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서울 청계천. 지금은 사라진 동대문운동장(당시엔 서울운동장) 부근엔 고물상과 헌책방, 운동용품 상점이 즐비했다. 녹슨 아령과 줄 끊어진 배드민턴 라켓, 낡은 ‘추리닝(트레이닝복)’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널린 중앙시장 근처의 고물상 앞에 한 사나이가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사나이의 이름은 석봉근, 당시 36세로 서울 수도여자중학교 체육교사였다. 석봉근이 그토록 골똘히 바라본 것은 서양활, 즉 양궁이었다. 저물어가는 청계천의 땅거미 속에서 그를 사로잡은 호기심과 영감은 한국 양궁의 탄생을 알리는 수태 고지와 같았다. 세계 최강 한국 양궁의 역사는 석봉근 선생이 청계천의 고물상에서 구한 중고 활 한 대로 시작된다.
석봉근 선생(활 든 사람 중 맨 오른쪽)이 장충수영장에서 시범을 보이고 있다.
한국 양궁의 역사는 그 자체로 기적이다. 석봉근 선생이 줄도 없는 중고 활대를 구입해 시작한 지 20년 만인 1979년, 한국의 김진호가 세계를 제패한다. 이후 한국 양궁의 패권은 30년간 요지부동이다.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도 한국은 남·여 단체전을 휩쓸었다. 세계 양궁선수 중 40%가 한국산 활을 쓴다.일제 강점기에 소년기를 보낸 석봉근 선생의 기억 속에는 일본인들이 국궁과는 전혀 다른 큰 활을 쏘던 모습이 남아 있었다. 경희대 체육과를 졸업하고 교편을 잡은 석선생은 학습교재를 구하기 위해 자주 청계천 중고 상가를 찾았다. 거기서 발견한 양궁은 그의 어린 시절 기억을 선명하게 되살렸다. 석 선생은 놀라운 정열을 발휘해 혼자만의 노력으로 한국 양궁의 기초를 세웠다.
석 선생은 우선 활줄을 만들었다. 처음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낙하산 줄을 꼬아 걸어봤다. 그러나 질기기만 할 뿐 탄력이 전혀 없어 활줄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석 선생은 장충단공원 안의 석호정에 있는 국궁장을 찾아가 전통 활에 쓰는 시윗줄을 얻었다. 그런대로 쓸 만했다. 활이 완성되자 다시 청계천에서 국궁에 쓰는 대나무 화살을 구입해 구색을 갖췄다.석 선생은 이론 서적도 청계천에서 구했다.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일본어와 영어로 된 책을 한 권씩 찾아냈다. 석 선생은 일본어에 능했다. 일본 서적은 스스로 번역하고 영어 서적은 동료 영어교사에게 번역해 달라고 맡겼다.
서울올림픽에 양궁팀 스태프로 참여한 석 선생
석 선생은 집요했다. 책에 나온 대로 과녁을 그려 가마니 위에 붙여 놓고 활을 쏘았다. 가슴 보호대와 팔 보호대 같은 장비도 책에 나온 대로 본을 떠 학생용 가방을 오려 만들었다. 심지어 활까지 손수 만들어 학생들의 훈련용으로 사용했다. 독학으로 양궁 훈련과 경기 방법을 익힌 석 선생은 근무하던 수도여중에 양궁부를 만들었다. 그가 지도하던 배드민턴 서클 학생들이 첫 양궁선수가 됐다. 몇 대 안 되는 활을 번갈아 가며 쏘는 초라한 훈련이었지만 학생들은 특이하게 생긴 서양활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다.
석봉근 선생이 1965년 전국활쏘기대회에 출전해 시위를 당기고 있다. | |
궁도협회는 1963년 7월 27일 국제양궁연맹(FITA)에 가입한다. 그로부터 20년 뒤 양궁협회가 독립한다. 그리고 1970년, 한국양궁은 획기적인 발전의 전기를 맞는다. 최초의 실내 양궁장이 개장했고, 지도자강습회가 열렸으며, 국산 활이 생산됐고, 문교부는 양궁을 여자고등학교 안보체육종목으로 지정한다.석 선생은 첫 실내양궁장의 주인이었다.
궁도협회에 양궁을 기증한 밀란 엘로트(가운데). | |
수강생 중의 한 명인 정갑표는 초대 양궁대표팀 감독이 돼 1984년 LA올림픽에서 서향순을 세계 정상에 올린다.석 선생의 초인적인 활약은 진심으로 양궁을 사랑했기에 가능했다. 그는 두 아들과 함께 활을 쏠 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학생과 교사들이 모두 떠난 교정에 아들들과 나란히 서서 어둡도록 시위를 당겼다. 노인이 돼서도 물구나무서기를 설 만큼 팔심이 강했던 그는 강궁(强弓)을 사용했다. 100m 트랙의 결승점에서 출발점에 세운 과녁을 겨냥했다. 화살은 일본식 다다미에 붙인 과녁 깊숙이 박혔다.
석봉근 선생의 성격은 매우 조용했다. 그러나 내성적인 성격 속에 정열과 집념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다정다감했다. 대한양궁협회 윤병선 사무국장은 “석 선생은 선수들이 경기에 나갈 때는 네 잎 클로버를 직접 따서 코팅해 선수들한테 나눠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좀처럼 감정표현을 하지 않았고, 선수들에게도 인내심을 강조하는 지도자였다.
매년 새 학기가 시작되면 석 선생은 신입생들의 체육시간에 반드시 양궁 실습을 했다. 10m 정도 거리에서 활을 쏘게 해서, 화살이 한곳에 모이도록 쏘는 학생이 있으면 재능이 있다고 판단하고 양궁부에 들라고 권했다.
석 선생은 1999년 76세를 일기로 눈을 감는다. 그가 싹틔워 성장시킨 한국 양궁은 세계 최고가 됐지만, 석봉근이란 이름은 곧 잊혀졌다. 윤 사무국장은 “협회차원에서 보관하고 있는 자료가 없다. 양궁원로들이 계시니 시간이 흐르면 이분들의 기억을 되살리는 사업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재능이 뛰어난 맏아들 석동은(53)이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특히 지도자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하며 이탈리아 양궁을 유럽 최강으로 이끌어 영웅이 됐다. 베이징올림픽에는 영국 여자대표팀 감독으로 참가했다.
허진석·유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