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아래글은 원효대사의 행적을 중심에 놓고 쓴 글은 아니어서 충분하지는 않지만 일단 참고해주시기바라며 사실 혜초에 대한 국내 사료는 전무하지만 원효에 대한 사료는 꽤 있는 편으로 알고 있습니다. 단지 '당항성'의 정확한 위치가 현재 화성의 남양인지 포승인지에 대한 논란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긴합니다.
왜 지금 평택에서 ‘실크로드’란 말인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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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보다 약 1세기 전의 인물인 원효대사에 대한 행적은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고 한다. 원효와 의상대사는 당나라에 유학을 가기위해 압록강을 건너 요동까지 갔다가 고구려 병사에게 첩자로 몰려 갇혀 있다가 풀려나 신라로 되돌아온다. 10년 후 원효와 의상은 다시 육로가 아닌 해로를 통하여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다. 원효대사는 도중에 심한 비바람을 피해 한밤중에 무덤에서 자다가 목이 말라 물을 마셨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해골바가지의 물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마음밖에 법이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라며 득도하고 당나라로 가지 않고 신라로 되돌아간 곳이 ‘남양’이라고 한다.
백제 땅이었던 평택항 일대(고서에는 남양-현재의 포승지역도 예전에는 남양이라 불림)는 상당한 규모의 해상세력이 형성되어 항구로 활용되었는데 신라는 대중국교류가 가능한 서해의 항구를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여 6세기 중반에 이 지역을 장악하고 국제교역항으로 탈바꿈시켜 564년 신라가 독자적으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 한다.
즉 중국과 교역을 하기위해 평택항 일대를 신라가 차지한 6세기 중반이후 부터는 삼국간 분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힘들고 위험한 육로보다는 왕래와 교역이 발달한 해로와 국제교역항인 평택항 일대를 거쳐 이루지게 된다. 신라시대에는 서라벌(경주)에서 중국으로 가는 물자와 사람은 평택을 거쳐야만 했던 것이다.
약 1세기 후에 더구나 어린 나이의 혜초 역시 육로보다는 대중국교역이 활성화된 여기 평택항 일대를 거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평택 원효대사 오도성지 학술조사 보고서 참조)
왜 지금 평택에서 ‘실크로드’란 말인가? (3)
[470호] 2009년 05월 13일 (수) 00:00:00 평택시민신문 webmaster@pttimes.com
원효와 의상대사가 당나라로 가기위한 경로는 몇 가지 가설이 있지만 경주-상주-보은-청주-직산-당항성(평택항)으로 이어지는 길이 가장 빠르고 편한 길로서 가장 유력한 경로라 한다. 여기서 당항진(黨項津)을 지금의 당진(黨津)으로 알고 있는 이도 있으나 잘못된 억측이며 고서에 의하면 남양(지금의 현덕, 포승, 남양일대)의 어느 포구로서 현재의 화성 남양의 당성으로 추정되기도 하였지만 당성의 발굴조사 결과 신라가 이 일대를 장악한 6세기 중반의 유물들이 발견되지 않아 설득력을 잃고 있다. 또한 원효가 배를 타기위해 도착하여 득도하였다는 직산(?山)은 발굴조사나 고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지금의 성환읍 근처의 직산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신라시대에는 다른 지명(蛇山)으로 불리웠고 고려 이후에 직산(稷山)으로 개명되었기 때문에 논리적 타당성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심복사 주변의 현덕면 황산리의 ‘직산장터(안중장터)’, 안중읍 대반3리가 ‘직산말’이라 불리웠고, 황산리 앞에 까지 배가 드나들어 수많은 왕래가 있었다(평택의 마을과 지명이야기, 김해규)고 하며 신라시대의 것으로 밝혀진 현덕의 덕목리 산성, 심복사의 석조비로자나불상은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몇 가지의 설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경주에서 당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안성천 주변과 현덕(신왕나루, 구진나루 등), 평택항 일대를 거쳐 간 것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여러 가설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전문 학자들과 지역의 향토사가들에 의해 좀 더 체계적인 조사와 학술연구를 통하여 확고한 이론을 정립을 해야 할 것이다.
깊이 있는 학술연구의 필요성은 우리 지역의 역사를 밝히는 것에 더 나아가 신라가 평택항 일대를 장악한 6세기 중반이후부터 장보고가 청해진(완도)을 거점으로 해상왕국을 이루기 이전까지(장보고 이후 해상활동의 양상이 바뀐다고 함) 가장 활성화된 국제교역항인 평택항 일대를 쟁취하기 위한 삼국간의 처절했던 역사, 즉 한반도의 역사를 밝힐 필요가 있다. 더구나 이 기간이 우리가 관심을 갖는 원효, 혜초라는 인물이 평택 땅을 밟은 시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역사는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역사학자 E. H. 카의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끝임 없는 대화‘라는 말의 의미는 현재의 시대적 상황에 따라 과거가 다르게 해석된다는 의미에 더하여 과거역사와 선인들의 개척정신에서 우리의 미래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이며, 그랬을 때만이 죽어있는 역사가 아닌 살아서 생동하는 역사가 된다는 것이다. 현 시대의 요구가 역사인식의 출발점이기 때문에 과거의 사실 자체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것이 역사적 사실의 가공이나 왜곡이 인정될 수 없다는 것 또한 자명한 진리이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혜초가 평택에서 당나라로 출발했다는 역사적 사실 자체는 덜 중요할 수도 있다. 혜초나 원효에 대한 연고를 주장할 수 있는 지역이나 도시가 얼마든지 더 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지역보다 먼저, 왜 주장하느냐 하는 것이다.
좁은 틀에서 머물지 않고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 이 세계와 삶을 함께 하였던 선인의 개척정신과 문명교류, 국제교류의 대명사인 실크로드라는 이미지를 평택시와 접목하고 평택항이 실크로드의 출발지였다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선점함으로써, 국제화 중심도시를 지향하는 평택시와 평택항의 브랜드로 삼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그런데 국제교류, 국제화 중심도시가 된다는 것은 무엇이고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교통수단이나 통신기술이 열악한 과거에는 중국 더 나아가 천축이나 대식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설혹 알았다 해도 거기서 일어난 일을 알려면 몇 달, 몇 년의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크로드나 혜초가 중요하게 부각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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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의견 교환이 끝났기에 지루한 글은 모두 지웠습니다.
원효길 찬성 합니다.
현재 진행중인 평택의 섶길 찾기는 크게 문화길, 역사길, 트레킹코스 , 3분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알고있으며
저는 원효길 이라고 하되, 역사길에 넣지 않고, 문화길에 넣는것이 좋겠다는 생각 입니다. 왜냐하면요, 그곳이 옛날에도 지금도 국제 교역이 이루어졌고 이뤄지고 있는 곳이기에 원효길을 문화길에 넣어면 원효라는 역사인물로 인하여 길도 역사성이 있어지고, 원효도 자연스럽게 그 지역과 연관 지을수 있기 때문 입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글이 억망입니다 한줄 쓰면 전화오고 손님 찾아오고 .
그런데 장쌤과 나만 할일 없나 왜 의견 말하는 사람이 이렇게 없어요 ㅎㅎ
지금 베아트리체에 손남들한테 불려 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