한, 그러할 것이라고 믿는다.
수선화에게 지난 날을 떠 올리며 한참을 주절대고 있는데, 큰 아이가 다가왔다. 그리고 수선화를 가리키며 무슨 꽃이냐고 묻길래, 나르시스의 전설을 이야기해 주었다. 좀 듣는 듯 하더니 다른 나뭇가지로 눈을 돌리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
“와! 엄마,레이디 버드야! 원,투,쓰리,포… …일곱 개다! 우리 선생님이 레이디 버드가 점이 일곱개면…봄이래!”
나는 딸 아이의 말을 통해, 이 사실을 가르친 영국인 선생님의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느껴졌다. 무당 벌레를 보고 좋아하는 아이들 머리 위로 겨우 내 기다리던 파란 하늘이 군데 군데 구름을 거느리고 펼쳐져 있다.
언젠간 나도 이 곳 영국인들처럼 초연하게 비를 맞이하고 묵묵하게 파란 하늘을 간직할 수 있게 될까? 저 파란 하늘도 곧 회색 구름으로 뒤덮힐 것이다. 그러나, 아주 잠깐이었다 할 지라도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