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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악산 천화대 능선(릿지)을 넘고 있는 등반객 뒤로
장군봉이 보인다.
[설악에 살다] (1) 송준호와 '석주길'
설악산은 너무나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갖고 있다.
솜다리꽃.박새풀.둥글레.함박꽃.전나무를 비롯해 하얀 껍질에
사연을 적어보내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자작나무가
도처에 널려 있다.
그런가 하면 설악골.용소골.토막골.곰골.잦은 바위골 등의 숱한
골짜기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용아장성.공룡능선.화채봉
능선.서북릉.천화대 등의 바위능선(암릉)과 대청.중청봉을 휘감는
바람과 구름, 그리고 동해까지 거느리고 있다.
거기에 '설악시(詩)'와 '설악가(歌)'까지 지니고 있다.
그 설악의 노래는 슬픈 노래다. 아니 서럽도록 아름다운 노래다.
'너와 나 다정하게 걷던 계곡길, 저 높은 봉우리에 폭풍우 칠 적에…'
설악의 봄.여름.가을.겨울을 노래한 '설악가' 속에 나오는
산(山)친구이면서 사랑하는 사이이기도 한 '그녀'는 가을
설악산에서 조난당해 세상을 뜨게 된다. 그녀를 설악에 묻고
그리움을 삭이지 못해 매번 설악산에 되돌아와
부르고 또 부른 노래가 '설악가'다.
'굽이져 흰띠 두른 능선길 따라 달빛에 걸어가던 계곡의 여운을.
내 어이 잊으리요. 꿈 같던 산행을. 잘 있거라 설악아.
내 다시 오리니'.
외설악 초입에 있는 노루목 근처 산자락에 가면 지금은 호텔과 여관 등 숙박시설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사자(死者)의 마을'이 있다. 설악을 사랑하다 결국 설악의 품에 영원히 안긴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그곳에는 1969년 '죽음의 계곡'에서 눈사태로 목숨을 잃은 한국산악회 소속 대원
10명의 무덤(산악인들은 '십동지묘'라 부른다)을 비롯해 설악산에서 숨진 여러 산사람들의 묘지가 있다.
국토의 7할이 산인 산악국가로 산을 신앙으로 숭배하던 배달겨레의 유일한 '산악인 묘지'인 셈이다.
여기에는 이름없는 산사람들의 초라한 무덤들이 자그마한 동산을 이루고 있다.
상석은 고사하고 비석도 제대로 세워져 있지 않은 무덤의 주인공들은 벚꽃처럼
활짝 필 젊은 나이에 산에서 운명을 달리한 산사람들이다.
이 중에는 엄홍석과 신현주라는 두 남녀의 무덤이 있다. 연인 사이로 여러 차례 설악산을 함께 올랐던
두 사람은 67년 가을 어느 날 '설악가'의 가사 그대로 설악에서 등반사고로 함께 세상을 떴다.
이들과 같은 요델산악회의 회원이었던 송준호는 엄홍석과는 피를 함께 나눈다는 자일파트너(암벽등반 동료)인
동시에 의형제 사이였다. 그런 인연으로 송준호는 엄홍석과 신현주의 무덤을 자주 찾았다.
내설악과 외설악을 가로지르는 공룡능선은 설악의 주릉이다. 이 공룡릉에서 흘러내린 설악골과 잦은 바위골
사이를 천화대라고 하는 험준한 바위능선이 치밀어 올라 있다.
천화대는 여러 갈래의 작은 능선(지릉)을 거느리고 있는데, 이 중 설악골에서 왕관봉과 범봉
사이에 있는 성곽처럼 생긴 바위능선 하나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송준호는 68년 7월 이 바위능선을 맨처음 오르는 산악인이 된다.
산악계에서는 등산코스를 개척한 초등(初登) 산악인에게 코스의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명명(命名)권'을 주는 것이 관례다.
송준호는 그 바위능선에 '석주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의형제
엄홍석과 그의 연인 신현주의 이름 끝자인 '석'과 '주'를 따와 붙인 것이다.
그리고 자기 손으로 '석주길'이라고 새긴 동판을 만들어
석주길이 천화대와 만나는 바위봉우리의 이마 부분에 붙여
두 사람의 영전에 바쳤다. 그리하여 '석주길'이라는 신화가
설악산에 태어났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 필자 약력
▶1951년 경북 청도 출생
▶연세대 졸업
▶조선일보 '월간 산' 기자
▶월간 '사람과 산' 발행인 겸 편집인
▶한국소설가협회 회원
▶전 연세산악회 회장
▶전 대학산악연맹 부회장
▶장편소설 '만년설' '백두대간' '종이비행기',
기행에세이집 '반딧불이 되도록 그리운'
'방랑보다 황홀한 인생은 없다'
'사람의 산' 등 출간
http://www.joins.com/general/series/030616a02_sr.html
[중앙일보에 연재되었던 박인식 선생의 '설악에 살다'를 옮긴다]
해당 홈페이지에 멀쩡히 올려져 있는 것을 번거롭게 옮기는 이유는
'개인적인 자료'로서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인터넷 상에 올려진 자료는 항상 게시판을 참조하는 사람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영원히 안 변하는 경우도 있지만, 경험상 시간이 지나면 변형되거나
삭제되는 것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후에 달라지더라도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이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2005. 1. 17] 席
▲요델산악회 삼총사였던 송준호·나경봉·엄홍석씨(왼쪽부터)가 외설악 표범골(잦은 바위골)
개척 등반 도중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사진제공=백인섭]
[설악에 살다] (2) 토왕폭과 송준호
일제 말기 '백령회'라는 산악단체가 설립되면서 우리나라에 근대
알피니즘(모험적 등반행위)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해발 2천m 이하의 낮은 산들로 이뤄진 국내 산악환경은
알피니즘의 대상이 될 만한 입지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때문에 1970년대 후반 해외등반으로 그 출구를 찾기 전까지
한국 알피니즘의 수준은 짧은 암벽에서 이뤄지는 기교적인 등반에 머물렀다.
그런데 국내 알피니스트들에게 군계일학의 등반 대상이 딱 한 군데 남아있었으니, 바로 설악산의 노루목 맞은편에 있는
토왕성폭포(일명 토왕폭)였다.
70년대 초만 해도 당시의 등반 장비나 기술로 토왕폭 빙벽을 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때문에 전인미답이었던 토왕폭을 오르는 것은 히말라야 8천m급 봉우리보다 더 가치있는 등반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정말 그랬다. 그때까지만 해도 토왕폭은 설악산에서 살아 숨쉬는
신화였다. 그래서 당시 산악인들은 '토왕폭! 토왕!'을 되뇌는 것으로 스스로 '산사람'임을 깨닫곤 했다.
'석주'의 무덤이 있는 노루목은 토왕폭 건너편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화채봉에서 발원(發源), 함지덕.칠성봉 일대 골짜기의 물을
모아 하늘에서 내린다. 3백여m 높이의 얼음기둥이 자라나기
시작하는 겨울에 석주의 무덤에 성묘하고 뒤돌아 설악산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
거기서는 토왕폭 얼음기둥의 머리 부분이 보인다. 토왕폭의 아름다움에 산사람은 그가 평소 즐겨 부르던 '설악가'와
시도 때도 없이 노래하던 듀 프라의 '그 어느날'이라는 산악시가 하얀 얼음기둥에서
울려퍼지는 듯한 환청을 듣게 된다.
'그 어느 날 내가 산에서 죽을 때 오랜 산친구 자네에게 부탁하네
내 피켈을 집어다오
이 피켈이 치욕 속에 녹슬어가는 것을 나는 원치 않는다네
어딘가 아름다운 페이스에 가져가 주게
그리고 그 피켈만을 위한 작은 케룬(돌무지)을 쌓아다오
그리하여 그 케룬 위에 나의 피켈을 꽂아주게'
동해에서 치솟는 아침 햇살을 받아 토왕의 얼굴이 수정으로 빛날
때나 설악이 온통 잿빛으로 가라앉을 무렵 바라보는 토왕폭에선
신의 섭리를 느끼게 된다.
송준호는 석주에 두번 절한 뒤 토왕폭을 뒤돌아보고는 그때까지
아무도 오르지 못한 토왕폭을 단독 등반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 빛나는 토왕의 빙폭 위에 오랜 산친구 석주의 피켈을 꽂고 그곳에 석주의 피켈만을 위한
작은 케룬을 하나 쌓으리라 마음먹는다.
그리고 토왕폭 초등이라는 절대적 산행을 석주의
영전에 바치겠다고 다짐한다.
상단(1백40m).중단(60m).하단(1백30m) 등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토왕폭의 전체 길이는 3백30여m에 이른다.
상단과 하단은 전체적으론 곧게 일어선 고드름질 직벽(直壁)이지만 임신부의 배처럼
불룩 튀어나온 곳도 있다.
상단과 하단을 잇는 중단은 30~50도 정도의 완만한 빙벽이다.
이같이 중단이 비스듬한 모양을 하고 있는 까닭에 상단과 하단간
수직(垂直) 길이는 전체 길이보다 약간 짧은 3백m 정도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 백인섭씨가 1964년 겨울에 외설악 권금성 직벽
(권금성 케이블카 바로 아래)을 오르고 있다.
[사진제공=백인섭]
[설악에 살다] (3) 토왕폭과 송준호
1972년 12월 30일, 설악산의 날씨는 빙벽등반에 이상적이었다.
맑은 가운데 바람도 적당히 불었다. 기온은 섭씨 영하 10도 안팎을
나타냈다. 토왕폭 허리부분의 빙질(氷質)도 적당한 탄력을 유지했다.
오전 11시쯤 송준호는 사흘 앞으로 다가온 D데이를 대비해
토왕폭 정밀 답사에 나섰다.
아이젠도 없이 피켈만 들고 토왕폭 빙벽 하단을 돌아 중단의 완만한 곳에서 오른쪽 설벽(雪壁)으로 나아가
상단의 출발지점을 볼 수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출발지점을 자세히 살펴본 후 정식 등반 때
쓸 장비 일부를 근처 눈더미 속에 묻어두고 산을 내려왔다. 설악동에 이르러 그는 요델산악회의
선배인 백인섭씨(현 아주대 교수)에게 전보를 띄웠다.
'토왕폭 빙벽의 상태가 등반에 최적임. 피켈.아이젠.아이스하켄
지참, 31일 비행기편으로 오기 바람. 준호'
이튿날 날씨도 맑았지만 약간 강한 바람이 불었다. 오전 3시에
일어나 다시 설악동으로 간 송준호는 백인섭.박경립씨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통화를 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송준호는 토왕폭을 혼자
등반키로 결심하고 함께 훈련했던 서울대 상대 산악부 소속 두명의 산사나이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다음날인 73년 1월 1일 아침. 영하 8도의 기온 속에 맑은 날씨였다.
송준호와 지원조 두 명은 설악동에서 등반에 필요한 몇가지 물품을 구입한 후 비룡산장으로 올라가 잤다.
이날 밤 산장에서 송준호는 '석주에게'라는-이승에서 저승으로
띄우는-묘한 편지를 썼다. 주소란에는 이렇게 적혔다.
받는 사람='석주 귀하'
보내는 사람='준'
받는 사람 주소='노루목'
보내는 사람 주소='벽에서'
'잘 있었나. 그동안 나는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네. 내일 벽과의
감격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네. 아니면 자네 품으로….
등반할 나를 도와줄 S대 상대 OB인 J와 P 두 악우(岳友)를 소개하겠네. 기억해두고
깊이깊이 사귀어보고 싶은 두 사람이네. 석주도 고마워할거야. 나는 확신한다네.
아직 자네는 내 곁에 있다는 것을. 석주가 있기 때문에 나는 더욱 열심히 한발 한발 힘차게 오를 것이네.
정상에서 대화를! 노루목에서 일배하세! 좁은 지면 메우기보다는
서로 힘찬 격려로 서로를 지켜주면 좋을 걸세. 용아장성에서처럼.
후회하지 않을 행동뿐, 결코 두려워하지 않겠네.
나의 맘 한없이 메꾸고 싶지만 주고 받을 얘기는 토왕성의 하얀 벽
꼭대기에서! 여유를 가져보세. 1월 1일 설날 이러한 일이 있다는 것은 보람일세. 넘기기 싫은 하루였다네.'
73년 1월 2일. 맑은 날씨는 여전했다. 영하 5도의 기온은 토왕폭
사나이의 긴장감을 유지하기에 적당했다. 오전 8시 40분 송준호와
지원조는 비룡산장을 떠났다.
이들은 토왕폭 상단 40m 지점의 고드름 기둥까지를 1피치(자일 한묶음의 길이로 40m 안팎)로 잡고
그곳에 70m 짜리 자일을 고정시킨 다음 출발지점의 지원조로부터 1백20m 짜리 자일을 넘겨받아
토왕폭 상단 빙벽을 2시간 정도에 끝낼 계획으로 등반을 시작했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 외설악에서 가장 험준하기로 소문난 표범골(잦은 바위골)
등반에 나선 요델산악회원들이 주먹밥을 먹고 있다.
왼쪽부터 이형삼.백인섭.나경봉.전철민씨 등.
[백인섭씨 제공]
[설악에 살다] (4) 토왕폭과 송준호
토왕폭 빙벽 하단을 우회한 송준호와 두명의 지원 대원은 사흘 전
장비를 놓아두었던 곳에서 담배를 피우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휴식을 마치고 중단의 완만한 경사 부분을 오르기 시작한 때는 낮
12시 15분쯤. 송준호는 70m짜리 자일의 한쪽 끝을 몸에 묶고 올랐으며, 한명의 대원이
자일의 다른 한쪽 끝을 30m가량 사려 배낭 위에 얹고 뒤를 따랐다.
송준호를 뒤따라 오르는 대원은 송준호와의 거리를 5~6m 정도로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체력과 기량 차이로 갈수록 간격이 벌어졌다.
치밀한 성격의 송준호는 토왕폭 빙벽 단독등반에 나서기 전에 잦은 바위골의 50m와 1백m 폭포에서
두차례 훈련등반을 가졌었다. 송준호는 1971년 1월 후배 오세진과 함께 1백m 폭포를 11시간의 사투 끝에 겨우 올랐다.
이들의 등반시간은 요즘 기준으로 보면 납득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앞 이빨(프론트)이 없는
8발 아이젠에 길이 1m가 넘는 무거운 피켈 한자루에 의지한 채 아이스 하켄도 없이 종일 피켈을
휘두르며 스텝 커팅(빙벽에 발 디딜 계단)하면서 등반해야 하는
당시 상황으로선 결코 긴 등반시간이 아니다.
당시엔 그런 방식으로 잦은 바위골의 1백m 폭포나 토왕폭 같은
깎아지른 둣한 빙벽을 등반한다는 것은 불가능이라고 믿던
시절이었다. 송준호가 설악산의 1백m 폭포를 등정했다고 말했을 때 아무도 이를 믿지 않았다.
이듬해인 72년 12월 중순, 설악산 잦은 바위골에서 두번째 훈련등반을 했다. 이때 송준호의
등산화에는 8발이 아닌 앞 이빨이 달린 12발 아이젠이 묶여 있었다.
새 장비를 갖춘 그는 날쌘 표범처럼 15분 만에 50m 폭포를 올랐다.
그리고 11시간의 사투를 벌였던 1백m 폭포는 불과 30분 만에 등정했다.
얼음기둥 꼭대기에서 하얀 표범은 울부짖었다.
"석주야, 이제 토왕으로 간다. 토왕폭 위에 너를 위한 작은 케룬을
쌓고 그 위에 너의 피켈을 꽂아주마."
훈련등반을 통해 그는 토왕폭도 등정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1백m 폭포 등반 중 아이젠의
밴드가 풀어지는 위기를 만났지만 빙벽 위에서 발레하듯 절묘한 균형을 잡고 밴드를 다시 고쳐 맸다는
일화는 이제 송준호라는 이름과 더불어 전해지는 신화가 되었지만….
요즘 장비라면 1백m 폭포를 30여분 만에 등정할 수 있는 산쟁이가
드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70년대 초 쓰던 긴 피켈과 아이스 대거(얼음 송곳),
그리고 모래내 금강(M.K)에서 만든 국산 아이젠으로 1백m 폭포를 오르라고 한다면
누구도 등반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송준호가 토왕폭 상단 출발지점에 거의 다다랐을 때 그와 지원 대원과의 거리는
40여m로 벌어져 대원은 허겁지겁 손에 감고 있던 자일을 풀어줬다.
그러던 대원은 어느 순간 멈칫했다. 가파르게 턱진 빙벽이 눈 앞에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급히 경사가 심한 골을 피해 산행 방향을 바꾸는 순간, 그는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 설악 최고의 바위봉 개척 등반에 성공한 송준호(左)씨와
오세진씨. 이들은 이 바위봉에 ‘범봉’이란 이름을 붙였다.
[백인섭씨 제공]
[설악에 살다] (5) 토왕폭과 송준호
송준호를 지원하던 대원은 그 순간 "앙카!"라고 외치며 떨어졌다.
그 바람에 송준호도 밑에서 잡아채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함께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앙카'는 암벽 등반 도중 위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도움을 요청하는 구호다.
동료의 외침에 놀란 나머지 중단 옆 안전지대에서 등반 과정을 촬영하던 또 다른 지원 대원이 위쪽을 쳐다보았다.
재미로 그러는 것처럼 송준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빙벽 중단 부분에서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 밑에서 추락하던 지원 대원은 아이젠이 얼음에 걸리면서 천우신조로 추락 방향이 바뀌어
촬영대원이 있는 곳으로 떨어졌다. 다행히 이곳은 눈이 쌓여 있는 설사면(雪斜面)으로 안전지대였다.
하지만 송준호는 계속 떨어졌다. 추락의 가속도 때문에 그의 형체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송준호는 추락을 멈추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가 박으려는 피켈이 '찌익' '찌익'하는 마찰음을 냈다.
그러나 갈수록 가속도가 더 붙는 그의 몸은 끝내 멈추지 않았다. 중단을 완전히 벗어나
하단으로 떨어지면서 허공을 물방울처럼 날았다.
그대로 모든 것은 끝났다.
중단과 하단이 맞닿은 빙벽 위에 그가 마지막 제동을 위해 휘두른
피켈만이 얼음을 뚫고 토왕폭에 굳게 박혔다. 석주와의 굳은
약속처럼 굳건한 모습으로….
지금 그는 석주와 함께 노루목에 묻혀 있다. 요델산악회에서는
석주의 영전에 바치기 위해 토왕폭 등정에 도전한 송준호를
'석주 무덤' 바로 곁에 묻어주었다. 이들 세명의 묘지에 세워진
충혼비에는 '시간과 존재의 불협화음으로 공간을 활보하고 있는
악우들이여! 철학적 경이로써 모둠된 그대들의 자취는 훗날 이
인자한 산정을 찾는 이들의 교훈이 될 것이다. 추억을 침묵으로
승화시킨 사람들의 그 대담한 의지로 그대들은 설악에서
회생하리라'라고 새겨져 있다.
1973년 1월 2일 새벽. 송준호의 작별인사는 서울에 있는 연인의 꿈
속에 나타났다. 그는 그녀를 '까만돌'이라고 불렀다. 연인 송준호가 토왕폭을 등반하다
떨어지는 꿈을 꾼 까만돌은 혼비백산해 깨어났다. 송준호는 토왕폭으로 떠나며 그녀에게 '1월 5일 오후 2시
중앙극장 앞에서 만나자'고 했었다. 당시 중앙극장에서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상영 중이었다.
그 영화를 함께 보자던 송준호는 자신이 설악산 토왕폭에서 바람처럼 사라지며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송준호는 그 뒤에도 그녀의 꿈에 거듭 나타났다. 꿈 속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라고 여러번 보챘다.
그 바람에 영화를 보러 간 그녀는 스크린을 통해 "영화의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처럼 굳건하게 살아가라"는
송준호의 메시지를 보았다.
73년 가을, 요델산악회는 송준호 추모등반을 설악산 용아장성에서 갖고 용아장성의 14번째 암봉에
그의 추모동판을 새겼다. 토왕폭 초등(初登)을 성공하면 스위스에서 등산학교를 다닌 뒤 직업가이드가
되자는 계획을 세웠고, 신혼여행으로 '석주길'을 등반하기로 약속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까만돌은 추모동판 뒤에 송준호에게 보내는 연서를 썼다.
"…그대 뜻대로 스칼렛 오하라처럼 살아가리라…."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 설악 토왕골의 어느 암릉을 오르고 있는 송준호씨.
[백인섭씨 제공]
[설악에 살다] (6) 토왕폭과 송준호
송준호의 1주기인 1974년 1월 2일. 송준호의 연인이었던 '까만 돌'은
한 남자와 노루목의 '석주 무덤' 곁에 누워 있는 송준호를 찾았다.
송준호의 묘에 두 번 절한 그 남자는 노루목을 굽어보고 있는 하얀
토왕폭을 바라보며 송준호에게 산친구로서 약속을 했다.
'그대 뜻대로 까만 돌이 살아가도록 평생을 보살피겠소.'
그는 송준호와 절친한 동양산악회 소속 산꾼이었고, 농대 출신의
젊은 '상록수'였다. 까만 돌과 상록수는 결혼했다. 상록수는 결혼 후
고향인 전북 장수로 내려가 어릴 적 꿈인 목장을 만들었다.
스칼렛 오하라를 닮은 까만 돌과 상록수의 집념으로 자그마하던 목장이 5만여평으로 커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토왕폭과 까만 돌과 젊은 상록수, 그리고 송준호의 그 절절한
설악산 사랑은 내 가슴까지 뜨겁게 달궈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얘기 하나 하지.
"옛날 어느 산에 폭포가 하나 있었어. 그 폭포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높고 곧은 폭포였지. 그 폭포가 얼마나 높은지, 또 언제부터 언제까지 떨어지는지 아무도 몰랐어.
그런데 그것을 아는 이가 한 사람 있었어. 그는 노래꾼이었는데 성은 김이었고,
이름은 수영이라 했지. 그의 노래 한번 들어봐.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새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그런데 말이야, 곧은 소리를 내며 곧게 떨어지던 그 폭포가 어느 겨울날 얼어붙은 후 풀리지 않았어.
계절을 잃은 그 폭포는 더 이상 노래하지 않았던 게야. 얼마나 답답했겠어. 폭포나 보는 사람이나 말이야.
그래도 다들 편히 잠자고 있을 때 곧은 폭포소리를 못내 그리워하던 한 소년이 폭포를 풀려고 하얗게 얼어
붙은 폭포에 올라간 게야. 미끄러져도 오르고 떨어져도 오르고 올라 소년은 폭포의 언 얼굴에 매달렸어.
그는 맨주먹으로 차가운 얼음덩어리를 두들겼어. '폭포야 풀려라. 한을 풀어라'하고 마구 두드린거야.
두드리다 두드리다 두 주먹이 핏빛으로 멍들었어. 이제는 풀릴 만도 하겠건만 폭포는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어.
폭포는 가슴마저 얼어붙은 거야.
그러다, 그러다가 말이야. 폭포는 문득 이렇게 웅얼거리기 시작했어.
'네 머리로 여기를…'.
소년은 결국 폭포를 푸는 열쇠 구멍에 제 머리와 몸을 던져버린 거야. 그래서 폭포는 계절과 밤낮을 되찾고
다시 곧은 소리를 내며 소리치기 시작했어. 동해에서 치솟은 맑은 햇살이 폭포를 비출 때면,
지금도 그 소년의 붉은 피가 폭포수로 변해 절벽의 폭포를 곧게 곧게 떨어뜨리고 있지.
그러다 겨울이 오면 폭포는 하얀 얼음으로 소년의 넋을 설악의 하얀 신화로 다시 결정시키곤 하는 게야."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산악인들이 꽁꽁 얼어붙은 토왕폭 하단부를 향해 올라가고 있다. 멀리 보이는 것이 상단부. [손재식 사진작가]
[설악에 살다] (7) 유기수와 토왕폭
유기수는 아주 독특한 산쟁이다.
그는 하루 산행이면 한병, 두밤 자는 산행이면 두병, 열흘이면 열병의 인슐린병을 배낭에 챙겨 넣는다.
자신만의 등반장비이자 식량이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산에서 밤마다 팔뚝에 스스로 주사를 놓는다.
그는 약효가 떨어지면 치명적인 상태에 빠질 수도 있는 당뇨를 이겨내며 15년 이상 눈부신 등반 활동을 펼쳤다.
설악의 토왕폭 우벽과 울산암 중앙직상 크랙(바위가 갈라진 틈) 을 비롯해 국내 여러 곳의 높은 벽을 처음으로 올랐다.
게다가 일본에서 가장 어려운 코스로 알려진 다니가와 다케(谷川嶽)를 겨울에 올랐으며,
프랑스 알프스의 난벽(難壁) 드류를 등반했다. 이들 등반 모두가 당뇨로 쓰러진 뒤에 인슐린을 주사하며 이뤄낸 것이다.
밤에, 그것도 달밤에, 아스라한 절벽에 매달려 하늘을 우러르며 자신의 팔뚝에 주사바늘을 꽂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면 괜히 섬뜩해진다. 그것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복부 깊숙이 선불맞은 상처에서
배어나오는 선홍빛 피를 혀로 핥으며 하늘을 향해 으르렁대는 한 마리 들짐승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유기수의 클라이밍 인생에서 가장 높은 목표가 됐던 벽은 역시 설악의 토왕성 빙폭이었다.
그는 토왕폭에서 목숨을 잃은 송준호보다 6년이나 앞선 1967년부터 거의 매년 토왕폭 빙벽에 도전했다.
에코클럽의 동료인 이일영씨, 고령산악회의 허재영씨와 함께 처음으로 하늘에 걸린 듯한 3백m 길이의
얼음기둥에 붙었던 67년. 유기수는 하단부 12m를 오르고는 돌아서야 했다. 당시엔 아이스 하켄조차 구할 수 없어
암벽 등반 때 쓰는 짧은 록(rock) 하켄을 얼음에 박으며 빙벽을 오르려고 했던 기막힌 등반이었다.
이후 거듭된 도전은 실패로 끝나고 당대 최고의 클라이머였던 송준호마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토왕폭에서
숨진 70년대 중반까지 '토왕폭은 등반이 불가능하다'는 좌절감을 산쟁이들에게 안겨주었다.
그러나 형식이 내용을 좌우한다는 말처럼, 고드름질 빙벽 등반장비가 개발되면서 상황은 아주 달라졌다.
그 장비에 걸맞은 기술이 준 '몸의 자유'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이 불가능의 빙폭을 등반이 가능한
현실세계의 눈높이로 끌어내렸다.
유기수뿐만 아니라 당시 토왕폭 초등을 노리고 있던 모든 클라이머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던져준 장비가 하나 나타났다.
토왕폭 빙벽 등반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확보점(위급상황 때 몸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지점)을 설치할 만한
아이스 하켄이 없다는데 있었다. 75년 독일에서 개발된 '바르트 혹(wart hog)'이라는 아이스 하켄이 일본 산악인
하다케야마 산시로를 통해 국내 산악계에 소개된 일은 우리나라 면직공업사에 있어 문익점이 목화씨를 붓대롱에 숨겨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비화에 견줄 만하다.
같은 해 2월 9일 어센트산악회의 김재근씨는 산시로가 가져온 바르트 혹 하켄으로 강촌 구곡폭포 빙벽을 초등했다.
등반을 마치고 귀국하며 산시로는 김재근씨에게 3개의 바르트 혹을 구곡폭 빙벽 초등의 기념선물로 주었다.
산친구 김재근씨를 통해 손에 쥐게 된 바르트 혹 하켄의 효율성은 고드름 투성이의 토왕폭 빙벽 초등을 벼르던
유기수의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다.
그는 '바로 이거다'하는 느낌을 받았다. 71년 겨울 요델산악회의 최용준씨가 토왕폭 상단에 도전한 적이 있다.
그때 최씨는 하켄 10여개를 설치하고 10m 가량 나아가다 추락했는데, 확보용 하켄이
추락 하중을 견뎌내지 못해 모두 빠져 버렸다. 그만큼 당시 빙벽 등반장비들은 부실했다.
그즈음 사용하던 하켄은 사실 토왕폭과 같이 단단한 청빙(淸氷)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장비였다.
실제로 이런 하켄들은 청빙용이 아니라 설벽(雪壁)용으로 제작된 것이다. 그런 하켄을 토왕폭과 같은 청빙에
박으면 주변 얼음이 온통 깨지고 만다. 하지만 바르트 혹은 그렇지 않았다. 이놈은 신기하게도
고드름질 빙질에서조차 빨려 들어가듯 쏙 박혀들어가곤 했다.
유기수는 바르트 혹을 신주 모시듯하며, 토왕폭에 맺힌 10년의 한을 풀기 위해 77년 1월 8일 설악의 토왕골로 들어갔다.
금강운수 버스를 타고 속초로 가서 물치와 설악동을 거쳐 설악의 토왕골로 들어선 유기수는 깜짝 놀라
돌장승처럼 그자리에 굳고 말았다. 토왕폭 초등을 노리고 전국에서 모여든 클라이머들로 토왕골이 장터처럼 북적댔기 때문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박영배씨가 이끄는 크로니산악회팀, 오영복.도창호씨의 동국대팀, 권경업.이정희.배종순.이종양씨 등의 부산합동대 등
무려 4개팀 30여명이 진을 치고 처녀 토왕폭을 시집보내기 위한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유기수씨가 인수봉의 에코길 등반 도중 앞서 가는
등반자를 도와주고 있다. [손재식 사진작가]
[설악에 살다] (8) 토왕폭 초등 경쟁
맨 처음 도착한 팀은 '크로니'였다. 이 팀은 1976년 12월 29일 토왕골에 들어왔다. 그 다음은 77년 1월 7일 도착한 동국대팀이었다.
그리고 유기수의 에코클럽팀과 부산 합동대팀은 하루 뒤인 1월 8일 맨 마지막으로 토왕골에 들어왔다.
동국대팀 도창호 대원은 유기수보다 더 당혹감을 느꼈다. 그는 76년 겨울 토왕폭의 하단을 초등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동국대팀은 70년부터 매년 토왕폭 초등의 문을 두드려왔다. 그러다 6년 만에 토왕폭은, 비록 하단만이지만
토왕폭 사나이들인 동국대의 도창호, 이동훈에게 처녀성을 허락했다.
신인섭 대장을 비롯한 이상선.김형태.강승모.김성배.안호근.안규섭.이종량.김용일.이동훈.도창호.오영복씨 등
12명의 대원은 7박8일간 고투 끝에 두 대원을 하단 위로 올려보내는 데 성공했다.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도씨가 어센트의 김재근씨에게서 받은 '바르트 혹'이다.
이처럼 하단 초등의 쾌거를 이룬 동국대팀은 상단 개척등반에도 성공해 토왕폭의 진정한 초등자가 되기 위해
전열을 재정비, 토왕골로 들어왔으나 일이 묘하게 꼬인 것이다.
유기수와 동국대팀은 먹지도 못할 젯밥에 지난 10년간 절만 한 꼴이 됐다.
전체 길이가 3백m에 이르는 토왕폭은 상단과 중단, 그리고 하단으로 나뉘어 있다고 이미 얘기한 바 있다.
유기수가 토왕골에 닿았을 때 크로니팀의 박영배는 하단 등반을 3박4일 만에 끝내고 상단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단 초등으로 토왕폭에 대해선 나름대로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했던 동국대팀은 '난리 난 해에 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선비'처럼
어쩔 줄 몰라하며 박영배의 등반 모습을 허탈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유기수는 '닭 쫓던 개'처럼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10년 이상 자신과 에코클럽에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온 토왕폭이기 때문이다.
박영배의 등반 방식도 유기수의 성미를 건드렸다. 박영배가 속한 크로니팀은 등반한 곳까지 일정한 높이로
줄을 설치해놓고 내려와 텐트에서 휴식을 취한 후, 다음날 줄을 타고 올라가서(유마링) 등반을 계속하는
이른바 포위전술 (시지택틱스.siegtactics)방식을 쓰고 있었다.
유기수에게 포위전술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뜨뜻미지근하게 보였다.
'죽기 아니면 살기'식으로 바로 치고 붙는-며칠이 걸리든 벽에서
자며 캠프의 온기(溫氣)를 떨쳐내야 하는-러시택틱스(rushtactics)
방식으로 등반해야만 토왕폭을 진정한 자신의 산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게 유기수의 소신이었다.
그렇게 선선히 빙벽으로 나아가다 떨어져 죽더라도, 송준호처럼
사후에나마 토왕폭의 한을 풀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토왕폭 하단부 왼쪽에 있는 동굴 입구에서 산악인들이
등반 준비를 하고 있다. [손재식 사진작가]
[설악에 살다] (9) 유기수의 추월
유기수는 토왕폭에 도착한 이튿날인 1977년 1월 9일 화끈한 속공법으로 토왕폭 하단을 7시간 만에 등반했다.
며칠 전 3박4일에 걸쳐 오른 크로니팀이나 전 해의 동국대팀 등반기록(7박8일)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다음 날 유기수는 후배 이봉우와 함께 4시간 만에 하단을 올랐다. 토왕폭 하단은 이제 유기수에겐 연습코스에 지나지 않는 듯했다.
유기수는 앞에서 오르고 있는 크로니팀에 개의치 않고 곧바로 상단을 등반하겠다고 결심했다.
유기수는 이미 상단의 절반 정도까지 올라가 있는 박영배를 앞지를 자신이 있었다.
비박(야외에서 텐트 없이 자는 것)장비를 지고 하단을 4시간 만에 오른 그는 중단을 거의 뛰듯이 올랐다.
그리고 상단 밑부리의 얼음을 파내고 그곳에 침낭을 폈다. 그 얼음동굴에서 비박한 뒤 동해에 얼굴을 씻은 아침해가
토왕폭 머리 위 함지덕으로 비쳐들기 전에 상단으로 올라갈 작정이었다.
크로니팀은 야간등반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밤이 되면 빙폭에 자일을 고정해두고는 하단 아래쪽에
설치한 베이스캠프로 내려가서 쉬곤 했다. 그런데 이날 밤 박영배의 크로니팀은 베이스로 돌아가지 않고
중단 아래쪽 설사면(雪斜面)에 캠프를 쳤다.
77년 1월 10일 오후 11시 무렵, 토왕폭 상단 밑동 얼음동굴에서 비박하던 에코팀의 유기수는 침낭에서
빠져나와 등반 채비를 했다. 그는 아려오는 오른쪽 무릎을 문지르며 팔뚝에 인슐린을 주사했다.
으스름한 달빛에 더욱 흰빛을 드러낸 토왕폭과 그 위에 드리워진 크로니팀의 고정자일을 바라보며
그는 주사바늘을 팔뚝에 힘껏 찔러 넣었다.
유기수는 헤드랜턴을 켰다. 동시에 중단 설사면에 설치된 크로니팀의 캠프에도 불이 들어왔다.
그들도 자지 않고 에코팀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기수가 등반을 시작했다.
토왕폭의 가장 밑동의 얼음기둥에 힘껏 피켈을 찍었다. 그리고 4년 전의 송준호처럼 한마리
날쌘 표범이 돼 토왕폭 빙벽을 치고 올랐다.
박영배가 그냥 보고 있을 리 없었다. 박영배의 크로니팀도 텐트에서 곧바로 뛰쳐나와 고정시켜 놓은 줄을 타고
유마링을 시작했다. 유기수가 아무리 날쌔다해도 줄을 타고 오르는 유마링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유마링으로 쑥쑥 올라오는 박영배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그를 보고 유기수가 물었다.
"너희는 오늘 따라 왜 밤중에 등반하나?"
"원래 오늘은 야간 등반 예정이었다."
박영배는 그렇게 응수했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동국대 산악부의 김경호.최영식.김종섭씨(사진 왼쪽부터)가
1959년 대청봉 초등에 성공한 후 정상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유창서씨 제공]
[설악에 살다] (10) 깨진 토왕폭 협상
토왕폭에 두 팀이 한꺼번에 오르는 것은 조난을 자초하는 일이다.
더구나 한밤에 함께 등반하는 것은 당시 장비로는 한 팀에는 자살행위이며, 동시에 다른 팀에는 살인행위가 될 수 있다.
당시의 피켈과 아이젠.하켄 등은 엄청난 낙빙(落氷)을 일으키는 주범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입에서 '협상'이라는 말이 나왔다. 유기수와 박영배는 두 팀 모두의 파국을 막기 위해 협상을 택했다.
두 사람은 빙벽에서 내려와 크로니팀 텐트에 모였다.
크로니팀 캠프에서 협상이 시작됐다. 협상의 흐름은 유기수가 제안하고, 박영배가 결정권을 쥔 형국이었다.
한발 앞서 등반에 나선 크로니팀의 대장인 박영배가 협상의 주도권을 가진 것이다.
에코클럽이 지난 10년간 토왕폭에 바친 열정을 내세워 유기수는 '에코팀에서 한명, 크로니팀에서 한명,
그리고 지난해 하단 등반에 성공한 동국대팀에서 한명씩 모두 세명으로 합동대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박영배는 텐트 밖으로 나와 크로니팀의 후배 대원들과 상의했다.
얼마 후 텐트로 돌아온 박영배는 크로니팀 모든 대원들의 뜻이라며 합동등반을 거절했다.
박영배는 개인적으로는 발군의 산사나이 유기수와 악수할 수 있어도 크로니팀의 리더로서는
에코팀의 리더와 자일을 함께 묶는 파트너가 될 수 없었다.
크로니팀이 원하지 않았고, 에코팀도 못마땅하게 여긴 때문이었다.
에코팀의 피끓는 젊은이들은 협상이 깨지자 곧바로 하산했다.
1977년 1월 11일 오전 3시. 유기수를 앞세운 에코팀의 토왕폭 사나이
들은 저마다 이마에 단 빨간 불빛을 반딧불처럼 흔들며 토왕골을
흐르는 물길을 따라 내려가고 말았다.
이날 오전 5시쯤 토왕폭 빙폭 상단에 불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반딧불이나 도깨비불처럼 보이는 그 불빛은 토왕폭의 이마께로
흔들흔들 올라가고 있었다.
그 불빛의 상승이 무엇을 뜻하는지 동국대팀.부산합동대팀은 물론
하산한 에코팀의 대원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토왕폭 사나이들의 가슴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장독대로 떨어지는 첫눈처럼 차곡차곡 쌓였다.
한편 동국대팀은 에코팀처럼 중도에 하산하기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들은 70년 1월 유창서(현 설악산 권금성산장 관리인)씨가 토왕폭에 첫 도전한 그 의지를 이어받아 6년 만에 하단 초등에 성공했다.
76년 1월 7일신인섭 대장과 이상선.김형태.강승모.김성배.안호근.
안규섭.이종량.김용일.이동훈.도창호.오영복 대원은 토왕폭 등반에 나섰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1976년 1월 14일 토왕폭 하단 등정에 앞서 빙폭에서 포즈를
취한 동국대팀의 도창호씨. 도씨는 7박8일 만에 하단 정상을 밟았다.
[동국대산악회 제공]
[설악에 살다] (11) '동대 호랑이' 도창호
그들은 토왕폭 하단 얼음동굴로 들어간 뒤 왼쪽의 고드름지대를 가로질러 토왕폭 왼쪽 암벽에 있는
약간 턱진 테라스로 올라갔다. 요즘 '동대 테라스'로 불리는 곳이다. '동국대의 호랑이' 도창호는
이동훈의 지원을 믿고 동대 테라스에서 빠져나와 빙벽 한가운데로 과감히 들어섰다.
그곳에서도 토왕폭 하단의 빙벽은 수직으로 50m 이상 뻗어 있었다. 도창호는 3년 전의 송준호처럼
목숨까지 내건 하얀 얼음기둥에 아이젠의 앞이빨을 힘차게 내질렀다. 그렇게 빙벽 한가운데로 곧장 오른
도창호와 이동훈은 1월 14일 오후 하단 정수리에 올랐다.
하단 등반에만 7박8일이 걸린 긴 투쟁이었다.
토왕폭 하단의 하얀 허리에 첫길을 낼 때 그들은 아침마다 아이젠
밴드를 묶으며 '왜 이 짓을 해야 하는가'하고 회의도 했지만 환상의 얼음기둥에 목숨을 거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왜?'
초등에 성공해 빙벽의 꼭대기에 깃발을 꽂는다 하더라도 그 깃발이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 무용한 정열!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곧바로 전염되는 맹목적인 정열이야말로 젊음의 특권이다.
산사람들의 가슴 속에 가득찬 산을 향한 열정의 에너지는 행위의 동기를 묻는 의구심마저 불태워 버린다.
도창호와 이동훈이 등반을 마무리짓는 날, 서울에서 달려온 이인정(현 한국등산학교장)씨가
두 대원의 등반 자일을 손수 묶어주는 의식을 베풀었다.
그 선배들의 열정을 가슴으로 기억했기에 도창호와 이동훈은 이듬해 상단까지 초등, 진정한
'토왕폭의 사나이'로 태어나길 간절히 바랐다. 그런 까닭에 동국대팀은 비록 크로니팀에 선수를 뺏겼다
하더라도 그냥 돌아설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크로니팀의 등반 상황을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박영배씨를 대장으로 김태성.남순철.서정학.이건호.송병민.임상섭 대원으로 짜인 크로니산악회의
토왕폭 등반대는 76년 12월 29일 서울 동대문 고속버스터미널을 출발했다.
크로니팀은 76년 1월 토왕폭 정찰등반 이후 토왕폭만을 생각했다.
그들은 어센트산악회의 김재근씨에게서 얻은 '바르트 혹' 아이스 하켄을 서울 모래내 금강대장간의
김수길씨에게 의뢰해 같은 모형으로 23개, 그보다 조금 작게 변형시킨 소형의 바르트 혹을
10개 제작했다. 77년 첫날부터 토왕폭 하단을 공략한 크로니팀은 76년의 동국대 루트와는 달리
동굴로 들어가지 않고 왼쪽으로 바로 올라 붙는 루트를 택했다.
1월 3일 오후 5시40분 박대장은 송병민 대원과 함께 하단 정상에
올라섰다. 한해 전 동국대팀이 7박8일 걸렸던 하단 등정을 2박3일
만에 끝낸 것이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인수봉을 등반 중인 유동옥씨. 유씨는 안나푸르나 4봉
원정 때 동상을 입어 발가락을 잘랐다. [손재식 사진작가]
[설악에 살다] (12) 크로니팀 대장 박영배
1977년 1월 5일부터 박영배 대장과 송병민 대원은 비옷과 고무장갑까지 갖추고 토왕폭의 낙수 속으로 뛰어들었다.
포근한 날씨로 어느 정도 몸이 풀린 상태였다.
이들 공격대원이 떨어뜨린 얼음조각에 뒤에서 지원하던 김태성. 이건호 대원의 헬멧이 깨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낙빙이 토왕폭 사나이들의 등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박대장과 송대원이 토왕폭 상단의 중간 지점에 이른 1월 7~8일 동국대팀과 에코팀, 그리고 부산합동대팀이
초등을 노리고 토왕골로 잇따라 들어왔다. 초등에 가장 강한 의욕을 보였던 유기수씨의
에코팀은 크로니팀에 합동등반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
에코팀이 퇴장함에 따라 토왕폭 상단을 독차지하게 된 크로니팀의 박영배 대장은 등반을 속개해
그해 1월 12일 새벽 토왕을 완전히 넘어 첫 '토왕폭의 사나이'로 설악에서 다시 태어났다.
노루목에 누운 여러 고혼들을 위로하며 산세계로 나온 박대장은 등반 12일 만에 토왕폭 상단 정상을 밟았다.
그 사이 박대장은 모두 70여 회에 걸쳐 '바르트 혹' 아이스 하켄을 확보점으로 설치해야만 했다.
1월 12일 크로니팀의 등반 과정을 줄곧 지켜보고 있던 동국대팀은 박대장이 초등에 성공하자
며칠 전의 에코팀처럼 토왕골을 등졌다. 동국대팀에 토왕폭은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달아나버린 약혼녀에 다름없었다.
하단 초등으로 동국대팀은 처녀 토왕폭과 약혼한 사이가 됐었다. 그 약혼녀가 백년가약을 저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버린 꼴이 된 것이다. 배신한 여자에게서 바로 등을 돌린 동국대팀의 하산은
설악을 사랑하는 산사나이들의 지순하고 투박한 애정표현의 하나였다.
부산합동대는 다른 팀이 없는 상태에서 1월 13일부터 토왕폭 등반에 들어갔다.
그들에게 토왕폭은 '돌아온 첫사랑의 여인'과 같았다. 운명의 장난으로 첫 인연을 맺은 남자에게서 버림받고
다시 돌아온 토왕폭이라는 첫사랑에 그들은 알피니즘의 동정을 내걸었다.
초등자에게 순결을 바쳤건 아니건, 그런 일에 개의치 않고 토왕폭에 도전한 부산 산사나이들의
등반도 설악을 사랑하는 산악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76년 여름으로 기억된다.
토왕폭의 사나이들에게 '바르트 혹'이라는 절묘한 장비를 알려준
어센트산악회의 김재근씨 집에 간 적이 있다.
나의 오랜 산친구인 대구 팔공산악회의 성익환(현 자원연구소 선임연구원)씨는 한국산악회가
꾸린 히말라야 마칼루원정대의 학술대원으로 선발됐다. 그가 김재근씨에게서 도움 받을 일이 있어
김씨의 집을 함께 찾아가게 된 것이었다.
등산 장비가 너절하게 깔린 김재근씨의 방에 얼어붙은 폭포 사진이 한 장 걸려 있었다.
'I want the first ascender(내가 초등자가 되리라)'라는 영문이
씌어 있는 그 사진 밑에서 묵묵히 등반 장비를 추리고 있던 그에게서 묘한 감동을 받은 기억이 새롭다.
김씨가 처음 오르고자 했던 사진 속 폭포는 바로 설악의 토왕폭이었다.
김재근씨가 소속된 어센트산악회는 크로니산악회와 함께 78년 안나푸르나 4봉을 원정했다.
그때 등정에 성공한 크로니산악회의 유동옥씨가 동상에 걸려 한강성심병원에서 발가락 절단 수술을
받고 있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 기사는 유씨를 전혀 몰랐던 나를 병원으로 찾아가게 만들었다.
문안이나 위로의 뜻으로 찾아간 게 아니라 발가락을 잃어가며 꿈을 이룬 유씨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어서였다.
병상 머리에서 나는 유씨의 친구인 한 산사나이와 악수를 하게 됐다.
그때 서로 손아귀에 쥐었던 힘의 여운이 아직도 뻐근하다. 내가 손아귀에 그토록 힘을 준 이유는
그가 77년 1월 토왕폭의 상.하단을 초등한 박영배씨였기 때문이다. 토왕폭 초등자라는 사실 하나로
그는 나의 온몸을 뜨겁게 달궜다. 이후 박영배씨와는 가끔 북한산 인수봉이나 도봉산 선인봉에서 만나 함께
암벽 등반을 하며 가까워졌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크로니산악회원들이 인수봉 대슬랩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사진 앞줄 왼쪽에서 둘째가 유동옥씨, 세째가 박영배씨,
다섯째가 남순철씨. [손재식 사진작가]
[설악에 살다] (13) 토왕폭 초등 보고서
그러던 1980년 어느 날 박영배씨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약속 장소에 나가보니 긴밀히 만나자던 말과는 달리 여러 명의 산꾼들이 모여 있었다.
허욱(악우회).이찬영(보우회).허정식(은벽산악회).민병국(어센트).
고윤석(중대산악회)씨 등 면면이 소속 산악회를 대표할 정도로 유명한 산꾼들이었다.
이들은 알프스 3대 북벽의 하나인 아이거 북벽을 겨울에 오르겠다는 엄청난 계획을 세우고 동지를 모으는 중이었다.
등반대장으로 내정된 박영배씨가 나를 등반대원으로 추천하는 바람에 나도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박영배씨의 아이거 북벽 겨울등반 동참 제안을 가까이 지내는 연세산악회의 한 후배에게 털어놓았다.
그런데 그는 뜻밖에도 아이거 북벽에서 박영배씨와 자일을 함께 묶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후배가 반대하는 이유는 토왕폭 초등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나는 환상의 얼음기둥 초등자인 박영배씨에 대해 불미스러운 소문이 퍼져있음을 알게 됐다.
사상 첫 '토왕폭의 사나이'인 박영배.송병민씨가 속한 크로니산악회는 월간 '산' 77년 3월호에
토왕폭 초등 관련 등반보고서를 실었다.
'…이런 고도에서 헤드랜턴에 의지해 아이젠의 앞이빨을 빙벽에 박는 프런트 포인팅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박영배 대장은 10여m를 프런트 포인팅한 후 드디어 12일(11일의 오기:필자註) 오후 6시30분 (실제로는 자정 무렵:필자註)
정상에 도달했다. 밑에서 확보를 보고 있던 송병민 대원은 박영배 대장과 의사소통 하려고 큰 소리를 질렀지만
얼음벽에 가로막혀 잘 들리지 않았다. … 송대원은 한 지점에서 몇 시간이나 확보를 보았기 때문에 온몸이
얼어붙어 있었다. 그가 이를 악물고 정상에 올라선 것은 12일 오전 2시쯤이었다'.
후배는 이 보고서의 내용이 실제와 상당히 차이가 난다며 박영배씨와 나의 아이거 북벽 동행을 반대했던 것이다.
토왕폭 정상에 먼저 오른 박영배씨가 밑에 있는 송병민씨의 확보를 봐주지도 못하고 정상 부근 설사면에
쓰러졌다는 게 후배의 얘기였다. 그 바람에 송병민씨는 확보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 토왕폭 상단을 올라가게 됐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동국대팀.부산합동대팀의 산사나이들이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산악계에는 웬만큼 알려진
진실이라고 후배는 덧붙였다.
그 후 서울 무교동의 어느 술자리에서 박영배씨에게 물었다.
"영배형! 형의 토왕폭 초등에 대해 말들이 많아요.
그때의 진실을 얘기해 주시오."
박영배씨는 즉석에서 토왕폭 초등에 얽힌 고해성사를 했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1987년 4월 산서회 회원들이 도봉산 만장봉 초등 재현등반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허욱.허창성.신승모.이용대.허정식.이찬영씨.
[손재식 사진작가]
[설악에 살다] (14) 송병민의 탈출
'등반 시작 14일 만에 박영배씨가 토왕폭의 상단에 올라섰을 때, 이미 주위는 어두웠다.
밑에 있던 송병민 대원이 자일을 내려 달라고 해 그는 몸에 묶은 자일을 풀다가 얼어붙은 장갑에 미끌어진
자일을 그만 놓쳐 버렸다. 그 바람에 송대원은 홀로 고립되고 말았다.
박대장은 중단 설사면에 설치된 캠프 쪽으로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의 절규는 세찬 바람에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렸다. 이제 후배를 살리는 길은 우측 계곡으로
내려가 빨리 자일을 갖고 오는 것이었다. 험한 토왕폭 우측 계곡을 박대장은 자일도 없이 짐승처럼 기어 내려갔다.
하지만 도중에 길을 잃어 밤새 눈 골짜기를 헤매다 탈진해 텐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쓰러지고 말았다.
한편 박영배 대장이 끌고 올라간 자일이 허망하게도 위쪽에서 흘러내리는 바람에 천길 낭떠러지 얼음 벼랑에
고립된 송대원은 한동안 얼이 빠져 매달려 있었다. 자일을 달라고 계속 고함을 질러보았으나 헛일이었다.
온통 물에 젖은 몸이 점점 굳어져 갔다. 송대원은 얼어죽느니 차라리 떨어져 죽겠다는 결심으로 빙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송대원은 갖고 있던 예비 자일을 사용해 박대장이 촘촘히 박아둔 바르트 혹 하켄에 확보줄을 거는 인공등반을 강행,
다음날 새벽 기적적으로 서릿발 선 토왕폭 정상에 무사히 올라섰다.'
진실은 가슴이 먼저 알아보는 법이다. 내 가슴은 어느새 고백을 마친 박영배씨를 끌어안고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아이거 겨울 원정을 함께 추진하게 됐다.
한편 부산합동대의 권경업 대원은 아이스 해머 하나만으로 토왕폭의 빙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당초 나무 피켈과 해머를 들고 토왕폭에 붙었으나 동대테라스에서 얼마 나아가지 못한 곳에서 피켈이 부러져 버렸다.
권대원은 개구리같이 옴츠렸다 뛰는 듯 몸을 펴서는 두손으로 모아 잡은 해머를 번개처럼 위쪽 빙벽에 거듭 찍었다.
그토록 아슬아슬하게 오르는 당사자보다 지켜보는 동료들이 손에 땀을 쥐어야 했다.
토왕폭도 등줄에 땀같은 물을 흘리고 있었다. 토왕폭을 개구리 타법으로 40m 가까이 침착하게 오른 그는
1977년 1월 14일 오후 하단을 마무리 지었다.
상단으로 들어선 이들은 김문식.권경업 대원을 투입해 얼마간의 고도를 올렸으나 등반 방식의 문제로
2~3일을 허송한 후 마지막 공격조로 김원겸.김문식 대원을 선발했다.
1월 25일 오전 8시10분쯤 두 대원은 동료 대원들의 뜨거운 격려 속에 상단의 출발점을 떠나 오후 늦게 상단 빙벽 위에 올라섰다.
이로써 두번째 토왕폭 등반은 깨끗하게 이뤄졌다. 하단에서 1박2일, 그리고 상단에서 4박5일이 걸린 부산합동대의 토왕폭 등반이었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 토왕폭을 등정한 부산합동대의 권경업씨
[설악에 살다] (15) '젊음의 용광로'
토왕폭 상단을 마무리한 김원겸.김문식 대원은 마지막 테라스에서 크로니산악회의 박영배.송병민조가 미처 거두지 못한
자일이 하켄에 카라비너로 연결된 채 얼음 속 깊숙이 정상까지 파묻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불과 13일 전 토왕폭이
크로니팀의 '토왕폭 사나이'들에게 순결을 내주며 입었던 상흔 같기도 하고, 짝사랑하던 그녀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다른 친구에게 던져준 부케같기도 했다.
토왕폭 제2등의 주역 중 한명인 권경업씨의 부산집에서 얼마간 묵은 적이 있다.
그가 히말라야 파빌봉 원정에 등반대장으로 갔다온 지 얼마되지 않았을 즈음이니 1983년 초겨울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의 방구석에 산사진이 하나 걸려 있었다. 크지는 않았지만 표구한 모양새라든가 걸려 있는 품새가 주인이 애지중지하고 있는
물건임을 한눈에 짐직케 했다. 히말라야 등반 때의 사진이려니 하고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토왕폭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아래쪽에 '토왕폭을 완등하고'라고 적혀 있었다.
토왕폭을 배경 삼아 자신의 얼굴을 크게 잡은 이런 사진은 산꾼들 집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사진을 대하자마자 나는 권경업씨가 왜 그 토왕폭 사진을 히말라야 원정사진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가를 알게 됐다.
그로부터 6년 전의 사진이긴 하지만 당시의 그를 보고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그 사진 속의 얼굴은 광채를 띠고 있었다.
그것은 젊음의 얼굴이었다. 그가 목숨까지 걸었던 토왕폭에서의 젊음이 사진에 고스란히 담겨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히말라야 등반에 대해서는 시들하던 그에게 토왕폭 얘기를 건네자
눈빛과 얼굴빛이 사진에서 처럼 번쩍하는 빛을 발했다.
"정말이지, 그때는 너무도 젊었습니다."
토왕폭을 얘기하는 그의 목소리는 김수영의 시 '폭포'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곧은 소리를 냈다.
"나를 키운 8할은 산이다.
그리고 나의 산을 키운 8할은 배종순형이다."
이것은 '나를 키운 8할은 바람이다'라던 미당 서정주의 유명한 금언을 패러디한 권경업씨의 금과옥조다.
77년 1월 토왕폭 제2등의 자일 파트너였던 배종순씨를 권씨는 이토록 섬기고 또 따랐다.
권씨가 히말라야 원정에서 돌아온 후 오랜 백수 생활을 접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을 때였다.
그가 부산 시외버스터미널에 분식집을 차리고는 개업식에 나를 불렀다.
"사람은 머리로 말하고 우동은 국물로 말한다."
"30년 전통의 한솔 우동으로 속을 푸세요."
그런 광고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내건 '한솔우동'집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권씨에게
"지금 개업하면서 30년 전통을 내세운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따졌다.
"야, 이기 다 종순이형한테서 배운거 아이가. 그 형이 산에 데불고 다니며 우동 국물 빼는 거서부터
머리로 말해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갈 알켜준기라."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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