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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 허목 선생이 지은 서애 선생 유사
서애(西厓) 유사(遺事)
공은 휘가 성룡(成龍)이요, 자는 이현(而見)이요, 성은 유씨(柳氏)이다. 조상은 풍산현(豊山縣) 사람이니 군수(郡守) 공작(公綽)의 손자이며, 관찰사 중영(仲郢)의 아들이다.
젊어서 총명 박학하여, 처음 이 선생(李先生 이황(李滉))을 도산(陶山)으로 찾아가 뵈었을 때, 이 선생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하늘이 낸 사람이다.”
하였다. 23세에 박사 제자(博士弟子)가 되고 3년 만에 대과(大科)에 선발되어 승문원 정자에 보직되고, 다시 뽑혀서 한원(翰苑)에 들어갔다.
선조(宣祖) 2년(1569)에 상소하여 인종(仁宗)을 연은전(延恩殿)에 부(祔)하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말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경사(京師)에 갔다. 공이 현명하고 예의에 익숙하니, 태학(太學) 제생들이 모여 와 구경하는 자가 수백 명이었다. 공이 본조(本朝 명(明) 나라를 가리킴)의 명유(名儒)가 누구인가를 물으니, 서로 돌아보다가 왕양명(王陽明)과 진백사(陳白沙 진헌장(陳獻章)) 두 사람이라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백사는 도(道)를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하였고, 양명은 선학(禪學)을 주장하였으니, 모두 설 문청(薛文淸 문청은 설선(薛瑄)의 시호)의 정학(正學)만 못하오.”
하니, 한 태학생이 앞으로 나와서,
“선비들이 학문의 방향을 잃은 지가 오래인데 공이 능히 이를 바로잡아 주니 오도(吾道)를 위해 다행한 일이다.”
하였다. 서열에 따라 줄을 설 때, 승려와 도사(道士) 두 부류를 인도하여 앞줄에 세우자 공이,
“관디의 열이 비록 품계가 있기는 하지만 도석(道釋)을 앞에 세워서는 안 되오.”
하자, 홍로관(鴻臚官)이 크게 부끄럽게 여겨 곧 물려서 뒷줄에 세우니, 정중(廷中)에 있던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
그후, 옥당(玉堂)에 들어가 항상 경악(經幄)에서 임금을 모시니 상이 중히 여겼고, 얼마 후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이조 좌랑을 거쳐 다시 수찬에 제수되었다. 고(故) 재상 이준경(李浚慶)이 임종할 때, 차차(箚子)를 올려 조정의 붕당에 관한 일을 말하고,
“후일에 어찌할 수 없는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응교 이이(李珥)가 노하여 상소하기를,
“그가 질투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때 이이를 중용(重用)하였으므로 여론이 대부분 그를 따라서 이준경의 관작을 삭탈할 것을 논의하였다. 공이 옳지 못한 일이라 하여,
“대신이 임종할 때 올린 말이 옳지 않으면 그것을 변론할 따름이니 죄주기를 청한다면 조정에서 대신을 대우하는 체통을 잃게 된다.”
하니, 그 의론이 중지되었다.
정축년(1577, 선조10) 인성대비(仁聖大妃 인종(仁宗)의 비)가 승하하자, 예조에서 마땅히 기년상(朞年喪)을 행해야 한다고 하자 공이,
“명종(明宗)은 인종(仁宗)에 대하여 계통의 순서로 볼 때 부자(父子)의 도가 있으니, 상께서는 마땅히 적손(嫡孫)으로서 아버지가 죽은 경우에 조모(祖母)를 위하여 중복(重服)을 입는 예를 따라야 합니다.”
하고 강력히 주장하니, 상이 마침내 공의 의론을 따랐다.
기묘년(1579, 선조12) 직제학에서 밀직(密直)에 승진되었다가 얼마 후 이조 참의로 개임되었다.
경진년(1580, 선조13) 부제학으로 전임되었다. 상소하여 귀양(歸養)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마침 상주 목사(尙州牧使)가 결원이었으므로 특별히 그곳에 제수하고 상이 말하기를,
“열읍(列邑)으로 하여금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다음해에 부제학으로 소환하였다.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자 상소하여 10조항의 일을 올렸는데, 첫째 천심(天心)에 보답할 것, 둘째 궁금(宮禁 궁중)을 엄하게 할 것, 셋째 규모를 수립할 것, 넷째 조정의 기강을 정비할 것, 다섯째 인재를 등용할 것, 여섯째 요행의 문을 막을 것, 일곱째 염치의 기풍을 배양할 것, 여덟째 간사한 것을 그치게 할 것, 아홉째 민생(民生)을 보호할 것, 열째 선비들의 기풍을 진작시킬 것 등이었다.
임오년(1582, 선조15) 대사간을 거쳐 우부승지에 제수되고, 그후 특별히 도승지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조사(詔使)가 장차 도착할 것이므로 그를 안내하고 의전(儀典)을 돕는 일에 적합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조사가 도착하여, 상 앞에서 공의 예절이 매우 엄숙함을 보고 칭찬하고 어질게 여겼다. 조사가 돌아간 후 상이 금포(錦袍)를 내리고 특별히 대사헌에 임명하였다.
계미년(1583, 선조16) 이탕합(尼湯哈)이 국경을 침범하였다. 공이 부제학으로서 변방의 방위책 5조항을 올렸는데, 첫째 화(禍)의 근원을 막을 것, 둘째 싸우고 지키는 규정을 정할 것, 셋째 오랑캐의 정세를 살필 것, 넷째 군량을 충분히 보급할 것, 다섯째 황정(荒政)을 닦을 것 등이었다. 당시에 조정의 의론이 크게 갈라져 서로 공격하였는데, 이 문제에 이르러 더욱 심하였다. 공은 조정에 있고 싶은 생각이 없고 또 노모가 계시므로 귀양(歸養)할 것을 청하였다. 가을에 함경도 관찰사와 대사성에 연이어 임명되었으나 모두 노모가 계시다는 이유로 사양하였고, 겨울에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또 상소하여 극력 사양하니, 상이,
“이 사람이 어질고 재주가 있으나 노모로 해서 부를 수가 없다.”
하였다.
이듬해에, 부제학으로 소환하니 연거푸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예조 판서로 승진 임명하였으나 또 극력 사양하자, 상이,
“옛사람에 그 신하를 신하로 대우한 자도 있고 벗으로 대우한 자도 있으며 스승으로 대우한 자도 있는데, 나는 경(卿)을 벗으로 대우한다.”
하였다. 이때 효제(孝悌)와 예양(禮讓)을 강조하여 관학(館學)의 제생(諸生)들을 권유하고 향약(鄕約)을 전국에 반포하였다.
상이 명하여 부마(駙馬)를 선택하되, 이성(李姓)도 피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는 마음에 둔 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이 말하기를,
“예(禮)에 ‘동성(同姓)에게는 장가들지 않는다.’ 한 것은 혐의를 피하기 위한 것입니다. 유총(劉聰)이 유은(劉殷)의 딸을 받아들여 아내로 삼은 것은 그 조상의 계통[所出]이 전혀 다르다고 해서였는데, 이에 대하여 《강목(綱目)》에는 ‘개나 양처럼 뒤섞였다.’ 하였고, 당 소종(唐昭宗)이 이무정(李茂貞)의 아들을 부마로 삼았으나 이는 권신에게 눌려서 부득이 그렇게 한 것이니, 후세에 본받을 일은 못 됩니다.”
하니, 드디어 시행되지 않았다. 서익(徐益)이 상소하여 남의 말을 빌려 공을 지적하여,
“큰 간신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어찰(御札)을 내려,
“그 사람을 보고 그의 말을 들으매 사람을 감복하게 하는데, 어느 대담한 자가 감히 이런 말을 하는가?”
하였다. 공이 다섯 번이나 상소하여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조정을 떠날 뜻이 더욱 굳어져서 귀향할 것을 청하고, 연이어 상소하여 관직을 면직해 줄 것을 청하였다. 여러 번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무자년(1588, 선조21) 형조 판서로 부르고 다시 대제학을 겸임하게 하였는데 연이어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기축년(1589, 선조22) 대사헌으로 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다. 겨울에 정여립(鄭汝立)의 역모 사건을 알리는 보고가 있었다. 옥사가 일어나자 사대부들이 많이 연루되었는데, 공의 이름 또한 죄인의 편지에서 나왔으므로 면직해 주기를 청하고 이어 상소하여 스스로를 탄핵하니, 상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특별히 이조 판서를 제수하였다. 얼마 후, 우의정을 제수하고 수충익모광국 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의 호를 내리고,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에 봉하였다. 한번은 상이 조용히 여립(汝立)의 일을 말하고, 이어서 조정의 신하 중에 그의 간악함을 미리 안 자가 누구인가를 물었다. 공이,
“신의 망우(亡友) 이경중(李敬中)이 일찍이 그를 등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였는데, 도리어 배척을 당하여 불우하게 죽었습니다.”
하자, 상이,
“배척한 자가 누구인가?”
하므로,
“신이 잊었습니다마는 사관(史官)의 기록에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사관에게 물어보니 장령 정인홍(鄭仁弘)과 지평 박광옥(朴光玉)이라 하므로 명하여 두 사람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정인홍이 당시에 중명(重名)이 있었는데 모함하는 것이라 하여 매우 화를 냈다.
신묘년(1591, 선조24) 명하여 이조 판서를 겸임하게 하니 공이 사양하면서,
“옛날에도 이런 일이 없었으니, 후일 혹 국권(國權)을 천단하려는 자가 신의 전례로 구실을 삼게 된다면 국가의 무궁한 해가 신에게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얼마 후 좌의정에 승진되었다.
황윤길(黃允吉)이 일본에 사신 갔다가 돌아왔는데 그 국서(國書)에,
“군대를 거느리고 명(明) 나라에 들어가겠다.”
하는 구절이 있었다. 공이,
“마땅히 자세히 명 나라에 주달(奏達)해야 한다.”
하니, 영의정 이산해(李山海)가,
“만일 명 나라에서 왜(倭)와 교빙(交聘)하였다 하여 우리를 문책한다면 무슨 말로 변명하겠는가? 그러니 숨기느니만 못하다.”
하자, 공이,
“사신의 왕래는 어느 나라고 다 있는 일이다. 성화(成化) 연간에, 일본이 우리에게 ‘중국에 공물을 바치도록 주선해 달라.’ 하였을 때, 우리가 곧 주달하니 칙서를 내려 그 뜻을 받아들였다. 그 전례가 이러한데 이제 보고하지 않았다가 만일 왜가 정말 중국을 침범할 의도가 있고, 중국이 다른 나라를 통하여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반드시 우리를 깊이 의심할 것이고 대의(大義)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하고, 곧 상에게 아뢰고 중국에 자세히 주달하였다. 이때, 복건(福建) 사람이 일본에 잡혀 있으면서 이미 일본의 정세가 이러함을 보고하였고, 유구국(流球國)에서도 사신을 보내어 보고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만 사신이 오지 않으므로 중국에서는 과연 우리나라가 일본과 내통하여 두 마음을 품고 있지 않나 의심하다가 우리 사신이 도착하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후한 포상을 내렸다.
상이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천거하게 하였으므로, 공은 권율(權慄)과 이순신(李舜臣)을 천거하였다. 이들은 하급 관료로 별로 명망이 없었다. 이순신은 일찍이 북변(北邊)의 만호(萬戶)로 재직할 때, 오랑캐를 토벌하여 공이 많았으나 추천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10년이 되도록 승진되지 않았는데, 이때 정읍 현감(井邑縣監)에서 바로 발탁하여 호남 수군좌절도사(湖南水軍左節度使)를 제수하였다.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은 상이 중용(重用)하는 신하였다. 공이 이일을 먼저 변방에 내보내어 적의 침입에 대비할 것을 청하니, 병조 판서 홍여순(洪汝諄)이 이일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임진년(1592, 선조25) 일본이 대거 침입하여 부산ㆍ동래(東萊)를 함락하니, 여러 성이 크게 무너져 다시 믿을 만한 곳이 없게 되었다. 이러한 보고가 이르자 내외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공이 상에게 아뢰어, 홍여순이 병권(兵權)을 잡고 있으면서 사태가 위급한데도 대처할 바를 모르므로 장사(將士)들의 원망이 많다 하여 그를 체임시켜 김응남(金應南)으로 대신하고, 또 계(啓)를 올려, 이일을 순변사(巡邊使),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左防禦使), 조경(趙儆)을 우방어사(右防禦使)로 삼아 세 길로 나누어 왜적을 막게 하고, 유극량(劉克良)과 변기(邊璣)를 조방장(助防將)으로 삼아 유극량은 죽령(竹嶺)을 지키고 변기는 조령(鳥嶺)을 지키게 하였다.
신립은 이일이 고립된 군사를 이끌고 난을 막으러 갔다고 하여 자신이 가서 후원하겠다고 하였으므로, 상이 명하여 도순변사(都巡邊使)를 삼고 출발할 때에 칼을 하사하면서,
“여러 장수 중에서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참수하라.”
하고, 공에게 병조 판서를 겸임하여 병사(兵事)를 처리하게 하였다. 대간이 대신으로 체찰사(體察使)를 삼아 제장을 검독(檢督)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공이 마침내 체찰의 명을 받게 되었다.
공이 출발하기 위하여 군사를 모집하여 80인을 얻었으나, 신립은 군사를 모집하니 한 사람도 응하는 자가 없었으므로, 화난 얼굴로 공을 뵙고 부관(副官)이 되어 따르기를 청하였는데, 무사(武士) 중 자기를 따르는 사람이 없으므로 화를 낸 것이다. 공이 곧 모집한 80인을 넘겨주니 신립이 출발하였으나 적은 이미 상주(尙州)를 함락하고 이일은 패주하였다. 신립이 충주(忠州)에 도착하니 적은 이미 고개를 넘어왔으나 신립이 노하기를 잘하였으므로 말해 주는 자가 없어서 사태가 위급하게 된 후에야 출병하여 강가에 이르러 달아나려 하였으나, 적이 그 틈을 타서 함몰시켜 탈출하지 못하였다.
이때 사복시의 말을 관리하는 자가 수상(首相)과 귓속말을 하고 갔다가 다시 오니, 보는 사람들이 의심스럽게 생각했다. 도승지 이항복(李恒福)이,
“말을 영강문(永康門) 안에 대기시켜라.”
고 쓴 것을 공에게 보인 뒤에야 안에서 출수(出狩 파천(播遷))할 뜻이 이미 결정되었음을 알았다. 이에 대간에서 수상이 나라를 오도(誤導)한 죄를 탄핵하고, 종실과 대신들은 모두 굳게 지키고 떠나지 말 것을 청하였으나 신립이 패하였는데 급보(急報)하는 자가 없자, 상이 드디어 서행(西行)하였다. 공이 상에게 왕자들을 여러 도에 나누어 파견하여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공에게 명하여 서울을 지키게 하니, 이항복이 계(啓)를 올려서,
“상이 서쪽으로 가서 국경까지 이르면 중국의 경계입니다. 유성룡은 민첩하고 널리 사리에 통하며 말솜씨에 능하여 외교에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오니 수행하게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고 이양원(李陽元)에게 서울에 남아 지키라 하였다.
상이 임진(臨津) 나루에 이르러서, 여러 대신을 불러 같은 배를 타고 건널 때, 상이 공을 돌아보면서,
“다행히 국가가 중흥된다면 마땅히 경의 힘을 빌려야 할 것이다.”
하였다. 동파역(東坡驛)에 머물렀는데, 대신 중에 이산해(李山海)ㆍ윤두수(尹斗壽)와 공을 불러 모시게 하고, 상이 가슴을 치면서,
“사태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장차 어느 곳으로 가겠는가?”
하니, 모든 사람들이 다 눈물을 흘려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이항복이,
“의주(義州)에 진주(進駐)하여 사세가 어렵게 되면, 황제에게 호소하는 것이 옳을 줄 아옵니다.”
하자, 공이 옳지 않다 하며,
“거가(車駕)가 국경을 벗어나면 조선은 우리의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
하였다. 이항복이 그래도 힘써 주장을 하니, 상이,
“내부(內附)하는 것이 또한 나의 뜻이다.”
하였다. 공이 또 옳지 않다 하며 격한 음성으로,
“동북(東北) 여러 도의 병마가 아직 온전하고, 호남의 의병들이 대대적으로 기병(起兵)하는 터에, 어찌 갑자기 이런 일을 의론한단 말입니까?”
하고 말한 뒤에야 이항복이 비로소 깨닫고 잠잠해졌다. 공이 물러 나와서 이성중(李誠中)에게 말하기를,
“나를 위하여 이 승지에게 이렇게 말해 주시오. ‘어쩌면 말을 이다지도 경솔하게 하는가? 옷을 찢어 발을 싸매고 길가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아녀자나 환관의 충성에 불과하다. 인심은 한번 흩어지면 다시 합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였다.
개경(開京)에 이르러서 이산해가 정승에서 파면되고 공이 영의정이 되었다. 신잡(申磼)이 상에게 아뢰기를,
“산해가 정승에서 파면되었는데 아무개가 혼자 면한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여, 공이 그날로 정승에서 파면되었다.
평양에 이르러 다시 이산해를 귀양 보낼 것을 의론하면서 공도 그와 죄가 같다 하여 함께 죄를 논하려 하니, 이항복이 부제학 홍인상(洪麟祥)에게,
“이것은 백대(百代)에 전할 만한 명망이 달려 있는 일이오. 공이 만약 이 일에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제부터 당신과 교제를 끊겠소.”
하니, 홍인상이,
“좋습니다. 내 뜻도 같습니다.”
하고는 드디어 들어가 큰소리로 말하니, 그 의론이 중지되었다. 이때 왜적은 이미 평양에 육박하고 있었다. 상이 공을 서용하였는데, 중국에서 온 장사(將士)를 응접하는 일만 맡고 병사(兵事)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일이 상주에서 패하여 산골짜기에 몸을 숨기며 뒤따라 행재소에 이르렀다. 이일은 평소에 위명(威名)이 있었으므로 비록 패하여 도망해 왔으나, 그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기뻐하였다. 이일이 도착하자 공이 좌상 윤두수에게 급히 그를 보내어 강탄(江灘)을 지키게 하였다. 이때 거가(車駕)가 피난하여야 한다는 의론이 있었는데, 공이 옳지 못하다 하며,
“앞에는 큰 강이 막혀 있고 인심이 이산되지 않았으니, 굳게 지키는 것이 제일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중국 군사가 우리를 도와서 적을 제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고, 윤두수도 성을 지키는 것이 편함을 말하였다. 성내가 이미 요란해지자,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어 먼저 성을 나가니, 성내의 남녀들이 모두 노하여 욕을 하며,
“재상이 후한 녹봉만을 탐내어 국사를 그르치고, 또 우리 백성들을 죽게 만들었다.”
하고, 다투어 무기를 들고 난동을 부려서 신주가 길바닥에 떨어졌다.
난동을 부리는 자들이 궁문까지 이르니, 조정에 있는 자들이 모두 기립하여 얼굴빛이 변하였다. 공이 계단 위에 서서 부로(父老)들을 불러 타이르기를,
“너희들이 힘을 다하여 성을 지키고 떠나지 않는 것은 진실로 충성스럽다 하겠으나, 궁문에서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된다. 중지하지 않는 자는 용서하지 않으리라.”
하니, 난동을 부리던 자들이 무기를 버리고 사죄하고는 흩어졌다. 이항복이 감탄하여,
“동파역(東坡驛)에서 일을 아뢰었을 때, 유 상국(柳相國)이 나에게 경솔히 말한다고 책망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나는 이를 깨닫지 못하였으나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니 그의 선견지명이 사람을 감복시킬 만함을 알았다.”
하였다. 거가가 떠나려 할 때, 의론하는 자들이 대부분 북쪽으로 가는 것이 편리하다고 하니 공이 굳이 다투어 말하기를,
“상이 서쪽으로 행차한 것은 본래 중국의 도움을 받아 회복을 도모하고자 해서였다. 이제 구원을 청해 놓고 우리가 깊이 북관(北關)으로 들어가면 의리상 옳지 못하고, 북쪽으로 갔다가 적에게 길이 막혀서 형세가 궁하여 더 갈 곳이 없게 되면 북쪽 오랑캐 나라로 갈 것인가. 이보다 잘못된 계책이 없다.”
하니, 상이 드디어 영변(寧邊)으로 나갔다. 의주에 이르러 전수(戰守)에 대한 열 가지 계책을 올렸다.
이때 중국에서는 우리나라와 일본이 내통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요동(遼東)에서 보낸 공문에 우리나라를 책망하는 구절이 있었다. 공이 상소하여,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의심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 데다가 또 우리에게 일곱 가지 실책이 있으니, 난리에 임하여 급히 보고하지 않은 것이 첫째요, 일찍 군사를 청하지 않은 것이 둘째요, 중국에서 우리를 염탐하러 보낸 군사들을 곤핍(困乏)하게 해서 돌려보낸 것이 셋째요, 이미 군사를 청해 놓고 군량이 없는 것이 넷째요, 중국인이 우리에게 향도(嚮導)를 요구하는데 한 명도 앞세울 군사가 없는 것이 다섯째요, 승여(乘輿)가 머무르는 곳에 호위의 방비도 없이 평일과 같이 태연한 것이 여섯째요, 나라의 형세가 위급한데도 기상이 느리고 일이 대부분 제때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일곱째입니다. 이것이 모두 그들의 의심을 사는 것이오니, 청컨대 해사(該司)로 하여금 때에 맞춰 속히 명백히 보고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하였다.
이때 북로(北路)가 이미 함락되자, 반민(叛民)들이 왕자와 신하들을 포박하여 적에게 항복하였다. 7월에 부총병 조승훈(祖承訓)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왔다. 상이 공의 병이 위독함을 염려하여 윤두수에게 군량에 관한 일을 맡아보게 하니, 공이 스스로 힘쓸 것을 청하여 백성을 효유하고 세 고을의 곡식 수천 석을 풀고 또 남방에서 배를 실어 온 곡식이 도착하니 관곡(館穀 대접할 숙소와 식량)과 공구(供具)가 갖추어졌다. 조승훈이 평양을 공격했으나 불리하여 후퇴하고, 공은 그대로 안주(安州)에 머물러 백성을 진무(鎭撫)하면서 후속 부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12월에 관서 도체찰사(關西都體察使)에 제수되었다.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정병 4만을 거느리고 안주에 도착하였다. 공이 만나기를 청하여 평양 지도를 가지고 형세를 설명하니 제독이 크게 기뻐하면서,
“적이 내 눈앞에 있는 것 같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우리 측 군사로서 적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적의 후한 뇌물을 받고 우리의 정보를 염탐 보고한 자가 있어서 우리의 실정을 적이 모르는 것이 거의 없었는데, 공이 첩자의 우두머리를 잡아 심문하여 그의 무리 수십 명을 잡아 모두 참수하였기 때문에 제독의 군사가 대대적으로 도착하였으나 적은 모르고 있었다. 제독이 우리 군사를 소집하여 도합 6만 명으로 정월에 평양을 탈환하였다. 적이 대패하여 소서행장(小西行長)ㆍ종의지(宗義智)ㆍ현소(玄蘇)가 급히 잔병을 수습하여 밤을 타서 달아났다. 공이 해서(海西)의 여러 장수에게 그들이 돌아가는 길에서 맞아 그 뒤를 밟게 하니, 모두 출병하지 않고 이시언(李時言)만이 그 뒤를 쫓았으나 그 또한 군사가 적어서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니, 적이 지나가 버렸다. 상이 공을 명하여 충청ㆍ경상ㆍ전라도의 도체찰사를 삼았다.
제독이 진격하여 파주(坡州)에 이르렀을 때, 부총병 사대수(査大受)가 적을 추격하여 벽제(碧蹄)에서 싸우다 약간 불리하다는 보고를 받고, 1천여 기를 이끌고 달려갔다가 패하자 돌아서서 곧장 개성(開城)으로 향하려 하므로, 공이 만류하며,
“대군이 한번 퇴각하면 적의 기세가 더욱 강해질 것이며 원근(遠近)의 민심이 놀라고 두려워하게 될 것이니, 잠시 머물러 있으면서 틈을 보아 움직이도록 하십시오.”
하였다. 제독이 거짓으로 답하여,
“좋소.”
하고는, 즉시 말에 올라 돌아서서 개성으로 가니, 모든 진영도 다 퇴각하였다. 제독이 성언(聲言)하기를,
“청정(淸正)이 함흥으로부터 장차 평양을 습격할 것이니, 급히 군사를 돌려서 구원해야 한다.”
하고, 임진(臨津) 남쪽에 있는 우리 군사에게 먼저 강을 건너가 막게 하였다. 공이 종사관 신경진(辛慶晉)을 보내어 제독을 만나 후퇴해서는 안 되는 다섯 가지 이유를 말하게 하였는데, 첫째 선왕의 분묘가 모두 기전(畿甸)에 있는데 적지(賊地)가 되게 되니 도의상 버리고 갈 수 없고, 둘째 피난 가고 남아 있는 백성들이 왕사(王師)가 적을 토벌해 줄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이제 군사가 퇴각하였다는 소문을 들으면 다시 뜻을 굳게 가지지 못하여 서로 이끌고 적에게 귀순할 것이요, 셋째 우리의 장사(將士)들이 왕사에 의지하여 복구할 것을 도모하고 있는데 군사가 한번 후퇴하면 인심이 모두들 원망하고 분하게 여겨 흩어져 갈 것이요, 넷째 우리나라의 영토는 한 치의 땅이라도 버릴 수 없으며, 다섯째 군사가 후퇴한 후에 적이 그 뒤를 타서 공격한다면 임진강 이북도 보지(保持)할 수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제독이 잠자코 있자, 여러 장수들이 제독의 뜻을 알아차리고 군량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군사를 돌리기를 청하였다. 제독이 노하여 공과 호조 판서 이성중(李誠中), 우감사(右監司) 이정형(李廷馨)을 불러서 뜰아래 꿇어앉히고 꾸짖으므로 공이 임시방편으로 사과하고 이윽고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니, 제독이 후회하는 빛을 띠고 짐짓 노한 체하고는 그의 휘하 장수들에게,
“적을 멸하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겠다.”
하니, 여러 장수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였다. 제독이 부총병 장세작(張世爵)에게 공을 만나 위로하고 병사(兵事)를 의론하게 하였다.
호남 순찰사 권율(權慄)이 정병 수천을 거느리고 왜적을 행주(幸州)에서 무찔렀다. 제독이 막 왜와 연화(連和)하려 하고 있었는데, 싸움에 이겼다는 보고를 받고 크게 놀라서,
“권가군(權家軍)이 이겼는가.”
라고 외쳤으나, 마음으로는 사실 그를 꺼렸다. 공이 권율의 군사에게 명하여 순변사(巡邊使) 이빈(李薲)과 함께 파주에 모여 험고한 지대에 의거하여 지키게 하고, 방어사(防禦使) 고언백(高彦伯)ㆍ이시언(李時言), 조방장(助防將) 정희현(鄭希玄)ㆍ박명현(朴名賢)으로 하여금 여러 의병들과 함께 좌우로 나누어 요해처를 지키고 출몰하면서 적을 공격하게 하고, 수군(水軍) 장군 이빈(李蘋)ㆍ정걸(丁傑)을 불러서 서호(西湖)에 주둔하여 적세를 분리시키게 하니, 의병도 또한 수군을 이끌고 도착했다. 왕필적(王必廸)에게 글을 보내어,
“적이 이제 험한 곳에 응거해 있어서 쉽사리 공격할 수 없으니, 대군은 진격하여 파주에 이르러 적의 뒤를 밟고, 남쪽 병사로서 날래고 용기 있는 자를 선발하여 한강 남쪽으로 나아가 적이 뜻하지 아니한 틈을 타서 모든 적의 주둔지를 공격하면, 성안의 적이 돌아갈 길이 막혀 반드시 용진(龍津)으로 달아날 것이니, 이때 대군으로 습격하면 단 한 번에 적을 소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왕필적이 크게 기뻐하여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어 적의 형세를 살펴보니 성안에 있는 적은 아직도 강하였으나, 나머지는 모두 지쳐서 약하여 쉽게 격파할 수 있을 듯싶었다. 그러나 제독은 북방의 장수이므로 남방의 군사가 공을 세우는 것을 꺼려 그 계획을 막고 실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사대수(査大受)가 공에게 알리기를,
“적이 현재 사ㆍ유(査柳 사대수와 유성룡) 두 장수를 잡으려는 계획이 있으니, 퇴진(退陣)하여 스스로 대비하고자 합니다.”
하였으므로 공이,
“적은 대군이 뒤에 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다만 빈말로 우리를 두렵게 하려는 것일 뿐이니, 반드시 경솔하게 침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이동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답장을 하니, 기뻐하며,
“적이 비록 침범해 온다 하더라도 나는 의리상 혼자 갈 수는 없다.”
하였다.
이때 전쟁이 이미 오래되어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였는데, 공이 동파(東坡)에 주둔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굶주린 백성들이 날마다 천여 명씩 찾아왔다. 마침 그때 남방에서 조운(漕運)해 온 곡식이 도착하였으므로, 즉시 상에게 계를 올려서 1천 석을 내어 구휼하였다. 경상우도 감사(慶尙右道監司) 김성일(金誠一)이 보고하기를,
“전쟁의 피해가 영남 지방이 가장 심하니, 곡식을 이송해서 기민(飢民)을 구휼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으므로, 즉시 남원(南原)의 곡식 1만 석을 실어다 구제하게 하였다.
적이 스스로 약세임을 알고 비로소 강화(講和)를 청하였다. 제독이 보고를 받고 개성으로 돌아와서 유격(遊擊) 심유경(沈惟敬)을 적에게 보내어, 두 왕자를 돌려보내고 부산으로 철수하기로 약속한 후에 허락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의리상 강화를 허락해서는 안 되니 공격하느니만 못합니다.”
하니, 제독이 거짓으로,
“좋소.”
하였으나, 실상은 싸울 마음이 없어서 또 유격 진홍모(陳弘謨)를 적중에 보내었다. 그가 파주를 지날 때, 기패(旗牌)에 와서 참배하라 하였으나 공이 듣지 않았다. 제독이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기패는 천자의 명령인데, 어찌하여 참배하지 않는가? 마땅히 군법으로 다스리고 군사를 철수하겠다.”
하였다.
공이 원수(元帥) 김명원(金命元)과 함께 군문에 나아가 면담을 청하니 제독이 노하여 만나 주지 않다가 얼마가 지난 후에야 허락하였다. 공이 앞에 나아가 사과하며,
“기패에 경의를 표하지 않으려 해서가 아니라, 그 옆에 우리가 왜적을 죽이는 것을 금지하는 패문(牌文)이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통분한 나머지 감히 참배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니, 제독이 부끄러워하며,
“이는 송 시랑(宋侍郞 명(明) 나라 병부 우시랑(兵部右侍郞) 송응창(宋應昌))이 한 일이니, 나는 사실 모르는 일이오.”
하였다. 며칠 후에 유격 척금(戚金)ㆍ전세정(錢世禎)을 보내어 강화를 허락하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말하니, 공이 불가함을 고집하였다. 두 사람이 떠나고 나서 공이 글을 보내어,
“적이 우리를 꾀어 강화를 요구한 것이 세 번째이나, 우리나라가 위급한 지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끝내 허락지 않은 것은 차라리 싸우다 죽을지언정 욕을 당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온 나라 사람들이 원한을 잊고 적과 함께 살기보다는 차라리 적을 공격하다가 군법에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제독이 동파역에 도착하자, 공이 찾아가 안부를 물으니 제독이 만나 주지 않고 시중드는 자에게,
“유 체찰사(柳體察使)가 나를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으면서 어째서 나의 안부를 묻는가?”
하였다.
수가(秀嘉)가 이미 제독에게 강화의 승낙을 얻었으나 우리가 그들의 뒤를 추격할까 두려워 군사를 숨겨 밤을 타서 달아났다. 제독이 입경하자 공이 급히 군사를 동원하여 적을 추격하기를 청하니, 제독이 거짓으로,
“강에 배가 없으니 건널 수가 없다.”
하였다. 그러나, 공이 배 80여 척을 수합(收合)해 놓은 지 오래였으므로 제독이 부득이 영장(營將) 이여백(李如栢)을 보내어 군사 1만여 명을 인솔하고 추격하게 하였으나, 강가에 이르러 강을 건널 듯이 하다가 군사가 반쯤 건넜을 때 신병을 핑계로 돌아왔다.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거짓 적을 치려는 뜻을 보이고 제독에게 군사를 재촉하여 적을 추격게 하니, 적이 철수한 지 이미 여러 달 뒤였다. 제독이 추격하여 문경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경략이 이미 우리 군사에게 적을 죽이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적이 도망하여 돌아가는데도 우리 군사가 감히 나아가 싸우지 못하였다. 적이 해변인 울산ㆍ동래ㆍ김해ㆍ웅천(熊川)ㆍ거제(巨濟)를 거점으로 진을 친 것이 16둔(屯)이었는데, 모두 산을 의지하여 성을 쌓고 참호를 파서 오래 머무를 계책을 하므로, 유정(劉綎)ㆍ오유충(吳惟忠)ㆍ이영(李寧)ㆍ조승훈(祖承訓)ㆍ갈봉하(葛逢夏)ㆍ낙상지(駱尙志)ㆍ왕필적(王必廸) 등은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사면을 포위하여 서로 대치하고, 우리 군사는 원수 이하 여러 장수들이 모두 의령(宜寧)에 집결하였다. 이때 적이 왕자와 여러 신하들을 돌려보내니, 얼마 후 유정이 대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공이 상에게 계하여,
“왕사(王師)는 믿을 수가 없으니, 군사를 교련하여 자강(自强)할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하였다. 장정을 선발하여 절강 참장(浙江參將) 낙상지에게 보내어 얻은 화포(火炮)ㆍ낭선(狼筅)ㆍ창검 등의 무기를 가지고 돌려 가며 익히게 하고, 자신은 영남에 가서 군사(軍事)을 다스렸다.
9월에 소명(召命)을 받고 행재소에 도착하였다. 10월에 상을 수행하여 서울에 돌아오니, 서울이 파괴되어 모든 관청이 무너진 벽에 가까스로 의지하고 있는 데다, 기근이 겹쳐서 도둑이 들끓어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었다. 공이 상에게 아뢰어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곡식 1만여 석을 풀어 장정 수천을 모집하여 조총(鳥銃)과 도창(刀鎗) 사용하는 기술을 가르치고 파총(把摠)과 초관(哨官)을 두어 거느리게 하여 차례로 숙위(宿衛)케 하니, 인심이 안정되었다. 얼마 후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명 나라에서 우리나라가 쇠약하다 하여 분할역치(分割易置 국토를 다시 나누고 임금도 바꾼다는 뜻)하자는 의론이 있었다. 급사중(給事中) 위학증(魏學曾)의 주본(奏本)에 그 내용이 언급되었는데,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이 불가함을 주장하여 행인(行人) 사헌(司憲)이 파견되어 왔는데, 이는 대개 칙명으로 우리를 선유(宣諭)하고 또 우리의 사정을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그 칙서에,
“짐이 속국을 대접하는 은의(恩義)가 이에 이르렀으니, 앞으로 왕은 스스로 다스리라. 짐은 왕을 위하여 다시는 일을 도모하지 않으리라.”
하였으므로 상이 공을 인견하고,
“내가 오래전부터 이렇게 될 줄을 알았는데, 일찍이 왕위를 피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내일 사신을 만나서 전위(傳位)할 뜻을 말하겠다. 경과 같이 훌륭한 인재가 나 때문에 큰일을 못하게 된 것이 진실로 유감스럽다.”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칙서는 우리를 권면하는 것일 뿐인데, 상께서는 어찌하여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신이 삼공의 지위에 있으면서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의 죄는 만번 죽어 마땅하오나, 명일의 일은 크게 옳지 못하므로 감히 죽음으로 간청합니다.”
하였다.
그후, 상이 행인을 만나 보고,
“내가 병들어 국사를 감당할 수 없어서 세자에게 전위하려 한다.”
고 말하니, 사신이 허락하고 또,
“유성룡은 충성심이 굳고 어질며 신의가 있어서 동정(東征) 나온 장수와 관리들이 좋아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왕께서는 어진 정승을 두셨습니다.”
하였다. 이때 척 유격(戚遊擊 척금(戚金))이 서울에 있으면서 사신의 처소에 가서 비밀히 의론하고 나서, 밤에 선생을 만나기를 청하여 좌우를 물리고 지필을 가져다 예닐곱 말을 썼는데, 살펴보니 그중 한 가지는 상의 전위에 관한 것이었다. 공이 놀라 벌떡 일어나서 종이에다,
“공은 천하의 서적을 두루 읽어서 고금의 사실을 널리 알 것이오. 우리나라가 이렇게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또 군신 부자 사이에 그 도리를 제대로 못한다면, 이는 망국(亡國)의 화를 재촉하는 것이오.”
라고 쓰니, 유격이,
“옳소, 옳소.”
하고 즉시 그 필담(筆談)한 종이를 촛불에 살라 버렸다.
다음날 아침, 공이 백관을 거느리고 사신의 처소에 가서 글을 바쳐 상이 실덕(失德)한 일이 없음을 극력 진술하였는데, 그날 밤 유격이 공에게,
“사신의 생각이 많이 돌아섰습니다.”
하였다. 이로부터 사신이 상을 뵐 때에는 예절이 더욱 공손하였고, 귀국할 때에는 자문(咨文)을 보내어 권면하기를 각별히 하였다. 또 공에게 차부(箚付)을 보냈는데,
“나라를 다시 만들었다.”
는 구절이 있었다.
사신이 도착하기 전에 경략 송응창이 접반사(接伴使) 윤근수에게 차부를 주면서,
“돌아가 국상(國相)에게 전하시오.”
하였다. 공에게 이를 전하니 공이 받기를 거부하면서,
“경략이 국사를 공적으로 의론하려면 마땅히 자문(咨文)을 상에게 보낼 것이어늘, 이제 자문은 없고 차부만 있으니 그 말한 것을 국상이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12월에 호서(湖西)의 반적(叛賊) 송유진(宋儒眞)이 격문을 전하고 협박 약탈하면서 북상하니, 인심이 흉흉하였다. 상이 공에게 명하여 궐내에 들어와서 숙직하게 하니 공이,
“이와 같이 한다면 인심이 더욱 놀라게 될 것입니다.”
하고 사양하자 상이,
“경은 무원형(武元衡)의 일을 생각지 않는가?”
하였다. 하루저녁은 날씨가 몹시 추웠다. 상이 내시를 시켜 공을 엿보게 하니, 심야(深夜)에 불을 켜 놓고 책을 보고 있다고 하므로, 상이 명하여 술을 데워다 주었다. 반적이 잡히자, 공이 공평하게 옥사를 다스렸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신장(訊杖 죄인의 심문에 쓰는 곤장)이 점점 커졌으므로 공이 상에게 아뢰어 일정하게 《대명률(大明律)》에 정한 크기를 따르게 하니, 지나친 형벌로 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
갑오년(1594, 선조27) 차자를 올려, 근본을 굳게 하고 비용을 절약하며 저축할 것과 군사를 선발하여 훈련시킬 것 등에 대하여 수천 자에 달하는 내용을 말하고, 또 토지를 계산하여 세입을 정하고 각 관청으로 하여금 공물(貢物)과 방물(方物)을 모두 물량(物量)을 계산하고 값을 정해서 유사(有司)가 공무(供貿)케 하고, 그 나머지로 군량에 보충할 것을 청하니, 모두들 편리하게 여겼으나 반대하는 자가 있어서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왜적이 지구전을 하고 있어 천하의 병력을 다 투입할 수는 없으니, 적의 강화 요청을 허락하여 군사를 풀게 하는 것이 편하다고 여겼다. 송응창은 탄핵을 받아 돌아가고 고양겸(顧養謙)이 후임으로 왔다. 그는 요동에 도착하자 참장(參將)인 호택(胡澤)을 보내어 차부(箚付)로 우리를 책유(責諭)하는데, 자기를 굽혀 자강(自強)하라는 것을 말하였고, 또 우리로 하여금 왜를 위하여 봉(封)해 주기를 청하게 하고는, 우리 조정의 의론이 분분해서 결정되지도 않은 터에 보고를 매우 독촉하였다. 공이 이때 폐병을 앓아 허약해서 일을 보지 않은 것이 한 달이 넘었는데, 이에 이르러 차자를 올려,
“마땅히 적의 상황을 자세히 갖추어 진술하여 대국의 처분을 따르되, 왜를 도와서 그를 봉해 주기를 청하라는 일은 결코 좇아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또 조목별로 전수편의(戰守便宜) 11책(策)을 올리고, 병조에서 군사훈련을 전담케 할 것과 인재를 널리 구하여 내외의 문무 중신으로 하여금 각기 아는 사람을 천거하되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말 것을 청하였다. 또 군국기무(軍國機務) 10조를 올렸다.
을미년(1595, 선조28) 강가를 따라 둔보(屯堡)를 설치하였다. 차자를 올려서 방수(防守)하는 방책을 아뢰었다. 유생 나덕윤(羅德潤) 등이 상소하여 기축원옥(己丑寃獄)을 말하였으므로, 공이 크게 풀어 줄 것을 청하면서 특히 수적(囚籍)에 실려 있는 사람 중에서 정개청(鄭介淸)ㆍ유몽정(柳夢井)ㆍ이황종(李黃鍾) 등에 대하여 억울한 이유를 자세히 진술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9월에, 사직하고 돌아가 노모를 뵙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얼마 후 휴가를 얻어 돌아갔는데, 곧 다시 불러서 경기ㆍ황해ㆍ평안ㆍ황해도의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삼아 군사를 열병(閱兵)케 하였다.
병신년(1596, 선조29) 황제가 이종성(李宗城)ㆍ양방형(楊方亨)을 보내서 수길(秀吉)을 봉하여 일본 국왕으로 삼을 때, 심유경(沈惟敬)이 평소 왜와 왕래하며 사건을 주선하였으므로 그도 함께 왔는데, 우리로 하여금 중신(重臣)을 보내어 함께 가게 하니, 조정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공이,
“적은 변하기를 잘해서 형편이 어렵게 되면 스스로 면하려고 허물을 우리에게 돌릴지도 모르오니 우선 눌러두고, 글로써 책문(責問)하여 그 회답을 받아 보고 처리하는 것이 편합니다.”
하니, 상이 이를 따랐으나 유경이 독촉하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그의 접반사인 황신(黃愼)을 보냈다. 이종성(李宗城)이 왜에서 도망하여 돌아오니 서울의 인심이 흉흉하여 안정되지 않았으므로, 방(榜)을 걸어 효유하여 안정시켰다. 이때 참소하는 말이 있었으므로, 상이 백관들에게 명하여 동궁(東宮 세자)에게 청정(聽政)하게 하자, 공이 백관을 거느리고 한 달 넘게 복합(伏閤)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이에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자, 상이 수찰(手札)로 유시하여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양방형과 심유경이 왜에서 돌아왔다. 수길은 책봉을 받고도 사례하지 않았고, 소서행장(小西行長)ㆍ가등청정(加藤淸正)은 전과 같이 둔병하고 있으면서 성언(聲言)하기를,
“왕자가 와서 사과해야 군사를 철수하겠다.”
하였다.
심유경은 복명하자 죄를 얻어 해임되었고, 다시 대병을 출병시켜 군문(軍門) 형개(邢玠), 경리 양호(楊鎬), 대장 마귀(麻貴), 제독 유정(劉綎)ㆍ동일원(董一元), 총병 양원(楊元)이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왜를 토벌하였다. 수군제독 진린(陳璘)도 뒤따라 도착하였다. 경리 양호와 제독 마귀가 기병(騎兵) 5천을 거느리고 서울에 있었는데 우리의 군사와 합하니 7, 8천 명이었다.
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왜적을 진도(珍島)에서 대파하고 한산도(閑山島)에 주둔하여 연이어 적을 격파하니, 왜적이 그를 염려하여 정유년(1597, 선조30)에 첩자를 시켜 우리를 유인하여,
“청정(淸正)이 지금 막 바다를 건너오고 있으니, 수군으로 맞아 싸우면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는 우리의 실정을 염탐하려 한 것이다. 이순신이 거짓임을 알고 듣지 않으니, 절도사 원균(元均)이 이순신의 공이 높아 가는 것을 시기하여,
“순신이 명령을 받고도 출병하지 않는다.”
하였으므로, 부득이 출병하니 청정은 이미 바다에서 떠난 후였다. 이순신은 공이 발탁한 사람이었으므로, 공을 비난하는 자들이 이순신이 일을 그르쳤다는 것으로 비방의 구실을 삼자, 상이 노하여 법으로 조치하고 원균(元均)으로 대신케 하려 하였다. 공이 힘써 다투며,
“균은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과연 대패하여 원균은 도망치다 죽고 호남 지역은 적의 수중에 떨어지자, 김명원(金命元)과 이항복의 건의에 따라 이순신을 다시 등용하였다.
양원(楊元)이 남원(南原)에서 대패하자, 적이 승리한 기세를 타고 직산(稷山)에 이르니 경리 양호가 이를 격파하고 마귀와 함께 군사 수만을 이끌고 추격하여 울산에 이르렀다. 이때 적은 직산에서 패하여 청정은 울산에, 행장은 순천(順天)에, 심안돈오(沈安頓吾)는 사천(泗川)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유정(劉綎)은 행장을 공격하였으나 불리하였고, 동일원(董一元)이 또 사천에서 패하였으며, 경리 양호는 청정을 공격하여 그 외책(外柵)을 빼앗고 오랫동안 포위했으나 불리하였다. 이순신이 패잔병을 수합하여 진린(陳璘)과 함께 남해 앞바다에서 적을 맞아 싸워 대파하자, 행장과 안돈오가 달아나니 바닷가에 주둔하였던 모든 적이 각기 후퇴하였다. 이순신이 바다에서 싸우다 죽었다. 적의 기세가 크게 꺾여 서쪽으로 향할 뜻이 없게 한 것은 그의 힘이었다.
공이 국사를 맡은 이후로 상이 마음을 쏟아 공의 의견을 채택해 쓰니, 시기하는 자들이 밤낮으로 헐뜯어 상이 공을 싫어하게 하려 하였다. 상이 공에게 출병하여 왜를 막게 하니, 공이 명령을 받고 즉시 출발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 적이 심하게 조여들어 와 도성 안이 시끄러운데, 모(某)가 출병하면서 먼저 가족을 거느리고 떠나서 인심이 크게 흐트러졌습니다.”
하였으므로, 상이 대로하니, 대사헌 이헌국(李憲國)이 공과 여러 대신들의 가족이 누구는 어디에 있고 누구는 어디에 있음을 하나하나 열거한 뒤에야 상의 노여움이 풀렸다. 상이 공을 부르니 거느린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 호위하였는데, 이른 자가 수만 명이었다. 상이 강가에 나아가서 군대의 진용이 매우 엄숙함을 보고 크게 기뻐하여 공을 더욱 믿고 중용(重用)하였다.
처음에, 경리 양호가 대군을 거느리고 남하(南下)할 때 공이 먼저 영남으로 가서 군량을 조달하였다. 경리가 도착하자 공이 면담을 청하니, 그가 이미 참소를 믿고 만나 주지 않으며 좋아하지 않는 태도를 지으니 수행한 자들은 불안해 하였으나 공은 동요되지 않고, 대사(大事)가 잘못되는 것만을 염려하여 경리의 행동을 갖추어 계달(啓達)하고 서로 사이가 좋지 않으니 체직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다가 얼마 후에 소환하였다. 그후에 양호가 서울로 돌아왔다. 공이 이항복과 일을 의논하고 있을 때 관청의 역관(譯官)이 찾아와 공을 뵙고 관청의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나서, 자기가 중개를 서겠다며 여러 장수들과 교제하기를 청하였다. 공이 정색을 하며,
“공사(公事)가 아니면 사교(私交)가 없는 법이다.”
하니, 역관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이공이 물러 나와서 사람들에게,
“선비는 이해에 대해서 마땅히 이래야 한다.”
하였다.
무술년(1598, 선조31) 주사(主事) 정응태(丁應泰)가 경리 양호를 탄핵하였는데, 내용은 군사들을 못살게 굴어 원망이 많았고, 패배한 것을 숨기고 공으로 삼아 군문(軍門), 감군(監軍)과 함께 황제를 기만하였다는 것이었다. 이에 황제가 크게 노하여 급사중(給事中) 서관란(徐觀瀾)을 파견하여 정응태와 함께 서울에 와서 사실을 조사하게 하였다. 경리는 파직되어 하남(河南)으로 돌아가고 만세덕(萬世德)이 후임으로 왔다.
상이 직산에서의 싸움을 생각해서 대신 한 사람을 보내서 경리를 위하여 그의 원통함을 변명하려 하였다. 상의 생각에는 대체로 공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내외의 일이 많았으므로 그만두고 마침내 좌의정 이원익(李元翼)을 보내게 되었다. 이원익이 중국에 도착하자 정응태가 또, 우리가 왜와 통하여 임진년에 요동을 침범하려 하다가 도리어 그들의 침입을 받은 것이라고 허위 사실을 말하였다. 상은 이 말이 분하고 불쾌해서 피위(避位)하겠다는 말을 하고 며칠 동안 정사를 보지 않으니, 공이 백관을 인솔하고 나아가 정사에 임할 것을 간하였다.
지평 이이첨(李爾瞻)이 앞장서서 공이 변무(辨誣)할 일을 맡아 연행(燕行)을 자청하지 않은 것을 탄핵하여 상의 마음을 노하게 하고, 집정자가 또 은밀히 그의 문객 몇 사람을 시켜 상소하여 배척하며 사론(士論)이라 하였다. 정인홍이 평소 공에게 깊이 노여움을 품고 있었으므로 그의 문객 문홍도(文弘道)가 정언이 되어 온갖 방법으로 공을 헐뜯었는데, 모두 공이 주화(主和)했다는 것으로 핑계를 삼았다. 이에 공이 계속하여 차자를 올려 실책을 들어 가며 스스로를 탄핵하니, 곧 정승에서 파직하고 이어서 관작을 삭탈하였다. 우의정 이항복이 차자를 올려서,
“지난번에 신이 명을 받들어 남방에 갔을 때, 적의 기세는 매우 강한 데다 우리는 재물은 다하고 백성은 흩어져서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었으므로, 나라를 지키고 적을 막는 데는 나아가 싸우던가 지키던가 화해하는 세 가지 길이 있을 뿐이었는데, 이제 이미 싸울 수도 없고 또 지킬 수도 없으니, 이 두 가지를 빼면 화해를 요구하는 데 따르는 길뿐이었습니다. 신이 일찍이 체찰사 신 모(某 유성룡을 가리킴)와 이 일을 의론하였으니, 이 일로 성룡을 죄준다면 차례로 죄를 주어 신에게도 죄를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좌의정 이원익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와 상소하기를,
“유성룡은 정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고 나랏일을 근심하고 자기 집을 근심하지 않는 사람인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마음이 슬픕니다. 이 사람이 배척되어 물러나고, 그와 친한 사람이라 하여 물리치고, 의견을 달리한다 하여 물리친다면, 선비들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니 국가의 복이 아닙니다.”
하고는 병을 칭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기해년(1599, 선조32) 6월에 명하여 공의 직첩을 돌려주니, 삼사(三司)에서 다시 논란하므로 환수했다가 경자년(1600, 선조33) 11월에 또 직첩을 내리는 명이 있었다. 다음달에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장례로 교외(郊外)의 곡반(哭班)에 나아가 곡하고 곧 돌아왔다. 이듬해 8월 정경부인(貞敬夫人)이 졸(卒)하였다. 그해 12월에 비로소 다시 서용(叙用)하는 명이 있었다.
임인년(1602, 선조35) 염근리(廉謹吏)에 뽑혔다. 영의정 이항복이 공의 이름을 선발 명부의 맨 앞에 기록하고 동료들을 돌아보면서,
“이분은 한 가지 선덕(善德)으로 이름 지을 수 없으나 다만 미오(郿塢)라는 무고를 씻으려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이 말은 문홍도(文弘道)가 공을 무고했던 일을 말한 것이다.
계묘년(1603, 선조36) 탈복(脫服)하였다. 다시 부원군(府院君)에 복호(復號)되자, 공이 상소하여 치사(致仕)하기를 청하였다. 갑진년(1604, 선조37)에 호성원공(扈聖元功)에 책봉되었는데, 공이 상소하여 녹권(錄券)에서 삭제해 주기를 청하였다. 공신의 초상을 그리려고 화공이 오니, 공이 공훈을 사양하였다는 이유로 사절하여 보냈다.
을사년(1605, 선조38) 회맹(會盟)하는 예를 마치고 교서를 내려 은견(銀絹)과 승마(乘馬)를 하사하고, 본도(本道)로 하여금 장리(長吏 수령)를 시켜 음식을 보내게 하였다. 상이 명하여 봉조하(奉朝賀)의 녹을 주자 공이 상소하여 극구 사양하였으며, 세 번이나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정미년(1607, 선조40) 5월에 공이 졸(卒)하니 향년 66세였다. 그 전날 밤에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일어나 앉아서 홍범(洪範)을 외었다. 공이 병중에 있을 때, 상이 내의(內醫)를 보내어 시질(視疾)하게 하였는데, 아침에 그를 돌려보내면서,
“멀리 오느라 수고했네. 내가 상의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구나.”
하고 손님을 사절하기를,
“안정하여 조화(造化)로 돌아가고 싶다.”
하고는, 시자(侍者)에게 대청 복판에 자리를 깔게 하고 북쪽을 향하여 정좌하고 서거하였다. 유언으로 군도팔사(君道八事)가 있고, 또 박장(薄葬)할 것을 유계(遺戒)하였다.
조정에 부음이 전해지자, 상은 3일간 조회(朝會)를 폐하고 의식에 따라 조의를 표하고 부의를 내렸다. 사대부들은 서로 달려와 성남(城南)의 옛집에 위패를 만들어 놓고 친척처럼 곡하였고, 도민(都民)들은 모두 달려와서 회곡(會哭)하고 4일간 시장을 파하고,
“공이 아니었다면 우리들은 이미 모두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하였다. 그해 7월에 풍산현(豐山縣) 수동(壽洞)에 남향으로 봉분을 만들어 예장(禮葬)하였는데, 장례에 참여한 사람이 4백 명이었다. 후에 공을 위하여 병산(屛山)에 사당을 세웠다.
공은 나라가 위태로운 시기에 장상(將相)의 중임을 한 몸에 받아, 의리를 밝게 살펴 일에 바르게 임하였으며, 충성을 다하여 어려움을 사양치 않았다. 공의 행사(行事)를 살펴볼 때, 요점은 시종(始終) 도덕의 바른 입장에 귀착되니 공이야말로 덕과 지혜와 술수와 지략을 지니고 예악으로 문식(文飾)한 분이라 하겠다. 조정의 기로(耆老)에서 숙장(宿將 병사에 노련한 장수)ㆍ구리(舊吏 오래된 벼슬아치)에 이르기까지 상국(相國)의 충성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그렇다면 온 힘을 다해 주선하여 위태한 나라를 부지(扶持)하여 끝내 왕업을 다시 안정시키고, 백성들이 부자 형제가 서로 보존케 하여 지금까지 의식을 즐기고 편안히 살며 본업을 즐기게 한 것은 그 누구의 힘이겠는가. 공은 사리에 통달하고 일에 민첩하며, 학식은 넓고 성품은 우아하였다. 문장을 잘하였는데 특히 사명(詞命)에 능하였다. 공은 거처하던 서애(西厓)의 절경을 좋아하여 서애로 자호(自號)하였다.
[주D-001]부(祔) : 삼년상이 끝난 뒤에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순서에 따라 모시는 것을 말한다.
[주D-002]낭선(狼筅) : 창의 일종이다. 대나무나 쇠로 만드는데 9~11층의 가지가 달렸고, 창대 끝, 가지 끝, 가지 안쪽에 쇠로 만든 날카로운 날이 있다.
[주D-003]무원형(武元衡)의 일 : 무원형은 당 덕종(唐德宗) 때 사람으로 덕종이 병사(兵事)를 그에게 전담시켜 채(蔡)를 토벌하였는데, 조회(朝會)에 들어가던 도중 적의 화살을 맞고 죽었다. 《舊唐書 卷158 武元衡列傳》
[주D-004]《대명률(大明律)》에 정한 크기 : 대두경(大頭徑) 3푼 2리(厘), 소두경(小頭徑) 3푼 5리, 길이 3척 5촌이다. 《大明律直解 獄具圖》
[주D-005]기축원옥(己丑寃獄) : 선조 22년(1589) 10월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계기로 동인(東人)이 화를 당한 사건을 말한다. 특히 서인(西人)의 영수 정철(鄭澈)이 동인을 가혹하게 치죄하여 이발(李潑)ㆍ유몽정(柳夢井)ㆍ백유양(白惟讓)ㆍ최영경(崔永慶) 등을 처형하고 정개청(鄭介淸) 등을 유배시키는 옥사를 일으켰다.
[주D-006]미오(郿塢) : 후한(後漢)의 역신인 동탁(董卓)이 미현(郿縣)에 쌓은 성채이다. 동탁이 여기에 금 2, 3만 근, 은 8, 9만 근을 저장하였으므로 탐욕하여 축재함을 뜻한다. 《三國志 魏書 卷6 董卓傳》
[주D-007]봉조하(奉朝賀) : 정3품 당상관 이상으로 퇴직한 관원 중에서 특히 우대하기 위하여 임명하는 직명이다. 이에 임명된 자는 종신토록 녹봉을 받으며 평시에는 근무하지 않고 의식(儀式)이 있을 때에만 참례한다. 《大典會通 吏典 奉朝賀》
西厓遺事 미수 허목 찬
公諱成龍。字而見。姓柳氏。其先豐山縣人。郡守公綽之孫。觀察使仲郢之子也。少聰明博學。初見李先生於陶山。李先生曰。此子天之所生也。二十三。選博士弟子。三年。擢大科。補承文院正字。選入翰苑。我宣祖二年也。上疏言仁廟祔延恩非禮事。上從之。以賀聖節書狀官。如京師。公賢而習於禮儀。太學諸生聚觀者數百人。公問本朝名儒。相顧言王陽明,陳白沙二人。公曰。白沙見道不明。陽明主禪學。皆不如薛文淸之正學。有一生前曰。士失趨向久矣。公能正之。吾道幸矣。及序班引僧,道二流。立之前列。公曰。冠帶之列。縱有官。不可以道釋在前。鴻臚官大慙。卽郤之後列。廷中大驚。後入玉堂。常侍經幄。上甚重之。尋賜暇湖堂。由天官佐郞。還拜修撰。故相李公浚慶。臨卒上箚。言朝廷明黨事。爲他日難救之患云。應敎珥怒上疏。以爲媢嫉。上方柄用珥。時議多趨之者。議追奪官爵。公不可曰。大臣臨死進言。不可則辨之而已。請罪則傷朝廷待大臣之體。其議乃止。丁丑。仁聖大妃登遐。禮曹以爲上當行朞年之制。公曰。明宗於仁宗繼統之。序有父子之道焉。上當從嫡孫父沒。爲祖母持重服之禮也。力論之。上卒從其議。己卯。以直提學。陞密直。俄改吏曹參議。庚辰。遷副提學。上疏乞歸養。上許之。適尙州牧使缺。特拜之。上曰。使列邑取法也。明年。以副提學召之。冬無氷。上疏陳十事。一答天心。二嚴宮禁。三立規模。四整朝綱。五用人才。六杜倖門。七養廉恥。八戢奸濫。九保民生。十振士風。壬午。由大司諫。拜右副承旨。上特拜都承旨。以詔使將至。導相須得人也。有是命。詔使至。見公在上前。禮節甚嚴。爲之稱嘆賢之。上賜錦袍。特拜大司憲。癸未。尼湯哈寇邊。公以副提學。上籌邊五策。一杜禍源。二定戰守。三審虜情。四給餽餉。五修荒政。時朝議大乖相攻擊。至此益甚。公不樂於朝。且以老母乞歸養。秋連拜咸鏡道觀察使大司成。皆辭以老母。冬拜慶尙道觀察使。上疏力辭。上曰。此人賢有才。以老母故不能召。明年。以副提學召還。連辭不許。陞拜禮曹判書。又力辭。上曰。古人於其臣。有臣之者。有友之者。有師之者。予以朋友待卿云。於是申孝弟禮讓。勸諭館學諸生。頒鄕約于八方。上命選擇駙馬。毋避李姓。蓋有屬意者也。公曰。禮不娶同姓。爲遠嫌也。劉聰。納劉殷女爲妃。其所出絶異。綱目曰。犬羊雜糅。唐昭宗。以李茂貞子爲駙馬。此受制於強臣。不可爲後世法也。事遂寢。徐益上疏。假人之言。指公謂巨姦云。上下御札曰。觀其人。聽其言。使人心服。何物膽大者。敢爲此言也。公乞退疏五上。上終不許。公去意益堅。因請告歸。連上疏乞解官。累召皆謝不就。戊子。以刑曹判書召還兼大提學。連辭不許。己丑。以大司憲復爲禮曹判書。冬。有上變。告鄭汝立事。獄事起。士大夫多連累。公亦出於罪人書乞罷仍上疏自劾上優答之特拜吏曹判書。尋拜右議政。賜輸忠翼謨光國功臣號。封豐原府院君。上嘗從容言汝立事。仍問廷臣有先見者誰也。公對曰。臣有亡友李敬中。嘗言其不可用。反被排擯。坎軻而死。上曰。排擯者誰也。曰臣忘之。在史官。上問史官。掌令鄭仁弘,持平朴光玉也。命奪削兩人官爵。仁弘方有重名。以爲沮陷深怒之。辛卯。命兼吏曹判書。公辭曰。於古無此事。他日或有專國柄者。以臣籍口者。國家無窮之害。自臣身始也。上不許。尋陞左議政。黃允吉奉使日本還。其國書有曰。率兵直入大明云云。公曰。當具奏大明。領議政李山海曰。大明若以交倭責我。當何說之辭也。不如匿之。公曰。使价交往。有國之常事。成化間。日本因我求貢於中國。我卽奏聞。又降勑回諭。古事如此。今不以聞。倭有犯順之謀。而由他國聞之。大國疑我必深。且於義不可。卽白上。具奏。時福建人有被虜在倭中者。已報倭情如此。而琉球亦遣使上聞。而我使未至。中國果疑我貳於倭也。我使至則帝大說。賜賚之甚厚。上令備局諸臣。各薦將帥才。公薦權慄,李舜臣。皆在下僚。不甚知名。舜臣嘗爲北邊萬戶。討叛胡功多。無推挽者。十年不調。卽以井邑縣監。擢拜湖南水軍左節度使。申砬,李鎰。皆上之所重。請以鎰先出邊以備寇。兵曹判書洪汝諄以爲。鎰不可遣。壬辰。倭大擧。連陷釜山,東萊。列城大潰。更無可恃者。報至。中外大懼。公白上。洪汝諄掌兵柄。事急不知所爲。將士多怨。遞之。以金應南代之。又啓上以鎰爲巡邊使。成應吉爲左防禦使。趙儆爲右防禦使。分三路以禦倭。劉克良,邊璣爲助防將。克良守竹嶺。璣守鳥嶺。砬以爲鎰以孤軍赴難。欲自行以爲聲援。上命爲都巡邊使。臨遣。賜劍曰。諸將不用命者斬之。命公兼判兵曹治兵事。臺諫請令大臣爲體察使。檢督諸將。公遂有體察之命。公將行。募勇士得八十人。砬募士無一人應者。砬怒色見公。請爲副。以從其意。蓋怒武士無從己者也。公卽以所募八十人與之。砬乃行。賊已陷尙州。鎰敗走。砬至忠州。賊已踰嶺。而砬多暴怒。人無言之者。急然後乃出兵。至江上欲走。賊乘之。陷沒不出。時司僕掌馬者。與首相耳語。去而復來。見者頗疑之。都承旨李恒福書立馬永康門內示公。然後乃知內間出狩之意已決。於是臺諫劾首相誤國之罪。宗室大臣皆言固守勿去。及砬敗無報急者。上遂西幸。公請上分遣王子諸道。使召兵勤王。命公守京城。李恒福啓上曰。上西幸盡塞。則大國之境。柳成龍通敏博達。善於詞令。酬酢非此人不可。請從行。上從之。以李陽元留守。上至臨津。召諸大臣同舟而濟。上顧謂公曰。幸而國家中興。當賴卿耳。次東岐驛。召見大臣李山海,尹斗壽及公侍。上拊心嘆曰。事已至此。予將何往。諸臣皆泣。不敢仰視。李恒福曰。且進至義州。勢窮力屈。可赴遡於帝。公不可曰。車駕出疆。則朝鮮非我有也。恒福猶力辨之。上曰。內附亦予意也。公又不可。因厲聲言曰。東北諸道兵馬尙全。湖南義兵大起。何遽論此事。然後恒福始悟默然。公退而語李誠中曰。爲我語李承旨。何言之易也。裂裳裹足。縱死道路。特婦寺之忠。人心一散。難可復合云。至開京。李山海罷相。公爲領議政。申磼白上曰。山海罷相。某不宜獨免。公卽日罷相。至平壤。復論竄山海。而以公且罪均。將幷論之。李恒福語副提學洪麟祥曰。此百代之望也。公苟不盡力於此者。吾自此絶矣。麟祥曰。諾。亦吾意也。遂入而大言之。其議乃止。時賊已薄平壤。上命公敍用。卽受命。應接大國將士來者。無預兵事。鎰敗於尙州。竄身山谷。追至行在所。鎰素有威名。雖奔敗而至。聞者皆喜。鎰至。公言左相尹斗壽。急遣鎰守江灘。時有車駕出避之議。公不可曰。前阻大江。人心不散。莫如堅守。必有王師助我。可以制敵。尹斗壽亦言守城便。城中已擾亂。奉廟社主先出城。城中男女皆發憤罵詈曰。宰相竊厚祿。誤國敗事。又魚肉我百姓。爭執兵刃縱擊之。神主墮途中。擾亂及於宮門。在朝者皆失色起立。公立於階上。招父老諭語曰。汝等竭力死守不去。固忠矣。不可驚動。宮門不戢者。罪當無赦。亂者卽棄兵叩謝。皆散去。李恒福私嘆曰。東坡奏事。柳相國嘗以易言責我。我當時不覺也。事至此。然後乃知先見服人云。車駕將出。議者多言北行便。公固爭曰。上西行。本欲賴大國之力。以圖恢復。今旣請救。而我深入北關。於義固不可。北行之後。爲賊所阻。勢窮地盡。將北走胡乎。計無失於此者也。上遂出寧邊。至義州。上戰守十策。時中國疑我與倭連誄。遼東移咨有責我語。公上疏曰。中國疑我者非一。而又我有七失。臨亂不急報變。一也。不早乞兵。二也。漢兵探我者。令困乏而返。三也。旣乞兵。無兵食。四也。漢人求我嚮導。而無一卒立於前。五也。乘輿所止。無兵衛之備。晏然如平日。六也。國勢危急。而氣像徐緩。事多後時。七也。此皆來人之疑者也。請令該司登時速報。明白自陳甚善。時北路已陷。而叛民縛王子諸臣以降云。七月。副摠兵祖承訓。以五千兵來援。上念公病篤。使尹斗壽治兵食。公請自力曉諭百姓。發三縣粟數千。又南方漕粟至館穀。供具旣備。承訓攻平壤。不利而退。公仍留安州。以鎭撫百姓。且待後軍之至。十二月。拜關西都體察使。提督李如松以精兵四萬。至安州。公請見。以平壤地圖指示形勢。提督大說曰。賊在目中矣。先是。我被虜者受賊厚賄。探報我事殆無遺。公得首諜者。按問其儻數十輩。皆斬之。以故提督兵大至。而賊不知也。提督召我兵。合六萬人。正月。克平壤。賊大敗。行長,義智,玄蘇急收餘兵。夜遁去。公令海西諸將。邀其歸路。急躡其後。諸將皆不出。惟李時言踵其後。亦兵少不敢逼。賊已過矣。上命公爲忠淸,慶尙,全羅等道都體察使。提督進兵至坡州。聞副摠兵査大受追賊至碧蹄戰小利。領千餘騎馳赴之。敗折而還。卽趨開城。公爭之曰。大軍一退。賊勢益強。遠近驚懼。請少留觀釁而動。提督佯應曰。諾。卽跨馬還至開城。諸營悉退。提督聲言淸正。自咸興將襲平壤。急還軍以救之。且令我兵在臨津南者。首渡江拒守。公遣從事辛慶晉見提督。言不可退兵者五。其一。先王墳墓皆在畿甸。陷爲賊所。義不可棄。其二。奔竄遺民。日望王師伐賊。今聞退兵。無復固志。相率而歸賊。其三。將士方倚重王師。以圖興復。大軍一退。人心怨憤。皆思散去。其四。封疆之內尺地不可棄。其五。兵退之後。賊乘其後。臨津以北。亦不可保也。提督默然。諸將士知提督意。以食盡請旋師。提督怒。召公及戶曹判書李誠中,右監司李廷馨。跪之庭下而數之。公權謝而已。因爲之慷慨泣下。提督有悔色。陽怒其諸將曰。不滅賊不還。諸將皆頓首請罪。令副摠張世爵。見公慰之。仍論兵事。湖南巡察使權慄率精兵數千。克倭於幸州。提督方與倭連和。聞戰勝大驚。號曰權家軍。而心實憚之。公令權慄軍。與巡邊使李薲會於坡州。據險守之。又令防禦使高彥伯,李時言,助防將鄭希玄,朴名賢及諸義兵。分左右守要害。出沒擊賊。召舟師將李蘋,丁傑。屯西湖以分賊勢。倡義軍亦以舟師至。移書王必迪言。賊方據險未易攻。大兵進至坡州。躡其後。選南兵精勇。出漢南乘賊不意。擊破諸賊。城中賊歸路阻絶。必走龍津。因以大兵襲之。可一擧而盡矣。必迪大悅。陰使人覘賊。城中賊尙強。餘皆羸疲寡弱。可易破也。提督北將。忌南兵有功。沮其謀。使不得動。査大受報公曰。賊方有謀。必欲得査,柳二將。欲退陣以自備。公曰。賊畏大軍在後。徒以虛辭恐我耳。必不輕來犯。我不動。還報則喜曰。賊縱來。我義不可獨去云。時兵革已久。民不耕種。聞公駐軍東坡。飢民至者日千百。南方漕粟適至。卽啓上。出一千以賑之。慶尙右監司金誠一報云。兵革之禍。嶺南最甚。請移粟賑飢。卽移南原粟一萬。賊自知勢弱。始請和。提督得報。遂還開城。遣遊擊沈惟敬。約還二王子。退兵釜山。然後乃許。公曰。義不可許。不如擊之。提督佯應曰。善。實無鬪心。又遣遊擊陳弘謨入賊中。過坡州。令入參旗牌。公不聽。提督聞之大怒曰。旗牌天子之命也。何以不參。當行法撤兵。公與元帥金命元。詣軍門上謁。提督怒不見。良久乃許。公前謝。仍曰。非不敬旗牌。其側又有牌文。禁我殺倭。心痛恨之。不敢參拜。提督有慙色曰。此宋侍郞爲之。我實不知云。數日遣遊擊戚金,錢世禎來。言許和便。公執不可。兩人者旣去。公移書曰。賊誘我求和者三。小邦危急而終不許者。寧死不辱。一國之人。忘讎釋怨。與賊俱生。無寧擊賊而死於軍法云。及提督至東坡驛。公卽就問起居。提督不見。謂將命者曰。柳體察使不快於我。亦問我耶。秀嘉旣與提督得和。憚我躡其後。潛師夜遁。提督卽入京。公請於提督急發兵追躡之。提督詭言曰。大江無舡不可渡。公已急收艦八十。艤待之久矣。提督不得已遣營將李如柏。率兵萬餘。追之至江上。若渡兵者。兵半渡。稱疾迺還。經略宋應昌。佯示伐賊意。令提督促兵追賊。賊去已數月矣。提督追至聞慶而還。經略已令我兵。禁不得殺賊。賊遁還。我兵亦莫敢出。賊據海上蔚山,東萊,金海,熊川,巨濟。連陣十六屯。皆依山。築城掘壕。爲久留計。劉綎,吳惟忠,李寧,祖承訓,葛逢夏,駱尙志,王必迪等。以萬餘兵環四面相距。我兵元帥以下諸將。皆聚於宜寧。於是賊乃遣還王子諸臣。未幾劉綎以大兵歸。公啓上曰。王師不可恃也。請治兵敎鍊。以爲自強之計云云。選丁壯。遣浙江參將駱尙志所得火炮,狼筅,鎗劍諸兵械。令傳習之。身至嶺南治兵事。九月。召至行在所。十月。從上還京。京城殘破。百司依於墻壁。加之以飢饉。盜賊多起。人心危懼。公白上置訓鍊都監。發萬餘粟。募健兒數千。敎鳥銃刀鎗之技。置把摠哨官以領之。分番宿衛。人心乃定。尋拜領議政。大明以我衰弱。有分割易置議。給事中魏學曾上本言之。兵部尙書石星。持不可。行人司憲來。蓋勑諭我。且令觀屬國事也。其勑書曰。朕待屬國。恩義至此。王其自治之。朕不爲王再謀也。上召見公曰。久知若此者。恨不早避也。明日見行人。當言傳位事。卿之才以予之故。不得有爲。良恨。公對曰。勑書令勉厲之耳。上何爲遽出此言也。臣冒居三公位。使國事至此。臣罪萬死。明日事大不可。敢以死請。後上見行人言。病不任國事。欲傳位世子。行人許諾。又曰。柳成龍忠硬仁義篤信。東征將吏。無不悅者。王得賢相云。時戚遊擊在京。至行人所言甚密。夜要見公。屛左右。取紙筆。書六七言問之。其一。上傳位事也。公驚愕起立。書之曰。公讀天下書。知古今事博矣。小邦危急至此。而又於君臣父子之間。不能善其道者。促亡國之禍也。遊擊曰。是是。卽以其紙焚燭火而止。明朝。公率百官。呈文行人所。力陳上無失德事。又夜。遊擊語公曰。行人意大回矣。及行人見上禮節益恭。及歸。又移咨勉飭殊甚。又以箚付付公。有曰。再造山河云。行人未至。經略宋應昌。嘗以箚付授伴臣尹根壽曰。歸與國相。公拒之曰。經略公言。國事。當移咨於上。今無咨而有箚。付其所言。非國相所宜處者也。十二月。湖西賊宋儒貞傳檄劫略而北。人情洶洶。上命公入宿禁中。公辭曰。如此。令人心益驚。上曰。卿不念武元衡事乎。一夕甚寒。上令內豎覵。公深夜明燈閱書。還報。上命煖酒以賜之。賊旣見擒。公治獄平。累代以來。訊杖漸大。公白上。一從大明律尺寸。人無濫死者。甲午。上箚言固本,節用,積儲,選兵,敎訓累千言。且請計田量入。令諸司凡貢物方物。皆計物定價。令有司供貿。以其餘補軍食。皆以爲便。而有沮之者。不果行。中國以爲賊持久。天下兵力不可窮。因賊請款許之。令解兵便。宋應昌被劾去。顧養謙來代。至遼東。遣參將胡澤。以箚付責諭我。以屈己自強以爲言。且令我爲倭請封。廷議持不決。督報甚急。公病肺痿。不視事逾月。乃上箚曰。當具陳賊狀。以聽大國處分。贊倭請封事。決不可從。又條上戰守便宜十一策。請令兵曹專任鍊卒。廣收人才。令內外文武重臣。各擧所知。勿拘貴賤。又上軍國機務十事。乙未。置沿江屯堡。又上箚陳防守便宜。有儒生羅德潤上疏。言己丑冤獄事。公請大釋囚籍。如鄭介淸,柳夢井,李黃鍾。最甚伸理。上從之。九月。乞解官。歸見老母。上不許。尋暘暇歸。卽復召爲京畿,黃海,平安,咸鏡等道都體察使。敎閱戎卒。丙申。帝遣李宗誠,楊方亨。封秀吉爲王。而沈惟敬素與倭往來彌縫。惟敬亦從之。令我遣重臣偕往。朝廷不知所處。公曰。賊反覆多變。計窮則欲自免而歸咎我。未可知。姑捨之。先以書責問。得其報便。上從之。惟敬督之不已。令其伴臣黃愼遣行。及李宗誠自倭逃歸。京城洶洶不定。張榜曉諭以鎭之。時有讒言。上令群臣聽政於東宮。公率百官。伙閤逾月。上乃許。仍上疏乞歸。上以手札諭之。令毋去也。楊方亨,沈惟敬回自倭。秀吉受封不謝。行長,淸正復屯兵如前。聲言王子來謝。然後解兵云。惟敬旣復命得罪。而復大出兵。軍門郉玠,經理楊鎬,大將麻貴,提督劉綎,董一元,總兵楊元。各率衆討倭。水軍提督陳璘繼至。經理鎬,提督貴。領五千騎。在京城。合我兵。爲七八千人。水兵統制李舜臣。大敗賊於珍島。軍閑山。連破賊。賊患之。丁酉。賊令間誘我曰。淸正方渡海。以舟師邀之。可擒矣。蓋覘我也。舜臣知其詐。不聽。節度使元均忌舜臣功高。以爲不肯進兵。舜臣不得已出兵。淸正已下海矣。舜臣公所拔擢。誚公者尤以舜臣爲言。上怒置法。而將以元均代之。公力爭以爲均必敗。果大敗。均走死。湖南大陷。用金命元,李恒福計。復用舜臣。楊元大敗於南原。賊乘勝至稷山。經理擊破之。吳麻貴率兵數萬。追至蔚山。時賊敗於稷山。淸正屯蔚山。行長屯順天。沈安頓吾屯泗川。劉綎攻行長不利。董一元又敗於泗川。經理攻淸正。奪其外柵。久圍不利。舜臣集破敗餘衆。與陳璘遇賊於南海前洋。大破之。行長,安頓吾皆遁去。沿海諸屯賊各退兵。舜臣死於洋中。賊大折。無西意。實舜臣力也。公自受任以來。上傾心用之。媢嫉者日夜毀短之。令上心不快於公也。上命公出師禦倭。公受命卽行。或曰。方賊急。都城騷動。而某出師。先以家屬自隨。人心大潰云。上大怒。大司憲李憲國歷擧公及諸大官家屬所在某在某。然後上意乃解。召公以所領兵入衛。至者數萬。上出江上望見。軍容甚肅。大悅。益倚重之。初。經理楊鎬帥大軍南下。公先出嶺南。調兵食。經理旣至。公上謁。經理已信讒不見。有不悅狀。從者失色。公不動念。大事不濟。具啓經理所爲不相能。請代。上不許。尋召還。後經理還京。公與李恒福議事。有衙門譯來謁。公具言衙門事。請爲介欲交懽諸將。公正色曰。非公事無私交。譯不敢復言。李公退而語人曰。士臨利害當如此。戊戌。主事丁應泰劾經理鎬剝卒多怨。掩敗爲功。與軍門,監軍。共爲瞞上。帝大怒。遣給事中徐觀瀾。同應泰抵王京閱實。經理免歸。河南萬世德來代之。上追思稷山之戰。欲遣大臣一人。爲經理卞誣。上意蓋在公而以內外多事持之。卒遣左議政李元翼。至則應泰又誣論我與倭通。壬辰要犯遼東。反受兵云。上憤憤不快。言避位事。不臨朝數日。公率百官爭之。持平李爾瞻首劾公當卞誣事。不請燕行。以感怒上心。而執柄者又陰令其客數輩。上疏斥之。以爲士論。仁弘素深怒於公。其客文弘道爲正言。詆誣萬狀。專以主和爲言。公連上箚引咎自劾。旣罷相。尋又削奪官爵。右議政李恒福上箚曰。前臣奉使南方。見賊勢盛強。我財匱民散。無一可恃。守國禦冠。戰,守,和三者而已。今旣不能戰。又不能守。下此則聽其求和而已。臣嘗與體相臣某言此事。以此罪成龍。則次弟鋤削。當及臣身。仍謝病。左議政元翼還自京師。上疏曰。柳成龍守正不撓。憂國不私家。其心可悲。此人斥去。謂之親厚而斤之。謂之異議而斥之。士類斥去無遺。非國家之福也。遂稱疾。己亥六月。命還職牒。三司復論之。庚子十一月。又有職牒之命。後月以懿仁王后葬禮。從郊外哭班。卽歸。明年八月。貞敬夫人卒。其十二月。始有敍命。壬寅。選廉謹。領議政李恒福以公名置選首。顧同列曰。此老不可以一善名。特洗郿塢之誣耳。此弘道詆誣語也。癸卯。服闋。復府院君。公上疏仍乞致仕。甲辰。策扈聖元功。公上疏乞除名錄券。將圖畫功臣。畫工至。公以辭功謝遣之。乙巳。會盟禮成。下敎書。賜銀絹,乘馬。令本道。遣長吏致食物。命給奉朝賀祿。公上疏力辭。凡三召。皆謝不就。丁未五月。公卒。年六十六。前夜起坐。如平常誦洪範。公病中。上嘗遣醫視之。朝則與訣曰。遠來勤苦。無以報上恩。仍謝客曰。欲安靜歸化耳。命侍者。整席堂中。北向正坐而沒。有遺言。君道八事。又遺戒薄葬。訃聞。上爲之輟朝三日。賜賻弔如儀。士大夫相率而爲位於城南舊第。哭之如親戚。都民皆奔走會哭。罷市四日曰。微公。吾屬已無類矣。其七月。以禮葬于豐山縣壽洞南向爲封。會葬者四百人。後爲之立祠於屛山。公身都將相。受命傾覆之際。見義明臨事正。盡忠不辭難。考其行事。終始要歸於道德之正。公可謂有德慧術智。而文之以禮樂者也。自朝之耆老。以至宿將舊吏。莫不曰相國之忠。而其竭力周旋。能扶顚持危。終使王業。再安生民父子兄弟相保至今。婾衣甘食。安處樂業。其誰之力也。公通敏博雅。爲文章尤長於詞命。所居樂西厓絶景。自號西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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