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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누가복음 4:1-13
오늘은 사순절 첫 주일이다.
사순절은 일상의 욕망을 절제하고, 생활 속에서 경건을 회복하는 때이다. 겸손히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배우며, 동행하려는 신앙의 수련기간이다. 자기다움을 회복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올해 사순절에 나의 영적성장과 곧 탄생할 색동교회의 비전을 목표로 하여 기도하자.
사순절은 40일을 마친 다음날, 부활주일에 색동교회가 창립을 선언한다. 사순절 40일 동안은 색동교회의 마지막 준비기간이다.
성경은 40일에 대한 다양한 길을 보여준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머물렀던 시내산 40일은 ‘준비의 40일’(출 34:28)이었다.
출애굽 한 열두 지파 대표가 가나안을 정탐했던 40일은 비전을 세우는 ‘비전의 40일’(민 13:25)이었다.
아합과 이세벨의 박해를 피해 호렙산까지 걸어간 엘리야의 40일은 절망의 삶에서 다시 깨어난 ‘회복의 40일’(왕상 19:8)이었다.
요나의 40일은 니느웨성이 40일 후 멸망한다며 회개를 촉구한 ‘회개의 40일’(욘 3:4)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40일을 침묵하며 ‘시험의 40일’(막 1:13)을 연단하셨고, 공생애를 마친 후 부활 후 40일 간 지상에 머물며 ‘기쁨의 40일’(행 1:3)을 제자들과 함게 보내신 후 승천하셨다.
나는 어떤 40일을 계획하는가? 내게 해당되는 40일은 어떤 것인가? 내게 필요한 40일은 무엇인가?
본문은 예수님이 세례 받은 후에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40일 간 침묵하며 금식하시다가 막바지에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기록이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마 6:13)라고 말씀하셨다. 아마 그분이 직접 구체적으로 유혹을 당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광야는 어떤 곳인가? 광야는 생명이 없는 절망의 땅이었고, 죽음의 땅이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오아시스로 가는 광야길은 강도가 길목을 노렸고, 브엘세바 우물가를 벗어나면 사방이 목이 타는 황무지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은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로만 연명할 수 있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1).
40일 동안 예수님은 침묵하고, 금욕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을 위해 기도하셨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따르고자 한다. 초기 기독교 에집트의 사막의 교부들은 일상적 안일과 안전이 전혀 없는 사막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홀로 사막에서 은거하며, 하나님께 보다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였다. 처음에 그들은 광야와 사막에 홀로 머물며 고행하였고, 나중에는 수도사들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수도의 방법은 주로 고행이 핵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서방교회에서는 극단적인 고행자들을 정죄하기도 하였지만, 동방교회에는 고행자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정죄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이들을 ‘하나님의 운동선수’라고 불렀다.
15세기 초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쓴 토마스 아 켐피스는 사제 서품을 받은 후 평생 수도원에서만 생활하면서 경건한 삶과 하나님의 임재 기쁨을 누리며 살았다. 그는 “나는 명상과 독서 외에는 어디에서도 안식을 찾지 못했다”고 고백하였다. 그의 책은 위대한 회심자들을 낳았고, 지금도 현대인들에게 사랑받는다.
사람들은 왜 스스로 침묵과 금욕 등 고통을 선택하였을까?
그들이 선택한 고독은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붙잡히지 않고, 오직 절대자를 향하여 나아감으로써 얻는 완전한 자유였다. 그들은 금욕을 통해 자신의 몸을 오로지 하나님의 현존으로만 채워지는 그릇이고자 하였다.
토마스 머튼은 “비록 공동체 안에 살고 있다 할지라도 수도자는 한 은자(隱者)로서 자기 실존의 내적 황무지를 개척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수도자만이 아니라 영성 생활을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가르침이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지낸 40일은 침묵의 기간이었다. 이제 “날 수가 다하매”(4) 그 막바지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 마귀는 40일을 다 채운 예수를 향해 유혹하고 나섰다.
1) 육체적 시험(3-4)
첫 번 째 시험은 육체적인 유혹이었다.
이 모든 날, 40일 동안 아무 음식도 입에 대지 않았으니 얼마나 굶주렸을까? 마귀는 이렇게 유혹한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3).
사실 마귀의 유혹이 아니어도, 굶주린 사람에게는 음식이 헛것으로 보인다. 광야는 모래로 된 사막이 아니었다. 작은 석회석 조각으로 뒤덮인 광야는 마치 떡 조각(만나)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육체적인 연약함을 파고 든 마귀의 유혹은 대단히 현실적이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신명기 8장 3절을 인용한 말씀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사람이 결코 물질적인 것에서 생명을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음식은 단 ‘한 끼’를 위한 것이다. 먹고 마시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때론 기본적인 욕구마저도 기꺼이 금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을 자신의 양식으로 삼으셨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또 마침내 자기 자신을 인류 구원을 위해 생명의 양식이 되셨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지 아니할 터이요”(요 6:35).
2) 정신적 시험(5-8)
두 번 째 시험은 정신적인 유혹이었다.
마귀가 또 예수님을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여주었다.
마귀는 유혹한다.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6-7).
두 번째 시험을 통해 사단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을 비켜가도록 유혹하였다. 그것은 달콤한 유혹이었다. 굳이 온갖 환난과 고난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보다, 쉽고 빠른 방법으로 할 수도 있다. 넓은문과 지름길로 가라는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권위와 영광을 얻는 것, 이보다 솔깃하고 확실한 제안은 없다. 그래서 세상의 경향은 유혹을 받게 될 때 사물을 희미하고, 모호하게 보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이러한 경향과 싸우셨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마 5:39),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마 5:)고 하시지 않았던가?
제프 딕슨은 이렇게 ‘우리 시대의 역설’을 이야기 하였다.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작아졌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집은 커졌지만 자족은 더 적어졌다.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생활비를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를 잊어버렸고, 인생을 사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은 상실했다. 달에 갔다 왔지만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편리함, 한 입에 삼킬 듯한 손쉬움, 지근거리에서 유혹하는 마귀를 향해 다시 하나님의 말씀 신명기 6장 13절을 인용하며 되받아 치셨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예수님의 대답은 명쾌하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마귀는 마귀며, 의는 의이고 악은 악이다.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3) 영적 시험(9-12)
세 번 째 시험은 영적 유혹이었다.
마귀의 마지막 시험은 종교적 시험이라 할 수 있다. 영적 유혹은 세 가지 시험을 포괄하는 궁극적인 의미의 시험이다.
마귀는 인간적 편의를 위해 하나님의 이름과 능력을 이용하도록 부추겼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9).
성전 꼭대기에 서면 기드론 골짜기 아래로 140미터 가량 되는 가파른 벼랑이 있었다. 그런 곳에서 뛰어 내려도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실 것이고(10),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실 것(11)이기 때문이다.
마귀는 잘 알고 있다. 이 시험은 사람들에게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9일 간의 기적’이란 말이 있다. 세상의 소문은 대개 열흘만 되면 잊혀지는 법이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는 일은 겨우 ‘9일 간의 기적’에 그칠 것이다. 센세이션으로 유명해지는 사람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
예수님은 기적을 통해서 사람들을 현혹하지 않았고, 믿음을 강요하지 않았다. 늘 제자들의 입을 단속하시면서 ‘알리지 마라’, ‘소문내지 마라’ 하시고, 군중을 피해 숨으시거나, 홀로 한적한 곳에 머무르려고 하시지 않았는가?
시카고 시내에 템플교회가 있다. 이 교회가 유명한 것은 높은 종탑이다. 가히 세계에서 손꼽히는 높이를 자랑한다고 한다. 그러나 평소에 사람들은 무심히 이 종탑 아래를 지나쳐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많은 인파가 거리에 모여들어 이 종탑을 올려다보았다. 교통이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 이유는 종탑 위 십자가에 사람이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십자가를 수리하기 위해 올라간 직공이었다.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은 대단한 구경거리가 되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교회의 십자가는 그 자리에 서 있었지만 사람의 주목을 받은 적은 없었다. 해프닝이었다.
처음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님더러 그런 센세이션을 일으키길 요구하였다.
그러나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센세이션으로서 십자가도, 해프닝으로서 십자가도 아니다. 십자가 사건이 생략된 그리스도는 구원을 주시는 생명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은 센세이션을 요구하는 마귀에 대해 신명기 6장 16절의 말씀을 인용하신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세 가지 시험에 임한 예수님의 태도를 보라.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 판단, 권위를 철저히 낮추고 오로지 말씀으로만 응수하셨다. 그 분은 철두철미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완전한 자유를 선택하셨다. 철저한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셨다.
결국 자신의 온 생애를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순종과 헌신의 삶을 사셨다.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13).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란 소설에서 그 마귀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유혹한다고 상상한다.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고, 가족과 함께 사는 행복한 꿈을 꾼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시험하였던 마귀는 여전히 사람을 유혹한다. 마귀는 사람을 네 단계로 꼬인다고 한다.
첫째 단계는 ‘누구나 하는 것이니까’, 둘째 단계는 ‘작은 것이니까’(별 것 아니니까), 세 번째 단계는 ‘아직 젊으니까’(그러나 기회가 늘 있는 것은 아니다), 네 번째 단계는 ‘딱 한번만’.
마귀의 시험은 교묘하다. 그 유혹은 대단히 현실적이다.
마귀는 매섭게 갈라진 발굽과 뾰족한 꼬리로 등장하지 않는다. 마귀는 양의 탈을 쓴 늑대의 모습을 하고 우리를 유혹한다.
예수의 시험이 보여주는 것은, 성령의 부르심을 받은 자가 바로 시험을 받는 자라는 사실이다.
종교지도자 중에도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일을 자신의 종교적, 세속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마귀적이다.
이런 달콤한 유혹들에 홀딱 넘어가 단지 ‘떡 한 덩어리’에도 속아 넘어갈 수 있다. 마귀를 예배하느라 우리는 하나님을 헌신짝처럼 내 팽개쳐 버릴 수도 있다. 한 순간의 일이다.
사순절은 다시 광야에 나서는 기간이다. 어떠한 마귀의 유혹도 물리치려고 연단하는 때이다. 고독과 홀로 섬을 통해 하나님과 마주하려는 기회이다. 우리는 자신의 내적 황무지로 나아가, 하나님과 마주해야 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
최근 개봉한 영화 중 ‘위대한 침묵’이 있다.
알프스의 깊은 계곡 카르투지오 수도원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타리이다. 영화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해발 1,300m 알프스의 깊은 계곡.. 그곳에 누구도 쉬이 들여다보지 못했던 고요함의 세계가 있다. 해가 뜨고 달이 지고 별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계절 속에서 영원을 간직한 공간을, 그들만의 시간을 만들어 나가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저 조용히 그 일상의 깊이를 바라본다”.
수도사들은 엄격한 규율 아래 자급자족의 원칙을 지키며 침묵수행을 한다. 제한된 공간 안에서 조용히 자신의 소리를 낮춤으로써, 한정된 시간 안에서 고요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그들의 삶을 지켜보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버겁다.
사실 영화를 보는 즐거움을 없고, 침묵을 경청하는 무거움으로 가득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바싹 귀를 기울인 채 무언가를 듣고 싶게 만들었다고 하였다.
놀라운 일이다. 침묵은 사람으로 하여금 귀 기울이게 한다. 아니 침묵하는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내면으로 듣고자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침묵이 실종되었다. 사람들은 조용한 것을 못 참는다. 지하철에서 조용함을 사랑하는 사람은 졸고 있는 사람 뿐이다. 거의 대부분은 핸드폰으로 뭔가를 하고, 영상을 보고, 엠피 쓰리를 듣는다.
“사람들은 너무 늦게까지 깨어 잇고, 너무 지쳐서 일어나며 너무 적게 책을 읽고 텔레비전은 너무 많이 본다. 그리고 너무 드믈게 기도한다”(제프 딕슨).
교회를 연상할 때 역시 가장 쉽게 떠올리는 것은 소란함일 것이다. 시끄럽고 번잡한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고요함을 선물하지 못한다면 끔찍한 일이다.
오늘의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 중의 하나로 침묵을 손꼽는다. 너무 입으로만, 말로만 하나님을 사랑한다. 사랑도 입으로, 경건도 말로만, 기도도 소리로만 한다.
라틴 속담에 “소리는 많으나 음성이 없다”는 말이 있다. 소리는 넘쳐난다. 이제 소리를 낮추고 음성에 귀기울일 때이다.
사순절은 1년 내내 전혀 안 해 본 일일망정 한번 도전해보는 절기이다. 침묵하는 일, 말씀대로 살아 보는 일, 말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일..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는 기도가 현실이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인다워 질 것이다. 내 삶에서 우리가 직면한 도전을 이겨 낼 믿음을 얻게 될 것이다. 어떤 상황에도 불구하고 늘 가까이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런 사순절을 통해 하루하루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체험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