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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불교의 수행과 우주법계와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들은 통상적으로 종교에 대해서 그릇된 관념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간단하게 예를 들면 내가 믿고 좋으니까 너도 나처럼 믿고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그중에서 종교만큼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인 것입니다. 깨달음을 대신해서 얻어 줄 수가 없고 구원 또한 스스로 노력에 의해서 얻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하나님도 대신 해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중생들이 가장 쉽게 유혹되는 것이 노력하지 않고 얻는 것과, 누군가가 대신해서 책임져주는 것, 이 두 가지 말을 들으면 쉽게 넘어가버립니다. 이런 말을 하는 종교들이 융성하는 것을 보면 여기가 사바세계라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이런 곳에 모이는 사람들이 중생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부모가 아무리 자식이 안타깝게 보일지라도 자식의 삶을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이 이치입니다. 단지 길을 제시해 주고 자신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 귀감이 되어줄지언정 상대의 업과 고뇌를 대신해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업이 틀리고 근기가 다르고 태어나면서부터 여러 가지가 똑같지 않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팔만 사천 법문과 수준에 맞는 가르침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근기가 천차만별이듯이 불교의 우주 또한 다양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큰 틀에서 보면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가 있고, 이 세 가지를 여섯 갈래로 다시 명확하게 나눈 것이 우리들이 보통 알고 있는 육도(六道)입니다.
육도를 각각 설명하면 천상, 인간, 수라, 축생, 아귀, 지옥으로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중생들이 태어나고 죽는 것을 반복하는 것을 육도 윤회라고 합니다. 자신의 업에 따라 천상에서 지옥까지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을 옛날 큰스님은 게송으로 ‘삼계유여급정륜’ (三界猶如汲井綸) 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윤회하는 우리의 삶이 우물속의 두레박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에 비유했고,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업력에 의해서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는 미혹에서 벗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절간에서 저녁에 예불하는 스님이 종을 치면서 게송을 읊는 것이 있습니다.
문종성(聞鍾聲) 번뇌단(煩惱斷)
지혜장(智慧長) 보리생(菩提生)
이지옥(離地獄) 출삼계(出三界)
원성불(願成佛) 도중생(度衆生)
이 종소리를 듣거든 번뇌를 버리시고
지혜를 키우시어 보리심을 발하소서.
그리하여 지옥은 멀리하고 삼계를 벗어나서
성불하시기를 바라오며 일체중생을 제도하기를
바라나이다.
이 게송 가운데에 출삼계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불교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입니다.
타종교에서는 지옥은 혐오하고 오로지 천국에만 자신들의 모든 소망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지옥은 당연히 벗어나야 하겠지만 천국 또한 오래 머물 곳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업을 쌓아서 천국에 태어나는 것도 그 무엇보다도 좋은 일이지만 천국 즉 천상이라 할지라도 그 곳은 미혹(迷惑)의 세계이며 묶여 있는 세계라는 것입니다.
지옥은 나쁜 것에 의해서 묶여 있다면 천상은 좋은 것에 의해서 묶여 있는 것이죠. 묶여 있는 것, 즉 구속으로부터의 자유가, 불교에서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마치 지옥은 쇳덩어리로 된 사슬에 묶여 있다면 천국 즉 천상은 금덩어리로 된 사슬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모든 구속과 속박으로부터 벗어남, 이것이 해탈입니다. 한 번 더 말씀드리면 요즘 말로 육신과 마음과 대상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라고 할 수 있겠죠.
모든 종교에서 궁극적 가치로 생각하는 천국, 천상, 극락, 하늘나라 등이 불교에서는 왜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천국이라는 것도 결국은 외부적인 환경이 최상이라는 것 이외에는 자아의 욕망은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 천국을 만든 신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이런 것들로 인해서 결코 행복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그런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상상력으로 만든 것이지 실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아는 욕망을 통해서 존재하고 욕망은 끊임없이 채워도 부족하고, 그래서 고통을 피할 길이 없는 것이죠. 그 곳이 천국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욕망이 있는 한은 천국에 가서도 또 다른 천국을 꿈꾸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자기가 있는 천국은 지옥이 되는 것이죠.
무엇보다도 있을 수 없는 것은,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누구의 종은 될 수 없는 것이죠. 그 존재가 부처님이든 하나님이든 간에 종이 된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고귀한 존재의 입장에서 보면 치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구속은 지옥입니다.
다행히도 부처님께서는 한번도 인간들을 종으로 생각하거나 소유물로 만드신 적이 없습니다.
삼계의 고해(苦海)를 건네주는 안내자, 스승, 자애로운 부모 등으로 묘사합니다.
그 스승을 따를 수도 있고, 따르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가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 따르는 결과 또한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불교에서 천상에 간다고 할 때는 기독교에서 이야기 하는 하나님이라는 신의 다스림 속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천상의 신의 존재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삼계안에서 천상의 세계와 인간계의 세계가 나름대로 가치가 있고 행복한 삶이긴 하지만 삼계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 무명(無明-모든번뇌의 근본)에 의해서 갈애(渴愛-중생이 목마르게 오욕을 애착하는것)의 족쇄에 묶인 채 끊임없이 순환하는 육도(삼계)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업의 노예로 사는 존재를 중생이라 하며 그 중생의 삶을 고(苦)라고 합니다.
삼계 내의 모든 삶을 고(苦)라고 하는 것은 그 안에서 경험하는 고통뿐만 아니라 행복 또한 상대적이거나 유한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출삼계 즉 해탈 열반의 세계에 중생들은 곧바로 갈 수가 없습니다. 먼저 삼보에 대한 믿음과 오계를 잘 수지하면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出三惡道).
그 다음에 삼보에 대한 믿음과 계의 준수와 선정력에 의해서 인간과 천상에 태어날 수가 있고, 그 바탕 위에 깨달음을 얻으면 출삼계가 됩니다. 지혜수행을 닦아 가면 삼독심의 번뇌가 소멸되어 갑니다.
그 번뇌의 완전한 소멸을 열반(니르바나)이라 하고 열반에 이르게 되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남으로 해탈에 이르렀다라고 합니다. 즉 완전한 자유로움을 얻은 것입니다. 번뇌의 소멸이
해탈 곧 자유가 될 수 있는 것은, 번뇌는 대상에 집착하는 마음입니다.
번뇌라는 것이 있는 이상은 두 가지에 묶이게 되는데 하나는 대상(法)이요, 하나는 자아(我)입니다.
사성제에서 고통은 집착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과 대상에 집착하게 되면 번뇌가 일어나게 되고 번뇌가 일어나면 마음이 어두워지고 어리석어집니다.
어리석은 마음에서 하는 모든 행위는 잘못되는 것이죠. 그 결과로 고통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집착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중생의 입장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법문을 배우고 수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집착을 하지 말라고 하면 집착하지 않음에 집착합니다. 대상에 대한 집착은 양적인 집착이라면 집착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음적인 집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집착에서 벗어나는 길은, 집착에서 모든 고통이 생겨난다는 사실과 집착에서 벗어나 참된 행복에 이르는 이치를 부처님의 경전을 통해서 배워야 하고, 꾸준히 수행을 닦아 집착이 저절로 사라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지 억지로 없애려고 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키게 됩니다.
모든 존재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애쓰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완전한 행복을 얻고자 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궁극적인 행복은 어디에서 오겠습니까?
완전한 자유에서 온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수행을 통해서 지혜를 확장시켜 나가면 무아에 이르게 되고, 궁극적인 무아가 삼독심이 소멸된 열반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무아의 상태가 되었을 때는 너와 나의 상대적 구별이 없으므로 대상과 자신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곧 완벽하게 깨어있는 상태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완전한 자유에서, 완전한 지혜와 완전한 자비가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행복의 정의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모든 불행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바라는 행복은 일시적인 유한한 행복이거나 상대적인 행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격하게 이야기 한다면 상대적인 행복 또한 넓게 보면 불행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진 행복보다 더 많은 행복을 누군가가 누리고 있다면 당장 불행해질 것이고, 불행의 근본적인 원인은 집착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사랑 즉 자비 또한 자유가 없으면, 집착이 되어서 상대를 구속하거나 소유할려고 하게 됩니다.
자유가 없는 사랑은 구속, 속박, 애착으로 인해 삶이 가난해 지게 되고, 사랑이 없는 자유는 고독, 슬픔, 공허, 외로움의 어둠 속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자유는 서로가 선순환구조로 상생이 되어야 합니다.
자유가 우리 내면의 마음 상태가 되어야 되고, 사랑은 우리 자신의 외적인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불교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용어인 공(空), 무아(無我), 열반, 등을 꿰뚫고 지나가는 한 가지 느낌은 자유 입니다.
타종교에서는 천국과 지옥이 하나 씩 밖에 존재하지 않지만 불교에는 수많은 천상과 수많은 지옥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생전에 지은 선업과 악업의 경중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지은 업에 따라 거기에 맞는 세계에 태어나게 됩니다.
아무리 선업을 지어도 일정한 천상 이상은 갈 수가 없는 곳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이 선업을 지었다는 상(相)이 자신도 모르게 내재해 있어서 공덕이 더 이상 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이상의 천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선정수행을 닦아야 가능합니다. 선정수행을 닦으면 무주상의 선업을 짓는 것이 되어서 공덕이 한량이 없기 때문에 가장 높은 천상까지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타종교에서 이야기 하는 창조주, 조물주의 개념이 불교에서는 범천신, 브라만이라고 불립니다.
창조주와 같은 이신은 만물을 생성시키고 소멸시킬 수도 있는 능력이 있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업에 묶여 있는 미혹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경전 가운데에서 하늘의 신들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 장면을 자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약을 보면 야훼(창조주)는 감정이 조절이 되지 않는 사람처럼 자신의 분노를 이기지 못해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세상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오로지 자신만을 숭배하기를 바라는 유아기적 행동을 하는 자기중심적인 존재이며 남들에게 말 할 때는 사랑의 신이라고 하지만 행동할 때는 질투와 분노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죠.
이런 말은 결코 타종교를 비난하고자 하는 말이 아닙니다. 객관적인입장에서 구약을 읽어보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부처님과 타종교의 신과의 특징적인 차이점을 신통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논쟁은 차치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운가, 그렇지 못한가, 입니다.
아무리 기적을 일으키고 세상을 창조하고 소멸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하더라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존재는 자기 스스로에게 묶여 있는 존재입니다.
사실 자기한테 묶여 있으면 모든 것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묶여 있는 존재란 결국은 고통 받는 중생에 해당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끊임없이 남편, 자식, 아내, 환경 탓으로 돌리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자신의 내면에서 스스로 묶여져 있습니다.
마음이 묶이게 되면 불안정한 상태가 되고 그 마음이 바깥 대상을 끌어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탓, 환경탓을 합니다.
내가 나의 마음에 속지 않고, 묶이지 않고, 자유로우면 어떠한 밖의 경계에도 끄달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반대로 생각합니다.
상대방 때문이야, 돈이 없어서, 환경 탓이야 등의 밖의 대상 탓으로 돌리지만 근본적으로는 내 마음 속에 있는 자신의 업이 자기를 묶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도 우선순위가 자신부터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상대 탓을 해도 늦지 않습니다.
수행자라 하더라도 남탓하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남탓을 한다는 측면에서는 같을 수가 있는데 일반 사람들은 우선 남탓을 하고 자신을 보지만, (사실, 자신을 둘러 볼 줄 안다면 그런 사람은 그래도 괜찮은 사람일 것입니다) 수행자는 자신을 먼저 탓하고 남탓을 합니다.
작은 차이 같지만 굉장히 큰 차이인 것 입니다.
수행과 불교의 세계관에 대해서 한 번 더 짚고 다음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원각선원에서 법회를 할 때 예불의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삼보에 대한 믿음 즉 귀의함에 대해서 독송합니다. 그 다음에 오계를 수지 독송합니다.
법회 때마다 빠뜨리지 않고 제일 먼저 다 같이 독송하는 이유는 귀의와 오계 수지가 출삼악도 곧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에 떨어지지 않는 커트라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몸 받아서 불법 만나기가 백천만겁난조우, 맹구우목이라는 말들을 흔히 쓰는 이유가 잘못해서 다른 몸을 한번 받게 되면 벗어나기가 그렇게 어렵기 때문입니다.
인간도 전생의 업 때문에 생긴 현생에서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습(習)을 벗어나기가 어려운데, 예를 들어 축생 세계에서, 축생은 무지의 습(習)이 있어서 그 업을 벗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과거 부처님, 미래에 다시 오실 부처님, 모든 부처님 법문의 근간이 되는 것이 칠불통계(七佛通戒)라는 게송이 있습니다.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심(自淨其心) 시제불교(是諸佛敎)
모든 악한 행위를 하지 말고 온갖 선행을 받들어 행하라.
그리고 스스로의 그 마음을 청정히 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니라.
첫 번째 게송은 삼악도를 벗어남을 의미하고,
두 번째 게송은 이와 같이 수행하면 인간과 천상의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세 번째 게송은 출삼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개의 게송이 모든 부처님이 말씀 하시고자한 것이고 불교를 함축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부처님 같은 분은 내적인 구속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육신과 마음(자의식)을 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육신과 자의식을 나라고 동일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언어로는 진리의 몸, 법신, 불성, 진여 등으로 설명할 수는 있지만 이것은 말일 뿐, 이름일 뿐, 우리의 생각과 언어를 넘어서 있기 때문에 이런 언어를 함부로 쓰면 중생들이 언어에 갇히게 된다고 옛 스승들은 크게 호통을 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이런 것에 대한 질문을 받으시면 침묵, 무기(無記,대답하지 않으심)를 하셨습니다. 또한 이 침묵은 부처님의 가장 위대한 법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은 머리로, 글로, 말로써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수행의 체험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리의 몸은 불생불멸하고 상주불멸하고, 영원하기 때문에, 없게 할 수도 없고 있게 할 수도 없는,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 ‘원래부터 그러한 것’ 이라서 부처님께서는 여여(如如) 라고 이름 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진리라는 이름과 관념으로만 알지만 깨달은 성인들은 실제적 체험으로 아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진리, 불성, 진여, 영원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면 이름은 언어이고 언어란 유위법인 인간의 의식 속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리란, 무위법에 속하는 것이고 인간의 의식과 언어를 넘어서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언어 즉 지식을 배우면 실천하기 보다는 그 지식에 갇혀 버립니다. 관념과 실제를 혼동하고 관념이 실제라고 착각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체험조차도 마찬가지로 지식으로만 이해할려고 하게 되는 것이죠.
부처님께서도 궁극의 세계에 갈 수 있는 수행의 방법을 설명하셨지만, 궁극의 세계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수행을 통한 번뇌의 소멸을 그저 ‘열반’ 이라고만 했지 그 이상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저는 부처님의 크나큰 자비심을 느낍니다.
마치 자애로운 부모가 어린 자식에게 위험한 칼을 아예 치워 놓듯이 중생들이 관념에 빠질 것을 염려하셔서 아예 대답을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또한 고(苦)를 해결하는데 있어 관념과 이론은 소용이 없기 때문에 오직 수행을 통한 고(苦)의 해결방법만 말씀하십니다.
수행을 통해서 경지가 높아지면 저절로 모든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언어로써 풀어 놓으면 중생들은 수행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수행은 어렵고, 지식은 쉽게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지식으로 안 것을 실제 수행이 된 것처럼 착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되면 아무리 날카로운 칼이 옆에 있어도 다치지 않을 뿐더러, 요긴하게 쓸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말로써 만일 설명하게 되면 중생들은 자신의 의식 수준으로 전락시켜서 이해하기 때문에 크게 잘못되어 지는 것이죠. 또한 자기 수준에서 이해한 것을 알았다 하는 자기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도 자신의 법문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을 가지고 아직까지 시비를 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인 진리의 세계를 말과 글로써 모두 설명할려고 하는 종교나 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잘 못된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주변에서 여전히 많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리의 세계는 말, 글, 생각으로 다가갈 수 없으며 그것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므로 자신의 개인적인 수행의 체험을 통해서 의식 수준이 그 만큼 높아져야 실제적으로 아는 것이 가능합니다. 말, 글, 생각은 그 자체가 상대적일 뿐만 아니라 유한하고 현실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아무리 말과 글과 생각으로 절대적인 진리를 이해하고 설명해도 결국은 상대적이고 유한함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으로 아는 것으로는 올바른 지혜가 생겨나지 않고 자신에게 생겨나는 괴로움을 결코 벗어 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론과 관념을 버리고 수행을 통하여 도를 깨우친 성인은 육신과 자의식(마음)을 넘어서 근본을 깨달아 더 이상 괴로움이 없는 생사의 고해를 벗어난 것입니다.
육체란 생겼다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이 있는 이상은 태어나고, 병들고, 늙고, 죽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그리고 이 육신을 가지고 영원히 행복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육신과 자의식 자체는 유한하고, 유한한 존재는 불안정하고 고통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육체와 마음(자의식)이 가진 한계점이자 특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육신과 마음을 넘어선 그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데, 그 길이 번뇌의 소멸을 통한 열반에 이르는 길이며 그렇게 된 분은 법(진리)의 몸을 얻었다고 합니다. 법신을 또다시 언어로 한정시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2600년 전에 몸으로 나투어 보이신 부처님을 ‘천 백억 화신 석가모니불’ 이라 하고, 마음속에 공덕을 원만히 구족하신 부처님을 ‘원만보신 노사나불’ 이라 하며 근본 진리(다르마)의 몸을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법을 보는 자가 나를 보는 것이다. 지금 형상의 내 모습을 부처라 하지 말라.
나의 이 모습은 전륜성왕도 32상 80종호를 가지고 있다. (전륜성왕이라 함은 몇 천 년 만에 이 세상에 나와서 지혜롭게 세상을 통치하는 지도자(황제)라고 합니다.)
이 사람도 나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그 사람을 부처라고 하지는 않는다.
부처란, 형상 이전에 근본 진리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중생의 세계가 너무나 좋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집착을 하고 싶고 영원하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행복한 이 순간에도 우리 깊은 무의식 가운데는 미혹이 뿌리내리고 언제든지 가지를 뻗으려고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미혹이 있는 이상, 괴로움은 같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마치 썩은 물에 모기가 깃들 듯이, 썩은 물에 지금은 모기가 없다손 치더라도 때가되면 모기는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깊은 무의식 안에 자신의 어리석음이 또아리를 틀고 있음을 모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을 현대 심리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의식, 잠재의식, 무의식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 층은 3%이하라는 설과 10%이하라는 설이 있습니다. 10%라 하더라도 전부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죠.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와 인식의 범위는 10%이내라 할 수 있고, 약 90%이상은 무의식 층에 속합니다. 수많은 생을 윤회하고 진화해온 결과가 우리들의 몸과 마음에 감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업력이고 이것에 의해서 알게 모르게 지배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이 업을 지혜롭게 풀어내면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아 갈 수가 있겠지만 업력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줄을 모르면 끝없이 윤회하면서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업이란 가변적이고 양면성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에 따라 좋은 쪽이던 나쁜 쪽이던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이란 자신 안에 존재하는 업이라는 미혹을 걷어 내는 작업입니다. 자신을 변화시켜 가는 작업을 해 나가다 보면 수행이 깊은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은 바꿀 것이 없더라.’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성철 큰스님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산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물길도 틀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 산이 나에게 시비를 걸어와서 가만둘 수 없다는 것이죠.
공부가 깊어지다 보니 산과 물이 하나가 되고, 다시 공부가 더 깊어지니 산은 그대로 산으로써 부족함이 없고, 물은 물로써 그대로 부족함이 없는데 산과 물(세상을 향해서)을 가지고 시비한 어리석은 내 마음이 문제였다. 그래서 내 마음 하나 닦고 보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하신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가 진리이고 다 여여한 것이라고 깨친 분들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을 화신, 보신, 법신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지금 부처님이 계신다면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가지고 계시겠지요.
몸은 화신이요, 닦은 공덕의 마음은 보신이요, 깨친 마음은 법신이라 하겠지요.
중생도 여기에 빗대어 나누어 보면 현재의 이 몸은 업장의 화신일 것이고, 마음은 업장으로 가득할 것이며, 법신은 아예 깜깜 무소식일 것입니다.
인도의 요가 쪽에서는 ‘차크라’ 라고 해서 정신적인 수준을 일곱 단계로 나누기도 합니다.
수행이 높아질수록 차원이 상승하게 되는데 정신적인 차원에 걸맞는 세계를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즉 차원에 해당되는 세계가 우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지라도 존재한다고 합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유정의 존재가 가지고 있는 의식이 만물을 생성시킨다는 것입니다. 유식(唯識)에서는 이것을 “삼계유심(三界唯心)이요, 만법유식(萬法唯識)이다.” 라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오직 예수’ 라고 하지만 우리 불교인들은 ‘오직 마음(의식)’ 이라고 합니다.
오직 예수라는 것도, 오직 마음(唯識)에서 나옵니다. 자신의 생각 곧 마음이 부처를 그리기도 하고 예수를 그리기도 합니다. 자기가 그려서 만든 부처와 예수는 실제 부처와 예수가 아닙니다. 업이라는 의식이 우리 몸을 만들 듯이 업식이 모이면 우주법계가 만들어집니다.
현재 이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 정신적인 세계가 높은 차원에 있다면 그 사람은 천상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반대로 삶이 고뇌로 점철되어 마음의 불길이 활활 타오른다면 지옥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서 천상과 지옥을 창조하듯이 우주 법계와 바깥세상 또한 유정(有情)의 업력에 의해서 창조되어집니다.
이와 같이 이 몸을 가지고 살아 있을 때 수행을 통해서 정신적인 수준을 높여 놓으면 죽고 난 뒤에도 거기에 맞는 높은 세계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과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因)이 연(緣)을 만나 과(果)를 이루는 것이지요.
인이란 이번 생에 내가 닦은 수행의 공덕이고, 연은 그 공덕에 걸맞는 내생이요, 과는 거기에서 내가 태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요즘말로 다시해보면 원인이 조건을 만나 결과를 맺는다고 할 수 있고, 직접적인 원인이 간접적인 조건과 결합해서 결론이 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상 세계의 유위법에서 보면 씨앗이 인이요, 밭이 연이라면 열매가 과라고 하겠지요. 진리라는 것은 유위법과 무위법이 不二, 즉 하나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알 수 없는 무위법 세계의 법칙 또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유위법의 법칙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현상 세계를 잘 꿰뚫어 본 분들은 경전을 보지 않아도 진리를 깨친 경우가 흔히 있고, 그 분들의 말씀과 부처님의 말씀이 별로 틀리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법(진리)의 맛을 한 맛이다(一味)라고 했습니다. 동해안의 바닷물이나 서해안의 물이나 대서양의 물은 한 맛입니다. 즉 짠맛이죠.
이와 같이 진리의 맛, 즉 진리의 법칙은 유위법에서나 무위법에서나 과거, 현재, 미래 또는 전생, 현생, 내생까지 같은 법칙이며 누구에게나 올바르게 맛을 본 사람이라면 같은 맛입니다.
비록 현상 세계를 넘어서 있는 세계라 해도 현상 세계를 바르게 잘 관찰하게 되면 그대로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화엄경의 법성게에서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란 말은 온 우주를 알기 위해서 우주를 몽땅 살펴 볼 것 없이 한 티끌만 살펴보면 그 안에 축소된 온 우주(시방세계)가 있다는 것이며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은 한 세계와 전체 세계가 다르지 아니하고 수많은 세계와 한 세계가 또한 다르지 아니하다는 내용입니다.
우리자신이 삼계(우주법계)안에 속해있지만 우리마음이 또한 삼계를 담고 있습니다. 우주법계(삼계)를 알기위해서 밖으로 나갈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유위법적인 이치가 과학이라면 무위법적인 이치는 불교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과학은 물질적이고, 상대적인 세계에 속하고, 객관적인 검증이 되어져야 하는 것이지만, 불교는 정신적이고, 주관적인 세계이며 자발적인 수행의 체험을 통해야만 이 검증이 가능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외형적으로는 엄밀히 다른 현상이지만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의 법칙은 결국은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상적인 세계를 사법(事法)즉 유위법이라고 하고 근본진리의 세계를 이법(理法)즉 무위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법(理法)의 세계를 깨닫고 보니 이(理)와 사(事)가 다르지 아니하기에 이사무애(理事無碍)라 하고,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유위법에 있어서 각각 다른 현상들 사(事)와 사(事)가 곧 하나임을 아는 것을 사사무애(事事無碍)라고 합니다.
사사무애가 되어진 분을 부처님이라고 할 수 있고, 완전한 깨침에 이르렀고 열반을 성취하셨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의 깨치신 분은 ‘이사무애’ 정도 되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은 제 생각이니 참조하십시오.
현실세계에서 보면 법을 준수하면 법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법을 어기면 법에 의해서 범법자가 되어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법위에 사람 없고 법 아래에 사람 없다고 하듯이 진리 위에 어떤 존재가 있을 수 없고 진리 아래에 부당한 존재 또한 없는 것입니다.
다만 성인이 말씀하신 진리를 잘 배우고 익혀서 진리를 따라서 사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진리를 알지 못하거나 외면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을 뿐일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선택은 본인의 자유겠지만 결과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져야할 것 입니다.
진리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참된 것이며, 진실한 것이며, 참된 도리이자 올바른 이치이고, 모든 사람과 존재에 대해서 보편타당하다고 인식되는 것일 것입니다. 창조 할 수도, 소멸 시킬 수도 없는 것이며, 소멸되지 않기에 창조 되어지지 않는 것이며, 창조되지 않으므로 소멸되어 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하다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어떤 절대자가 있어서 창조한 것이라면 벌써 그것은 진리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절대자가 곧 진리라고 합니다.
절대자라는 존재는 상(相)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相)은 생성된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절대자 또는 절대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그것은 어떤 상(相)을 의미하고 상(相)이라는 것은 생성되어진 것이고 생성되어진 것은 반드시 소멸 되어집니다. 생성과 소멸은 하나의 동전에 앞면과 뒷면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진리라는 것은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유형의상(相)과 인지할 수 없는 무형의상(相), 이 둘을 초월하여 있는 것입니다. 무형은 상(相)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유형의 반대되는 개념이 있고, 없음이라는 이미지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상(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에도 변할 수 없는 것이며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여기든, 저기든 특정한 장소와 상관없이 같은 원리로써 작동하는 것이며, 어떤 조직과 관계없이 공평무사하고 합리적인 이치이자 원리인 것입니다.
이 진리는 불교, 기독교 등의 모든 종교를 초월하여 있는 것이며 종교 이전의 법칙이자 이치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들이 진리에 대해서 다양한 이름을 붙이지만 이름 이전에 진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진리의 법칙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어떤 신이 만든 것도 아니라 내가 깨닫고 보니 이런 진리의 세계가 있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진리의 법칙과 진리의 세계를 깨닫는 자를 부처님이라 이름하고, 부처님께서는 이 진리에 대해서 설명하시고 진리에 도달하는 길을 제시하고 진리에 이르게 되면 모든 고통을 벗어난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모은 것을 불교에서는 경전이라고 합니다.
삼계 가운데에서 욕계는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천상은 사왕천에서 타화자재천까지가 해당됩니다.
욕계는 말 그대로 욕망이 있는 세계를 말하며, 그 중에서 오욕이라고 할 수 있는 애욕, 물질욕, 식욕, 수면욕, 명예욕 등이 있는 곳을 말합니다.
색계는 범중천에서 유정천까지를 말하며 색계는 욕계와 달리 물질세계이기는 하나, 물질이 아름답고 청정하여, 미묘한 물질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곳은 욕계의 중생보다 더 많은 복력의 중생이 태어나서 많은 복락을 받고 즐기는 세계입니다.
무색계는 공무변천에서 비상비비상천까지를 말하며 물질세계의 형상을 넘어서서 본질적인 물질과 순수한 정신만이 충만 되어 있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이 세계마저도 아직도 미세한 정신적인 번뇌가 남아 있어서 사바세계 즉 삼계안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무색계는 욕계와 색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평화와 복락을 누리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삼계에서 가장 으뜸가는 세계이며, 여기에서 정진을 더욱더 하게 되면 부처님의 경지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러면 수행이 불교 세계관인 삼계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불교 수행은 삼학(三學)입니다.
지계(持戒)수행, 선정(禪定)수행, 지혜(智慧)수행입니다. 이 세 가지를 세밀하게 다시 분류하면 팔정도가 됩니다. 팔정도가 곧 삼학입니다.
지계는 보통 오계를 말하는데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 이 다섯 가지이죠. 삼보(불.법.승)에 귀의(믿음)와, 보시행과 이 다섯 가지를 잘 준수하면 출삼악도,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삼악도는 벗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오계란 단순히 불교의 계율에만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를 떠나 인간이 삶을 영위하면서 지켜야 할 기본적 도덕, 상식, 합리적인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수행자, 성직자, 종교인이 되면 우리들은 그들에게 보통 사람들의 수준 이상을 기대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인격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은 경우가 흔한 일이지만, 불교 지계수행의 입장에서 보면 성직자라하면서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를 무시한다면 그 이상은 더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나 성직자는 먼저 상식적인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도를 이야기하든 신과 천국을 말해도 늦지 않는 것입니다.
현생에서 삼보에 대한 믿음(귀의)과 보시 그리고 오계수행에 준해서 살면 최소한 인간 이상의 몸을 받고 태어날 수가 있습니다. 지계수행을 잘 한 사람은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에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현생의 삶 가운데에서도 오계에 준해서 살게 되면 지옥의 뜨거운 불길과 같은 고통은 겪지 않고 살 수가 있을 것 입니다. 또한 축생 세계의 어리석고 갈 길 모르고 헤매는 마음을 벗어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계의 첫 번째가 생명을 해치지 말라, 곧 생명을 사랑하라 입니다. 모든 존재는 육신과 의식(영혼) 두 가지로 볼 수가 있습니다. 육신을 죽이는 것도 살생이지만 미움과 증오는 의식 즉 마음을 죽이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직접적인 살생이 많이 있었지만, 요즘 시대에는 상대방의 마음(영혼)을 죽이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증오와 시기 등은 정신적인 살생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불투도는 주지 않는 것을 갖지 말라, 곧 베풀면서 살겠습니다. 이것 또한 남의 물건을 단순히 가지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에 탐욕을 적게 갖는 것입니다. 불필요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죠.
세 번째, 불사음은 성적인 방종에 빠지지 않겠습니다. 곧 마음속의 음욕을 내려놓고 쉬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네 번째, 불망어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곧 진실한 말만을 하겠습니다, 입니다.
다섯 번째, 불음주는 술 및 정신을 흐리게 하는 것 (마약, 환각제 등)을 먹고 마시지 않겠습니다. 이 말은 정신을 놓아버리고 어리석게 살지 않겠다고 부처님께 약속을 하는 것이죠.
오계수행은 인간 몸을 확실히 받게 합니다. 거기에서 삼보에 대한 믿음(귀의)과 보시행을 더 닦으면 인간에서부터 천상 가운데 사왕천에서 타화자재천까지 태어날 수 있는 복력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지계수행, 보시행, 삼보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선정수행이 깊어지면 천상의 범중천에서 천상의 마지막인 비상비비상천까지 수행력과 실천행의 공덕의 결과로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이 아닌 신의 몸으로 화생(化生)하는 것입니다.
범중천에서 비상비비상천 내의 천상의 세계는 색계와 무색계안에 포함되는 것이고 지옥에서 타화자재천까지는 욕계에 해당됩니다.
지혜수행부터는 삼계를 벗어났다고 하기보다 삼계를 벗어날 수 있는 열쇠를 얻었다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지혜수행의 완성, 해탈이 되어서야 비로소 출삼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혜수행을 닦는 동안은 여전히 몸과 마음은 삼계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수행을 닦기 시작하면 삼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고, 그래서 지혜수행부터 ‘출삼계’라고 합니다.
지계수행을 깊이 잘 닦은 사람은 인간의 몸을 받아도 지계수행을 얕게 닦은 사람보다 더 많은 복력을 가지고 태어나겠죠.
이와 같이 똑같은 수행을 해도 수행의 깊고, 얕음에 따라 같은 세계에 태어나도 복력은 차이가 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계를 옛날 스님께서는 유학과 비교하면서 이렇게도 설명하셨습니다. 인간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 곧 인(仁)은 불살생에 해당되고, 의(義)는 불투도, 예(禮)는 불사음, 지(智)는 불음주, 신(信)은 불망어, 이렇게 하고 보면 오계의 뜻이 더욱더 분명해 보이죠?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있는데 어떤 종교는 신을 믿어 천국에 가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어떤 종교는 선한 행을 하여 내세에 인간이나 천상(천국)에 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종교들이 있습니다.
우리 불교는 믿음과 보시와 오계수행을 통하여 인간과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첫 번째 목표로 하고, 선정수행을 더하여 더 높은 차원의 천상세계에 나는 것을 두 번째 목표로 하며, 세 번째는 고요한 마음에서 지혜를 얻어 출삼계의 길에 들어서고, 네 번째는 지혜수행을 통하여 해탈하여 부처님세계, 즉 부처의 경지에 도달하고, 다섯 번째는 부처님의 경지에서 대자비로써 중생을 구제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합니다.
그러므로 중생이 스스로 부처님이 되는 종교는 불교 밖에 없습니다. 신에 의해서 인간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어리석고 보잘것없는 우리 같은 중생들도 서원을 세우고, 발심하여, 수행의 단계를 높혀가면, 생을 거듭하면서 언젠가는 우리도 부처님처럼 거룩한 존재가 되어진다는 것이 부처님이 깨달은 바이며, 부처님께서 우리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들이 보통 쉽게 쓰는 말 중에 모든 것이 인연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말 뿐만 아니라 많은 불교의 용어들이 일반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왠지 소극적이고 세상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느낌과 더 나아가서 현실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 이유를 몇 가지 점에서 찾아보면 첫째, 절대적 세계를 언어로 표현하게 되면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느껴집니다.
두 번째, 현재의 삶에서 초월해서 더 나아가야 한다고 할 때 현실과 타종교는 삶을 더 집착하게 하는 데, 불교는 집착을 버리라고 하는 것이 마치 삶에 대해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라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 번째는, 타종교와 중생들의 현실적인 삶은 항상 결과 지향적이고, 목적 중심적인 삶의 태도에 대해서 말하지만, 불교는 결과와 목적은 미래에 있는 것이고, 미래라는 것은 우리들의 생각 즉 관념 안에서만 있는 것이지 실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에 인연법이다, 라고 무관심해보이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실재하는 것은 다양한 조건들이 인연법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이 조건을 갖추는 것이 모든 것이고 그것이 목적이자 결과이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생이라는 고정되어진 결과물이라면 부처님이 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 할 것 입니다. 하지만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작은 조건들을 하나씩 갖추어 가는 것 이것은 어느 중생이던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길입니다.
언어가 관념이기 때문에 관념을 언어로 표현 할 때는 그 언어가 명확하고, 논리적이고, 손에 확실히 잡히지만, 실제를 언어로 표현하면 오히려 표현이 우유부단해서 뭐가 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불교는 되도록이면 실제를 언어로 표현하려고 애쓰다 보니 그렇게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를 알고 있는 사람이거나, 알고 싶어하는 사람은 머리로써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언어를 넘어선 언어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수행이란 조건을 갖추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팔정도가 바로 그것이죠. 여덟 가지 각각의 조건이 서로 선순환 구조로써 연기의 상생을 한다면 우리도 언젠가는 부처님이 될 것입니다.
수행자가 현실 가운데에서 수행정진을 잘해 나가면 육체는 지금 이 현실에서 같이 존재하지만, 마음이 한 사람은 천상가운데에서 평화와 복락을 누리고, 또 다른 사람은 축생, 아귀, 지옥 등에서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축생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는 행위들은 고귀한 가르침을 싫어하고, 본능적인 삶 즉 먹는 것, 자는 것, 이성, 재물 등 탐욕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보통 자신을 되돌아 볼 줄 모르고 자기중심적이고 무지에 갇혀서 습관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두 가지 핵심적인 마음은 우치와 탐욕입니다.
또 아귀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하면 인색하고 집착이 강하고 끊임없이 남의 것을 빼앗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지옥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잔인하고 다른 생명을 함부로 해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악독한 짓을 서슴없이 행하는 자들 입니다.
이와 같은 마음이 현재 자신에게 있다면 곧 바로 그런 행동을 할 것이고, 그런 행동을 하게 되면 삼악도 가운데에 한 곳으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일어나서 고통을 받으면 자신이 지은 죄업의 결과로 이런 지옥의 고통을 받고 있구나! 하고 참회하고 부끄러워하고 열심히 수행정진을 해서 마음과 행동을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지옥의 환경과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부처님의 말씀과 스승의 가르침을 잘 배우지 않으면 지옥의 행위를 하게 되어있고, 그러면 죽어서 지옥에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살아 있을 때에도 지옥의 환경과 마음 때문에 고통받고 어리석게도 참회할 줄 모르니 죽어서도 지옥에 가게 됩니다.
악순환 구조가 연속되어 지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고통이 생길 때 똑같은 상황을 두고도 어떤 사람은 참회로써 자신을 성장시키고, 또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주변을 탓하면서 상황을 악화시키고 부정적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작자수’(自作自受)라는 말이 있듯이,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다, 라고 합니다. 지금 현재가 고통스럽더라도 그것을 자신이 성장의 계기로 삼아서 자신의 차원을 높이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아무리 지옥의 고통을 현재 받는다 하더라도 자기 마음의 근본을 지금 바로 볼 수 있으면 곧바로 천상의 마음이나 출삼계의 마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외부적으로는 지옥 같아도 그 사람은 천상에서의 삶이나, 성인의 마음처럼 평화로울 수가 있습니다. 그 마음이 평화롭고 지혜로우면 현실 또한 그 마음과 똑같이 변해집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이것 또한 不二 곧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수행정진을 통해 천상의 마음을 기르고 성인의 마음을 배워서 보살행을 실천하고, 그 결과로 현생에서는 평안하고 행복하며, 내세에는 천상이나 성인의 길, 즉 부처님 되는 길을 가야하겠습니다.
앞에서 인연법에 대해서 시작하다가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 수행자들은 인연을 잘 지어야 합니다.
일반인들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사람 한 번 잘 못 만나면 어떻게 됩니까? 또는 잘못된 환경을 한 번 만나면 또 어떻게 됩니까?
인생 전체가 완전히 꼬여버리고 한 생을 망쳐 버리죠. 정신세계 곧 진리의 세계에서는 이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수많은 생이 잘못되어지는 것이죠.
올바른 스승, 올바른 가르침, 올바른 도반의 인연은 내가 수행을 열심히 하는 것보다도 어쩌면 더욱더 소중합니다. 그래서 ‘인연 따라 간다’ 이런 말을 하죠. 내가 좀 부족해도 좋은 인연이 지어지면 연기의 법칙에 의해서 나도 저절로 좋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수행을 잘하지 못하면 대신에 좋은 인연을 꼭 붙잡으십시오.
반대로 내가 수행을 잘하고 복을 지으면 좋은 인연이 다가옵니다.
불교수행을 삼학이라고 했습니다. 스님들이 절에서 예불을 올릴 때 제일처음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慧香), 해탈향(解脫香),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을 먼저 낭송합니다.
지계수행은 앞에서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계수행을 잘 닦은 사람의 마음과 말과 행동에서 지계의 향기가 가득함으로, ‘참된 인간이 됩시다.’ 하는 의미에서 계향이라 하고, 계향으로 모자라니 선정수행을 닦아서 선정의 향기가 가득한 사람은 욕망을 평정하고, 마음이 안정되고 평화로워지니 정향이라 합니다.
정향이 무르익으면 마음이 적적(寂寂)해지고 안정되어진 상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마음이 성성(惺惺)해지는 상태, 곧 깨어있는 마음이 생기면 그것을 혜향(慧香)이라고 합니다.
깨어있는 마음이 지혜라고 하는 것은 자신(我)에서 일어나는 (몸과 마음의) 현상과 대상(法)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깨어있는 마음에서 각성되어지므로 자신과 대상에 대해서 삼법인(三法印)인 무상, 고, 무아를 헤아려 알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현상의 이치와 근본의 이치 그러한 이치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 가를 잘 아는 것이죠.
현상의 이치를 안다는 것은 무상(無常)을 아는 것이고 근본의 이치를 안다는 것은 무아(無我)를 아는 것이며 현상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은 고(苦)를 아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수행을 닦아가기 시작한 것을 혜향이라고 이름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해탈향인데 해탈향은 지혜수행을 통해서 번뇌를 완전하게 소멸하여 열반을 이룬 부처님에게서 나는 향기를 해탈향이라 하겠습니다.
그 다음은 부처님같이 해탈을 이루신 분의 지혜와 자비를 해탈지견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애로운 부모가 어린 자식을 돌보듯이 반야지혜와 대자비로, 우리 중생들을 보살피는 부처님과 같은 분에게서 나는 향기가 해탈지견향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불교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위의 해석은 저의 말이니 절대시 하지 마시고, 올바르게 참고 하셔서 수행의 체험을 통해 확인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육도의 각각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하고서 이번 법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육도에서 가장 고통받는 세계가 지옥인데 지옥은 성품이 잔인하고 생명을 함부로 해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악독한 짓을 행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지옥의 세계는 제일 고통스러운 무간지옥부터 시작해서 총136개의 지옥세계가 있다고 합니다.
이 지옥의 세계에는 인간의 몸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화생(化生)한다고 합니다. 지옥의 고통을 뜨거운 불에다 비유하기도 하는데 지옥의 불길에 비해 인간계의 불은 차다고 하고, 고통 때문에 죽어도 다시 소생하고, 또 고통 때문에 죽고 태어나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온갖 고문 도구에 의해서 이루 말 할 수 없는 고통을 받는 곳입니다.
그 중에서도 무간지옥, 아비지옥이라 하는 지옥은 어머니를 살해하거나, 아버지를 살해하거나, 부처님 몸에 상해를 입히거나, 아라한을 살해하거나, 정법을 비방하고 부처님의 진리를 배우는 모임을 깨뜨리는 행위를 하는 사람, 이 다섯 가지를 ‘오역죄’ 또는 ‘불통참회’(참회가 되지 않는 죄)라 하고 지옥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럽고 오래 동안 겪어야 하는 지옥에 떨어지게 됩니다.
우리들도 보통 고통스러운 현실을 아비규환이라고 하는데 아비도 지옥이요, 규환도 지옥입니다.
지옥의 하루는 인간 세계의 900만 년에 해당 된다고 합니다. 이 무간지옥은 타 지옥에 비해서 1000배나 더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우리들은 지옥에 가는 중생들이 우리들과 별로 상관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조금 유의해서 주변을 살펴보면, 자식이 유학생활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기에 그의 부모가 돈을 적게 보내 주었는데, 그 아들은 분심을 못 이겨 한의사 아버지를 불태워 죽인 일이 서울에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총기 난사로 수많은 사람을 죽인 조승희라는 학생의 경우만 봐도 처음부터 악한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학생은 평소에는 누구보다 착하고 소심한 학생이었지만, 한 생각 잘못으로 지옥에 떨어질 업을 짓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루에 수십 번도 넘게 지옥과 천상을 왔다 갔다 합니다. 육도를 한 순간에도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순간적으로 일어나서 행동을 하게 되면 육도의 한 곳에 떨어지는 원인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만큼 알 수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깨닫기 전에는 너 자신의 마음을 믿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남을 믿을 수 없다라고 하지만 사실 자신의 마음을 먼저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간순간 변화하는 자신의 마음을 잘 관찰하고 더불어 수행의 공덕으로 가득 채워가야 할 것입니다.
살아서도 지옥의 고통을 받지 말고, 죽어서도 지옥의 세계는 가지 않도록 합시다.
다음은 아귀 세계인데 살아생전에 인색하고 탐욕이 지나친 존재이며, 다른 사람을 시기, 증오하면서 조금도 보시하지 않고, 깨알만한 물건도 아까워하고, 질투가 심한 사람들이 가는 세계입니다.
보통 귀신이라고 하는 존재도 아귀의 세계에 속합니다. 귀신의 존재는 지옥과 같은 험악한 세계에 살기도 하고 인간계에 태어나서 과보를 받기도 합니다. 그 태어나는 형태는 부모 없이 업력에 의해서 태어나는 화생(化生), 부모에 의지하여 태어나는 태생(胎生) 등의 다양하게 태어난다고 합니다.
아귀의 존재는 백천년이 지나도록 음식과 물의 이름조차 듣지도 못하기에 배고픔과 목마름으로써 고통이 한 없이 크다고 합니다. 또한 아귀의 신체적인 특징은 배는 산과 같고, 목구멍은 바늘구멍과 같으며, 머리는 반대로 크다고 합니다.
이러한 체격 때문에 음식이 있어도 먹지 못하고 먹으면 목에서 불이 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음까지 안정되지 못하고 늘 불안하며 다양한 신체적인 형태의 아귀의 존재가 있고 과보 또한 다양하게 받고 있습니다. 생전에 귀중한 것을 얻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거나, 자기만 살기 위해 가족을 버려 죽게 하거나, 자신의 부와 명예를 위해서 거짓으로 진리를 말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독이든 음식을 판매하거나 등의 과보로 아귀도에 태어난다고 합니다.
육신이 없는 아귀를 보통 귀신이라고 하고 유가에서는 신이라고도 합니다. 아귀는 인간계 보다 밑에 있는 업이 많은 존재인데 인간들 중에서는 신을 받아 오히려 인간 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부류와 인연이 되면 그러한 사람들도 아귀의 세계와 인연이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에 의지하고 믿기 보다는 (경전상에서 볼 때) 오히려 불쌍하게 여기고 제도하는 입장에 서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귀(귀신, 신)들은 전생에 죄업을 많이 지은 과보의 결과이므로 불쌍히 여기고 부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깨우치도록 도와주고 제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 다음은 축생의 세계입니다.
미혹에 빠져 지혜가 없고 본능적인 삶, 즉 생식, 수면, 식탐 등 탐욕에 찬 중생들이 떨어지는 세계입니다. 축생의 형태는 태에 의지하는 태생(胎生), 알에서 태어나는 난생(卵生), 습기에 의지하여 태어나는 습생(濕生), 스스로 업력에 의해 태어나는 화생(化生), 등이 있습니다.
축생은 무지로 인하여 현재의 결과가 되었고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경전인 십이유경에 보면 축생 미물의 종류가 나옵니다.
그 중 어류가 640여종, 조류 450여종, 수류가 2400여종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 과학으로도 측정하기가 어려운데 그 시절에 어떻게 알았는지 지금도 한없이 경이롭기만 합니다. 축생의 세계는 약육강식에 의해서 그 투쟁의 고통이 잠시라도 쉴 수가 없습니다.
동물의 왕국이라는 TV프로그램에서 아프리카 초원에 있는 누우같은 짐승을 한번 보십시오.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서 스쳐지나가는 바람에도 귀를 쫑긋이 세우고 깜짝 놀라는 장면을 봅니다. 한 순간에 목숨이 달아날 수 있으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물론 너무나 무지하기에 고통이 무엇인지도 모르겠지요. 사람들 중에서도 고통이 고통인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이런 사람이 부러울 때도 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은 속도 좋지 어떻게 이 상황에서도 아무렇지도 않지?’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무지를 가장 큰 죄의 근원으로 봅니다. 모든 죄의 근원은 무지입니다. 죄가 죄인 줄 모르게 하는 무지는 죄를 계속해서 짓게 만들고 그로 인해서 끊임없는 고통을 받게 되지만 그 원인을 올바르게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원인을 찾지 못하면 올바른 처방을 할 수가 없어서 고통은 더욱 심해지고 끊임없이 반복되지만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가장 훌륭한 사람을 성인 곧 ‘생이지지’(生而知之:전생에 벌써 지혜를 갖추고서 이번 생에 태어나는 사람)라 했고, 그 다음을 ‘학이지지’(學而知之:태어나고 난 뒤 배워서 지혜를 터득하여 잘못되게 하지 않는 사람), 그 다음은 ‘곤이지지’(困而知之:몸소 체험해서 잘못되지 않게 하는 사람)로 분류할 수가 있습니다. 곤이지지의 곤은 괴로울‘곤’자로써 몸으로 고통을 체험하면서 하나씩 배워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무지한 사람은 고통을 계속해서 겪으면서도 그 고통의 원인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찾지도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악업을 짓고 그 과보의 고통을 받기를 반복적으로 합니다. 경험을 해도 모르는 것이죠. 그러면서 축생을 무지 하다,라고 말합니다.
다음은 수라세계입니다. 아수라라고도 하는데 그 모습이 흉측하고 전생에 오계를 잘 시켜 인간 몸으로도 태어날 수 있었지만 독선적이고, 거만하고 시기심이 많은 결과로 수라세계에서 태어납니다. 서로가 부족한 것을 쟁탈하므로 싸움이 그칠 날이 없고, 항상 심신이 불안하고 유혈이 낭자한 싸움을 계속한다고 합니다. 인간계에서는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마치 아수라의 세계를 연상시킵니다.
다음은 인간계입니다.
오계를 수지한 중생들이 태어나는 곳입니다.
우리 인간은 오계를 수지하고 기타 선행을 한 공덕으로 인간계에 태어나는 과보를 받았습니다.
인간계는 천상의 존재에 비하면 복락이 훨씬 적은 존재이지만 지옥, 아귀, 축생 등의 중생에 비교하면 매우 큰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계는 지나치게 고통스럽지도 지나치게 복락에 빠지지 지도 않는 중간지점의 세계이라 할 수 있고, 또한 인간계는 깨달음의 진리를 닦을 수 있는 가장 알맞은 세계이며 선행과 복덕을 닦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세계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태어나시는 곳이며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어 성불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인간계에도 악업을 지은 사람이 많아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업에 따라 차별이 이루 말 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있습니다.
경전에 의거하면 인간의 수명은 백년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며 (과학이 발전하면 훨씬 더 늘어나겠지만), 백년이라는 세월은 선업을 짓고 수행해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되거나 또는 악도를 면해서 천상에 태어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라고 봅니다.
또한 인간은 일상생활 가운데에서 고와 낙을 같이 받아야 하고, 출생할 때 고통을 받아야 하며, 배가 고프거나 갈증을 느끼는 고통과, 목적을 이루고자 하지만 일이 잘 되지 않는 어려움과, 그리고 천상에 비해서 음식물이 몸에 맞지 않는 것과, 이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갈등을 겪어야 하고, 404가지의 병으로 인해서 겪는 고통,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도 늙어 버려서 추해지는 고통, 결국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죽어야 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인간세계에서 사람들의 악업이 깊어지게 되면 삼재의 현상을 유발하게 되어 있고 (풍재, 수재, 화재) 즉 바람, 물 , 불의 재앙으로 인간세계(지구)까지 종말을 가져올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환경인 지구와 인간은 不二의 관계에 있으므로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정물인 생명이 있는 존재와 무정물인 생명이 없는 존재까지도 우리 자신과 다르지 않게 생각하고 사랑하고 보호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계가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오히려 올바른 진리의 세계에 접근하기가 천국보다도 더 나은 곳이라고 하며 무엇이건 의지적으로 창조할 수 있는 용맹함과 지혜가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악업을 짓기도 하지만 스스로 참회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시도 행하여 무한한 복력을 쌓을 수 있는 곳이 여기 인간세계이기도 합니다.
또한 인간계는 모든 진리를 탐구함은 물론이고 궁극적인 진리인 깨달음을 얻고 성불을 기약할 수 있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 인간의 몸을 한 번 잃어버리면 백천만겁이 지나도록 사람 몸 받기가 어려우며, 이것은 마치 우담발라화가 피는 것과 같이 희귀한 일이라서 이생에 사람 몸 받았을 때 허송세월을 보내거나 무지한 삶으로 인생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부처님은 누누이 강조하십니다.
다음은 천상세계인데, 삼보에 대한 믿음(귀의)과 오계수지와 보시를 행하면 인간계에서 욕계의 천상인 육욕천까지 태어날 수 있는 많은 공덕을 쌓게 되고 여기에서 선정의 수행력이 더해지면 색계의 천상과 무색계의 천상까지 태어날 수 있는 공덕을 짓게 된다고 합니다.
욕계에는 사왕천,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이 있고 색계에는 범중천, 범보천, 대범천, 소광천, 무량광천, 극광천, 소정천, 변정천, 무량정천, 광과천, 복생천, 무상천, 무운천, 무번천, 무열천, 선현천, 선견천, 색구경천 등이 있고, 무색계에는 공무변천, 식무변천, 무소유천, 비상비비상천등이 있습니다. 각각에 따르는 많은 천상이 있지만 이정도 하도록 하겠습니다.
천상의 신들은 화생하여 태어나고 복력이 떨어져도 곧바로 삼악도에 잘 떨어지지 아니하고 적어도 사람 몸은 받을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전생에 닦은 선업이 아직도 남아있어서 인간으로 태어나도 다복한 가정에 날 수가 있다고 합니다.
법당에 있는 탱화를 ‘신중탱화’라고 합니다. 탱화 안에 많은 신들의 모습이 있는데, 그 신들은 천상세계에 있는 존재들이며 부처님께 귀의하여 불법을 배우고자 애쓰고 또한 불법을 옹호하고 부처님 법을 믿고 배우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복을 가져다주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불자들 중에는 신중기도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천상의 복락은 전생의 수행력과 믿음, 지계, 보시행의 결과에 의해서 나누어지고, 말 할 수 없는 오랜 세월을 지극한 행복을 누린다고 합니다. 또한 많은 신통력을 갖추고 있으며 몸에는 부정한 어떤 것도 없으며 피곤하거나 육체적인, 정신적인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비교가 있어서 설명을 하고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육도 중생들은 음식 먹는 방법이 모두 다르다고 합니다.
첫째, 단식(斷食)은 음식을 자르고 씹어서 먹는 경우 입니다. 이 경우에 해당하는 세계는 우리 인간계와 팔대지옥 중에서 귀신의 무리가 있고 욕계의 육천에서 그렇게 음식을 먹는다고 합니다.
두 번째, 촉식(觸食)은 알(卵)과 새 종류 중에서 그런 경우가 있고 귀신이 간혹 촉식을 한다고 합니다.
보통 제사 지낼 때 냄새로 통해서 귀신은 촉식을 한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세 번째, 염식(念食) 이것은 의식의 흐름을 통해서 좋은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이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경우에는 수행을 바르게 잘 하면 호흡을 통하여 기가 잘 다스리므로 음식을 별로 먹지 않아도 아주 건강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인도 쪽에 요가 수행자들은 흔히 그렇게 합니다.
네 번째는, 식식(識食)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최고의 식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신만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 정신은 다름이 아니라 수행의 선정력으로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식사를 하는 곳은 색계와 무색계의 신들(천인)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천상의 세계는 무한한 복락과 행복이 있기 때문에 굳이 수행을 해야 하는 당위성을 별로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 인간들도 마찬가지죠.
세상에서 흔히 하는 말로 소위 잘나가는 사람은 진리라든가 고귀한 가르침이나 의미 있는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습니다. 남들보다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거나, 지금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고, 지금의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또는 지금 쥐고 있는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밤잠을 편히 못자는 것이죠.
오로지 소유만이 삶의 유일한 가치가 되어버렸습니다. 서양의 어느 철학자가 말했듯이 ‘인간은 더 많은 소유를 위한 욕망의 추구와 그리고 충족된 욕망이 가져다주는 허무와 권태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시계추와 같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 만큼 소유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즉 눈에 보이는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참된 가치의 마음(영혼)을 소유당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없어도 괴롭지만 가진 자도 또한 괴로운 것입니다. 괴로움은 누구나 싫어하지만 욕망을 통한 소유의 축적으로는 괴로움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소유는 우리의 육체의 보존과 현실의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 자신의 행복과 내적인 만족감을 얻는데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현재 미국 불교도 가운데 유대계가 거의 30~40%에 가깝다고 합니다. 그들은 미국 현지에서 최고로 성공한 사람들 입니다. 그들로 인해서 신조어가 하나 생겼는데 유대인이라는 Jewish와 불자라는 Buddhist가 합쳐서 JewBu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쥬부 즉 유대인 불자라는 말이죠. 이들이 불교에 귀의해서 수행정진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정치인, 언론인, 의사, 박사 ,금융업 등으로 미국에서는 최고로 성공한 사람들이지만 아무리 욕망을 통해서 소유해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권태, 허망함의 고뇌를 극복할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아마도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 단 칸 방에서 살 때 24평의 아파트 한 채만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만족하십니까?
외적으로 추구하는 것에 비해서 욕망은 더 커져 버리고, 진실로 보면 불가능한 게임을 시작 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연목구어(緣木求魚)’라는 고사성어가 맞는 말이죠. 만족할 수 없는 곳에서 만족을 구하려고 하니, 노력하면 고통은 더욱더 심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그러므로 외부적으로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되어지지 않기에 내적인 수행을 하는 불교에 귀의하는 서구 상류층들이 많은 것입니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통일한 알렉산더대왕도 죽을 때 관 밖으로 두 손을 내밀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손에 쥘 수가 없는 것 이죠. 현실이 한계에 와 닿을 때 인간은 새로운 모색을 하게 됩니다. 그때에 바로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수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종교는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종교적인 목적으로 사용합니다. 욕망의 방향을 내세로 향하게 하고 절대자를 숭배하도록 합니다. 내세, 천국, 메시아, 창조주등에 집착하도록 합니다.
신이건, 부처이건, 천국이건, 집착하면 그것은 욕심이며 오히려 현실적인 욕망보다 더욱더 무서운, 스스로 벗어나기 불가능한 욕망과 집착이 됩니다. 그래서 가장 위험한 어리석음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 부처, 진리에 대한 집착은 집착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사람들의 착각이며 오히려 집착에 반대되는 비움으로 다가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접근방법과 진리에 대한 접근방법은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에 의해서 강요되어진 미혹은 쉽게 알 수가 있지만 자청한 미혹은 자기가 자신을 묶었기 때문에 자신을 깨닫는 지혜가 생겨나지 않고는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삶의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기에는 너무 많은 고통과 어려움이 있기에 끊임없이 고착화된 업, 즉 습관에 의지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욕망의 아름다운 이름인 희망에 의지하기를 바라고 꿈속에서 깨어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 꿈이 자신에게 너무나 익숙해져 있고 꿈에서 깨어나는 것은 불안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자, 계속해서 꿈을 더 깊게 꿈꾸게 하는 천국을 제시하고, 현재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메시아를 기다리게 합니다.
욕망과 공허에서 생기는 고통이 인간에게 주는 메시지는 지금 삶의 방식이 잘못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욕망을 통하여 삶을 더 행복하게 하려고하면 할수록 고통은 커지고 욕망의 충족이 이루어지거나 욕망을 포기하면 권태와 공허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진퇴양난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종교에서는 새로운 길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어떤 종교는 이 상태를 극복하고 초월하도록 이끌어주기도 하지만, 어떤 종교는 오히려 현재 상황보다 퇴행을 시켜서 악화되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잘못된 수행법으로 인해서 고정관념과 무의식에 빠져 어리석게 되거나 최악의 경우는 신기루와 같은 환상을 주입시켜 관념 속에 빠져있게 합니다. 맹신하게 하는 것이죠.
늘 하는 말이지만 진실을 아는 사람은 미래라는 것과 이상향을 꿈꾸는 것은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지 실제 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마치 수평선이 눈에는 보이지만 헤엄쳐서 가보면 저 멀리 가버립니다. 그것은 수평선이 실제 있어서 다가가면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우리의 눈이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것과 같습니다.
욕망을 추구하다 실패하면 내생에 다시 욕망을 추구하고, 또다시 실패하면 그 다음 생에 또 추구하고, 이렇게 반복하면서 육도윤회의 삶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입니다. 운 좋은 사람은 욕망의 끝을 발견하겠지요.
욕망의 끝이 무엇이겠습니까? 올바르게 수행을 닦아서 끝을 보면 깨달음을 이루고 진정한 행복을 얻겠지만 대부분은 바로 공허라는 무서운 괴물을 만납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공허라는 괴물이 너무 두렵기에 욕망의 삶을 계속하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공허를 만나면 대부분의 사람은 곧 바로 새로운 욕망을 찾아서 길을 떠날 것이고 일부는 절망 속에서 우울증에 빠지거나 마약이나 자살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바깥의 어떤 대상이 자신의 만족을 채워줄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이 좋다 하지만 영원할 수 없고, 돈이 좋긴 하지만 그것 또한 만족함이 없을 테고, 권력과 명예라는 것은 자신의 피를 말려서 얻는 것이고, 아무튼 결국 외부에서 또는 관념이라는 환상 속에서는 결코 채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내적인 수행, 불교 수행으로 오는 것입니다.
천상계의 신은 즐거움에 젖어 있어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부족하고 지옥은 고통이 너무나 심하기에 고통을 피하기만을 바랄 뿐 진리의 삶을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아귀세계는 기갈이 너무나 심하므로 공부할 수 없고 축생은 우치하여 진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그러한 세계에는 자신이 스스로 구하고자 하는 마음과 기회 또한 없을 뿐더러 진리를 가르쳐줄 스승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유일하게 인간계에 있는 사람만이 적당한 괴로움과 즐거움이 있고 변화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괴로움을 통해서 배울 수 있고 즐거움을 통해서도 배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천상계는 지극한 즐거움이 하나 밖에 없고 지옥과 아귀세계는 괴로움의 고통 밖에 없고 축생 미물은 어리석음(미혹)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계는 적절하게 섞여있어 변화의 가능성을 최상부터 최하까지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하기에 부처님께서 이 인간세계에 나오시는 이유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변화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에 법문을 통하면 중생들은 바뀌어 지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능성은 우리들의 노력여하에 따라서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고, 천상에 나거나 부처님처럼 해탈에 이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세상을 둘러보면 히틀러 같은 최악의 인간도 있지만 부처님 같은 최상의 성인도 계실 수 있는 것입니다.
아쉽게도 인간은 변화를 싫어하기에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를 못합니다. 업의 지배를 받고 습관에 고착되어 있기를 원하고 고정되고 멈추어 있기 만을 바랍니다.
하지만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은 무상(無常)하기에 한 순간도 그대로 있지 않는데 자신의 마음만 관념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변화에 대해 깨어있지 못하고 그 변화를 수용하지 못해서 엄청난 고통이 자신에게 떨어지는 것이죠.
변화를 수용한다는 것이 실제를 바로 안다는 것이 됩니다.
그 변화의 가능성 속에서 부처님과 올바른 스승과 참된 법(진리)을 만나면 이번 생에 인간 몸 받았을 때 최소한 삼악도는 벗어날 수 있고, 못해도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날 수 있는 공덕은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처럼 열반에 이르러 해탈할 수 있으면 더 말할 나위가 없겠죠!
그러므로 불교수행이란 단순히 보면 나 자신을 편안하게 하는 것부터 궁극에는 열반에 이르는 길까지 불교에서는 그 모두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원각선원장 만응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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