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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긴 모양이 마치 초승달 같지 않습니까? 18세기경에 오스트리아의 공주였던 마리 앙뚜아네뜨에 의해 프랑스로 전해진 이 빵은 프랑스인들이 아침식사로 즐겨 먹는다고 하는군요. 요즘은 페이스트리 형태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초기에는 바게트처럼 딱딱한 킵펠(kipfel)이라는 하드계(hard type) 종류의 빵이었습니다.
마리 앙뚜아네뜨(Marie Antoinette josephe jeanne D'autriche lorraine)는 프랑스의 루이 16세(Louis XVI) 국왕의 왕비였습니다. 이케다 리요코의 장편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기억하는 분들은 마리 앙뚜아네뜨도 함께 떠오르시리라 생각됩니다. 아니면 왕실의 근위 연대장이었던 오스칼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르구요. 마리 앙뚜아네뜨는 어쩌면 비운의 왕비였는지도 모릅니다. 15살(1770년)에 부모들에 의해서 국가간의 정략적 결혼을 하게 되었고, 그 뒤(1774년)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으나, 프랑스혁명(1789년 7월 14일부터 1794년 7월 28일에 걸쳐 일어난 프랑스의 시민혁명)으로 인하여 콩코드 광장의 길로틴에서 단두대에 처형(1793년) 됩니다.
빵이나 과자에 대한 글을 읽다보면 마리 앙뚜아네뜨 왕비와 관련되는 것들이 더러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혁명이 시작될 무렵에 프랑스에서는 흉작으로 값싼 빵조차 품귀현상을 일으켜 못사게 되자, 시민들이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왕실의 호화로운 생활만 해오던 마리 앙뚜아네뜨는 “빵(bread)이 없으면 과자(cake)를 먹으면 되잖아요”라고 했답니다.
물질이 의식을 지배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의식이 물질속에 매몰되어 버린 것일까요? 한심한 것은 우리 사회속에서도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매스컴을 통해서 때때로 느낄 때가 있습니다.
크루아상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전해지고 있습니다. 1683년에 터키와 오스트리아의 국경분쟁으로 촉발된 양국간의 전쟁에서 터키(오스만 투르크제국)는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의 도시인 빈(Wien)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터키는 전쟁을 빨리 종결 시키고자 오스트리아에 대해 총공격을 준비하고 있었죠. 그런데 이 사실을 아침 일찍 빵을 만들기 위해 일하러 나왔던 오스트리아의 제빵 기술자가 알게 되었고, 제빵 기술자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은 오스트리아군이 선제공격을 하므로서 터키군을 물리치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에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Habsburg Haus)에서는 그 기술자의 빵집에 왕가의 마크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였고, 제빵 기술자는 그 답례로서 터키국기에 있는 초승달 모양의 빵을 만들어서 황제에게 감사의 표시를 했던 것입니다. 이 빵이 바로 크루아상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